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고 사랑하는 선후배 동문여러분!
사람마다 자신의 어려웠던 과거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꺼려합니다.
그러나 그런것들을 드러내어 현재의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닫힌 마음의 문을 열게 하여 이 사회가 조금이라도
행복하고 밝아 질 수 있다면 어느 한 사람의 진솔한 이야기가
베스트 셀러나 한편의 명화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저는 일상생활, 1일 명예 교사, 노인대학 특강을 할때도
가난하고 어려웠던 제 과거 이야기를 통해
그들을 내 마음속으로 끌어 들이곤 합니다.
제 학창시절 최재환 선생님의 열정은 대단하셨습니다.
3학년인 우리들에겐 국어, 1학년은 영어를 가르치신 것 같아 아마 황산중학교
14회는 물론(제가 14회) 15회, 16회 졸업생들도 기억을 더듬으면 생각 날 것입니다.
제가 이 글을 올리는 것은 문학적 가치는 없습니다.
단지 동문으로서 최재환 선생님뿐만 아니라 황산중학교에서 우리들을 가르치셨던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기고 혹시 어려운 동문들이 있다면 힘을 내 함께 가자는 의미입니다.
또한 이제 발족한 재경총동문회가 더욱 화합하고 서로 사랑하여
황산사랑카페를 열면 항상 총동문회 페이지에 빨간 불이 켜져있고
더욱 관심을 갖자는 의미이기도 합니다.(불이 켜져있지 않으면 관심이 없게됩니다)
따사한 봄날입니다.
혹시 저와 생각이 다른 동문이 계신다면 오직 동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뿐 다른
뜻이 없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른 욕심은 없지만 고향사랑과 동문회에 욕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선후배 동문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드립니다.
이제부터 제 어려웠던 학창시절의 이야기와 선생님의 헌신적인 사랑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역할役割에 대하여 해송/이상석
사람은 누구나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으며 사는 동안 자기가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정치가, 경제인, 사업가, 선생님, 학생, 공직자, 농부, 남녀노소, 어른, 아이를 총망라하여 제각기 역할이 있으며 서로가 그 역할을 다 할 때 이 사회는 밝고 아름다워집니다.
때로는 어느 한 사람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자신은 물론 상대방의 운명이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래 이야기는 동아일보에 기재된 정호승 시인의 새벽편지 내용 중 일부입니다.
전남 해남에 집이 가난해 중학교에 진학 하지 못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학교에 가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지만 아버지가 머슴살이 하여 겨우 살아가는 형편이기에 엄두도 낼 수 없었답니다. 소년은 어릴 적부터 엄마와 같이 다니던 교회에 가서 학교에 가게 해 달라고 며칠씩 기도하다가 하느님께 한 장의 편지를 썼답니다.
“하느님, 저는 중학교를 가고 싶습니다.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굶어도 좋고 머슴살이도 좋으니 공부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시오.”
소년은 가난한 집안 형편과 중학교에 진학하여 계속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을 적어 편지봉투 앞면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쓰고 뒷면에 자기 이름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답니다.
편지를 발견한 집배원은 어디에다 이 편지를 배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답니다. 고심 끝에 ‘하나님 전상서’라고 했으니 교회에 갖다 주어야겠다고 생각하고 해남읍내 이준목 목사님께 전해 주었답니다.
함석현 선생의 제자인 이 목사는 당시 농촌 계몽운동에 앞장선 분으로 소년의 편지를 읽고 크게 감동하여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에서 살게 하고 과수원 일을 돕게 하면서 중학교에 보내주었답니다.
소년은 열심히 공부해서 한신대에 진학했고, 졸업 후에는 고향에서 목회자로 일하다가 스위스 바젤대로 유학을 가 박사 학위를 받고 모교의 교수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나중에 총장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소년이 바로 오영석 전 한신대 총장이랍니다.
오총장은 이 일화에서 내가 주목한 분은 진학의 길을 열어 준 목사가 아니라 무명의 집배원이다. 수신인이 ‘하나님’인 이 편지를 교회에 전해 주지 않고 “뭐 이런 편지가 다 있어. 장난을 쳐도 유분수지”하고 찢어 버렸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편배달원이 역할과 직무에 충실했기에 소년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열어 준 것입니다.
내 소년시절에도 그런 역할을 해 주신 선생님이 계십니다.
내가 중학교를 졸업하던 70년대는 너나없이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나처럼 가난한 집 아이들은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마치면 머슴(중머슴, 꼴담 살이)을 살거나 돈을 벌기 위해 도시로 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뙤밭 몇 마지기로 6형제를 키우느라 부모님께서는 너무 많은 고생을 하셨으며 고등학교 진학은 생각 할 수도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목포 등 타 지역으로 진학을 한 몇 몇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쉽게 포기하지 못하고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부모님께서도 원수놈의 가난 때문에 영리한 자식을 고등학교에 보내지 못한다고 언짢아하시며 한숨 쉬는 모습을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전기, 후기 시험이 모두 끝난 2월 말 쯤으로 기억됩니다. 고구마로 점심 끼니를 떼우고 이 생각 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목포로 진학을 한 두 친구가 갑자기 찾아와서 “ 상석아. 너 선생님께서 3학년 때 받은 상장(해남 두륜문학 동인회 응모: 단편소설 당선, 해남 예술제 장원 , 6개군 학생 체육대회 하프코스 마라톤 과 3,000m 우승, 우등상 등 등) 모두 가지고 내일 아침 우항포 배로 꼭 오라고 하시더라. 만약 네가 오지 않으면 너 올 때까지 목포 선창에 계신다고 하셨어. 꼭 가야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국어를 가르치셨고, 우리 담임을 하시다가 목포 청호중학교로 발령을 받으신 후였습니다.
나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거역 할 수 없어 아버지께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니, 우리 형편에 진학은 할 수 없지만 일단은 가 뵈어야 되지 않겠느냐며 옆집에서 배 삯을 빌러 주셨습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우고 아침 일곱 시 배를 타기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서 십리도 훨씬 넘는 우항포로 달렸습니다. 그날따라 거센 눈바람에 몹시 추웠습니다.
약 3시간 30분 만에 목포항에 닿았습니다. 가까운 곳이지만 목포는 처음 가보는 도시였습니다.
선생님께서 안 나오셨으면 어떨까 걱정하면서 선창가를 바라보니 낡은 코트 깃을 세워 세찬 눈바람을 막고 서 계셨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선생님” 하고 부르니 “오냐 왔구나, 와 줘서 고맙다”하시며 내 손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네 실력과 재능이 너무 아까워 친구가 재직하는 동광고등학교(지금의 홍일고)에 이야기를 하였더니 장학생으로 받아주겠다 하였고, 가정교사 자리도 마련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창가 식당에서 점심을 사 주신 후 그 학교로 데리고 갔습니다.
학교에 도착하니 기다리고 계시던 선생님 친구께서 잘 왔다며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크니 앞으로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꿈에도 그리던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내 사기진작을 위해 가끔씩 학교를 방문하여 저를 교무실로 불러 격려해주시곤 하였습니다.
몇 차례의 좌절과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때마다 선생님을 생각하며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가정교사와 신문배달 등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반에서 1등을 하고, 목포예술제에서 큰 상을 받는 등 두각을 나타내는 동안 어느새 3학년 2학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갑자기 찾아오셔 지금은 가장 힘든 시기이니 불편하더라도 우리 집에서 같이 생활하자고 하시기에 극구 사양하였지만 끝내 거역 할 수는 없었습니다.
선생님 댁 형편도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짐을 옮겼습니다.
동 목포에 위치한 조그만 단독주택에서 아이들 넷을 키우며 생활하셨는데 선생님 보다 사모님께서 더욱 많은 신경을 써 주셨으니 나는 참 염치없으면서도 행복한 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40 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때의 기억들이 엊그제 일처럼 떠오르지만 활기 넘치시던 30대 초반의 선생님의 모습은 어디 가고 고희를 넘긴 노인이 되셨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나는 지금도 선생님의 사랑과 배려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겨울 때면 전화하여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항상 선생님의 곧고 바른 성품을 닮아가려 노력하며 아직은 서툴지만 선생님처럼 문인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10 여권의 시집을 출간 하셨고 한국문단에 우뚝 서 계십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선생님!
한 소년의 인생에 새 길을 열어 주신 선생님!
그 당시 당신의 어려운 가정과 자식들 뒷바라지에도 여념이 없었으면서도 하찮은 시골의 제자 한 사람에게까지 헌신적인 노력을 해 주신 위대한 선생님이 계셨기에 오늘의 내가 있습니다.
가끔씩 뵈올 때면 제자들의 안부를 물으시며 너희들 가르칠 때가 제일 좋았다고 하시는 선생님!
헤어질 때면 언제 또 만날 거냐고 눈시울을 먼저 붉히시는 정 많은 선생님!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특히 나보다 더 못하고 어려운 사람을 위해 마음을 쓴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얼마 전 마흔 여덟 짧은 생을 마감한 이태석 신부의 헌신적 삶을 그린 영화 ‘울지마 톤즈’를 보면서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저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 해 보았습니다. 많이 갖고 있으면서도 베풀 줄 모르며, 고위관직에 있으면서도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시대에 그래도 가끔씩 남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소식들을 접하면서 아직도 우리 사회는 살만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 또한 그런 삶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한 없이 부족합니다.
오늘따라 선생님이 너무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께 소주 한잔 올리고 싶습니다.
최재환 선생님과 이현숙 사모님! 정말 감사합니다.
* 함석현(1901 - 1989) : 일제 강점기 김교신등과(성서조선)을 발간 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광복 후 민주화 운동에 헌신.
첫댓글 참 좋으신 멘토 선생님이셨네요 일생에 훌륭한 스승을 만나는것도 행복의 조건이지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씨알 함석헌님을 존경해서 "수평선 -(그의 유일한 시집) ' 죽을때가지 이걸음으로 .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 성서로 본 한국역사 . 씨알의소리 .등 그의 저서를 섭렵하다가 친구결혼식 주례로 오신 선생님을 뵌적이 있었네요 님은 가시고 조국은 아직도 황폐한 정신문화속에서 기근을 겪고 있음이 안타깝습니다
들불처럼 타 오르는 정신 운동이 언제나 이땅의 잡초들을 태워 버릴지 ....
고향을 지키는 님의 가슴에 늘 옹달샘 물처럼 시원한 묵상이 떠 오르시기를 ...
귀한 답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페에서나마 자주 뵙기를 원합니다.
고향 사람들, 황산인. 정말 소중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입니다.
고운 인연이 지속되기를 원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선배님은 정말 멋지고 훌륭하십니다 또한 존경합니다 목포에오시면 최재환 선생님과 이현숙사모님 이상석선배님 정미숙사모님과함께 오찬이나 저녁을 접대하고 싶습니다 멋진분과 만찬은 아주 좋을것 같습니다
동생, 참으로 고맙네. 동문회에 많은 관심가져주시고
선후배들도 두루 보실피니.
건강 조심하고 사업번창을 빌면서 목포에 가면 연락 할게. 안녕.
선배님 저 지금 울고 있습니다...
선생님도 존경 스럽지만 제자도 존경 스럽습니다
은혜를 알고 계신 선배님.....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막 올라오네요~~~
춘기 동생, 우리 삶은 눈물나는 진솔한 이야기들을 통해 진실이 전해지며
자신과 상대방의 삶을 비교하면서 자신도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서울에 있는 동안 보고싶었는데 워낙 바빴다네.
만나는 날을 기약하면서......
감동의 글 감사 합니다. 스승의 은혜가 존경 스럽습니다
이상석 선배님 잘 계시지요 저번 모임때 소달구지에서 처음 뵙었지요 너무 반갑습니다.
가끔씩 인사 드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