[보충] 서울 홍은동(옛 홍제외리)에 구전되는 환희동, 보은동, 실락동, 청량동 등의 지명유래
서울시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서울의 고개』라는 책자를 보면 '은평구 산골고개' 즉 '녹번이고개'에 관한 설명항목에서 이 고개 아래 홍은동 쪽에 환희동, 보은동, 실락동, 청량동 등의 지명이 있다는 사실을 채록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지명들은 지금(이 책의 집필 당시인 1998년을 기준)부터 30년 전만해도 주민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하는 내용이 적혀 있으나 이 부분에 대한 세밀한 보충설명은 기록되어 있지 않는 바 그 유래에 대한 자료를 여기에 덧붙여두고자 한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의 고개』 (서울특별시, 1998)
[은평구]
산골고개 - 녹번현(綠礬峴) (녹번동)
...... 산골고개 주위에 있는 현 홍은1동 지역은 의주로변에 있었으므로 이 일대에서 제일 먼저 발달하였다. 그 중에서 홍은고가차도 밑으로 마을이 제일 먼저 형성되어 「본동」이라 하였으며, 풍림1차아파트를 포함해서 그 아래 지역을 「환희동」, 풍림2차아파트와 홍은1동 새마을금고 사이를 「보은동」, 벽산아파트 주변을 「실락동」이라 했다. 또 홍은파출소가 있는 일대를 「청량동」이라 했는데, 지금부터 30여년 전만해도 그렇게 불렀다고 하며, 지금도 오래 거주한 주민들은 그렇게 부르고 있다 한다.
아래에서 인용한 신문기사를 보면 '실락동'과 '청량동'은 본디 각각 '신락촌'과 '청정촌'인 것으로 드러나며, 이것말고도 지혜촌, 정신촌, 무량촌, 해탈촌 등의 구역이 더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모든 것은 일제강점기 때 서울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토막민(土幕民, 움집에 거주하는 사람들; 일종의 판잣촌과 같은 주거형태)을 1934~7년 무렵에 변두리 지역인 '홍제외리와 정릉리 등지'에 집단 이주를 시키면서 생겨난 새로운 거주단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현재도 풍림1, 2차 아파트 단지 위쪽으로 '실락어린이공원'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도 그 명칭의 유래에 따르자면 '신락어린이공원'이라야 더 맞는 표현이 아닌가 한다. (아마도 그 동네 주민들의 입을 통해 구전되는 '실락'이라는 발음과 표현을 그대로 채용하여 공원의 이름으로 따서 그러한 결과가 빚이진 일일 것이다.)
▲ 『동아일보』 1936년 8월 2일자
밀려난 토막민 순방기(土幕民 巡訪記) (2)
이름은 좋다 환희촌(歡喜村), 1인(人) 1일(日) 20전(錢)으로 생활(生活)
몰인정(沒人情)한 경성부(京城府) 차지료(借地料) 받기엔 똑똑
서부 홍제외리(西部 弘濟外里) 새 두옥촌(斗屋村)
『동아일보』 1936년 8월 2일자
...... 주택지로서는 인연이 먼 - 이 험한 돌산, 영양도 부족한 이 여윈 토막민들의 피땀을 얼마나 흘리게 하고 있는가?
국유림을 토막민구제라는 미명 아래 불하한 경성부는 그의 경영관리를 일개 사회사업단체에 일임한 채 오불상관. 더구나 터 닦는 것쯤이야 알은 체나 하랴?! 그러나 그들에게 빌려주는 겨우 15평의 이 험한 기지를 소위 차지료(借地料)라고 하여 매월 1호에 20전씩만은 또박또박 징수하고 있는 것이다. 지료를 받을 경우라면 집터만은 닦아주는 것이 당연한 의무가 아닐까? 무성의한 경성부 태도에 다시금 흥분되며 동리의 홍제천을 끼고 동남으로 휘돌아드니 이 동리로는 중앙 동본원사(東本願寺) 향상대(向上臺)사무소가 있고 그 아래로 '향상대염매소(向上臺廉賣所)'라는 큰 간판이 붙어 있는 큰 집이 새로 건설되는 이 마을의 한 이채이다.
동명은 홍제외리(弘濟外里)라 하나 구역을 따라 환희촌(歡喜村), 보은촌(報恩村), 지혜촌(智慧村), 청정촌(淸淨村), 정신촌(正信村), 신락촌(信樂村), 무량촌(無量村), 해탈촌(解脫村)으로 나누어 있다.
환희촌을 찾아 그들의 기쁨을 나누자 함도 아니요 보은촌을 찾아 보은의 뜻을 알자 함도 아니요 해탈촌을 찾아 속세를 떠나자 함은 아니나 동구에 들어놓은 발길은 자연 이곳 저곳으로. ...... (이하 생략)
토막민 이주 실패(土幕民 移住 失敗)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정책(政策)
금년내(今年內) 천오백호(千五百戶) 이주계획(移住計劃)도
사살싱(事實上) 실현(實現)은 곤란(困難)
『동아일보』 1936년 10월 31일자
경성부에서 지난 소화 9년도(즉 1934년도)부터 동 12년도(즉 1937년도)까지 4개년 계획으로 부내에 산재한 토막민(土幕民) 2천 호를 부외 홍제외리(弘濟外里)와 정릉리(貞陵里)에 집단 수용키로 되어 홍제외리는 교남정(橋南町)에 있는 향상회관(向上會館)에, 정릉리(貞陵里)는 관수정(觀水町)에 있는 화광교원(和光敎園)에 위임하여 그 사업을 진행시킨 이래 이미 3개년이 지난 오늘날 실제 성적이란 홍제외리 약 1백40호 가량을 수용하였을 뿐이라 한다. 이에 느낀 바 있었음인지 수일전 토막민정리위원회(土幕民整理委員會)를 개회하고 그에 대한 선후책을 강구중 금년안으로 그 4분의 1인 한곳에 750호씩을 수용할 방침을 세웠다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토막민집단수용정책의 성적이 불량한 상태를 정하게 된 원인은 부당국에서 세운 토막민정리방침이 중도에 변경을 보게 된 관계라는 바 최초에는 토막민 생활을 참작하여 가옥건축재료(家屋建築材料)만은 공급하여 주기로 되었으나 예산관계로 다못 집단부락의 도로, 수도, 하수구 설비만을 하여주고 그외의 것은 전부 토막민이 비용을 내어 시설을 하는 동시에 가옥도 건축하라는데 있다 한다. ...... (하략)
관리자(管理者)를 면직(免職)
토막촌 향상대 사건 후문(土幕村 向上臺 事件 後聞)
『동아일보』 1938년 10월 31일자
나는 새와 기는 짐승에도 둥지와 보금자리가 있는데 넓은 장안에 5척 단신을 둘 곳이 없어 늙은 부모, 어린 처자를 데리고 여기저기 쫓겨 다니는 집없는 토막민(土幕民)을 위하여 경성부에서 토막부락(土幕部落)으로 특설한 부내 홍제외리(弘濟外里)의 향상대(向上臺) 일대의 토막촌 기지(基地)를 사매(詐賣)하여 사복을 채워온 사실이 백일하에 폭도되어 범인 최창률(崔昌律)은 지난 25일 서대문서에 체포되었다 함은 이미 보도한 바이어니와 이 보도를 듣자 경성부에서는 즉시 사건진상규명에 착수하여 드디어 토막촌기지를 관리하라 의뢰하여던 최상률은 면직시키고 새관리자를 취임시켰다 하며 일방 서대문서에서는 최상률의 여죄를 계속 추궁중이라 한다.
그런데 원래 자기 홍제외리의 토막부락의 관리자는 향상관(向上館)이라는 불교단체가 경성부에서 위임을 맡아 다시 최창률에게 의뢰한 것이라는데 종교단체 내에 이러한 가면 밑에 자선사업가가 있어 그와 같이 더구나 눈물겨운 토막민을 속이려는데 대하여 부근 일대의 주민은 향상관에 대한 비난이 만만하다 한다.
(정리 : 이순우, 2013.12.1, http://cafe.daum.net/dist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