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버드’ 분석
통계학과 2021150472 홍지우
영화의 제목만 봤을 때는 새라는 소재로 어떻게 풀지 궁금했는데 영화를 보고 기발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새라는 동물은 우리에게 굉장히 친숙한 동물 중 하나이다. 은혜 갚은 까치, 흥부와 놀부 등 새와 관련된 설화도 많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다가 보면 늘 보는 동물이 비둘기인만큼 새는 우리의 인식의 거리 및 물리적 거리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친숙한 존재이다.
히치콕 감독은 이러한 새의 이미지를 반전의 요소로 사용하였다. 재난 영화라 하면 보통 지진, 쓰나미, 허리케인 등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자연재해를 소재로 하였다면, ‘더 버드’는 새의 습격이라는 기존의 새의 이미지를 뒤집어 오히려 역설적이게 강조하여 공포심을 더욱 자극하였다. 미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새들이 인간을 덮쳐 재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자연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보다 극대화한다.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위치하여 만물의 영장이라고 생각한 인간이 사자 호랑이 같은 맹수도 아닌 몸집도 작은 새들에게 당하는 것은 공포심을 유발한다. 먹이사슬 위치의 뒤바뀜이 나타났다고 볼 수 있는데 이는 영화의 연출에서도 드러난다. 처음에 멜라니와 미치가 만난 새 가게에서는 새들이 모두 갇혀 있고 사람들이 밖에 있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그 위치가 바뀌어 인간들이 모두 안에 갇혀 있고 새들이 밖에 있다. 새들이 단체로 학교가 끝나길 옆에서 기다리다가 아이들을 공격하는 연출은 상당히 공포스럽다. 보통 아이들은 잘 공격하지 않는데 이 영화는 새들이 아이들을 공격하여 피 흘리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공포심을 대변하듯 영화 개봉 이후 조류 공포증 발병률이 올라갔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감독이 그저 새로운 소재의 자연재해 영화를 찍고 싶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감독이 말하고자 한 것은 새로운 것에 대한,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이다.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어두움을 무서워한다. 나이를 먹어서도 어두운 곳을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이는 어둠 그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단 그 주위가 보이지 않고 어두운 곳은 스스로 가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 있는 대상을 알지 못함에 따른 불안이고 두려움이다. 어둠뿐만이 아니다. 일상에서도 앞으로 닥칠 일을 예측할 수 없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의문과 불안이 일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알지 못하고, 친숙하지 못한 것에 불편해하고, 편안한 감정을 갖기 어렵다. 처음 가는 장소에 대해 불안함과 처음 대하는 사람을 만날 때 느끼는 불편함 등도 아마 이전에 미리 알지 못함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다.
이러한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를 강조하기 위해 영화 시작부터 끝까지 새들이 공격하는 이유, 패턴 등에 대해 정보를 주지 않는다. 인물들은 영문도 모른채 새들에게 공격 받고 새장에 갇힌 새들처럼 집 안에 대피해 있는 것이다. 또한 멜라니에게 새로운 외부인인 멜라니가 온 이후로 새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아주머니가 있는데 그 사람의 입장에선 낯선 이인 멜라니의 등장부터가 불안함을 촉발시킨 매개체인 것이다.
공포를 유발하면서도 그러한 시련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결속되고 의지하며 가까워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처음에 미치의 어머니인 리디아는 자신의 남편을 잃은 슬픔과 공백을 자신의 아들에게서 채우려 하여 멜라니의 존재를 싫어했다. 멜라니 또한 어렸을 때, 어머니를 잃은 경험이 있어 모성애의 결핍이 있는 인물이다. 험난한 재난 상황을 경험하고 이겨 나가는 과정을 통해 서로에게 동지애 및 가족애를 느끼며 멜라니와 리디아 서로 결핍을 채워주는 관계가 되어 하나의 가족이 된다. 마지막에 리디아에게 안기는 멜라니의 장면을 통해 처음에 있었던 경계심이 풀어지고 서로에게 서로가 치유 받음을 시사한다.
더 버드는 미지의 공포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공포를 자극하여 공포 영화를 연출하면서도 그 과정 속에서 피어나는 가족애 및 동지애를 그려내 드라마적인 요소도 빼놓지 않은 영화이다.
논제1: 사람들이 불확실성을 싫어하기에 대부분 안전지대 밖에 나가지 않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도전을 한다. 그렇다면 불안함을 느끼는 정도는 개개인마다 차이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 정도는 모두 비슷하지만 자아실현의 욕구의 차이에 따른 것일까?
논제2: 리디아와 멜라니는 결핍을 해소할 대상을 새로 찾은 것인데, 이는 완전한 결핍의 해소로 볼 수 있을까? 아니면 언젠가 비슷한 문제를 겪을까?
‘위플래쉬’ 분석
통계학과 2021150472 홍지우
‘위플래쉬’는 최고의 드러머를 꿈꾸는 앤드루라는 한 드러머의 이야기이다. 얼핏 들으면 감동적인 한 사람의 성장 스토리로 생각될 수 있다. 물론 그런 성장 스토리가 메인이긴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광기 어린 모습을 보이며 스릴러라는 장르가 한 스푼 들어간다.
영화 초반의 앤드류는 어중간한 실력을 가진 소심한 성격의 드러머였으나, 학교 최고의 밴드 교수인 플랫처 교수의 눈에 들어 그의 밴드에서 연주를 하게 된다. 플챗처 교수는 음악적으로는 뛰어나지만 자신의 성에 차는 연주를 하지 않으면 앤드류에게 모욕과 폭력을 하면서 그를 학대한다. 이러한 교수의 광기 어린 모습에 앤드류 또한 물들어가며 초반의 소심하고 어리숙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의 모습을 닮아간다. 경연에서 ‘카라반’이라는 곡에서 드러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위해 자신을 쓰레기라고 비하하고 주먹으로 스네어를 마구 찢으며 광기를 발산하며 정신적으로 타락해가며 자기가 좋아하던 여자친구에게 자신은 드럼에 집중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별을 고하기도 한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플랫처 교수를 통해 지도자의 역할이 무엇인지 의문점을 계속 제시한다. 플랫처 교수의 뛰어난 실력만큼 한편으로는 그의 도덕적 잣대 또한 무디다. 매드 아티스트인 그는 음악의 ‘완벽’보다 연주자에게 중요한 것은 없다는 가치관을 드러낸다. 맹목적으로 결과만을 위해 압박한다면 상대방이 그것을 버틸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데 그에 대해 답을 하듯 앤드류는 스스로의 광기를 주체하지 못하여 밴드에서 잘리고 학교에서 제적당하며 그의 증언으로 교수 또한 해임당한다. 또한 학교 측 변호사가 교수의 옛 제자 션 케이시는 훌륭한 연주자가 되었지만 우울증으로 자살했다고 알려주며 그의 교육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며 이야기는 흘러간다.
꿈을 잃게 된 그는 우연히 플랫처 교수를 만나게 되고 그는 카네기 홀에서 앤드류가 드러머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그 이유는 플랫처 교수가 자신을 해임시키는 증언을 한 앤드류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 무대에 세운 것이었다. 앤드류에게 잘못된 곡을 연습시켜 수많은 관중과 관계자 앞에서 연주를 망치고 비난 받게 만들어서 다시는 그가 무대에 설 수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까지 그는 자신의 가학적인 성향을 앤드류에게 보이며 그를 자극하는데 그에 대한 반격이라도 하듯, 앤드류는 최고의 연주를 보이며 처음의 갈등 관계가 음악으로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인다. 앤드류의 드럼 솔로 후 마지막 장면에 앤드류와 플랫처 교수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여 자세히 보이진 않지만 미소 짓는 듯한 표정을 그리며 영화는 끝이 난다.
중반부에 교수의 교육 방식의 한계점이 드러났던 것처럼 이야기는 흘러갔지만 결국 앤드류는 마지막에 최고의 연주를 보이며 플랫처 교수를 만족시키는 최고의 드러머가 된 것처럼 연출이 된다. 그런 스스로의 모습에 만족하여 앤드류도 미소를 짓고 플랫처도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해피 엔딩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관객들의 감상과 해석에 따라 '예술을 이루려는 괴짜 스승과 그에 감화된 천재 제자가 한계를 극복하고 성공을 이뤄내는 해피엔딩' 혹은 '예술에 미친 인간에 의해 제자의 인간성이 파괴되어가는 비극'으로 엇갈릴 수 있다.
우선 필자의 생각으로는 마지막 장면에서 클로즈업을 하여 각자 표정이 보이지 않았기에 미소를 짓는 것 또한 확실치 않다고 생각한다. 서로 간에 욕을 하는 입모양이 마치 미소 짓는 것처럼 보인 것일 수도 있다. 설령 미소라 하더라도 마지막 앤드류의 모습이 정말 좋은 결과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점이 든다. 앞서 말한 션 케이시는 결국 연주가로서는 성공했지만 연주자가 아닌 삶으로서는 우울증에 걸리며 실패했다. 이는 앤드류의 결말에 대한 복선을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앤드류 또한 그의 교육 방식으로 인해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예술가로서 성공해도 인생 자체에서 행복함을 느낄 수 없다면 해피 엔딩이라고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열린 결말인만큼 감독은 자신의 입장에 조심스러웠지만 감히 그의 의도를 파악해보자면, 중간에 앤드류가 이별을 고한 것은 그에게 있어 일이 사랑보다 중요한 요소라는 것인데 이는 감독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데이미언 미셸 감독의 후속작 ‘라라랜드’는 내용부터가 일과 사랑에 관한 내용이고 마지막에 둘이 이별을 하지만 각자의 일을 선택하고 그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결말이 난다. 결국 감독은 일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영역이 양립할 수 없다고 보고 두 개중에 일에 가중치를 더 둔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감독은 삶에 있어서 자신의 본업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감독은 앤드루의 결말을 나름 해피엔딩이라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논제1: 결과의 완벽을 위해 과정은 어떠 하든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논제2: 자아실현이 가장 높은 단계의 욕구인데, 이를 이룬다면 나머지 욕구는 무의미한 것이 되는가? 앤드루는 예술가로서 성취를 이루고 단명하더라도 그 길을 선택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