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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젓한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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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흐른다 스크랩 인간 공자
호젓한오솔길 추천 0 조회 57 07.11.23 18:1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인간 공자

 

 

 

 

 

 

 

 

 

 

공자는 어떤 사람일까

 

{論語}를 주된 연구의 근거로 삼지 않을 수 없는데, {論語}를 보면 공자가 호감가는 인물이라는 인상을 받는데, 공자의 적대자들이 가한 공격에도 이 인상과 상충되는 내용은 없다. {論語}에 의하면 [공자는 閉居 할 때면 격의없고 온화한 태도를 보였으며], 또 [온화하지만 당호하였고 , 위엄이 있었지만 사납지 않았으며, 공손하였으나 편안감을 주었다.]고 한다. 그는 아첨하지 않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할 경우에는 경의를 표하였 으며, 그 대신 다른 사람들도 자기를 존경해 줄 것을 기대했다. 그는 자신이 지켜야 할 일정한 위치가 있었다고 느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료는 물론 미천한 사람들에게조차 고자세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공자가 항상 수많은 친구들로 떠들썩하게 둘러싸여 있는 型이었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는 변함없는 친구가 많았지만 크게 인기를 모으는 型은 아니었다. 그는 너무나 생각이 깊었고 솔직하였으며 [원망의 감정을 느끼는 사람에게 그것을 숨긴 채 친하게 지내는 것을 ...... 나는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대개의 경우 그는 면전에세 사람을 비판하고 뒤에서는 칭찬하는 원칙을 따른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존경은 받지만 인기는 끌지 못하는 법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그는 다소 과묵한 편이었다. 이 태도는 자기 아들에게도 적용된 것 같은데, 그는 자기 아들의 능력에 실망하였음을 솔직이 인정하였다. 그는 예의가 발랐으나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위신을 손상하는 짓으로 생각하였다. 군주나 권세 있 는 세습귀족들과 말할 때도 비위를 맞추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일반적으로 몹시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런 식의 처세가 실제 현명한 것이었느냐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공자의 교훈인 엄격한 성실성과는 일치한다.


그는 수다스러운 사람들을 혐오하였다. {논어}만 보아도 공자가 多辯家가 아니라는 것 을 알 수 있지만 맹자도 [나는 話術에는 재능이 없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공자의 말에는 때때로 감동적이고도 고상한 것은 있지만, 장황하거나 화려한 것은 거의 없다.


다른 면에서도 그는 겉으로만 꾸미는 것을 선천적으로 싫어하였는데, 이것은 세상에 너무 닦인 사람보다는 소박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격이다.


공자는 육체적인 안락과 부는 진정한 군자가 추구할 목표가 아니라고 믿었다. [선생께서는 만약 부가 정당한 추구의 목표가 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으며, 채찍을 잡는 마부라도 되겠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한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따라가겠다.] 이것으로 공자가 금욕주의자였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진정한 금욕주의자는 보통 쾌락 자체를 죄악시하고 고통을 선으로 생각하기조차 하는데 공자에게는 이러한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철학으로서의 유교는 절제있는 육체적 쾌락을 반대한 적이 없으며, 공자 자신도 덕과 성실에 배치되지 않는 한 쾌락을 반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였다. 그는 쾌락의 원천으로서 학문을 찬양하였으므로, 순전히 향락을 목적으로 공자가 음악을 즐긴 것은 예외적인 것이다. 쾌락이 바람직한 것일 뿐 아니라 인생의 필요한 일부라는 심원한 심리학적인 진리를 인식한 점에서 유교는 고대 중국의 주요 철학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문명의 전운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극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그의 확신은 너무나 진지하였기 때문에 부당한 비판에도 성내지 않고 미소로써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지전능한 척하지 않았으며 어는 학자에게도 불가결한 [나는 모른다]라는 말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지식을 얻었고,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를 무식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제자들이 그와 의견을 달리하였을지라도 그의 권위는 손상되지 않았으며, 그는 그들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인색치 않았다. 자신이 거창한 사명을 띠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말 겸손한 사람처럼 보였다. 사람은 평판보다 공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공자는 항상 주장하였지만, 때로는 친한 제자들에게 자기를 이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다고 한탄할 정도로는 세상의 평판에 관심을 가졌다.


또 그는 인정도 많고 생각도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공자는 맹인을 접대하였을 때, 그 눈먼 손님에게 그 자리에 참석한 모든 사람을 소개하였으며 그 손님이 호기심은 있지만 볼 수 없는 것을 모두 알려주는 등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고 한다. 그는 인정이 많아 자기 재산보다는 사람의 안전에 더 관심을 가졌다. [마굿간 이 불탔을 때, 조정에서 돌아온 공자는 아무도 다치지 않았는가고 물었을 뿐 말에 대해서는 묻지도 않았으며] 들에서 사냥을 할 때도 [낚시는 하였지만 그물은 사용하지 않았고, 주살을 던졌으나 앉은 새는 쏘지 않 았다.] 이 비범한 인물에 대해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해학감각을 가진 열정가였다는 점 일 것이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그는 자주 농담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눈이 장난기로 반짝이는 일이 잦았음에는 틀림없다.


그의 이야기 중에는 금방 이해되지 않는 해학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것이 많다. 그 해학 때문에 경건한 주석가들이 난처한 순간에 빠진 일이 많았는데, 주석가 중에는 농담을 하는 것은 성인의 체면을 손상하는 일이라고 철저하게 확신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크게 빈정거리는 어투로 공자를 이렇게 평한 일이 있었다. 즉 [과연 위대하구나, 공자는!  학도 하구나! 그러나 어느 분야에서도 명성을 얻지 못하지 않았는가?]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자기가 교사로 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을 변호하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고, 그 대신 즉시 이 것을 엄숙한 비판으로 인정하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무슨 일을 해볼까? 마차를 몰아볼까?  을 쏘아볼까? 좋다! 마차를 몰자.]


공자는 자제력은 대단하였지만 초인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감정이란 자제해야 한다고 믿었지만 총애 하는 제자 顔回가 죽었을 때는 슬픔을 억제하지 않았다. 다른 제자가 공자에게 [선생께서는 너무 지나치게 슬퍼하십니다.]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과연 그랬던가?] 그러나 만약 이 사람을 지나치게 슬 퍼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그렇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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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링컨 ‘노예제도 폐지’는 남부 약화 노린 선거용 역사

 

 
링컨 ‘노예제도 폐지’는 남부 약화 노린 선거용


링컨이라는 이름 앞에 따라다니는 ‘노예 해방의 아버지’ ‘위대한 해방자’라는 수식어가 왜곡과 과장임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백인에 비해 흑인이 열등하다고 믿었고, 흑인 노예제의 해결책은 흑인들의 해외 이주라고 생각했으며, 당시 노예제 폐지론자들을 광신자라고 보았다. 더 나아가 남북전쟁 때인 1863년에 노예 해방령을 선포한 것도, 남부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지 노예제 자체를 없애는 것이 주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국이 분열의 위기에 처한 1850년대에 링컨은 노예제 폐지론자로 비쳐졌고, 그의 대통령 당선은 남북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결국 흑인 노예제를 폐지하는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조심스럽지만, 자신의 야망과 목적에 충실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전국적으로 유명 정치인이, 그것도 노예제 반대론자로 부각된 것은 1858년 상원 의원 선거 때였다. 일리노이 주에서 출마한 그는 당시 유명인사였던 북부 민주당 후보인 스티븐 더글러스와 맞붙게 되었다. 이 선거 유세에서 링컨의 제안으로 둘은 일곱 차례의 토론회를 벌이게 된다. 순발력과 임기응변이 필요한 토론회에 익숙하지 않았던 링컨은 첫번째 토론회에서 더글러스의 맹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더글러스는 링컨을 과격한 노예 해방론자로 몰아세우면서, 노예제를 채택할 것인가 채택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결정권은 각 주에 있다는 주권론(州權論)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링컨은 자신이 온건파라는 식으로만 변명했을 뿐 노예 문제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토론회가 거듭되면서 링컨은 자신감을 얻어갔고, 마지막 세 번의 토론회에서는 처음과는 반대로 더글러스를 몰아붙였다. 여기서 결국 쟁점은 노예제 문제였는데, 그는 더글러스가 주권론의 미명 하에 노예제 문제 자체를 회피한다고 말하면서, 이 토론과 선거는 “노예제가 그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차이”가 대립하는 장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자신과 공화당은 노예제가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악이라 믿으며 이 제도를 새로운 영토로까지 확산시키려는 민주당을 막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선거 유세전 속의 토론회를 통해서 링컨은 자신의 평소 주장과 달리 과격한 노예제 반대론자로 부각되었고, 비록 상원 의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도전을 위한 디딤돌을 놓았다. 왜냐하면 그는 노예제를 지금의 남부에만 한정한다면 노예제가 “궁극적으로 소멸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그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인, 연방이 해체되지 않는다는 전제 위에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남북 전쟁이라는 또다른 도전과 비극을 통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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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계와 풍수 역사
 
조선 태조 이성계

 

풍수에서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는 말이 있다. 무릇 인물은 하늘이 내린다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풍수얘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의 인물이 있는데 바로 조선 태조 이성계(1335∼1408)와 중국 명나라 태조 주원장(1328∼1398)이다.

전남 목포 앞바다에 왕이 나온다는 자리가 있었다. 우이도라는 섬이 바로 그 자리인데,섬밑 바다 속에 혈자리가 있어서 시신을 바닷물속에 안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이도의 바다 속 명당자리는 소 귀의 형상을 한 섬으로 왼쪽은 천자(天子),즉 중국의 황제가 나오는 자리고 오른쪽은 조선의 왕이 나오는 자리였다.

때는 고려말엽. 이성계의 조부되는 이춘(李椿)은 자기 손자대에 중국 황제가 나오게 하려고 산소자리를 물색하던 중 이 우이도 대명당을 발견하고 즉시 이장을 추진했다. 그런데 물속에 시신을 안치하는 수장(水葬)을 하려니 물질을 잘하는 사람이 필요했다. 수소문해 보니 근처에 주씨(朱氏)라는 사람이 제일 잘한다고 하여 곧장 만나러 갔다. 그 주씨는 바로 후일 중국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의 조부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저 물질이나 하던 평범한 어부에 지나지 않았다. 이춘은 주씨를 만나 속이야기를 털어놓은 뒤 우이도 밑의 오른쪽 왼쪽 두 곳에 대명당이 있는데 나와 당신 두 집안이 한 자리씩 쓰자고 제의했다. 그는 천자 나올 자리는 주씨에게 쓰라고 하고 왕이 나올 자리는 자신이 쓰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춘은 이미 속셈이 있었기 때문에 진짜 천자자리를 왕자리라고 하고 왕자리는 천자자리라고 속여 알려 주었다. 이런 기막힌 얘기를 듣자 주원장 조부도 선뜻 동의하며 자신이 물질하여 바다 속 수장을 하겠다고 나섰다. 마침내 두 집안의 수장작업을 끝마치고 주씨가 물속에서 나왔다. 이춘이 주씨에게 수장을 잘했느냐고 묻자 그가 대답했다.

“영감께선 미천한 저에게 천자자리를 쓰라고 하였으나 생각해 보니 자리를 알려주신 것도 감사한데 주제넘게 무슨 천자자리까지 바라겠습니까. 그저 왕자리로도 과분합니다. 그래서 저는 쓰라고 하신 천자자리에 안 쓰고 왕자리에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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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양일체론’의 최익현
 
주자학적 명분에 목숨건 ‘왜양일체론’의 최익현


1876년 ‘개항’으로 조선사회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계와 만나게 되었다. 조선사회가 만난 것은 과학 문명 진보 등으로 표상된 근대성이자, 철선과 함포 그리고 무엇보다 자본으로 무장된 제국주의이기도 했다. 새로운 만남은 곧 기존의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이기도 했으나 ‘모든 죽은 것들이 산 자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죽은 것들은 무엇보다 주자학적 대의명분의 세계였다. 척사위정의 주자학적 세계는 죽은 것들을 위해 죽음마저 불사하는 장렬함을 보여주었지만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이미 사산된 미래였다. 그들에게 장렬한 죽음은 메타포이자 비가역적 현실이기도 했다. 면암 최익현은 그 죽음의 메타포의 표상이다. 이항로 계열의 화서학파에 속해 있던 최익현은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는 누구든지 죽일 수 있다’는 극단적 춘추대의로 자신의 삶마저 죽일 수 있었다.

죽음의 찬미는 곧 시대적 위기를 통해 미학적 숭고함을 획득할 것이다. 당시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조정과 개화파들에 대해 최익현은 ‘사람마다 사학(邪學)을 하게 되어, 아들이 그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않고 신하가 그 인군(仁君)을 인군으로 여기지 않게 되어 예의는 시궁창에 빠지고 인류는 금수가 될 것’이라는 비판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그 ‘인군’인 고종은 “그들의 교는 배척하고 그들의 기계는 본받”자고 하여 동도서기라는 금수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최익현은 일본과 서양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자본주의적 교역의 위험성까지 경고하고 있다. 즉 ‘저들의 물화는 공업 생산품이어서 그 양이 무한하고, 우리 물화는 토지 생산품으로 그 양이 유한’하다는 것이다. 농업경제와 기계제 대공업의 차이를 간파한 예리한 지적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대립은 1895년 고종의 단발령을 둘러싸고 반복된다. 최익현은 1896년 단발 반대 의병봉기를 시도하고 당시 의병들은 복수보형(復讐保形) 즉 국모의 원수를 갚고 형체를 보전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중화와 오랑캐의 구분이 임금과 신하의 의보다 더 중하다고 보았기에 저 유명한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주장이 가능케 되었다.

고종과 면암은 지킬 것이 있었다. 왕권이라는 절대권력과 그것을 초월해버리기도 하는 성리학적 유토피아가 그것이었다. 물론 그 유토피아는 유생 의병장이 양반 능멸죄로 평민 의병장을 참수하는 디스토피아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근대와 서구, 자본과 제국을 만난 그들의 논쟁은 지배계급의 분열과 위기적 징후에 다름 아니었고 지킬 것이 없는 자들과는 분명 다른 세상의 문법이었다. 그 다른 문법의 정당화를 위해선 민족이라는 또 다른 문법이 등장해야 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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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림토 문자 역사
 
경북 경산시 와촌면 명마산서

ㅅ ㅈ ㅠ 자모 뚜렷 학계 관심 


훈민정음 창제(1443년) 이전의 고(古) 한글로 추정되는 가림토(加臨土) 문자가 국내 최초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사진)
가림토 문자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3년 이암(李巖)이 저술한 단군세기에 제3세 단군 가륵이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짓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13일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명마산(鳴馬山) 중턱에 자리한 바위(가로 1.8m,세로 3.4m)에서 가림토로 추정되는 문자 다수가 새겨진 것이 발견됐다. 이 바위에는 상형문자에 가까운 글꼴이나,ㅅ ㅈ ㄴ ㅠ 등 한글 자모가 뚜렷이 각인돼 있다.

재야 사학자인 예대원(62·경북 경산시 사동)씨는 '훈민정음 창제의 모태이자 기반이 된 것으로 알려진 가림토 문자가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한국정신문화원 박성수(72·역사학) 명예교수는 '바위에 암각된 문자가 가림토와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연구검토를 거쳐 가림토 여부를 판명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54·국문학) 박사는 '상당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추정돼 언어 역사 민속학 인문지리학 등 여러 분야 학자들이 공동으로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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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의 우수성 역사

 

 
◇ 무엇이 1위인가

한국어가 세계 언어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어느 정도일까 이 물음은 한국인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아울러 우리 자신을 객관화해 살펴보는 데 주요한 잣대가 될 것이다. 나아가 한국어가 제자리를 잡으면, 이를 바탕으로 한민족의 정체성을 높이고, 높은 문화 창조를 통하여 세계인들을 두루 이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한글은 글자의 됨됨이에서 세계 언어의 맨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기본 자음 14자와 모음 10자, 나아가 겹자음과 모음을 합쳐 모두 40자로 구성된 한글은 먼저 말(한국어)이 있고서 이를 바탕으로 인위적으로 만든 글자라는 점에서 세계 언어에서 견줄 문자가 없고, 소리내는 사람의 기관과 하늘·땅·사람을 결합시켜 만든 과학·철학적인 글자라는 점에서 각 나라 언어학자들이 세계 언어를 얘기할 때 칭송하고 반드시 짚고 넘어가는 본보기로 통한다.

아울러 그로써 나타내지 못할 소리가 없어 국어정보학회나 한글문화 세계화 운동본부 등에서는 국제 음성기호를 한글로 채택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인터넷의 발달과 세계화는 언어를 획일화하는 부정적인 구실을 하고 있는데, 유네스코에서는 지난해 ‘바벨계획’을 제안하여 ‘언어 다양성과 정보 이용의 공평성’을 높이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말은 있되 이를 적을 글자가 없는 소수민족 언어 사용자들에게 그들의 말을 쓰도록 함으로써 소수언어의 사멸을 막는 것도 언어 다양성을 높이는 데 큰 몫을 할 것이라는 제언도 나오고 있다.유네스코에서는 1989년에 ‘세종대왕상’(킹 세종 프라이스)을 만들어 해마다 인류의 문맹률을 낮추는 데 공적을 끼친 단체나 개인을 뽑아 상을 주고 있기도 하다. 이는 세계 언어에서 한국어가 차지하는 위치가 어디인지를 드러내주는 몇몇 사례들이다.

◇무엇이 12위인가>

한국어를 쓰는 사람 수나 영향력은 얼마나 되는가 한국어를 모국어로 삼아 쓰는 이의 수는 표준중국어, 에스파냐어, 벵갈어, 영어, 힌디어, 포르투갈어, 러시아어, 일본어, 중국오어, 자바어 다음으로 프랑스말 앞인 12위에 해당한다. 서울대 조동일 교수 같은 이는 이를 일컬어 ‘다수가 쓰는 언어의 말석, 소수가 쓰는 언어의 선두’로 표현하기도 한다. 이로써 생산하고 있는 지식 정보의 양(인쇄물, 인터넷 보급률)은 이 순위를 앞지른다. 물자 교역량 역시 10위권을 넘나든다.(2001년 한국은 교역량 2915억달러로 13위임. 세계무역기구 통계)우리말글의 경쟁력을 연구하는 이들은 “한글과 한국어는 쓰는 인구와 글자의 과학성, 경제력, 컴퓨터 등의 활용을 바탕으로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영향력 면에서 중국어와 일본어 등 동양언어뿐만 아니라 영어 등 로마자를 바탕으로 쓰는 언어들과 충분한 경쟁관계에 있게 될 것으로 본다.”(유재원 한양대 언어인지학과 교수) 물론, 이를 위한 교육과 연구, 제도화 등에서 민관 두루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개인과 국가 두루 거품이 지나친 영어투자 일변도의 의식도 많이 누그려뜨려야 한다는 지적을 곁들인다.

◇ 한국어 쓰임의 실제 모습들

재외동포들과 외국인 쪽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재외동포들과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동기는 무엇일까 재외동포들은 한국어가 모국어이니까 당연히 배우고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 외국인과 다르며, 필요성은 그 다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동기는 필요성이나 호기심이 먼저다. 이웃을 알고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 취직이나 사업, 학문상 필요하여 배우게 된다. 이런 것을 통틀어 언어의 ‘영향력’이라고 할 것이다.우리나라가 남북 통일이 되고, 나아가 경제대국, 군사대국이 되면 이런 영향력도 더욱 커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옛소련이나 지금의 미국처럼 세계 패권국으로 가고자 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다만 ‘문화대국’으로 가자는 데 반대할 한국인들은 없을 것이다. 그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고, 한글과 한국어의 발전은 그런 ‘큰나라’로 가는 데 썩 중요한 몫을 할 것이다. 한글문화 세계화운동 본부 서정수 본부장은 “우리가 요즘 영어 배우는 데 쓰는 돈의 절반만 우리말글과 문화를 갈고닦고 펴는 데 쓰면, 영어를 잘해서 얻는 이득의 몇 배는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재외동포들 가운데 러시아나 중앙아시아, 중국 쪽에 사는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과 뿌리를 잊지 않기 위해 부족하나마 고려말, 조선어를 지켜왔으며, 이로써 최소한의 정체성을 확인해 온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서도 조국과의 오랜 단절 끝에 3, 4세로 넘어갈수록 정체성의 의미도, 필요성도 멀어지게 되어 제2, 3의 동화현상이 나타나는 것이 목격되며, 이는 상당 부분 조국인 남북한의 책임으로 돌려야 마땅한 것으로 보인다.좀더 잘산다는 미국 쪽은 다민족 국가로서 다중 언어정책을 쓸 수밖에 없는데, 1994년을 전후하여 동양 3국인 중국, 일본, 한국어를 외국어로 대접하여 대학 입학자격 시험의 하나인 ‘에스에이티2’ 시험과목에 올린다. 물론 그들의 세계경영 필요에 따라 국방언어교육원(DLI) 등 연방 차원에서 한국어 요원을 양성하는 프로그램들도 운영해 왔다.

가까운 일본의 경우 60만 재일동포들이 피나는 노력에 더하여 교육부에서 설치한 한국 교육원만도 열네 곳에 이를 정도로 뿌리가 깊고 넓으며, 현재 170여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외국어로 채택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어강좌나 한국어문학과가 설치된 대학이 200곳 안팎에 이르지만, 남한 쪽에서 재일동포들에 대한 교육·문화 투자가 생각보다 허술하기 짝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난다.이민사가 비교적 오래된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쪽에도 모국어 교육 연한이 이민사와 비슷한테, 이중·삼중언어 사용 현상이 나타난다.오스트레일리아나 동남아시아 쪽도 대학에서 한국어문학과를 설치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고, 이로써 중고등학교에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어가는 차례를 밟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현재 유럽을 중심으로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관은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학교(IB)가 있다. 이는 세계 곳곳에 세워져 국제학교 교육과정을 밟고 있는 각국 국제고등학교에서 채택해 시행하고 있다.

한글의 기원은 가림토 문자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들지 않았다
우리는 흔히 한글은 세종대왕이 창제, 선포했다고 알고 있다.그러나 이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 한글은 그보다 훨씬 이전인 단군 시대에 만들어진 유서 깊은 글자다. 정확히 말해 단군3세 가륵임금 때인 B.C 2181년에 정음 38자를 만들어 ‘가림토(加臨土)’ 문자라고 명명하여 발표한 것이 그 시초다.놀랍게도 과거 우리민족의 활동무대였던 만주에는 가림토 문자 비석이 우뚝 서 있다. 그 비석을 탁본한 것이 높이 2m, 폭이 32㎝인 것을 보면 비석은 이보다 조금더 클 것이다.세종대왕은 성삼문을 만주 방면으로 열세 번이나 보내어 가림토 문자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글을 연구케 하였다. 그리하여 집현전 학자들인 성삼문, 박팽년, 최항, 신숙주 등과 가림토 문자를 실제 쓰기에 편리하도록 다듬어서 서기 1446년 병인 음력 9월 상한(양력 10월 9일)에 훈민정음 28자를 반포하였다.

한글은 음양오행의 원리로 만들어졌다

우리 민족 문화의 뿌리는 음양오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과 글은 물론이요, 음식, 주거, 의복, 의학, 음악 등 어느 하나 음양오행과 관련되지 않은 분야가 없다.한글은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원리와 음양오행(陰陽五行) 원리를 바탕으로 창제되었다. 한글의 기본 형태는 천(天), 지(地), 인(人), 원(圓), 방(方), 각(角)의 형태로 나누어지는데, 천은 , 지는 ―, 인은 |로 표시하여 모음을 만드는 데에 이용한다. 하늘은 둥글어서 둥근 점이요. 땅은 평평하여 一자이고 천지간에서 있는 것이 사람이라 |자로 표시하는 것이다.

원(○), 방(□), 각(△)은 자음을 만드는 데에 이용한다. 원방각의 구조는 인간을 말한다. 원은 사람의 머리이고 방은 사람의 몸통이다. 각은 손발의 움직임을 상징한다.또한 각은 만물이 싹트는 모양이며, 방은 잎이 넓게 자라는 모양이며, 원은 열매 맺는 모양을 말한다.우주 만물은 오행의 원리에 따라 존재하는데, 우리말의 소리법칙도 이 원리에 맞추어 창제되었다. 따라서 한글은 이 세상의 온갖 소리를 그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다. 소리는 입안의 목구멍¹에서 시작되어 어금니², 혀³, 이⁴, 입술5 을 통해 나온다.

한글의 오행체계

한글의 자음은 오행의 다섯 가지로 구분된다. 그리고 기본음이 있고 각 기본음에서 파생하여 계열음이 생김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기본음 ㄷ에서 ㅡ을 떼면 ㄴ이 된다.또한 ㄷ에 ㅡ을 보태면 ㅌ이 되고 ㄷ에 ㄱ을 보태면 ㄹ이 된다. 또 ㄷ에 ㄷ을 합치면 ㄸ이 된다. 한글이 얼마나 지혜롭게 이루어졌는가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외국인도 극찬하는 한글의 우수성

미국에 널리 알려진 과학전문지 디스커버리 지 1994년 6월호 「쓰기 적합함」이란 기사에서, ‘레어드 다이어먼드’라는 학자는 ‘한국에서 쓰는 한글이 독창성이 있고 기호 배합 등 효율 면에서 특히 돋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라고 극찬한 바 있다.(조선일보 94.5.25). 그는 또 ‘한글이 간결하고 우수하기 때문에 한국인의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다’고 말한다.또 소설 『대지』를 쓴 미국의 유명한 여류작가 ‘펄벅’은 한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종대왕을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극찬하였다(조선일보 96.10.7).그런가 하면 시카고 대학의 메콜리(J. D. McCawley) 교수는 미국사람이지만 우리 나라의 한글날인 10월9일이면 매해 빠짐없이 한국의 음식을 먹으며 지내고 있다고 한다(KBS1, 96.10.9).

몇 년전 프랑스에서 세계언어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학술회의가 있었다. 안타깝게도 한국의 학자들은 참가하지 않았는데, 그 회의에서 한국어를 세계공통어로 쓰면 좋겠다는 토론이 있었다고 한다(KBS1, 96.10.9).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이처럼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 글의 우수성을 정작 우리 자신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1986년 5월, 서울대학 이현복 교수는 영국의 리스대학의 음성언어학과를 방문하였다.그때 리스대학의 제푸리 샘슨(Geoffrey Sampson) 교수는 한글이 발음기관을 상형하여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도 독특하지만 기본 글자에 획을 더하여 음성학적으로 동일계열의 글자를 파생해내는 방법(‘ㄱ-ㅋ-ㄲ’)은 대단히 체계적이고 훌륭하다고 극찬하였다.

그러면서 한글을 표음문자이지만 새로운 차원의 자질문자(feature system)로 분류하였다. 샘슨교수의 이러한 분류방법은 세계최초의 일이며 한글이 세계 유일의 자질문자로서 가장 우수한 문자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마침내 지난 1997년 10월1일, 유네스코에서 우리 나라 훈민정음을 세계 기록 유산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다.

한글은 가장 발달한 음소문자

한글은 소리글자(표음문자) 중에서도 가장 발달한 음소 문자이다. 즉, 글자 하나하나가 낱소리(하나의 소리)를 표기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은 모음이 열자이고 자음이 열넉자이다. 그리고 받침이 27종 있다. 모음과 자음을 합치면 하나의 글자가 되고 여기에 받침을 더해 사용할 수도 있다. 이처럼 한글은 그 구성 원리가 간단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대단히 쉽다. 그래서 우리 나라에서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모든 어린이들이 한글을 알고 있다. 또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이기도 하다.한글은 글자 그대로 읽을 뿐 아니라, 인쇄체나 필기체 등이 따로 없다. 이에 반해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서로 다르다. 또한 대문자와 소문자의 구별이 있고 글자대로 읽지 않는다.

예를 들어 speak(말한다)를 ‘스피-크’라고 발음한다.ea를 ‘이-’로 발음하는 것이다. 그런데 head(머리)는 ‘헤드’라고 발음한다.
같은 ea인데도 ‘에’라고 발음한다. 또 knee(무릎)를 ‘니-’라고 발음하는데, 여기서는 K자가 있는데도 발음을 하지 않는다. 이처럼 영어는 알지 못 하면 읽을 수조차 없다.국제어로 그 위상을 뽐내고 있는 영어에 비해 우리의 한글이 더 없이 우수한 글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한글의 우수성이 세계에 널리 알려질수록 영어는 국제어의 자리를 한글에 양보해야 할 것이다.

한글은 가장 풍부한 표현력을 가지고 있다

한글 문화권에 사는 우리가 외국어를 배우기는 쉽다. 영어발음을 90%이상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소리의 표현을 우리말은 8800개를 낼 수 있다. 이에 비해 일본어는 300개, 중국말(한자)은 400여개라고 하니 우리말의 표현력이 무려 20배가 넘는다. 세계언어 중에 단연 독보적인 존재인 것이다.(조선일보, 96.10.7, 재미동포 박춘양의 발표기사)외국인이 말을 할 때 흔히 제스츄어를 많이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언어의 표현력이 부족하여 생기는 습관이다. 우리는 말로써 충분히 표현되기 때문에 제스츄어를 굳이 쓸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제스츄어 쓰는 것이 세련된 문화인 것처럼 인식되어 한 때는 흉내 내려고 했던 사람들도 있었으니 재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자는 우리말은 외국어로 번역이 안되는 것이 너무 많아서 나쁘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사실 우리말의 표현 그대로는 세계 어느 나라 언어로도 번역을 못한다.우리말은 표현력도 세계 으뜸이지만 어감(語感), 정감(情感), 음감(音感) 등도 으뜸이다.외국에서 우리말을 번역 못하는 것은 우리말이 뒤떨어져서가 아니다. 외국어가 표현력이 부족하여 우리말을 번역하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 책임이라 할 수 있을까?“가자미 냄비에 물을 잘잘 부어 살근살근 끓이고 졸졸 졸여서 노리끼한 고기를 보시기에 소복하게 담아서 괴괴한 달빛 아래에 사랑하는 님과 둘이서 술 한 잔 곁들이니 살살 목을 넘는 요맛이 달콤하기도 하다.” 너무나 다양하고 아름다운 표현법이다. 이 표현과 어감을 어떻게 외국어로 제대로 번역해 내겠는가?

한자도 우리가 만든 우리의 문자


삼라만상(森羅萬象)에 음양(陰陽)이 있듯이, 우리글에도 음양의 짝이 있다.한글은 양이요, 한자는 음이다.한자의 시조로 불리는 창힐은 배달국시대 제14세 치우천황의 후손으로 동이사람이다. 초기의 문자로서 실증된 최초의 자료는 갑골문(甲骨文)이다. 거북이 배뼈와 소 어깨뼈에 주로 새겨진 갑골문자는 3천4백년전 중국 은(殷)나라 때 사용된 것으로, 황하 이북 은나라 도읍지였던 지금의 안양(安養)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명지대 진태하(陳泰夏) 교수(국문학, 한국 국어교육학회 회장)는 대만에서 문자학을 연구하면서 갑골문에서 북방민족이 아니면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특징을 발견하고 지금까지 연구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그는 결론적으로 ‘漢字’라는 명칭은 옳지 않으며, 고대 한민족의 글이라는 ‘고한글(古韓契)’ 혹은 ‘동방문자(東方文字)’ 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진교수는 또 ‘한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발달한 표의문자도 만들었고, 가장 과학적인 표음문자도 만들었다. 세계에서 유일 무이한 이 일은 한민족의 큰 자랑이다’라고 강조한다.이것이 입증되는 날,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는 한글 전용론자들과 한자와 한글을 혼용해야 한다는 논쟁 자체가 불필요하게 될 것이다. 한글은 한글로서의 장점이 있고, 한자는 한자로서의 장점이 있다. 이 둘을 합하여 쓸 때 가장 합리적이고 완벽한 언어가 된다. 다시 말해 한자와 한글의 혼용은 음양의 합덕인 것이다.

자랑스런 우리 글의 이름, 한글

왜 한글이라고 할까?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한’이란 자를 애용해 왔다.현재 우리 나라의 국호가 한국(韓國)이라는 점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한의 뜻은 왕, 수장, 우두머리, 하나, 크다, 바르다, 많다, 밝다, 훌륭하다, 하느님 등 여러 가지 좋은 뜻이 담겨있다.한글은 세종대왕이 28자를 반포할 당시 훈민정음이라 불리어졌다.그런데 한편에서는 언문(諺文), 언서(諺書)라고도 했으며, 그 후에는 반절, 암클, 아랫글, 가갸글, 국서, 국문, 조선글 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근대에까지 이르렀다.그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불리던 명칭은 ‘언문(상말을 적는 상스러운 글자)’이었다.그러나 개화기에 접어들어, 언문이라는 이름은 사대주의에서 나온 이름이라 하여, 주시경 선생께서 비로소 ‘한글’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이 명칭이 일반화한 것은, 조선어학회에서 훈민정음 반포 8주갑이 되던 병인년 음력 9월 29일을 반포 기념일로 정하여 처음에는 ‘가갸날’이라고 부르다가 1928년에 ‘한글날’이라고 고쳐 부르게 되면서 부터이다.‘한글’이라는 명칭의 뜻은 ‘한나라의 글’, ‘큰글’, ‘세상에서 첫째 가는 글’등으로 풀이된다. 따라서 ‘한글’은 한나라, 한겨레와 함께 영원히 뻗어나갈 글이요, 큰 글이니, 남녀노소 모두 한가지로 넓고 크게 써야할 글이며, 세상에서 첫째 가는 글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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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역사 역사

 

 

이슬람 역사 /수니파와 시아파

모하메드가 632년6월8일 메디나에서 갑자기 죽었을 때 모슬렘 사회는 커다란 지도력의 위기에 봉착했었다. 모하메드는 후계자 지명에 대해 어떤 지침도 남기지 않았다. 모하메드가 마지막 예언자였으므로 새로운 지도자는 '예언자'라고 불릴 수 없었다. 그가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알라로부터 새로운 계시가 올 수 없었고, 모슬렘은 코란과 하디스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 모하메드의 장례가 준비되던 때 매우 중요한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이슬람교가 삶의 전 영역을 포괄하므로 초기의 모슬렘  사회에서는 종교와 정치간의 구분이 없었고, 각 지역의 세속 정부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메카에 있는 모슬렘과 메디나에 있는 모슬렘 간의 싸움의 주요 원인이 되었고, 두 그룹 모드 자신들이 진정한 후계자라고 주장하였다.

메카의 모슬렘들은 모하베드와 가장 친하고 가장 신뢰받는 친구인 아브 바크르를 선택했고,  그는 칼리팟 아술 알라(하나님의 사자의 후계자)라는 이름을 얻었고, 첫 번째 칼리프가 되었다. 아부 바크르는 이슬람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슬람교의 수니파가 지지하는 철학이다.

그러나 메디나의 모슬렘들은 모하메드가 자신의 사위인 알리를 후계자로 남겼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모하메드의 딸인 파티마와 결혼한 알리는 선거 과정을 통해 선출되었다. 알리와 그의 지지자들은 바르크의 후계자 임명에 반대하였고, 결국 이슬람교의 시아파를 형성하게 되었다. 시아파는 이슬람교가 인간의 지혜로 이해할 수 없는 신의 계시이므로 지도자가 종교적 권위를 가져야 된다라고 느꼈다.

수니파 이슬람은 코란이 최종적인 계시이고 더 이상 이에 첨부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더 정통파로 인정되었다.

시아파 이슬람은 이맘이라고 부르는 종교지도자를 믿고, 그가 신의 계시를 더 받아 코란에 덧붙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결과 시아파 이슬람은 더욱 극단주의적이라고 여겨진다. 지도력의 문제는 모든 모슬렘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스마렐리스, 무피, 알라위, 샤피, 하니피리 등등의 많은 분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모든 모슬렘은 동일한 근본적인 가치관을 믿지만 이러한 가치관은 지역과 분파에 따라 많은 다름 관습과 의식에 의해 표현된다.

모슬렘 해의 시작은 무하람이라고 불리고 이는 거룩한 달이라는 뜻이다.

시아파 모슬렘들은 이 달 알리의 아들이자 모하메드의 손자인 후사인과 후사인의 아들 카심의 순교를 기념하기 위한 애도의 시간으로 지킨다. 무하람 월의 7일부터 10일까지 그 비극적인 사건의 낭송과 젊은이들이 날카로운 칼로 피가 흐르기까지 자신을 치면서 행진하는 의식들이 행해진다.

수니파 모슬렘 또는 이 의식을 거행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칼로 치지는 않는다. 사이파 모슬렘 순교의 구속적인 성격을 더욱 강하게 믿는다.

기도 중에 샤피파 모슬렘은 그들의 손을 옆구리에 살짝 댄체로 기도한다. 여자들은 샤피파나 수니파나 그들의 손을 가슴에 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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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역대왕들의 구분, 그리고 평가 역사

 

 

 태조 이성계의 어진

 

들어가기 전에 조선의 역대왕들의 순서와 재위기간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제 1대 태조 (1392 ~ 1398)

제 2대 정종 (1398 ~ 1400)

제 3대 태종 (1400 ~ 1418)

제 4대 세종 (1418 ~ 1450)

제 5대 문종 (1450 ~ 1452)

제 6대 단종 (1452 ~ 1455)

제 7대 세조 (1455 ~ 1468)

제 8대 예종 (1468 ~ 1469)

제 9대 성종 (1469 ~ 1494)

제 10대 연산군 (1494 ~1506)

제 11대 중종 (1506 ~ 1544)

제 12대 인종 (1544 ~ 1545)

제 13대 명종 (1545 ~ 1567)

제 14대 선조 (1567 ~ 1608)

제 15대 광해군 (1608 ~ 1623)

제 16대 인조 (1623 ~ 1649)

제 17대 효종 (1649 ~ 1659)

제 18대 현종 (1659 ~ 1674)

제 19대 숙종 (1674 ~ 1720)

제 20대 경종 (1720 ~ 1724)

제 21대 영조 (1724 ~ 1776)

제 22대 정조 (1776 ~ 1800)

제 23대 순조 (1800 ~ 1834)

제 24대 헌종 (1834 ~ 1849)

제 25대 철종 (1849 ~ 1863)

제 26대 고종 (1863 ~ 1907)

제 27대 순종 (1907 ~ 1910)

 

총 27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의 역사이다.

이 역사를 총 4부분으로 나눠보겠다. (내 맘대로임 -_-)

1기 초기 발전기: 태조 ~ 연산군

2기 중기 쇠퇴기: 중종 ~ 인조

3기 후기 부흥기: 효종 ~ 정조

4기 말기 멸먕기: 순조 ~ 순종

 

각 부분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이 궁금하실 것 같은 부분을 짚고 넘어가겠다.

다른것도 있겠지만 나는 여러분들이 연산군을 왜 2기에 집어넣지 않았냐는게 궁금해 하실것 같다.

왜냐하면 연산군에 대해서는 이미 다루었으니 참고해 보시면 알겠고, 중종에 대해서만 설명하겠다.

아시다시피 중종은 반정에 의하여 왕이 된 인물이다. 그럼 그 반정은 중종 자신이 나서서 했겠나?

아니다, 당연히 신하들이 나서서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추대했다. 좋게 말하면 추대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옹립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왕권이 약해지는 현상이 나오고 신하들의 권력이 세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붕당정치의 씨앗은 이때부터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럼 각 부분의 설명에 들어가겠다.

 

먼저 제 1기 초기 발전기, 태조 ~ 연산군까지이다. 이 시기는 말 그대로 조선이 발전하던 시기다. 이 시기의 훌륭한 왕들로는 태종, 세종, 세조 , 성종을 들수 있고 나쁜 왕은 특별히 없다.

바로 2기로 넘어가려다가 잠깐 짚고 넘어간다. 우리나라 위인들 중에서 이순신과 세종을 많이 존경한다고 하던데 나는 솔직히 말해서 세종보다 태종을 더 높게 평가한다. 세종도 훌륭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세종도 덕이 있는 왕이였기 때문에 황희부터 장영실까지 훌륭한 신하를 많이 보유했고 신하들의 도움으로 한글도 창제했고 거의 모든부문에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게 과연 자신의 능력때문에 된 일일까? 아니다. 태종이 기초를 닦아놓았기 때문에 그런 업적이 실현될수 있었던 것이다. 태종이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 야심이 있는 신하들을 죽이고 하지 않았다면 세종의 업적은 실현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또 태종처럼 악역을 자처하면서까지 나라의 기초를 닦아놓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세종보다 태종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다.

 

다음에는 제 2기 중기 쇠퇴기, 중종 ~ 인조까지이다. 이 시기는 당파싸움과 임란, 호란등에 의해서 조선이 쇠퇴하던 시기다. 이 시기의 훌륭한 왕으로는 광해군이 있고, 나쁜 왕으로는 선조, 인조가 있다. 3기로 넘어가기 전에 광해군, 선조, 인조를 짚고 넘어가겠다.

먼저 선조다. 선조....선조는 정말 멍청하고 비겁한 조선 역대왕 중에서 최악이라고도 할수 있는 그런 왕이었다. 그때는 잘하면 우리나라가 멸망할수도 있었을 위험한 때였다. 그런데 임란때 선조는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넘어가려고 하였으니 이는 비겁한 것이며 ( 한양을 버리고 간 것은 그렇다 치자. 그러나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하려고 한 것은 정말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이다. 그마저도 광해군의 만류로 인해 도망가지 않았다.) 왜가 침략할 것을 모른체 동인과 서인의 의견에만 갈팡질팡하고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으니 이건 멍청한 것이다. 그에 비해 광해군은 달랐다. 비록 선조의 아들이었지만 그는 백성을 위하여 정치를 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임란의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여러가지로 힘썼고,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집필하게 하여 완성시켰고, 청과 명사이에서 탁월한 외교를 하여 전쟁의 위험을 피했다. 그렇게 탁월한 성군이였지만 결국은 신하들의 반란으로 인해서 폐위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인조에 대해서도 잠깐 짚고 넘어가겠다. 인조는 그래도 선조만큼 멍청한 왕은 아니였지만 그는 옹립당한 왕이였고, 신하들의 의견으로 인해서 명나라를 직접적으로 도와주고 청나라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실수를 저질렀고 결국 역사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는 치욕을 당하였다. 하지만 그건 결국 그가 외교적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불러일으킨 결과라고 할수 있다.

 

세번째로 제 3기 후기 부흥기, 효종 ~ 정조까지이다. 이 시기는 훌륭한 신하들과 왕들이 많이 나타나서 조선이 다시 부흥하게 된 시기이다. 훌륭한 왕들로는 정조, 영조, 효종, 숙종을 들수 있고 특별히 나쁜 왕은 없다. 정조, 영조, 효종, 숙종을 잠시 짚고 넘어가겠다.

정조...내가 태종,광해군과 함께 조선 역사에서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3왕중 하나이다. 정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인재를 능력에 따라 골고루 선발하여 채제공, 정약용등 훌륭한 인재를 얻어 치세를 펼쳤다. 영조도 비록 사도세자를 잔인하게 죽이긴 하였지만, 긴 재위기간 동안 백성을 위하여 일해 조선의 왕들중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효종은 인조 다음의 왕이다. 그는 호란을 직접 겪어 보았기 때문에 청에 대한 복수심이 아주 강하였다. 그래서 군사력을 강화하고 특수부대를 설치하는등의 업적을 남겼다. 마지막으로 숙종이다. 숙종은 개인의 능력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고 할수 있다. 그러나 숙종의 시대에는 송시열등 훌륭한 신하들이 있었고, 당파 싸움이 (좋은 의미로) 심해서 비난을 당하지 않기위해 신하들이 모두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힘쓰고 청렴결백하여서 치세를 하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제 4기 말기 멸망기, 순조 ~ 순종까지이다. 신하들이 부패하였고 외세의 침입, 그리고 왕들도 특별히 훌륭한 왕이 없었기 때문에 멸망으로 치닷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서 그나마 나았던 왕은 고종을 들 수 있고, 나머지 왕들은 다 세도세력이든 외세이든 간에 휘둘렸기 때문에 다 그게 그거였다. 전체적으로 짚고 넘어가겠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모든것이 바뀌었듯이,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모든것이 바뀌었다. 일단 천주교의 박해가 다시 시작되었고, 탕평책이 폐지되어 정약용등이 탄핵되었다. 그리고 세도세력, 즉 외척이 권력을 잡게 되어 철종까지 그 권력을 유지하였다. 고종때는 대원군이 나타나 외척을 몰아내고 경복궁 중건을 하는등 업적을 남겼으나, 쇄국정책을 시행하여 우리나라에 근대화에 큰 장애가 되었다. 대원군이 쫓겨난 후에는 외세와의 싸움, 외세한테 굴복, 외세한테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다가 결국 멸망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줄일 수 있다. 역사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지만 왕들의 평가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다.

 

결국 조선은 중종때부터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고, 선조와 인조때 확 , 기울어 버렸으며 순조후에는

제기할수 없게 되었다. 역사란 모두 이런것인가. 모든것은 시작이 있고 또한 끝이 있는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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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사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

역사 속에는 무수한 천재들이 명멸해왔다.  아인슈타인, 미켈란젤로, 에 디슨, 피카소, 뉴턴, 셰익스피어, 괴테 등은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들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세종대왕, 김시습, 율곡 이이, 정약용 등을 떠올 릴 수 있다.

그런 천재들은 누구나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람 들이 알고 있는 것은 의외로 보잘것 없다.

특히 그들에게 숨겨진 인간적 고뇌와 정열은 전문적으로 연구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알기 어렵다.

역사 속 천재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집중 조명해본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천재로 꼽히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을 그린 다빈치는 보통 르네상스의 위대한 화가로 불린다.

최근 출판된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초의 과학자'(안인희 옮김ㆍ사이언 스북스) 저자인 마이클 화이트 말처럼 그의 전기는 이미 너무도 잘 알 려져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나리자' 를 떠올린다.

또 다른 작품인 '최후의 만찬'을 보자. 다른 작품들은 대부분 배신자 유다에 초점을 맞춘 반면 다빈치는 인물 배치와 각 사도들 몸짓 묘사를 통해 '나와 함께 먹는 자 중에 배신자가 있다'는 극도로 긴장된 순간을 그려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술가로서 업적에만 주의를 기울인 나머지 해부학이나 도시계획, 천문, 지질 등에서도 특출한 재능과 열정을 발휘한 '과학자' 면모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 과학자이자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보통 사람처럼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를 동경했다.  하지만 그의 동경은 단순한 부러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1480년부터 6년 동안 그는 발명가ㆍ공학자로서 지식을 총동원해 새 움직임을 분석하는 데 매달렸다.

그 결과 내놓은 주장은 놀라웠다.

'물체가 공기에 의해 받는 압력만큼 공기도 물체에 압력을 가한다.

날개가 공기를 쳐서 무거운 독수리가 가벼운 공기 속으로 높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라.'

뉴턴의 제3운동법칙인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과 유사 하지만 무려 200년이나 앞선 성과였다.

오직 자기 힘의 한계에서만 비행에 제한을 받는 새.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새와 하늘에 대한 평생에 걸친 동경은 비행장치 연구로 발전하기도 했다.

그림들에서도 그의 과학에 대한 열정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위동굴 속의 성모'는 얼굴 위에 떨어지는 빛의 강도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그린 것이다.  그는 광선이 자연 속에서 끝없이 반사하고 굴절하기 때문에 물체가 있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그림 속 선들은 딱히 하나로 잡아내기가 어렵다.  선 하나하나에 명암과 색채 그리고 윤곽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자연 현상을 집요하게 관찰해 어떤 물체 색깔이 다른 물체에 의해 항상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는 19세기 인상파 화가들의 기본 개념이다.

인상파 작품들을 보면 색 속에 다른 색이 섞여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얼굴에 나타나는 누르스름한 색, 불그스름한 빛 등 은 이차원 캔버스에 그대로 옮길 수 없다는 것을 이미 15세기에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세대를 앞선 예술가이자 과학자다.

◆ 군사 공학자

='적이 공략할 수 없도록 안전하게 위를 덮은 수레를 만들 수 있습니다.  대포를 가진 적의 대열을 통과하고 가장 강력한 군대라도 파괴할 것 입니다.  보병은 방해도 받지 않고 손상도 입지 않고 이 수레 뒤를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대포와 박격포 등을 갖 출 수 있습니다.

' 위 기록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당시 밀라노 통치자인 루도비코 스포르차에게 자신을 추천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편지 중 일부다.  이는 현대 전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계화 부대 운용 개념과 일치 한다.

발췌한 부분 외에도 편지에는 새로운 박격포 모델ㆍ투석기ㆍ전투함 등 전쟁 기계 관련 내용으로 가득차 있고 나머지는 건축ㆍ조각ㆍ회화 등에 관한 얘기가 담겨 있다.

당시 밀라노 공국은 15세기 다른 유럽 나라처럼 '힘의 논리'로 유지됐 다.  특히 1470년대 밀라노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중요한 군수품 공급처 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같은 시대 상황을 이용했다.  당시는 질병이나 전쟁 때문에 죽음이 매우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질 때였다.

따라서 화가나 조각가가 공학자나 건축가보다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군사 공학이 자기 이름을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특히 대량 파괴 기계들에 대해 큰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그의 행보는 밀라노 궁정에서 공학자나 건축가로서 성공 발판을 마련한 후 화가나 음악가로서 재능을 발휘하려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 길들일 수 없는 괴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보통 사람과 달리 인간사에 무관심했다.  가장 가까운 대화 상대는 노트 기록이었다.  큰 전쟁이 발발하거나 질병 이 도시를 덮쳐도 그는 노트에 이 같은 사실을 적지 않았다.

인간 시체를 며칠 밤을 새워가며 30번 이상 해부하기도 했고 신체가 인간이 소유하기에는 너무 훌륭한 작품이라고 경탄하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아름다운 성모와 여성을 즐겨 그리면서도 여성을 혐오하고 미소년만 사랑했다.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생각해 채식주의를 고집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전쟁기구를 발명하는 일로 가득차 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남들이 자기 생각을 훔쳐가는 것을 두려워해 평생 왼손으로 '거울글씨'를 썼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에게서 추출한 성공핵심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을 갈고 닦은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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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한국의 문명 전파 - 수메르 역사

 

 

영국학자 크래머 등의 발굴에 의하여 '머리가 검은 (Black Headed People) 동아시아 인들'이 문명을 가지고 들어와 세웠다는 것이 밝혀진 수메르 문명. 흔히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수메르인들은 고대에 만주에 있었던 '수밀이' 사람들이 이동하여 세운 문명으로 보인다. (수밀이 - 고대 한국의 12나라 중 하나.) 그 증거를 보자. 

 

메소포타미아 (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 지역)에 문명을 가지고 들어온 수메르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검은 동아시아 인들로 나타났다.(유적발굴-두개골등) 그 말은 한국어와 유사하다. 지금도 비슷한 것이 많아서, 언어학자들은 서부 아랍의 '우랄어' 와 동아시아의 '알타이어'를 합쳐서 '우랄-알타이어'라고도 한다. 수메르어는 중국어가 아니라 한국어와 비슷하다.

 

다음 그림에서 보이듯이 초기 수메르 문자는 고대 한문과 비슷하다.

(원래 한문을 만든 사람들은 동이인(한민족)이다. 그 증거는 차후 밝힐 것임. 편집자주)

 

이렇듯 문명이 서로 비슷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은 수메르 문명이 동아시아로 들어온것 아니냐 하고 오해하기도 한다. 이미 오래전에 수메르문명을 발굴한 크래머 등은 "두개골등으로 보아 동아시아 인들인 어떤 사람들이 문명을 갖추고 갑자기 나타나서 세운 문명이 수메르 문명이다."라고 했다. 특히 그 주위에 원래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살았다고 하여 크래머는 '인종의 섬'이라 하는 표현을 썼다.

 

수메르문명(메소포타미아 문명)도 <고대 한국>에서 '홍익인간의 정신'에 의하여 세계를 문명화시킨 일들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문명화된 땅(ken.gi(r)--civilized land)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로선 (그 주위에서) 수메르가 최고 발달된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수메르의 도시는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고 심지어 수세식화장실도 이용했다.

 

수메르인의 격언에 '진리와 함께 걷는 자는 누구든지 생명을 얻는다.'라는 말이 있다.

 

현대 유럽 초기역사책에서는, 유럽 문명의 생성,이동은 '수메르문명 -> 에게문명 -> 이집트와 그리스' 순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스 문명 이전의 유럽은 석기원시시대였다. 그리스인들이 돌도끼 갈고 있을때 고대 한국에서는 진리를 논하고 있었다.

 

이하 글은 글의 원주인이 인용한 글입니다. 여기서 재인용합니다.

 



주택단지들을 파 들어가 보다가 고고학자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지금 세계사 책에 보면 인류 문명의 최초의 문명으로 갈대아 우르 지역의 수메르문명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비롯해 굉장한 주거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상수도와 하수도를 만들었습니다.

 

PVC나 스텐파이프는 아니고요, 도자기를 구워 상하수도 시설을 한 것입니다.

 

 그저 원숭이 비슷한 존재들이 아니고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우리나라조차도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춘 것이 이제 몇 년 되었습니까? 그런데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중의 하나는 수메르 문자의 발견입니다.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문자는 쐐기문자입니다. 쐐기란  나무를 고정시킬 때 박는 쐐기(Wedge)를 말합니다. 한자로는 설형문자라고 부릅니다.

 

보시는바와 같이 이런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는데요, 그 어순( 語順)이 서양이나 중동 사람 말이 아닌, 한국어와 제일 비슷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문장이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이고요, --'가', --'을' 등의 토시를 붙여서 말을 구성합니다.

 

 '밭'을 '받'이라고 하고, '길'을 '길'이라고 하고, 아버지를 집에서는 '아바'라 하고, 남에게 말할때는 '아비'라 하며, 높은 분을 높여 부를 때는 이름뒤에 '님'자를 붙입니다. '하늘'을 '아눌'이라고 하고 하늘을 높인 말 즉 '하늘님'을 '아눌님', 혹은 '아누님'이라고 하지요. 그러한 말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수메르어와 한국어의 공통점에 대해서는 차후 자세하게 올릴 것입니다. 편집자주)

 

또 놀라운 것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귀하게 숭상하던 꽃이 'Rose of Sharon' 즉, '샤론의 장미'입니다. 이 꽃의 학명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ybiscus syriacus) 인데요, 그것은 바로 무궁화 꽃의 학명과 동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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