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동하는 당우리(堂隅里)
주덕읍지 1114쪽
1. 위치
주덕읍 서부에 위치하며 대체로 동위 127˚ 45‘~127˚ 46’ 30“, 북위 37˚ 00‘~37˚ 01’에 걸쳐 있으며 지형적으로는 뒷동산을 경계로 장록리와 접하였고 서쪽은 설매산을 중심으로 신니면의 신청리와 접하였으며, 남쪽은 요도천을 경계로 신니면 학성마을과 접하였고 북은 자녀올등갱이산 아래 벌미못, 밭자녈못을 끌어안고 있는 형국으로 주덕읍 덕련리와 접하고 있다. 지적상으로 전체적으로 방향 제일 끝자락을 경계로 본다면 당우리 동(東)쪽은 1123번지 밭이고 서(西)는 690번지로 논이다. 남(南)은 농림지역 농업진흥구역에 속한 603번지 논이고 북은 산 4번지로 나타나고 있다. 지형의 변화는 신덕저수지(통칭 용원저수지)가 완공되면서 수리 조합이 생겨 대부분의 밭이 논으로 전환되었으며, 경지 정리로 인하여 수로를 바르게 잡으면서 논이 많이 생겨났지만 지형적 변화는 각 마을의 모습을 새롭게 바꾸어 젊은 연령 대는 고유 지명을 별로 알지 못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2. 연혁
당우리는 본래 충주군 덕면에 속한 곳이었는데 1914년 군․면 통, 폐합시에 당모루(堂隅), 돌모루(石隅), 버들골(柳洞 :上柳洞, 下柳洞), 신대리(新垈里)와 신니면 수청골(水淸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당우리(堂隅里)라 하고 주덕면에 편입하였다. 마을 이름은 원당우(元堂隅), 유동(柳洞), 석우(石隅) 3개 마을이 있다.(당우리 마을 홈페이지에 의하면 당모루(當隅), 당우리(當隅里)라고 표기하였는데 “當” 표기는 오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 마을의 유래를 추론하면 산제당, 즉 서낭당 모롱이가 됨으로 “堂”으로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마을 명칭에 대하여는 산신당 모롱이라는 연혁이 있어서 재론의 여지가 없지만 “堂”이란 의미는 ‘번듯하다’, ‘훌륭한 태도’ 등의 의미를 갖고 있으며, “隅”는 ‘모퉁이’, ‘기슭’이란 의미와 ‘약간 돌아 앉아 있는 모습’이란 뜻도 갖고 있어 “堂隅”를 ‘반듯하게 약간 틀어 앉아 있는 모습’이란 해석도 가능하겠다. 즉 마을 자체가 자급이 가능한 들과 풍부한 용수를 바탕으로 의연하게 터 잡은 마을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3개 마을의 생성 시기는 오래되었지만 6. 25전쟁 시와 충주댐 수몰지역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마을이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특정 성씨가 집성하는 모습은 거의 없으며 제일 많은 성씨가 유동 마을의 성주 이씨 10가구 정도이고, 기타 5~6가구 정도이며 3개 마을 공통적으로 다양한 성씨와 본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윤완섭 소유의 17~18C의 호구단자를 검토해 본 결과 당우리의 중심 마을은 원당우나 석우 마을이 아닌 유동마을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즉 ‘덕면 유동리’ 라는 지명이 나오고 있어 당우 라는 지명은 후대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요도천은 주덕읍의 상징적인 하천으로 자리 매김을 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는데, 특히 당우리에서는 갑신 장마에 대한 얘기가 지금껏 회자되고 있다. 갑신 장마란 1944년 일어난 장마를 일컫는데 이 당시 당우리 쌔께들을 보호하고 있던 제방이 터져 많은 재산상의 피해가 있었다. 들판에 있는 집들은 전부 물에 잠기고 나이어린 이들은 소 등에 얹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3. 현황
(읍지 편찬 조사위원 조사 바탕)
마을명 원당우 유동 석우 계 비고(홈페이지 내용과 비교)
가구 수 45 46 34 125 136가구에서 11가구 감소됨
인구수(명)
남자 48 49 59 156
여자 59 57 49 165
계 107 106 108 321 346명에서 25명 감소됨
Ⅰ. 원당우 마을(元當隅)
1. 마을현황
□ 연도별 마을 인구 동향
호 구 인 구 농가 비농가 계 남 여 계
1989년 55 3 58 129 133 262
1999년 45 3 48 74 83 157
2006년 41 4 45 48 59 107
원당우 마을의 전체 호수는 지속적으로 감소 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특히 1989년과 2006년 3월을 비교해 볼 때 호수의 감소 폭에 비하여 인구 감소의 폭이 훨씬 큼을 보이고 있다. 거의 1/3 수준으로 감소된 것으로 이는 젊은 연령대가 거의 도시로 이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판단된다. 더불어 농촌 경제의 피폐와 국가적인 인구 감소 현상과도 맞물려 나타나고 있다고 보여진다.
원당우 마을은 요도천의 북쪽에서부터 마을까지 넓은 농토를 바탕으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유동 마을과는 달리 과수원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농업을 주로 하면서 한우를 키우는 농가가 4가구이며 육계를 하는 가구도 1가구가 있다.
□ 농경지 현황
내칭이들(일명 쌕쌕이들, 또는 쌔께)을 중심으로 논과 밭 비율이 약 3.5 : 1로 논농사가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사 당시(2006년)에는 새터 앞의 논이 모래 채취로 인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는 모습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실행되고 있겠지만 심층 채취로 인한 지하수의 오염, 복원 시의 매립 토양의 질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될 것이 우려된다.
새터 앞의 산신당 자리의 모래 채취 현장-한쪽에서는 벼가 익어가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굉음과 더불어 모래채취가 한창이다.
□ 원당우 마을 공동 재산
회관 경로당 창고 비고
면적 38.05㎡ 1동 50평 1동 20평 1동 40평
마을회관은 2001년도에 새로이 건축되었다. 마을회관에는 원당우 마을 유일의 구판장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 옆에는 가건물의 형태로 할머니 경로당이 위치하고 있다. 또한 마을회관 뒤편이 서낭댕이, 주막거리로 불리우는 곳으로 옛 한성으로 통행되는 영남대로의 길목으로 번성하던 곳이다.
1967년까지 마을회관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마을 방앗간 방 한 칸을 이용해서 방송시설을 하고 각 가옥마다 스피커를 달아 마을의 공지 사항을 전달하였다. 1978년 현 마을회관 터를 구입하여 마을회관을 건립하여 회의실과 마을 구판장을 두었다. 그러나 마을 사무실이 별도로 있어 불편이 가중됨에 1999년 회관을 재건축하여 현재의 2층 슬라브 건물을 갖게 된 것이다.
공동 재산인 마을 창고는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 1966년에 현 창고터를 매입하여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공동 부역으로 흙벽돌을 찍어 공동 작업하여 건축하였다. 창고에는 마을에 공동으로 필요한 농기구와 애경사시 필요한 기물 등을 보관하였다. 현재는 공동 물품의 보관은 마을회관 3층으로 옮기고 창고는 임대를 주어 활용하고 있다.
4) 경로당
가. 원당우 할머니 경로당
당우리 499~1번지의 조립식 건물로 95년 9월 28일 건립하였으며 면적은 274㎡이고 원당우 마을회 소유이다.
회장 이광영(72세, 당우리 493), 부회장 이장훈(69세), 총무 김순영(67세)외 회원 13명으로 구성되어 2006년 현재 4년째 운영되고 있다. 다른 마을에 비하여 할머니 경로당의 설립이 늦은 이유는 당우리 경로당(할아버지)이 원당우에 위치하고 있어서 별도의 경로당 설치가 현실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현재 경로당이 위치하고 있는 곳도 마을회관의 취사장으로 가건물을 약간 개조하여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경로당 운영상 가장 큰 애로점은 난방 문제이다. 행정적 보조금은 거의 없다시피 하기에 스스로 해결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회원들이 미곡 1말씩을 내어 경비로 충당하고 있는 형편이다. 경로당도 부녀회와 같이 사용하고 있다.
나. 당우 경로당
1980년 3월 당우리 3개 마을의 노인들이 모여 노인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노인정 신축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풍물을 치며 3개 마을을 순회하며 기금 조성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모금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사나 모금액은 당시의 기록물이 분실되어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마을 대동계에서 일정액을 지원받고 이를 시발점으로 하여 노인 자부담까지 포함하여 당우리 502~2번지의 농업협동조합 소유의 대지에 20평 정도의 벽돌 슬라브 건물을 마련하고 초대 회장에 곽희동이 선출되었다. 이후1994년 3월 현 위치에 시비 보조 3700만원, 자부담 1000만원으로 건평 78.28㎡의 시멘트 슬라브 건물이 완공되었다. 2006년 3월 시비 보조금 700만원, 자부담 140만원, 도합 840만원으로 난방 시설을 완공하였다. 현재 회원 55명으로, 매년 대동계에서 30만원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고 있다.
3. 원당우 마을의 빛난 분들
◇ 이극춘(李克春 1705~1762)碧珍李氏 忠肅公派로 通政大夫를 역임하였다.
◇ 이명준(李命峻 1757~1801)벽진이씨 충숙공파로 龍安縣監을 지냈다.
◇ 이승우(李承祐 1781~1846)벽진이씨 충숙공파로 贈嘉善大夫 戶曹參判이다
◇ 이양화(李亮和 1801~1843)벽진이씨 충숙공파로 初名 光洙이고 가선대부 호조참판을 역임하였다
◇ 이용화(李容和 1811~1867)벽진이씨 충숙공파로 통덕랑을 지냈다.
◇ 김창경(金昌璟) : 한학자
◇ 김판술(金判述) 1909년 2월 22일생으로 전 민한당 국회의원과 제 7대 보건사회부 장관을 역임하였고 그의 호는 도암(道庵)이다. 부여사 사당 앞에 기공비가 서 있다. 일본 쿄토대학농림학부를 졸업하였으며 그의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1948~․ 농림부 농정과장 1981~․ 민한당 자문회의 의장
1948~․ 민국당 군산시 최고위원 1983~․ 민한당 고문
1954~․ 제 3대 민의원 1985~․ 민한당 상임고문
1958~․ 민주당 산업부장 1990.03~․ 제1차국제침구학술대회대회장
1960~․ 제 5대 민의원 1986~․ 평화민주당 고문
1961.01~ 1961. 05 제7대 보건사회부 장관 1989~․ 국토통일원 고문
1967~․ 신민당 지도위원 1990~․ 평민당 당무위원회 의장
1967~․ 절두산성당 총회장 1991~․ 민주당 당무위원
1973~․ 근명학원 이사 1997.07~․ 현) 운석기념회 이사
◇ 김영구
본적은 주덕읍 화곡리이지만 당우리 친척에게 편입되어 동거인으로 생활하던 중 6.25 전쟁으로 미혼인 상태에서 출전하여 전사를 하였는데 당시 면민장으로 장례를 치루어 현재 원당우 그리스도의 교회 뒷산에 묘가 있으나 후손이 없는 관계로 애장(아기묘) 취급을 받고 있어 국립묘지로 이장하여 국가가 관리해 줘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당우리 390번지 여운용 67세, 당우리 420번지 (이종상 66세의 증언,)
면민장을 직접 확인한 것으로 두 분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예전에 보훈지청에서 1차 조사를 했음에도 어떠한 후속 조치도 없어 마을에서는 상당히 안타까워하고 있다.
◇ 이종상(1941년 생)
당우리 42번지 거주-가훈은 家傳淸白 世守忠謹이다. 벽진이씨대종회 이사 우천문학사 대표 (현)태극출판사 전무 서울 강동 충북도민회장 재경 충주․중원 향우회 이사
◇ 김병옥
덕신초등학교 6회 졸업 한학 5년간 공부
충주시청 근무-총무계장, 연수동장 역임
충주시청 사회진흥과장, 총무과장으로 근무 중 정년퇴임
◇ 이명배 : 육군 헌병 중령 예편․국가안전기획부 이사관
◇ 김태섭 : 주덕 중학교 졸업, 충주공업전문대학 토목과 졸업
충주시청 근무․지역개발과장 역임, 현재 충주시 최첨단기업도시지원단장
◇ 김동호 : 충주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2년 중퇴
음성사정초등학교로 교직생활 시작, 삼원초등학교 교장 역임 후 정년 퇴임
◇ 곽도곤(郭道坤) : 원당우 한문 서당을 사재를 털어 개설하여 10여 년간 100여명의 후학을 양성하였다.
◇ 이철원(李哲源)
한흥건철주식회사(韓興建鐵株式會社) 대표이사로 서울에 본사를 두고 화성시에 공장을 운영하는 모범적 중견기업을 이끌어 가고 있다.
◇ 김영삼 : 주덕고등학교 교장
◇ 이규하 : 경찰 경감으로 근무 중
◇ 김현섭 (39세)
원당우 마을에서 유일의 화훼 영농가이다. 1,200평 규모로 배양실을 포함한 3개 비닐하우스에서 난(蘭)을 재배하고 있다. 풍란 10만촉으로 시작하였으나 현재는 2개동에 약 7․8종의 서양 난을 재배하여 대규모로 서울 공판장에 경매로 넘기거나 화원에 도매로 판매하고 있다.
◇ 신도식 : 1937년생으로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현대전공이사 역임.
◇ 현태석 : 1938년생으로 고졸이며, 서울여자대학교 기획과장 역임.
◇ 신규동 : 1940년생으로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을 마치고 청학고 교장으로 퇴임하였으며 현재 성균관 서원연합회의 교육위원으로 있다.
◇ 현연섭 : 재경향우회장을 맞고 있으며 한일섬유대표이다.
◇ 김동환 : 충주시총무국장을 역임하였다
4. 마을의 효자, 효부
◇ 유연춘
곽호상의 처로 홀로 계시는 기동이 불편한 시아버지를 십여년 이상 정성 스럽게 병수발을 하면서도 불평보다는 매양 보다 잘 모시지 못한다는 안타까움만 토로함에 마을의 수범이 될 뿐 아니라 효행의 표상이 되고 있어 1978년 3월 10일 주덕 농협에서 효부상을 수상하였다.
◇ 이옥자
정준용의 처로 바쁜 농사 일에도 불구하고 시조부모, 시부모를 모시고 정성스럽게 공경하면서 가정사도 충실하게 꾸려 나갔기에 마을의 모범적인 효열(孝烈)로 모든이의 칭송을 받았다. 1983년 2월 15일 주덕 농협에서 효행상을 수상하였다.
5. 마을의 지명
◇ 원당우(元堂隅)【마을】당우리 행정리 동의 하나. 당우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당모루”, “당우”라고도 한다. 그 관할에 새터, 새반이 있다. (원당우 마을의 전경으로 넓은 들과 설매산 자락, 그리고 요도천이 위치하여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아늑함을 간직한 마을이다.)
◇ 내칭이-들[쌕쌕이들]【들】당우리 남쪽, 요도천 북쪽의 들로 모래밭이라 물이 싹싹 잘 빠진다고 하여“쌕쌕이들” 이라고도 한다.
◇ 당-모루[당우]【마을】→ 원당우, 산신당 모롱이라는뜻이다.
◇ 당-우【마을】→ 원당우
◇ 당우-교【다리】원당우에서 요도천을 건너 신니면 학성으로 가는 다리를 이른다.
마을에서 3번 국도로 연결되는 교량으로 사실상의 당우리 입구가 되고 있다.
◇ 배실-골【골짜기】원당우의 서쪽으로 돌모루와의 중간 지점에 있는 북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이다.
◇ 배실골-소류지【못】배실골에 있는 저수지이다. 배실골 골짜기의 논에 용수를 공급하고 있다.
◇ 산신당-터【들】요도천을 건너는 당우교를 건너면서 100m 직진후 우측으로 100m인 곳 으로 일명 ‘조상거리’ 라고 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경지정리가 이루어진 시기에도 그 터가 둥그렇게 남아 있었으며 당모루의 낮은 구릉이 이 지 점까지 실개천을 끼고 있었고 그 끝자락에 산신당 있었다. 10여 년 전에 산신당터에서 제기가 많이 출토되어 마을의 양식있는 몇 사람이 그자리를 다시 파고 깊숙하게 매장하였다고 한다. 여운용은 (67세 당우리) 직접 매장에 참여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 산지당거리【들】산신당-터 부근을 일컫는 말이다. 산신당거리 라고도 한다. 2006년도 조사당시는 모래 채취를 위해 농사를 포기한 상태였다.
◇ 새들【들】원당우와 석우 사이의 들로 요도천에 새로운 보를 막아서 생긴 들이란 의미 를 지니고 있다.
◇ 새보【보】요도천을 막은 보로 원당우와 석우사이 부근에 있었으나 현재는 흔적을 볼수 없다.
◇ 새-반【마을】원당우에 속한 마을 중 하나이다. 원당우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예전의 4반(班)이었던 말이 음운 변화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일설에는 갑신년(1944)대홍수 때에 새로이 터를 잡았다고 해서 밑받침 반(盤)자와 연관하여 새반이라 명칭한다고도 한다. (여윤용 67세 당우리 390번지 증언)
◇ 새-터【마을】원당우에 속한 자연 마을 중 하나로 원당우의 동쪽에 있으며 갑신(1944)년 장마이후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 서낭-당이【당】농협 창고 서쪽에 있었으나 마을로 변하여 없어졌다. 이 서낭당이 마을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서낭댕이라고도 한다. 현 마을회관 부근을 일컫는다(여운용 67세 당우리 390번지) 또 이 곳은 주막거리라고도 하는데 이는 장록리에서 이 주막거리를 거쳐 돌모루, 요도천 제방을 거쳐 용원으로 나가는, 옛 영남대로의 경유지였다고 한다.(이진우 71세 당우리 501번지)
◇ 쌕쌕이-들【들】→ 내칭이들, 쌕깨라고도 하며 원당우 남서쪽의 들판을 가르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였다고도 하였다. (당우
리 420번지 이진상 53세 증언) 이 곳은 모래가 많아 물이 쌕쌕 잘 빠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2006년)모래 채취가 한창 진행되고 있 어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외딴-터【마을】원당우에 속한 자연 마을 중 하나이다. 원당우 서쪽 들 가운데 있는 웃당모루 마을로 동쪽은 원당우, 서쪽은 석우 마을에 소속되어 있으며 현재 4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주막거리【도로】당우리 경로당 앞쪽, 원당우 마을회관 뒤쪽으로 옛날 이 곳에 주막이 있었고 삼거리를 형성하고 있어 번창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우리 지역을 통과하는 영남대로는 장록리에서 새터마을 앞을 지나 주막거리에서 돌모 루 방향, 요도천 제방 방향으로 나가서 용원(신니면) 방향으로 나갔던 곳이다. 유동 방향에서 넘어오는 도로는 없었다고 한다. 결국 유동 마을은 막혀있는 곳 이었다고 할수 있다.(이진우. 71세 당우리 502번지)
6. 당우마을의 볼거리
1) 원당우 아랫말(당우리 420번지)에 있는 우물
웃당모루의 모든 가구가 이용한 우물로 현재 경지 정리이후 물맛이 변하였다. 아직
우물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예전에는 여름에 시원하면서 달고 겨울에 따뜻하면서 맛이 일품이었다고 한다. 약 10여년 전까지도 이용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이종상 66세 당우리 420번지)
2) 디딜방아간
420번지 담 옆에 위치하였으나 현재 흔적조차 없으며 예전에는 웃당모루 모든 가구가 이용한 유일한 디딜방아였다고 한다. (이종상 66세 당우리 420번지)
3) 서낭당과 산신당
웃당모루의 중간 지점으로 현재 논으로 변화된 곳에 해방 직후까지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경지 정리하기 전에는 작은 실개울이 옆으로 치고 나가던 곳이지만 지금은 흔적을 확인할 수 없고 평범한 논으로 남아 있다. 또 하나는 현 농협 창고 있던 곳에도 서낭당이 존재하였다고 하는데 이 곳 역시 흔적을 볼 수 없다. 특이하게 1개 마을에 2개의 서낭당이 있는 경우를 보이고 있다. (이종상, 여운용) 또한 경지 정리로 현재는 없어졌지만 당모루에서 산신당 터까지 낮은 구릉이 이어지고 있었으며 그 구릉의 끝 자락에 산신당이 위치하고 있었다. 현 위치는 새터 마을의 앞부분으로 조상거리의 남쪽에 해당된다.
4) 새터에 있는 가족묘
해평 윤씨 가족묘로 조선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치만(致晩)을 비롯한 모두 9분을 각기 신니면 추동, 신니면 수청동, 주덕읍 당우리 석우 등에서 이장하여 양지에 소박하지만 깔끔하게 치장한 분묘로 모셨다.
묘비 앞면 : 朝鮮 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海平尹 氏 致晩 配 貞夫人 昌寧成氏 武科 禹善 配 昌寧 成氏繼配 平山申氏 衡求 配 光山金氏 喬榮 配 長水黃氏 之墓
묘비 뒷면 : 이 묘소로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선대 산소를 여기 함께 모신 것으로써 六代 祖父와 配 昌寧 成氏는 忠州市 薪 尼面 楸洞에서, 五代 祖父와 配 昌寧成氏는 薪尼面 水淸洞에서, 繼妃 平山 申氏는 周德邑 堂隅里 石隅에서, 高祖父와 配 光山 金氏 및 曾祖父와 配 長水 黃氏는 薪 尼面 水淸洞에서 이 곳으로 이장함. 서기 2004년 4월 18일 제 27世孫 鎭)
5) 벽진이씨 충숙공파 가족묘원
배실골 소류지 옆 낮은 구릉에 공원처럼 예쁘게 가족 묘원을 꾸몄다.
6) 당우리 교회
당우리 138번지에는 조그마한 교회가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당우리에서 유일한 종교시설이다. 외관상 허술하지만 역사는 30년이 된 교회로 외국인 선교사, 김창복 목사의 목회 활동으로 이어지다가 현재 조순덕 목사(여, 59세)가 신앙 활동을 굳건히 하고 있는 곳이다. 조순덕 목사는 1984년 큰 병을 회복한 후 인천여자신학교, 장로교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대전지역에서 부사역자로 10여년 전도 활동을 하다가 2004년 5월 24일 당우리 교회로 부임하였다. 당시 이 교회의 신자는 단 1명(원당우 정정자 집사)이었으나 2006년 4명의 성도(聖徒)로 확대되었다. 충청북도 내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30여 개소에 이르지만 여성 목회자는 이 당우리 교회뿐이다. 조목사는 20여명에게 목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어 빠른 시일 내에 발전있을 것으로 본다.
7) 부여사(扶餘祠)
김해 김씨 안경공파 부여공 사당이다. 부여공은 증수(增壽)로 자는 인서(仁瑞)이며 조선 성종 20년(1489) 기유생으로 문과 합격이후 통훈대부 부여현감을 역임하였다. 부인은 숙인 안동 김씨이다. 묘는 충주시 신니면 견학에 소재하고 있다. 사당은 새터에 위치하고 있으며 부여재(扶餘齋)라는 재실이 앞 쪽에 있으며 부여사 담장 좌측 밑 부분에는 사당 건립에 의연금을 기탁한 김해 김씨 부여공파 종회에서 세운 비가 있으며 그 옆에는 민한당 국회의원. 보사부장관을 역임한 김판술 기공비(前國會議員 前保社部長官 道庵金公判述紀功碑)가 있다.
부여사는 대종손인 김원섭이 관리하고 있다.
8) 우계이씨 이복남 충신문
1971년 건립된 이 건물은 임란시의 명장 이복남의 사당이다. 현판에 “忠臣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折衝將軍守全羅道兵馬節度使李福男之門 甲申八月日重建”이라 쓰여 있다. 충주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 이영식이 관리하고 있으며 원 정문은 제천 봉양면에 있었는데 돌보는이 없어 허물어져서 현위치로 옮겼다고 함.
이복남은 우계인으로 고려 명장 이의(李薿)의 후손으로 고조 지방(之芳), 증조 광식(光植), 조부 전(戩) 등은 모두 국가의 간성이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금성통판이 되었다. 임진란을 당하여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함에 그 공으로 붉은 비단옷을 하사받고 목사로 승진하였다. 이후 공은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켜 정예 500인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만력 25년(1597) 8월에 왜군이 남원을 공격하자 명의 부총병양원의 구원 요청을 받고 출동하여 포위진을 뚫고 남원성으로 진입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색이 짙게 되자 남원부 청사 대청의 의자에 앉아 부하에게 섶을 가져다 불을 지르게 하여 의연하게 순직하였고 이를 본 왜군들도 무릎을 치면서 충의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남원 충열사에 제향되어 자손들이 춘추제향시 남원충열사로 가서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Ⅱ. 유동마을(柳洞)
버들골(柳洞)의 유래비가 마을회관 앞에 있다. 이에 의하면 “우리 마을은 본래 충주군 덕면의 지역으로 충주에서 서쪽으로 약 15km 지점으로 당우리 당모루 마을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예전에는 버드나무가 많아 버들골(柳洞)이라 하였다.
마을 뒤편에는 겨울에도 따뜻하여 매화가 피는 설매산(雪梅山)이 병풍처럼 마을을 아득하게 둘러싸고 있으며 벌미와 장내미들 문전옥답에는 해마다 풍요로움에 황금 물결치는 곳이다. 우리 마을에는 “조상거리”와 “장고개”, “장내미들”같이 전설이 깃든 지명과 가재잡이하던 “가재골”이 있다. 예로부터 우리 마을은 경로효친 사상이 뛰어나고 46가구 116명 주민 전체가 한 가족같이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정겹게 살아가고 있다. 앞으로 이 아름다운 전통을 후손에게 기리고자 주민의 뜻을 모아 국비 5000만원, 자담 3500만원을 들여 여기에 회관을 건립하다.” 라 하였다.
역사적으로 당우리의 중심 마을은 유동이었다. 현재 확인된 바에 의하면 (석우마을 윤완섭 소유의 호구단자) 17~18C의 단자에는 ‘충주목 덕면 유동리’ 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는 현 당우리를 유동이라고 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며, 또 시기에 따라 ‘제 1 유동리’라고 표기한 것으로 미루어 제 2, 제 3의 유동리가 있다고 유추한다면 당우리보다는 (버들골 유래비)유동리가 중심 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유동마을의 화목함과 협동심은 ‘농림부 장관상’, ‘72년 협동 새마을상’ 등의 마을 단체상 수상으로 확인되고 있다.
최근 유동마을의 발전상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58. 2 : 당우리 농업협동조합 설립. 초대 조합장 이건학 취임
1960. 3 : 흙벽돌 농업창고 건립. 사무실 겸 구판장 건립
1962. 3 : 농업협동조합에서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기와공장 직영하고 개즙 사업을 실시
1962. 5 : 이건학 조합장 서거. 조합장 공적 기념비 건립
1964. 8. 15 : 장록, 덕련. 당우리 농업협동조합 합병. 덕삼 농협으로 창립하고 조합장 김종인 취임
1965. 5 : 도정공장 직영, 농업 창고 2동 건립 * 우수 리동 협동조합 수상(농림부)
1970. 8. 15 : 각 부락의 리동 농협 합병에 따라 주덕농업협동조합으로 합병. 이후 덕삼분소를 개설하고 경제사업을 취급.
1972. 2 : 비료 판매 사업 체결. 육묘 공동 작업 실시
1972. 6 : 이종근 국회의원 선거 공약으로 요도천 당우교 공사 약속
1973. 5~1974. 7 : 요도천 당우교 완공
1973 : 73년도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마을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은수원사시나무 양묘사업을 실시. 마을 안길 정비, 소하천 교량 설치 등 새마을 사업의 최성기 였다.
1980 : 1960년대에는 주로 보리를 재배, 70년대에는 산란계 양계사업이 번창,
1980년대는 24가구가 사과 재배로 전환하여 현재에 이름.
1990 : 당우리 3개 마을의 공동 임야를 일부를 한용식에게, 일부는 중원산업단지에 매각하여 마을 단위로 분배하고 다시 마을에서 호당 등급을 나누어 분배. 그 차익금으로 회관 건립
1990 : 마을 대홍수로 산사태 발생. 이로 인하여 이은생 모친이 매몰되어 사망하였고 이를 계기로 마을 하천 옹벽 공사를 함.
1995 : 국비 지원받아 농기계 창고 50평 건립
1996 : 유동마을과 창동 사이 2차선 기초공사 실시 국비 지원으로 저온 창고 50평, 농산물 집하장 건립
2000 : 벌미들 경지 정리 완료
2001 : 장내미들 밭 기반 조성 사업 실시
2002 : 마을 안쪽들 경지정리 완료. 유동과 창동 사이 2차선 포장공사 완료
2004 : 국비 지원으로 마을 회관 건립
2004 : 유동 마을 진입로 2차선 확․포장 공사 완료
2005. 3. 24 : 국방부와 자매결연. 윤광웅 국방부 장관, 이원종 충청북도지사, 정대근 농협 중앙회장, 이시종 국회의원, 한창희 충주시장, 김일생 37사단장 참석
유동마을은 국방부와 자매결연을 맺어 모범적인 1사1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과정을 살펴보면 2005년 2월경 농협중앙회에서 우리 농촌을 살리자는 캠페인 하에 1사 1촌 자매결연을 전국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 당시 농협 충북지역 본부농촌 복지팀에서 주덕읍에 소재한 농촌 마을을 추천 받았다. 주덕 농협에서 유동 마을을 선정하여 마을 현황을 보고한 결과 처음에는 재정경제부에서 의뢰를 하였으나 선정되지 못하였다.
이후 국방부에서도 자매결연 마을을 모색하던 중 농협중앙회 충북지역 본부에서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국방부에서 실사를 하게 되었다. 국방부 1차 실사는 2005년 3월 2일 국방부 실무진(신형식 중령)과 농협중앙회 농촌사랑팀장 김재기님이 현지 답사하였고 3월 10일 2차 실무진의 재차 실사가 있었고 3월 24일 마을회관 광장에서 윤광웅 국방부 장관, 이시종 국회의원, 이원종 충청북도지사, 한창희 충주시장, 정대근 농협중앙회장, 김일생 37사단장 등이 참여하여 자매결연을 정식으로 맺게 되었다.
2005년 6월 21일에는 국방부에서 농촌 일손 돕기 일환으로 사과 봉지 씌우기, 감자캐기 등의 행사를 벌여 우의를 돈독히 하였고 2007년 어버이 날 행사에는 국방부와 유동 발전회가 공동으로 개최하기로 약속되어 있어 지속적인 자매결연이 이어지고 있다.
2006년 현재 자매결연 심사 대상에서 충청북도 1위를 하였고 전국 농촌사랑 지도자 대회에서 전국 은상을 수상하여 농림부장관 상과 상금 2,000만원을 받았다.
□ 세대주 성씨 별 분석 : 세대주의 다양함으로 미루어 마을이 형성되면서부터 특정 성씨 집단이 중심을 이룬 것보다는 산포되어 흘러들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 중 성주 이씨들이 가장 많다. 이는 유동 마을에 많은 영향을 끼친 박씨부인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즉 영풍군의 부인인 박씨부인의 외손이 성주 이씨로 집성을 이루었으나 현재는 많이 축소된 모습을 보이고 있고 덕련리 조동마을은 아직 성주 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독거노인이 8가구가 되나 자손과 이웃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대체
적으로 편안한 노후를 즐기고 있는 것은 이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 세대주 연령별 조사
분석 : 마을 세대주 중 최고령자는 이종석 옹으로 2006년 현재 연세 90이다. 연령 분포대로 미루어 이 마을은 타 농촌 마을보다는 젊은 연령대인 40대가 17세대로 40%를 차지하고 있어 마을의 활력이 넘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또한 50대의 비율이 현저하게 낮은 것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1970년대의 고도 성장기에 탈 농촌화, 도시 집중 현상과 맞물려 도시로 이동된 모습이 보여 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60대 이상의 세대주가 50%에 육박하는 것으로 미루어 역시 타 농촌 마을과 다름없이 농촌 마을의 노령화가 예외없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인구 현황
2006년 현재
호구인구 : 농가 비농가 계 남 여 계
42 4 46 49 57 106
1가구당 평균 동거인 수가 2.3명으로 핵가족을 이루고 있다.
3) 부녀회
유동 마을의 부녀회는 2005년, 회장 연령을 대폭 하향하여 장년층에서 맡아 적극적이고 활기있는 부녀회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2005년에는 공유지 700평에 공동 작업을 통하여 감자를 200Box를 생산하여 자매결연 기관인 국방부와 직거래를 하여 상당한 소득을 올렸다. 2006년에는 고구마를 식재하여 국방부와 직거래가 예약되어 있는 상태이며 마을 부녀회원들의 공동작업을 통한 소속감과 공동운영비를 마련하여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애향심 등의 부수적 효과를 올리면서 43명의 부녀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4) 유동 발전회 (청년회)
청년회 모임을 발전적으로 재조직한 것이 “유동 발전회”로 회원 상호간의 협동 단결과 지덕을 연마하여 부락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매 짝수 달에 월례회를 가지며 경조사에 적극 참여하여 사회,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매년 어버이의 날을 “유동의 날”로 정하고 경로잔치를 열고 귀감이 될만한 효자, 효부를 표창하는 행사를 개최함에 유동인의 자긍심 고취와 교육적 효과를 동시에 얻고 있다. 지속적인 발전이 기대된다.
유동 발전회 회칙은 다음과 같다.
제 1장 총칙
제 1조 (명칭) 본 회는 “유동 발전회”라 칭한다.
제 2조 (목적) 본 회는 회원의 상호 협동 단결을 도모하고 지덕을 연마하여 마을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 3조 (회원의 구성)
1. 본 회원은 유동 마을 거주자로 구성한다.
2. 회원의 탈퇴 및 이주 시 회원 자격과 모든 지분에 대하여 모든 권리를 상실한다.
제 4조 (사업) 본 회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아래의 사업을 행한다.
1. 마을 발전을 위한 사업
2. 회원 상호간에 친목을 위한 사업
제 2장임원
제 5조 (임원의 구성) 본 회의 임원은 2 인 이내로 한다.
1. 회장 1명
2. 총무 1명
제 6조 (임원의 선출) 회장, 총무는 총회에서 선출한다.
제 7조 (임원의 임무)
1. 회장은 본 회를 대표하며 회의를 총괄한다.
2. 총무는 본 회를 총괄하며 회무를 처리한다.
제 8조 (임원의 임기)
1. 임원의 임기는 2년으로 하고 연임할 수 있다.
2. 보선된 임원이 임기는 전임자의 잔여기간으로 한다.
제 3장 회의
제 9조 (회의) 총회는 정기총회와 임시총회 및 월례회로 구분한다.
1. 정기총회는 1년마다 1월에 개최한다.
2. 월례회는 1년 중 2, 4, 6, 8, 10, 12월에 소집한다.
3. 임시총회는 그 필요성이 인정될 때 개최한다.
4. 총회는 다음 사항을 의결한다.
가. 회칙의 제정 및 개정
나. 임원의 선거
다. 기타 중요사항
제 10조 (의결) 본 회는 총회 및 임원의 의결을 출석회원 과반수 이상의 찬성으로 한다.
제 11조 (재정) 본 회의 재정을 회원의 회비, 찬조금으로 충당한다.
제 12조 (회비의 납부) 회원은 아래의 회비를 납부한다.
1. 월례회비 : 일만원정
2. 특별회비 : 임원회에서 정한다.
제 13조 (회계년도) 본 회의 회계연도는 매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로 한다.
제 4장 경조사
제 14조 (경조금) 회원의 직계로서 아래와 같이 지출한다.
1. 부모 : 200,000원정
2. 자녀 : 200,000원정
3. 회원 : 200,000원정
병문안시에는 찬조를 하지 않는다.
제 15조 (회원의 가입) 입회금 ₩50,000원으로 정한다
□ 할머니 경로당
백운현(82)할머니께서 할머니 경로당을 13년 이끌어 오면서 마을의 어른 역할을 담당하셨으며, 원칙적으로 66세 이상의 연령이 경로당 회원이 되고 있다. 현재 28명의 회원이 있다. 한편 유동 마을은 타 마을에 비하여 젊은 인력이 많은 편이지만 부녀회와 할머니 경로당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채 부녀회원이 곧 경로당 회원이 되고있다. 특히 젊은 부녀회장의 소집 방송에 경로당 회원 한분도 빠짐없이 마을 공동 행사에 참여하는 모습은 연령을 초월한 아름다움이다.
2. 마을의 빛난 분들
◇ 리건학(李建學) 주덕면장, 당우리 리동 농협 조합장, 신덕 수리조합 이사장. 버들골 사립학교에 교사로 3년 여 근무 후 고시를 거쳐 청주 도청 강습소에서 1년 연수, 이어 주덕면사무소 권업주임(산업계장)을 역임 . 해방 직후 민의에 의해 2대 주덕면장으로 근무하면서 대소원역을 주덕역으로 개칭하고, 이류면 대소리 소재의 금융조합을 주덕면으로, 대소원에 위치한 우체국을 주덕으로 이전하는 등의 업적을 남김에 따라 이류면민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이후 공직에서 사퇴하고 수리조합, 농업협동조합 중앙회 활동을 하면서 당우리 농업협동조합을 최우수 농협으로 만들어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재주도 다양하여 시조창에 능하고 시인으로 자필 문집을 손자가 보관하고 있을 정도로 글 솜씨를 과시하였다. 주덕면장 재직 시 주덕중학교 교사를 신축한 것과 덕신초등학교 교사 건립이 평생에 가장 소중한 일이었다고 유언할 정도로 교육적 신념을 가진 분이었다.
◇ 이기하 : 해병대 제 1기 입대. 6. 25 전쟁 시 해병으로 입대하여 함양전투, 진동리 전투, 통영상륙전투, 경인지구의 인천상륙작전 참가, 가리산 전투, 토솔산 지구 전투, 펀치볼 전투, 화진포 전투에 직접 참가한 역전의 용사로 몸으로 애국충정의 길을 걸으신 분이다. 그동안 해병 김포부대장 표창, 해병사령관 표창, 금성 충무 무공 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또한 제대 후 고향을 지키면서 이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유동마을의 정신적 지주로 젊은이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 김종인 : 1928년생. 당우리 268번지
경력 : 주덕초등학교 졸업
50. 7. 29 문경지구 전투에서 부상 후 51년 명예제대
주덕면사무소 근무(51. 3~54. 12. 31)
당우리 농업협동조합 상무이사
덕삼리동농업협동조합 조합장 및 주덕농업협동조합 참사 근무(64. 8~75. 4. 8)
대한상이군경회 충북지부 중원군 분회장(73. 3~94. 12. 31)
대한노인회 충주시지회 주덕읍분회 사무장(93. 1~현재)
포상 : 대통령 표창 3회 (모범원호 대상자, 새마을 훈장, 모범국가 유공자) 충청북도지사 표창(54. 8. 15)
대한민국 상이군경회장 표창 및 공로패 5회(회원복지 및 단체운영 활성화)
농협 중앙회장 새농민협동장 수상
전국 새농민회장 공로상
◇ 이장흠(李將欽 46. 7. 14 생) 주덕읍 당우리 194번지
학력 : 덕신초등학교(8회) 졸, 충주중학교 졸(62년도), 충주고등학교 졸(65년도) 육군대학 졸(79년도)
국방대학원 수료(82년도), 충남대 행정대학원 수료(96년도) 강남대 북한대학원 수료(02년도)
건국대 사회과학대학원 졸업(04년도)
주요 경력(66년 10월 15일 소위 임관~2001년 5월 31일 육군 소장 예편)
국군 제 777사령관(육군 소장)
국방부 북한정보부장(육군 소장)
보병 제 5사단장(육군 소장)
건국대 사회과학대학원 교수
상훈 : 인헌무공훈장(69년도)
월남동성무공훈장(69년도)
미국동성무공훈장(69년도)
보국훈장 삼일장(87년도)
보국훈장 천수장(94년도)
대통령 개인 표창(81. 01년도)
주요 활동
한․미 정보교류회의 한국군 대표(98~00년도까지 7회), 국방부 군사정보위원회 위원장/위원(98~01년도), JSA사건 특별조사위원(98~00년도), 한국군 포로대책위원(98~00년도), 남북 장성급 회담 한국측 대표 활동 지휘 감독(98~00년도), 땅굴 대책 위원장(98~00년도), 한․미 정보협정 체결 한국군 대표 (01년도)
주요 저서 및 논문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중국의 역할(02. 강남대 북한대학원)
합참정보 판단서(00)
북한군 지상군, 해군, 공군 전투 서열(98~00)
21C 안보 위협(00. 국방부)
북한 군사위협 판단(00. 국방부)
대공정보 판단((99~01. 국방부)
북한 도발위협 분석(00).
“국방백서” 안보환경 변화와 도전, 주변국/북한정세 관련 15개 항목
(98. 99. 00)
땅굴 보도 관련 현장 조사 결과 및 조치(00. 국방부/국방일보)
※ 특히 21C 안보 위협과 북한의 군사위협은 현재 국방대학원,
합동참모대학, 육, 해, 공군 대학/사관학교 교재로 활용되고 있음.
※ 상기 문건 외에 다수의 저서 및 논문이 국회 및 NSC에 보고되었으나 비밀로 분류
되거나 안보상 파기되었음. “한국군사문제연구원” 부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 이광흠 (李廣欽 48. 5. 12) 주덕읍 당우리 194번지
학력 : 덕신초등학교(10회), 충주 중, 고등학교(23회), 육군 제 3사관학교(1971) : 우등 졸업으로 국무총리상 수상.
한국 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학과 수료.
체육활동 : 충북 대표 싸이클 선수(1966~1969)로 활동하여 각종 경기 출전.
고교단체 전국 선수권 준우승(1966)을 비롯하여 전국체전 도예선 1위 다수, 시도단위 싸이클 경기 우승 등 활약
경력 : 육군 장교 근무-소령 예편(1971~1984. 7.)
정마기업, 현대정공, (주)영일, (주)원일 등에서 노무, 인사, 총무업무 총괄.
경남 울산 재향군인회 직능대표 및 이사 역임(1990~2005)
상훈 : 국난극복기장, 참모총장 표창, 군사령관, 군단장, 사단장, 우수교관 표창 등 다수.
현대모비스 사장 표창, 그룹회장상, 창원시장 표창, 경남도지사 표창 외 다수.
◇ 이도흠(李道欽 51. 11. 20) 주덕읍 당우리 194번지
학력 및 경력 : 덕신초등학교 졸(13회), 충주중학교 졸(23회), 충주고등학교 졸(26회)
육군3사관학교 입교-소위 임관(73년도)
보병 소대장 및 중대장, 연대 군수장교, 사단 작전장교, 연대 인사참모
보병학교 OAC 수료
육군대학 졸업
육군 3사관학교 특수전 및 전술학 교관
보병 75사단 대대장
상훈 : 국난극복기장 외 3개 기장
대통령 부대 표창 2회
국방부장관 표창
참모총장 및 군사령관 표창 외 20여회 수상
현재 대원종합관리 (주)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 윤진
철도고등학교 졸, 상공부, 공업진흥청 특허과장
◇ 이은자 : 1959. 10. 25일 생 본적이 유동 259번지.
부 이기하, 모 안부승의 3남 2녀 중 넷째로 덕신 초등학교, 주덕 중, 충주여고, 충북대 체육교육과, 건국대 사회과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충북 체육고등학교 단거리부 감독 교사로 재직 중이다.
주요경기 입상경력 :
제 4회 전국소년체전 200m 금, 100m 동을 시작으로 한일고교 대표로 일본고교 선수들과의 시합에서 100, 200m 1위,
1977년 말레이시아오픈 국제대회 100, 200m 1위.
아시아 대표로 독일 세계 월드컵 육상대회 참가,
1978년 제 8회 방콕 아시안게임 200m 2위 입상 경력을 갖고 있는 국가 대표 육상 선수 출신이다.
◇ 김종길 : 우수 새마을 지도자로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 이석종 : 충주공업전문학교 졸업, 현대건설 설비과장
◇ 김천수 : 인하공대 졸업, 대한항공 기획관리실 차장
◇ 이석붕 : 예성여중 교사
◇ 김종찬 : 충주공업전문학교 졸업, 단국대학교 환경공학 박사
경기도청 북부출장소장, 경기도 보건환경 연구원 원장
◇ 이은홍 : 고려대학교 대학원, 엽연초 생산조합 이사(특허 40여종)
3. 마을의 효자 효부
◇ 이은필 : 유동발전회에서 효자상 수상하였다. 유동 마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웃어른에 대한 공경이 남달라 마을 주민들의 추천으로 수상하였다.
◇ 이창하 : 주덕읍의 효자상을 수상하였다.
◇ 이애종(70세) : 유동 마을 전주민이 이구동성으로 효부라고 추천하였으나 본인은 절대 부인하고 있다. 허나 일찍 남편을 여의고 어린 4남매와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여 온 마을의 칭송을 받고 있음은 물론 청, 장년층의 효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만든 분이다.
◇ 고병선 : 충주 향교, 충주시, 주덕 신용협동조합 등에서 효부상을 수상하였다. 38살의 젊은나이에 남편이 군에 입대하여 전사한 후 홀로 시아버지 80, 시조모가 96세로 작고하실 때까지 극진히 봉양함은 물론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시누이 6명, 시동생 2명과 자식 3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 출가시켰다.
◇ 김영숙 : 유동발전회에서 효부상을 수상하였다. 연로하신 시조부모님을 극진히 모셔 마을 주민의 추천에 의해 수상하였다.
◇ 이경문 : 유동발전회에서 효부상을 수상하였다. 시부모님에게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에 감명받은 마을 주민의 추천에 의해 수상하였다.
◇ 박문현 : 유동발전회에서 표창하였다. 시부모 봉양이 극진하여 마을 주민의 추천에 의해 수상하였다.
◇ 홍영옥 : 유동발전회에서 표창하였다. 시부모 봉양 뿐 아니라 마을 어른들에게도 공손한 태도를 보여 모든 이들의 귀감이 된다고 마을에서 추천하여 수상하였다.
◇ 조정순 : 유동발전회에서 표창하였다. 시부모를 깍듯이 모셔 마을 어른들의 격려가 많았으며 마을 주민의 추천에 의해 수상하였다.
유동 마을의 유동 발전회에서는 매년 어버이날을 유동의 날로 정하고 마을의 효자, 효부를 표창하여 그 뜻을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더불어 웃어른 공경에 앞장서는 이 단체의 활동은 인근으로 확대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보이고 있다.
4. 유동마을의 지명
◇ 유동(柳洞)[버들골]【마을】당우리 행정리동의 하나로 당모루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이름하였으나 지금은 거의 없다.행정관할에는 웃말․아랫말․산밑 등이 있다.
◇ 가재-골[가진골]【골짜기】웃말 서북쪽에서 불당골로 이어지는 골짜기. 가재가 많았다고 함. (지도상에는 가진 골이라 함) 예전 이 동 네에서 단오 무렵 한밤 중에 어린아이들이 솜방망이에 불을 붙여 가재잡이를 많이 하였다고 전해지며, 하천정 비를 하기 전, 자연상태의 하천이었을 때에는 천렵 장소로도 최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이기하, 김종인 증언)
가재골은 큰가재골과 작은 가재골로 나누어져 내려오다가 설매산 밑부분에서 합쳐지고 있다. 이 중 작은 가재골은 아직도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반면에 큰 가재골은 하천 밑바닥이 꺼멓게 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큰 가재골은 중원지방산업단지와 연결되어 있어 현재 활발하게 개발이 되고 있는 중이다. 개발과 자연 보호, 그 어떤 것이 옳다고 자신있게 말 할수는 없지 만 설매산의 개발이 큰 가재골에 피해를 주는 것만은 확실하다. 2006년 장마에 토사가 쓸려 내려와 가재골의 과수원과 가재골이 침수 피해를 입었고 지금은 임시로 복구를 해놓은 상태였다.
◇ 가진-골【골짜기】→ 가재골
◇ 규석 광산터【광산】가재골 옆 동산을 말한다. 현재 광 산 사무실의 잔재가 남아있으며 일제시대에 이 곳의 규석을 전량 일본으로 수출하였다고 전해진다. (이기하옹, 김종인옹 증언)
◇ 말똥에미 묫자리【묘】유동마을에서 설매산으로 오르 던 길목에 위치한 묵묘로 설매산에서 나무를 해서 내려오거나 일하다가 쉬는 쉼터 역할을 했던 곳이다. 현재 는 도로 옆에 붙어 있으며 퇴비를 쌓아 놓아서 묘가 있 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아카시아 나무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기하옹, 김종인옹 증언)
◇ 밭자-녈【들】유동 마을 동북쪽에 있는 들
◇ 밭자녈-못【못】밭자녈골에 잇는 못
◇ 백마-산(白馬山)【산】→ 설매산
◇ 버들-골【마을】 → 유동(柳洞)
◇ 벌미-들【들】웃말 북쪽에 있는 들
◇ 벌미-못【못】벌미들 북쪽에 있는 못 이다.
◇ 부엉-재【고개】신니면과 노은면의 삼면 경계 지점으로 노은면으로 넘어 가는 고개로 유동에서 망월을 하던 산이라고 한다.
◇ 불당-골【골짜기】샘탕구렁 서쪽의 골짜기. 절터가 있으며 돌부처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중원지방산업단지 내로 포 함되어 원형을 상실한 형편이다.
◇ 사번디기-골【골짜기】→ 새번디기골
◇ 산-밑【마을】→장터골
◇ 새밭-번던【들】중상골 남쪽의 들
◇ 새번디-기【산】새번디기골 남쪽의 구릉지로 사과 과수원이 있다.
◇ 새번디기-골[사번디기골]【골짜기】장터골 서쪽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짜기
◇ 샘탕-구렁【골짜기】중상골의 서쪽 골짜기로 샘이 있는데 참샘골이라고도 불리웠으며 현재는 망실되었다. 설매재로 이어진다.
◇ 서낭-고개[장고개]【고개】유동에서 용원장으로 가는 고개로 장고개라고 한다. 서낭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 설매-산(雪梅山)【산】유동 북쪽의 높은 산으로 신니면과 노은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산. 겨울에도 따뜻 하여 매화가 핀다고 하여 설매라 하며 신니면에서는 백마산(白馬山)이라고 한다.
◇ 설매-재【고개】설매산에서 신니로 넘어가는 고개
◇ 솟다백이【구릉】벌미못을 지나는 도로 건너편의 과수원을 가르킨다. 박씨부인 장례를 치를 때 솥을 죽 걸어놓고 밥을 하던곳이라고 한다. (이장 이석두씨 증언) 그러나 솟다백이란 곳의 지명이 나타나게 된 것은 대부분 솟대가 있던 곳 즉 소도라는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더구나 이 지역은 덕련리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 위치하여 지리적으로도 소도라 보는 편이 적절하리라 사료된다.
◇ 아랫-담【마을】→ 아랫말
◇ 아랫말[아랫담]【마을】 유동에 속한 자연 마을. 당모루의 북쪽, 웃말 남서쪽의 마을이다.
◇ 웃-담【마을】→ 웃말
◇ 웃-말[웃담]【마을】유동에 속한 자연 마을로 유동의 중심 마을이다.
◇ 유동-골【골짜기】→ 조상거리
◇ 장-고개【고개】→ 서낭고개, 개별적으로 서낭제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부락 제사는 없었다고 한다. 지금은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으며 고갯길이 잘 남아 있다.
◇ 장나미-들[장내미들]【들】아랫말 동남쪽의들. 박씨부인 장사지내던 남쪽 들이라는 뜻이라 한다.
◇ 장내미-들【들】→ 장나미 들 (장사만 78세 유동마을의 증언 : 주덕장이 서기 전 에는 용원 장과 이 당우리 장이 섰는데
이 곳이 장터라고 해서 이름 하였고, 그 당시에는 이 들이 전부 가옥들로 들어차 있었다고 한다)
◇ 장터-골[산밑]【마을】유동에 속한 자연 마을 중 하나 로 웃말 서북쪽에 있는 마을. 세종의 8남 영풍군(永豊君)의 부인 박씨(박팽년의 딸)의 장례 때 조상꾼이 장을 이루었다고 하여 이름 하였으나, 박씨 부인의 묘는 1993년에 이장하였다.
◇ 조상거리-거리[유동골]【골짜기】원당우 북쪽, 아랫말 동쪽 골짜기. 박씨 부인 장례때 조상꾼이 골을 이루었다고 하여 이름 하였다.(유동마을 장사만(78세) : 유동마을의 왕실 집안인 성 주이씨 집안의 할머니께서 돌아 가시자 조상꾼이 들먹거려 이름하였다고 한다)
◇ 주라-골【골짜기】벌미못 북쪽의 골짜기, 박씨부인 묘가 이 곳에 있었는데 이장하였다.
◇ 중상-골【골짜기】팽나무 골의 서쪽 골짜기로 불당골 옆이다. 중이 많이 살던 골이라 ‘중-산골’이라 한다. (이기하. 당우리 259)
◇ 진-등【산웃말】동북쪽에서 설매산(雪梅山)으로길게 이어지는 능선. ‘진등이’라고도 하며 장릉(長陵) 즉 길게 늘어선 구릉이라는 뜻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기하. 당우리 259번지)
◇ 팽나무-골【골짜기】부엉재로 넘어가는 골짜기로 팽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 화살-골【골짜기】아랫말 북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골이 깊다.
◇ 학교마당【회관】옛날 서당 터로 옛 황해진씨 집터, 현 김윤식씨 집터에 있었으나 지금의 회관 자리로 이전 되어 2년 정도 서당이 유지되었고 덕신초등학교가 방죽 안에 설립되면서 서당이 폐쇄되었다. 현재 그 터에 회관이 건립되었다.
◇ 마을회관【회관】홍기원 선생께서 마을회관 부지를 마을에 희사하셨고 이후 이인배 소유의 논과 이동하여 소유의 논을 매입하여 현재의 회관 터를 유지하게 되었다.
5. 마을의 옛 얘기와 볼거리
1) 전설
‘설매산’은 장마가 심하게 져서 솔개미 대가리만큼 봉우리 꼭대기가 남았다고 해서 설매산이고 농협 창고 뒤의 ‘개앞산’(개앞산은 음성의 가엽산, 또는 가섭산으로 불리는 산을 말한다.)은 장마 때 개 대가리만큼 남았다고 해서 개앞산이라고 한단다.-백운현(82세)
2) 동요
“개앞산에 비 들어온다. 마당 쓸어라. 봉당 쓸어라” 라는 동요를 불렀다.
이 노래를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곡에 맞춰 불렀는데 특별한 의미를 갖고 부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장 이석두 증언)
4) 교육
일제시대 김윤식씨 댁 터에 서당이 위치하고 있었다가 서당이 ‘사립학교’(마을주민들 모두 그냥 “사립학교”였다고 말하고 있다. 추정으로는 공립학교가 아닌 사립학교이기에 통상 그렇게 호칭한 것으로 본다)로 바뀌어 4년제로 교육이 이루어졌다. 이 곳에서의 학력은 인정이 되어 4년 수료 뒤에는 주덕공립국민학교 5학년으로 편입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당시 덕신, 용원 초등학교가 설립되었음에도 신니면을 비롯한 인근 지역에서 취학을 하여 한때 학생 수가 100명을 넘었다(백운현 (82), 이기하(80)의 증언)고 하며, 사립학교 원장은 김선흥이었다. 교원의 수는 2 명(이기하 증언-이기하의 부친인 이건학이 교사로 3년 여 근무하였기에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이었다. 이 학교는 해방과 더불어 폐지되었으며 이 터에 약 10m를 이동하여 홍기원 선생이 기증한 터에 마을회관을 건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기하 소유 古書>
○ 詩集 : 15 × 23㎝ 4결
소유주의 부친이신 이건학(李建學)의 시(詩)를 고졸한 해서체로 정리한 책이다. 예당편(蘂堂篇) 83수는 주로 시회(詩會) 에서 지은 시, 회갑 축하 시, 만장 등 평시 에 습작한 시를 정리하였다.
경관을 노래한 시, 다른 이의 시 등을 분류하여 미서유회편(渼西遺懷篇)61수, 운남편(蕓南篇) 26수, 산수편(散穗篇) 85수를 정리하였다. 주로 칠언율시(七言律詩)이다.
○ 삼사결(三師訣) : 15 × 23㎝ 4결
내용은 음양오행법을 중심으로 각종 비결을 정리하였다.
정음정양법(凈陰凈陽法), 12회도(十二會圖), 옥룡자발(玉龍子跋), 구
변수법(九宮變數法), 국사무학논쟁음정양서(國師無學論爭陰正陽
序), 삼사비결(三師秘訣), 옥룡자해(玉龍子解), 중오곤괘본도(中五
坤卦本圖), 감괘구궁변수지법(坎卦九宮變數之法) 등을 해서체로 필
사하였다.
○ 연주시 (聯珠詩) : 15 × 23㎝ 5결
속표지는 당음정선(唐音精選)이라 하였다. 唐의 칠언율시(七言律詩)
160여 수를 해서체로 필사하였다. 표지에 계묘삼월하한수(癸卯三月
下澣修)라 쓰여 있다.
○ 두시(杜詩) : 18.5 × 28.4㎝ 5결
두보의 칠언율시 약 200여 편을 단아한 해서체로 정리하였다. 겉표지
에는 경오 7월 말일 이건호(庚午七月末日 李建顥)라 쓰여 있지만
뒷 표지 내에는 책주 이통정댁 유동(冊註 李通政宅 柳洞)이라 기록
되어 있어 약18~19C에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통신정화(通信情話) : 21.5 × 29.3㎝ 5결
각종 편지 서식을 해서체로 정리한 책이다. 庚午陰九月 二十六日이라고 표지에 쓰여 있다.
홍기원 송덕비
<豐山洪公起元頌德碑>
“홍기원 선생은 서기 1896년에 출생하셨으며 이 고장에서 자수성가하신 청빈의 공복으로 탁월한 교양과 인자한 성품으로 후세들에
게 애향심을 심어주신 향리 발전의 선구자이시다. 평소 강직한 성품을 신조로 근면 절약하여 마련한 소중한 문전옥토를 배움의 전당인 사립학교 부지로 희사하셨으니 바로 이 터(당우리 253의 3번지 543평)가 회관 터가 되어 이 마을 발전의 근원지가 된 것이다.
이 터전에서 유동 마을은 대대손손 영원히 번영될 것이며 선생의 고귀한 애향 정신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저 마을 주민들은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우노라”
홍기원은 주덕면사무소 서기로 유동마을에서 주덕까지 걸어서 출퇴근 할 정도로 검약한 분으로 재산을 모아서 사립학교 터를 기부하였고 지금의 회관 터가 되었는데 현재 회관 터의 반을 희사했다고 한다. 다만 그 이전의 사립학교 터(현재 양계장 위쪽의터)와 이 터를 교환한 것인가, 기부한 것인가에 대한 부분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예전 사립학교 터는 현재 개인 소유지이다. (이기하, 김종인, 이장 이석두 증언)
Ⅲ 석우 마을(石隅)
석우마을 자랑비에 기록된바에 의하면 “석우 마을은 장엄한 돌팍지 동산아래 바우 벼랑 돌아서 돌모루와 임금님(이태조)의 행차 길에 쉬어 갔다는 행궁이 마을을 합쳐 석우라고 부르는 모범 마을이다. 예로부터 인물나고 인심좋고 경노효친의 미풍양속이 전통이
다. 더구나 청소년들은 성적이 뛰어나고 성실 근면하여 밝은 내일을 기약하며 이를 기리고자 동민의 뜻을 모아 이 비를 세운다” 고 하였다. 이 마을에서는 2년마다 정월대보름에 출향인사들을 전부 초청하여 윷놀이 행사를 벌여 애향심을 고취하고 있는데 매번 200여명이 참가하고 있다.
□ 인구 동향 (2006년 4월 현재)
년 도 호구인구 농가 비농가 계 남 여 계
2006년도 34 29 5 34 59 49 108
□ 연령별 인구 현황 (2006년 4월 현재)
여타 마을과 같은 현상으로 노령자가 중심이 된 마을이다. 20세 이하가 전혀 없음은 상당히 심각한 문제로 중원지방산업단지의 준공과 더불어 인구 유입이 기대되고 있지만 중원지방산업단지 설립이 마을에 청, 장년층의 직접적인 인구 증가를 가져올 요인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 직업별 현황 (2006년 4월 현재)
당우리 전체의 경제 활동과 맥을 같이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농사와 더불어 축산업, 과수원이 고르게 분포되고 있다. 돌모루 들에 비닐하우스를 대규모로 설치하여 특용 작물을 재배하는 모습이 많이 있지만 이는 신니면 주민들이 농경지를 빌려 경작하는 것이다. 약간 초점을 돌려보면 석우 마을은 주민의 노령화로 전통적인 농경 방법에만 주로 의존하는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5) 청년회
연령층이 고령화 됨에 따라 석우마을에는 청년회 조직이 와해되었다. 젊은 연령이 50대이다 보니 조직이 운영될 수가 없었다.
2. 마을의 공업화 현황
1) 중원지방산업단지
2005년 4월 21일자 연합뉴스를 보면 (주)중원지방산업단지(대표 오지용)는 21일오후 현장에서 사업시행자와 관내기관, 단체 관계자, 주민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산업단지 조성사업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갔다고 알리고 있다.
이 일대는 1997년 지방산업단지로 지정돼 조성사업을 추진하려 하였으나 외환위기와 장기간 이어진 경기침체 등으로 지연돼 2003년 5월에서야 실시 계획 승인을 받아 토지 매입을 완료하였으며 이 날 착공하게 되었으며, 산업단지는 34만㎡ 규모로 200억원을 들여오는 2006년 6월 말까지 조성될 예정으로 전자, 기계, 섬유의복 등 저공해 업종의 기업을 유치, 약 2500여명의 고용 효과가 기대되는 단지이다. 특히 주변에 2005년 하반기에 충주첨단산업단지가 착공될 예정이어서 충주시의 경제 인프라 확충과 산업구조 고도화에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충주시는 단지 진입도로와 용수공급, 폐수처리시설 화보를 위해 국가 예산 확보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에 대한 사업투자 계획을 정리한다.
가. 제 3차 도종합계획 투자계획 관리카드
① 중원지방산업개발단지 개발사업-제 3차 도종합계획 투자계획
② 위치 : 충주시 주덕읍 당우리 산 2-1번지 일원
③ 사업 면적 : 377,700㎡(114,253 평)
④ 사업 기간 : 1997. 6~2007. 6
- 지정 고시일 : 1997. 6. 19 (충청북도 고시 제 1997-53호)
- 실시 계획 승인일 : 2003. 5. 19 (충주시 고시 2003-39 호)
⑤ 사업 시행자 : (주) 중원지방산업단지 대표 오지용
⑥ 유치업종 : 전기․전자, 기계 및 조립금속, 섬유․의복, 화학 및 기타화학, 기타 제
조업
나. 중원지방산업단지지정(개발계획)변경 승인 고시 - 충청북도 고시 제2006-33호
충청북도 고시 제 2005-45(2005. 4. 22)호로 지정(개발계획) 변경된 중원지방 산업단
지에 대하여 산업입지 및 개발에 관한 법률 제 7조의 규정에 의거 지정(개발계획)변경
승인하고, 같은 법률 제 7조의 3 규정에 의거 다음과 같이 고시합니다.
2006년 3월 24일 충청북도지사.
□ 산업단지의 명칭․위치 및 면
○ 명칭 : 중원지방산업단지
○ 위치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당우리 일원
○ 면적 (변경)
기 정 변 경 증 감 비 고
343.482㎡
(103,903 평)
377,700㎡
(114,253 평)
증 34,218㎡
(10,350 평)
․입주 수요자 증가로 부지 편입
․효율적인 토지이용 계획 변경
1164
중원산업단지 조성지
□ 산업단지의 지정 목적(변경 없음)
낙후된 충주권 일대의 산업시설용지 수요에 대처하고 수도권내 기존 공장들을 이전
시켜 집단화, 계열화함으로서 환경오염을 최소화하고 지역경제 활성화를 도모.
□ 산업단지 개발사업의 시행자(변경 없음)
(주) 중언지방산업단지 대표 오 지 용
□ 산업단지의 개발기간 및 방법
○ 산업단지의 개발기간 (변경)
- 기정 : 1997년 6월 25일~2006년 6월 30일
- 변경 : 1997년 6월 25일~2007년 6월 30일
○ 산업단지의 개발
방법(변경 없음) : 민간 개발 (실수요업체 개발)
□ 주요 유치업종 및 유치업종 배치 계획
○ 주요 유치 업종(변경 없음)
- 전기․전자, 기계 및 조립금속, 섬유․의복, 화학 및 기타화학, 기타제조업 설
매산 자락의 산업단지 현장
○ 유치업종 배치 계획(변경)
업 종
기 정 변 경
증 감(㎡)
면 적(㎡) 비 율(%) 면 적(㎡) 비 율(%)
계 171,218 100 211,919 100 증 40,701
섬유․의복 18,470 10.8 18,470 8,71 -
화학 3,470 2.0 3,929 1.86 증 459
기타화학 7,574 4.4 7,574 3.56 -
전기․전자 68,418 40.0 68,418 32.28 -
기계 및 조립금속 43,489 25.4 55,753 26.3 증 12,264
기타제조업 29,797 17.4 57,775 27.25 증 27,978
2) (주) 헤파가드 충주공장
Hepaguard Company Group(HCG)은 아시아에 연구 개발의 기초를 둔 기술과 자
원을 바탕으로 한 제약회사와 생명공학 간의 힘 있는 결합체로서 빠르게 변화하고 있
는 의료 보건 환경에 중추적인 역할을 단당하기 위해 설립한 회사이다. HCG의 주요
목표는 간질환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밝혀진 Euphorbiaceae과의 식물들 중에서 한
국산 진주초를 원료로 한 생약제재의 개발에 두고 있다. HCG는 서울, 홍콩, 타이페이
에 회사가 설립되어 있으며 한국과 대만에 연구소를 두고 있다. 한국에는 KGMP기준
에 적합한 시설을 갖춘 제조공장을 갖추고 있으며 HCG는 한국과 홍콩의 투자로 1997
구 분 품 목
환경기계
뜰채식 스컴 스키머(특허),
수처리 기계, 중형 소각로, 건조기, Oil Refining Plant.
집진기(E. P. Bag Filter)
운반기계 조립 및 이송 컨베아. 곡물이송엘리베이터. RACK. 대차류
철 구조물 기계가대. 보도육교. 수문류. 압력수관. 건축철물.
건설기자재
TOWER CRANE. LUFFING CRANE. STEEL FORM.
(TURN FORM). PC MOULD
년 설립되었으며 한국에 Headquarterrk 있다. (주)헤파가드 충주공장은 2004년
Clean사업장 인증서를 받았다.
□ 연혁 : 1997. 7. 25 법인 설립
1999. 6. 1 홍콩법인 Sea prince사 출자로 외국인 투자 기업 등록
1999. 9. 10 충주공장(KGMP. 우수 의약품제조관리기준 적격업체)인수
1999. 12. 9 벤처기업지정(2001.6.19, 2003.7.30 재지정)-서울지방중소기업청
2000. 2. 22 ‘신약 탐색 및 개발 기술’에 의한 조세감면 결정-재정경제부
2000. 12. 12 국가 병역특례 업체 지정-병무청
2002. 1. 11 우리기술투자(주) 투자 유치
2003. 3. 19 천연물 생약제제 헤파가드정 품목허가 취득-식품의약품안전청
□ 충주공장 : 충청북도 충주시 주덕읍 당우리 809번지에 위치하며 1995년 한유약품으
로 준공되어 1999년 헤파가드로 법인 변경이 되면서 공장을 인수하였다. 공장의 면적
은 대지 1600평, 건물 352평으로 총 18명의 인력이 종사하고 있으며 인력의 대부분은
충주지역에서 공급되고 있다.
3) 진원인더스트리(주)
(2006년 4월 현재, 단위 :개소)(2006년 4월 현재, 단위:개소) 본사는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3동 666-11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장은 충주시 주덕읍 당우리 825-3번지
에 있다. 생산하여 주로 수출하는 품목은 공기 주입식 오일펜스, 고형식 오일펜스, 영구
설치용 오일펜스, 유흡착제, 고무보트, 포터블 물탱크, 오일스키머, 기타 해양오염방제
장비 및 기자재이며 주요 수출국은 루마니아, 태국, 캐나다, 일본, 이태리, 베트남, 프랑
스, 미국, 독일 등이다.
4) 대로산업(주)
충주시 주덕읍 당우리 899
1998. 9. 1일 대로산업(주)를 설립하여 2000년 공장이 준
공되었다. 대지 약 3,500평, 건평 300여 평에서 생산되는
품목은 다음과 같다.
□ 대로산업 주 생산품 (2006년 4월 현재, 단위 : 개소)
1166
S.C.P 항타선. DRAIN재 매설선 및 진공 PUMP UNIT.
산업기계
AL 용해로 및 탕도, 제강공장 건조기, 분쇄기, 유압 LIFTER.
턴디시, 레들 카바.
기 타 발주기 및 발주대(특허 보유), 전용기, 공장 건물 LIFTING.
* 특히 주생산품인 TOWER CRANE 용 TURN TABLE은 대로산업이 최초로 국산
화에 성공한 것으로 국내 2번째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회사의 연혁은 다음과 같다.
□ 대로산업 (주) 제공
일 시 내 용 비 고
1980.08.01 대로산업 설립
1989.09 ~
1990.07
새한미디어(주)아일랜드 현지공장 신설 참여 12명 파견
1990~1991 제일제당(주) 생활화학 공장 신설참여
1992.11 남동공단 2단지 입주 250 평
1993 한양공영(주), 금강정공(주) P.M.HOIST 국산화 참여 1,000대 이상
1995~1998
금강정공(주), (주)삼목 LUFFING CRANE 국산화 참여
대우중공업(주), 금강전공(주) TOWER CRANE 국산화 참여
1995.11.17 경마용 발주기 충격흡수장치 실용신안 획득
1995.11.17 경마용 발주기 방향회전장치 실용신안 획득
1998.05.19 한전 수화력 발전설비 정비 적격업체 인증획득
1998.09.01 대로산업 (주) 법인 설립
1999.02 ISO 9002 인증 확대
2003.03 충주공장 이전 3,500평
2005.03 GM대우 KD품 수출용 스틸케이스 제작
이 회사에 근무하는 인원은 15명으로 거의 충주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5) 광진산업(주)
주덕읍 당우리 900-1
주 생산품은 나일론사, 지퍼사, 재봉사이며 인력은 30여명으로 생활 근거지는 신니면이
대부분이다. 2000년 4월 설립된 회사이다.
3. 마을의 빛난 분
◇ 이명렬(李銘烈) : 주덕면 당우리 670번지 (1926. 1. 21~2005. 11. 16)
본관 덕수(德水)이고 호는 금석(錦石)이다.
1939. 용원초등학교 17회 졸업
1944. 충주농업고등학교 12회 졸업
1946~1991. 용원초등학교에서 교육자의 길 시작하여 앙성, 엄정, 가금, 원월, 용원, 금
가, 동락, 대전, 소태, 덕신, 동락 초등학교에서 근무
1998. 충주노인대학장 역임
한시 금석 시집 1, 2권 발간.-유위적 인생 추구에 시작 또는 시에 접함보다 더함이 없음과 자신과의 조우, 자기 수련과 가치 추구의 길 등 인생성찰을 서문으로 삼았다. “착한 마음, 바른 행동”을 교육 이념으로 삼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우직하게 외길 45년을 이 사회 동량인 제자 사랑과 육영에 헌신하였다. 그 공으로 교육공로 훈장과 모범공무원 표창 등을 다수 수상하였다.
◇ 윤원진
용원초등학교 졸업
주덕중학교 19회 졸업
서울로 진학
현) 신한은행 올림픽선수촌 지점장
◇ 손정숙(64세)
당우리 376번지 거주, 요즘 젊은 세대 가 잊어가는 근면, 자조, 협동을 바탕으로 새마을운동을 생활화하여 끊임없이 부녀회 활동을 통한 지역사회 발전과 의식의 전환을 모색하는 한편, 세월을 초월한 봉사와 희생을 실천하여 주덕읍 부녀회를 활성화 시킨 분으로 평가받고 있다.
80. 1. 석우마을 부녀회장
81. 2. 13 주덕면 새마을 부녀회 부회장
94. 1. 중원군 새마을 부녀회 회장 역임
95. 8. 1~97. 6. 30. 제 7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충주시 협의회원
97. 1. 충주시 새마을 부녀회 회장
2000. 1~현재. 새마을 사랑모임 회장
현재 주덕읍 자치위원회 부회장
수상 경력
1990. 4. 20 도지사 표창
1991. 12. 10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 상패
1993. 12. 1 내무부장관 표창
1999. 12. 6 대통령 표창
2000. 2. 10 충주시 새마을 가족 공로패 수상
◇ 여운영
건국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주농회 설립 초대회장
주덕농협 이사(1998~2005)
제 8회 영농수기 대상(1991년, 농민신문사)
◇ 정일승(42세)
당우리 423번지-현 충주시 친환경 농업인 연합회 사무국장
정일승은 현재 우렁이를 양식하여 시내에 공급하면서 논과 밭에 우렁이 농법을 적용하고 있다. 우렁이 살은 시내 음식점에 공급을 하고 남은 우렁이 껍질과 내장 등은 천연 비료로 사용하여 복숭아 재배를 실험하고 있으며, 친환경 농업을 위하여 우렁이를 공급한 논의 면적은 2007년에는 170만평 정도 공급 예정이라고 한다.
◇ 문경순(김현경 부인 77세, 당우리 782번지)
남편을 여의고 시부모님 공양이 극진하여 효성스러움이 인근에 자자하였으며 중원군에서는 어버이날을 맞아 효부로 표창하여 귀감을 삼고 있다. 현재는 3남매도 다 출가시키고 홀로 생활하고 계신다. 표창장 등의 자료는 10여 년전의 가옥 붕괴로 인하여 매몰된 상태이어서 현존하는 것이 없다. 현재 독거노인의 상황이면서도 이웃의 도움으로 편안한 생활을 즐기고 있다고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활기 있는 모습을 보이고 계신다.
◇ 이항열 : 철도고등학교 졸업. 육군 대령 예편
◇ 이종혁 : 농협 중원군 지부 주덕출장소 근무. 중원수리조합장역임
4. 마을의 지명
◇ 석우(石隅) [돌모루, 바위모퉁이]【마을】당우리 행정리․동의 하나. 원당우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동남쪽 마을 모퉁이에 바위가 있다는데서 유래하였다. 행궁 이 마을도 이 행정 관할로 있다.
◇ 갬보 【보】새보 밑에 요도천을 막은 보를 일컫는다. (당우리 420번지 이종상 66세 증언)
◇ 공동-묘지【묘】두모골과 참샘골 사이의 남쪽에 있다. 일제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 공말 【마을】서편 돌모루 마을의 뒤쪽을 일컫는다.
◇ 돌-모루【마을】→ 석우, 바위 모퉁이를 중심으로 동. 서로 형성된 마을을 일컫는다.
◇ 돌모루-들【들】돌모루 마을 남쪽(앞)의 들.
◇ 돌팍-재【고개】행궁이 마을 동북쪽에서 유동으로 넘어 가는 고개. 현재 우거진 숲에 가려 기능을 상실하였다.
◇ 돌팍-지【바위】돌팍재에서 두모골로 넘어가는 산마루에 있는 너른바위로 현재는 삼림이 우거진 상태여서 확인이 힘들지만 40대 이상의 지역 주민들에게는 친근한 장소로 기억되고 있는 곳이다.-이곳에서 도자기 파편 등이 많이 출토 되었다고 한다. (이종상 66세 당우리 420번지)
또한 돌팍지에 소나무가 우거지면 큰 인물이 난다고 전해진다. (석우마을 정일승)
◇ 두모-골【골짜기】행궁이 마을 서북쪽의 골짜기로 박정희 시대의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밀가루를 지급하면 서 논, 밭을 일구도록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농지 정리가 되고 헤파가드 공장 위쪽의 두모골 소류지란 방죽이 있어 농업용수가 해결되어 기계화 영농이 이루어지고 있는 긴 골짜기이다. (석우마을 이장 이수범(53))
◇ 두모골-소류지【못】두모골 중간에 있는 못이다.
◇ 뒷-동산【산】돌모루를 감싸고 있는 북쪽 산.
◇ 바위-모퉁이【마을】→ 돌모루
◇ 새봇-들【들】돌모루의 남쪽과 요도천 북쪽에 있는 들.
◇ 소득원-도로【도로】원당우에서 돌모루 앞으로 이어 지는 도로로 봇들을 따라 새로 개설하여 소득이 증대되었다고 한데서 명칭이 유래되었다.
◇ 솟다-백이【골짜기】‘쇳대-백이’라고도하며 골짜기 끝부분에 작은 동산이 있고 이산 정상에 돌팍지 라는 너른바위가 있고 그 밑 부분인 이 곳에서도 자기 파편과 와당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전해진다. (당우리 390번지 여운용 67세 증언)
◇ 시작-골【골짜기】행궁이 마을 동쪽의 작은 골짜기로 산에 오르는 출발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현재 버섯장이 골짜기 입구 부분을 가로막고 있다.
◇ 외딴-터【마을】석우에 속한 자연 마을 중 하나로 돌모루 남쪽 들 가운데 있는 서쪽 마을인데 동쪽은 원당우에 속한다.
◇ 큰배실골 【골짜기】돌모루의 동쪽에 위치한 골짜기이다.
◇ 배실골 소류지【못】큰 배실골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제법 큰 방죽이며 그 옆 작은 구릉에는 벽진 이씨 충숙공파 가족묘원이 잘 정비되어 있다.
◇ 작은 배실-골[솟다백이]【골짜기】배실골의 서쪽 작은 골짜기로 일명 솟다백이라고한다. 그러나 석우마을 이장 이수범에 의하면 작은 배실골은 원당 우에 속하는 곳으로 현 당우리 교회 뒤편의 골짜기를 말한다고 증언하고 있어 혼란이 있으나 쇳대백이를 답사한 결과 이수범의 증언이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 참샘-골【골짜기】행궁이 마을 서쪽의 골짜기로 신니면 수청골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 참샘-골【내】참샘골로 흐르는 개울
◇ 행궁-이(行宮-)【마을】석우에 속한 자연 마을중 하나로 돌모루 서쪽에 있는 마을. 조선 태조(太祖)가 쉬어간 곳(行宮)이라고도
하고, 태조의 비가 이곳을 지나다 병이 나서 며칠 머물다 갔기에 행궁이라는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마을의 일부 사람들은 ‘항궁이’라고도 한다.
5. 마을의 전설과 문화재
1) 전설
가. 솟다백이 구렁 :
큰 배실골 옆의 솟다백이 구렁은 본래 벼 수확이 100석인지 쌀100가마인지는 모르지
만 아주 큰 부자가 기와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잘되려고 그랬는지 뭔지는
모르지만 그 집의 소가 송아지를 떡 낳았네. 경사 난거 지. 그런데 그날 밤 호랑이가 나
타나서 송아지를 물어 갔데. 그런데 이상하게 그 다음부터 그 부자네가 점점 재물이 없
어지더니 결국 망했다는구만. 그래서 나 어렸을 때는 놋그릇 닦으려면 그 곳에 가서 기
와 조각을 찾아와서 곱게 갈아서 썼어. 지금은 밭으로 하도 트렉터로 갈아서 기와 조각
은 구경도 못혀. 그 옆 산이 소가 누운 형상의 와우형인데 해평 윤씨 내 9대조 선조 묘
를 소 젖꼭지에 해당되는 곳에 묘를 썼지. 다들 명당이라고 해. (윤완섭)
나. 망덕굴 : 돌모루 마을 뒤에 망부석들이 많이 있었는데 어느 때 큰 장마로 다 떠내
려가서 만덕굴이라고 해 (석우마을 윤완섭)
그보다는 어느 집안에서 아버지 묘를 쓰는데 상주들이 어찌나 못되게 구는지 지관이
참다 못해서 아무 곳이나 터를 잡아 주고 떠났는데 그 후 그 집안이 점차 망해서 망덕
골이라고 하는거여. (유동마을 장사만 78세)
2) 윤완섭(71세, 당우리 376번지) 소유의 유물
가. 술잔
선조(어느 분인지는 명확치 않다)께서 청에 사신으로 갔는데 청 황제가 사신인 선조
께 술과 술잔을 하사하셨다고 전해진다.
제11장 당우리(堂隅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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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을 보면 겉 뚜껑은 정교하게 조각된 모습이지만 2/3
이상이 파괴된 모습으로 10×6㎝이며 내피는 매끈하게 돔형
으로 옷칠이 되어 있으며 그 안에 술잔과 받침이 들어 있다.
밑부분은 접이식으로 경첩이 달려 있어서 내․외피를 벗기
지 않고서 술잔을 꺼낼 수 있도록 하였다. 크기는 16×11㎝
이다. 술잔은 장수를 상징하는 복숭아 모양으로 가벼우면서
단단한, 맑은 소리가 나는 재질로 옷칠이 되어 있고
11.5×9.5㎝이다. 잔 받침은 단단한 재질로 역시 옷칠이 되어
있으며 잔을 올려놓도록 복숭아 잎 모양을 조각하여 받치
도록 하였다. 크기는 밑 부분이 14.5㎝이며 꽃잎 받침의 높
이는 약 2㎝정도이다.
나. 고문서
① 敎旨 :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윤춘수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자 만력삼십삼년(1605년) 칠월이십삼일 호성
원종 공신삼등 의전추증
(贈 通政大夫 承政院 左承旨 兼 經筵 參贊官 尹春壽
贈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義禁府事者 萬曆三十三年
七月二十三日 扈聖原從 功臣三等依 傳追贈)
② 교지 : 숙부인 김씨 위 정부인자 만력 사십이년십일 월십구
일(1614년)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경 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 제학 예문관 제학 세자좌부빈객 윤경처 의 대전
경대직
(淑夫人 金氏 爲 貞夫人者 萬曆 四十二年十一月十九日
贈 嘉善大夫 吏曹參判 兼 同知經筵 義禁府 春秋館 成均
館事 弘文館 提學 藝文館 提學 世子左副賓客 尹坰妻 依大典徑大職)
․교지 : 윤경 위 통훈대부 행자여도찰방자 강희삼년육 월이십이일(1664년)
(尹坰 爲 通訓大夫 行自如道察訪者 康熙三年六月二十 二日)
③ 호구단자 : 강희(康熙) 5년 5월(1666년) 한성부 동부
창 선방계호적단자 호 통훈대부행자여도찰방(漢城府 東
部 彰善坊契戶籍單子 戶 通訓大夫行自如道察訪) 윤
경(尹坰 당시 60세)의 단자이다. 결재를 지방처럼 수령
이 아닌 당상과 낭청이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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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유씨 재실
․ 호구단자 : 강희(康熙)20년(1681년) 신유년(辛酉年) 충원현 덕
면 제 1유동리 제 7통 제 4호(忠原縣 德面 第1 柳洞里 第7統 第
4戶) 통덕랑 윤세휘(通德郞 尹 世徽 당시 56세)의 단자이다.
․ 호구단자 : 옹정 원년( 1723년) 충원현 덕면 제 1유동리 제 5통 제
2호(忠原縣 德面 第1柳洞里 第 5統 第2戶) 통덕랑 윤전(通德郞 尹
전 당시 46세)의 단자이다.
․ 호구단자 : 건륭(乾隆) 3년 (1738년) 무오(戊午) 충주목
덕면 제 1유동리 제 5 제 3(忠州牧 德面 第1柳洞里 第5
統 第3戶) 통덕랑(通德郞) 윤전(당시 63세)의 단자이다.
․ 호구단자 : 건륭(乾隆) 9년 (1744년) 갑자(甲子) 충원현 덕면
제 1유동리 제 5통 제 2호(忠原縣 德面 第1柳洞里 第5統 第2
戶) 유학 윤득필(幼學 尹得弼)의 단자이다.
․ 호구단자 : 건륭(乾隆) 21년 (1756년) 병자(丙子) 충원현
덕면 유동리 제 2통 제 4호(忠原縣 德面 柳洞里 第2統 第
4戶) 유학 윤득필(幼學 尹得弼)의 단자이다.
․ 호구단자 : 건륭(乾隆) 52년 (1787년) 병오(丙午) 충주목
덕면 제 1유동리 제통 제 4호( 忠州牧 德面 第1柳洞 里
第3統 第4戶) 유학 윤서동(幼學 尹瑞東 당시 58세)의 단
자이다.
․ 호구단자 : 건륭(乾隆) 60년 (1795년) 을묘(乙卯) 충주목
덕면 유동리 제 1통 제 5호( 忠州牧 德面 柳洞里 第1統 第
5戶) 유학 윤봉렬(幼學 尹鳳烈 당시 46세)의 단자이다.
3) 진주 유씨 재실 : 당우리 376-4번지(돌모루)
충주 댐 수몰지역(제천시 청풍면 대류리 소재)
에 있는 선 조 묘를 정비하고 시향을 지내기 위
하여 1981년 건립하였다. 형태는 남향으로 ╔╗
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유해용(56세, 당우리
376-4)의 소격서 참봉을 역임하신 12대 선조부
터 모시고 있다.
6. 석우 마을의 문제점
1) 논에서의 모래 채취
이는 비단 석우 마을의 문제점만은 아니다. 당우리 쌕쌕이들, 돌모루들, 새봇들 곳곳
에서 모래 채취가 성행하고 있으며 모래 채취업자들의 불성실한 뒤처리, 업체의 부도
로 농민들의 피해가 증가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깊은 모래 채취로 인하여 농업용
수의 고갈 현상을 초래하였고, 이에 대한 관청의 미온적인 대처로 주민들의 불만이 고
조되고 있는 실상이다. 농업용수 및 식수 해결을 위하여 관정을 새로이 개발해야 하는
문제점도 노출되고 있다.
2) 고령화
석우마을의 고령화는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독거노인의 수가 급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이들에 대한 사회 복지정책이 미흡하여 마을의 공동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석우 마을의 독거노인의 수는 전 세대의 1/3 수준에 이르러 의식있는 주민
들이 깊은 우려를 보이고 있다.
3) 중원지방산업단지
중원지방산업단지 충청북도 및 충주시에서 허가하여 설매산 남쪽 기슭을 절개하며
산업부지를 정리하고 있다. 이 것이 완공되어 산업체의 입주가 시작되어 정상적인 가
동이 원활하게 진행이 되었을 경우 충주시로서는 상당한 이익이 될 수도 있겠지만 석
우 마을의 주민 대다수는 이 부분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즉, 중
원지방산업단지 자체가 석우 마을에 주는 혜택은 전혀 없이 오히려 현 개발 단계에서
산허리를 잘라 단지 조성을 함에 따라 마을의 모습이 흉하게 변하였음은 물론 2006년
여름 장마 시에는 토사가 흘러내려 석우 마을의 수로를 막아 위험한 경우를 당하였으
나 이에 대한 사후 대책이 전연 없는 형편이며, 2010년 이후 30여 업체의 입주 예정이
나 그 시점에서의 석우 마을은 업체에 취업할만한 연령이 전혀 없기에 마을 소득 향상
과도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판단되고 있다. 또한 현재 농가 소득을 위하여 마련된 소득
원도로가 중장비 차량 및 과적 차량으로 인하여 파손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적절한 대
책이 없는 상태여서 더욱 석우 마을 주민들은 산업단지 조성에 부정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4) 마을회관의 이용도
타 마을에 비하여 마을회관의 이용도가 낮다. 대통령 하사금과 마을 주민들의 인력
으로 지어진 마을회관의 현관에는 ‘석우마을 원로회’. ‘대한노인회 충주시지회 주덕읍분
회 석우경로당’의 현판과 더불어 회관 공터 옆에는 마을자랑비가 있지만 마을회관은
황폐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더불어 회관 이용도가 낮아지면서 마을의 융합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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