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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유형문화재 제15호 (선농단 동대문구) 선농단 시도유형문화재15호(동대문구)
우리나라는 본래 농본국(農本國)으로서 조선(朝鮮) 태조(太祖) 때부터 한양(漢陽) 동교(東郊)에 농사와 인연이 깊은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을 주신(主神)으로 단(壇)을 모으고 국왕(國王)이 친히 나가 풍년(豊年)을 기원하였는데 그 단을 선농단(先農壇)이라 이름하였다. 선농단 앞에는 적전(籍田)을 마련하고, 제(祭)가 끝나면 왕이 친히 밭을 갈아 농사의 소중함을 만백성에 알리었는데, 이때 농부(農夫)들 중에서 고령다복(高齡多福)한 사람을 뽑아 임금을 도와 봉행(奉行)케 하였다. 이 친경(親耕)은 조선(朝鮮)의 마지막 황제(皇帝)인 순종(純宗) 융희(隆熙) 3년(1909)까지 계속되었다. 이 행사(行事) 때 모여든 많은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하여 쇠뼈를 고은 국물에 밥을 말아낸 것이 오늘날의 설렁탕의 유래(由來)다. 선농탕(先農湯)이 설렁탕으로 음(音)이 변한 것이다. 사적 제436호 지정됨에따라 2001년12월29일 해지.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15호 (범어사 당간지주 금정구) 범어사 당간지주 시도유형문화재15호 (금정구)
산지를 이용한 특이한 가람배치로 잘 알려진 범어사는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조건이 아름다운 곳이다. 숲 한가운데 수많은 비석과 유물들이 있는데, 이 당간지주도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설치하는 것으로,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이곳에 당이라는 깃발을 걸어둔다. 깃발을 다는 길쭉한 장대를 당간이라 하며, 당간을 양옆에서 지탱해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드물게 당간이 있으나 대부분은 두 기둥만 남아 있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기단(基壇)과 당간의 받침돌이 모두 사라지고 양쪽의 두 기둥만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기둥 윗부분 안쪽면에는 당간을 고정시켰던 네모난 홈을 두고 양 기둥 끝은 곡선으로 처리하였다.
대구시 유형문화재15호(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 동구) 북지장사 석조지장보살좌상 시도유형문화재15호(동구)
대구의 북지장사는 고려 명종 22년(1192)에 창건되었으며 불상은 북지장사 대웅전 뒤쪽 땅속에서 발견된 것으로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다. 얼굴은 온화한 인상으로 단정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으며, 왼손에는 보주(寶珠)를 들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을 아래로 향하고 있다. 양쪽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은 주름의 조각선이 가늘고 약하게 형식화되어 시대가 뒤짐을 보여준다. 머리의 형태나 손에 든 보주 등으로 미루어 보아 지옥의 중생을 구제한다는 지장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이며, 단정한 자태와 온화한 인상 등으로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추정된다.
인천시 형문화재15호(용궁사 중구) 용궁사 시도유형문화재15호(중구)
영종도 백운산 동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용궁사는 신라 문무왕 10년(670)에 원효대사가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철종 5년(1854)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세워지며 지금의 명칭인 용궁사로 바뀌게 되었다. 용궁사에는 관음전·용황각·칠성각·요사채 등의 건물과 최근에 만든 높이 11m에 달하는 미륵불이 있다. 용궁사 관음전은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집이다. 기둥에는 해강 김규진이 쓴 글씨(주련)가 4개 남아있다. 내부에는 본래 옥으로 조각한 관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일제시대에 도난당하고 현재는 청동관음상을 모시고 있다. 또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요사채는 맞배지붕집이며, 건물 앞면에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쓴 ‘용궁사’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대전시 유형문화재15호(조천진장 대덕구) 조천진장 시도유형문화재15호(대덕구)
조선 인조 5년(1627) 청음 김상헌(1570∼1652) 선생이 명나라 사신으로 북경을 왕래할 때 지은 기행시문이다. 김상헌은 청백리로서 좌의정을 지내고 병자호란 때 화친을 반대하다가 중국 심양에 불모로 잡혀가 6년간 옥고를 치른 절의가 높은 명현이다. 이 시문은 당시 서장관(書狀官)으로 동행했던 김지수에게 주어진 선생의 친필본으로, 김지수가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이다. 시문 뒤에는 현지에서 명나라 학자와 필담을 나눈 종이와 김지수가 죽은 후 예조에서 시호를 ‘정민(貞敏) ’으로 선정하여 내린 망첩지가 붙어 있다. 이것은 후에 『청음집』의 원본이 되기도 하였다.
광주시 유형문화재15호(원효사 소장 만수사 범종 북구) 원효사 소장 만수사 범종 시도유형문화재15호(북구)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총 높이 86㎝, 몸체 높이 66㎝, 입 지름 63㎝인 범종이다. 종을 매다는 부분인 용뉴는 각각 여의주을 물고 있는 2마리의 용으로 장식하였는데, 용머리 위에도 불꽃에 휩싸인 1개의 여의주을 장식하였다. 용머리 장식이나 발의 조각기법은 약간 경직되어 있다. 음통을 대신하여 종의 윗부분에 2㎝ 정도의 구멍을 종의 윗부분에 뚫었다. 종 위쪽 띠에는 범자 문양 띠를 둘렀으며, 띠 아래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4구의 보살상이 동일선상에 번갈아 배치되었다. 유곽과 보살상 사이에 왕실의 안녕을 비는 글이 새겼다. 유곽 안에는 연꽃무늬의 바탕에 연봉오리 모양의 9개의 유두가 도드라지게 새겨 있다. 범종에 새겨진 여래상과 유곽(乳廓)아래“강희사십구년경인사월일추월산만수사대종주성야(康熙四十九年庚寅四月日秋月山萬壽寺大鍾鑄成也)”라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어 이 종이 1710년에 주조된 담양 추월산 만수사의 대종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언제 원효사로 옮겨졌는지 알 수 없다. 유곽 아래에 새긴 글로 보아 이 종이 숙종 36년(1710) 만수사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은 몸체 높이와 입 지름의 비율이 거의 1:1로 전형적인 조선종의 비율을 지니고 있으나, 용뉴 부위의 표현이 경직되고 음통대신 음구멍을 넣는 등 양식의 퇴화가 엿 보인다. 또 당좌 및 하대의 문양이 없어지는 등 조선후기 범종의 특징이 나타나는 점에서, 범종의 양식 변화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울산시 유형문화재15호(문수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울주군) 문수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 시도유형문화재15호(울주군)
이 불상은 조선 후기에 만든 아미타여래좌상으로, 불상의 재료는 옥돌이다. 아미타여래는 서방 극락정토를 관장하고 중생의 극락왕생을 인도하는 부처이다. 불상은 높이 28.3㎝, 어깨너비 12.6㎝, 머리높이 10.5㎝, 무릎너비 15.3㎝이다. 얼굴은 턱 쪽으로 약간 각이 져 있으나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불상의 법의(法衣)는 가슴에 승기지(僧祇支)를 입고, 양 어깨를 덮은 통견(通肩)에 오른쪽 어깨를 가린 편삼(偏衫)을 걸치고 있다. 두꺼운 법의 때문에 신체의 윤곽선은 감추어진 모습이다. 오른손은 촉지인(觸地印)을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무릎 위에 두었다. 불상에서 나온 복장(腹藏) 유물에는 조성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당시 유명한 화사(畵師)였던 지연(指演) 스님이 1787년(정조 11) 세상을 떠난 부모와 스승의 극락왕생을 위하여 조성하여 봉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15호(신흥사 경판 속초시) 신흥사 경판전 신흥사 경판 시도유형문화재15호(속초시)
설악산 신흥사에 소장되어 있는 경판은 불경을 찍어 내던 각판(刻板)으로, 나무 판에 도장 새기듯 불경을 새긴 것이다. 경판은 ‘불설대보부모은중경(佛說大報父母恩重經)’을 비롯하여 법화경(法華經) 경판 일부, 다라니경 경판 일부와 기타 흩어져 있는 몇 매의 경판 등 모두 280매가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불설대보부모은중경’은 3·4쪽과 13·14쪽의 경판 두 장이 빠져 있고, 한문 원문에 한글 번역문까지 함께 싣고 있으며 중요한 부분은 그림까지 그려 넣었다. 이 경판 끝 장에 ‘순치(順治) 15년 강원도 양양부 설악산 신흥사 개간(開刊)’이라는 연기가 있으니 조선 효종 9년(1658)에 간행했던 것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15호(용주사 병풍 화성시) 용주사 병풍 시도유형문화재15호(화성시)
풀과 나무의 모습을 채색하여 그린 4폭 병풍으로, 각 그림의 크기는 가로 65.5㎝, 세로 222.5㎝ 이다. 원래는 8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폭에는 오동나무, 단풍나무, 매화, 모란 등 각기 다른 초목을 한 종류씩 그려 놓았는데, 오동나무를 제외하면, 각 폭마다 짙은 묵으로 그린 기이한 모습의 돌이 함께 표현되어 있다. 어떤 폭은 푸른색의 바위와 붉은 꽃을 그려 색깔의 대비를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은 조선 후기인 19세기 궁중 가리개 등의 유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단원 김홍도(1745∼?)의 그림으로 정조가 용주사 창건시 하사하였다고 전하고 있으나, 단원의 화풍과 많이 다르고, 19세기 화법도 일부 나타나고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민화적 형식을 가진 특이한 작품으로, 그림의 화법이 매우 정교하여 우리나라 화단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15호(손소 선생 영정 경주시) 손소 선생 영정 시도유형문화재15호(경주시)
손소(1433∼1484) 선생은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무인(武人)으로서, 자(字)는 일장(日章), 시호(諡號)는 양민(襄敏)이다. 세조(世祖) 9년(1463)에 문예시(文藝試)에 장원(壯元), 성균주부(成均主簿), 병조좌랑(兵曹佐郎)을 지내고 세조 13년(1467) 이시애(李施愛)의 난(亂)때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강순(康純)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출정(出征), 난이 평정된 뒤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되어 내섬시정(內贍寺正)에 특진했다. 그후 성주목사(星州牧使),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계천군(溪川君)에 봉해지고, 안동부사(安東府使), 진주목사(晋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양민공신유사(襄敏功臣遺事)』에 의하면 공의 나이 44세에 "상명충훈부도화제공신영상(上命忠勳府圖畵諸功臣影像) 사급장우본가(賜給藏于本家)"라 하였으니, 적개공신상이 그려진 것은 공신호(功臣號) 책록(冊錄) 후 10년이 경과한 성종(成宗) 8년(1477)이 된다. 현재 전해오는 손소영정은 바로 이 적개공신상으로 믿어진다. 오사모(烏紗帽)에 야청색포(鴉靑色袍)를 입고, 공수(拱手)자세를 취한 전신좌상(全身坐像)으로서 안면(顔面)은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이며 몸체는 8분면을 취하고 있다. 중폭(中幅)을 대폭으로 하고, 좌우 양쪽을 결봉(結縫)한 형식, 아무 것도 깔려있지 않는 바닥, 각지게 처리한 의복의 외곽선(外廓線), 선염기(渲染氣)가 전혀 삽입되지 않고 갈색선으로 이목구비(耳目口鼻)만을 표시한 점 등은 조선 초기의 초상화법(肖像畵法)을 여실히 예시한다. 진본(眞本)이 수폭밖에 전해오지 않는 현재, 손소영정은 조선 초기 공신도상을 대표하는 가품(佳品)이다. 보물 제1216호 '손소초상'으로 명칭변경 및 승격지정됨에 따라 1995년5월6일 해지.
표충비 시도유형문화재15호(밀양시)
무안지서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현재는 돌담이 둘러진 비각안에 보존되어 있다.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고 있는 비로, 일명 ‘사명대사비’라고도 불리운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을 얹은 구조로, 특이하게도 비몸은 까만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비문에는 표충사(表忠寺)의 내력, 서산대사의 행적, 사명대사의 행적 등을 4면에 고루 새겨 놓아, 서산대사의 제자이기도 한 사명대사가 임진왜란 당시 스승의 뒤를 이어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사실, 가토 기요마사와의 담판내용, 정유재란 이후 선조의 어명을 받들어 일본에 건너가 포로 3천여명을 데리고 온 사실 등을 적고 있다. 조선 영조 18년(1742)에 세운 비로, 이의현이 비문을 짓고, 김진상이 글씨를 썼다. 앞면 윗쪽에 새겨 놓은 비의 명칭은 유척기의 글씨이다. 국가에 큰 어려움이나 전쟁 등의 불안한 징조가 보일 때에 비에서 땀이 흐른다 하여 ‘땀 흘리는 표충비 ’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사명대사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금까지 전해진 결과라 하여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충청도 병마절도사영문 시도유형문화재15호(청주시)
청주읍성 안에 있던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의 출입문이다. 병영의 출입문은 보통 원문이라고 부르며, 좌우로 담장이 이어져 병영을 에워싸고 있다. 충청도병마절도사영은 당초 충남 해미현에 있다가 조선 효종 2년(1651)에 이곳으로 옮기었다. 1988년까지 ‘청녕각’으로 잘못 알려져 서원현감 이병정이 세운 것으로 여러 책자에 기록되어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네모진 높은 주춧돌 위에 세운 2층의 누문으로, 아래층의 중앙에는 문을 달아 출입하고 위층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호서읍지와 청주읍지를 보면 정곡루가 병영에 있음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병영내에 누각은 통군루와 정곡루가 있을 뿐인데 ‘충청병영도’와 ‘청주읍성도’에 통군루는 문루 안쪽의 서편에 있는 2층 건물로 나타나 있어, 정곡루가 바로 문루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영랑사 대웅전 시도유형문화재15호(당진군)
영랑사는 신라 진흥왕 25년(564)에 아도화상이 세웠다는 설과 백제 의자왕 8년(648)에 당나라 아도화상이 세웠다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모두 신빙성이 없다. 고려 선종 8년(1091) 대각국사 의천이 크게 수리하면서 사찰의 면모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 숙종 4년(1678)에 보수하였고, 일제시대에도 대웅전을 수리하였다. 대웅전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다. 옆면에는 공포가 없는 대신 높은 기둥을 세웠다. 대웅전 안에는 영조 35년(1759)년에 만든 동종이 있다. 이 외에 나무로 만든 석가모니불과 동자불상 등을 모시고 있다.
한벽당 시도유형문화재15호(전주시)
승암산 기슭의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 옛 사람들은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 8경의 하나로 꼽았다. 조선의 개국을 도운 공신이며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월당 최담 선생이 태조 8년(1404)에 별장으로 세운 건물이다. 월당 선생 유허비에는 ‘월당루’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시간이 지나며 ‘한벽당’이라고 명칭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한벽’이란 이름은 이곳이 옥처럼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쳐 흩어지는 광경이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같다하여 붙인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광주 십신사지 석비 시도유형문화재15호(광주시)
십신사터에 남아 있던 비로, 1990년 10월 11일 광주시립박물관으로 옮겨 세웠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형태이다. 거북받침은 거의 사각형에 가까우며 등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 안에 ‘王’자를 새겨 놓았다. 길쭉한 비몸 위에는 목조 건축을 모방한 지붕돌이 약간 파손된 채 놓여 있다. 비몸에는 앞면 윗부분에 ‘범자(梵字:불교문자)’자를 새긴 후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새겼는데, 이 때문에 ‘범자비’라고 부르기도 한다. 비문에는 질병을 막고 장수를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거북의 등에 새겨진 ‘王’자는 고려적인 요소로 보이나, 목조건축을 모방한 지붕돌, 형식적으로 변한 거북받침 등을 통해 고려 전통을 이어받은 조선 전기의 작품으로 추측된다. 1978년 2월 보수공사 때 비 끝부분에서 ‘정사년(丁巳年)’이라는 글이 발견되어 조선 세종 19년(1437)에 이 비를 세웠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황해도 해주와 평안북도 용천에 있는 비와 함께 몇 안되는 범자비로서 그 가치가 높다.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 분리되면서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3호로 지정됨에따라 1986년11월1일 해지.
홍화각기 시도유형문화재15호(제주시)
제주목 관아가 모두 불탄 뒤 세종 17년(1435)에 최해산(崔海山) 안무사가 홍화각 등 여러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홍화각기』는 바로 그 간의 경위를 밝히기 위해 고득종이 지은 글이다. 글 전체의 내용은 제주도의 지형과 역사를 간략히 서술한 뒤에 최해산의 인품과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것을 찬양하고, 다음으로 홍화각의 건립 내력과 홍화각이라 명명한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또 ‘홍화각(弘化閣)’이라는 제액 세 글자도 고득종 자신이 직접 써서 게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 기문(記文)의 일부를 인용해보면, "공(公)(최해산(崔海山))이 정사(政事)가 성취되고 인심이 화하여지자, 관우(館宇)의 허물어진 것을 수축하려고 폐허가 되어버린 절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먼저 거처하는 집을 일으키니, 거문고 타는 당(堂)과 욕실·부엌·랑사(廊舍)의 위치가 갖추어졌다. 조금 서편으로 집 한 칸을 세워서 당(堂)을 만들고, 또 그 서쪽에 집 세 칸을 세우고 겹처마로 보충하니, 그 규모가 굉걸하고도 정밀하고 그 제도가 웅장하고도 화려하였다. 그 남쪽에 반랄(半剌)(판관(判官))의 당(堂)을 세우고 그 북쪽에는 나라에 바치는 말의 마구간을 두고 동쪽에는 창고를 두고 서쪽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또 그 남쪽에 문루(門樓)를 지어 아래로는 드나들게 하고 위에는 종과 북을 달았고, 약(藥)창고와 기(旗) 두는 곳이 동서에 서로 대하여 모두 서 있다. 모두 담으로 둘렀으며, 집이 도합 2백 여섯 칸인데, 집들이 서로 연접(連接)하지 않은 것은 화재를 예방한 것이다. 그 경영과 위치와 제작이 정당함을 얻은 것은 모두 공(公)의 지시와 규획(規劃)에서 나왔다"고 하였고, '홍화각(弘化閣)'이라 한 현액(縣額)은 "무릇 임금의 근심을 나눈 자가 날마다 이집에 올라서 편안히 놀지도 말고 방종히 하지도 말아서 맡은 직책을 다하기를 생각하여, 항상 왕화(王化)를 넓히고(홍(弘)), 백성의 사정을 상달(上達)시키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다면 제주 백성들이 무궁하게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 '홍화(弘化)라고 이 집을 이름하지 않으랴"고 하여, 성군(聖君)의 덕을 온누리에 널리 알리고 덕화(德化)로써 백성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현재『홍화각기』와 홍화각 액자는 모두 고양부 삼성사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15호
육조대사 법보단경 세종특별자치시 유형문화재15호
소 재 지; | 세종 부강면 시목부강로 685-22(부강리, 광제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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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대사 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은 선종의 6대조인 혜능(慧能, 638~713)이 수도하는 과정과 문인들을 위해 설법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는 자신의 자서전적 일대기로 「법보단경(法寶壇經)」 또는 「단경(壇經)」으로 약칭되기도 한다. 본문은 「오법전의(悟法傳衣)」, 「석공덕정토(釋功德淨土)」, 「정혜일체(定慧一體)」, 「교수좌선(敎授坐禪)」, 「전향참회(傳香懺悔)」, 「참청기연(參請機緣)」, 「남돈북점(南頓北漸)」, 「당조징조(唐朝徵詔)」, 「법문대시(法門對示)」, 「부속유통(付屬流通)」 등의 10가지 법문(法門)에 대한 해설이 수록되어 있다. 「육조대사 법보단경(六祖大師法寶壇經)」에 나타나는 특징은 혜능(慧能)을 중심으로 선사들의 법맥과 학풍을 강조하고 있는 점, 자기성찰을 떠난 부처는 결코 없다는 점,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근본이 되는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임진왜란 이전인 성종 10년(1479)에 백운산 병풍암(屛風庵)에서 간행된 한문본이며, 조선시대 초기의 목판 인쇄문화와 불교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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