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 '태화관(泰和館)'과 '명월관(明月館)'에 관한 몇 가지 보충설명
▲ <매일신보> 1912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명월관'의 '근하신년' 광고문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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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관의 대확장
<매일신보> 1912년 10월 3일
중부 황토현에 있는 명월관(明月館) 안에 새로 건축확장한 삼층집은 대단히 심수하고 종용하여 손님이 앉아놀기도 좋거니와 장식과 설비는 순연한 조선제도로 하였다하니 회공주 정석조(鄭錫朝)씨가 명월관으로 하여금 조선요리점에 원조 되게 하기를 열심하는 소치라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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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12년 11월 23일자에 수록된 '장춘관(長春館)'의 광고문안이다. 이곳의 소재지가 "경성 중부 창덕궁전 유동 2통 6호"라고 표기되어 있다. 명월관은 나중에 이곳 '장춘관'이 있던 데로 자리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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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12년 12월 18일자에 수록된 '상점비판기'에 '명월관'에 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상점평판기(商店評判記)
조선요리점(朝鮮料理店)의 시조(始祖) 명월관(明月館)"
<매일신보> 1912년 12월 18일자
근십년전(近十年前) 조선내(朝鮮內)에서 요리(料理)라 하는 명(名)을 부지(不知)할 시(時), 소위(所謂) 별별(別別) 약주가(藥酒家)외에 전골(煎骨)집, 냉면(冷麵)집, 장국밥집, 설렁탕집, 비빔밥집, 강정집, 숙수집 등속(等屬)만 있어 진애산적(塵埃山積)한 파식탁상(破食卓上)에 전라도 대죽(全羅道 大竹)을 삼부오열(三剖五裂)한 장저(長箸), 세척(洗滌)치 아니하여 자연적(自然的)의 흑칠(黑漆)을 도(塗)한 아현진유시순지시(阿峴鎭鍮匙舜之時)에도 고유(苦 )하여 사용(使用)키 불능(不能)하던 장적(長的) 대적(大的) 원적(圓的) 방적(方的) 심적(深的) 천적(淺的) 흑색적(黑色的) 갈색적(褐色的) 천태만상(千態萬狀)의 토부지기(土缶之器)에 감식(堪食)키 난(難)한 육어채과(肉魚菜果) 등을 신사(紳士) 노동자(勞動者) 노소남녀(老少男女)가 일탁(一卓)에서 임립(林立) 혹(或) 잡좌(雜坐)하여 식지음지철지토지(食之飮之 之吐之)할 시(時)에 일개(一個) 신식적(新式的) 파천황적(破天荒的) 청결적(淸潔的) 완전적(完全的의) 요리점(料理店)이 황토현(黃土峴)에 탄생(誕生)하니 즉 조선요리점(朝鮮料理店)의 비조(鼻祖) 명월관(明月館)이 시야(是也)이다. 경성(京城)은 조선(朝鮮)의 수부(首府)로 내외인(內外人)의 교제(交際)가 빈번(頻繁)하니 거배논사(巨杯論事)할 처(處)와 오락한유(娛樂閑遊)할 장(場)이 일시(一時)라도 무(無)하면 불가(不可)하던 중(中) 어시호(於是乎)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유(有)한 명월관주(明月館主) 안순환(安淳煥)씨가 당시(當時) 이천원(二千圓)의 자본(資本)으로써 신식(新式)의 요리점(料理店)을 창설(創設)하였으니 저간(這間)에 비상(非常)한 풍상(風霜)과 고통(苦痛)을 경(經)함은 일필난진(一筆難盡)이어니와 차(此)는 순연(純然)한 영리적(營利的)도 아니오 일시(一時)의 오락적(娛樂的)도 아니라, 다만 조선(朝鮮)에 요리점(料理店)이 유(有)하다 함을 동서인(東西人)에게 과요(誇耀)코저 함인데 이래(爾來)에 점차(漸次) 발전(發展)하고 활약전진(活躍前進)하여 천삼사백명(千三四百名)의 초대회(招待會)와 환영회(歡迎會)는 명월관(明月館)이 아니면 능(能)히 거행(擧行)치 못하니 명성(名聲)이 내외(內外)에 분분(噴噴)하여 조선(朝鮮)에 내유(來遊)하던 구미인(歐米人) 급(及) 동양인(東洋人)은 명월관(明月館)을 미관(未觀)하면 조선(朝鮮)을 유람(遊覽)한 가치(價値)가 낙하(落下)한다 함에 지(至)한지라. 금하(今夏)에 불행(不幸)히 도로개정(道路改正)으로 인(因)하여 일부(一部)의 훼철(毁撤)을 피(被)하였으나 우금(于今) 일층확장(一層擴張)하여 신라식(新羅式) 조선식(朝鮮式) 서양식(西洋式)의 건물(建物)이 굉활(宏闊)하고 설비(設備)가 완전(完全)하여 대소연회(大小宴會)에 민속수응(敏速需應)하고 주의정확(主義正確)하며 품치가렴(品侈價廉)하며 대객진성(待客盡誠)하며 극력알선(極力斡旋)하며 명가묘무(名歌妙舞)의 선아(仙娥)가 유(有)하여 귀빈신사(貴賓紳士)의 심신(心神)을 이열(怡悅)케 하고 청흥(淸興)을 야기(惹起)케 함은 동관(仝館)의 特色)이라. 연(然)이나 유위부족(猶爲不足)하여 명춘(明春)부터 십삼만원(十三萬圓)의 자금(資金)을 투(投)하여 유익확장(愈益擴張)하되 각처(各處)에 지점(支店)도 출장(出張)케 한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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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신보> 1913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명월관'의 신년인사를 겸한 광고문이다. 왼쪽의 사진은 명월관의 '조선식 휴게실'이라는 설명이 붙어있고, 오른쪽의 사진은 '신라식 3층 건옥'이라고 적고 있다. 주소를 광화문통이라고 적고 있는 걸로 봐서, 지금의 동아일보사 자리에 있던 때의 모습 같다. 달리 '황토현' 명월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 <매일신보> 1913년 7월 20일자에 수록된 '매일신보 윤전기증설 축하 찬조광고'이다. 명월관의 주소가 중부 황토현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행정구역개편으로 인한 동, 정명 개정이 이뤄지기 직전이라서 그렇게 표기된 듯하다.
▲ <매일신보> 1914년 10월 27일자에 수록된 '명월관' 광고문안이다. '축신축낙성'이라는 것은 이 광고가 매일신보사옥의 신축낙성을 축하한다는 찬조광고의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드물게도' 불타기 전의 황토현 명월관을 담은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 <매일신보> 1915년 1월 3일자에 수록된 '태화관' 광고문안이다.
여기에는 태화관을 '太華館'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이 자리는 앞서 설명한 바대로, 이완용이 살던 집이다. 태화관 시절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 좀 드문 편이라서 여기에 수록된 것이 흐릿하나마 제법 귀중한 자료인 셈이다.
여기에 나온 문구를 옮겨보면 이러하다.
"조선(朝鮮)의 수부(首府)요 경성(京城)의 중앙(中央)되는 종로(鐘路) 이문동내(里門洞內) 전순화궁(前順和宮)에 참신굉대(참新宏大)한 설비(設備)를 부(附)하여 여관업중(旅館業中) 일대효시(一大嚆矢)될 만한 관사(館舍)를 시설(施設)하는 제(際)에 근(謹)히 구년(舊年)을 송(送)하고 공(恭)히 신년(新年)을 영(迎)하여 신년벽두(新年劈頭)로부터 내외제현(內外諸賢)과 강호귀객(江湖貴客)을 청송녹죽(靑松綠竹)이 울창(鬱蒼)한 정원리(庭園裡)와 전등와사(電燈瓦斯)의 황홀(煌忽)한 현관하(玄關下)에서 공수읍양(拱手揖讓)으로 환영(歡迎)하겠삽나이다. 경성부 인사동(원 이문동) 195번지 태화관(太華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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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인의 거사가 이뤄졌던 '태화관'의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담아낸 사진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고, 그나마 위의 사진 정도가 세상에 소개된 '태화관'의 모습이라 하겠다. [자료출처 : 김정동 교수, <일본 속의 한국근대사현장> (하늘재, 2001)] 이와는 반대로 '태화여자관'의 모습은 여러 가지 책자를 통해 사진자료가 널리 알려진 편이므로, 여기서 따로 소개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다.
▲ 명월관이 불탄 소식을 알리고 있는 <매일신보> 1919년 5월 24일자 보도내용이다.
흔히 황토현의 명월관이 불탄 때를 '1918년'이라고 적어놓은 자료가 많이 눈에 띄는데, 이건 바로 위의 <매일신보> 기사가 그대로 증명해주듯이 잘못된 기억이다. 가령 명월관의 기생 이난향이 <중앙일보>의 '남기고싶은 이야기들'(명월관 편)에 적어놓는 내용을 보면, "황토현 네거리에 있었던 명월관이 불타버렸다. 내 기억으로는 1918년으로 생각되는데 여러 군데 확인해 보았으나 명월관이 불탄 해를 정확히 기억하는 분을 만나지 못했다"고 하여 도리 없이 1918년 쪽을 따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이 내용은 중앙일보사,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1]> (1973)으로 책자의 형태로도 묶어져 나왔다.] 그리고 명월관이 불탔기 때문에 '태화관'을 물색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이 역시 사실과는 어긋난 잘못된 기억으로 드러난다.
'태화관'과 '명월관'의 상관관계를 자세히 설명할 공간은 없으므로, 여기서는 단지 위의 <매일신보>에 수록된 화재관련기사를 옮겨두는 것에 그치기로 한다. 여기에도 그 시절의 여러가지 형편을 살펴볼 수 있는 내용이 많이 들어있으니까, 그 자체로도 충분히 좋은 참고자료가 되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몇년 뒤에 이 자리에 바로 '동아일보 사옥'이 들어선다는 사실 정도는 따로 기억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명월관(明月館)이 소실(燒失)됨"
23일 오전 여섯시경에 실화되어 전부 소실되었다
<매일신보> 1919년 5월 24일자
이십삼일 아침 여섯시경에 광화문통 명월관 요리점 뒷방 집고각(集古閣) 온돌방에서 불이 일어낫는데 화세가 맹렬하여 동 여섯시반 가량에 전부 소실되고 동편 이웃에 격장한 세심관과 정문 앞에 있는 초가집에도 연소는 되지 아니하였으나 지붕에 약간 손해가 있었는데 원인은 목하 취조중이오, 손해액은 약 육만 원이상이라더라.
기구 전부 소실(器具 全部 燒失), 한참 잠든 때에 출화
집고각에서 유흥하던 손과 기생이 이십삼일 새벽 네시경까지 있다가 갔다 하며 점원 일동은 그 뒤를 수습하고 오전 다섯시 가량에야 잠을 자기 시작하여 첫잠이 들어 한참 정신 모르는 아침 여섯시경에 명월관 건너편에 있는 경관파출소 순사가 명월관 뒷채에서 연기가 일어나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소방대를 부르며 방화에 노력하였으나 화세가 맹렬하여 불과 삼십분 동안에 전관을 소실하고 주위에 별돌로 쌓은 담만 올연히 남아있으며 졸지에 맹렬한 불이 일어났으므로 설비한 기구와 세간은 한개도 건지지 못하고 전소를 당하였는데 손해액은 목하 조사중이므로 자세치는 아니하나 약 육만 원 가량이나 될 듯하며 불이 난 원인을 목하 취조중이라더라.
문제(問題)의 집고각(集古閣), 재작년에도 한번 실화
화재의 원인은 목하 조사중이 되어서 알 수가 없으나 이 집고각(集古閣)이라는 방은 명월관 남편머리에 붙어 있는 이층온돌인즉 아무리 구조가 완전하다 할지라도 이층온돌은 안심할 수 없을 것이며 더욱 이 방은 재작년 겨울에도 한번 실화되었으나 다행히 즉시 발견되어 무사히 소화된 곳인즉 이번에도 역시 그 이층온돌이라는 안심할 수 없는 구조에서 실화가 되었는지 또 그 전날밤에 그 방에서 놀던 손은 매우 늦도록 놀아서 화재가 나던 날 오전 네시까지 놀았다한즉 이와 같이 늦도록 놀고난 뒤를 방을 치우는 뽀이들이 한참 졸린판 혹 무주의나 하지 아니하였는지 그는 알 수가 없으나 전기 이층온돌이 원인일 듯하더라.
이만원 보험(二萬圓 保險)을, 그 전날에 계약함
이 명월관은 전주인 안순환(安淳煥)씨가 다년 경영하던 것을 수개월전에 민봉호(閔鳳鎬)씨외 사명이 도중으로 명월관 본점과 지점을 인계하였는데 인계가격은 오만원이 들었다 하며 인계한 후에 만여 원을 들이어서 기구와 세간을 일신하게 만들었섰는데 이번 화재에 전부를 소실하였더라. 그러나 불행 중의 다행으로 불이 나던 그 전날 즉 이십이일에 풍국(豊國)보험회사에 이만 원의 보험을 계약하고 보험료도 금 일백 원을 회사에 지불하였는데 보험회사측의 말을 듣건대 이십이일 오후 육시경에 보험료 일백 원을 받고 보험금액 이만 원에 계약을 성립하였으나 보험금 전부를 지불할는지 어떠할는지 목하 의논중이라더라.
최초(最初)의 요리점(料理店), 내지에서도 다 안다
조선에서 제법 요리집이라고 할 만한 신식요리점으로는 이 명월관이 원조이니 전주인 안순환씨는 명월관의 전신 '명월루'로부터 차차 발전을 시키어 지금의 이름을 얻게 되어 조선안에서는 물론이요 내지인들도 조선요리하면 명월관을 생각할 만큼 지명을 닦은 요리집이며 금번에 소실된 삼층집으로 말하면 지나간 명치 사십오년(즉 1912년)에 낙성한 것으로 건평이 삼층을 합하면 삼백여 평에 이르고 방도 대소를 합하여 이십호에 미치는 것인데 지금 돌연히 소실된 것은 아까운 바이라. 그러나 지금의 경영자는 그 자리에다가 다시 최신식으로 지을 예산이 있다 하더라.
▲ 왼쪽은 명월관이 불탄 다음날 <매일신보> 1919년 5월 24일자에 수록된 명월관 측의 '광고문'이고, 오른쪽은 2년이 지난 <매일신보> 1921년 5월3일자에 수록된 '명월관 지점 이전 확장 광고문'이다.
이 가운데 오른쪽의 '광고문안'을 옮겨보면 이러하다.
이전급대확장급고(移轉及大擴張急告)
폐(弊) 명월관지점을 장춘관'자리'로 5월 10일에 이전하오니 기시(其時)까지는 인사동(이문안)에서 의구(儀舊)히 영업하옵고 전장춘관(前長春館) 재래가옥(在來家屋)은 협착하므로 귀객(貴客)의 불편하심이 불무(不無)하와 금반(今般)에 이전과 동시에 약 5백인 연회장을 신축에 착수하오니 시내 유일의 광활한 연회장(宴會場)이 초유(初有)하겠사오니 폐점(弊店)을 애호(愛護)하시던 귀객제위(貴客諸位)는 배전애고(倍前愛顧)하여 주심을 바라나이다.
재(再) 장춘관에 재(在)한 본년 2월 2일 이전에 재(在)한 괘매(掛賣, 외상)는 폐점에서는 관계가 무(無)함.
경성부 돈의동 145번지 (원 장춘관적) 명월관 고백
전화 0064, 862, 2153, 2733번
▲ <동아일보> 1924년 7월 5일자에 수록된 연재물 '내동리명물'의 '인사동 태화관' 편이다.
[내동리명물] "인사동 태화관"
정해자(正解者) 인사동 8번지 김복순(金福順)
<동아일보> 1924년 7월 5일자
<> 이 집은 내력이 많은 집입니다. 이 집은 안동김씨 중에 이문안대신으로 유명하던 김흥근(金興根)씨댁이었답니다. 이 대신은 양미간이 넓기로 유명하였고 풍류에 범연치 않기로 유명하였고 직언(直言) 잘 하기로 유명하였답니다. 이 대신뿐인가요. 그 자제 영평(永平)대신 김병덕(金炳德)씨도 일시에 물망이 있던 대신이었답니다.
<> 이 집이 유명한 대신댁으로 헌종귀빈(憲宗貴嬪) 순화궁(順和宮) 김씨의 궁이 되어 순화궁 순화궁하고 붙으게 되었습니다. 세워이 변하더니 이 북촌 갑제가 일시 남부끄러운 주인을 갖게 되었섰습니다. 이완용 후작이 이 집을 팔아서 이 집이 요리집이 되기 시작하여 태화관이 되었고 명월관 지점이 되었섰습니다.
<> 이 집이 태환관으로 있었을 때 삼일운동에 큰 관계를 맺게 되었섰습니다. 지금은 여자교육기관이 되어 요리집되었던 흔적도 없게 되었으나 그 안에 있는 정자 태화정을 지금도 양파정이라 별명삼아 불으는 것은 요리집으로 있을 당시에 기생들이 정양파(鄭陽坡)의 휘짜를 어디서 얻어듣고 변삼아 부른 것입니다. 이만하면 한집 내력으로 상당히 많지 않습니까.
▲ <매일신보> 1928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명월관의 근하신년 광고를 겸한 '신축낙성' 안내광고이다.
▲ <매일신보> 1933년 1월 1일자에 수록된 명월관의 근하신년 광고문안이다. 여기보면 명월관 본점은 '돈의동 145번지'이고, 지점은 '서린동 137번지'로 위치의 변동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대경성사진첩> (1937)에 소개된 명월관의 모습이다. 건물외형은 앞서 <매일신보> 1928년 1월 1일자 신축낙성광고에 수록된 그것과 동일하다. 오른쪽은 명월관의 객실내부를 담은 것이다.
(정리 : 2005.10.8,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