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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ode. 50
『 한국에 온다는 소리만 2년째인거 알아요? 도대체 언제 온다는 건지.
우리 누나 깨어난지도 벌써 1년이나 지났단말이에요. 난 빨리 우리 누나 보여주고 싶은데.
도대체 언제쯤 온다는건지 - 이젠 누나가 당장 내일 온다 그래도 난 안믿을것 같습니다!
음, 여긴 겨울이라 날씨가 추워요. 거긴 여름이겠죠? 좋겠다.
어느 책에서 그러는데 사람은 이기적인 생물이라서 여름이 오면 겨울을,
겨울이 오면 여름을 그리워 한대요. 정말 그 말이 딱 맞는거 같아요.
누나가 한국에 있을때는 언제든 보고 싶을때 볼 수 있으니까 누나 생각이 덜했는데
지금은 누나 보고싶은 생각이 간절해요. 매정한 사람 같으니.
참, 주철형이 우리 누나한테 프로포즈할 생각인가 봐요. 그럼 약혼반지, 결혼반지 디자인은
누나한테 맡기라고 해야지. 그러니까 빨리 한국와요. 내가 보고 싶지도 않아요?
난 보고싶어 죽겠는데. 에고, 매니저 형 난리 친다. 이만 줄여야겠어요.
그럼 다시 볼때까지 건강히. 답장도 해야되는거 알죠? 다음에 또 메일 보낼께요~
p.s 전화도 하고 그래요! 국제 전화 얼마나 한다구. 쳇! 』
〃더 개구장이가 된 것 같아. 〃
여자는 피식 웃으며 메일 창을 닫았다.
푹신한 사무용 의자에서 일어나 커피포트에서 끓고 있는 커피를 컵에 따랐다.
금세 진한 원두의 향이 실내를 메웠다.
여자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린다.
여자는 막 컵에 따랐을때의 진한 커피향을 좋아한다. 언제부터 인지 그 향이
한국 생각을 덜 하게 해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을 도망치듯 떠나온지도 팔년이 흘렀다.
어린 날 감정에 휘둘려 떠나왔지만 여자는 후회하지 않는다.
비록 그렇게 모두와 헤어졌어도 잃은것만큼 얻은것도 많았으니까.
블라인드를 걷었다.
뉴욕의 거대한 빌딩들이 금새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삭막해 보이기만했던 이들도 이제 그녀에게 모두 익숙해진 것들이었다.
Rrrrrr - Rrrrrrrrr
〃Hello.〃
[가령이니? 엄마야! ]
〃엄마? 이 시간엔 어쩐일이세요.〃
[ 어쩐일이긴 - . 일주일후에 한국온다는 편지 방금 막 봤어. 오늘 동창회라서
지금 집에 들어오는 길이거든.]
〃이렇게 늦게?〃
[ 후훗. 그게 문제가 아냐. 너 정말 한국 오는거야? 그래?]
〃…네.〃
여자는 아주 짧은 공백을 두다 대답했다.
전화기 속 여성의 목소리가 금세 들떠버린다.
[어쩜 좋아! 이번에 아주 오는거지? 그렇지?]
〃네. 아주 가는거에요.〃
여자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이제는……괜찮을 것 같았다.
[ 알겠어. 엄마가 준비해놓고 기다릴게. 일주일 후엔 우리 딸 얼굴
엄마가 만질 수 있는거다? 응? ]
젖어버린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여자는 미안함을 느꼈다.
팔년동안 그녀는 단 한번도 모국을 찾지 않았다.
그녀의 가족들이 일년에 한 두 번 겨우 그녀가 사는 곳을 방문하는 것 외엔
가족들과의 만남도 없었다.
〃알겠어요. 이제 쉬세요. 전화 또 할게요.〃
[ 그래. 몸 건강하고 밥 잘 챙겨먹고. 알았지? ]
〃네.〃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이미 반쯤 식어버려 미지근해진 컵을 들었다.
미세하게 수증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여자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있던 잡지위로 옮겨 갔다.
「 ´한국인 사진작가 하천울, 그의 두번째 개인전 `
- 섬세한 분위기와 서정적인 느낌으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던 그가
이년만에 한층 성숙해진 분위기로 돌아왔다. 이번엔……. 」
한국어로 된 잡지는 그녀가 습관적으로 정기구독 하는 거였다.
이렇게라도 잊지 않기 위해서 - .
어쩌다 이렇게 그리운 이의 이름이 나올때면 여자는 가슴이 뭉클해 지곤했다.
이번엔 그 뭉클함의 정도가 더 심했지만.
여자는 컵에 남은 온기를 느끼며 생각에 잠겼다.
어느순간,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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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현씨, 여기보세요 - Ok!! 좋아, 조금만 더 고개 옆으로 - Ok! 잘했어. 〃
실내 스튜디오.
여러 스탭들이 분주히 오가는 가운데 누군가의 촬영이 한창이었다.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를 고스란히 다 받으며 컨셉상 건조한 표정을 짓는
잘생긴 남자의 포즈는 프로급이었다.
〃자, 십분만 쉬었다 합시다!〃
사진 작가의 말이 끝나고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식용으로 마련한 간이 소파에 앉은 남자는 피곤한지 살짝 충혈된
눈을 비볐다.
〃옷 구겨지지 않게 잘 해주세요- .〃
스타일리스트의 말에 싱긋 웃어보인 남자의 미소는 여전히 맑았다.
휴대폰을 꺼내 슬라이드를 밀자 액정에 한 여자의 사진이 있다.
팔년동안 단 하루도 잊어보지 않았던 여자 - .
〃또 청승이냐. 너 이제 데뷔하고 그러면 여자 사귈수도 없을텐데 그만 잊어라, 좀.〃
〃나 연예인 말고 그냥 모델만 하고 싶은데.〃
〃얌마, 몇 번 말하냐. 넌 모델만 하기엔 아까운 인물이라니까?
우리 기획사가 너 스카웃 안했어도 다른데서 채갔어.〃
〃알아요. 미루다 미루다 결국 여기에 자리 잡은거잖아요.〃
〃지금 시작해도 넌 늦었다고. 그니까 열심히 해 - .〃
매니저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다 전화를 받으러 그 자리를 떴다.
〃후…….〃
남자는 잿빛 한숨을 내쉬었다.
휴대폰 액정에 가만히 손을 대보았다.
밝게 웃고 있는 여자.
그녀는 어떻게 변했을까.
사랑스러웠던 미소도 변함없을까.
그리움만 더 해가는 그였다.
비록 그녀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있지는 않았어도
타락의 끝에서 잡은 한줄기의 빛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촬영 다시 시작합니다, 준비해 주세요!〃
스태프의 외침에 다시 스튜디오가 바빠졌다.
그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메이크업에 들어갔다.
건조한 표정을 짓고 포즈를 취하는 남자의 눈빛이 어느샌가 복잡해 졌다.
Episode. 51
〃선배님, 좀 쉬었다 하세요. 요즘 너무 무리하신거 같아요.〃
〃고마워.〃
천울은 뻐근한 눈가를 비볐다.
조교가 가져다 준 녹차를 입으로 가져갔다.
피로가 좀 풀리는 것 같았다.
사진 전 준비로 며칠동안 작업실에서 지냈다.
하지만 아직도 할 일은 태산이었다.
천울은 소파에 털썩 앉았다.
녹차를 마시는 동안만이라도 쉬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 쉬는 시간조차 천울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그랬다. 팔년이 지났다.
그렇게 그 애가 사라진지도- 팔년이나 지났다.
뒤늦게 깨달은 자신의 어리석음에 얼마나 많은 후회를 했었는지 -
그랬던 나날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천울은 잘 알았다.
한번만 더 기회가 생긴다면 -
그때는 놓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공허한 천울의 눈동자가 슬퍼졌다.
여림에게도, 그 아이에게도, 그리고 자신에게도 -
모두 힘겨웠던 나날이었다.
팔년 전, 그렇게 그 아이와 어긋나 버렸던 날이었다.
힘없이 돌아오는 천울에게 여림이 다가왔다.
〃천울아, 괜찮…….〃
〃…오지…말아…줘….〃
〃어…?〃
〃내게 - 더이상 다가오지 말아…….〃
〃……!〃
〃하아……미안…미안해, 누나….〃
털썩- 주저앉는 여림을 뒤로 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모두가, 이기적이었다.
서로가 상처받기 싫어 이기적으로 굴었던 탓에 끝내 지우지 못할 상처를
안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상처를 안은 채로 팔년이 흘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그건 가면이었다.
점점…기다리는게, 얄팍한 가면으로 버티는게 힘겨워 지는 천울이었다.
〃……어디에 있는거야…내가 너에게…이렇게나 간절한데…….〃
어느 새 천울의 오른 손에 쥐어진 하얀 기린의 귀걸이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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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에서 내린 가령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싸늘한 겨울 공기가 폐속까지 들어왔다.
〃오랜만이야.〃
하늘에서 겨우 찾아낸 구름을 보고 가령이 내뱉은 말이었다.
언제나 빌딩에서만 보던 하늘이기에, 지금 땅에서 보는 하늘은 무척 높아보였다.
가령은 수트를 밀고 게이트로 나왔다.
도착시간을 알려주지 않아 가령을 마중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느때처럼 한산한 공항을 빠져나오며 가령은 싱긋 웃었다.
설가령, 그녀가 진짜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막 택시를 잡으려는 그 때였다.
〃저기요 - .〃
처음엔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겠거니 하고 신경도 안쓴 가령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직접 어깨를 톡톡, 쳐주기까지 하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이거, 떨어뜨리셨는데요.〃
핸섬하게 생긴 남자가 내민것은 기린모양의 귀걸이였다.
가방에 안떨어지도록 잘 걸어뒀는데 어느새 빠진 모양이었다.
〃아, 감사합니다.〃
〃되게 중요한 건가봐요. 얼굴에 화색이 도는걸 보면.〃
〃네? 중요한거요…?〃
낯선남자의 말에 가령은 가슴이 뜨끔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내 피식웃으며 남자가 내민 귀걸이를 받았다.
〃여튼, 감사합니다.〃
마침 그들의 앞에 멈춰서는 택시에 가령은 가방을 싣고 그에게 다시 한 번 목례를 한 뒤
자기도 탄다음 그대로 출발했다.
〃참, 냉정한 숙녀로군.〃
어느새 혼자 남겨진 남자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결국 웃어버렸다.
나중을 기약하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가는 길에 가령은 비언과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했다.
〃설가령 한국으로의 화려한 귀환인건가?〃
〃그럴리가. 금의환향은 아니더래도, 확실히 돌아간다는 뜻의 귀환은 맞겠지?〃
짐을 챙기는 가령에게 비언이 건넨 말이었다.
가령은 가족사진이 담긴 액자를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
벽에 기대 물끄러미 가령을 바라보던 비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없으면 나 이제 무슨 재미로 사냐.〃
〃치, 오빠가 언제 나랑 놀아주기나 했어? 검사님이 참 잘하는 소리다.〃
가령의 시니컬한 대답에 비언은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그런 비언의 모습에 가령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비언을 쳐다보았다.
〃오빠 오늘, 왠지 좀 오버하는것 같다.〃
〃너 보내기 싫으니까 그렇지.〃
〃장난하지마. 여자친구까지 있는 몸이 왜그러실까.〃
〃제인은 진짜 순수한 친구라구요, 아가씨.〃
〃친구가 애인되고 마누라되고 그러는거지. 다 친구로 시작하는거야.〃
가령의 말에 한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비언은 전과는 다른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가서도 힘들면 돌아와. 난 여기서 너 기다릴테니까.〃
〃…….〃
〃딱 이년 기다려 준다. 그 후에도 너 온다는 소리 없으면 나 진짜 다른
여자 만나서 결혼해야지. 뭐, 굳이 이년을 안기다리게 해도 돼.
이 몸이 아까우면 지금 프러포즈 하던가.〃
비언의 장난스런 말에 가령은 그제야 안심인 표정으로 마주 웃었다.
〃그럴 일은 없네요 - 그냥 제인하고 결혼해. 이년 기다리지도 말고.
오빠만 바라보는 제인 불쌍하지도 않아?〃
〃와, 진짜 서운하다. 설가령- 나 이래뵈도 인기 많거든? 너 너무 거만한거 아니냐?〃
〃어이구~ 어련하시겠어요, 왕자님?〃
비록 장난치듯 주고받은 말들이었지만 가령은 알고 있다.
비언이 한 말은 진심이 담긴 말이라는 것을.
〃다 왔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 〃
거스름돈을 받은 가령은 차에서 내렸다.
팔년만에 보는 집이었다.
가령은 설레는 마음으로 초인종으로 손을 가져갔다.
벌써 안 봐도 보이는것 같았다, 리연이 맨발로 뛰어나와 자기를 반기는 모습이.
Episode. 52
리연은 가령을 맞을 준비로 분주하였다.
공항에 도착하면 전화한다고 하였으니 이제 곧 전화가 올 것이었다.
가령이 좋아하는 음식을 이것저것 만들며 리연의 입가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일년에 한 두번, 가령을 보러 갔던 리연이었다.
처음 삼년은 돌아오란 말은 하지 않았다. 가령이 간절히 원해서 간 유학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또 해가 바뀌어도 가령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큰 내색은 안했지만 저러다 평생 한국에 오지 않을까봐 내심 불안했던 리연이었다.
그랬는데 가령이 돌아온다 했다.
이제 겨우, 리연은 안도할 수 있었다.
딩동 -
〃누구세요?〃
벨이 울렸다.
리연은 혹시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인터폰 수화기를 들었다.
초인종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가령은 밝게 웃음지었다.
잠깐동안 어찌할까 생각했던 가령은 코를 막고 자신이 아닌척 목소리를 내었다.
〃가스점검 왔는데요, 잠시만 나와주세요.〃
리연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며 마당으로 나와 대문을 열었다.
〃가, 가령아!!〃
〃Hi, Mom?〃
가령이 리연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리연은 가령을 꼭 안았다.
〃이게 얼마만이야, 우리 딸!! 전화 한다더니 왜 안했어?〃
〃성가시게 뭣하러 해. 나 혼자서도 집 잘 찾아 오는데 - .〃
〃하아……우리 딸- 이제 아주 온 거 맞지? 응?〃
〃……네.〃
〃엄만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 우리집에서 널 이렇게 껴안고 있는게.〃
리연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렸다.
가령은 리연을 더 꼭 안으며 눈을 감았다. 어느새- 리연은 나이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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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가령?! 이게 얼마만이야!!〃
〃오랜만이다? 온나리, 한설렘- 〃
셋은 그 자리에서 서로 부둥켜 안았다.
카페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힐끔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동안 잘 지낸거 맞지?〃
〃다시 돌아온 걸 환영해 - .〃
처음 가령이 유학간 것을 알고 누구보다 서운해 했던 둘이었다.
그러나 가령의 마음과 사정을 알고 응원하고 격려해 주었다.
그렇게 팔년동안 연락이 닿아 마침내 이렇게 한국에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나리 너, 이제 제법 아줌마 티가 난다?〃
〃뭐, 벌써 그렇단 말야? 아악- 안돼!!〃
대학교 졸업 후 바로 같은과 선배와 웨딩마치를 올린 나리였다.
가령은 결혼식에 못 간 것을 미안해 하며 직접 디자인한 목걸이를 선물로 보내줬었다.
그런데 벌써 나리가 결혼한지 삼년이 다 되어갔다.
〃얘, 올해 엄마된댄다.〃
〃어머, 정말?〃
설렘의 말에 눈을 크게 뜬 가령이었다.
나리는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그렇게 안된다고 말렸건만, 결국 날 임신시켰어. 아흐~ 어떡해.〃
〃애기 듣겠다. 뭘 그런 말을 하고 그러냐?〃
〃엄마 된다는 사람이 아직도 철이 없어요. 이러다 애가 엄마를 키우는건 아닌지 몰라?
으이그 - 선물은 뭐 해줄까?〃
설렘과 가령이 선물얘기를 꺼내자 나리는 얼굴을 활짝 피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둘은 그런 나리의 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설렘이 넌 요즘 어때, 일 괜찮아?〃
〃응. 즐거워 - . 이번에 나 매니저로 승진했잖아.〃
설렘은 행복해 보였다.
사실 셋중 진로에 관한 고민을 가장 많이 한 설렘이었다.
그러다 호텔경영학과에 들어갔고, 지금은 호텔리어로 일하는 중이었다.
〃축하해, 설렘아. 한턱 내야되는거 아냐?〃
〃알겠다, 알겠어. 오늘 설가령 환영회겸 내 승진 축하겸 우리 셋이 뭉칠까?〃
〃좋지~!!〃
〃임산부가 너무 나대신다.〃
〃그러게나 말야 - 〃
가령은 오랜만에 실컷 웃었다.
모두들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이제- 자신이 만나야 할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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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현씨 여기보세요 - . 좋았어! 턱 아래로 좀 내리고 - 눈빛 더 강렬하게! 〃
라현은 사진작가의 말을 따라 포즈를 취했다.
오늘은 이 화보만 찍으면 스케쥴 끝이었다.
〃나라현씨, 누가 찾아왔는데요 - .〃
잠시 쉬는 시간 동안 메이크업을 받던 가령은 스태프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스튜디오 문가에서 가령이 기댄 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누나……?〃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라현이 작게 읇조리자 가령은 그런 입모양을 봤는지
고개를 끄덕이고 서서히 라현에게로 다가왔다.
〃안녕, 오랜만이야.〃
가령이 자신의 코앞에서 인사를 건네자 그제야 라현은 가령이 환상이 아님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 말도 안 돼……!〃
라현은 가령을 꼭 안았다.
가슴이 벅차서,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윽, 숨도 못쉬겠다. 연예인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자각이 없어서야.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러냐?〃
〃누나라면 스캔들 백번나도 상관없어요.〃
라현의 말에 가령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 아인, 여전했다.
Episode. 53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요즘 들어 - 가슴이 답답해진 천울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냥, 계절을 타나 싶었다.
한참을 촬영에 몰두하고 있을 때쯤이었다.
천울은 문득, 사진기를 내려다 보았다.
언젠가 수학여행에서 가령이 말했었다.
사진을 잘찍는 것 같다고 - . 혹시 어디서 배운적 있느냐고.
굳이 가령의 그 말 때문에 이 일을 선택한 건 아니었지만, 사진을 찍다 보면
자연스레 가령이 생각났다.
잘 지내고 있긴 한걸까…….
그 때, 천울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천울은 생각에서 벗어나 슬라이드를 밀었다.
〃여보세요.〃
[ 여어 - 하천울? 오랜만이다. ]
〃…상훈이구나. 무슨일이야.〃
[ 무슨 일은 - 이번에 나 결혼하잖냐. 너 있는데 주소를 몰라서
청첩장은 못보내고, 이렇게 전화했다. 서운한거 아니지? ]
〃뭘- 괜찮아.〃
[ 그래. 그럼 다행이고. 아, 이번에 설가령 귀국했다더라? ]
전화기속에서 들려오는 이름에 천울은 멈칫했다.
한시도 떨치지 못했던 그리운 이름이 들려오고 있었다.
〃…그래…?〃
[ 전화 한 번 해보려고. 연락처를 구하긴 했는데 - 너도 알려줄까? 전화 한 번 넣어봐.
그래도 너네 사귀던 사이 아니냐. ]
〃어?〃
[ 하 - 그렇게 말도 없이 사라져서 우리 전부 다 놀랬었지, 아마?
올해로 팔년이니까 벌써 십년이 다 되간다. 세월이 참 빨라. 그렇지? ]
〃……그래.〃
[ 불러 줄게, 받아 적어라. 010 - 9638 …….]
어느새 손은 펜을 쥐고 메모지에 번호를 적고 있었다.
천울은 자신의 행동에 놀라 펜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고맙다. 그래, 나중에 다시 연락하고 - 어. 그래.〃
멍하니 떨어뜨린 펜을 주우며 말했다.
그렇게 통화를 마친 천울은 멍하니 메모지를 바라보았다.
이 번호를 누르면 그렇게 그리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천울은 메모지를 손에 꾹 쥐었다.
이거였나 보다. 요즘 이상스레 가슴이 답답했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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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해요, 우리 누나에요. 누나 - 내가 얘기했지? 가령이 누나야.〃
〃안녕하세요, 설가령입니다.〃
가령이 고개 숙여 라리에게 인사했다.
라리는 가령이 생각했던 그대로였다. 긴 생머리에 하얀 피부,
기품있어 보이는 분위기와 아름다운 외모.
비록 침대에 앉아있긴 했지만 라리는 말도 할 수 있었고, 약간의 행동도 할 수 있었다.
가령이 한국을 비웠던 사이, 라리는 길고 길었던 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반가워요. 내가 의식이 없는 동안 우리 라현이 많이 챙겨줬다고 들었어요.
만나면 인사해야지 했는데 - 결국 만났네요.〃
라리가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이 라현과 닮았으면서 또 여성스러운 아름다움이 느껴져서 가령은 기분이 묘했다.
그 때, 방문이 열리며 주철이 들어왔다.
〃어, 혹시 가령이? 아니아니, 이제 가령씨라고 불러야지. 가령씨 맞아요?〃
〃아- 안녕하세요. 주철아저씨… 맞죠?〃
주철과 가령도 너털웃음을 지으며 반갑게 인사했다.
모두들 오랜만이었다.
〃유학갔단 소린 들었는데 이제 아주 온 거에요?〃
〃네. 한국에서 다시 시작하려고요. 그리고 말 놓으세요. 원래 대로요.〃
주철이 따르는 술잔을 받으며 가령이 말했다.
넷은 주철의 가게에 모였다.
가게는 전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다. 전보다 더 커지고 종업원 수도 많아졌다.
〃가령씨 보석디자이너라고 들었는데, 맞아요?〃
〃아, 네.〃
〃부러워요. 나도 잠깐이지만 미술 배웠었는데…….〃
라리가 말끝을 흐리며 기침을 했다.
그러자 주철이 냅킨을 들어 라리의 입가에 가져갔다.
그런식이었다. 라리가 조금이라도 힘들어 하거나 지친 기색을 보이면
주철이 옆에서 라리를 다독여 주고 보살폈다.
그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둘은 한 몸인것 같았다.
〃으~ 닭살. 내가 이래서 두 사람하고 같이 있지 못하겠다니까?〃
라현이 양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나 라현도 그렇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오히려 둘을 격려하고 아끼는 처남노릇을 톡톡히 하는 듯 했다.
부러웠다.
편안하고 그림자같은 사랑을 하는 둘이 가령의 눈에 부럽게 비춰졌다.
아주 잠깐, 그 아이가 생각났지만 가령은 다시 고개를 젓고 말았다.
〃누나, 우리도 빨리 저렇게…….〃
〃시끄럽다, 나라현. 일이나 열심히 해라.〃
가령은 라현의 볼을 잡아 당겼다.
아직도 자신을 어린애 취급하는 가령의 모습에 라현은 인상을 구겼다.
이건, 정말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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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울은 이마를 짚으며 쇼파에 앉았다.
두통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방금 전, 여림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었다.
천울은 끊으려 했지만 끊을 수 없었다.
여림이 울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내리 십분을 울기만 하던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스탠드에 걸린 하얀 기린을 물끄러미 마라보았다.
오늘따라 귀걸이에 박힌 큐빅이 더 빛나는 것 같았다.
〃선배님, 누가 찾아오셨는데요.〃
〃누가 왔는데……?〃
미연의 말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난 천울은 그 자리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잘 지냈어? 여전하다.〃
천울에게 태연스레, 아니 태연을 가장하고 천연덕스럽게 안부를 묻는 사람은,
바로 가령이었다.
Episode. 54
덜그럭, 찻잔 놓이는 소리가 났다.
가령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결국 사진 찍는구나 - . 잡지에서 봤어, 이번에 개인전 준비한다는거.〃
〃……응.〃
천울은 가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칼은 굵게 웨이브가 져 있었고, 연한 화장을 했다.
회색의 정장이 무척 잘 어울렸다. 그 때보다, 훨씬 성숙해진 분위기를 가졌다.
〃작업실 분위기 괜찮다. 아까 다른 사람도 있는 것 같던데. 연습생?〃
〃그냥, 후배.〃
〃음…그렇구나.〃
다시 그들에게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시계바늘이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가령은 한참 망설인 끝에 입을 열었다.
〃여림언니는- 잘 지내?〃
〃아……어.〃
천울은 한박자 쉰 다음 다시 말을 꺼냈다.
〃다음 달에 약혼해.〃
천울의 말에 가령의 눈이 커졌다.
천울과 약혼한다는 뜻일까, 아님 다른 사람과 약혼한다는 뜻일까 - .
어찌되었든 그 두가지 이야기 모두 가령에겐 달갑지 않은 소식일 것이었다.
〃그, 그래…? 축하해.〃
창백해진 얼굴빛을 숨기고 가령은 애써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그러나 찻잔을 드는 가령의 손끝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천울 역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가령에게 말했다.
가령은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눈이 따가워져 오는 것 같았다.
〃괜찮은거야 - ?〃
말을 해놓고도 가령은 후회했다.
괜찮냐고 묻는 자신이 그렇게 한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이제와서, 마치 자기가 무엇이라도 되는 양 천울에게 그런 말을 꺼냈다는 것이
우스워 보였다.
〃보는 대로.〃
천울은 가령에게 찻잔을 들어 보였다.
가령은 그저,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가령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천울을 바라보았다.
천울은 가령을 흔들림없이 쳐다 보고 있었다.
가령은 고개를 돌렸다.
천울이 혼자일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직접 얘기를 들으니 가슴이 싸해져 왔다.
왠지- 자기만 여전히 과거에 얽매여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언제 한 번, 소개시켜 줘. 누군지 궁금하다.
사진 찍는 사람은 원래 눈이 높다던데. 누가 네 마음을 흔들었는지 - 보고싶네, 기대된다.〃
가령은 담담히 말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넌…어떻게 지냈어.〃
〃쥬얼리 디자인 해. 이제 다음주부터 다시 일 시작할거야.〃
〃그래.〃
〃아, 성결이하고 사교 결혼했다는 소식 들었어. 둘은 어떻게 지내?〃
〃카페 영업하고 있어.〃
천울의 말에 가령은 푸훕- 웃음을 터뜨렸다.
둘의 이미지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풉- ! 카페…? 큭큭- 어디서? 궁금하다. 우리 가볼래?〃
가령은 자신이 말을 꺼내놓고도 놀라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스스럼없이 같이 가자는 말을 할 줄은 자기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울은 그런 가령의 당황한 모습을 모른체 했다.
〃가자. 일어나 - .〃
천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어딜- ? 〃
〃가보자며. 말 나온 김에 가자. 다음주부터 바빠질 거 아냐.〃
〃그냥 이렇게 가도 돼?〃
〃그냥 가지, 그럼 절차가 필요한가?〃
천울이 아무렇지 않게 가령의 팔목을 잡아 끌었다.
그 행동에 또 가슴이 덜컹한 가령이었다.
바보같이 정말 왜이래, 정신차려.
가령은 마음을 다잡고 핸드백을 챙겼다.
〃그래, 가자.〃
천울과 가령은 스튜디오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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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 이게 누구야, 하천울 아냐?〃
반갑게 천울을 맞는 성결이었다.
이제 둘은 다시 옛날 처럼 스스럼없는 친구로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런 둘의 모습에 가령은 또 한 번 놀랬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냐?〃
〃나야 뭐 늘 그렇지. 옆엔 누구…?〃
성결이 가령을 못알아 보자 천울은 작게 웃었다.
〃설가령이야. 기억안나?〃
〃뭐, 네가? 야 - 너 진짜 예뻐졌다~?〃
〃빨리도 알아본다, 유성결.〃
가령이 성결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은 정말 아주 오래전 일 인 것 같이 느껴졌다.
〃여보, 세현이 어린이집에 데리러 안 갔……. 어?〃
그때,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던 사교가 천울과 가령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여보, 애들 왔어.〃
성결이 웃음을 띄며 말했다.
사교의 눈에 금세 눈물이 맺혔다.
그 때- 달가운 인연은 아니었지만, 8년만에 보는 가령이 그녀도 반가웠다.
〃진짜, 오랜만이네…….〃
사교는 가령을 덥썩, 끌어 안았다.
Episode. 55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성결과 사교를 만나고, 나리와 설렘까지 만난 한 주가 정신없이 지난 다음에야
가령은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가령이 있는 회사는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꽤 알력이 있는 회사로,
국내는 물론 국외까지도 알려진 쥬얼리 회사였다.
가령은 그곳에서 디자인 1팀장을 맡고 있었다.
이번에 가령이 맡은 프로젝트는 꽤 중요한 것이었다.
귀국해서 일을 시작하자마자 맡은 프로젝트가 회사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중대한
일이라는 것에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가령은 자신있었다.
쓸데없이 다른 일에 신경만 안 쓴다면.
가령이 그동안 조사했던 보고서와 틈틈히 준비했던 기획안을 들고
로비를 들어서려던 때였다.
〃어어……!!〃
〃앗 - !〃
급하게 엘리베이터에서 뛰어 나오는 남자와 부딪힌 가령은 들고 있던 화일들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어깨에 작은 통증을 느끼며 가령은 바닥에 흩어진 화일들을 줏었다.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아, 네. 괜찮으세요?〃
가령과 함께 화일을 줍던 남자가 가령에게 괜찮은지를 물었다.
가령이 고개를 들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왠지 처음 보는 얼굴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남자에게서 화일을 건네받은 가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그를 어디서 봤는지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저번엔 귀걸이, 오늘을 화일. 다음번 엔 커피라도 엎겠어요. 그죠?〃
〃네?〃
남자의 말에 가령은 다시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그때 가령의 머릿속을 스치는 형상.
〃아! 그때 공항에서…?〃
〃딱 한 번 봤는데, 용케 기억하시네요.〃
유쾌한 웃음을 짓는 남자 덕분에 가령마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두 번째로 만난 둘은 로비에서 서로 얼굴을 보며 웃고 말았다.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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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이- 한국 왔다면서……?〃
여림의 말에 렌즈를 만지던 천울의 손짓이 멈칫했다.
그러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다시 렌즈를 손질했다.
〃응.〃
〃…봤어?〃
〃……어.〃
여림의 작은 한숨소리가 조용한 실내를 메웠다.
여림역시 그닥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나도 한 번 봐야되는데, 가령이.〃
〃누나가 뭣하러 걔를 봐.〃
천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가령과 관련된 말에 저렇게 반응하는 천울의 모습에
금세 안타까운 눈빛을 하는 여림이었다.
등을 돌리고 있는 천울이었지만, 천울이 지금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귀국했다는데 인사 정도는 해야지 - . 그래도 전에…….〃
드르르륵. 드르르르륵.
테이블위에 올려진 여림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러나 여림은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듣다 못한 천울이 다가와 휴대폰을 집어 여림에게 건넸다.
발신자는 여림의 약혼자인 경영이었다.
〃받아, 매형이야.〃
〃……싫어.〃
여림은 무릎을 끌어 안고 고개를 묻었다.
그러는 사이, 멈췄던 휴대폰의 진동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천울은 한숨을 쉬고 폴더를 열었다.
〃예, 매형.〃
[어, 처남이 받네? 여림씨 또 스튜디오에 있는거야?]
〃…네. 요 앞에 왔다가 잠깐 들렸대요.〃
천울이 흘끔 여림을 바라보았으나 여림은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고 있었다.
[여림씨 옆에 없어?]
〃화장실갔나 봐요. 오면 매형한테 전화왔었다고 전할게요.〃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알겠어. 다음에 봐 - 처남.]
〃예, 매형. 들어가세요 - .〃
폴더를 닫은 천울은 여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드는 여림이었다.
〃이럴거면 결혼한다는 말은 왜 했어.〃
딱딱하게 굳어진 천울의 말투에 여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네가 가장 잘 알잖아. 내가 왜 그랬…….〃
〃웃기는 소리 하지마! 그 날 이미, 다 끝난 얘기야.〃
격해진 천울의 목소리에 여림의 눈이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흐를것 같은 얼굴이었다.
천울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가. 나 일해야돼.〃
〃나 좀 봐…….〃
여림이 애써 떨림을 감추고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 자신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약해진 것일까.
천울은 여림의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다시 사진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여림은 입술을 꼭 깨물었다.
〃……갈게, 천울아. 나 더이상 너한테 매달리는 거 안해.
근데……그렇게 냉정하게 돌아서지만 말아줘-.〃
〃경영이 형, 좋은 사람이야.〃
〃…….〃
천울의 말에 이번엔 여림이 입을 닫아버렸다.
한동안의 침묵끝에 조용히 작업실의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천울은 그 상태로 눈을 감아버렸다.
머리가 지끈 거렸다.
Episode. 56
〃팀장님, 곧 회의 들어가요.〃
〃네, 준비하고 있습니다 - !〃
가령은 정신없이 화일들을 챙겨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다.
이번 브리핑에서 점수를 잘 따야 일 하기가 수월해 질 것이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간다 - !!〃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기합을 불어넣고 가령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화일을 들고 회의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가령이 자리에 앉았다. 이제 주요 인사들이 오면 본격적인 브리핑이 시작할 것이다.
앞에 놓인 물컵을 들어 입에 갔다대는 순간, 가령은 눈을 의심했다.
아까 아침에 로비에서 보았던 남자가 회의실로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령이 그 남자에게 시선을 두고 있을 때 그 남자도 가령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돌아보았다. 가령이 흠칫 놀라는 기색을 보이자 남자는 씩 웃어보였다.
마치 이렇게 다시 만날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때 소란스러웠던 회의실이 잠잠해 졌다.
사회자가 이번 브리핑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하고 있었다.
가령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왠지 집중력이 흐트러 진 것 같다.
이제 자기의 차례가 되었다 생각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순간, 사회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그 남자를 돌아보았다.
무언의 싸인.
사회자는 입에 살짝 미소를 걸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관한 브리핑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들께 소개시킬
분이 있습니다. 강도랑이사님, 나와 주십시오.〃
회의장은 술렁거렸다.
가령은 헛웃음을 지었다.
며칠 전 직원들이 휴게실에서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곧 새 이사님이 발령받아 올 것이라는, 그 이사에 관한 얘기들이었다.
도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사회자가 서 있던 자리로 갔다.
그제야 주위는 조용해 졌다.
〃안녕하세요. 강도랑입니다. 미흡한 실력이지만 앞으로 회사를 잘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부탁드립니다.〃
도랑이 간단한 인사를 마치자 사람들은 그를 박수로 환영했다.
가령도 약간 떨떠름한 기분으로 손뼉을 쳐야 했다.
도랑은 자리로 돌아와 브리핑을 시작하는 가령을 쳐다 보았다.
생기넘치는 눈, 오똑한 코, 붉은 입술.
무엇보다 그녀의 반짝 빛나는 눈에 자꾸 시선이 간다.
처음 공항에서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어딘가 허전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아까 로비에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인데도 웃음이 나왔던 그때와
지금 가령의 모습은 또 달랐다.
매력적인 여자.
볼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는 가령이 왠지 끌리는 도랑이었다.
가령은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도랑을 흘끔 쳐다 보았다.
그가 이사라는 말에 더 신경이 쓰였다.
무사히 브리핑이 끝나고, 그때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가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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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여기서 뻐기는 거야.〃
천울이 신경질적으로 라현에게 돌아보았다.
라현은 입에 막대사탕을 물고 잡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라이벌 탐색이랄까.〃
라현의 말에 천울은 기가 찬 웃음을 지었다.
〃무슨 라이벌.〃
〃새삼 왜그래요? 가령이 누나 귀국한 거 뻔히 알면서.〃
〃……네가 말하는 거라면 난 네 라이벌이 아냐.〃
라현은 천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천울은 소품정리중이었다.
〃비겁한 새끼.〃
라현이 입에서 사탕을 빼며 말했다.
천울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소품에게 손을 가져갔다.
〃넌 그때나 지금이나 비겁해.〃
〃그럴지도 모르지.〃
시니컬한 천울의 목소리에 라현은 맥이 탁 풀린다.
라현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넌 아니라고 해도, 내가 그렇다면 그런거야.
내가 누나 마음 얻지 못하는 한, 내가 인정한 라이벌은 너 하나뿐이야.〃
라현은 그대로 옷을 챙겨 스튜디오를 나갔다.
천울은 그럼에도 한동안 소품정리를 계속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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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택시 - !!〃
차를 가져 오지 않은 걸 후회하면서 가령은 택시를 외치고 있었다.
전철이나 버스를 타고 집에 가기엔 짐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무심한 택시들은 저마다 손님들을 태우고 가령앞을 지나치고 있었다.
그때 잘 빠진 승용차 한대가 가령앞에 멈춰섰다.
창문이 열리고 보이는 얼굴은 바로 도랑이었다.
〃아, 이사님.〃
〃짐이 많은 것 같은데 집까지 바래다 줄게요. 타요.〃
〃아니요, 괜찮은데요.〃
가령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호의는 오히려 가령을 더 껄끄럽게 할 뿐이었다.
가뜩이나 그가 이사라는 사실에 가령은 심란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번씩이나 가령은 그에게 빚을 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도 괜찮으니까, 어서 타요.〃
가령이 거부를 하려 할 때 저 뒤에서 '빈 차'라는 불빛을 깜박이는 택시가 오고 있었다.
〃전 저거 타고 갈게요. 안녕히 가세요.〃
가령은 서둘러 택시를 잡아 탔다.
도랑의 차를 지나쳐 가버리는 냉정한 택시에 도랑은 가볍게 핸들을 쳤다.
한 방 먹은 것 같다.
저 매력적인 여자는 자기를 거부하고 있다.
바리게이트를 확실히 쳐버린 느낌이 들었다.
도랑은 웃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앞으로의 회사생활이 기대되는 그였다.
Episode. 57
천울은 로비에 들어섰다.
대학선배가 잠시 자기가 근무하는 회사에 들르라 해서 였다.
지나가는 여직원들은 천울을 흘끔거렸다.
그의 잘생긴 외모와, 몇 눈치 빠른 직원은 그가 사진작가 하천울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었다.
천울이 엘리베이터에 올라 문이 닫히려는 순간이었다.
가령의 뒷모습이 문득 보인 것 같았다.
천울이 황급히 '열림'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그가 다시 주위를 두리번 거렸을 땐 아무도 없었다.
〃잘못 본 건가…….〃
천울은 씁쓸한 표정으로 '닫힘'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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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이게 정말 얼마만이냐.〃
도랑이 웃으며 천울을 맞이했다.
천울도 도랑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선배 귀국한 건 알았지만 오자마자 이사 자리맡을 줄은 몰랐어요.〃
〃엄마 때문에 그렇지. 좀 성화시냐. 적응하면 바로 아버지 건축회사로 옮길 생각이야.
거기서 다시 시작해야지.〃
천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랑의 사무실은 그의 성격대로 깔끔했다.
전체적으로 화이트 분위기였다.
〃근데 밖에서 보자고 하지 뭣하러 회사까지 불렀어요?〃
〃음 - 넌 역시 예리해.〃
도랑이 천울을 향해 특유의 사람좋은 웃음을 지었다.
천울은 뭔가 불안해졌다.
대학교때도 저 웃음에 속아 도랑의 리포트를 떠맡곤 했었다.
이윽고 도랑은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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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안녕하세요. 오, 오늘부터 나, 나라현씨 스타일리스트를 맡게된
고,공하얘라고 합니다.〃
라현은 앞에 선 여자 때문에 벌써부터 뒷목이 땡겨오는 것을 느꼈다.
자신도 신인인데 코디마저 초짜를 데려오다니.
〃형, 초짜끼리 뭘 어쩌라고.〃
라현이 신경질적으로 매니저한테 말했다.
그러자 매니저 승욱도 머리를 긁적였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얌마, 그래도 쟤 실력은 알아준…….〃
〃실력이 문제야? 뭔가 경력이 있어야 날 이끌어주지.
이건 내가 오히려 애를 끌고 다니게 생겼으니- .〃
라현이 하얘를 아래 위로 훑어 보며 말했다.
하얘는 그 시선을 느끼면서 입술을 꼭 깨물었다.
참아야 해. 참아야 해. 살인도 면한다, 공하얘. 참아라.
〃그, 그래도 저…… 잘 할 자신 이,있습니다. 시,시켜만 주시면…….〃
이번에도 라현은 말을 자르고 버럭 화를 냈다.
〃시켜만 주면 다 한다고? 네가 무슨 나가요 걸이냐? 아 나 진짜.〃
라현은 지금 저기압 상태였다.
화가 났다.
천울의 그 어정쩡한 태도도, 며칠째 연락도 안되는 가령도 다 화가 났다.
그래서 라현은 본의 아니게 새 코디에게 짜증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얘가 그런 라현을 알 리 없었다. 결국 한 성질하는 하얘도 폭발하고 말았다.
〃이 사람이 보자보자하니까 누굴 바보로 아나. 뭐, 나가요걸?
이봐요, 당신 아직 연예계 데뷔도 안했잖아요? 근데 뭘 믿고 이렇게 콧대가 높아요?!
이런 싸가지로 무슨 방송일을 한다고 그래. 나도 아직 방송계일은 안해봤지만
거기가 어떤 지는 대강 알거든요?
너같은 싸가지는 당장 거기 사람들한테 소리소문없이 파묻히고 말걸?
재수가 없으려니까 진짜.〃
승욱의 입이 쩍 벌어졌다.
하얘가 라현의 기분을 아주 제대로 긁어놓은 것이었다.
예상대로 라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여자 말 들으니까 겁이나서 못해 먹겠네요. 하 - 어이가 없어서.
형, 이런 식으로 일 할거예요?〃
라현이 문가로 다가가자 더 참을 수 없었던 하얘가 성큼성큼 라현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손을 들어올려 그대로 라현의 뺨을 후려쳤다.
〃나도 너같은 새끼는 필요없어. 너보다 내가 더 아니올시다네요! 〃
쾅 - 문 소리를 내며 하얘가 사라지자 그 자리의 사람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라현은 얼얼한 뺨을 문지르며 인상을 써야했다.
〃뭐 저딴 애가…… 형! 어떡할거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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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못해요, 선배. 그런걸 왜 내가 해요.〃
〃너니까 부탁하는거지, 내가 누구한테 부탁하겠냐.〃
〃그러니까 왜 하필 나한테 부탁하냐구요.〃
천울이 한숨을 내쉬었다.
도랑이 자신을 부른 이유는 이러했다.
이번에 회사에서 준비중인 프로젝트에 천울에게 쥬얼리 화보를 부탁한 것이었다.
한번도 이런식의 소품 화보를 찍어보지 않았던 천울인지라 도랑의 부탁에
적잖이 당황했다.
〃난 네가 필요해. 네 사진이 아니면 안된다고.〃
〃선배, 우길걸 우겨요. 이런 사진 전문적으로 찍는 사람들 많은데
왜 나한테 부탁하냐구요. 난 한번도 이런 거 안찍어봤어요.〃
〃너라면 할 수 있을거야. 천하의 하천울이 못찍는게 어딨냐.
너 선배 말 이렇게 무시할래?〃
천울이 뭐라 더 말하려는 순간, 도랑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도랑은, 잠깐만 실례, 라고 말하고 휴대폰을 받았다.
〃네, 강도랑입니다. 아, 네. 가령씨. 매장은 좀 어때요? 네. 아, 그래요?〃
천울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도랑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가령」이었다.
〃아, 미안. 시간 뺏어서 미안하다. 어디까지 얘기했지?〃
〃통화한 사람…… 누구에요?〃
〃아, 설가령씨? 이번 프로젝트에서 쥬얼리 디자인 맡았어. 우리 회사 디자인 1팀장.
꽤 매력있는 여자란 말이지 - .〃
도랑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가령의 생각만으로도 벌써 기분이 좋아지는 그였다.
도랑의 거의 안들릴듯한 마지막 말에 천울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천울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저 - 그 화보 찍을게요,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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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님, 다녀왔습니다.〃
〃바로 퇴근하지 왜 회사로 왔어요?〃
〃네?〃
도랑의 말에 가령은 헛웃음을 지어야 했다.
분명 말할게 있다고 회사로 오라던건 도랑이었기 때문이다.
〃농담이에요. 그런 사실적인 표정을 지을 줄이야.〃
도랑은 가령의 표정에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알면 알 수록 점점 그녀에게 끌렸다.
〃저, 말씀하시려는게 뭔지…….〃
금방 표정을 바꾸며 도랑에게 묻는 가령이었다.
가령은 자꾸 자신한테 다가오려는 이 남자를 밀쳐내려 했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쩐지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아직 저녁 안 먹었죠? 배고프다. 저녁먹으면서 얘기해요, 우리.〃
〃예? 아, 저 그게 - .〃
〃스테이크좋아해요? 내가 잘 아는데 있으니까 그리로 가죠. 몇년 전에 갔던덴데,
아직도 거기 있으려나?〃
가령은 막무가내로 자기를 끌고 가는 도랑과 어쩔 수 없이 저녁을 먹어야 했다.
〃가령씨, 혼자죠?〃
〃…켁, 켁 - 네?〃
난데없이 혼자냐고 묻는 도랑때문에 사레에 들릴 뻔한 가령은 물을 마시며
다시 되물었다.
〃애인 있냐구요. 설마 결혼을 하진 않았을 거 아니에요.〃
〃아, 저- 그게…….〃
〃가령씨는 나한테 할 말이 그렇게 없어요? 맨날 아, 저 그게……
진짜 그게 뭐예요, 재미없게.
큭큭 - 어쨌든, 나 그 쪽한테 작업걸어도 되는 거죠?〃
도랑의 말에 가령은 눈을 크게 떴다.
이 남자 정말 감당할 자신없게 만드는 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사님, 하실 말씀이 그건가요?〃
〃아뇨, 할 말은 따로 있어요. 우리 쥬얼리 화보 누가 찍을건지 결정났거든요.〃
〃아…네… .〃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가령을 보며 도랑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가령씨도 알지 모르겠군요. 사진계에서는 유명하니까.
하천울이라고…… 어, 알아요?〃
쨍그랑 -
나이프를 떨어뜨린 가령이었다.
도랑의 입에서 나온 이름이 너무 익숙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하천울……이요?〃
〃네, 그 사람이 이번 우리 프로젝트때 쥬얼리 화보 찍기로 했어요.〃
가령은 도랑의 말에 결국 허탈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난, 널 피해갈 수 없는거니 - .
Episode. 58
리연은 앨범정리를 하고 있었다.
케케묵은 앨범들까지 꺼내며 옛 추억에 잠겨들 즈음 사진 한 장이
앨범 사이에서 툭 떨어졌다.
〃어머, 이게 뭐……!!〃
리연은 놀라움으로 눈이 커졌다.
그 것은 아주 오래된 사진이었다.
갓난아기가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리연의 시야가 점점 뿌옇게 변해갔다.
그리고 눈에 다 차버린 눈물은 결국 흘러 내리고 말았다.
〃끅……아가……아가야……엄마가 미안해……흐윽.〃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모습으로, 마치 소녀같은 모습으로 리연은 여리게 울었다.
〃엄…마…? 엄마, 왜 그래. 왜울어, 응? 왜 울어 - 무슨일이야. 왜그래, 엄마.〃
가령은 난생 처음보는 리연의 모습에 놀라 가방을 떨어뜨렸다.
사진을 끌어안고 너무도 애처롭게 울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연은 가령의 품에 안겨 한동안 더 서럽게 울었다.
가령은 이유도 모른채 엄마의 여윈 등을 다독거려 줄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리연은 가령의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리연은 눈, 코가 새빨개진 얼굴로 가령에게 사진을 건네 주었다.
〃와아, 이거 나야?〃
〃아니……네 언니…….〃
뜻밖의 말에 가령은 사진에서 눈을 떼어 리연을 쳐다 보았다.
〃언니라니…? 나한테 언니가 어딨어. 사촌언니 사진이야? 가윤언니 사진이
왜 우리한테 있어……?〃
〃가윤이 아니야, 가령아. 이젠…너한테 말할 때가 온 거 같구나… .〃
리연은 한숨을 한번 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리연이 대학시절, 리연에게는 가장 친한 남자 친구와 애인이 있었다.
리연의 애인과 그 친구 역시 절친한 사이여서, 셋은 언제나 함께였다.
그리고 리연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그 누구보다 축복을 해준 건 그 친구였다.
그렇게 리연의 행복한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4년이 흘렀다.
리연에겐 제법 아장아장 걷기 시작하는 세살짜리 꼬마 아가씨도 있었고,
남편의 사업역시 점차 영역을 확대하고 있었다. 남부럽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는
리연이었다.
리연의 남편이 출장을 간 어느 날이었다. 딸을 시댁에 보내고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갖던 리연에게 누군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친구였다.
그런데 그는 힘든 일이 있었는지 술에 잔뜩 취해 있었고, 밖에서 내리는 비를 혼자서
다 맞은 것처럼 온 몸이 젖어 있었다. 그를 반기는 리연의 손길조차 뿌리쳤다.
엉망진창으로 취한 그가 갑자기 리연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으웁……!! 하, 하지마요. 왜 이래요, 지훈씨 - 정신 좀 차려 봐요.〃
힘겹게 그를 떨쳐낸 리연이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러나 그는 무척 괴로운 듯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았다.
〃더 이상은……참을 수가…없어.〃
〃무슨 말을 하는거…에요….〃
남자의 말에 리연은 표정이 굳었다.
남자는 거친 숨을 내쉬며 리연에게 말했다.
〃존대말 하지마. 예전처럼 편하게 지훈이라고 불러.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 마.〃
그 슬픈 목소리에 리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사…사랑해, 리연아. 사랑해……미쳐버릴 만큼 사랑해 - .〃
그의 떨리는 고백에 리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믿을 수 없었다.
〃하, 어떻게…어떻게 지훈씨가…. 지훈씨, 나 지금 충분히 행복해요.
제발 이 행복 깨뜨리지 말아줘요. 제발, 제발…….〃
〃행복해? 난 이렇게나 고통스러운데 넌 행복해?
말도 안 돼. 어째서…? 어째서 내가 이렇게 아픈데 행복하다는 거야……?〃
그는 울고 있었다. 리연이 떨리는 손으로 그의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이제야 알아서 미안해요 - . 근데 너무 늦었잖아…….〃
안타까운 리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리연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무서운 힘으로 리연을 바닥에 눕혔다.
〃왜, 왜이래요 - 정신차려요, 지훈씨. 이러지 마요 - !〃
〃4년이면 많이 참은거야. 더는 너 그 자식 옆에서 웃는 거 못보겠어.〃
〃지훈씨!! 지훈씨, 하지마요 - 지훈씨 제발!!〃
아무리 리연이 저항해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리연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순간 그는 멈칫했지만 다시 리연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이러지 마요……흐윽……이러지 마요, 지훈씨…흐흑….〃
남자는 리연의 옷을 찢다시피해서 벗겼다.
리연은 울고 있었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는 듯 그녀의 몸 곳곳에 입술을 가져갔다.
비가 심하게 퍼붓고 있었다.
번개도 치고 천둥도 쳤다.
결국 그는 리연과 끝까지 관계를 맺은 다음에야 그녀를 놓아 주었다.
리연의 눈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다시 옷을 입혀 주었다.
여자는 더이상의 저항도 하지 않고 남자가 하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사랑해서…너무 사랑해서 그랬어, 리연아…….〃
〃…….〃
남자가 여자를 소중히 끌어 안았다.
조금 전의 거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리연은 여전히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 널 이렇게나마 가진 걸로…되었어.〃
자신의 품에서 여자를 떼어낸 그는 여자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여자는 텅빈 시선으로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길고 긴 키스에도 여자는 가만히 있었다.
〃사랑해, 리연아 -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너를 무척이나 많이…사랑해…….〃
그는 여자를 한번 꼭 끌어 안은 다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다시 한번 여자를 보고는 그 집을 나섰다.
쾅 문소리가 난 다음에야 리연의 눈에서 눈물 한방울이 흘렀다.
그 날 이후, 리연은 삶에 의욕이 떨어졌다.
남편과 주변 사람 모두 그녀를 걱정했지만 리연은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았다.
그렇게 석 달이 흘렀을 무렵, 리연은 자기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월경이 멈추고, 왠만한 음식냄새에는 기절할 듯이 헛구역질을 했다.
리연은 설마하면서도 병원을 찾았다.
〃축하드립니다. 임신 12주째입니다. 여기 작은 태아 보이시죠?〃
의사가 가리키는 초음파 화면속에는 작은 생물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의 아기를 갖게된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리연은 차에 치일 뻔했다.
일부러 찻길로 뛰어든 것이었다.
그러나 운전자의 좋은 운전솜씨로 그녀는 다행히 다치지도 않았다.
리연은 집으로 돌아와 짐을 쌌다.
그리고 남편과 이혼준비를 했다. 더이상 그와 살 수 없었다.
〃도대체 당신 왜이러는 거야. 응? 여보, 말해봐.〃
〃나 - 임신했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근데 왜 우리가 이혼을 해. 응? 여보 - 제발 이러지…… 〃
〃당신의 아이가 아니에요. 당신이 출장갔던 그 날 - 그 날…….〃
리연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남편은 침대에 쓰러지듯 주저 앉았다.
리연은 가방을 들고 방을 나와 현관으로 향했다.
〃어마, 어디 가아 - ?〃
한창 재롱피울 나이인 아이가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녀를 향해 떠듬떠듬하게 물었다.
리연은 터지는 울음을 참으며 그대로 집을 나섰다.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리연은 집밖에 나와서 엉엉 울었다.
지훈을 찾은 그녀는 결국 이혼절차가 끝나고 나서 그와 식을 올렸다.
그 사이 몇번이나 죽으려 했지만 그 때마다 지훈이 그녀를 살렸다.
결혼식을 하는 신부의 얼굴은 마치 밀랍인형같았다.
그리고 5개월 후, 가령이 태어났다.
〃하, 어떻게 그런 일이…….〃
리연에게 모든 이야기를 들은 가령은 겨우 목소리를 짜내어 말했다.
얘기를 다 마친 리연은 다시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어, 엄마가 집 나올때 - 몰래 가방에 사진을 한장 넣고 나왔었거든……흐윽.
그 사진이 지금 여기서 나올 줄이야……. 미안해, 가령아 - 미안해. 엄마가…흑, 미안해- .〃
〃엄마는 그럼 - 나 진실로 사랑했던 적은 없었겠네…….〃
〃그게 무슨말이야, 가령아 - 흐윽…….〃
〃그 언니 대신 날 사랑해준거 아니야 - ? 바보같이 난 그것도 모르고 - .〃
가령의 말에 리연이 도리질치며 말했다.
〃아니야, 가령아. 절대 그렇지 않아 - 아빠는 정말 많이 미워했지만, 너는 그렇지 않아.
너도 내 자식인데 어떻게 그러니……흐윽.〃
〃……엄마, 나 올라가서 쉴게요. 엄마도…쉬세요….〃
가령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허탈한 마음으로 리연에게 말을 건넨 가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령아, 가령아 - 엄마가 잘못했어. 흐흑……가령아…….〃
리연이 안타깝게 가령을 불렀지만 가령은 아랑곳않고 방으로 올라갔다.
그곳엔 다시 리연의 울음소리만 울려퍼질 뿐이었다.
Episode. 59
방으로 올라온 가령은 힘없이 문에 기대어 스르륵 - 주저 앉았다.
너무 놀라서 아직도 꿈인 것같다.
리연의 과거, 그리고 존재조차 몰랐던 언니…….
너무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천천히 다시 되짚어 생각해 보기로 했다.
자신이 어렸을 적, 리연과 지훈의 사이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아니, 리연의 일방적인 미움이었다.
지훈은 언제나 그런 리연에게 선뜻 다가서지 못했다.
어린 가령이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는 남편인데 왜 엄마의 뒤에서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었는지.
그런데 그 이유를 이제야 알았다.
사랑해서 한 게 아닌 강제로, 억지로 한 결혼이었기 때문이었다.
죽지못해 겨우 한 결혼이기 때문이었다.
가령은 눈 앞에 놓인 현실이 혐오스러웠다.
자신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굳이 이혼까지 가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혹여 이혼했다 하더라도 얼굴도 모르는 언니는 엄마의 사랑을 받았을지도 몰랐다.
'언니' 라는 사람의 엄마를 빼앗고 행복을 빼앗은 지훈과 자신이 경멸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가령의 공허해진 눈동자에 눈물이 차올랐다.
그리고 더 시간이 흐르자 그것은 하염없이 볼을 타고 흘렀다.
너무……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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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얘와 일하게 된 라현이었다.
라현은 아직도 하얘가 껄끄러웠지만 승욱의 간절한 부탁에 어쩔 수 없었다.
싫은 건 하얘도 마찬가지 였다.
이미 그녀에게 라현의 첫인상은 너무 안좋게 남아 있었다.
거기다 연예인이 될 사람의 얼굴에 손찌검까지 하지 않았던가.
싫기도 싫었지만 사실은 그게 더 걱정되는 하얘였다.
명예훼손이니 뭐니 해서 고소하면 일은 분명 더 꼬일것이었다.
하얘는 다시 라현에게 다가가기가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돈을 벌자면 꼭 라현과 마주쳐야 했기 때문이다.
에이, 설마 남자가 쪼잔하게 때린거 가지고 뭐라 하겠어 - ?
배 째라지, 뭐. 잘 해보자, 공하얘!! 넌 할 수 있어!
〃저기요, 여기 브로치가 좀 비뚤어 진 것 같은데요.〃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을 정중하게 대하는 라현의 모습에
하얘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 그래요? 제가 손 봐드릴게요. 저기, 그리고…저번엔 제가….〃
기회는 이때다 싶어 하얘가 라현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려는 순간,
라현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라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잠깐만요. 여보세요? 누나! 어쩐일이에요? 그동안 연락한 번 없어놓고…….〃
라현이 웃음지으며 즐거워 하는 것을 가까이서 보게된 하얘는 가슴이 덜컥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그날의 차갑고 무표정했던 라현의 모습은 싹 잊혀지고도 남았다.
[ 바빠서 그랬어. 미안해, 라현아. 지금 바쁘니? 아 - 이제 너도 데뷔하려면 한창 바쁘겠다.
난 맨날 이런다니까. 쓸데없는 것만 묻고.]
〃안 그래요, 아직은. 누나, 근데 목소리가 안좋아요. 어디 아파요?〃
[ 아프긴, 안 아파. 나 엄청 튼튼한거 벌써 잊었어? ]
〃그래도 누나,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알겠죠?〃
하얘는 눈물날만큼 다정한 라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뒤로 돌아섰다.
왠지 자기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여자친구가 있었네. 연예인 대부분이 애인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건 사기 아닌가?
벌써 여자친구도 있고. 하긴, 내가 알 바는 아니지.
〃지금 이것만 찍으면 돼요. 거의 다했으니까 한 시간이면 될거야. 어디서 볼까요?
거기? 당근 알죠. 알았어요 - 한 시간 후에 거기서 봐요, 누나.〃
전화를 끊은 라현의 얼굴엔 여전히 화색이 돌았다.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벌써 가슴이 벅차오른다.
예나 지금이나 라현의 심장을 쥐고 흔드는 사람은 가령뿐인가 보다.
〃나라현씨, 전화 끊고 나더니 아주 표정이 확 살았네 - 좋아요, 그대로 갑니다!〃
작가의 농담에 라현은 눈부신 웃음을 지었다. 아니, 적어도 하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하얘는 조명을 받으며 포즈를 취하는 라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손이 아픈 느낌이 들어 꼭 뒤고 있던 손을 펴 보았다.
라현의 옷깃에 달려있던 나비 브로치가 하얘의 손바닥에서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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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울과 여림, 그리고 여림의 약혼자 경영 - 이렇게 셋이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경영과 천울은 종종 말을 주고 받았지만 여림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여림씨, 어디 아파요? 안색이 창백한데…….〃
〃네?〃
경영의 걱정스런 말에 다른 생각을 하던 여림이 놀라 그를 쳐다보았다.
천울도 여림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느낀 여림이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아, 저 안 아파요. 신경쓰지 마요, 경영씨.〃
〃그럼 다행이구요.〃
경영이 여림에게 웃어보였다.
여림은 다시 식사에 열중했다. 천울은 경영이 눈치채지 않게 여림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 보았다.
〃내가 여림씨를 데려다 줘야 하는데 어쩌지? 급한 일이 생겼어.〃
식사를 다 마친 후, 어디 2차라도 가야하는 거 아니냐며 말하는 경영에게 갑작스레
걸려온 전화로 헤어져야 했다.
〃괜찮아요, 매형. 제가 누나 데려다 줄게요.〃
〃택시타고 가도 돼요, 경영씨. 먼저 가보세요.〃
경영이 둘에게 인사를 건네고 먼저 그 곳을 떠났다.
천울이 택시를 잡으려 할때 여림이 천울의 옷깃을 잡았다.
〃조금 걷자, 천울아. 속이 안좋은 거 같아.〃
〃…그래.〃
한참을 말없이 걷던 둘이었다.
그때 여림이 앞에 있던 벤치를 발견하고 먼저 그리로 가 앉았다.
천울도 여림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대도 되지 - ?〃
천울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여림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천울은 가만히 있었다.
주변은 한산했다.
기분좋은 바람이 그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랜만이다, 네 어깨에 이렇게 기대는거.〃
〃…….〃
여림의 눈가가 촉촉히 젖어들었다.
가슴이 아프다.
〃아무렇지 않니? 다른 사람 옆에 있는 나 보는거… 정말 넌 이제 아무렇지 않은거야…?〃
〃……누나.〃
〃그때 내가 끝까지 모른척했으면, 넌 지금까지 날 보고 있었을까…?〃
〃…하….〃
〃내 마음도 네 마음도 다 모른척하고 지냈으면 네 맘 돌아서는 일은 안생겼을까……?〃
어느새 천울의 어깨가 젖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천울은 모른척 그대로 있었다.
〃내가 너무 어리석었어. 아니, 이기적이었다는게 맞겠다.
가여운 너희 둘, 나 때문에 그렇게 됐어…….〃
〃그런거 아냐. 자책하지 마.〃
내가, 잡았어야 했어. 내가 병신이었기 때문이었어.
그 애를 떠나게 한 건… 바로 나였어, 누나.
〃…그래서 나 벌 받나봐. 가슴이 아파. 숨도 쉬기 힘들 정도로 아파서,
어떤 때는 그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
여림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천울은 눈을 감았다.
〃미안해, 천울아. 미안해…. 가령이한테도 꼭 말해주고 싶어, 정말 미안하다고….〃
천울은 조용히 눈을 떠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 새 짙은 푸른색으로 물든 하늘이 유난히 시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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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이 한국에 귀국한 뒤 처음 들른 바(bar)였다.
분위기도 가령의 취향이었고, 그곳의 칵테일은 언제나 기분을 나른하게 했다.
가령은 언제나 자신이 마시던 것을 시키고 잔에 담긴 푸른 액체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지만 취해버린 것 같다.
〃누나 - 벌써 와 있었네요?〃
〃응. 피곤해 보인다. 하긴, 지금이 몇시야…….〃
라현이 가령의 안색을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누나, 얼굴이 안 좋은데 정말 아무 일도 없는 거에요?〃
〃후……글쎄. 아무 일도 없는 걸까, 정말…?〃
가령의 이상한 말에 라현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른이 되어도 이 여잔 여전히 약했다.
〃누나, 도대체 무슨 일…….〃
〃참, 라현아 - 이거.〃
가령은 일부러 라현의 말을 잘랐다.
이 아이에게 자꾸 약한 모습을 보이는 자신이 싫다.
가령이 내민 것은 화일이었다.
라현이 열어보니 거기엔 반지 디자인들이 여러가지 있었다.
〃이게 뭐에요?〃
〃라리 언니랑 주철 아저씨 갖다 드려. 예물 디자인이야.
맘에 드는 걸로 고르시라고 해.〃
〃아, 그렇게 말할게요. 저, 그리고 누나 - .〃
가령은 조용히 칵테일을 입에 가져갔다.
블루레인(Blue Rain). 파란색을 가진 비.
라현은 가령에게 더 무슨 말을 하려다 말았다.
어느덧 눈물이 맺힌 가령의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하아……미칠것 같아……정말 - 보고싶어서…….〃
가령은 엎드렸다.
칵테일 한 잔도 채 다 마시지 못한 그녀였지만, 자기는 지금 취한게 분명하다고 여기면서.
그래서 제멋대로 중얼거리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Episode. 60
〃누나, 정신차려봐요. 괜찮아요?〃
〃헤…라현아…우리 귀여운 라현이 - 이리 와봐. 누나가 뽀뽀해줄까?
아님 용돈줄까아?〃
〃후 - 차라리 나한테 업혀요, 네? 일어나 봐요.〃
〃음- 우웅…….〃
라현은 가령을 자신의 등에 힘겹게 업었다.
가령은 인사불성이 되서 술주정중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마시게 내버려 둔 내가 잘못이지. 누나, 정신 좀 차려요. 〃
가령을 업은 라현은 택시를 잡으려다말고 걸음을 옮겼다.
이대로 가령의 체온을 좀 더 가까이서 나누고 싶었다.
조금만, 조금만 이렇게 걸을게요.
〃하아…라현아…라현아 - .〃
〃…….〃
가령은 라현의 목을 그러안았다.
라현은 잠자코 가령의 말을 들었다.
〃있지 - . 있지 라현아…….〃
〃…말해 봐요. 들어줄게요.〃
가령이 반쯤 눈을 떴다.
언제 이렇게 이 아이가 커버린걸까.
이 등에 자신이 업힐만큼, 기댈만큼 어느 새 이렇게 커다래 진걸까.
〃…넌 나 어디가 좋았니….〃
뜻밖에 가령의 질문에 라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요. 다 좋았어요. 아니, 지금도 좋으니까 - 과거형 말고, 현재진행형이다.
난 누나에 관한거라면 전부 다 좋아요. 〃
가령은 라현의 머리에 꿀밤을 때렸다.
〃임마, 그런거 말고 - 좀……확실하게 말해봐아 - .〃
〃치, 이제 폭력까지 쓰네. 이렇게 무서운 여자 어디가 좋다고…….〃
〃뭐라구우- ?〃
여전히 술에 취해 발음이 꼬이는 가령의 말에 라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우리 누나때문에 죽고싶을 때가 있었어요. 학교도 때려 치우고 맨날 싸움만하고 다녔어요.
실컷 싸워서 얻어 터지고 나면, 이런저런 생각안드니까 - . 차라리 이렇게 맞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누나 처음 만난 날도 내가 먼저 시비 걸어서 맞고 있었던 거에요.
그 때 누나 덕분에 응급실 실려가서, 사실은 정신이 들었는데 귀찮아 질까봐
일부러 안 깨어난 척하고 있었거든요?〃
〃짜아식, 상습범이었구마~안?〃
〃하하. 그렇게 되는건가?
근데 누나가 나 간지럼 태워서 결국 눈 뜨게 만든거예요. 눈 뜨는 순간 누나 얼굴을
보는데, 뭔가가 쑥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 드는거있죠. 나도 모르게 첫 눈에 반한 거에요.
그리고나서 누나가 나한테 꼬맹이라고 부르면서 전화번호 적어주고 가버렸잖아요.
그 때, 누나가 나가고 나서 알았어요.〃
〃……뭘? 뭘 알았는데 - ?〃
〃이 지랄같은 인생에 드디서 빛이 생겼다구요.〃
〃…….〃
가령은 말없이 있었지만 라현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누나는 나한테 그런 사람이에요. 내가 다시 살아 가고 싶게 한 사람이라구요.
내게 누나는 빛인데 어떻게 한 부분이라도 빼놓고 좋아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다 좋다는 거에요.〃
〃…….〃
가령에게서 대답이 없었기에 라현은 그녀가 잠든 줄 알고 더이상 말없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가령의 몸이 조금씩 들썩이는 것이 느껴졌다.
〃누…나…?〃
〃흐윽…처음부터…너를 좋아했더라면…흐흑…우린 모두 안 아팠을텐데…….
윽, 흐윽…….〃
가령의 말에 맥이 풀리는 라현이었다.
어느새 라현의 눈가에도 투명한 것이 맺히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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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자마자 이사실에 들르라는 도랑의 호출을 받고 가령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서 가방을 들고 바로 이사실로 가야 할 판이었다.
〃잠깐만요 - !〃
문이 닫히려는 찰나, 누군가 다급히 외치는 소리에 가령은 열림 버튼을 눌렀다.
다시 문이 열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사람은 천울이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둘은 잠깐동안 멈칫하고 말았지만
가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어, 그래.〃
잠깐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다시 가령이 말을 꺼냈다.
〃이번에 네가 우리 화보 찍는 다면서? 얘기 들었어. 그런 건 안 찍는 줄 알았는데, 의외다.〃
〃……응.〃
천울은 무언가 더 가령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헛기침으로 말을 대신했다.
그러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어느 새 이사실이 있는 층에 멈춰섰다.
〃너도 이사님 뵈러 가는 길이었어?〃
〃아, 너도구나.〃
비서에게 말하고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잠시후, 둘은 나란히 이사실로 들어섰다.
바쁘게 일하고 있던 도랑은 둘을 보자 반가운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 일이야? 둘이 같이 들어오고. 참, 둘이 오늘 처음 보는 거죠? 인사나눠요.〃
〃이사님, 그게 - 〃
〃안녕하세요. 하천울이라고 합니다.〃
천울의 말에 가령이 놀라 천울을 바라보았다.
천울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령씨, 이 쪽은 제가 저번에 말했죠? 우리 화보 찍기로 하신 작가님이에요.
얼굴은 기생오라비처럼 생겼어도 사진 실력은 끝내 주니까 믿어 보자구요.
아, 제 대학 후배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설가령씨. 디자인 1팀장이라고 저번에 한 번 말했었지?〃
〃아, 안녕하세요. 설가령입니다.〃
얼떨결에 악수까지 하고 말았다.
가령은 인사가 끝난 다음에도 천울을 바라보았지만 천울은 가령의 시선을
모른척했다.
이대로 우리가, 처음 만난 거라면 - 차라리 그랬다면…….
가령은 천울의 속내를 알 수 없어 답답하기만 했다.
도랑과 천울, 가령의 간단한 브리핑이 끝나고, 이사실을 나온 둘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가령이 입을 열었다.
〃잠깐 얘기좀 하자, 천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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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옥상이었다.
옥상에 잔디를 깔아 휴게실처럼 만들어 놓아서
앉을 벤치도 있었고, 바람도 시원히 부는 곳이었다.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꺼낸 가령이 천울에게 캔커피를 건넸다.
그것을 받아드는 천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아깐 왜그랬어?〃
〃…….〃
〃솔직하게 고등학교 동창이었다고 말하면 이사님 앞에서 불편하게 서로 존대할
필요도 없을텐데.〃
눈이 시리다.
초록색은 눈을 편안하게 해준다던데 어쩐일인지 잔디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이 시려왔다.
〃……그냥, 그렇게 하면 처음같잖아.〃
〃…….〃
〃우리, 단지 '동창'만이 아니잖아.〃
진지한 천울의 말에 가령이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천울은 여전히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 - 지난 일인데 뭐.〃
가령이 거의 들리지 않을 듯하게 말했다.
천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볼게. 약속이 있어서 - . 그리고…….〃
가령이 고개를 들어 천울과 눈을 마주쳤다.
〃……나한텐 지난 일 아니야.〃
가령은 옥상을 나서는 천울의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았다.
자꾸만, 눈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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