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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동아일보
유년시절<하재봉>
1. 강 마 을
외사촌형의 새총을 훔쳐 들고 젖어있는 새벽강의 머리맡을
돌아
갈대숲에 몸을 숨길 때, 떼서리로 날아오르는 새떼들의 날개
끝에서
물보라처럼 피어나는 그대 무지개를 보았나요?
일곱 개 빛의 미끄럼틀을 타고 새알 주으러 쏘다니던 강안에
서
무수히 많은 눈물끼리 모여 흐르는 강물 위로 한 웅큼씩 어
둠을 뜯어
내버리면, 저물녘에는 이윽고 빈 몸으로 남아 다시 갈대숲으
로 쓰러지고요
둥지를 나와 흔들리는 바람을 타고 강의 하구까지 내려갔다가
그날 노을 거느리며 돌아오던 새떼들의 날개는 불타고 있었
던가?
어느덧 온 강마을이 불타오르고 그 속을 나는 미친 듯이 새
알을 찾아 뛰어다녔지요
맨발로 오래된 바람의 건반을 밟으며 아이들의 긴 그림자가
사라진다
노을속으로, 목 쉰 풍금소리 꽃잎처럼 지는 들녘에 어둠은 웬
소년 하나를 세워두고
지나간다. 간다. 노을밭 지나며 훔친 불씨 속살속에 감춘 아
이들
한 짐 어둠을 메도 달집 가까이 떠나고, 알몸의 또 한 무리는
노을의 뿌리밑 그 잠으로 엉킨 언덕으로 내려간다. 풀어놓는
짐으로
깊은 어둠의 집을 만든다, 달무리가 지고 지붕밑에 불시붙여
온 누리 가득차게 달빛 일으키는 정월 대보름의 아이들
빈 몸으로 어둠속에 숨어있던 소년은.
시벽녘 마른 가슴 부비어 불을 지피고
편도선<이정숙>
고달픈 신열이었읍니다.
육신이 먼저 까부라지면
정신도 고개를 못추스르고
어찔어찔 스러지는 입원이었읍니다.
티끌처럼 작은 이 몸 하나,
쓰러져도 더하기 빼기엔
흔적도 없을 삼라만상.
온 몸 성하게 돌아갈 적엔
삼천 번을 넘게 외던 이야기도
첫구절부터 외국어였읍니다.
영혼이 날개를 달아도
헐벗은 몸 하나는 짐짝 같아서
도솔천 가는 길은 멀었읍니다.
육신의 아픔, 사지의 즐거움이
혼백까지 다스려 버려서
찍어바를 미안수도 없는 날이면
산천초목은 주근깨 투성이.
팥알만한 편도선 한 알이
부처님도 예수님도
못부르게 했읍니다.
몸살이 팔다리를 꺽어오는 밤이면
베드로처럼 세번 이상 도리도리
어려울 것 없는 파문.
나에겐 맡기지 마십시오.
춤추는 혼백의 날렵한 심지는
소관밖으로 밀려납니다.
고달픈 신열이었읍니다.
육신이 먼저 까부라지면
정신도 고개를 못추스르고
어찔어찔 쓰러지는 입원이었읍니다.
돌<손동연>
1
인식의 마을 동구밖에 돌이 놓여있다. 눈이 내리면 더욱 그
자리가 뚜렷해진다. 돌은 기지개를 켜며 겨울을 인내한 집념을
추슬린다. 추슬리는 그의 그림자속으로 초가집들이 여위어가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봄날을 꿈꾼다. 그들은 아무도 돌이 나비
의 어미임을 모른다.
2
그러나 돌은 형용사를 모른다. 반대로 사람들은 형용사 속
에서 갇혀 산다. 시간의 금속성속을 초침같이 지나간다. 확실
히 무서운 일이다.
3
돌이 바람에 깎여 내려가는 제 의지를 늘름하게 다시 받아먹
는 동산 사람들은 또 한번 쓰러져서 호랑이 껍질같은 이름을 남
기러 간다. 가는쪽 산그늘이 일어선다.
4
돌의 뿌리 쪽으로 바람이 돌아눕는다. 고드름 끝에서 불씨를
캐던 그의 허연 손뼈가 삭는다. 삭아서 사람들의 정신을 세우
나 한 채씩의 소금기만 허옇게 남는다.
5
그리고 또 싸락눈이 돌의 부동을 깨우려다가 물어뜯다가 흔
들다가.....
햇빛이 금간 그의 문을 열다가 빗장을 벗기다가.....
심심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마음을 돌 던져 물살을 일으키다
가 퍼뜨리다가......
못이기고, 저무는 싸락눈의 이빨이
못이기고, 깨어진 햇빛의 어깨뼈가
못이기고, 허망한 사람들의 꿈이
6
돌 속을 무너지고 무너지고 무너지고 있었다.
풍경의 꿈<장 석>
1
나는 한낮의 성숙한 하늘에 부조되는 장엄한 무늬를
보았다. 나의 것인 뜨거운 꿈 하나가
그 근처에 벌써 앉아 있었다.
구름의 흰 살에 일어나는 물결들.
나는 원했다. 삶의 한순간의 질인
강렬한 빛의 혼례를 설레이는
분만의 풍경을.
끝없이 겹쳐 오는 모든 이절들의 힘을.
더럽혀진 풀의 형상으로
대지의 낮은 중심에서 새들이
눈뜨고 있었다. 빛 한 가운데로
소리의 기사가 말 달리며 지나갔다.
바람이 불어 온다. 흩어져라. 단단한
풀씨들이여. 사랑의 열들이여.
날아 올라라. 한없이 힘센 세력이여. 흰 욕망들이여.
나는 부풀어갔다. 장엄한 문양과 내 꿈이
숨쉬는 따뜻한 열이 나를 상승시켰다.
풀이 일어 선다. 녹색의 무리들,
삶을 환히
밝혀 주는 불붙는 표피여.
나는 부끄러워 눈물 흘렸다. 내 꿈은
나에게 입맞추어 주었다.
2
삶을 준비하는 자가 새를 날려보냈다. 어둠 속으로
새는 젖혀진 밤의 골목으로 날아 갔다. 새는
무너진 너의 슬픔위로 떨어졌다.
그의 흰 깃이 남긴 무늬의 물결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이 어두운 숲의 한 가지에서
태어나는 불꽃처럼 밤은 빛나는 몇 개의 눈을 뜨고
우리는 숨의 증기인 눈물을 흘렸다.
두번 째 새는 돌아오지 않았다. 문법 바다의
가장 서늘한 심연에서 이마에 불을 단
우스꽝스러운 심해어인 사랑이
헤엄치고 있었다. 지상의 어두운 골목에서
새는 차갑게 불타고 있었다.
노아의 세 번째 비둘기는
황금빛 올리브 잎사귀를 물고 왔다.....
이제 삶은 신성한 정지이며,
그의
그림자인 풍경만이 변모한다,
그의
입김인 바람은 흩어진다. 소리의 철책 사이에서.
새여,
슬픔의 첨탑 위로 떨어지는 푸른 입술이여......
미성년의 강<박태일>
산과 산이 맞대어
가슴 비집고 애무하는 가쟁이 사이로 강이 흐른다.
온 세상의 하늬 쌓이듯 눕는 곤곤한
곤곤한 혼탁
멀어져 나가는 구름모양
한없는 나울을 깔면서
대안의 호야불을 찿아나서는 물길.
물 위로 물이 흐르듯 얼굴을 가리며
무엇이 우리의 슬픔을 데려왔다 데려가는가.
열목어 열목어는 온통 강물에 열을 풀고
무수히 잘게 말하는 모래의 등덜미로
우리의 사랑이란 운명이란
말할 수 없는 슬픔이란 그런 그런 심연을 이루어
인간의 아이들처럼 아름다운 깊이로 출렁이면서
강을 흐르는 사이의 강.
산과 들이 한가지 모습으로
무덤을 이루어 있는 강안에 서면
귀밑머리 달도록 예쁜 지평선은
우리 버려진 나이를 위한 설정이다.
아, 하면 아, 하는 하늘
오, 하면 오, 하는 산
많이 추위와 살비비는
손과 손의 가장 곱게 펴진 그림자 위에
한 방울 눈물을 올려놓고
이승은 온통 꽃이파리 하나에 실려가고
다시는 그림자 하나 세상에 내리지 않는다.
하늘로 트이는가, 혈맥
태를 감는가, 산악
손벌려 앉아 우리는 끝내 무엇이 되고 싶은 것일까.
강은 순예,
눈들면 사라지는 먼 먼 마을의 어두움도 따라나선다.
길 잘못든 한 아이의 발소리도 들리고,
산이 버린 산
사람이 버린 사람의 백골이 거품을 토해내는 것도 보인다.
죽음이란 온갖 낮은 죽음과 만나
저들을 갈대로 서있게 한다.
실한 발목에 구름도 이제
묵념처럼 하얗게 죽는다.
돌아다 보고 옆눈 주는 어두움
그 흔적 없다는 이름의 길을 따라
꽃의 배슬은
나의 기억은 여기에서 끝난다. 강이여.
산과 들이 한가지 모습으로
무덤을 이루어 있는 강안에 서면
우주의 능선에 달이 뜨고
까칠한 욕망의 투구를 흔들면서
나는 빛나는 스물의 갈대밭, 혹은.
생 활<안재찬>
창을 닦다 보면
마치 세상의 한 끝을 닦는 것 같다.
어둠의 문을 열고
맨 처음 세상으로 나온 아이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하늘을 바라보았을 때
아침은 소리없이 움직임만으로 와서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힘
사방에서 입술을 부비며 스며든다.
손바닥 위에 놓인 생의 조각들을 쪼아먹는
소망의 뜰에 내린 새 몇마리
앉아있다 날아간 자리
버리고 남은,
버릴 수 없이 슬픈 이야기들은 모두
지난 밤의 꿈으로 문질러두고
지금 창을 닦고 있는 내 손길 아래
세상의 어느 한 곳이 닦여지고 있다.
톱밥처럼 흩어지는 일상의 책장들
양식은 굳은어깨뼈처럼 튼튼하지 못하고
길모퉁이에 잠복해 있는
먼지의 덫, 보이지 않는 손들의 굴레
일부분씩 닦여져 나간다.
빈 접시에 채우는 하루분의 양심과
빵 하나의 자유로 시작되는
이 아침, 햇빛은 하늘의 층계를 걸어내려와
무구한 눈망울을 가진
내 아이들의 손을 잡고
어디로 어디로 데려가는가.
아침의 문을 열고
맨 처음 밖으로 나온 아이의 두 눈
창을 닦다 보면
마치 세상의 어느 한 끝을 닦는 것 같다.
1981년
겨울의 첫걸음<채충석>
남들은 4년이면 마치는 것을
나는 5학년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도 지방 사립 대학을
증서 없는 졸업식 날 학교 떠나는
친구들이 모아 주는 30만원으로
나머지 1학점의 등록을 마치니
노천 강당의 개나리 넝쿨은
올들어 두 번째 피어났다.
낯선 이름과 언어가 붐비는
수요일의 한 시간을 위해
두시간 거리의 직행 버스로 등교하면
지독하게 피곤하였다. 그 다음 날도
이렇게 한 주간이 쉬 지났다.
대학원에 다니냐는 후배들은
모란이 피자 모두 아스팔트 위로
파도처럼 밀려나고, 나만이
텅 빈 풀밭에 오르리고 앉아
흩어진 과우들에게 엽서를 쓰거나
도시의 변두리가 돼버린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동네 어른들이 입을 모아 흉년이 들었다고 하는 동안
코스모스 피는 가을은 슬쩍 찾아들고
5학년 1학기도 한달을 더 끌다
끝났다, 자, 가야지 내일은
경제학사 학위를 받으러
서이 최씨로 바뀐 무거운 앨범도 찾고
홀로 교문을 나서는 나를 만나러
서랍만 달린 겨울을 만나러
로트레아몽백작의 방황과 좌절에
관한 일곱개의 노트 혹은 절망 연습
<남진우>
1
그 겨울 내 슬픈 꿈은 18세기 외투를 걸치고 몇닢 은전과 함
께 외출하였다. 목조의 찻집에서 코피를 마시며 사랑하지 않는
여인의 흰 살결, 파고드는 쾌감을 황혼까지 생각하였다. 때로
희미한 등불을 마주 앉아 남몰래 쓴 시를 태워버리고 아, 그
겨울 내 슬픈 꿈이 방황하던 거리, 우울한 샹송이 정의하는 토
요일과 일요일을 그 숱한 만남과 이 작은 사랑의 불꽃을 나는
가슴에 안고 걷고 있었다.
2
밤 열시, 시계의 태엽을 감으며 그녀의 살속으로 한없이 하
강하는 헝가리언 랍소디. 따스한 체온과 투명한 달빛이 적시는
밤 열시의 고독, 머리맡에 펼쳐진 십이사도의 눈꺼풀에 주기도문
문이 잠시 머물다 간다.
3
날개를 준비할 것 낢, 혹은 우리의 좌절에 대한 대명사. 솟
아오름으로 가라앉는 변증법적 사라의 이중성.
4
가로등이 부풀어오른다. 흐느거적리는 밤공기 사이로 킬킬대
는 불빛의 리듬. 안개는 선술집 문앞에 서성이고 바람은 취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걸어나온다. 쉬잇 설레이는 잠의 음계를 밟
고 내가 바다에 이르렀을 때, 보았다. 아득히 밀려오는 파도와
살 섞으며 한잎 두잎 지워지는 뱃고동 소리, 조용히 모래톱에
속삭이는 잔물결을 깨우며 한 여인이 꽃을 낳는 것을.
5
물결치는 시간의 베일을 헤치고 신선한 과일처럼 다디단 그
대 입술은 그대 향기로운 육체는 깊은 혼수로부터 꿈을 길어 오
른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박수를 치며
젖은 불꽃의 옷을 벗으라 나의 하아프여.
가만히 촛불을 켜고 기다리자. 누군가 휘파람을 불며 지중해
의 녹색 문을 열고 거울 속으로 들어간다. 피어나는 연꽃 속에
눈뜨는 보석을 찾아.
6
자정이 되면 샤갈과 함께 방문하는 러시아의 설해림. 모닥불
옆에 앉아 우리는 수평선 너머 사라지는 선박을 그 긴 항해를
바라보았다. 눈이 내리는군요 밤안개가 걷히겠지요. 바람부는
해안 푸른 고요 속에 목마른 자 홀로 남아 기도하는 자정의 해
안 그 어둠 속에 눈은 내리고 내리고 유년의 마을 어디쯤 떠오
르는 북두칠성. 지상의 모든 불빛이 고개 숙인다.
7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겠다.
오! 모국어<신찬식>
1
아직도 남아 있을까?
주리고 주려서 뼈마디 앙상한 채
밀리고 떠밀려서 다다른 하늘가,
실향민의 달도 서럽게 기울어가는
북간도의 하늘가에
달무리처럼 서리던 한국어.
언제나 피빛 노을에 물들거나
눈물에 젖어있던 한국어,
오! 눈물의 모국어여.
한 많은 사연 간직한 채
그 모습 그대로 지녀
아직도 울고 있을까?
2
엎드렸다가
뜨거운 한낮 내내 엎드렸다가
어둔 밤을 뚫고 기어오는 전우,
베트남 수풀에서 쓰러졌던 전우가
새벽마다 꿈길따라 찾아오누나.
동녘 훤히 밝기 전에
서둘러 서둘러서 기어오는 전우여
끝내 그대 돌아오지 못하누나.
끝내 그대 더불어서 돌아오지 못하는 한국어,
오! 절룩거리며 신음하는 피의 모국어여.
축제의 불꽃처럼 산화한 젊음따라
그 수풀 어디쯤서 헤매고 있는가,
떨어져나간 팔다리 더듬어 헤매는가?
3
밤낮 쉬임없이 타오르는
유전의 불꽃둘레,
유전의 불꽃 보고
부나비처럼 떼지어 찾아드는
온 누리 말의 무리들.
부나비처럼 퍼득거리며 맴돌다가
하나 둘 지쳐 내려앉는 곳,
페르시아 만에서도
아라비아 반도에서도
알몸 드러낸 채
땀 흘리며 뛰어가는 한국어,
때로는 비틀거리기도 하다가
더러는 쓰러져 눕기도 하다가
기어이 떨치고 일어서는 노동자 더불어서
모랫바람 헤치며 성을 쌓는가.
새로운 빛의 궁전,
영원한 내일의 성채를 쌓고 있는가!
오 ! 땀의 모국어여.
우리의 숲에 놓인 몇개의 덫에 대한 확인<이병천>
1. 식구들의 잠
한밤이라도 잠드는 꿈은 없이 우리의 방안에
빈 껍질만 누워서 키를 재다가
공중으로 달아난 안식을 채운다.
어머니의 꿈은 50년
행상에 나가 발이 부르트더니
돌아일어설 때마다 헛발질
닳고 닳아 없어진 발목은 무거운 광주리에
어느 사이 얹히고
그해 여름내 그치지 않던 장마는
아버지를 적시더니
이 밤도 여물지 않는 아버지의 꿈
마른기침을 따라나와 들판의 허수아비로 서서
또다시 비에 젖고 있지만
누이의 가을 소풍도 비맞고 있을까
잠든 눈썹이 가난처럼 안스럽다
한밤이 되어서도 우리의 방에서는
결코 잠들지 않는 꿈
도시의 불빛에 옆구리를 찔린 내 꿈은
빈 손으로 돌아와 문지방을 갉아대며
미안한 내 잠을 끝내 거부한다.
2. 기다리는 날
우체부가 지나가는 고샅길 남새밭에
고추잠자리가 먼지처럼 일어났다 고쳐 앉고
부러진 억새풀이 땅에 머리를 쳐박은 채 항복한다.
기다리는날 수없이 보내며 분침은 저혼자
깊어진 계절의 주름살을 온몸으로 가리키고 있다
푯말하나
- 출구 없음
3. 사랑은 흔들리는 풀씨
이제 나를 풀어다오
홀로 눈감지 않는 사랑아
남 몰래 내뱉는 탄식에도 철렁한 가슴
절벽 미끄러지던 꿈속 쇠북 소리로 맞받아 울고
더 쓰러볼 가슴팍없이 여윈
들판의 갈대로 서서 이 기도 끝나면
열두 사도처럼 흩어져 갈 풀씨
잎자루 떨어져간 상처 아물즈음
파리한 사슬 자국을 본다
이제 풀어다오
바람에 수 만번 딩굴리며 멀리 갈수록
잔털 뜯기며 단단해지는
당신 노예, 풀씨의 사랑을 본다
4. 달, 달, 무슨 달
달 하나가 한잎 가득 웃음으로 떴다가
고개를 넘을 때는 울고 있다.
저희들의 유희에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희미한 울음만 밤하늘에서부터 내리고
새벽까지 그늘에 몸을 숨긴 새
새벽까지 나무에 몸을 부딪히는데
달은 눈을 멀어 산밑에 떨어진다
5임금님 귀는
무심한 말의 늪에 발목 잘린 말들이 빠져 헛돌고
부화되기 이전에 모두 깨어져 버리는 말의 무서운 부재가
뼈를 울린 비명의 휘파람소리로 새어나와
이 말 그대에게 줄 수 없을 때
무수한 벌떼처럼 달려와 꽃히는 화살이다가
잠자코 돌아서서 늪속에 다시 뛰어드누나
사평역에서<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콥밥을 불빛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약 같은 입술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 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논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 톱밥의 불꽃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채 광 기<오정환>
우리가 닿아야만 할
확신의 나라
가장 빛나는 마을어귀까지
나의 화차는 달리고 있다.
아직도 분별되지 않는
형상들의 정수
떨어져 쌓이는 좌절을 실어나르며
혼미의 동굴, 숨죽여 누운 어둠의
깊은 강을 건너
나의 불면의 화차는 달리고 있다.
잠들어버린 세상의 곤혹도
먼지 묻은 온갖 생애마저도
뜨겁게 아프게 쏟아내면서, 나는
외줄기 불빛이 밝히는
마태복음 십삼 장 십삼 절
이사야의 예언의
하얀 소금이 되어 써늘하게 살아있다.
밤마다,
밤마다 동결된 언어의 흙더미를 찍어내는
나의 야망의 삽날
은밀한 집중
캄캄한 어둠, 우리들의 가난 속으로
홀연히 하늘을 밝아 올 것인가.
선혈처럼 뜨거운 금맥
끝없이 이어진
성스러운 새벽의 나라
가장 빛나는 마을어귀까지
나의 녹슨 화차는 달리고 있다.
1982년
◈동아일보
榮山浦·1<나해철>
배가 들어
멸치젓 향내에
읍내의 바람이 다디달 때
누님은 영산포를 떠나며
울었다.
가난은 강물 곁에 누워
늘 같이 흐르고
개나리꽃처럼 여윈 누님과 나는
청무우를 먹으며
강둑에 잡풀로 넘어지곤 했지.
빈손의 설움 속에
어머니는 묻히시고
열여섯 나이로
토종개처럼 열심이던 누님은
호남선을 오르며 울었다.
강물이 되는 숨죽인 슬픔
강으로 오는 눈물의 소금기는 쌓여
江深을 높이고
황시리젓배는 곧 들지 않앗다.
포구가 막히고부터
누님은 입술과 살을 팔았을까
천한 몸의 아픔, 그 부끄럽지 않은 죄가
그리운 고향, 꿈의 하행선을 막았을까
누님은 오지 않았다
잔칫날도 큰집의 제삿날도
누님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들은 비워지고
강은 바람으로 들어찰 때
갈꽃이 쓰러진 젖은 창의
얼굴이었지
십년 세월에 살며시 아버님을 뵙고
오래도록 소리 죽일 때
누님은 그냥 강물로 흐르는 것
같았지.
버려진 선창을 바라보며
누님은
남자와 살다가 그만 멀어졌다고
말했지.
갈꽃이 쓰러진 얼굴로
영산강을 걷다가 누님은
어둠에 그냥 강물이 되었지,
강물이 되어 호남선을 오르며
파돛퍼럼 산불처럼
흐느끼며 울었지.
◈중앙일보
불이 있는 몇개의 風景<양애경>
1
立冬 지난 후 해는
산 너머로 급히 진다.
서리조각의 비늘에 덮인 거리
어둠의 粒子가 추위로 빛나는 길목에서
나는 한 개비의 성냥을 긋고
오그린 손 속에 꽃잎을 급히 피워 낸다.
불의 의상을 입으며
事物은 하나하나 살아나기 시작하지만
불은 가장 완벽하게 피었다 지는 꽃
화사한 절망.
절벽으로 떨어지듯 꺼진다.
2
기침을 한다.
탄불을 갈며.
달빛 밑에 웅크리면 아궁이 옆으로 흼미하게 흩어지는 그림자.
한밤중 여자들의 팔은
生活로 배추 속처럼 싱싱하게 차오르지만
좀처럼 불은 붙지 않는다.
食口들은 구들에 언 잔등을 붙인다.
어떻게 된 것일까 옛 집의 불씨는.
영원히 꽃피우는 전설의 나무와 같이
純金으로 제련된 불씨,
화로에 잘 갈무리되어
주인을 지켜주던.
3
이제 불은 때묻고 지쳤다.
누가 불을 去來하고
누가 불에게 명령하는가.
불길한 謀反의 충동에 몸을 떨며
콘크리트 보일러실에 갇혀 웅크리고 있는 불의 꿈
밤 열시 工員들은 흩어지고
4
짧은 인사의 잔손목을 흔들다 말기.
부딛치다 와아 터지기.
안개 속에 서있는 불
문을 열고 길길이 솟구치는 불
산맥 속에 잠들어 있는 원시림의 불.
5
牧丹 마른 가지에서 올라오는
불의 빛깔은
사과나무 장작에 옮겨 붙으며 만발한다.
쓰레기 더미에서 불은 꽃핀다.
들끓으면서 平等한 불의 속
熱은 순수하여 평화롭다.
6
熱은 빛나지 않고
소리내지 않는다.
그러나 따갑게 퉁겨져나와 손바닥을 쏘는
열기
우리의 입다문 眞實
바람 부는 都市의 밑둥을 떠받치는
건강한 당신
일곱 시 반에 집을 나와 아홉 시 반에 퇴근하며
휘파람을 부는 당신,
당신의 불.
7
이 속에 잠자는 불이 있다.
작은 성냥골 안에,
성냥은 불을 꿈꾸고
불은 성냥을 태운다.
순간의 불꽃은 기다림을
地上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바꾼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꿈을 시작한다.
◈경향신문
겨울바다<김종목>
Ⅰ
모든 것이 죽어 있다.
하늘은 파랗게 질린 전율에 떨고 있다.
삭아 내리는 눈(雪)은
걸레처럼 떨어진 바다로 投身한다.
幻像의 새 한 마리,
겨울바다 水平을 몇 小節로 날아올라
바닷가 敎會堂 尖塔 위에 앉는다.
갈비뼈 앙상한 바다 한 모금
하얀 부리에서 흘러나와
소금빛 매운 바람으로 부서진다.
Ⅱ
간간 醉한 바람이 비틀거리며 海岸으로 올라오고
그 때마다 놀라 잠을 깨는 뱃고동 소리,
떠나야 할 곳도 없는 죽은 바다를 겨냥하여
뱃사람들의 눈은 이글거리며
괄괄한 바다의 急所를 더듬는다.
그러나 아직은 죽어 있는 바다.
저 커다란 死身을 바꿀 순 없다.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그네들의 希望은
船倉에 船積된 채,
언제 出發할지도 모른다.
파아랗게 질린 겨울의 이마를 짚고
바람은 얼어붙은 希望의 바다를 찍어 내며
海岸으로 소금 몇 가마 부리고 있다.
Ⅲ
희미한 등대불이 부풀어 오른다.
喘息을 앓는 木船은
밧줄에 묶이어 해안에 버려져 있고.
밤새 먼지처럼 내리는 白雪은
허기진 꿈들을 하얀 나비로 날아오르게 한다.
간 간 뼈 부딪는 幻聽이 들려오고
누군가의 시린 넋이
바다 깊이 浮沈할 때,
이윽고 海岸을 적시는 한 장의 겨울은
바다에서 주검으로 包裝되어 나간다.
◈서울신문
겨울새<강태형>
1
그 겨울의 바람 속에서
나는 깃발의 끄트머리를 붙잡고 한없이 나부졌다.
江물처럼 바람이 흐르고
하염없이 쏠려가는 사람들의 거리를
꿈 속을 오르내리듯
주머니 속의 몇 개의 지식을 셈하며
내 유년의 거리와 셈하며
數世紀를 지나온 빙하기의 바람 속을
날고 있었다.
발아래 교회의 종소리가 얼어 붙은 채 구르고 있었다.
어두워진 하늘을 열고 내리는
눈송이들
세상은 하얗게 떠오르고
사람들이 길 모퉁이 모퉁이로
深淵의 물살처럼 사라져 갔다.
2
소리없는 거리에 내리는 찢어진 깃발, 종소리
흐린 街燈 위로 내리는 눈송이 몇 개
가장 빛나는 音階를 딛고
새의 울음은 어둠 속으로 치솟았다.
그 때, 서서히 일어서는 백마의 무리
하얀 갈기를 쓸며 꿈틀대는 도시를 보았다.
어둔 하늘에 뛰어올라
붉은 아침바다에 앞발굽을 딛고 선
세상을 보았다.
3
겨울 하늘에 차갑게 빛나던
내 하나의 별이 부서져 내려 온 세상에 흩어지고
地上의 곳곳에서 눈뜨며 반짝이는 빛, 반짝이는 江물.
목마른 자의 가슴 아래로 潛跡하듯
가장 낮은 땅으로 흐르는 별 무리들
이제 나는 願한다
가슴에 새겨진 별빛을 돌며돌며
내 속살을 적시며 떨구는 눈물도
낮은 땅으로 흐르기를
이름 잃은 풀잎의 한 점 이슬이기를
타오르는 아침바다에 投身하기를
일어서는 빛,
밤새 내린 눈발 위로
무수히 쏟아지는 하늘이여
◈대구매일신문
박기영<사수의 잠>
그날, 어둠 쌓인 슬픔 속에서
내가 버린 화살들이
어떤 자세로 풀밭 위에 누워 있는지 모르더라도
나는 기억해내고 싶다. 빗방울이
모래 위에 짓는 둥근 집 속으로 생각이 젖어 들어가면
말라빠진 몸보다 먼저 마음이 아파오고,
머리 풀고 나무 위에 잠이 든 새들이 자신의 마당에 떨어진
별들의 그림자를 지우기도 전에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어떻게 스스로의 이름을 가슴에 새겨둘 수 있는지.
추억의 손톱자국들 무성하게 자란 들판 너머로
노랗게 세월의 잎사귀 물들어 가는 것을 보고 있으면
나는 벽에 기대어서도
하늘 나는 새들의 숨쉬는 소리 들을 수 있고,
숲에 닿지 않아도 숨겨진 짐승의 발자욱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접혔던 전생의 달력을 펴고
이마에 자라난 유적의 잔가지를 헤치고 들어가면
태양계 밖으로 긴 고리를 끌고 달아나던 혜성이, 내가
땅 위에 꽂아 둔 화살의 깃털을 잡기도 전에
진로를 바꾸어 해보다도 더 큰 빛을 바하며 내 품안으로 되돌아 오는 것도
나는 이제 볼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말하는 땀 젖은 웃도리를 벗고 가만히
어둠과 함께 별자리에 떠 있으면 나는 또 그 모든 것을
등 뒤에다 새겨 둘 수 있을 것 같다.
태양의 곁에 누워서 자전의 바퀴를 굴리지 않더라도
어떻게 걱정에 쌓인 별이 저녁이면 다시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까닭을
역마살이 낀 내 잠의 둘레에
밤이면 어떤 별들이 궤도를 그리며 떠돌고 있을 것인지.
1983년
◈동아일보
밀물드는 가을 저녁 무렵<고운기>
1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오고
열 몇 마리씩 떼를 지어 산마을로 들어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사립문 밖에 나와 산과 구름이 겹한
새 날아가는 쪽 하늘 바라보다
밀물 드는 모랫벌 우리가 열심히 쌓아 두었던
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들을 바라보면
낮의 햇볕 아래 대역사를 벌이던 조무래기들
다 즈이 집들 찾아들어가 매운 솔가지 불을 피우고
밥 짓고 국 나르고 밤이 오면 잠들어야 하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분주히 하루를 정리하고들 있었다
그러면 물은 먼 바다에서 출발하여
이 마을의 집 앞까지 밀려와 모래담과
집과 알 수 없는 나라 모양의
탑쪼가리 같은 것부터 잠재웠다
열심히 쌓던 모든 것을 놓아 두고
각자의 집으로 찾아들어간 조무래기들의 무심함이나
물은 사납거나 거세지 않게
천천히 고스란히 잠재우고 있었다
먼 바다 쪽에서 기러기가 날아와
산마을 어디로 사라지는
밀물 드는 가을 저녁 무렵
2
이 도시에서 밀물처럼 몰려오는 어둠
먼 시가지가 보이는 언덕길 버스 종점에 내려
돌아올 버스 토큰 하나 남았던 허전함처럼
모두 쓰고 버리고 힘들여 쌓아놓고 오는 밤
불을 키우고 어둠을 밝혀
한낮의 분주함처럼 서성이지만
먼 옛마을에 찾아와 호롱불 몇 개로정체를 밝히던 어둠이여
오늘 인공의 빛을 피해 찾아오는 밀물이여
이미 어린아이 적처럼
만들었던 것들과 무심히 결별하지 못하는 우리에게
깊은 잠을 주고 또 평평히
세상의 물상들 내려 앉히는
대지의 호흡이여
어느 땐가 밤이 깊어져
물은 떠나온 제 땅으로 돌아가고
백지처럼 정돈된 모래벌에 아침이 오면
이루엇으나 아무것 이룬 것 없는 흔적 위에
조무래기들 다시 모여들었더니
물이 들어왔다 나간 이 도시의 고요함을 딛고
내가 간다
살아왔던 일일랑 잊을 만하고
새 벌판은 끝이 없어
또 쌓아야 모습은 못날 뿐이지만
일이 끝나 날이 저물면
가슴에 벅차도록 몰려오는 밀물은
산이 되고 밭이 되고
집과 자동차와 친구가 되고
정승이 되고 나라가 되고
희망도
사랑도 되었을 것을.
◈중앙일보
비망록<김경미>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아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ㅎ지 않는 거만한 술레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없는 눈물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앗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으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어였습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경향신문
龜浦장에서<박정숙>
구포장이 서던 날
나는 무수히 짖어대는 개소리를 들었다.
방천 둑을 따라
온갖 개들이 나와서
컹컹 하늘을 물어뜩기도 하고
아예 짖는 것을 포기해 버린 놈들도 잇었다.
더러는 철망 안에서
수십 마리씩 비좁게 앉아
몸부림을 치는 놈들이 잇는가 하면
쇠줄에 묶여
어디론가 팔려갈 하늘을 향해
앞발을 떡 버티고
이를 드륵드륵 가는 놈들도 있었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갈비뼈에
송곳니를 박거나,
아니면 언젠가 떠나야 할
우리의 靈魂까지 흔들어 놓는
무섭고 당찬 개소리를 들으며
바삐바삐 둑길을 돌아서 가면,
마치 삶의 終點에 온 듯한 現場이
무섭게 눈앞을 가로막는다.
개들은 수십마리씩 옷을 벗고
불 속으로 뛰어들었거나
가마솥에 뛰어든 용감한 모습으로
판자 위에 올려져
끝까지 이그러진 하늘을 물고 잇었다.
나는 갑자기 온몸에 戰慄을 느끼며
그들의 목에서
딱딱하게 굳은 울부짖음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본 하늘과
마지막으로 혜어진 主人의 얼굴이
눈동자에 굽혀 있음을 보았다.
생선뼈처럼 딱딱하게 굳었거나
잿불에 굽힌 그들의 눈동자를
손가락 끝으로 쿡쿡 찌르면서
얼굴 表情 하나 흐트리지 않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자꾸만 추워지는 무서움을 느꼈다.
人間이 가장 사랑하고
또 사랑해야 할
ㅏ음의 어느 일부가 무너지며
뼈 소리로 가득 찬
正午의 시장을 돌아나오면,
손아귀엔 식은 땀이 흘러내리고
반쯤 짤려나간
구포 위에 뜬 하늘에서는
죽은 개의 悲鳴소리만이
붉고 딱딱하게 타고 있었다.
◈서울신문
기상예보<김백겸>
하늘 흐리고 안개 긴 숲에 우울이 내려와 있음
구름에 갇히 빛살들
허공에 날개 자국을 긋고 가는 멧새
모두 표정을 남기고 있지 아니함
길 잃은 고아처럼 서서 플라타너스는 적막을 날리고
풀씨로 흩어진 슬픔은 北北東에서 北北西로 방향을 바꿈
폐부로 흘러드는 저기압의 음모
백마일 밖 한랭전선은 풀잎들의 잠 뿌리뽑을
폭풍을 몰고 오는 중임
지금은 모든 사랑이 위험함
외투를 걸친 우리의 꿈
방독면을 쓴 채 큰길로만 다님
골목마다 비수를 품고 매복한 어둠
시간들의 휘파람이 대꼬챙이로 눈 찔러 오는 저녁
지금은 모든 생각이 위험함
문 닫고 굳게 빗장을 지른 거리의 불빛들
창 틈을 엿보는 소문과 함께
얼굴 까맣게 죽는 지금은
모든 그리움이 위험함
찬비가 내림
우산을 들고 사람들은 사람을 비껴감
낯선 총을 맨 겨울의 척후병이 요소요소 서 있고
바이칼 호수를 지나 시베리아 삼림을 막 빠져나온
러시아의 절망도 보임
공중엔 바람의 채찍 가득해
두려움에 야윈 裸木들의 어깨 더욱 가늘고
겨울잠에 젖어 봄날을 꿈꾸는 개나리 새 눈만이
소롯이 숨결에 싸여 있는
한 개피 성냥으로 남겨논 최후의 불꽃임
1984년
◈동아일보
서울로 가는 全琫準<안도현>
눈 내리는 萬頃들 건너 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당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 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혜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 갈 것을
우리 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중앙일보
畵家 뭉크와 함께<이승하>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 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同化야 도 童話의 세계야
저 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바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 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우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경향신문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황인숙>
이 다음에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윤기 잘잘 흐르는 까망 얼룩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사뿐사뿐 뛸 때면 커다란 까치 같고
공처럼 둥글릴 줄도 아는
작은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나는 툇마루에서 졸지 않으리라.
사기그릇의 우유도 핥지 않으리라.
기시덤불 속을 누벼누벼
너른 들판으로 나가리라.
거기서 들주이와 뛰어 놀리라.
배가 고프면 살금살금
참새떼를 덮치리라.
그들은 놀라 후다닥 달아나겠지.
아하하하
폴짝폴짝 뒤따르리라.
꼬마 참새는 잡지 않으리라.
할딱거리는 고놈을 앞발로 툭 건드려
놀래주기만 하리라.
그리고 곧장 내달아
제일 큰 참새를 잡으리라.
이윽고 해는 기울어
바람은 스산해지겠지.
들쥐도 참새도 가버리고
어두운 벌판에 홀로 남겠지.
나는 돌아가지 않으리라.
어둠을 핥으며 낟가리를 찾으리라.
그 속은 아늑하고 짚단 냄새 훈훈하겠지.
훌쩍 뛰어올라 깊이 웅크리리라.
내 잠자리는 달빛을 받아
은은히 빛나겠지.
혹은 거센 바람과 함께 찬 비가
빈 벌판을 쏘다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난 컬끝 하나 적시지 않을 걸.
나는 꿈을 꾸리라.
놓친 참새를 좇아
밝은 들판을 내닫는 꿈을.
1985년
◈동아일보
안 개<기형도>
1
아침 저으로 샛江에 자욱히 안개가 낀다.
2
이 邑에 처음 와 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江을 건너야 한다.
앞서간 一行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空中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江에서 한 발자국도 移動하지 않는다.
出勤길에 늦은 女工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 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동안
步行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食口가 되고
멀리 送電塔이 히미한 胴體를 드럴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는,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江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空氣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植物들, 工場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寄宿舍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三輪車는 그것이
쓸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不幸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正午 가까이
工場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辱說을 해대며 이 發水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邑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江에 자욱히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邑의 名物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株式을 가지고 있다.
女工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工場으로 간다.
◈중앙일보
멸 치<전연옥>
지난 일들은 모두 잊어버리라고
내 몸에 달디단 기름을 발라 구우며
그대는 뜨겁게 속삭이지만
노늣하게 내 살점을 태우려 하지만
까닭없이 빈 갈비뼈가 안스러움은
결코,
이빠진 접시 위에 오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님을
비틀거리며 쏟아지는
한 종지의 왜간장에 몸을 담그고
목마른 침묵 속에
고단한 내 영혼들이 청빈하게 익어갈 때면
그 어느 것도 가늠할 수 없는 두려움에
쓰라린 무릎을 끌어안고
여기는 에미 애비도 없는
서럽고 슬픈 저녁 나라이더냐
들풀 같은 내 새끼들
서툰 투망질에도 코를 꿰는 시간인데
독처럼 감미로운 양념 남비 속에 앉아
나는 또 무엇을 잊어버려야 하며
얼마만큼의 진실을 태워야 하는지
◈매일신문
어린왕자를 추억함<박진환>
남들이 다들 중학교에 다니던
열 입곱의 나이, 내 생의 構文은
原絲工場 지잉징 달아 오르는
기계소리에
갖혀 밤샘하면서
유일한 친구 어린왕자의
형한 눈빛을 꿈꾸었지.
이름 지을 수 없는 소혹성
밀밭 곁으로 바람이 지나가고
더듬거리며 말을 걸기 시작한
어린왕자는 쓸쓸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활달하게 돌아가는 톱니바퀴에 맞물려
감성의 한 때는 으깨어지고
내가 기르는 內省의 뜰에는
고분고분 길들지 못한 장미꽃들
상심의 가시를 달고 서 있었고
먼지 낀 기숙사 다다미방에 엎드려
책장마다 꿈틀거리는 글귀 위에 방점을 찍으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그해 겨울.
핏줄마다두근거리는 씨눈을 감춘 채
원사 몇 가닥으로 꼬여 나오는 말들
밤참을 먹으러 가는 식당길에는
푸푸 연신 푸념을 뿜어대면서
스팀 라인이 지나가고
보리떡 두 개와 물고기 다섯마리를 기다리던
손시린 겨울 새벽, 기름기 절은 작업복 위에는
단추 떨어진 시간도 꽂혀 있었고
살결이 드러난 여공들의 하품소리가
천원 미만의 눈발이 되어 붐비고 있었지.
뿌리 깊은 외로움으로 밤새운 원사공장
퍼렇게 살아오르는 산소용접기 불꽃 속에서도
열 입곱 내 목마름은 녹아나지 않은 채
핏줄마다 두근거리는 씨눈을 감추고
小惑星의 끝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1986년
◈동아일보
아라비아의 영가·2<강미영>
-오아시스
낙타도 쉬어가는 사막이다
나무야, 넌
뜨겁지 않니.
네가
불타는 태양에 몸을 사르고
기어이 만들어 낸 서늘한 자리
흐르는 땀보다 먼저
내 영혼이 달려가 쉰다.
사라보다 향기롭고
사라보다 훈훈하고
사람보다 넉넉한 나무야,
너는
사랑이다.
-사랑은
나를 버리는 아픔이리라-
밤마다 찾아와 타이르시고
돌아서 대문을 나서면 내 안에서
어김없이 버림받는 하느님.
한걸음 나가 걸을 때마다
발목에는 한 가지씩 더 죄목이 늘고
산다는 것이 오히려
날마다 한번씩 다시 죽는 내
가난한 목숨이여
오늘은
부끄러이 내가
네 서늘한 가지 끝에 걸려
울고 있다.
◈중앙일보
겨울 手話<최승권>
몇 몇은 보이지 않았다
졸업식 송사의 마지막 구절이
키 작은 여학생들을 일제히 흐느끼게 할 때
서울 어느 목공소 조수로 취직했다는 광오와
상급학교에 진학을 못한 상동이의 얼굴은
금간 유리창 너머 갈매기 두 마리로 날아오르고
교정 구석 단풍나무 한 그루로 선
나는 노을이 지는 바다를 훔쳐 보았다.
싸락눈 잘게 뿌리던 날
문뜰나루 건너온 그놈들이
조회시간에 불쑥 내민 김뭉치를 받았을 때
지방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서정적인 시골 중학교 선생님이 된 나는
그놈들의 부르트고 째진 손등과
교실바닥에 나뒹굴던 해우무침 조각을 보고
바다를 따라 흔들리는 유채꽃의 희망과
황토밭을 흐르는 고무마 줄기의 자유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했던 것일까.
해우 한 장보다도 얇은 졸업장을 추면서
바닷가 갯물냄새 투성이의 아이들과
마지막 뜨거운 악수라도 나누고 싶었지만
나는 빈 칠판에 갈매기 두 마리를 그리고
유리창 밑에 숨어 바다를 보며 울었다.
서울의 낯선 어둠을 깎는 대패질소리와
절망마다 강하게 내리박는 못질소리가
짧은 편지 가득 들려 오는데
앨범에 묻어두었던 흑백의 그리움이
문뜰나루 갈매기 울음소리에 섞여
옹암리 앞 푸른 바다로 출렁이는 것을 보았다.
◈한국일보
연장論<최영철>
우리가 잠시라도 두드리지 않으면
불안한 그대들의 모서리와 모서리는 삐걱거리며 어긋난다
우리가 세상 어딘가에 녹슬고 있을 때
분분한 의견으로 그대들은 갈라서고
벌어진 틈새로 굳은 만남은 빠져나간다
우리가 잠시라도 깨어있지 않으면
그 누가 일어나 두드릴 것인가
무시로 상심하는 그대들을 아프게 다짐해 줄 것인가
그러나 더불어 나아갈 수 없다면
어쩌랴 아지못할 근원으로 한쪽이 시들고
오늘의 완강한 지탱을 위하여 결별하여야 할 때
팽팽한 먹줄 당겨 가늠해 본다
톱날이 지나가는 연장선 위에
천진하게 엎드려 숨죽인 그대들 중
남아야 할 것과 잘려져 혼자 누울 것은
무슨 잣대로 겨누어 분별해야 하는가를
또 다시 헤어지고 만날 것을 빤히 알면서
단호한 못질로 쾅쾅 그리움을 결박할 수는 없다
언제라도 피곤한 몸 느슨히 풀어 다리 뻗을 수 있게
一字나 十字로 따로 떨어져
스스로 바라보는 내일이 있기를
수없이 죄었다가 또 헤쳐놓을 때
그때마다다 제각기로 앉아 있는 그대들을 바라보며
몽키 스패너의 아름다운 이름으로
바이스 프라이어의 꽉 다문 입술로
오밀조밀하게 도사린 내부를 더듬으며
세상은 반드시 만나야 할 곳에서 만나
제나름으로 귿게 맞물려 돌고 있음을 본다
그대들이 힘 빠져 비턱거릴 때
낡고 녹슬어 부질없을 때
우리의 건장한 팔뚝으로 다스리지 않으면
누가 달려와 쓰다듬을 것인가
상심한 가슴 잠시라도 두드리고
절단하고 혜쳐놓지 않으면
누가 나아와 부단한 오늘을 일으켜세울 것인가
◈경향신문
꿈의 이동건축<박주택>
1
목재를 실어 나르는 貨車를 타고
숲으로 가네
수맥을 짚어 한 모금의
물을 마시는 동안
구름이 어둡게 어둡게 몰려오지만
풀밭에 제비꽃 몇 장 숨기고 있겠지
훠어이 훠어이 부는 바람같이만
처음인 곳으로 가는 나중의 하늘
숲 속으로 들어서면 푸른 잎맥의 바다
물레를 잣는 어머니처럼 부드럽게
하늘이
내게로 내려와 물을 주시고
마을의 풀밭에 씨앗을 뿌리시고.
아하 바람은 한사코 내 머리 위에 머물러 있다.
끌로 땅 끝을 깎아 나무들 사이의 行蹟을 깎아
햇살을 모아 두면서, 바람의 옆모습을 지켜본다.
세계는 옆으로 열리고 열린 창문처럼
쑥뿌리가 내 겨드랑이털까지 휘감아 돈다.
2
뽑힌 노을은 東쪽 하늘에 머물러 있을 것인가.
창포 꽃잎이 티눈처럼 손바닥에 퍼지고
귀에 잡힌 푸른 공기, 푸른 목숨이 서럽게 느낄 무렵
가슴 속 얽혀 있는 내 生涯를 점치리라.
별을 보며, 넓적다리에 진득거리는 절망을 떼어다오.
어제처럼 노을 위에 누울 때
까마귀떼 내 발밑으로 돌아와 눕고
무릎 사이로 말할 수 없이 많은 강물이 빠져나가 시방, 내 앞을 지나가는 사랑 앞에 서면 반딧불보다 더 빛나는 나뭇잎들. 산이 되는 바람에 의해 숲을 건너온 강물은 팽팽한 슬픔을 만드는데
나는, 흡반으로 길고 먼 바다를 빨아들인다.
한 마름의 비단으로 아버지가 가슴을 껴앉네.
이 손바닥에 비쳐지는 단 하나의 바다. 우수의 불꽃,
안개 표지판 없는 生涯의 채찍을 몰아
西녘 하늘 굽이굽이 돌아 모두
내 집으로 불러들이는
내 뒤를 밟던 새떼.
3
손수 나의 흉금을 털어 놓자
화살 모양의 안개는 지평선 밖으로
과녁을 찾아 떠나가고,
나는 집 구조와 가구들을 이동시킨다.
강물 때문에 어느새 현기증이
높낮이의 생애를 닮아가도
나는 다시는 태양을 찾지 않는다.
처음으로 약속받은 땅의 일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이것은 바꿔지지 않는 것이므로.
다만, 나무들이 지평 위에서 나를 지켜보기 위하여
날마다 까마귀알을 받아낼 뿐이므로.
그러면서도, 생명을 낳고 뜨거운 혈맥을 찾아 계곡을 건너온 물소리가 굽이굽이 천정을 울리고, 허물을 벗는 바람을 얼러 등 굽은 회양목 아래서 또 다시 깊은 잠을 자리라. 그때는 겹겹의 사랑이 땅끝에서, 살아 있는 나를 눈물겹게 껴안아 주리라.
내 입의 불, 어두운 저녁녘에 그려내는 내 눈의 太陽.
꿈의 세계로부터 빛나는 아름다운 약속.
지평을 밝히는 꿈으로 새는 날아가고
머리에 불꽃을 이고 아침.
나는 잠을 깬다. 일찌기
내가 貨車를 타고 이주해 온 숲의 아침에
맑은 햇살이 거미줄을 투명하게 비춰주고
보물과 곡식들이 가득찬 나라에서, 말하리라.
깊이를 숨긴 고독 속 새로 남아
내 굴레가 무었이며
어던 속박으로 죄어드는가를.
그때, 사과나무에서 꽃이 피고
양떼들의 풀밭에 양떼구름이
어떻게 순례하는가를.
◈서울신문
수렵도<이진영>
눈 내리는 그 겨울 산야에서
나는 고구려의 사내와 함께 사냥을 하고 있었다.
고구려의 사내는 나무창을 들고
범의 뒤를 날쌔게 쫓아가고 있었고
나는 엽총을 든 채 그의 뒤를 숨차게 따르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나무창으로 범을 쫓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현대의 지식에 잘 숙달된 나에게는
총이 아니면 범은 잡을 수가 없는 짐승이었다.
또한 현대식 사냥은 짐승이 눈치채지 못하게 접근해
정확히 사격해야만 되는 것이었으며
사나운 짐승일수록 멀고 은밀한 곳에서 총을 겨누어야만
안전하고 노련한 사냥 방법이었다.
고구려의 사내는 더욱 힘차게 말(馬)을 달려
날쌔게 범의 뒤를 쫓아가 나무창을 던졌고,
그때 눈발 속에 나부끼는 그의 뒷모습은
건강하고 튼튼한 한반도의 참모습.
숨을 할딱거리며 뒤따라온 나를 향해
고구려의 사내는 날쌔고 용감해야
사나운 짐승을 잡을 수가 있다고
또한 힘과 땀과 온몸으로 사냥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정확한 사냥법이라고 웃으면서 조용히
일러주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현대의 지식에 깊숙이 물든 나의 머리뼈와
사냥 상식을.
눈발 멎은 하늘을 향해 마음의 백마가 큰 소리로 울었을 때
고구려의 사내는 범가죽과 함께 나무창을 내밀며
사슴을 쫓아가 보라고 말하였다.
몇 채의 산을 넘고 드,ㄹ판을 지나 나의 등줄기가 축축해졌을 때
아, 범가죽 위에는 어느새 사내의 이름이 풋풋하게 돋아나
바람결에 펄럭이고 있던 것을.
나의 나무창에도 온몸에도 땀과 힘이 푸르게 솟아나
한반도의 먼 힘줄기를 서서히 닮아가고 있던 것을.
비로소 나는 엽총과 함께 힘없는 현대의 지식을 눈더미 속에 파묻으며
강물처럼 그에게 말하였다.
나도 이제는 고구려의 사내로 말(馬)달리겠디고,
용맹스런 고구려의 사내로 말(馬) 달리며
범가죽 같은 나의 나를 남기기 위해
넓은 들을, 넓은 세상을 온몸으로 투신하겠다고.
이윽고 고구려의 사내는 야생의 백마를 타고 웃으면서
지평선 너머로 아득히 멀어져가고,
눈 내리는 그 겨울 산야를 힘차게 달리면서
나는 따뜻하고 포근한 겨울을 설매화처럼 싱싱하게
나고 있었다.
◈매일신문
신월동의 눈<김완준>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있다
이곳은 강서의 긑, 몇 대의 버스 종점과
번지 수보다 더 많은 가구들이 사는 곳
날마다 불도우저 삽질 소리 요란하게
남부순환도로의 한 끝이 파헤쳐지고
확인할 수 없는 서울의 한 끝이 허물어지고 있다
누구인가, 오랜 친구처럼
내 어깨 위에 쌓이는 이 눈은
또 어느 슬픈 죽음이 삐라처럼 휘날리고 있는가
언제부터인지 가난한 이웃들은
도시의 외고가으로만 밀려다니고
돌아갈 수 없는 그리운 땅을 위하여
이곳의 아이들은 종이배를 접지만
그들이 가닿을 꿈의 항구는 눈발에 가려 아득하고
밤이면 저 먼 샛강 위로
휘황한 서울의 생애가 떠내려 간다
오늘 하루 눈이 내려
강남과 강북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막히고
우리들 삶의 귀가길도 아득한데
지친 하루를 살고 돌아오는 젊은 가장이여
이제 당신들의 서울은
어디로 시린 발목을 뻗을 것인가
인간이 사는 마지막 동네를 찾아 떠나온
집배원 우편낭 속으로 눈발이 날려
기억할 수 없는 몇몇의 주소가 지워지고
매운 바람에 코를 씻으며 돌아다니는
아이들 한쪽 어깨가 젖고 있다
1987년
◈동아일보
돌 <손진은>
노당리 뒷산
홍수 넘쳐 물살 거친 계곡 밑으로
쪼그만 돌들
물길에 휩쓸려 떠내려 간다
노당리의 산과 들
지난 수십년의 계절과 햇빛 바람 다져넣고도
동으로 혹은 서으로 머릴 누이고
낯익은 백양나무 강아지풀 개구리 울음 뒤로 한 채
이 마을 사람들 대처로 대처로 나가듯
물살의 힘 어쩌지 못하고 떠내려 간다.
떠내려 가서
형산강 하구나 안강쪽 너른 벌판
낯선 땅에서 발붙이며
지푸라기 다른 돌들과 섞여 부대끼거나
길이 막히면
구비진 어느 구석 외진 도랑에서 비를 긋거나
구름자락 끌어 덮으며 길들여지다가
비가 오면 또 떠밀려 갈 것이다.
만났다가 혜어지고
그냥 안주하기도 하는 돌들의 행려(行旅)여.
몇몇 친숙한 식구가 떠난 뒷산 계곡의 남은 돌들
더 깊은 시름에 잠기고
세찬 여름비의 며칠이 지나고 햇빛 쨍쨍한 날
가슴에 이끼날개 달고
밤 속으로 은빛공간 열며
별이 되는 꿈을 꾸는
조약돌 몇이 얼핏 보인다.
◈조선일보
도계행<김세윤>
강원도 산간의 생나무 구르는 소리를
아득히 푸른 강가로 띄워 보내리
정월 대보름 아이들이 올라가
하늘에다 횃불을 당겼을 때
이쪽 능선에서 저쪽 산허리끼지
조그맣게 빛나는 것들이 달려갈 때
스쳐가는 화차의 꼬리는 보이지 않고
네 맑은 눈이 강물 위로 떠올랐다 사라져 간다.
터널을 빠져나오면 눈이 부셔
이름 없는 마을까지 황홀해진다
땅 전역으로 숨쉬는 고장
황비발 도게행 차창 밖에선
탄더미가 턱턱 숨을 막는다
달리는 철로 아래로
함성 내지르며 뛰어드는 눈
눈은 몸을 버리고 숨소리 하나로
검뎅이 묻은 사람들의 등을 어루만지다
강원도 산들을 온통 설경 속에묻는다
잠시 눈 그친 사이
아이들이 달려나와 들불 놓는다
멈칫멈칫 불은 꺼지고
어린날 목탄차를 타고 간던 저 들과 들을 지나
일어서는 땅 속의 검은 물줄기
연한 지각을 뚫고
지상으로 마구 솟아오르는
네가 바로 불꽃이구나,
봉홧불처럼 타올라 차창을 부딪혀 오는
네 뜨거운 폐활량이여
게딱지만한 탄광촌의 집들을 지나
눈 덮인 산을 돌아나와
이 산 저 산의 흰 말떼들이
아득히 푸른 강가로 굴러 떨어질 때
얼마나 숨차게 달려야 네게 닿을까
도계의 땅 밑에서 끓어오르는 마그마의 불 속으로
뛰어들며ㄴ, 네 작은 석탄 하나의
성채오아도 같은 막장으로 밝아오리
출렁이는 석탄차의 석탄들같이
따스한 이웃의 불로 다시 살아오르리
◈중앙일보
봉함엽서<이상희>
세상에 나와 이로운 못하나 박은 것 없다. 못 하나만 잘 박아도 집이 반듯하게 일어나고 하다못해 외투를 걸어두는 단정한 자리가 되는 것을, 나는 간통을 하다가 생을 다 보냈다. 시를 훔치려고 소설을 훔치려고 외람된 기호를 가장했다. 아, 나는 남의 것을, 모든 남의 몫뿐이었던 세상을 살다 간다. 간나한 눈물로 물그림을 그리던 책상은 긍지처럼 오래 썩어가게 해달라. 단 하나, 내 것이었던 두통이여, 이리로 와서 심장이 터지는 소리를 막아다오. 그리고 떳떳한 사랑을 하던 부럽던 사람들 곁을 떠나는 출발을 지켜봐다오.
◈한국일보
관찰법<송용호>
저탄장으로 귀가하는
화물열차의 기적소리로 수업은 시작되었다
밤새 바람은 나비처럼 석탄가루를 날라
마당 가득
꿈만큼이나 어지럽게 피어난 철쭉꽃잎 사이 사이에 뿌리고
나는 사분의 사박자 행진곡에
발맞춰야 할 내 춤의 한 귀퉁이를 비우기 위해
애써 거짓일기를 쓰곤 했다
아무리 해도 잘 풀리지 않던
우리나라의 산수과목 문제와 함께
자라는 것은 왜 이리 어려운 것일까
자주 나의 장래를 의심하곤 했다
잦은 어머니의 등교로 우수수 우수수 낙엽되어 쌓이던 나의 성적표
때때로 그곳에 산불이라도 나기를 바라며
무궁화꽃이 자꾸만 피고 져도 찾아내지 못하던
이 다음에 내가 해야 할 숙제를 미리 걱정하곤 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새 이름표를 달듯 쉽게 바뀌곤 하던 내
희망의 간이역에서
종종 발견되곤 하던 절망의 상처에
어머니는 빨간약을 발라 주셨지만,
유년의 계획표는 가뭄처럼 갈라지고
국민학교 6학년을 마감하는 생활기록부에는
불안한 졸업이
버즘처럼 피어 있었다
◈경향신문
맨발로 걷기<장석남>
생각난 듯이 눈이 내렸다
눈은 점점 길바닥 위에 몸을 포개어
제 고요를 쌓고 그리고 가끔
바람에 몰리기도 하면서
무언가 한 가지씩만 덮고 있었다
나는 나의 뒤에 발자국이 찍히는 것도 알지 못하고
걸었다
그 후 내
발자국이 작은 냇물을 이루어
근해에 나가 물살에 시달리는지
자주 꿈결에 물소리가 들렸고
발이 시렸다
또다시 나무에 싹이 나고
나는 나무에 오르고 싶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잘못 자란 생각 끝에서 꽃이 피었다
생각 위에 찍힌 생각이 생각에
지워지는 것도 모르고
◈서울신문
어머니의 겨울<유강희>
할아버지 산소가 멀리 보이는 무너져내린 언덕에
어머니는 몇천 년 눈물로 헹구어 온 보리씨를
朝鮮의 한 뼘 가슴을 파고
그 기인 어둠 홀로 찍어 삼키며
박속 같은 얼굴로 뿌리시었다.
건너 들에 마른 이마 때리는 눈발이 내리기 전
우리들은 서둘러 우리들의 鳶을 만들어야 했다.
생전 할아버지의 숨결 푸른 마음으로
대쪽을 가르고 다시 잘라 다듬어서
山脈처럼 이어온 끈끈한 人情의 밥풀을 먹여
새 날개 같은 흰 옷의 韓紙에 붙이면
그대로 살아오신 우리들 어머니 모습
우리들은 언덕보다 커다란 연에 따순 핏줄 같은 연줄을 매달아
보리밭 위로 날리기 시작했다.
감나무 깨죽나무를 지나 시암골 너벙바위를 넘어
하늘 높이 마악 솟구쳐 올랐을 때
활처럼 보리밭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그 흰 모시 수건이 보였고,
여름 한낮 날빛 번개가 휘두르고 간
어머니의 그 갈라진 발바닥 틈으로
가을 하늘보다 맑은 江물이 흐르고 있음을
아니 그보다도 그 하늘보다도 겨울의 언덕을 넘어
어머니의 보리밭이 불길처럼 새파랗게 타고 있음을
마을로 마을로 더 큰 마을로 타들어가고 있음을.
1988년
◈동아일보
四季<김정희>
겨울강
잠자거라. 발목 삔 강물아.
밀어내지 않아도 저 혼자 가는 밀물처럼
너를 쉬게 하는 저 얼음을 뛰어 오르지 마라.
바위가 때리고 돌이 넘어드릴 때 생긴
떨고 있는 생채기마다
얼음이 두꺼운 붕대로 감기고 있다.
봄의 손길에도 그 붕대 풀지 마라.
시간에게 긴 머리 잡혓던 강물아.
돌
냇물 속에 저 돌을 보아라.
제 살 제 뼈 모두 냇물에 주고
산에서 바다까지 집시가 되어
제 손 잡아 줄 물품 하나
제 몸 안아 줄 바위 하나 찾아서
밤이나 낮이나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뛰는 것 보아라.
갈대
여름이 다 갈 때까지
무겁게 누르던 흐린 하늘을
너는 창이 되어 찌르고 찔렀다.
벼도 보리도 비껴 간 논둑 밭둑에서
억세게 자랄 수 있는 검은 방죽에서
나뭇가지 꺽는 바람도 베고 베었다.
늦가을이 먼 길 떠나는 지금
어디선가 포복오는 바람에게도 너는
허연 머리로 서서.
나팔꽃
목련나무 그늘에 주저앉은 나팔꽃
소리 없는 소리로 나를 부르다
모가지가 비비꼬여 파랗게 운다.
자기 머리 자기 발로 밟고
끊어지도록 비틀고 비틀리며
손 벋어 절망 한 줌 잡으며
높이 기어 오른다.
◈조선일보
兩水里에서<권대웅>
江에서 사는 사람들은 江을 닮아간다
그물을 올리면서 그들은 자기 가슴에 남은 양식을 확인한다
인자한 아버지처럼 칭얼대는 물의 투정 위에 돛대를 풀어놓고
말없이 강바닥을 넓혀가는 그들
그물을 따라 자주 세월의 아픈 흔적도 따라 올라와
멀리 流轉하는 구름 한번 바라보며 고개 숙이면
사무친 물속 깊이 올라오는 물방울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철없는 물고기떼 무심히 지나갈 때
홀연 슬픔이 많은 모습으로 저녁 햇살은 떨어지고
물살에 입술 부비는 노을 애태우지 않아도
알지 내 알어. 고개 끄덕이며 자기 가슴에 묻고
지금 살아있는 것들
무수히 파닥이는 것들 다스리며 돌아오는 그들
그윽한 깊이 감추며 後光에 비치는 붉은 얼굴
모두들 쳐다볼 때
허, 손 한번 흔들어 물속에 어우러지는 그들
햇빛에 탄 팔뚝은 푸드득 튕기는 한 마리 잉어처럼
그물을 펼쳐 생기찬 양식을 풀어 던질 때
물풀같이 미끄러운 女子들의 손가락
물의 깊이를 헤아려
가슴에 江이 흐르는 여자는 얼마나 따뜻할까
젖은 몸 푸릇한 내음 풍기며
낮게 낮게 가라앉는 풀잎
멀리 눈을 들어 젖은 머리카락 돌아서는
물푸레나무 그림자 길게 드러눕고
어슴푸레 짙어오는 어둠 속으로 일찍 돌아가는 그들
알고 있는 것일까
두 갈래의 물이 만나는 슬픔
어우러져 한데 흘러가야 할 세월
밤이 되자 물새알 같은 달이 부풀고
江의 아픈 늑골로부터 피어오르는 안개, 안개
물의 조상으로부터 받은 계시
그들의 法으로 잠든 밤 이 밤에 벌어질 반란을
절룩거리며 절룩거리며 수없이 밀려오는 강의 역사를
안개의 아픈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일까
고요와 적막에 묻혀
물 뒤척이는 소리 깊은 밤
그래 알지 알어 꿈속에서도 물과 함께 어우러져
江에서 사는 사람들
江이 흘러가야할 세월을 다스린다.
◈중앙일보
1987년 11월의 新川<안상학>
신천교가 보이는 길목을 지켜선
가로수는 하나 둘 가을 흔적을 지우고
팽팽하게 바람을 안고 있는 선거 현수막은
가지를 붙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강남약국 앞 버스정류소는 무인 판매대에서
문득 주워든 때 지난 조간신문
사람들이 표표히 떠도는 모습을 배경으로
현수막에 붙박힌 무표정한 이름들이 웃고 있다
순간 사회면에서 비상하는 철새들
왜가리 청둥오리 두루미 고니떼 무리
을숙도에 잠시 머물다 북상할 거라는 短信
저 썩어 흐르는 산천에도 철새는 날아올까
검은 물만 흐르는 신천 가득
철새는 날아올 수 있을까 날아와
저렇게 시린 발목을 담그고 있어낼까
신천을 가로지른 철교 아래
신천동 산동네 사람들이 모여 나와
영세민 취로 사업을 벌이고 있다. 철새무리
장화를 신고 오물을 건지는 아저씨, 철새
수건 미리 쓰고 돌 나르는 아줌마, 철새
허접쓰레기소각하는 할머니 철새, 할아버지
철새, 매캐한 연기는 바람부는 방향으로 누워 흐르고
하천둑에 붙박힌 녹색 깃발은 제자리 펄럭임을
하고 있다 정오 한때
낮은 하늘에 걸린 전투기 한 대 여전히
철새는 날아오지 않고 사람들이
식어버린 밥을 먹고 모닥불 가에 모여든다
천변 봉제공장 여공들은 잠시 은행잎처럼
몇몇은 담장 밑에 옹송거리고 앉아 있고
더러는 노점 떡볶이를 먹으며 재잘대고 있다
늦가을 바람에 날리는 햇살 속에서
낙엽들만 철새처럼 와그르르 몰려 다니는
저 썩어 흐르는 신천은 무사해도 되는가
무사해도 되는가
◈한국일보
바둑론<성선경>
우리가 스스럼없이 우리라고 부를 때
바둑을 두자, 아우여 돌싸움을 하자.
생나무 자라는 소리 쌩쌩한
남녘의 아랫도리 그 어디쯤에서
청동빛 말씀이 내리던
백두의 천지 그곳까지
날줄과 씨줄의 모눈을 메우며
우리들의 날들이 오로지 나아가야 할
길닦음을 해보자
때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약속과
산수문제처럼 부대껴야 할
어려운 숙제를 풀어가면서
내가 온 봄날의 잡꽃을 피우며
단발령, 추자령, 숨가쁘게 치올라갈 때
너는 또 대둔산, 멸악을 넘어
잘 익은 강르의 단풍잎 물들이기로
그렇게 내려오라
큰 강물이 양수리에서 만나듯
휘휘 휘둘러 강강수월래 같은
돌싸움을 붙여보자. 고싸움을 해보자.
세상의 비어 있는 자리를 서로 메우며
한상 가득 고봉밥을 마주할 수 있다면
꼬이고 꼬여서 만두속 같은 세상도
또 한 판 훌륭한 그림그리기 아니냐
흑이다 백이다 온 들에 모눈을 메우며
삼천리 화려강산 모자이크를 그려도
우리가 풀어야 할 숙취 같은 것
시원히 아침의 해장을 하지 않으면
언제 저 넉넉한 태평양 대서양
우리의 집 한번 만들어 보겠느냐
우리가 우리라고 스스럼없이 부를 때
스스로 셈하여 볼 내일도 있는 것
큰 강물이 양수리에서 만나듯
휘휘 휘둘러 강강수월래 같은
돌싸움을 붙여보자, 고싸움을 해보자.
◈경향신문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 스케치<조현석>
1
한밤의 심한 갈증, 깨어나, 얼어붙은 빗장을 연다. 꿈꾸는 철길, 달빛 내리고, 이상하다 숨죽인 나는, 오랜 갈증을 느끼며, 소양교 난간 나트륨 등빛의 겨울을 뒤집어 쓴 화가, 만난다 바람이 지난 후
저절로 닫히는 덧문, 내 혀가 끼인다.
2
달빛 없는 밤.
서럽게 운다, 절반의 어둠이 가리운 문틈에 끼인 붉은 혀와 초저녁부터 바람에 술렁이던 마을을, 문밖 세상으로 돌아간 화가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애당초 말을 하고 싶었다
짧은 혀 끝으로 더듬거리는
말을 하고 싶었다
겨울은 언제 시작하였는지, 눈을 감자
잠의 바닥에 깔린 들판을 가로질러
밤새워 폭설이 덮이고, 이미 낮은 세상은 더 낮아지고, 길눈의 거리에서 오도가도 못하며 몇 겹의 죄를 이고 지금 나는 섰는가
3
입을 굳게 다물어도 나의 고백은 쏟아지고
얼어간다. 놀라운 폭설이 그친
하늘은 고요하다, 붐비던 개찰구를 빠져나간
나의 꿈은 검은 버들처럼 잎지는
텅빈 驛舍에서 겨울로 지고 있다.
4
불투명한 유리가 깔린 땅 속으로 녹아내리는
내 속울음이
뿌리 내리는 겨울숲 사이
얼지 않은 물소리가 조심스레
한 옥타브 낮게 늦은 오후를 가득 메우고
짓눌린 오후를 떠다니는 아, 그 그
화가의 떠나지 않는 겨울
숲, 낮게 내려온 하늘을 깡마른 손으로 더듬는
겨울숲, 찾아드는 밤새떼, 종일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나무, 또 눈이 내리고
숲에서 잃어버린 말이여,
나의 근시안에 각질의 어둠이 배고
순간, 온 마을이 일제히 켜드는 불빛
살아 있을 누군가의 지상에 덮인
눈이 부시다 눈이 부시다.
◈서울신문
오이도<이효숙>
1
섬의 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멀미를 겨워하던 이웃들은 하나씩 짐을 구렸다.
비워낸 장궁처럼
더 이상 불빛이 보이지 않는 빈 집의 문들은
어둠 속에서 저 혼자 펄럭이고
허기진 별들은 버려진 그물더미를 갉아 먹으며
궁색한 밤을 비워내고 있었다.
아무와도 약속하지 않았던 새벽은 어김없이 찾아오고
새벽의 근처에서
싸늘한 바다를 물어뜯던 까마귀떼.
죽음 몇 뿌리 헹궈내던 그 바다에서
양식(糧食)처럼 자라나던 굴들의 여린 살과
해초의 푸른 머리칼로 밥상 위를 가늠하던
아, 아 지금은 울부짖다 목이 쉰 침묵의 섬.
바다 위로 우우 몰려가며 가래끓던 바람 소리도
아주 가버리거나
절벽 아래서 검붉게 피멍든 채로 누워 버렸는지
사방은 허물어진 소문과
플래스틱 문패 속에 버려진 이름들이 나뒹굴고
등지고 돌아누운 아버지의 잠 속에서
한때 은빛 조기떼의 달아오른 깃발이 드날리는데
이제 제발로 떠난 뱃길로 다시 나아가지 않으리라
2
문닫은 횟집 앞에서
나는 흔들리는 세상과 술을 마신다.
잔 속에서 흔들리는 낮달의 지느러미.
낡은 발동선이 햇볕에 바짝비짝 말라가는 풍경을 보며
별타는 목젖에 조개국을 흘려 넣으면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석유 냄새에
역하게 진저리를 친다.
바라보면 바다는 한 장의 푸른 손바닥.
가끔은 오이도의 뺨을 치며 일깨우기도 했건만
도시의 불빛이 밀물 끝에 말려오던 때
그 불빛읋 등지고 떠난 어족의 날카로운 예감은
이웃들의 가벼워진 고향을 끌고
어디일까, 새 물살이 그리운 나라로 몰려가 버리고
위태롭게 수선의 외줄을 타고 오던 봄도
기다림 속에 남아 있지 않은데
이제 떠내야 할 땅에서
마지막 남아 있는 정직한 절망은
녹슨 닻에 걸려 풀잎 몇 줄기 쏟아 놓는다.
3
들리는가.
깊은 잠의 언저리를 다가오며 흐느끼는 저 소리,
거센 폭풍이 바달ㄹ 휘감고
찌그러진 양은 대야가 낮은 지붕을 넘나들 때
나의 탯줄을 잘라주던 그 날의 섬이
말라붙은 젖줄을 더듬으며 우는 소리가
건넌방에서 귀없는 아버지가 짐을 챙겼다.
뒤척이는 선잠 속에서
묻어야 할 이웃들의 흰 뼈가 굴러다니고
베게 밑으로 밀려온 염전의 바닥을 긁어
나는 눈물만큼
한 움큼의 소금을 씹어 보았다.
파래속 같은 가슴을 지니고 남아 있던 몇몇 사람들과
새벽배에 오르면서
우린 내내 안개 속에 가물거리는 오이도를 바라보았다.
아직 많이 남아 있는 우리들의 끼니를 걱정하면서,
드문드문 보이는
기억속의 겨울 이빨을 하나씩 뽑아내면서,
바다의 싱싱한 살점으로 퍼득이던 오이도여.
아버지의 젊은 날의 왕국이여.
아득히 멀어지면서
나는 ㅈ;도 속에 단단하게 굳어진
서해 바다의 눈물 한 점을 지우고 있었다.
언제고 먼저 찾아올 건강한 바닷새들의
나직한 둥우리를 위하여.
◈매일신문
간이역에 내려<강남옥>
더 이상 갈 수 없어 내렸습니다. 종점이 가까운데 정당 잡혀온 내일은 바닥났고 생각은 호주머니 속에서 잠 잡니다. 날 저물어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적막강산에 맨몸으로 뛰어든 눈발만 한없이 반가워 지쳐 때묻은 뼈를 묻을까 잠시 비장한 궁리 합니다만,
끝없는 우리의 희망 같은 것일까요? 눈 덮인 山河 어둠의 한 끝을 녹이며 달려가는 붉은 눈시울의 차창은. 어디서 우리는 거짓없이 절망할 수 있을레는지.
며칠 이 곳에 묵으며 피차 이름 석자 건네지 않아도 낯익은 슬픔 어깨 기대어 나누어 떨 요량입니다. 남은 희망에서 춥고 흐린 날을 제한 따스한 백일몽을 셈하며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곳에서 또 다시 처음인 듯 래후할 날을 재촉하겠습니다. 별빛일지, 아직은 확시리 않은 얼굴들 새벽 첫차 바람부는 플랫포옴에 떠 오르는군요. 저들에게 아름답게 손 흔들어 인사하고 싶습니다.
마지막 서랍을 열어 주십시오. 소용 닿지 않을 유품과 길고 긴 유서에 부끄러움 전합니다. 삶과 죽음을 우롱한 죄값은 살아가면서 차차 갚아드리겠지만 다시 만날 땐 거짓 우울에 함구하겠습니다.
그 곳에도 해가 떴겠지요. 밤이 다하면 아침이 오는 이 평범한 진리를 낯선 곳에서 눈물로 수긍해야 하다니. 지나쳐온 눈물보다 겪어야 할 즐거움 더 많다고 속삭여대는 저 ㄴ누발에 새로운 은유를 찍으며, 아, 속는 셈치고 기꺼이 속아 넘어가겠습니다. 뒤늦은 깨달음에 기대 앞세우고 마중나와 주시길 바라면서
또 소식 드리지요.
1989년
◈동아일보
우리들의 고향<배진성>
길이 있는 풍경
나는 밭 가운데 너뷔바위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시성은
고춧대 하나에 꽃혀 있었다
외토리처럼
뽕나무 가지 버팀목이 없었다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
고춧대가 휘청거렸다
또 한 마리가 드디어 꼬꾸라졌다
새는 약속처럼
한꺼번에 떠났다
고추나무는
끝끝내 일어서지 못햇다
그러한 밭에서 걸어나온 길로
젖은 여자가 걸어가고 있었다
밤하늘은 반란이다
고향의 밤, 별들이 싸운다 밤 하늘은
반란이다 바람이 분다 쓰러졌다, 다시
넘어진다 별은, 쌈질하는 입이다 주점
젊은 여자의 열린 자궁 속이다 길들이
제 골목을 찾아 들어가도 동네는 앞으로도
시끄럽다 물소리도 밤하늘을 쥐어뜯으며
이어져 흐른다 그래도 사랑하는 고향, 우리집은
골목 끝으로 몰렸다 동네의 개들은 무리지어
일제히 짖어댔다 끝에 내달린 우리는 건너로
이어지는 길을 보았다 바람에 쓰러진 곡식들이
줄기로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고, 솟아올랐다
태풍의 눈이 다시 무섭게 쏘아보았다 우리들의
다리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포식한 어둠은
허연 이빨을 드러내고 악을 썼다 뭉둥이질
낫을 들고 휘둘렀고 쇠스랑으로 후려
갈겼다 무덤 속에도 하늘이 있었다 떠가는
흰구름 변두리 걸린 폐곡선에
갈라진 고향의 고샅길들이 감기고 있었다 그
하늘 속에는 메마른 공동우물이
파헤쳐져 있고 동네 사람들은 거꾸로 매달려,
◈ 조선일보
풀(2)<노용희>
너의
숨쉬는 자유의 머리칼은
가장 고독하게 남아 있는
시대로부터 불어오는
찬 바람의 언어로 시작된 꿈.
그 바람 타고
원시의 멜로디로 이는 아픔이
구도(求道)의 노래로 불릴 때까지
선명한 아침의 깃털로
발목 묶인 사랑의 전통이 뿌리째 무너지던
지난날의 이불 속을 털자.
지극히 간단하나 결코 그치지 않는
가락으로
삶이 가난한 잎새로 호흡하며
떨고 있을 때에도
나는 변하고 싶었다. 향기 없는 꽃으로라도.
그러나 샘물이 흐르는 우주는
언제나 우리의 잠 속에서
껍질을 뚫는 청결한 잎,
피어나는 진동음의
까다로움을 기다리고 있었네.
지상의 아름다움을 모독한
내 불륜의
가슴 아릿한 기억까지도
부적처럼 몸에 감추고서
서리 낀 바람 위에 이렇게 쓴다.
불러다오, 아픔을 위한 노래.
내 헝클어진 영혼의 지독한 방황과
부서짐과 거듭남을 위하여.
◈중앙일보
뿌리에게<나희덕>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나의 막 갈구어진 연한 흙이어서
너를 잘 기억할 수 있다
네 숨결 처음 대이던 그 자리에 더운 김이 오르고
밝은 피 뽑아 네게 흘려 보내며 즐거움에 떨던
아 나의 사랑을
먼 우물 앞에서도 목마르던 나의 뿌리여
나를 뚫고 오르렴,
눈부셔 잘 부스러지는 살이니
내 밝은 피에 즐겁게 발 적시며 뻗어가려무나
척추를 휘어접고 더 넓게 뻗으면
그때마다 나는 착한 그릇이 되어 너를 감싸고,
불꽃 같은 바람이 가슴을 두드려 세워도
네 뻗어가는 끝을 하냥 축복하는 나는
어리석고도 은밀한 기쁨을 가졌어라
네가 타고 내려올수록
단단해지는 나의 살을 보아라
이제 거무스레 늙었으니
슬픔만 한 두릅 꿰어 있는 껍데기의
마지막 잔을 마셔다오
깊은 곳에서 네가 나의 뿌리였을 때
내 가슴에 끓어오르던 벌레들,
그러나 지금은 하나의 빈 그릇,
너의 푸른 줄기 솟아 햇살에 반짝이면
나는 어느 산비탈 연한 흙으로 일구어지고 있을테니
◈한국일보
꼽추<김기택>
지하도
그 낮게 구부러진 어둠에 눌려
그 노인은 언제나 보이지 않았다.
출근길
매일 그 자리 그 사람이지만
만나는 건 늘
빈 손바닥 하나, 동전 몇 개뿐이었다.
가슴 등뼈 아래 숨어사는 작은 얼굴 하나
시멘트를 응고시키는 힘이 누르고 있는 흰 얼굴 하나
그것마저도 아예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았다.
하루는 무덥고 시끄러운 정오의 길바닥에서
그 노인이 조용히 잠든 것을 보았다.
등에 커다란 알을 하나 품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
태아처럼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곧 껍질을 깨고 무엇이 나올 것 같아
철근 같은 등뼈가 부서지도록 기지개를 하면서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아
그 알이 유난히 크고 위태로워 보였다.
거대한 도시의 소음보다 더 우렁찬
숨소리 나직하게 들려오고
웅크려 알을 품고 있는 어둠 위로 종일 빛이 내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경향신문
풍자시대에서-Video의 꿈<조기원>
여기는 17inch의 꿈과 사랑 그리고 당신이 원하시는 충족량의 서스펜스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마음껏 즐기시기를······ 태양계 한쪽에선 유성들이 별빛을 털며 사라져가고······. 치지익 치익······ 우리들의 애인은 전자오락실에서 갤러그 십만점을 역사적으로 돌파하고 있었다········· 치지직 칙···.. 경찰은 결코 여러분과의 충돌을 원치 않읍니다 민족의 앞날을 지켜나갈 여러분,학생 여러분의 주장과 요구는 조국과 민족을 아끼는 여러분의 뜨거운 충정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우리 경찰들은 잘 알고 있읍니다 그러나 과격한 시위는 여러분의 이같은 애국심을 의심받게 할 뿐이며 학생-시민-경찰 모두에게 피해만 주게됩니다. 경찰은 여러분들이 돌을 악······ 치이- ㄱ 사과탄 맞아 휭한 가슴 달콤한 아몬드로 고독을 달래십시요 루루 아몬드 초코렛······ 도시재개발사업이란 허울좋은 이름 아래 도시 빈민들의 생존권이 무참히 악 치지직 칙······사당······칙지직···.치지직···물자절약을 생활화합시다.공익광고협의회············ 휴먼테큰의 명성을 얻고 있는 주시회사 별하나는 노동자를 협박.회유.납치하는 데만 120억 악 칙······치 치지직······ 아 아 종종 공포는 좌절을 부르러 가고······ 치지직 칙······ 어머니 이젠 지쳤어요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마 모든 재벌의 상속된 재산에 대한 정당성은 재산의 이익을 사회에 환언한다는 조건에서만이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솔직한 심정입니다········· 치지- 치직 치- ㄱ·············· 노동자의 눈물과 피를 짜아내 만든 별하나 제품 절대로 쓰지 맙··· 억··· 아 여기는 관제된 아니 통조림의 세계 완제품만이 유통과정에서 우리를 만족합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오랜 공장생활이 여성근로자들의 「여성상」과 「모성」을 파괴시킨다는 칙······ 그때. 그의 나이 스물 둘 이었다. 눈물지며 교정밖에서 외치는 어머니의 울부짖음 아, 어머니 모포 네장을 덮어도 치가 떨리며 역력히 보이는 당신의 사랑 어머니 우리는 이렇게 떠나야만 했읍니다············ 애야 네가 아니더라도········· 애야 제발······ 치직 치-ㄱ······ 최종합니다 재벌들이 기부한 돈은 노동자의 식탁에서 콩나물 하나와 멸치 두마리 그리고 생선 몇 토막쯤 빼앗은 바로 그것이 아니냐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이런 시각에서 단 한번의 보도도 봇한 언론도 책임을 치직 억··· 치지직······ 그 해 눈이 내리고 인공위성은 치근거리며 지구를 맴돌고 몇 마리의 워키토키 같은 쥐들이 우리를 기웃거리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서울신문
비 갠 아침<김우태>
비 갠 아침
어머니가 울타리에
빨래를 넌다
간 밤
논물 보고 온 아버지의 흙바지며
흰 고무신
천둥번개에도 꿈 잘 꾼
손자녀석 오줌바지
구멍난 양말들이
햇살에 가지런히 널려간다
쪼들리는 살림일수록
빨래감은 많아
젖어 나뒹굴던 낱낱의 잡동사니
가렵고 눅눅했던
이불 속 꿈들이
줄지어 널려가는 울타리에
오이순도 넌출넌출 감겨 오른다
빗물 빠진 마당가엔
풀새들이 눈을 뜨고
지붕 위 제비떼 날개 말리는
비 갠 아침
어머니가 빨래를 넌다
꺾인 팔은 바로 잡고
꼬인 다리는 풀어 주며
해진 목덜미
닳은 팔꿈치
아무리고 다독이면서
새옷보다 깨끗한 빨래를 넌다.
◈대구매일신문
겨울판화<박윤배>
헛배가 자꾸 불러온다
비닐포장 처마 위에 눈이 쌓이고
얼음꽃 차디찬 이마 뉘인 고등어들
비린내 상자에 잠겨서 지느러미를 꺾고 있다.
등줄기 시퍼런 파도가
살갗에 달라 붙는 소금알 몇 개를 닦아내고 있다
눈 치켜뜨고 살아가라고
사람들 얼마나 싱싱한가를 물어오고
가게주인은 몇 흡 소주에 취해
코 골며 망을 보는 한 폭 그림 속
어머니 심부름으로 달려온 아이 하나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어
서성이는 겨울 저물 무렵
살소름이 점점 선으로 돋아나고 있다
바다 앞에 멈춰선 벼랑처럼
내가 발라낸 잉크는 미끄러지지 않고
머뭇거리는 추위 몇이 얼핏 보인다
앙상한 활굽이 등뼈로 누워
칼도마 위에 얹혀질 순간을
다물지 못한 입으로 가다리고 있는가
스물스물 죽음 도려낼 칼날을
귓밥 얼얼하게 지켜보고 있는 나는
분명 새겨 넣고 싶은 것 있어
굳은 피 혈관 속으로 세모칼을 밀어넣는다
흰 등뼈로 누워서만 살 수만은 없음을,
그리하여 완성되는 겨울 판화여
찢어진 부레로 눈발은 가볍게 내리고
싱싱한 뼈도 일으켜 세워야지
허무와 슬픔 뭉쳐진 대가리는
어느 집 싱거운 개가 물어갈지라도
가물가물 흐려진 풍경 속에 찍혀질
몸뚜어리 너는 늘 푸른 원목이여
나이테 눈물 중심부에 과거도 그려 넣어야지
사람들 고픈 배로 바라보던 고등어
내장 꺼내 던진 서러웠던 날도 있어
온기 나누고 싶어지리라
죽어 있던 이십대의 숯불심장 위로도
세상의 죽어 있는 것들에게도
소금 같은 눈발 한 줌 뿌려지고
불기둥 세우고 달려나갈
펄떡펄떡한 지느러미를 아프게 새겨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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