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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어르신/정광영
농사, 누군가는 반드시 지어야 하니까요
충남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 예당평야가 인근에 펼쳐져 있는 이곳은 땅이 비옥해 예부터 벼농사로 이름난 지역이다. 78년 간척사업으로 300만 평 정도의 농토가 확장되어 지금은 김제평야보다 농지 면적이 더 넓다. 이곳 당진에서 조상 대대로 500여 년 터 잡고 살아온 정광영 어르신. 농사를 지어온 세월 또한 집안 내력만큼 오래되셨다. 군대 다녀온 3년 빼고 중학교 졸업 이후 지금까지 농사를 지으셨다니, 어림잡아도 50년이 넘었다. 웬만해선 어르신 앞에서 농사 짓는다고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다.
매산리는 한눈에도 부농이라는 인상이 들었다. 마을 어귀부터 논과 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농가 손질도 잘 되어 있어 장마가 휩쓸고 간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길을 못 찾아 어르신께 전화를 걸었더니 샛터를 찾으라신다. 동행한 석기 씨 말로는 샛터는 새로 생긴 마을을 가리킨단다. 채송화가 지천인 마당에 들어서자 마음이 벌써 편해진다. 집안 역시 어르신 내외의 소박한 일상을 보여주듯 단출하고 깔끔했다. 정광영 어르신은 올해 66세라시는데 머리도 세지 않고 무척 젊어 보이셨다.
마당 가득 피어 있는 채송화들. 어르신 댁 단청에 상량문. 1972년인가 몇 날 몇 시에 어떤 향으로 이 상량을 올렸다는 내용.
매산리에서 50여 년 농사를 지어오신 정광영 어르신과 사모님. 함께 한 세월만큼 두분이 닮으셨다(왼쪽). 취재에 동행한
편집위원들이 토종오이를 보며 감탄하고 있는 모습.
종자선택권도 없었던 암울한 시대
어르신은 1987년부터 친환경 농사를 선택했다. 가톨릭농민회에서 생명공동체운동에 동참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80년대면 짐작할 수 있듯, 농촌지도소에서 농약과 제초제를 마구 권장하던 시기였다. 주라는 대로 주면 농약을 아홉 번을 쳐야 했단다. 종자선택권도 없었다. 정부에서 원하는 대로 농사를 짓지 않고 재래종을 심으면 면서기 직원들이 못자리를 발로 밟아버리고 비료도 끊어버릴 정도였다니 말 다한 셈이다. 대통령 직권 초기 밀어붙이던 종자는 통일벼였는데, 그 해 냉해를 입어 벼이삭이 다 죽어 50~60퍼센트밖에 수확을 하지 못하고 농민들은 발만 동동 굴렀단다. 통일벼가 필리핀 종자를 가지고 육종한, 열대 지방 벼라 추위에 견디지 못한 탓이다. 그 어려운 시기에 무농약 친환경 농사를 지으셨다는 건 대단한 근력이 아닐 수 없다. 통일벼 이전에는 농촌진흥청에서 권장하는 팔광 같은 일본 벼품종이나 재래종 찰벼(까락이 길고 키도 큰 벼, 잘 쓰러지고 수확량이 적어 지금은 심지 않는다)를 주로 심어왔다. 이후에는 얼음벼(늦게 수확하는 벼, 얼음이 얼 정도는 되어야 알곡이 영그는 벼), 이른얼음벼, 왜벼, 동진 등을 심다가 한살림 운동을 시작한 이후 소비자에게 인기가 좋은 품종 위주로 심으신다. 주로 일품, 일미, 고시히까리, 문광 네 품종을 선택하는데, 몇 해 전부터 각자 농사 외에도 친환경 작목반 팀을 꾸려 열 세대가 협동하여 농사를 짓는다. 지금은 종자 구입과 출하 시기를 고려해 일미에 주력하고 있다. 그런데 왜 한 품종만을 고집하지 않고 여러 종자를 심었을까.
“벼마다 특성이 다르죠. 그해 일기에 따라서 어느 품종이 결실이 잘 되느냐가 결정되지요. 날씨가 어떨지, 어떤 변화가 있을지 잘 모르니까 적어도 세 가지 이상 품종의 벼를 한 농가에서 나눠 심으면 수확량의 위험성이 훨씬 적어지는 거죠. 예를 들어 삼천 평의 경우 천 평은 일미, 천 평은 일품, 나머지는 문광을 심는 식이죠.”
종자의 경우 국립종자관리원에서 받아서 심는데, 삼 년 정도 농사를 짓고 나면 잡벼가 섞이고 퇴화되기 때문에 다른 종자를 새로 받는다고 한다. 간간이 어르신께서 옛날 농사법을 알려주셨는데 탈곡에 쓰인 변천사를 특히 관심 있게 들었다.
“전에는 수수 줄기를 접어서 벼를 훑었죠. 수수깡은 껍질이 단단해 탈곡에 제격이라 여러 개 만들어 마당에 빙 둘러앉아 훑기 작업을 했어요. 이삭이 매끄럽게 잘 나왔죠. 그러다 천치(이빨이 천 개라 해서 천지라는 이름이 붙었다)라는 걸 썼는데, 천치로 흝어 멍석에 잘 말린 다음 그걸 종자로 썼죠. 그러다 탈곡기로 바뀌고, 그 뒤엔 호롱기(발로 밟아 탈곡하게 만든 기구)를 대형화해 경운기에 걸어가지고 이삭을 털었어요. 어려선 보리, 벼는 모두 태질을 했는데, 기억해보면 능률이 참 좋았던 것 같아요. 한 70~80퍼센트는 이삭이 떨어졌고 쌀이 부서지거나 멀리 튀어나가는 것도 덜했으니까. 태질은 특히 잘하는 일꾼이 따로 있어 이집 저집 불려다녔죠. 예전엔 타작마당이 따로 있어서 주위에 멍석을 깔고 동네 사람들이 다 같이 일을 했죠. 70년대 초만 해도 품앗이로 김을 네 번씩 맸죠.”
어르신은 당시엔 노동력이 풍부했기에 이런 식의 농사가 가능했다고 회상한다. 가구당 농지 면적도 크지 않았고 한 집당 최하가 6~7남매였으니 자기 집 논 다 심으면 인근 예당평야로 품을 팔러 갈 만큼 넉넉한 일손이었다고. 현재 매산리에서 어르신처럼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는 집은 총 열 농가이다. 하지만 자연부락을 이루며 품앗이 하는 40세대 중 어르신이 열한 번째로 속할 정도로 연령대가 높다. 젊은 일손이 그만큼 부족하단 얘기다.
어르신의 논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어르신 앞편으로 한살림 깃발이 보인다. 드넓은 논을 보니 눈이 트이는 듯하다.
우렁이가 알을 까놓은 모습과 논에 방생되어 건강하게 자라고 있는 우렁이들.
농민도 땅도 국민도 사는 길
70년대 중반까지 어르신 역시 농약의 폐해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다 천주교 농민교육 때 신부님 말씀을 듣고 큰 충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농민회 통계를 보니 일 년에 농약 중독으로 쓰러지는 농민이 1만이고, 우리나라 국민들의 암 발생률이 높은 이유는 농민들이 농약을 많이 친 탓이라는 것, 농민 자신, 소비자, 우리 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렵더라도 농약과 제초제를 주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어르신 자신도 농약을 치다 쓰러진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부님 말씀에 깊이 공감하고 이후 이화명충, 이삭도열병, 멸구가 끓을 때 세 번으로 농약을 제한했다. 지금과 같이 무농약, 무제초제 농사를 짓게 된 결정적 계기는 87년에 찾아왔다.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던 박재일(현 한살림 회장) 씨와 이병철 씨와의 친분이 있었고, 존경하는 선배의 “광영이 자네 이거 해볼라?” 한 마디에 가족 동의도 없이 응해버렸다고. 시범 농가가 된 처음 3~4년 동안은 관행 농사 때보다 수확량이 30퍼센트 이상 감소되었고, 노동력과 농자재값도 만만치 않아 수입 손실이 컸다. 게다가 일일이 손으로 작업해야 했기에 한 달 내내 논에서 나오지도 못하는 고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동네 어르신들 야단도 많이 맞았다. 별난 짓 한다고 비난해 피해다닐 정도였다. 뚝심 하나로 밀어붙인 셈이지만 가족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듯하다. 어르신도 말씀 끝에 안식구와 자녀에게 두고두고 미안하다며 말끝을 흐리셨다. 회한이 남다르실 듯했다.
“누가 뭐라 해도 농업은 생명산업이고 모든 산업의 기본이지요. 또 농업은 소중하고 없으면 안 되는, 누군가는 반드시 농사를 지어야 하지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몇천 평 농사 지어서 자녀 공부 가르치고 문화생활을 한다는 건 불가능해요. 80년대 애들 가르칠 때는 그래도 쌀값에 비해 등록금이 이렇게 비싸지 않았어요. 지금은 쌀값은 그때 시세보다 오르지 않았는데 등록금은 거의 300만 원 가까이 오른 셈이니 기가 막히죠. 지금 쌀값은 쌀값이 아니에요. 오히려 논보다 밭농사가 수입 면에서 나은 편이죠. 농업 정책이 이대로 가면 과연 10년쯤 뒤에 누가 논농사 짓겠어요?”
이런 현실 탓에 어르신은 귀농을 하겠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우선 만류한다. 뜻은 귀하지만 현실적으로 가난하게 살 각오가, 긍정적으로 보자면 가난을 즐길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분명 후회할 것이라 그러하다. 그래도 본인은 한살림 활동을 해온 것에 후회 없다신다.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정부에서 나이 들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어르신들에 대한 처우와 귀농자를 위한 제대로 된 대책을 세워줘야 한다는 대목에선 말씀에 힘이 들어가신다.
당진의 명물 토종 생강. 볏짚을 깔아놓아 제초와 보온을 도왔다(왼쪽). 참깨밭 아래로 보이는 콩밭.
보기에도 잎들이 싱싱해 보인다. 오른쪽 사진은 정광영 어르신과 정용수 귀농운동본부 본부장님이 담소 나누는 모습.
땅은 소유가 아니라 지키는 대상
정광영 어르신은 현재 논 3,600평과 밭 800평 정도의 농사를 짓고 계시다. 가톨릭농민회, 한살림 활동을 병행해야 하는 탓에 소농이라며 부끄러워하셨다. 처음엔 일손 사서 풀 뽑고 거름 주고 하다 일본에서 동력 제초기를 들여와 바퀴로 굴려 로타리를 뒤집어 풀을 맸다. 최근에는 쌀겨를 평당 2킬로그램씩 뿌려 제초와 거름으로 이용한다. 쌀겨가 발효되면서 기름막이 형성되고 그러한 표토층이 형성되면 발아도 덜 되고 제초 효과에도 탁월하다고. 우렁이도 한몫한다. 적정 시기에 양식장에서 우렁이를 분양받아 3500평에 100킬로그램 정도 방생하면 80~90퍼센트의 제초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참깨, 오이, 녹두, 들깨, 하얀동부는 모두 재래종을 기르고 있다. 특히 하얀동부는 시어머니 때부터 종자를 물려받아 키우고 계시다. 가지고 있는 기계는 경운기가 전부다. 트랙터와 방제기는 농가 셋이 공동으로 구입해 사용하고 있다.
어르신 내외의 안내로 밭으로 향했다. 집 가까이 먼저 생강밭이 눈에 들어왔다. 두둑 사이에 볏짚을 깔아 제초와 수분을 보존하고 있었다. 서산은 생강으로 유명한 곳이라 종자 보존도 아주 잘되어 있단다. 토종 생강은 일반 생강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맛과 향이 일품이라고 “향이 얼매나 진한지 몰러요!” 하고 사모님께서 보충하신다. 생강밭 옆으로는 참깨와 들깨밭, 그 너머로 콩밭이 있었고, 그 일대를 빙 둘러 드넓은 논이 펼쳐져 있었다. 깨밭 옆으로 심어놓은 땅콩에는 아주 얇은 비닐로 멀칭을 해놓았다. 어르신 내외만 농사를 짓다 보니 어쩔 수 없지만 비닐 쓰는 게 영 마뜩찮다고 하신다. 풀도 마찬가지다. 논밭에 있는 풀이야 뽑아야지만 풀 자체도 얼마나 소중한 것이냐신다.
“풀이 없다고 생각 좀 해보세요. 자연이 있어야 사람도 있는 거잖아요. 수목 없이 사람이 있을 수 있나 어디, 이 풀이 보기에 얼매나 좋아요. 와서 보니까 어때요? 좋잖아요.”
밭 사이를 지나 논으로 향했다. 탁 트인 논을 보니 눈이 시원해졌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우렁이가 까놓은 알이 보였다. 진한 분홍을 띤 알들이 여기저기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 아래로는 튼실한 우렁이들이 그득했다. 농약을 치지 않아 땅심이 좋은 탓인지 벼들이 하나같이 기름지고 건강해 보였다. 실제 어르신의 논에 미생물 검사를 해보니 일반 관행 재배하는 논보다 미생물이 무려 100배 정도나 많았다고 한다. 건강한 땅에서 자란 쌀은 우리 몸에 또 얼마나 좋을지 헤아려본다. 올 5월에 모를 심었다시니 다른 지역보다 늦게 심는 편이다. 모를 늦게 심어야 제초를 한 번 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뒷간에 모아놓은 분뇨는 열흘마다 한 번씩 통에 옮겨 6개월 정도 발효시킨 뒤 거름으로 사용한다.
뒷간의 똥은 열흘 간격으로 통에 옮겨 6개월 정도 발효시킨 뒤 거름으로 쓴다. 오른쪽 사진은 어르신이 소유하신 유일한
기계 경운기. 그 옆으로 마늘이 보기 좋게 매어져 있다.
어르신은 땅에 대한 생각도 남다른 듯하다. 건물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농토는 개인이 소유하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 하신다. 근본적으로 농토는 농사를 짓기 위한 이들을 위한 것이므로 투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경계함이다. 농사를 짓는 사람 외에는 땅을 가져선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아들이든 딸이든 농사 짓겠다는 자녀에게 땅을 물려주실 계획이다. 이곳 당진 역시 교통이 편리하고 임야로 된 소유는 전부 소유주가 서울 사람들이라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더구나 좋은 먹거리에 대한 의욕은 많아졌어도 농업 정책이나 농민에 대한 관심은 예전보다도 못하니 어르신의 시름이 잠잠할 날이 없어 안타깝다. 논밭 면적을 키우기보다 땅심과 사랑심을 키워오신 정광영 어르신의 가르침을 두고두고 새겨볼 일이다.
이정화(귀농통문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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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수정해야 할 내용과 사진 설명 부족한 부분 보충 바랍니다!!!^^ 수정이 마무리되면 웹하드에 사진과 텍스트 올릴게요~~
정평이 난 - 이름난, 천 정 - 300만 평, 왠만하면 - 웬만하면, 샛터는 살기 좋은 곳보다는 새로 생긴 마을임, 가락 - 까락, 도복이 잘되지만 수확량이 적어 - 잘 쓰러지고 수확량이 적어, 문광 - 삼광(바로 앞 문장에는 삼광이 문광으로 바뀜), 두둑 사이 - 두둑 위. 이상입니다. 재밌게 잘 쓰셔서 금방 보았습니다.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상량문은 1972년인가 몇 날 몇 시에 어떤 향으로 이 상량을 올렸다는 내용입니다. 글자가 보이면 더 자세히 기억날 텐데 그렇지는 않아서리...
고마워요. 김서방이 선생님 역할을 해줘서 완전 든든하다는~~!!
정확한 표현은 "1972년(년도가 정확치 않습니다. 학준 형이 혹시 사진을 안 찍었나 몰라요) 몇 월 몇 일 몇 시에 어떤 향으로 용마루를 올렸다"는 내용입니다.
통일벼는 필리핀 쌀이라기보다 필리핀 쌀을 원종으로 해서 육종한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필리핀 종자를 가지고 육종한 것이라 할까요. 수수나무는 수수줄기라 하는 게 맞을 것 같고, 이화병충은 이화명충, 수수도열병은 이삭도열병이 맞을 겁니다. 이상....
수정토록 하겠습니다
수수나무는 사투리 표현이라 그대로 쓰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데요... 흠...
아 사투리 표현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