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무용의 발생과 형성
1) 원시시대와 상고시대의 무용
무용발생 연원을 살펴보면, 인간이 집단 취락인 원시공동체 사회를 형성하면서 자연에 대한 외경과 공포 속에서 본능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집단적인 종교의식 또는 무속행사를 하게 된데서 비롯되었다. 원시공동체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연계와 외부세계가 모두 신의 조화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선신을 맞아드리고 불행을 가져오는 악신을 물리치기 위하여 주술을 하곤 했는데 이럴 때마다 이를 주관하는 주술사는 의식을 행하였고 이런 의식에서는 노래와 춤이 늘 함께 행해지기 마련이었다. 특히 풍년을 기원하는 봄의 기풍제(祈豊祭)나, 추수 끝에 풍년에 감사하는 가을의 추수감사제와 같은 종교적인 축제에서 노래와 춤은 필수적이었다.
역사의 종합적인 연구에 따르면 한반도에는 70만 년 전의 구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한 이래 기원전 6천년의 신석기 시대를 거쳐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각 시대의 발달과 함께 점차 새롭고 다양한 문화와 사회조직을 만들면서 발전하였다.
한국의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문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으므로 단언하기는 힘들다. 다만 최초의 국가는 고조선이라 알려지고 있다. 고조선 주민들은 족장들의 지도나 지배 하에 요하 일대에서 기원전 8,7 세기 경에는 이미 비파형 청동검을 위시한 청동기 문화를 누리고 살았다. 청동검과 청동거울은 고조선시대 족장의 신분을 상징하는 도구였으므로 무당이 사제를 겸했음을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씨족사회의 족장은 신권을 가진, 즉 신의 계시를 대변하는 역할을 했고, 민중을 대신해서 신을 달래고 악신을 몰아내는 일은 맡았다고 할 수 있다.
세계 여러 민족의 원시 및 고대사회에는 흔히 제정일치(祭政一致)라는 종교와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단계가 있는데 고조선에도 그와 같은 시기를 경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무용의 연원은 고조선의 단군 때 신단에 제사하고 춤과 음악으로 즐겼던 풍속에서 시작된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단군이 3천 단부를 거느리고 신단수아래에 강림하여 백성의 생명, 곡식, 병, 형벌, 선, 악 등 무릇 360여 종류의 사회사를 관장하는 제천(祭天),사신(祀神),기곡(祈穀),요병(療病), 상벌(賞罰)을 두었다, 이때에 제천과 사신은 자연히 집단적인 가무를 동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이 당시의 무용은 개인적, 정서적이 아닌 전체적이고 집단적인 제천의식으로서 또는 행사의 절차로서 행했던 원시적 집단가무였으며, 이것이 오늘날 한국무용의 원형적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종교적 제천의식에서 비롯된 한국의 고대무용은 음악과 시가와 춤이 분리되지 않고 종합예술로 성립되어 왔으며 이러한 악가무의 삼위일체를 악(樂)이라고 총칭하여 부르기도 한다.
고조선 악무의 중요한 기록은 기원전 12세기경, 서주의 주공이 편찬한 <주례(周禮)>라고 할 수 있으며, 이 기록은 3천년 전의 한민족이 매사, 모인, 제루씨 라는 세 가지 직제에서 고조선 음악을 관장하여 가르치고, 제사에 춤을 춘다고 했으며, 춤추는 자들의 서열과 인원수까지 명시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우리민족의 무악의 기록은 중국 하소강 대의 것으로, 우리 음악과 춤이 중국에 전하여 그들의 무악보다 훨씬 발달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성경린/한국의 무용 p 31.1976)
<후한서> 동이(중국에서 한민족을 지칭하는 말로서, 동쪽의 오랑캐라는 뜻)전에 전하는 기록은 ‘하후씨 태강이 덕이 없어 이인이 침범하였는데, 소강제 때 접어들어 왕권이 확립되자 왕의 덕치에 감복하기 시작하여 그들을 궁중의 손님으로 모셔다가 그들의 춤과 음악을 보고 들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인 동이의 춤이 이때 중국으로 전하여져 연희되었음을 알 수 있다.(김매자. 삼신각 1995년 p16)
또 다른 우리나라 고대춤에 관한 기록으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고조선시대 천노왕이 비류강에서 야유놀이를 할 때 악공을 시켜 영선악을 연주케하고 궁녀들을 시켜 영선무를 공연케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이 내용으로 보아 고조선시대에는 악사와 궁녀가 분리되어 있었고, 선인 즉 신을 맞이하는 영선무라는 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경통의(五經通儀)>에는 ‘동이’의 악은 창을 가지고 춤을 추는데 각 계절의 곡식의 성장을 돕는 뜻이 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대 <지모무>라는 춤이 있어 창을 들고 전투적인 성격의 무속적 의식무용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진수의 삼국지나 중국사서의 단편적인 기록들에 의하면 부여, 고구려, 예 그리고 삼한에는 일정한 시기에 모든 부족민들이 한데 모여 사는데 감사하는 제천행사를 열고 가무백희를 연행하여 부족의식을 연희 하였다고 한다. 각 부족의 제천의식에서 분화된 무용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연희적 또는 오락적 무용의 형태로 재구성되거나, 인접 부족간, 국가간의 교류에 다른 수입된 춤의 모방과 그의 영향으로 인한 새로운 형태의 춤을 양산하여 갔다. 이러한 상고시대의 제천행사는 오늘날 한국무용의 원형이 되었는데 이들 행사는 그 집단의 단결과 화목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졌고, 노래와 춤과 술이 어우러진 집단의식을 구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오늘날 굿판의 진행 모습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각 지방의 동제의식은 B.C.1새기 경 상고시대의 제천의식의 유속으로 볼 수 있으며, 거기에 따른 가무가 한국무용의 기류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한국무용의 원초적시발은 상고시대의 제천의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