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를 사랑하는 나라 필리핀
한국동란 필리핀군 참전사
경기 고양시 '필리핀군 참전기념비'
필리핀은 70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섬의 나라'다. 세계 일주에 나선 스페인의 탐험가 마젤란에 의해 1521년 발견돼 서구에 소개됐다. 스페인은 이 후 필리핀 정복활동에 나서 1565년 여러 원주민 부족사회를 평정하고 목적을 달성했다. 이로 부터 300여 년 동안 필리핀은 스페인의 중상주의적 식민지 지배를 받았다.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오랜 무력투쟁 끝에 1898년 아기날도가 중심이 돼 필리핀 독립을 선언했지만 미국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햇다. 미국은 1898년 마닐라만 해전에서 스페인 함대를 격파한 뒤 파리조약을 맺어 필리핀을 활양받았다. 그리고 필리핀 혁명 세력의 저항을 물리치고 1902년 새로운 지배자로 들어섰다.
처음 필리핀과 한국의 관계는 타의에 의해 이뤄졌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아 가면서 일본은 열강들과 거래를 시작했다. 첫째로 미국과 거래를 성립시켰다. 1905년 7월 미 육군장관 태프트와 일본 수상 카스라는 이른바 '카스라 - 태프트 비밀협약'을 맺었다. 필리핀을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미국으로 부터 한국 지배를 인정받은 것이다. 이어 같은 해 8월 제2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으로부터 마지막으로 9월 러일전쟁 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으로 러시아로부터 한국 지배를 승인 받았다. 결국 이렇게 해서 한국은 일본 식민지가 된 것이다.
열강 간의 이런 비인도적 거래는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파국을 맞고 말았다. 일본이 필리핀을 침공, 점령해 친일 괴뢰정권을 세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독립국가 '필리핀공화국'이 출범했다. 오랜 식민지 경험을 가진 필리핀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들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동병상련의 처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한국에 대해서는 더욱 그랬다. 일찍이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마닐라 대학생들이 독립운동을 고조시켰던 기억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20년대 중반 한국의 민족지도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필리핀에서 동분서주하며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하려 애쓰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립국가로 출범한 이후에도 공산 반란군에 시달리고 있기에 북한 공산군의 6.25 남침은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유엔의 군사원조 요청이 있자 신생 필리핀공화국은 참전을 결정했다. 대대 규모의 필리핀군은 1950년 9월 20일 미국.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부산에 도착했다. 이때는 9.15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대반격 작전이 수행되면서 병력 수요가 급증하던 시기였다.
필리핀 대대는 10여일 간의 적응 훈련을 마치고 후방지역에서 공산 게릴라 소탕작전을 벌였다. 이어 미3사단에 배속돼 개성~평양 간의 주 보급로 경계작전을 수행하다 중공군 개입으로 김천으로 철수했다. 1.4후퇴 뒤 전열을 정비한 유엔군의 반격작전이 다시 전개되자 서부전선을 중심으로 큰 전공을 세웠다. 특히 전곡 진상리 전투(51년 4월 11일), 연천 율동 전투(51년 4월 22일), 적성 설마리 글로스터대대 구출작전(51년 4월 24일), 철원 에리고지 전투(52년 5월 18일), 양구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53년 7월 15일)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필리핀 참전 기념비(사진)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관산동 산 97-6번지 통일로 변에 하늘 높이 솟아 있다. 파주.문산을 거쳐 개성으로 이어지는 경의선 국도 야산 언덕에 17m높이로 우뚝 서서 북녘 하늘을 지켜보고 있다.
출처:김 용달 박사 국가 보훈처(2007.01.24)
필리피노들도 잘 모르는 한국동란 필리핀군 참전사
라모스 전 대통령부터 아키노 상원의원, 무명 용사들까지...
지금으로 부터 59년전 1950년 6월 25일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동족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총 사상자 259만 명, 한국군을 포함한 UN군 18만 명, 북한군 52만 명, 중공군 90만 명, 한국의 민간인 99만 명이 휴전이 된 1953년 7월 27일까지 집계한 사상자 수이다.
260만 명의 인구는 2008년 현재 인천시, 대구시의 인구수이며, 아이슬란드, 알래스카, 몽골등과 같은 국가의 전체 인구수와 맞먹는 수이다.
단 3년간의 전쟁으로 하나의 도시, 국가가 사라진 셈이 된다. 우리가 한국전쟁을 다른 전쟁에 비해 더욱 가슴 아프게 기억하는 이유는 동족간의 벌어진 전쟁으로 과거 1차 세계전쟁 당시 군인 사망자 비율 95%, 민간인 사망자 비율 5%였던 희생자 분포가, 한국 전쟁 땐 군인 사망자 비율 16%, 민간인 사망자 비율 84%의 분포로 비전투원, 비무장의 민간인 희생자가 학살 혹은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5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휴전중인 상태로 한민족 두개의 국가로 양분되어 있으며, 비유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같은 유전자를 지닌 우리 한민족이 언어와 신체상의 특징 등이 서로 다른 인종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이질화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1950년 9월 19일 까만 피부빛의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부산에 도착한다. 그들은 미국으로부터 독립한지 4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신생 국가 필리핀의 병사들로 미국의 영향력이 막강한 시기였던 탓도 있지만 그들은 당당히 UN군의 일원으로 미국,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한국전쟁에 투입되어 북한군과 중공군에 맞서 싸운다.
필리핀 병사들은 왜관, 김천, 대구, 임진강변과 철원지구 전투에 참전해 많은 전과를 올렷다.
대표적인 전투로는 경기도 연천군 율동 전투의 철의 삼각지대 전투, 크리스마스 고지 전투등이 있으며 이 전투에서 중공군 1개 대대를 섬멸한 제10보병 대대 디오니시오 S.오예다(Dionisio S. Ojeda)중령은 참전 영웅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필리핀은 1950년 9월 19일부터 1955년 5월 마지막 부대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연참전 인원 7,420명(전사 112명, 부상 299명, 실종16명, 포로 41명의 피해)을 파병했던 국가 이다. 특이할 만한 것은 한명의 필리핀 전직 대통령과 비운의 암살을 당한 상원의원 한명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이다.
1952년 제20전투부대 소대장(중위)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라모스(Fidel Vialed Ramos, 1928년 생 ~)전 대통령과 한국전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한 아키노(Beaning Surveillant A. Aquino, Jr. 1932년생 - 1983년 8월 21일 사망) 전 상원의원이다.
500페소 지폐 뒷면의 인물이 바로 아키노 상원의원이며 뒷면을 보면 종군기자로 활약할 당시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필리핀의 특수성상 굳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아도 될 만한 파워를 지닌 가문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여한 사실을 보면, 일반국민 면제자 비율 5% 대비 정치인 18%, 재벌47%로 이른바 고위층, 배경 든든한 사람들 일수록 병역면제자가 많은 우리 정치 지도층의 노불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와 비교가 된다.
현재 필리핀 참전 용사회 (Philippine Expeditionary Forces to Korea), 줄임말로 펙톡(PEFTOK),정식 명칭은 PEFTOK veterans Association, Inc. 이다, 펙톡은 한국전쟁 당시 참전자 중 약 5천명이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현재는 다수가 노환과 정부의 무관심, 빈약한 지원 속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 년 중 중간이 6월 달이 호국보훈의 달이기 때문에 누구나 적어도 한번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한목숨 바친 이들을 생각한다. 그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누군가를 기억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랑스럽게 말하는 나라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09년 현재, 전 세계 국가 수는 여전히 190개-230개로 추정할 뿐이다. 우리가 이미 겪은 59년 전의 아픔과 시련을 지구상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똑같이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상 어떤 나라도 대가나 이해관계 없이 다른 나라를 대신 지켜주진 않는다. 힘없는 나라의 설움을 논하기 이전에 스스로 자주국방의 기틀을 마련하고 국력을 키워 100여 년 전 나라를 빼앗기는 지도 모르고 당파싸움이나 하던 우를 범하지 말길 바랄 뿐이다. 필리핀이나 우리나 내심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면 더 좋았을 것이란 마음을 지닌 이가 아직까지도 현 정재계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51번째 주는 되어서도 안 되며, 될 수도 없다. 미국이 맹방이긴 하지만 100여 년 전 우리에게 했던 일(가쓰라 - 태프느트밀약(일본.미국 협약)The Katsura-Taft Agreement)을 기억하고, 영원한 맹방은 없다는 각오로 자주국방에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59년 전의 씻을 수 없는 상처에 대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필리핀인들을 무시해서도 안되며 필리핀 사람들에게 동반자적인 마음으로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그들과 우리 사이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으니 차별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은혜를 알고 되갚는 사람이 바로 자랑스러운 한국인일 것이다.
출처: 보라카이준자유여행필리핀신혼여행
6.25 한국전 참전국가 유공비
대가 없이 자신들이 처했던 상황을 떠올리며 오로지 한국땅의 자유를 주기위해 생명을 불사했던 필리핀군들의 희생에 감사를 드리며 이제는 우리가 도와야 할때이다. 스페인의 영향아래 카톨릭 국가로 전락하면서 사탄의 그늘아래 영적으로 묶여있는 이 백성들의 영혼을 주의 말씀으로 구원시켜야 할 것이다. 자유를 사랑했던 이들에게 예수 안에서의 영원한 자유로 되돌려 주는길만이 우리의 남은 빚을 청산하는 길이라 본다. 예수님의 피뭍은 깃발을 악한영이 다스리는 전역에 세우는 그날까지 필리핀의 선교를 위해 우리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것으로 여기지 않는 용맹스런 주의 군사들이 되길 소망한다.
http://cafe.daum.net/philac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