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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원 차유황 목사 소전
사마리탄 운동의 기수
차유황은 전주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운동을 창설한 평신도였다. 신학자도 목회자도 아닌 차유황의 기독청년운동은 전주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기독교단체였다. 그가 배출한 수백 명의 사마리탄 회원들은 세계 각처에서 활동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전북이 낳은 목원 차유황 목사의 삶과 신앙의 역정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성장
차유황은 1918년 5월 30일 전북 김제군 수유면 성계리 176번에서 아버지 차인명과 어머니 김인덕 사이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 어머니로부터 많은 사랑과 교훈을 받고 자랐다. 그는 어머니를 “신심과 자비의 마음을 깃들 게 하고 생명의 존귀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신 가정교사”라고 했다. 13살 어린 나이에도 10년간 병을 앓는 아버지에게 개울물을 막아 벼를 심고 수확하여 그것으로 약을 사드릴 정도로 효성이 지극했다.
초등하교 5학년 때 원선종이라는 친구가 전학을 왔는데 그의 외삼촌과 차유황의 고모부 김동규가 독립투사여서 그들에게 민족의식을 깨치게 되었다. 그때 큰 뜻을 이루려면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으로 통신으로 공부하며 1933년 여름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친구와 함께 상경했다. 서울에서 고학을 하며 가입한 단체가 이상재선생이 설립한 ‘갈돕회’(갈한 것을 서로 돕는다는 고학생 상부상조 단체)였다.
1934년에는 기독교로 귀의 했으나 고학이 너무 힘들어 큰 형에게 학비지원을 부탁하려고 6월에 고향에 내려갔다. 형은 학업을 중단하고 농사일을 시키려고 결혼을 종용했다. 결국 책임감 없이 정읍군 옹동면 칠석리 동갑내기 처녀 왕삼례와 혼인을 했다. 첫날 밤 아내는 좋은 아내가 되겠으니 자기 부모는 무자하니 아들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차유황은 그때야 정신이 번쩍 들어 충실한 남편이 되기로 다짐했다.
직장 생활
1936년 가정에 대한 책임을 가진 가장으로 직장을 구하려고 충남 홍성에 사는 셋째 형을 찾아갔으나 허사였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홍성경찰서장을 찾아가 직장을 구해주면 공부하여 좋은 공무원이 되어 보은하겠다고 사정했다. 서장이 써준 소개서를 들고 결성금산주식회사 소장을 찾아갔다. 다행히 사무직 일을 주어 입사했다. 400명가량의 광부들과 일하는데 힘이 센 박성산이 친구가 되어주어 신변을 보호해주고 힘든 일을 도와주었다.
경찰서장의 부탁을 받은 소장은 틈틈이 공부할 수 있도록 공부방도 만들어주어 열심히 공부하며 사무를 보았다. 그때 친정에 살고 있는 아내와 딸도 데려와 본격적인 가정을 꾸렸다. 직장업무를 마치면 집에 돌아와 오후 7시에 취침하고 밤10시에 기상하여 새벽 3시까지 통신강의록으로 공부하고 다시 취침하여 6시에 가상했다. 아내가 시간되면 깨우고 식사준비하고 출근시키고 아이를 기르는 등 직장생활과 학업을 열심히 도왔다.
1937년 4월부터는 소장의 도움으로 보통학교 교사 한분과 함께 결성학원이라는 광산야학을 개설하여 문맹퇴치운동을 했다. 동시에 면을 순회하며 연극공연을 통하여 3년간이나 계몽활동을 폈다. 그때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의 <사선을 넘어>를 읽고 빈민구제와 사회개혁에 관한 주장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시험 준비하는 틈틈이 책을 통해 세상을 깨치고 진리를 탐색하려고 철학, 역사, 기독교서, 위인전, 명상집 문학 서적 등을 탐독했다.
그 사이 보통문관 시험(1937) 전문학교 검정고시(1938)에 합격한 후 차유황은 1939년 9월 30일 홍성을 떠나 서울생활을 하게 되었다. 소장의 소개장을 들고 서울에 올라가 전매국 사업과에 하위 사무직 고원으로 취직하고 승진하여 속관으로 근무했다.
종교교회와 차유황
차유황은 1939년 상경하자마자 5년 전에 입문한 감리교 종교교회에 출석하여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청년부에서 활동하며 민족문제에 더 깊이 눈을 뜨고 독립운동에 대한 꿈을 지니게 되었다. 그때 걸인 한 명씩을 교인 각자의 집에서 재우는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종교교회는 미국 유학을 마친 양주삼 목사가 담임하면서 크게 부흥했다.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창립하고 양주삼 목사를 초대 총리사(감독)로 선출했다. 종교교회는 교육활동, 절제운동, 계몽운동 등을 주도하는 민족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했다. 동시에 국내 교회 개척사업, 장학사업, 소외계층과 청소년 사업에도 힘썼다.
차유황은 서울에서 조선총독부에 취직하여 직장생활을 하면서 서울 종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교인들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연극단을 만들어 주인공 역을 맡아 순회공연을 하였다. 한편 지도력을 가진 교회에서 민족 지도자들이신 김구, 안재홍, 여운형, 김규식 선생들과 청년 목사 강원용 목사를 만나 민족과 조국의 독립운동에 대한 꿈을 키웠다.
자연히 민족의 지도자들의 사상적 영향을 받아 교회가 펼지는 여러 가지 신앙운동과 애국운동 및 소외계층을 위한 사회운동과 기독청년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며 계몽운동에도 적극 나서게 되었다. 그는 앞으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인생의 목표와 비전을 발견하고 더욱 연구하며 인생관을 정립할 수 있었다.
고향에서 시작한 정치활동
고향 전주로 이사 온 이유가 있다. 1945년 5월 전쟁말기에 학병 모집이 강화되자 차유황은 이를 피하여 서울의 직장을 그만 두고 고향인 전주로 내려왔다. 8월 초 전라북도 도청 사회과 계장으로 발령받아 전주에서 터를 잡게 되었다. 車有晃은 후생단체의 공무원으로 전주로 와서 전주감리교회에 출석했다.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안재홍선생의 담화문방송을 듣고 새로운 뜻을 세웠다. 안정된 직장을 그만 두고 기독청년운동에 뛰어들었다. 먼저 전국 기독청년회 전북지부를 창설하고 안재홍 선생이 이끄는 신생회 전북지부 회장직을 맡아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12월 18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전국 기독청년회에 참석하여 강원용을 만나 평생의 동지가 되었다.
그때 전북을 대표한 차유황의 유창한 연설을 들은 강원용은 자기 집으로 초청하고 밤을 새우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한국에는 사마리탄 정신에 입각한 기독교사회운동이 필요하다는데 뜻을 같이 했다. 그리고 해방정국에서 평화적 통일정부를 수립하여야 개인의 자유와 평화도 담보할 수 있다며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임을 확인했다.
1946년부터 여운형, 김규식 안재홍 등이 추진하는 좌우합작운동에 뜻을 함께 하고 전주지역에서 군중대회를 개최하고 안재홍, 강원용, 차유황 등이 연사로 나섰다. 해방 후에 강대국들 사이에서 혼란할 때 좌우충돌을 극복하고 자주적 통일 정부를 세워 분단을 막아야만 민족의 불행을 막을 수 있다는 시대정신을 강조하는 그들의 연설에 동조하는 시민이 많아졌다.
차유황은 민족의 미래를 위하여 정의롭고 선한 정치세력 신장과 결집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국회에 진출하고자 두 번이나 출마하였다. 1950년 5월 1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한국청년회 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했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바가 뜻대로 되지 아니했다. 결국 그는 방향을 바꾸어 교회로 돌아가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선한 사마리아인 운동
625 이후로 새로운 인생이 시작 되었다. 1952년 고산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아 26년 동안 교직에 몸을 담게 되었다.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 희망을 걸기로 했다. 분단의 현실과 제국주의의 탐욕아래에서 번번이 왜곡되고 묻혀버리는 진실과 진리를 밝혀주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무엇보다 인간 세상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
1953년 11월 어느 주일 밤 최초로 ‘사마리탄‘을 조직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6.25전쟁 후 상처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며 그들의 슬픈 상황을 이해하고 함께하는 참 이웃이 되자는 것이다. 김창일 목사 등 6인이 함께 하며 차유황은 회장을 맡았다. 매주 월요일 밤 감리교회당에서 기독청년과 유지들이 80명에서 200명까지 모여 교양강좌를 실시하여 1년간 지속하였다.
그러다가 김목사가 대전으로 떠나고 차유황은 시골학교로 전근이 되어 ‘사마리탄’은 침체되었다. 그 틈에 차유황은 전북대학교 법대를 졸업하고 1955년 여름 김종욱 등과 의논하고 자신이 주강사가 되어 매주 토요일 밤에 모이는 ‘사마리탄’을 다시 재건했다. 교양강좌와 일주일간의 생활을 반성하고 애로사항의 해결방안을 토론하는 모임을 계속했다.
그때 병든 현대사회를 건강한 새 세대로 바꾸기 위해서는 성경과 역사에서 배운 것을 사마리탄 운동에서 경험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신념이 굳어졌다. 결국 감수성과 진리탐구욕이 왕성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고 성인사회운동을 학생운동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결과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가 중고등학교 교직(교사, 교감, 교장 등)에 몸담고 있는 동안 항상 나라와 사회와 국가발전을 위한 동량지재(棟梁之材)를 육성하는 일에 힘쓰는 한 편 전주에서 기독청년과 고등학생들을 중심으로 사마리탄 운동을 멈추지 아니했다. 그는 늘 학생들이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이 땅에 평화와 자유와 정의와 민주주의가 실현하는 꽃이 되게 하고자 했다.
제1기 사마리탄 훈련에 참가했던 그의 딸 차옥혜 시인은 이렇게 회고한다. “저는 사마리탄 입회식의 감동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항상 나를 중심으로 살던 저는, 타오르는 촛불 밑에서 입회선서를 하며, 보이지 않는, 그러나 확실히 존재하는 타인과의 연대를 이루는 하나님의 깊고 넓은 아름다운 사랑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우치며, 그 성스러운 체험에 열여섯 살 소녀 차옥혜는 한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때부터 아버지는 제 육신의 아버지이면서 세계와 우주로 향한 문을 열어주신 제 스승이었습니다. 현재의 밀림에서 미래로 향하는 길을 보여주시는 영혼의 인도자였습니다. 제가 세속에 물들어 갈대가 되고 빛을 못 보는 부엉이가 되다가도 아버지의 사랑의 불길로 세우신 정신의 고향 사마리탄이 있어 맑은 영혼을 수혈 받고 저를 추스릅니다.
어린아이 때부터, 가난하여 온 가족이 방 한 칸에서 자주 살았던 탓으로 언제나 찾아온 학생들이나 청년들을 모아놓고 진실을 깨우치고 진리를 보여주려고 열정을 가지고 말씀하시던 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며, 이 세상의 어둠을 물리쳐 이웃들이 진정한 평화와 자유 속에 살게 해달라고 틈만 나면 목매어 기도하시던 아버지의 기도소리를 들으며 저는 자랐습니다.
아버지의 기도와 말씀은, 제 영혼의 밥이었고, 모국어의 싹이었고, 제 문학 수업이었고, 시였고, 끝없이 인간의 존엄성을 일깨워 주는 종소리였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통합이며 통찰이었고, 우주와 영혼과의 만남이었으며, 참 세상과 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른 나무 가지인 저를 오늘 삶의 진수를 길어 올리려고 노력하는 한 시인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차유황은 신앙적으로 성숙하여 1957년에는 전주 제일감리교회의 장로가 되어 열심히 봉사하였다. 1962년 10월 14일에는 전주 사마리탄 회를 개혁하여 기독학생 운동과 더불어 환경운동, 애국운동 민주화운동 등에도 힘을 쏟았다. 자신이 친히 환경운동가로 삶의 현장에서 실천했다. 그의 가슴에는 항상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평생을 가족과 지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인 정신을 당부하며 선린정신으로 살았다.
1963년에는 신앙생활의 터전을 남문교회로 옮겨 교회들과 연대하여 군사독재와 싸우고 민주화운동에도 앞장섰다. 그의 제자들도 바른 역사의식을 가지고 불의와 맞서 저항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는 ‘명상과 고백’을 만들어 회원들로 매일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선힌 사마리아인의 삶을 실천하게 하였다.
그 8개 요강은 다음과 같다.
1. 오늘도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려고 애쓴 시간이 얼마나 있었는가?
2. 오늘도 남을 자기와 같이 사랑해보았는가?
3. 오늘도 성내어 마음이 좋지 않았을 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풀어버린 적은 있었는가?
4. 오늘도 형제의 허물을 판단한 적은 없었는가?
5. 오늘도 성경은 몇 장이나 읽었는가?
6. 오늘도 한적한 곳을 찾아가 기도하였는가?
7. 오늘도 시간을 귀히 여겨 부지런히 일하였는가?
8. 오늘도 만족과 동지를 위하여 기도한 시간은 있었는가?
차유황은 1978년 교직을 그만 둘 때까지 전주 사마리탄 회를 제21기에 이르기 까지 교육하였고 살아계실 때뿐 이니라 지금까지 매년 회원 여름수련회를 가지고 그 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사마리탄’회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사마리탄 제자들이 사회에 나가 사마리탄 정신을 실천하며 사는 모습을 보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며 보람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어여쁘게 생각하실 일이라 여기며 긍지를 갖는다.”
목사 차유황
차유황은 하나님의 부르신 소명을 따라 1979년 3월에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역과에 입학하여 1981년 2월에 졸업했다. 남은 생애를 하나님의 참 사랑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1982년 2월 8일 한국기독교장로회 서울 남노회에서 준목으로 인허를 받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982년 3월 5일부터 1995년 1월 까지 서울 초음교회를 개척하여 담임 목사로 시무하였다. 그리고 1996년 3월 3일 초음교회의 원로목사로 추대를 받았다.
그는 평소 그의 가르침을 받았던 학생들과 지인들을 모아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당신의 신학적인 소신을 갈파하였다. 초음교회는 원래 강남구에서 지하실교회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97년도에 경매를 통해서 송파구 신천동의 5층짜리 건물을 매입하였다.
그 후 초음교회는 호산나교회와 합병하였다. 교회합병을 결정한 공동의회기록을 보면 교인수도 비슷했다. 호산나 쪽이 21명, 초음 쪽이 23명. 호산나에는 윤 목사가 전도목사로 있고, 초음에는 목사가 공석이고 대신에 두 명의 장로가 있었다. 양보와 비움의 정신으로 교회를 합병하므로 당회가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병고와 싸우며
1999년 병원에서 심근경색과 뇌졸중 증세로 판정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매일 노쇠한 몸을 이끌고 수서의 산자락에 가셔서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과 사마리탄 제자들과 교인들의 이름을 낱낱이 부르며 축복기도를 하였다. 강도 만난 이웃들의 아픔과 고통의 치유를 위하여, 불의가 기승을 부리는 사회에 정의와 평화와 자유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했다. 병을 이기시려고 비나 눈이 오면 아파트 계단을 15층까지 몇 번이고 오르내리곤 하였다.
그리하여 혈관질환이 호전되는 듯 했는데 2.000년 가을 느닷없이 위암 선고를 받았다. 위암 때문에 혈관 치료를 할 수 없게 되면 언어장애를 일으켜 의사소통을 못하게 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였다. 검사결과, 몸의 여러 기관의 기능이 이미 손상되어 가족들과 의사들은 한사코 위험한 수술을 만류하였다.
그러나 단 한 명의 혈관 담당 의사의 낙관적인 전망에 희망을 걸고 “삶은 끝없는 도전과 모험이며 절대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 하는 거야. 수술을 안 하면 나날이 죽어 가는 것 밖에 더 있겠느냐? 하루를 살아도 나는 바보로 살기는 싫다. 내가 살면 하느님을 증거 할 것이고 죽으면 하느님 곁으로 갈 거야”라고 말하며 수술을 고집하였다. 만류하는 아내에게 “아픈 당신을 두고 갈 수 없어서 건강한 몸으로 당신 곁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수술을 하는 거야”라고 말했다.
평생 삶을 껴안고 삶을 더 높은 곳으로, 빛 가운데로 끌어올리려 끝없이 삶을 개척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운용하셨던 차 목사님은 역시 병마가 침범한 몸의 극한상황도 뛰어넘으려고 결단하였다. 차 목사의 사전엔 어떤 경우에도 좌절이란 없었다. 이런 정열과 힘은 하느님이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신앙의 힘이기도 하였다. 한편 만일의 경우를 생각하여 이 세상의 조그만 섭섭함도 다 용서하시고, 화해하고 용서하며 살라 고 당부하며,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축복기도를 하고, 초연하게 천사처럼 맑은 얼굴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차목사는 기적처럼 악 조건의 수술을 이기고 깨어났다. 그러나 수술을 하고 차목사의 병세가 생각보다 더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그는 말기 암을 안고도 마지막까지 의연하게 인간의 품위와 아름다움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힘으로 말없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때문이었다. 수술 이틀 후 심장이 멈추었으나 심폐소생술로 다시 호흡하며 말은 못했지만 간혹 눈을 뜨고 입술을 움직이며 20일 동안 버틴 것은 그의 생을 지키시려는 끈질긴 의지를 보여주는 인간승리의 드라마라 하겠다.
차유황 목사는 결국 2000년 12월 4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평생 동지인 고 강원용목사가 장례위원장 직을 맡아 장례예배를 집행하였다. 그는 평소 소망하던 하늘나라로 들어갔다.
그의 사마리탄 제자들은 2018년 5월 21일에 목원 차유황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하여 문집 ‘시마리탄’을 발간하고 고인을 기렸다. 그들은 고인이 평생 실천하며 전파하려고 애쓰셨던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며 사랑 평화 구원에 이르는 지름길로 밝힌 고인의 유언, “용서하며 화해하고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겼다.
2018. 8. 21. 비 걸레 씀
* 추이 : 교정본입니다. 댓글에 의견을 주시면 추후 교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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