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로 앞서 나가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질시와 의심과 중상모략을 받게 마련이다.
공화정 창시자 브루투스의 장열한 죽음에 눈물을 흘린 로마 시민들은 살아남은 발레리우스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다.
우선 발레리우스가 네 마리의 백마를 몰고 개선식을 거행한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마는 전쟁에서 이긴 뒤의 개선식은 로물로스 이래 전통이다.
그런데 전차를 끄는 말을 모두 백마로 한것은 발레리우스가 처음인데 그가 엄청난 부자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허나 시민들은 그의 왕족 취향이 드러난 것처럼 여겨졌다.
둘째는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위의 그의 웅장한 저택이 시민들에게는 궁전처럼 보였다.
또 브루투스의 죽음으로 집정관 자리가 하나 비워 있었음에도 빨리 메우려 하지않고 뭉그적거렸다.
이런 저런 이유로 발레리우스가 왕위를 노리고 있는게 분명하다고 참새들은 수군거렸다.
이를 알아차린 발레리우스는 수많은 일꾼을 동원하여 하룻밤 사이에 자기 저택을 부셔 버렸다.
또 그는 민중에게 좋은 평판을 받을성 싶은 법률을 차례로 제정했다.
과거 왕이 관리했든 국고를 앞으로는 집정관도 관리를 하지 못하고 재정관이 관리하도록 했다.
시민들의 갈채를 받았다.
또 로마시민의 항소권을 규정한 법률이다.
따라서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면 사법관이 내린 판결에 대해 민회에 항소할 권리를 갖게 되는데 인권중시의 이 법률은 후세에 이르기 까지 중요한 법개념을 갖게 된다.
이후 그는 비로소 동료 집정관을 선출하기 위한 민회를 소집했다.
선출된 사람은 정절을 지키면서 자살한 루크레티아의 아버지였지만 고령으로 선출되자마자 세상을 떠나 버린다.
곧 다음 선출자가 호라티우스인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임기 도중 바뀌어도 임기만료일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발레리우스가 몇 가지 시민들을 위한 법률제정한 탓에 인기는 올라가게 된다.
사람들은 발레리우스를 ‘푸블리콜라’라는 별명을 부르게 되었다.
공공(푸블리카)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푸블리콜라의 민심 회유책도 당시에는 필요했을것이다.
공화정으로 이행한 직후의 로마에는 왕정 시대에는 없었든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럴 때 로마인이 단결하지 않았으면 공화정도 이제 막 싹이 트는 단계에서 뿌리째 뽑혀 버렸을게 분명하다.
우선 국력의 쇄퇴이다.
3대에 걸친 에트루리아계 왕들은 모두 로마에서 대규모 개발사업을 벌렸다.
자연히 상공업이 발달했다.
로마에 와서 이 왕들에게 기술과 경제를 제공하고 있든 레트루리아인들의 지위와 영향력은 당연히 눈부시게 향상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것은 농업과 목축에만 종사하는 선주 로마인이 상공업을 독점한 에트루리아계 로마인에게 반발한 결과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을 정도다.
어찌 되었건 국력이 떨어진 로마인에게 ‘라틴동맹’도 저절로 멀어지게 되고 주변의 동맹군은 왕이 아니라 1년임기의 집정관의 지휘를 받는다는 자체가 맘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히 신생국 로마는 동맹국과도 적대시 하는 처지가 돼 버렸다.
과거의 라틴동맹도 애당초 약육강식의 시대가 낳은 산물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로마는 거의 해마다 인근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되풀이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공화정 이후 세 번째 생겨난 문제는 에트루리아를 완전히 적으로 돌려 버려 버린 것이었다.
에트루리아는 비록 쇠퇴기에 들었다고 하지만 도시들의 국력은 로마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전쟁터에서 양쪽의 장비만 보더라도 에트루리아쪽은 화려한 장비들을 다루는 반면, 로마병사들의 장비는 구리와 가죽이 고작이었다.
그리고 그 쪽 사람들은 쫒겨난 타르퀴니우스를 다시 왕위에 앉히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푸블리콜라의 머리에서 나온 여러 가지 정책들 중에 관심을 끄는 일들이 많다.
우선 에트루리아인의 유출로 저하된 로마의 경제력을 회복키 위해 소금판매의 국유화이다.
그때는 유통화폐가 없었기에 소금이 화폐대용으로 쓰인시기.
무엇보다 국고 수입의 확보를 위해 소금이 현금이니 국유화 하는것이었다.
무역상인들에 부과 되고 있었든 간접세를 경감했다.
자연히 상인들이 불어나고 무역업 종사자들이 많아지고 로마도 이제 에트루리아인에게 의지하지 않아도 독자적인 상공업 기술이 발달되고 농업국으로 되돌아 갈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또한 이런 경기 활성화로 인해 신흥 중산계급이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푸블리콜라는 타국민의 로마이주에도 적극적이었다.
로마 인근 부족들 중에서도 라틴족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같은 신을 경배하는 라틴인끼리 싸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은 힘도 갖고 있었다.
푸블리콜라는 이들에게 호소했다.
그 효가가 5천명이나 되는 일족을 이끌고 로마로 이주한 클라우디우스 가문이다.
이들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과 거주지를 주고 가문의 가부장인 아피우스에게는 원로원 의석을 주었다.
어제의 이민도 오늘 부터는 로마의 지도층에 들어갈 수 있다는 이 사례는 인근 부족들의 로마 이주에 박차를 가했다.
그런데 로마의 영원한 적인 쫒겨난 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가 이번에는 역시 에트루리아 연방에 속한 클루시움(오늘 날 키우시)의 왕에게 도망쳐서 그 왕이 로마에 선전포고를 하게 한다.
그들의 왕 포르센나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는데 그는 로마에서도 명군인 동시에 명장으로 소문나 있는 사람이다.
이에 겁에 질린 로마인들 중에는 왕정으로 되돌아가도 좋다는 사람까지 나오게 되었다.
로마의 집정관 푸블리콜라와 클루시움의 명장 포르센나 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그 긴 과정은 뛰어 넘자) 이어지는 가운데 로마는 포위되고 식량도 바닥이 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포위는 쉽게 풀려지지 않았고 비축식량도 바닥 난 가운데 로마의 영웅이 탄생하게 된다.
무티우스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로마를 구할려면 포르센나를 죽일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보고없이 진행을 하면 탈주병으로 여겨질까 봐서 원로원으로 달려가서 두 집정관과 원로원의 허가를 받아낸다.
무티우스는 단검 하나만 몸에 지닌채 테베레 강을 헤엄쳐 강 서안에 도착해서 적진으로 잠입하는데 성공한다.
포르센나는 급료를 주고 있는 중이었는데, 문제는 한 번도 그 왕을 본적이 없는 이 젊은이는 로마인에 비해 모두 화려한 장비와 옷을 갖추고 있는 그들로부터 누가 왕인지 분간이 어렵게 되었다.
짧고 순간적인 판단으로 돈을 나누어 주고 있는 사람이 왕으로 생각되어 그를 갑자기 달려들어 단검으로 찌르게 된다.
죽이는데는 성공했으나 그 사람은 왕의 비서였다.
붙잡힌 무티우스는 왕 앞으로 끌려갔다.
그는 가슴을 펴고 왕에게 말한다.
“ 나는 로마인 시민이다. 이름은 가이우스 무티우스라 한다.
적을 죽이려다 애석하게도 실패했지만 죽을 각오는 되어 있다.
운명을 감수하는 것은 로마인의 특징이기도 하다.
로마의 젊은이들은 당신에 대한 끝없는 투쟁을 선언했다.
내가 죽으면 또 다른 젊은이가 올 테고,그 젊은이가 성공하지 못하면 또 다른 젊은이가 올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
당신도 각오하는게 좋을것이다.”
격분한 포르센나 왕은 고문을 해서라도 배후를 캐려 했지만 무티우스는 더욱 목청을 높혔다.
“오직 겁쟁이만이 일신의 안녕을 염려하는 법이다!”
이렇게 외친 무티우스는 불타고 있는 횟불을 왼손으로 움켜잡고 그것을 오른손에 눌러댔다.
살이타는 냄새가 주변에 자욱했다.
프로센나는 무티우스에게 말했다.
“ 이제 되었다.너는 나에게 주는 것 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너 자신에게 주었다.
너의 담대함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구나.
내 백성들 중에도 너같은 젊은이가 있다면 좋으련만..........너를 아무 조건없이 풀어주겠다.
자 어서 떠나거라.”
(그를 왜 후대 사람들이 명군에다 명장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는 단면이다)
가이우스 무티우스는 그후 ‘왼손잡이 무티우스’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불에 타서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된 탓이다.
로마 시대 어린이들은 눈을 빛내면서 이런 일화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그들은 배워야 할 역사가 별로 없었기에 영웅담을 즐길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포르센나는 먼저 로마에 화평을 제의했다.
조건은 두 가지다.
하나는 타르퀴니우스를 왕위에 복귀 시킬것.
또 하나는 작년 싸움에서 빼앗은 베이 영토를 반환 할것이었다.
푸블리콜라는 두 가지 조건중 첫 번째는 거절하고 두 번째는 받아 들였다.
코르센나도 그것으로 만족하여 마침내 화평이 이루어졌다.
이것으로 로마와 에트루리아간의 일시적 휴전은 이루어졌지만 로마는 한 숨 돌릴 여유가 생겼다.
기원전 503년,
로마가 공화정이 된지 6년이 지났을 때 푸블리콜라가 세상을 떠났다.
그 많든 재산도 없어져 장례식 비용조차도 낼 수 없게 된 발레리우스 가문을 위해 로마인들은 조금씩 추렴하여 푸블리콜라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브루투스가 죽었을 때 처럼 로마 여인들은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로마 공화정의 씨를 뿌린 사람은 브루투스였고, 뿌리를 내린 사람은 푸블리콜라였다.
이 두 사람의 뒤를 이은 로마인 가운데 왕정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