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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지기♡파일 스크랩 공무도하가.구지가.해가.황조가
화려한 겨울 추천 0 조회 251 10.09.11 01: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공무도하가(공후인)

 

                                              백수광부의 처(or 여옥)

   公無渡河(공무도하)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경도하)       기어이 건너시다가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빠져 죽으니

   當奈公何(당내공하)       님을 장차 어이할거나



   ▶ 황조가와 함께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서정 가요

   ▶ 원시 집단 가요에서 개인적 서정 가요로 넘어가는 시기의 작품

   ▶ 전통적 정서인 한(恨)의 정서를 바탕으로 함


* 일명: <공후인>

* 출전: 해동역사(海東繹史)


* 공후는 비파처럼 생긴 스물 석 줄로 된 현악기로 불려지기도 한다.

* 이 노래처럼 물과 이별을 제재로 한 고려가요: 서경별곡

* 공무도하가와 황조가의 전승방식에서의 공통점: 4언 4구의 한역가요

* 서정가요로 볼 수 있는 이유: '슬픔'의 정한 표출

* 4행에 드러난 시적 화자의 정서: 체념

* 정서적 접맥 작품: 정읍사, 가시리, 서경별곡, 진달래꽃, 아리랑

* 물을 경계로 하는 것(물의 의미):  삶/죽음,  이승/저승,  차안/피안,  공존/분리


   물의 상징성-

 이 노래에서 가장 중심을 이루는 소재는 '물'이다. 첫 구절에서의 '물'은 남편으로 표현된 사랑을 의미한다. 그리고 둘째 구절의 '물'은 사랑의 종언과 함께 님의 부재를 의미한다. 셋째 구절의 '물'은 사랑과 죽음을 함께 내포하면서, 사랑 곧 죽음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자아내고 있다. 이 작품은 '물'을 매개로 하여 사랑과 죽음을 서로 바꿀 수 있다는 애정 지상주의를 드러내고 있다.


   백수광부의 상징성-

 모습이나 거동이 예사롭지 않은 점을 보아 죽은 사람이 무당일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특히 주목된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술병을 들고, 미치광이 짓을 하면서 강물에 뛰어들기도 하는 것은 황홀경에 든 무당의 모습이라야 이해가 된다.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권능을 확인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는데, 그렇게 하는 데 실패했으니 문제이다. 서툰 무당인 탓이라고 하면 심각한 사태가 가볍게 처리되고 만다. 실패에서 어떤 역사적인 의미를 찾으면서 새로운 견해를 덧보탤 필요가 있다. 무당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고, 그렇게 된 이유가 고조선이 국가적인 체계를 확립하면서 나라 무당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민간 무당은 불신되거나 배격되는 사태가 벌어진 데 있었을 법하다. 그 자리에서 공후를 탄 아내도 무당인 것 같으며, 그래서 굿노래 가락에 얹어 넋두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공후인 해제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란 명칭이 옳으며, <공후인>은 악곡의 명칭이요, 작자는 백수광부(白首狂夫)의 妻이다. 제작 연대는 서기 2세기 후반으로 원래 민요이던 것이 後漢 때 한역되었다는 설도 있고, 공후인을 음악상의 操曲인 동시에 문학상의 작품명으로 보고, 조선에서 한문으로 정착되어 중국에 유입된 가요로 한사군 이후부터 전한말에 백수광부의 처가 짓고, 여옥(麗玉)이 정착시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백수광부를 주신(酒神), 여옥을 악신(樂神)으로 이해함으로써 이 설화를 神話로 설명하여 작품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이 노래를 우리 노래가 아닌, 중국 고대인의 노래로 보고, 여기에 나오는 朝鮮이란 6세기 전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직예성(直隸省)의 조선현(朝鮮懸)을 지칭한 것으로, 또 곽리자고의 성명은 '곽마을에 사는 沙工'의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배경설화

 공후인은 조선의 진졸(津卒)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은 것이다. 조선의 진졸(津卒) 곽리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서 가는데, 머리가 흰 미친 사람(백수광부.白首狂夫)이 머리를 풀고 병을 들고 어지럽게 물을 건너가니, 그 아내가 좇아가며 말렸다. 그러나 그 남자는 듣지 않고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그 아내는 공후를 타며 공무도하의 노래를 지으니, 소리가 매우 구슬펐다. 노래가 끝나자 그녀도 스스로 몸을 던져 물에 빠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돌아와 그 아내 여옥에게 그가 본 광경과 노래를 이야기해 주었는데, 여옥이 슬퍼하며 공후를 안고 그 소리를 본받아 타니 듣는 자가 모두 슬퍼했다. 여옥은 그 소리를 이웃 여자 여용에게 전하니 이를 일컬어 <공후인>이라 한다.


  공무도하가에 대한 다양한 해석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물을 건너다 죽은 사람 때문에 모든 것이 시작되었으니 죽은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하겠다. 그 동안 논란이 매우 많았는데 모습이나 거동이 예사스럽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당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술병을 들고, 미치광이 짓을 하면서 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은 신들린 무당의 모습이라야 어울린다. 그런데 이 무당은 실패한 무당이다. 강물에 들어가 죽음을 이기고 무엇인가 재생을 이루는 의식(죽음의 신비 체험에 의한 자기 변용)을 거행하던 중에 죽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보면 고조선이 국가적인 체제를 이루면서 나라 무당으로서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무당이 불신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따라서 권위를 상실한 무당이 결국은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자리에서 공후를 타며 노래를 부르던 아내도 실은 무당이라고 볼 수 있다. 굿노래에 한 섞인 넋두리를 보탠 것이 아닌가 한다.

 또 다른 견해는 신화적 해석방법으로서 백수(白首)는 신선의 모습이므로 백수광부를 주신(酒神)으로, 그의 아내를 강물의 요정인 님프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즉 백수광부를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Dionysos)나 로마 신화의 바카스(Bacchus)로, 아내를 악신(樂神, Nymph의 하나)로 본다는 것이다.(정병욱)

 또한 '當奈公何'에서 남편을 따라 죽어야 한다는 여인의 의지를 찾을 수 있어 이 노래는 결국 정렬(貞烈)의 여심을 노래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해설 1

 이 노래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발견할 수 있다. 남편의 죽음을 보고 뒤따라 죽는 아내의 모습에서 기다림과 한, 체념에 묻혀 살아온 인종의 한국 여인, 정렬의 여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한이라고 하는데, 이 한은 이별과 죽음에서 온다. 우리나라의 서정시에서 이별을 다룬 것이 많은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오랜 옛날부터 한의 정서가 싹터 왔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서정시의 출발이라 할 이 노래는 한국적 정서인 한의 원류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의 중요한 제재인 강물이 훗날 고려 속요의 '서경별곡'이나 정지상의 '송인' 등 많은 이별가에 등장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노래에 대해서는 신화적 차원에서 해석되기도 한다. 즉 백수광부는 주신이며, 그의 아내는 악신의 성격을 지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백수광부의 행동은 황홀경에 든 신, 또는 무당의 행동이며, 이 행동은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권능을 확인하는 의식의 하나라고 보기도 한다.


   해설 2

 이 노래는 일찍이 중국에까지 전해져 이백을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차운(次韻)하기도 했던 고대 가요이다. 작품명은 <공무도하가>, 악곡명은 <공후인>으로 전한다. <해동 역사>에는 <고금주>에 이 노래가 전한다고 기록하고 내용을 싣고 있는데, 확인 결과 <고금주>에는 전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우리나라 서정시의 출발이라 할 이 노래는 한국적 정서인 한(恨)의 원류라 할 수 있다. 특히, 이 한(恨)이 이별과 죽음, (강)물(의 이미지) 등에 연원 한다고 볼 때, 한국적인 이별의 정한을 담은 속요 <서경별곡>, 정지상의 <송인> 등이 강물을 매개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볼 수 없다. 이 노래의 지은이는 일반적으로 백수광부의 아내로 보나, 죽는 남편을 보며 공후를 들고 와서 노래를 부르는 상황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여 곽리자고의 아내인 여옥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설화에 따라 백수광부의 아내가 지은 것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해설 3

 이 노래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한국의 여인상을 발견할 수 있다. 남편의 죽음을 보고 뒤따라 죽는 아내의 모습에서 기다림과 한(恨), 체념에 묻혀 살아 온 인종(忍從)의 한국 여인, 정렬(貞烈)의 여심(女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흔히 우리 민족의 정서를 한(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한은 이별과 죽음에서 온다. 우리나라의 서정시에는 이별의 한을 다룬 것이 많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 오랜 옛날부터 한의 정서가 싹터 왔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서정시의 출발이라 할 이 노래는 한국적 정서인 한(恨)의 원류(源流)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의 중요한 제재인 '강물'이 훗날 고려 속요인 '서경별곡(西京別曲)' 이나 한시인 정지상(鄭知常)의 '송인(送人)' 등 많은 이별가에 등장하고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구지가(龜旨歌)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어 놓아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만약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시어 풀이

* 구하(龜何): 거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용과 함께 신령스런 존재로 주술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임. 밑에 자세히 설명.  何(하): 이두식 음차(音借) 표기.  


* 수(首): 머리, 목의 뜻으로 보아 생명의 심상으로 파악하려는 견해와 '군주,왕,수령'등의 수로 보려는 견해가 있음


*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주술적 위협으로 갈구(渴求)의 의미를 강조


* 연대: 신라 유리왕 19년(A.D 42)

* 형식: 4언 4구체 한역시가

* 작자: 구간 등 가락국의 대신들과 200-300명의 백성들?

* 구성: 1,2행(요구), 3,4행(위협)

* 성격: 주술요, 집단요, 의식요, 노동요, 삽입 가요

* 주제:  새로운 생명(신령스런 임금)의 강림을 기원함

* 표현: 주술적, 명령형, 직설적

* 의의:

 ▶ 유리왕의 <황조가>(기원전 17년)보다 문헌 기록상 후대에 속하지만 문학의 일반적 발전 단계로 볼 때에는 문학사의 앞머리에 놓인다.

 ▶ 주술성을 지닌 현전 최고의 노동요

* 별칭: 영군가(迎君歌), 영신군가(迎神君歌), 구지봉 영신가, 가락국가


* 해석

 ▶ 잡귀를 쫓는 주문이다.

 ▶ 영신제의 절차 중 희생 무용에서 가창된 노래이다.

 ▶ 원시인들의 강렬한 성욕을 표현한 것이다.

 ▶ 거북점을 칠 때 부른 노래이다.


* 관련: 구지가의 아류작에 해가(海歌)가 있음


   해가(海歌)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가는 도중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그 옆에 병풍같은 바위 벽이 있어 바다에 맞닿았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한창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옆 사람들에게 "저 꽃을 꺾어다 바칠 자 그 누구뇨?" 하니 모시는 사람들이 모두 "사람이 발 붙일 곳이 못 됩니다." 하고 사양하였다. 그 곁에 늙은 노인이 암소를 끌고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노래를 지어 바쳤으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다시 이틀 동안 길을 가다가 바닷가 정자에서 점심을 먹는데 용이 홀연히 나타나 부인을 끌고 바다로 들어갔다. 공이 기절하여 땅을 쳐보았지만 아무 방법이 없었다. 한 노인이 있다가 "옛 사람의 말에 여러 사람의 입은 쇠도 녹인다 하였는데 지금 바다 짐승이 어찌 여러 사람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당장 이 경내의 백성을 불러서 노래를 부르며 몽둥이로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이 그대로 하였더니 용이 바다에서 부인을 데리고 나와 바쳤다. 공은 부인에게 바다 속의 사정을 물었다. 부인은 "칠보 궁전에 음식이 달고 부드러우며 향기가 있고 깨끗하여 세상의 익히거나 삶은 음식이 아니더라."하였다. 옷에도 향기가 배어 세상에서 맡는 향기가 아니었다. 수로의 자색과 용모가 절대가인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번 신에게 잡히었다. 여럿이 부른 해가의 가사는 이러하다.


 龜乎龜乎出首露(귀호귀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를 내 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략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 앗았으니 그 죄가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헌)     네 만약 거스르고 내놓지 않는다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로 너를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구지가에 대한 이견

* 잡귀를 ?는 주문으로 보는 견해 <박지홍>

* 迎神祭(영신제)의 절차 중 중심이 되는 희생무용(犧牲舞踊)(제천 의식에서 신에게 희생물을 바칠 때 추는 춤으로 의식절차(儀式 節次) 중 하나가 된다)에서 가창된 노래라는 견해

<김열규>

* 원시인들의 강렬한 성욕(性慾)을 표현한 노래로 보는 견해 <정병욱>

* 거북점을 칠 때 부른 노래라는 견해 <중국의 임명덕>

* 그러나 배경 설화나 해가(海歌)와의 연관 등으로 볼 때, 원시인들의 집단적 소망을 이루기 위한 주술적 집단 가요로 보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


   거북[龜] / 머리[首]에 대한 이설

* 신령스러운 존재로 呪術(주술)의 대상. 곧 神과 동일한 존재로 보는 견해

* 우두머리, 곧 王을 뜻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 男根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명의 근원' 또는 '성욕'의 표상으로 보는 견해.(이 견해에 의하면 '불에 구워 먹는다'는 것은 성교 행위로 생명을 탄생시키는 신성한 행위가 된다.)

* 제사에 사용하는 희생물(제물)로 보는 견해.

* '거북'은 단순히 신에게 소원을 전달해 주는 매개자에 불과하며 '머리를 내는 것'은 소원의 내용이라고 하는 견해.

* '머리'는 '首露王'의 '首'를 뜻하는 것이며, '거북'은 '長壽'를 상징하는 것으로 수로왕의 장수를 기원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


   구지봉

 '구지'에 대해서 가락국기의 작은 주에 [ 是峯巒之稱 若十朋伏之狀 故云也]라 하였다.'龜旨'는 '峯巒'의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인데,그 형상이 '十朋'이 '伏'한 것과 같아 그렇게 일컫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龜旨'라는 말속에는 '峯巒'의 뜻과 아울러 그 형상(十朋伏)을 가리키는 뜻이 함께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사전에 나오는 '峯巒'의 뜻은 '날카로운 산봉우리'이다.

  龜旨:旨 方言猶言地脊也  [大東韻府群玉 권9]


 이 기록에 따르면 '旨'는 方言으로 '地脊'(땅의 등뼈,땅의 등성마루)을 뜻한다.곧 '旨'의 우리말 뜻이 '산등성마루. 산봉우리'인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김유신전(상)에 [首露 ...登龜峰 望駕洛九村 遂至其地 開國] 하는 기록에서 龜旨를 龜峯이라 함을 보아 '旨'가 '峯'을 뜻함을 알 수 있다.(구지봉의 '봉'은 구지가 봉임을 더 또렷이 나타내기 위해 붙인 접미어이다.)


 따라서 '龜旨'의 '旨'가 곧 '峯巒'에 대응하는 말임을 알 수 있으며, 그 '旨'의 형상이 '十朋伏'한 것으로서,'龜'가 이에 대응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구지가의 성격

 이 노래에서 '거북'을 내세운 것은 무슨 뜻인지 학자에 따라 그 설(說)이 분분하다. 대체로는 신과 같은 신령스러운 존재로 보고 있다. (거북 = 검 = 신) 따라서, 이 노래는 그대로 영신군가(迎神君歌)로서의 주술요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흙을 파면서 불렀다는 점을 주목해 본다면 그것은 노동의 괴로움을 덜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일 것이므로 노동요의 성격도 지닌다. 또 잡귀를 쫓는 주문으로 보는 견해, 영신제(迎神祭)의 절차 가운데 가장 중요한 희생무용(犧牲舞踊)에서 불린 노래라는 견해, 원시인들의 강렬한 성욕을 표현한 노래, 즉 여성이 남성을 유혹하는 노래로 보는 견해도 있다. 거북의 머리를 수로(首露)?우두머리?남근(男根) 등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구워 먹겠다'는 구절은 우두머리 선정을 위한 거북점의 점괘를 얻기 위해 거북을 굽겠다는 뜻 혹은 강렬한 욕망이 깃든 여성 성기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언어의 주술성

 구지가는 임금 맞는 제의에서 부른 노래이다. 구간과 중서 2-3백명이 함께 불렀다는 점에서 주술의 효력을 한 개인의 주술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여러 사람이 집단으로 행하는 주술의 힘에 의존하는 '집단적 주술'이다.


    구지가의 구조

 '호칭 + 명령 + 가정 + 위협'의 주술 구조를 가지고 있다.

 명령과 위협으로 형성되는 구지가의 주술 구조는 당시 폭넓게 사용된 형식으로 보이며, 고구려를 세운 동명왕이 즉위 2년에 비류국과 세력 다툼을 하는 과정에서 흰 사슴을 잡아 거꾸로 매달고 홍수를 내려서 비류국의 항복을 받고자 행한 기우 주술(祈雨呪術)에서도 유사한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가정) 하늘이 만약 비를 내려서 비류 왕도를 표몰시키지 않으면

  (위협) 내 진실로 너를 놓아주지 않으리니

         이 어려움을 벗어나고 싶거든

  (명령) 너 능히 하늘에 호소하라.

                                   -이규보,동명왕편


  주몽이 홍수로서 비류국을 항복 받고자 사슴에게 비를 내리도록 명령하고 위협했던 주술의 내용과 구지가에서 대신들이 새 왕국을 세우고자 거북에게 왕을 보내도록 명령하고 위협하는 주술의 내용은 그 구조가 같다. 바다용이 앗아간 수로부인을 되찾기 위한 주술 목적에서 부른 <해가> 역시 이 주술 구조를 적용하여 실현시킨 것이다.


    구지가와 관련된 역사

  가락국의 형성을 밝힐 수 있는 사료로 삼국사기에 아래와 같은 것이 있다.

① 신라본기 시조 赫居世 居西干 조에

  [19년(기원전 39년) 봄 정월,卞韓이 나라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② 신라본기 脫解 尼師今 조에

  [원년(기원후 57년) 탈해 이사금이 이 해 나이 62세 였다. 탈해는 본디 多婆那國 소생인데 그 나라는 왜국 동북 1천리에 있다. 처음 그 나라 왕이 女人國 왕녀에게 장가들어 아내로 삼았던 바 태기가 있어 7년 만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왕은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한지라 버려 마땅하다."고 하나 그녀는 차마 못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을 아울러 싸서 독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갈 데로 가게 하였다.그래서 그 독이 처음 金官國 해변에 밀리니 금관 사람들이 괴이히 여겨 가져가지 아니하였다. 또 辰韓 阿珍浦口에 닿으니 이 해가 시조 혁거세가 재위한 지 39년(기원전 19년)이었다.


③삼국사기 신라본기 탈해 이사금 조에

  [21년(기원후 77년) 가을 8월, 아찬 길문이 加耶와 黃山津 입구에서 싸웠다.


 ①에 등장하는 卞韓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변한 12국 가운데 어느 한 나라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②에 이미 금관국이라는 국명이 등장하고 있다. 기원전 19년에는 금관국이 이미 성립하였다는 말이다. 물론 이것이 정확한 연대인지는 더 따져 보아야 한다. 기원전 19년에 탈해가 알에서 태어나 자라서 62세에 즉위했다면 기원 후 43년이 즉위년이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기원후 43년은 유리 이사금 20년에 해당하고 탈해의 즉위년은 기원후 57년으로 되어있다. 14년의 년대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산국사기 초기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14년 차이가 기록에 나타난다고 하여 이 차이가 역사 전반에 걸친 부정적 요소로 볼 수는 없다. ③에 처음으로 가야라는 명칭이 나타나지만 여러 가야 가운데 어느 가야를 가리키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아뭏든 기원후 1세기 중엽에는 이미 가야 여러 나라가 형성되어 있었음은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후한 세조 광무제 건무 18년(기원후 42년)에 가락국이 건국하였다고 하였다. 정확한 기록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이 안에는 많은 역사적인 진실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대체로 기원전 1세기 말부터 기원 후 1세기 중엽 사이까지는 이전 변한 지역에서 국가의 면모를 갖춘 여러 가야가 등장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이상 강봉원, 가야 여러 나라의 형성시기와 강역에 관한 연구, 경희대 대학원 논문집 12 참조)


    참고 < 제의(祭儀)>

 신화는 제의(祭儀)의 구술적(口述的) 상관물(相關物)이다. 더구나 건국신화는 건국을 기리는 제의에서 건국 시조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건국 과정을 자랑삼는 이야기로 빠짐없이 구술되었을 것이다. 이를 일러 legomena(thing spoken)라 하기도 한다. 이때 제의에서 하는 이야기에는 건국하던 때의 사회 정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신화는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상징과 우회적 표현으로 굴절하여 무척 함축된 언어로 의미를 전달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엄청난 초현실적 이적으로 보이는 것 뒤에 숨어 있는 실제적이고 일상적인 의미를 알아낼 수 있다. 신화의 출발점은 역사의 구체적인 생활상이라는 점을 늘 잊지 말아야 한다.


* 영신제의(迎神祭儀): 신을 맞이하기 위해 치르는 제사 의식

* 희생 무용: 짐승 등의 희생물을 신께 바치며 춤추는 의식


   참고 (구간이 있던 시대)

  개벽이후 이 땅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있지 않았고, 군신의 칭호도 또한 없었다. 그래도 아도간,여도간,괴도간,오도간,유수간,유천간,신천간,오천간,신귀간 등 구간이 있었으니 그들이 곧 추장(酋長)이었다. 백성을 영솔한 것이 대체로 1백호에 7만 5천 명이다. 대체로 제멋대로 산과 들에서 살며 우물을 파서 물을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이는 수로가 가락국 군주로 등장하기 이전의 상황이다. 구간을 추장이라 하였으니 이들은 바로 정치 지도자였다고 볼 것이지만, 강력한 중앙집권을 행사하는 왕은 아니었던 것이다.


   배경 설화

 이 이야기 속에 '구지가'가 전한다. 천지가 개벽한 후로 이 지방에는 아직 나라 이름도 없고, 또한 왕과 신하의 칭호도 없었다.


  이때 아도간(我刀干), 여도간(汝刀干), 피도간(彼刀干), 오도간(五刀干), 유수간(留水干), 유천간(留天干), 신천간(神天干), 오천간(五天干), 신귀간(神鬼干) 들의 구간(九干)이 있었다. 이들 수장(首長)은 백성을 통솔했는데, 대개 1백호 7만 5천명이었다. 그 때 사람들은 거의 스스로 산과 들에 모여 살면서 우물을 파서 마시고 밭을 갈아서 먹었다. 후한(後漢)의 세조 광무제(光武帝) 건무 18년 임인(A.D.42) 3월 상사일(上巳日)에 (그들이)사는 곳의 북쪽 구지(龜旨)-이것은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거북이 엎드린 형상과 같으므로 구지라 했다.-에서 수상한 소리가 불렀다. (구간들과) 마을 사람들 2,3백 명이 거기에 모이니, 사람 소리 같기는 한데 그 모습은 숨기고 소리만 내었다.



  "여기 누가 있느냐?"

 구간들은 대답했다.

 "우리들이 여기 있습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데이냐?"

 "여기는 구지입니다."

  또 말했다.

 "하늘이 나에게 명령하신 것은 이 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워 임금이 되라 하셨다. 그래서 내려왔다. 너희들은 이 산 꼭대기를 파며 흙을 집으면서 '신이여, 신이여, 수로(首露)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 먹겠다.' 노래하고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하늘에서) 대왕을 맞이하여 (너희들은) 매우 기뻐서 춤추게 될 것이다."

 구간들은 그 말을 따라 마을 사람과 함께 모두 기뻐하면서 노래하고 춤추었다.

 얼마 후 우러러 하늘을 바라보니, 자주색 줄이 하늘로부터 드리워져 땅에 닿는 것이었다. 줄 끝을 찾아보니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금합이 쌓여 있었다. 열어보니 황금색 알이 여섯 개가 있는데 해처럼 둥굴었다. 여러 사람은 모두 놀라고 기뻐하여, 함께 수없이 절했다. 조금 있다가 다시 보자기에 싸 가지고서 아도간(我刀干)의 집으로 돌아와서 탑(榻- 깔거나 눕는 좁고 기다란 의자) 위에 두고 무리들은 모두 흩어져 갔다. 12일을 지난 그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시 모여서 합을 열어보니 알 여섯이 모두 화하여 어린이가 되어 있었는데, 용모가 심히 컸으며, 이내 평상(平床)에 앉았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절하고 하례하고는 극진히 공경했다. (어린이는) 나날이 자라 열 며칠을 지나니 키가 9척임은 은(殷)나라 천을(天乙-탕왕)과 같았고, 얼굴이 용안임은 한(漢)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썹이 팔채(八彩)임은 당나라 요임금과 같았고, 두 눈동자를 가짐은 우나라 순임금과 같았다. 그 달 보름날에 왕위에 올랐다. 세상에 처음 나타났다고 하여 이름을 수로라하고 혹 수릉(首陵)-수릉은 죽은 뒤의 시호다.-이라 했다. 나라를 대가락(大駕洛) 혹은 가야국(伽倻國)이라고 일컬으니 곧 육가야(六伽倻)의 하나이다.

                출전:{삼국유사},권2,기이, 가락국기(駕洛國記)


    해설 1

 이 노래는 원래 우리말로 불리던 것이 한역되어 전하므로 그 원형은 알 수 없으나 영신군가, 영신가, 가락국가 등으로 불리는 가락국 건국 신화에 나오는 삽입가요이다. 향가의 4구체와 비슷한 형식을 가진 이 노래는 수로왕 강림의식에서 불리어진 주술적 집단 무요이다. 이 노래는 노동요로 보는 견해, 잡귀를 쫓는 주술요로 보는 견해, 원시인들의 성욕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 보는 견해, 영신제의 희생무용에서 불려진 노래 등의 견해가 있으나, 700년 후 성덕왕 때 불려졌다는 '해가'와 연결해 본다면 원시 주술적 집단 무요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옛 기록상의 연대로는 황조가나 도솔가보다 후대의 작품인 이 노래는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고대인 신앙의 바탕이 된 샤머니즘을 근간으로 하고 있어 그들 노래보다 훨씬 이전의 노래일 것이다. 한편 이 노래는 소박, 단순한 고대인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거북은 신군을 상징하는 말로, 머리는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말로 볼 수 있으나, 이 노래의 근본적인 성격은 소망(새로운 왕의 영접)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주술적으로 불린 집단 무요라 할 수 있다.


   해설 2

 제의적인 집단요로 현전하는 최고의 작품은 <구지가>이다. 김수로왕의 출현을 기대하는 가락국의 구간(九干)이 인도하는 무리가 구지봉에서 부른 집단요이기도 하다.

 '머리를 내어놓는다'는 말이 바로 '수로(首露)'이다. 구워서 먹겠다는 것은 물과 관련된 거북을 불로 위협해서 분발하도록 한 역설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해서 봄이  태어나고 나라의 시조가 태어났다. 수로왕은 아기인 채로 숭앙의 대상이 된 점에서 혁거세와 같다고 하겠으나, 탄생의 신이함이 더욱 강조되어 있어서 주목된다......구지가는 <굿노래>의 한 대목이지만 굿을 하지 않을 때에도, 무당이 아닌 예사 사람도 부르는 노래로 떨어져 나오지 않았나 싶다. 상대방을 위협하면서 소원을 이루자는 노래로 널리 전승되어 와 오늘날 들을 수 있는 동요로도 이어진 것 같다.


   해설 3

 구지가를 '실제의 민족 이동과 건국'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가락국 지역의 구간들이 지배하는 지역의 백성들을, '거북'을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거북 토템의 부족이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구지봉이라는 명칭은 거북의 봉우리이지 수로의 봉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거북 토템 신앙을 지니고 있는 9개 부족 연합 형태의 느슨하고 미약한 집단에 하늘에서, 실제로는 북쪽일 것이다, 강력하고도 많은 수의 이주민들이 내려온다. 이들의 힘은 막강해서 구간들은 항쟁에 대한 꿈도 꾸지 못한 채 그들을 받아들인다.

 그들은 모두 하늘의 자손임을 자랑하는 천신족들이다. 이들은 거북 토템의 상징인 구지봉을 신성 모독한다. 그 방법이 파헤치는 것이다. 거북의 생명 상징인 구지봉 꼭대기는 거북 토템에게 제사를 지내던 신성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한 산마루에서 자신들, 즉 천신족의 강림을 기원하라는 이야기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투항하라는 위협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다.

 결국 구지가에서 노래 가사만 보았을 때에는 거북을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천신족에 의해 자신들의 신앙의 대상인 거북에게 명령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후에 만들어진 해가는 이미 역사적 내용은 잊혀진 '단지 노래의 흔적과 설화'에 의해 만들어진 주가일 뿐이다.


   해설 4

 '구지가'의 내용은 일견해서 동요(童謠)와 다를 바 없다. 구간(九干)을 포함한 수백 명의 군중이 구지봉 산꼭대기에 모여 임금을 맞이하기 위해 흙을 파헤치며 목청껏 불렀을 것이다. 그 우렁찬 대합창이 메아리쳐 울렸을 것을 생각해 보면 고대인(古代人)들의 집단 가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신화 속의 이야기이지만 당시의 사람들은 이와 같은 군중의 합창에는 주술력(呪術力)이 있다고 믿었고, 과연 하늘로부터 임금을 맞았다.

 이 노래에서 '거북'을 내세운 것은 무슨 뜻인지 학자에 따라 그 설이 분분하다. 대체로는 신령스러운 존재로 보고 있다. '거북'과 '용'은 설화에서 혼용되었고, 또 고대 민족은 이를 원시적 신성관념(神聖觀念)의 타부로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노래는 그대로 영신군가(迎神君歌)로서의 주술요(呪術謠)라 할 것이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흙을 파면서 불렀다는 점을 주목해 본다면 그것은 노동의 괴로움을 덜고자 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일 것이므로 노동요(勞動謠)의 성격도 지닌다.

 이 노래의 아류(亞流)로 '해가(海歌)'가 있다. '구지가'를 신군(神君)맞이의 주술요라 한다면 '해가'는 재액(災厄)극복의 주술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이나 대상은 다르다 하더라도 결국 소원을 빌어 성취했다는 점과 집단 가무였다는 점에서는 서로 일치한다.

 '해가'는 '구지가'를 수로부인(水路夫人)의 경우에 알맞게 변용한 것이다. 이는 위협적(威脅的)인 주술요의 어떤 한 틀, 곧


 거북아, 거북아, /........하라/ ...않으면,/구워 먹으리


가 오랜 세월 일반에 널리 관용(慣用)외어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력(呪力)이 미치는 대상이 거북이든 용이든 그 대상을 위협하는 노래를 불러야 할 때는 그 경우에 맞게 내용을 보완해서 집단적으로 가창했었을 것이다.


   해설 5

 이 노래는 가락국 건국 신화 속에 들어 있는 삽입 가요로서, 수로왕을 맞이하기 위해 구지봉의 흙을 파서 모으고 춤추는 과정에 불려졌다는 점에서, 고대 시가의 제의적, 집단적, 주술적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이 노래의 핵심인 '거북'이 신령스런 존재를 상징한다고 볼 때, 거북의 머리는 생명을, 머리를 내어놓는 것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뜻하는 것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알로부터 수로왕이 탄생하는 것과 일치한다.

 거북으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위협하는 행위에서 고대인의 소박한 상징과 주술적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 노래는 한역(漢譯)되어 전하지만, 당시에는 가락국의 건국 신화의 일부로 존재했다가 민간에 구비 전승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 성덕왕 때 수로(水路) 부인이 바다의 용에게 잡혀갔을 때 백성들이 집단으로 불렀다는「해가」에서 이러한 전승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황조가(黃鳥歌)                          

                                       - 유리왕-

편편황조(翩翩黃鳥)     펄펄 나는 꾀꼬리는

자웅상의(雌雄相依)     암수 서로 놀건마는

염아지독(念我之獨)     외로운 이 내 몸은

수기여귀(誰其與歸)     뉘와 함께 돌아갈꼬


* 갈래: 4언 4구체 한역시

* 작자: 고구려 제 2대 유리왕(瑠璃王)

* 성격: 개인적 서정시, 삽입 가요

* 표현: 자연물을 빌려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 대조법, 의태법, 선경후정(先景後情)

* 주제: 짝 잃은 외로움

* 출전: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 본기'  


* 의의


   ▶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개인적 서정시

   ▶ 집단 가요에서 개인적 서정시로 넘어가는 단계의 가요


* 해석

   ▶ 고구려의 민요로서 유리왕이 가창한 것이다.

   ▶ 남녀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 불려진 사랑가의 한 토막이다.

   ▶ 종족간의 상쟁(相爭)을 화해시키려다 실패한 추장의 탄식이다. (서사시)


   꾀꼬리의 상징성

    ▶ 정답게 서로 사랑하는 자연물

    ▶ 실연의 아픔을 깨닫게 하는 존재

    ▶ 과거를 회상하게 해 주는 매개체

    ▶ 님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시키는 존재


   황조가에 대한 여러 견해


* 이병기: 원시적 서사 문학 가운데서 축수 또는 기원의 요소적인 부분이 분화 독립하여 서정시로 형성되었는데, 황조가도 그 한 예이다.

* 임동권: 고구려의 민요로서 유리왕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가창했을 따름이다.

* 정병욱: 이 노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전하는 제례의식 중에서 남녀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불려진 사랑가의 한 토막이다.

* 이명선: 유리왕의 치희에 대한 개인적인 미련에서 불려진 것이 아니라 종족간의 상쟁을 화해시키려다 실패한 추장의 탄식이다.


  배경설화

 3년 7월에 골천에 머무는 별궁을 지었다. 10월에는 왕비 송씨가 죽었다. 왕은 다시 두 여자를 후실로 얻었는데 한 사람은 화희(禾姬)라는 골천 사람의 딸이고, 또 한 사람은 치희(雉姬)라는 한나라 사람의 딸이었다. 두 여자가 사랑 다툼으로 서로 화목하지 못하므로 왕은 양곡(凉谷)에 동궁과 서궁을 짓고 따로이 머물게 했다. 그 후 왕이 기산에 사냥을 가서 7일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두 여자가 싸웠다. 화희가 치희에게 "너는 한나라 집안의 종으로 첩이 된 사람인데 왜 이리 무례한가?" 하면서 꾸짖어 말했다.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말을 채찍질하며 쫓아갔으나 치희는 성을 내며 돌아오지 않았다. 왕이 어느 날 나무 밑에서 쉬며 꾀꼬리들이 날아 모여듦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노래하였다.


   해설


 <황조가>는 고구려 제2대 유리왕의 설화 가운에 삽입된 노래로, 왕의 두 계비인 화희(농업)와 치희(수렵)의 사랑 다툼에서 치희를 잃은 심정을 읊은 것으로서 서정적이며 별리의 한을 형상화하고 있는 시가이다. 짝을 지어 즐겁게 노니는 꾀꼬리와  짝을 잃고 쓸쓸히 돌아가는 자신의 외로운 신세를 대비하여 외롭고 쓸쓸함에 감동을 더하고 있다. <황조가>의 서정의 정서는 고려가요의 <서경별곡>이나 <가시리> 등에 계승되고, 소월의 <진달래꽃>에 계승되어 한국 시가의 전통을 이루고 있다.  <황조가>는 현전하는 고구려의 最古의 서정시이며 국문학 발생 초기에 집단 서정 문학에서 개인 서정 문학으로 넘어가는 단계의 가요이다.


 이 작품의 성격을 서정시로 보는데 무리는 없다. <구지가>의 배경설화가 신적 영웅의 이야기를 다룬 신화이고 <공무도하가>의 배경 설화가 신적 존재(백수광부)의 이야기와 인간적 존재(백수광부의 처)의 이야기를 함께 다룬 신화와 전설의 복합 형태라면, <황조가>의 배경설화는 인간적 차원의 현실적 사건을 다룬 전설임을 유념할 때 이 작품은 이러한 외부 현실과 서사적 주인공의 지향 사이의 단절에 기반하면서 그러한 단절을 1인칭 서정자아의 내면 세계에서 해소하려는 갈망을 담은 정서를 노래한 것이다.


 또한 작가를 유리왕으로 보는 것에 별 무리는 없으나 우선, 그 형식이 4행시의 민요형태를 취하고 있다 는 점, 노래의 내용이 특수한 개인적 정서보다는 일반적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점 등은 이 노래의 성격을 민요로 볼 수 있게 한다. 즉 형식과 주제가 민요적 성격을 가지고 있고 노래의 표현 방법도 자연물(꾀꼬리) 에 의탁해서 자아의 정서를 단순하고 소박하게 표출함으로써 민요 일반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 자체만을 놓고 볼 때에는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특이한 정서로 표출한 창작가요로 보기보다는 집단의 보편적 경험을 단순, 소박하게 표출한 공동작의 민요로 보는 것도 타당성이 있다.


 이 작품은 고구려 초기에 우리 민족에 의해 자생된 고유의 서정 민요로서 그것이 유리왕의 비극적 설화 와 결합함으로써 비극적 정서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소중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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