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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필자 가족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슬항리 마을의 역사와 전설을 정리한 것이다. 내용은 역사서, 향토지와 어른들의 구술을 조합하여 구성하였다.
슬항리의 역사와 사회
역사 우리 가족이 슬항리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150여년 전에 불과하지만 그 이전에는 언제 사람이 들어와 어떻게 살았는지를 되짚어 보자. 이러한 내용을 통해 우리 가계를 포함한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석기 시대,
5천년 이전에 입주 이 지역에 처음으로 사람이 들어와 산 것은 신석기 시대로 추정된다. 신석기 시대는 지금부터 약 5천년 전으로 움짐을 대개 짓고 살았으며 이것은 당진의 초락도(푸레기)에서도 발견되었다. 이것은 당진의 석문, 고대 지역에 이미 오래 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뜻한다. 초락도의 움짐터에서는 무늬 없는 토기(무문토기), 연석(숫돌)․돌도끼가 발견되고 부근에서 무늬있는 토기, 북(방추차), 뼈로 만든 그릇 등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은 현재 석문면 삼봉리 소재, 석문중학교 전시실에 보관되어 있다. 북은 그물과 옷을 만드는 도구이며 이것은 이 때부터 그물로 고기를 잡아 먹고 옷을 만들어 입는 높은 문화단계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숫돌의 발견은 이들을 농경의 주요한 수단으로 삼았음을 보여준다. 초락도는 섬이기 때문에 맹수의 피해를 피할 수 있는 이점이 있으며 지금도 숫돌석이 생산되고 있다.
대산에서 발견된 청동기 유물은 대산초등학교에 보관했다가 아쉽게도 모두 도둑맞았다. 당진에 향토 주민사박물관이 선다면 이러한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또 석문면 삼화리 유채마을(현재 KBS 송신소가 있는 곳의 해안 쪽)에서 옛 무덤이 발견되었다. 옛 무덤은 당진읍 용연리, 수청리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수천년 전에 사람들이 북쪽에서는 물론 중국 산동 또는 양자강에서 서해안을 건너 마을에 도착했을 가능성을 추정케 한다. 양자강을 거치는 통로는 수로왕의 아내 허황후가 인도 또는 인도에서 중국 사천지방으로 이주한 후손의 딸로 황해를 건너 한반도(신라)로 오던 통로이었던 것을 보면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보면 슬항리와 같은 해변에도 적어도 수천년부터 사람이 살고 있었음을 뜻한다. 무덤에서 발견된 유물로 추정하건대 이들도 바다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으며 살았을 것이다.
인근에는 슬항1구의 고성 김씨와 삼화리의 교동 인씨가 이미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교동 인씨는 중이 장삼을 쓰고 춤추는 형인 석문 막고개에 묘를 쓰고 번성했다며 이곳에 사당을 세웠다. 차석기의 증언에 따르면 “교동 인씨인 인근식은 1937년 동심포에서 삼화리 사이의 바다에 제방 300미터를 쌓아 넓은 간석지를 만들었다. 자본은 그가 대고 일본인의 기술을 들여왔다. 만석군인 그는 보덕포 외창이外倉(외창, 북창, 남창의 하나)에 석출을 쌓아 선창 100여평을 만들었다. 그는 공적비를 사양했고, 보덕포에는 그의 동생 인철식의 비석이 있다.
고성 김씨의 김찬호씨의 15대 선조 때 이곳에 들어왔다. 이것은 557년여 전으로 여말선초 쯤이 되며 사회의 격변기이었다. 그러나 이 동족촌들은 1949년 농지개혁으로 위토, 문중토지에 대한 법적 제약이 가해지고 한국전쟁으로 전쟁으로 주민이 교류하면서 빠르게 해체되었다. 1960, 70년대 까지만해도 삼화리에는 집성촌의 종가댁인 99칸집 두어채가 퇴락한 채 있었으나 세월이 가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슬항1구 마술부락의 김찬호가는 고성 김씨의 종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사음말의 곽씨(390년), 경주 김씨(332년), 평산 신씨(321년), 진관리 밀양 손씨(551년), 원슬항 진주 하씨(350년) 등의 입주 시기와 비교하면 좀더 정확하게 고증할 수 있을 것이다.
경주 김씨는 동희의 9대조인 김홍욱이 당진현감으로 이곳에 이주했고 그의 선정비가 당진읍 남산에 서 있다. 그의 아들 김수진은 배를 부렸고, 김동희의 조부인 김상현의 비석에 쓰여진 ‘통정대부’는 대부분 70세 이상에게만 주어졌던 서류상의 직위이었다.
치더리 평산 신申씨는 ‘문교관계’ 관직에 있는 이의 후손이라고 한다.
밀양 손씨는 진관리를 거쳐 슬항2구로 들어왔는데 충청도 감사가 있던 공주의 순찰대(포도) 관리를 하던 이가 당진, 진관, 해창, 그리고 봉수대가 있던 고산봉 근처를 순찰을 하던 중 썰물 때 진관2구 바닷가에서 빗자루가 떠내려 갈 정도로 민물이 펑펑나오는 샘물을 발견하고 은퇴한 뒤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용두리 신申씨의 경우 홍성에서 왔다는 말도 있고 귀양을 와 눌러 앉았다는 말도 있다.
지형․지명
당진은 백제 때 벌수지伐首只(채운벌 머리의 성城이라는 뜻)이었고, 당진현은 조선 태종 때 처음으로 현감을 두었고 1895년 군으로 승격되었다. 면천은 진작부터 면천군이었다.
고대면은 면적이 53㎢이며 원래 당진군 고산면高山面, 상대면上大面, 하대면下大面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대면’하면 “하인들이 사는” “하대(下待)해도 되는 동네 사람”이라고 놀림감이 되어 어감이 좋지 않다고 여긴 주민들의 여론을 반영하여 고산의 고와 상대․하대의 대를 따와 고대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슬항리는 차석기의 증언. 용덕은 차석기의 증언에 대해 그가 고장의 역사에 관심 깊은 것은 좋은 일이지만, 외지에서 온 관계로 정확성이 떨어진다고 하였다.
에 따르면 원래 슬항리, 해촌, 마술, 사음의 네 마을이 조선말기에 슬항리로 합쳐졌다. 동네를 합칠 경우에는 대개 머리글짜를 따서 이름을 지었는데 음악과 관련된 이름(비파 슬瑟 자 슬항리)을 그대로 썼다.
슬항리의 포구로는 뱃말에 있었다.
흔히 땅이름은 땅의 생김새나 지상 지형물을 따서 지었다. 땅이 생긴 꼴에 따라 비파머리→슬항리, 소머리→우두리, 용머리→용두리, 선말목, 개목, 노루목, 닭이머리 등으로 불렸다. 지상물을 이용한 이름에는 칡다리→치더리, 자기공장→사기소리 등이 있다.
인구 구한말 때의 인구는 슬항리 30호, 해촌 20호, 마술 20호, 사음 35호 정도이었다. 2000년 현재, 슬항리1, 2구는 모두 230여 호이다.
인구는 6․25가 지나서 크게 늘었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직후 전국의 인구가 150만 명이었던 것이 100년뒤에는 750만 명으로 늘었듯이 입고 먹는 것이 안정되면서 인구가 급증하고 수명도 60세 이상으로 늘었다.
농지 구성
사암말의 농지(논) 구성을 보면 순곤의 집 앞에 첫 번째 제방이 있고 그 다음으로 200미터쯤 나가서 두 번째 제방이 있다. 두 개의 제방은 바닷물을 막을 수 있을 정도로 넓고 튼튼하다. 이것은 이 동네에 가구와 가족들이 늘어가면서 농지가 부족하고 제방 쌓는 기술을 익혀 바다를 좀 더 넓게 막아 농토를 늘리려 했던 노력의 결과로 추정된다. 현재 슬항1구의 가구가 80여호 인 점을 고려하면 일가의 입주 당시는 이것의 삼분의 일 정도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 사암말 일대는 여흥 민씨의 소작지였다. 친일파로 유명했던 민복기 전대법원장 집안이 이곳의 지주였다.. 일제 말기 서해안지방의 토지 대부분이 지주의 소유였다. 지주들은 일제의 비호를 받고 횡포가 심하였고, 이런 이유에서 암태도 소작쟁의와 같은 사건이 일어났고, 슬항리 사정도 유사했을 것이다.
소작쟁의 기록이 있을 것이다.
1948년 토지개혁 때 한 집마다 5, 6마지기를 유상분배했다. 농사만을 짓던 시기에는 식량이 모자라고 의료 혜택도 거의 없어 유아사망률이 높았다. 차석기는 밤에 공동묘지를 지나가며 아이를 잃은 어머니들의 흐느낌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1997년 증언.
현재 슬항리는 논이 100마지기가 넘는 집이 1, 2집, 50마지기가 넘는 집이 몇 집이 있다. 경지는 매우 협소해 전국의 가구당 평균인 1정보를 훨씬 하회한다. 그러므로 이곳의 농민들은 가을에 농사를 지어 봄에 빌린 장리쌀을 갚고 소작료를 내고 보면 빗자루 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필자도 어린 시절 한해 농사를 지어 집안에 쌓아 놓았던 벼가마를 한꺼번에 내가는 것을 보며 크게 당황한 경험이 있다.
골짜기가 좁아 농토도 좁고 보니 대규모 경작이 어렵다. 이것은 새로운 농업기술의 도입을 어렵게 한다. 슬항리에서는 용덕이 비닐 하우스, 마령서 재배, 배추 무 재배, 아카시와 버드나무 묘목, 마, 사과 과수원, 감나무 재배 등 선진적인 농업기법을 도입했는데, 상업 재배가 목적이었다. 1950년 초 슬항1구 교회 김연호 목사가 선진농법을 도입하는데 한 몫 했다. 당시 교회는 선교차원에서 선진 농법과 생활개선 방법을 도입, 소개하였다. 현재에는 무배추, 꽈리 고추 이외에는 특용작물을 거의 재배하지 않고 있으며 시설원예는 비닐하우스를 제외하고는 전무한 상태이다.
이러한 조건은 경제개발과 함께 이곳의 주민들을 일찍부터 외지로 나가게 했으며, 남아 있는 이들도 농업을 전업으로 하고 발전시키기 보다는 돈벌이 되는 부업을 찾게 하고 있다.
생업
슬항리 일대에는 농업과 고기잡이 외에 염전이 주요한 생업수단이었고 삼베, 육쪽 마늘, 밤은 아직도 유명하다. 곡식과 물고기는 식량이고 염전에서 나는 소금은 화폐와 바꿀 수 있는 귀중한 자원이었다. 바다 가까운 마을에 조개무덤이 두껍고 넓게 퍼져있는 것은 바다고기와 조개가 주요한 식량자원이었음을 말한다.
지난 시기에 농사는 주로 벼․콩․밀․보리․목화를 심었다. 목화는 옷의 원료이었고 일제시대에는 일본으로 쌀과 함께 공출되었다. 마늘은 약간 심었고 손님이 와야 한 두 쪽 내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근래에 감자(마령서)에 이어 고구마가 들어오며 고구마는 20세기 초에 이 지역에 들어왔다. 감자․고구마는 구황식품 역할을 했으며 이 때부터 인구가 늘고 수명도 길어졌다.
삼베생산
삼베는 용두․슬항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질이 좋기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며, 지금도 종인의 집에서 삼베 길쌈을 잣고 있으며 ‘용두삼베’로 상표등록이 되었다. 한사람이 한겨울에 100~150자를 짜며 삼베가 수의로 많이 쓰이는 한 자(60cm×30cm) 당 1만 5천 원에 팔린다.(1998) 그러나 삼베를 짜는 고통에 비하면 결코 비싸다고 할 수 없다. 지금도 삼베를 완전히 손으로 만드는 것을 보면 어려움을 짐작할 수 있다.
당진에서 삼베짜는 아낙네는 모두 254명, 생산량은 연간 1,300필로 국내 삼베생산량의 4.3%를 차지한다. 대부분 50대 이상인 아낙네들은 6월 모내기 전에 봄부터 재배해 온 대마를 수확해 찌고, 껍질을 벗겨 햇빛에 말리고, 잿물에 담궈 표백시키고, 바탕이 부드러워지도록 쌀겨물에 담그고, 숯불을 피워 풀을 먹여 질기게 한 다음, 베를 짜기까지, 어느 아낙네의 말처럼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랄 만큼 복잡하고 손이 많이 가는 공정을 모두 거쳐 삼베를 생산해 낸다.
특히 당진 삼베는 완성된 삼세를 다시 한번 잿물에 담가 기름 때 등 여러 불순물을 제거해 내는 공정까지 거쳐 다른 국산 삼베와 달리 세탁을 해도 변형이 없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 삼베는 품질이 우수해 수의용으로 팔려나가고 있으며, 천연염색을 통해 생활한복이나 침구, 방석 등 생활용품으로 소비되도록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
삼은 단위당 소득이 높으나 여성의 고한노동을 가져오고 최근에는 대마초 피는 사람들이 훑어가는 바람이 피해가 크고 이것을 막다가 다칠 염려도 있어 아에 경작을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당진군은 삼베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용두리에 이어 99년에 슬항1․2리 마을회관에 삼베직조 시설을 설치했고, 그 뒤에 삼심는 집이 다시 늘고 있다.
해방 후
삼화리에 있는 환형철강은 고철을 녹여 철근을 생산하고 있으며 노동자수는 300여명이 되며 임금은 제수당을 합하여 월 150만원 정도가 된다.
한보철강의 부도에 이어 IMF 신탁경제 신탁통치 시기로 들어서면서 당진의 경기는 급격히 하락하였다. 경제가 빈사상태에 빠졌다. 특용작물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면서 벼농사와 고무마 정도가 비교적 수익이 있는 농사가 되었다. 배추는 시장수요를 맞출 수 없고 마늘은 엘니뇨 때문에 웃자라 상품성이 약하고 생강은 다 자라기도 전에 썩는 문제가 있다. 마늘을 비롯한 과거의 품종을 개량해야 한다는 의견이 농민들 사이에 제기되고 있다. 담배는 쿼타제로 심기 어렵고 토질에 따라 소출에 차이가 크다. 그런데 2000년 들어 그마저 수입농산물 때문에 시체말로 ‘돈이 안돼’ 농민 살이가 더욱 어려워졌다.
시설원예는 기술적으로, 지형적으로 농토가 좁아 어렵다고 한다. 소(비육)는 한 때 안정적이었으나 지금은 어미소 한마리에 250만원에 불과하다. 1999년들어 소값이 반등되는 추세에 있으나 2001년 소고기 수입이 완전히 개방될 경우 충격은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주민들은 농사에 대해 IMF사태하에서 안전한 밥을 먹는 수단이라고 위안삼고 있다.
개발시대
주변의 공업화에 따라 반농반노동자 형태의 생업이 많다. 객지로 나간 사람은 물론 농사일을 떠났다. 그러나 슬항리에 남아 있는 사람은 주로 농사를 짓지만 더러는 자기 공장에 나가거나 직접 차려 일을 하기도 한다.
주거․환경․재앙․사망
주거환경
환형철강의 준공으로 공해가 심하다. 선경 석유화학 단지가 석문공단에 들어오려는 것을 막았으니 망정이지 이 시설이 들어왔더라면 슬항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고 이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주민의 사망
사망 원인이 노환보다는 암과 교통사고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과거에는 어려서 죽거나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그러나 환경의 변화와 수명의 연장으로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우리 집안의 경우 최근 50여년간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암이다. 이 점은 지역의 공업화, 차량의 증가, 기온의 증가로 더욱 심해질 것으로 우려된다. 1997~98년 당진 주민들은 석문국가공단에 입주하려던 SK사의 석유화학 단지 입주를 반대하는 투쟁을 전개, 이를 저지했다. 만약 이 시설이 당진에 들어왔더라면 석문, 고대, 멀리는 송산의 주민 일부까지 이주하고 가까운 마을 사람들은 공해병에 시달릴 뻔하였다. 울산, 대산 석유화학공장에서 발생한 공해와 그곳 주민들의 투쟁이 이곳 사람들이 싸우는데 큰 지혜와 용기를 주었다.
개펄을 모두 매립했는데 이것의 중요성을 미리 알고 대처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러나 언젠가는 매립된 바다의 일부라도 바다에 돌려주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교통
처음에는 육지는 물론이겠지만 바다를 건너서도 사람들이 왔을 것이다. 그 뒤에도 바다는 중요한 교통로가 되었다.
서산의 운산에서 당진의 슬항리로 이사를 하거나 왕래할 때는 여미→천의→황굴→진관을 거쳐 오거나 채운 뜰의 배다리를 건넜을 것이다. 이 배다리는 400여년 전에 설치돼 당진과 채운 뜰 건너에 있는 영랑사를 연결한다. 석굴 고개 동쪽 편에 있는 흰 색깔의 차돌 비석은 이 다리 준공 기념비이다. 현재 채운 뜰에 있는 약 3km에 달하는 긴 신작로는 일제 시대에 간척지를 막으면서 생긴 것이다. 채운교는 1920년 경 콘크리트가 들어 온 뒤 세운 것으로 몇 차례 중수되었다. 100여년 사이에 성구미↔장고항까지 바다는 밀려나갔다.
송산 오섬(오성鰲城?)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건넌 것은 나중의 일이다. 그전에는 오섬과 슬항리의 치더리가 육지로 연결되었으나 신평과 아산 사이의 육지가 지각변동으로 수몰되어 끊어질 때 함께 수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해운이 발달된 뒤에는 인천 → 영흥․대부도 → 장고항 → 보덕포 → 오섬 → 북창(당진읍 입구) 사이에 여객선 두 척이 취항하여 하루 한차례씩 교대로 다녔다. 현재 인천에 당진 사람을 비롯한 내포內浦 지방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이 배로 사람과 짐을 옮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속도로가 개통된 뒤에는 인천↔삼길포, 인천↔구도를 제외한 항로는 모두 끊겼다. 2001년 서해안 고속도로가 생길 경우 교통은 더욱 편리하게 될 것이다.
교육
슬항리 주민들의 교육열은 비교적 높은 편이다. 집집마다 힘닿는 데까지 공부를 시키고 있다. 그에 비해 근검 학습하는 전통이 세워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종교
보덕포에 있는 보덕사는 17세기 후반에 세워졌지만 신도는 부근에서보다 당진에서 많이 오고 있다. 이것은 당진에 공장이 들어서고 외지인의 전입이 늘면서 생긴 현상이다.
성당은 구합덕에 1890년 처음 세워졌다. 1876년 대미수교를 필두로 쇄국정책이 약간 열리고 미국․프랑스 등이 함포를 앞세우고 조선정부를 압박하는 사이에 서방의 종교기관들이 해안지방인 이곳에 속속 들어세게 되었다. 구합덕의 천주교인들이 독일의 도굴단을 행담도(토끼섬)에서 만나 수덕사 근처에 있는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원군을 안내, 도굴을 하다가 관을 덮은 두꺼운 석회층을 뚫지 못하고 간조시간이 다가오자 서둘러 철수한 일은 있다. 미국의 셔만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가 간조시간을 만나 모래톱에 걸리고 결국 박규수 평양감사가 이끄는 조선군에게 불타버린 일이 이들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경험이었던 것 같다.
미국계열인 기독교의 첫 감리교회가 1905년 삼화리 외창이(석문면사무소 동쪽 언덕)에 세워졌고 이후 각 마을로 퍼져나갔다. 대략 100호마다 교회가 하나씩 있으니 침투력이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현재와 같은 모습의 성격을 가진 감리교는 일제 말기에 들어왔다고 한다. 현재 슬항2구에 들어와 있는 교회는 일요일에 노동하지 말라고 종용하고 교회에 나올 것을 종용하는 형태이다. 또 결과적으로 전통이 깨지고 두레놀이와 같은 풍속을 구전조차 되지 않고 있다. 종교가 사회생활을 하는데 이점도 있지만, 유독 이 지역에 감리교가 성한 데에는 제국주의 침략이 선행된 지역으로 그들이 앞세운 함포의 비호아래 포교행위를 이루어졌다는 배경이 있다. 종교의 뿌리가 이렇기 때문에 대부분 외세의 간섭에 관대한 것인 지 헤아려 볼 일이다.
현재 슬항2리에서 교회에 다니는 가구가 전체의 70%이고 나머지는 유교, 절, 민속신앙(무당), 무신앙 등이다.
문화와 놀이
두레놀이․기지시 줄다리기
1950년대까지는 두레놀이라고 해서 농악놀이를 즐겼다. 당시 슬항리 두레패는 동네를 한바퀴 돌며 두레를 한판 놀고 집집마다 음식을 내놓았다. 그러나 1960년대의 새마을 운동으로 두레가 천시된다가 교회가 들어오면서 두레는 한동안 사라졌었다. 그러나 최근 다시 살아나고 있다. 슬항리의 경우에는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다.
기지시 줄다리기에도 슬항리 사람들이 물위 사람으로 참가했다. 기지시 줄다리기는 주된 줄기와 그것에 곁줄이 많이 달린 형태이다. 그러기 때문에 수백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줄다리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 물 위와 물 아래 사람들이 편갈라 줄다리기를 하였다. 용덕도 이 줄다리기에 서너차례 참석하였다고 한다. 기지시 줄다리기는 어느 해 동네에 역병이 돌아 이를 방지하려고 고안했다고 한다. 줄다리기를 통해 단결된 주민들이 재해도 예방하고, 나아가 왜구를 물리치고 결국 현대에 와서는 독재를 끈질기게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강하게 실천하려는 지역의 정서를 형성하게 한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 본다.
풍수지리
고대초등학교 뒷산의 옥녀봉에 이어 원슬항의 비파머리를 두고 옥녀가 거문고를 타는 형이라며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이라고 불렀으며 그 눈을 ‘비안목飛雁目 = 날아가는 기러기의 눈’이라고 불렀다. 비파목 즉 슬항瑟項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왔다고 한다. 따라서 슬항리 사람들은 노래를 잘하고, 대촌리 큰말 사람들은 노름을 잘한다고 한다.
도당골 산은 동쪽을 향해 누운 소의 형(와우형)으로 돌팍재 밑의 가슴부분과 엉덩이 부분이 명당이라고 한다. 슬항2구에서는 치더리의 풍수가 좋다고 하며, 이곳은 채운벌이 훤히 보여 앞이 탁 트인 전망 좋은 곳이다.
송악의 중심지인 송악면 중흥리中興里에 도시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선대의 풍수가들이 이곳의 지명을 선견지명을 가지고 지었다고 말한다.
사회․정치
김복선의 전설
임진왜란 직전 신평에는 살던 김복선金福仙은 당시 정세를 분석하고 일본의 침략의 예견, 우려하였으며 이점에 관하여 이웃에 살고 있던 이토정李土丁도 의견을 같이하였다고 한다. 김복선은 이율곡이 찾아올 것을 예견, 아산을 마주보는 망월산(망객산?)에 매일 올라 바다건너 이율곡李栗谷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느날 김복선은 이율곡이 오는 것을 보고 다가갔더니 이율곡은 자신이 김복선의 집을 찾아간다고 하였다. 김복선은 통성명도 하지 않은채 그를 업고 마침 범람한 물길을 건넜다. 이윽고 물을 건넌 뒤 김복선은 이율곡에게 멀리 돌아 시간이 걸리는 길을 말해주고 자신은 지름길을 잰걸음으로 달려오다가 중간에서 절인 생선 한 손을 사서 들고서 집으로 돌아와 이율곡을 맞을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김복선은 자신의 집에 도착한 이율곡에게 자신을 김복선이라고 말하였다.
이율곡은 김복선에게 왜군이 쳐들어 올 것으로 예상되는데 당신이 군대를 맡아 지휘하여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김복선은 자신이 비복 출신이라 그 청을 들을 수 없으니 그 대신 아산에 사는 이순신이라면 8,9년이면 왜군을 물리칠 수 있고, 충주의 **렬도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고 하였다. 이율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을 대장으로 천거하였고, 이순신은 7년만에 왜군을 물리쳤다. 그 다음부터는 아무도 김복선의 모습을 볼수 없었다.
그런데 대동아전쟁(1937~1945)에 징용된 이곳 사람이 필리핀에 갔더니 어느 묘소에 ‘김복선의 묘金福仙之墓’라는 묘비명이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때 잠적한 김복선이 필리핀으로 가 죽은 것이 수백년이 진난 뒤 이렇게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을 떠나 유구에서 이상향을 세웠다는 홍길동의 전설과 흡사하다.
동학혁명
일가 가운데 동학 관계한 이는 용태의 7촌이며 팔봉에 살던 용묵이며, 기록에 따르면 대촌리의 다수, 그리고 차석기의 증언. 1997년.
에 따르면 마술의 고성김씨 가운데 참가한 이가 있으며 슬항2구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순봉, 천종덕, 최후원, 신재옥의 할아버지․아버지가 동학교․증산교의 지파인 태을교를 믿었다.
갑오년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혁명은 ‘사람은 하늘이다人乃天’라는 동학사상의 기치를 내 걸고 이 나라의 변혁하고자 하는 일어났던 기의이다. 당시 당진 면천에서 봉기한 동학군은 서산에서 진격해 오는 동학군과 합류하여 대군을 형성하였다. 합덕에서 합류한 동학군은 그 여세를 몰아 신례원까지 나아가서 대항해 오는 관군을 무찌르고 중군 김병돈, 영관 이창유, 주홍섭, 한기경을 전사시켰다. 신례원에서 대승을 거둔 동학군은 두 패로 나누어서 한 쪽은 합덕거쳐 당진으로 진격, 점령하였으며, 다른 한 쪽은 신례원에서 남하하여 삽교 목리에 진을 치고 있던 관군을 몰아내고 홍주군으로 밀어닥쳐, 서방에서 추격해 오는 동학군과 합류하여 홍주성을 포위하고 향교에 들어가 장부(노비문서, 세금문서 등)를 불사르고, 계속해서 홍주성에 압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서산 운산 아래인 해미의 여미리에서 동학군을 토벌하던 일본군 100여명이 달려오는 바람에 홍주성은 빼앗겼다. 일본군은 청일전 풍도해전에서 청나라에 이긴 뒤 그 한무리가 홍성 결성면으로 상륙한 것이다. 동학군은 이어 신례원을 거쳐 예산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관군에게 밀고한 자가 있어 두령 최한규崔漢奎와 함께 천여명이 무자비하게 학살되었으며 나머지 동학군들도 관군에게 모두 전멸되었다.. 『충남지역의 문화유적 제6집』 15쪽, 「당진군편」 백제문화개발원.
일제 지배시기
차석기의 증언에 따르면 이 슬항리에서 의병활동은 한 이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구한말 홍성지방의 항일 의병이 서울로 가려다가. 구한말 국권상실기에 각지의 의병들이 서울로 진격, 동대문밖까지 갔다갚 패퇴한 일이 있는데, 이와의 연과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일본군에 ?겨 소난지도에 표류하여 저항하다가 모두 순국했고, 소난지도에는 이들의 무덤이 있다. 대호지의 남씨들이 항일운동에 열중했고 이들의 선조의 하나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왜군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 항일운동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상세하게 나와있다.
일제 때 징용을 간 사람이 많고 이들은 주로 북해도, 화태의 탄광에서 일했다. 용덕 형제․박기정의 큰형과 같이 만주로 간 유민도 크게 보아 징용을 피해 거기로 갔기 때문에 크게 보아 징용의 범주에 속한다. 조옥순의 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남편을 두 번 징용을 갔다 왔다. 도쿄북쪽의 동광산이었다. 처음에는 남편만 갔다. 처음에는 남자만 보냈는데 식사 등이 부실해 병이 나거나 죽어 노동력 상실이 커지자 나중에는 부인까지 딸려서 보냈다. 그래서 두번 째 갈 때에는 나도 따라서 갔다. 큰 딸인 길자는 거기서 났다. 그 곳은 뺑둘러 산이었다. 거기 있는 3년 동안 산만 보았고 귀국할 때 까지 밖에 나가본 적이 없다.”
정신대는 초기에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속여서, 나중에는 조선의 젊은 여성을 강제로 납치하여 데려갔다. 그러나 이 동네에는 피해가 없었다고 하지만 사실을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용덕의 아내인 조옥순이 정신대 납치를 피해 서둘러 결혼을 했다는 점은 정신대가 얼마나 무서웠는가를 말해준다.
8.15 이후
1946년 10월 항쟁 때를 당진 지역의 사정을 살펴보자. 10월항쟁은 8․15 후 진주한 미군이 일제의 정책을 답습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옥죄자 대구․경북지역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시위이다. 이 항쟁의 모습은 3․1운동이나 4․19, 1987년의 6월항쟁과 흡사하였다. 10월 초 대구․경북에서 시작된 항쟁은 10월 중순이 되어 내포지방으로 확산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0월 17일 당진(합덕)에서 1,000명의 군중이 경찰지서를 습격하여 경관을 구타, 감금하고 다리를 파괴하고 총기를 탈취하였다. 미군병사가 도착하여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같은 날 홍성에서도 시위대들이 외곽의 지서를 습격하고 토지분배, 쌀 분배, 미소공동위 재개를 주장하였으며, 경찰의 발포로 4명이 사망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6명을 체포하였다. 다음날 당진에서는 좌익들이 경찰서에 방화를 기도했고 천안에서 경찰이 급파되었다. 군중이 합덕, 송산 지서를 습격하여 경관이 부상당하였다. 같은 날 홍성에서는 300여 명의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던 중 군중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하였다.. 이우재 『한국농민운동사연구』, 한울, 1991, 235~136쪽.
6.25 때에는 김희곤 등이 전사했다. 보덕포와 절돌아에는 전재민촌이 건설되어 주로 황해도, 인천에서 온 피난민이 입주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은 더러는 인천으로 가고 더러는 정착하였다.
6.25 뒤에 이곳에 들어 온 북한군은 막 베가 팰 무렵(8,9월)에 1948년 분배된 토지를 거듭하여 분배하며 부자땅을 머슴들에게 나눠줘 지주들의 불만을 샀다고 한다. 이것은 북한군이 공출을 하며 벼낱알을 일일이 세게 하는 것 등과 함께 ‘극좌적인’ 정책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6.25전쟁 시기에 원슬항의 하씨河氏들이 인공에서 직책을 많이 맡자, 이를 고성 김씨가 비난했다고 한다. 당시 지역 공동체내에서 빈부와 처지의 차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로 생각된다. 우익단체에 속한 청년단체․자경단自警團이 있었다. 1․4후퇴 때에는 당진에서 철수하는 군경가족들이 슬항리 앞길을 지나 보덕포 선창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좌우익간의 보복 살륙은 당진, 석문에는 있었지만 슬항리 주변에는 없었다고 한다.
합덕·우강지역의 실태를 살펴보자. 당진은 해방 이후 여운형 등이 주도했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영향권에 있었다. 6월 28일 국군 패잔병들이 석문에 상륙, 합덕에 집결해 금융조합 소유 차량을 타고 철수하였다. 이때 경찰은 미군정 법령위반이나 리스트에 올랐던 지역좌익인사들을 우강면 공포리, 송악면 한진 바닷가에 끌고가 마구잡이 총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이 우강면 부리포 해안으로 상륙해 합덕과 예산을 거쳐 전선으로 향했고, 지역 남로당 소속 좌익계는 합덕시장과 구양도다리 등 곳곳에서 인민재판을 통해 지주와 유지, 경찰가족을 살해하였다. 음력 8월 14일 남로당계 좌익계는 마을이장과 의용소방대원 등 친정부인사라고 판단했던 주민들을 골라 우강면 창리 야산에 데려가 구덩이에 밀어넣고 최창으로 36명을 살해하였다. 국군이 다시 진주하게 되자 이번에는 우익의 보복이 시작돼 태극동맹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청년단원은 인민군 점령시 좌익활동에 가담했거나 부역에 참가한 주민들을 색출, 우강면 송산리 전파관리소 부근에 끌고와 70여명을 총살했다. 우강·합덕지역은 소들평야를 끼고 있어 영세 자작농보다는 지주 소작관계가 대부분을 차지해, 소작료는 5~7할외에도 각종 조세로 생계조차 어려웠다. 이 지역은 1893년 합덕농민운동과 갑오농민전쟁이 표출된 지역이다. 일제 이래 봉건지주와 친일파의 수탈에 시달리던 이 지역은 군내 어디보다 좌익운동이 활발했으며 전쟁으로 인한 피해도 컸다. 슬항1구에는 고성김씨 청년이 베트남전에 파병, 전사하였다.. 『당진시대』 2000. 11. 27.
문화유적
슬항리 인근에는 사암사지를 비롯해 치더리 칡다리 전설, 오성, 해창나루, 성당사, 영랑사, 당진포성, 성산리 산성, 항곡리 산성, 대촌리 고분, 고산 봉수대와 같은 문화유산이 많이 있다. 당진에 당진(당나루), 한진(한나루)과 같은 지명이 있듯이 통일신라 시대에 당진은 중국 한나라와의 주요한 교역항이었다. 이 지역을 고고학적으로 발굴할 가치가 있다.. 김봉호 교수(숙명여대의 사학과)의 증언, 1990.
사음사지
김종인의 집이 있는 절골은 원래 절이 있던 곳이다. 큰 절은 종인의 집 남서 쪽 기슭에 있었고 서쪽의 쇠골로 넘어가는 등성이에 암자가 있었고, 작은 절은 현재 조광식이 살고 있는 집터에 있었다. 절터에서는 기와조각, 백자 조각이 발굴되었다. 기와조각은 회흑색의 경질로 두꺼우며, 무문 내지는 파도문의 문양이 대부분이지만 간혹 적갈색의 기와조각도 보였다. 백자 조각은 모래 번조燔造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퇴락된 형식의 말기 백자인데 굽도 형식화되어 매주 낮은 편이다. 이상의 내용들로 미루어 보건대, 이곳에 세워진 사찰은 계곡의 안쪽에 동향으로 소규모의 법당을 운영했던 것으로 짐작되며, 시기는 조선조 말기에 세워져 얼마 안되어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덕사지,보덕포
삼화리 선창가에 있는 보덕사는 수덕사의 말사이며 현재의 위치보다 약간 북쪽에 있던 것을 1676년 현재의 위치로 옮겨 중수되었다. 절 앞에 중수를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연호가 건륭(1736~1795)인 것을 보면 18세기 중엽의 일이다. 만조 때는 바닷물이 보덕사의 아랫마당을 적셨고, 지금은 콘크리트로 덕지덕지 되어버렸지만 경치가 절경이었다. 보덕사에서 삼화리로 가는 찬동 고개에 있는 열녀문은 나주 임씨의 여각으로 가문과 남편의 출세(효릉참봉-한참봉)를 위해 헌신한 나주 임씨의 공을 기리기 위해 1933년 동네사람들이 세운 것이다.
오섬
오섬은 인천을 가는 배가 있는 항구였다. 지금은 석문호에 갇혀 있지만, 60, 70년대만 하더라도 이곳을 떠난 연락선 ‘한성화’와 ‘조운호’가 보덕포, 장고항을 거쳐 인천으로 왕래하였다. 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목선을 짓는 재래식 조선소가 있었고 새로 지은배를 진수할 때와 정월보름 때에는 안전과 풍어를 비는 굿이 보름동안 밤낮없이 진행되었으며 여기서 오는 풍악소리가 슬항리 동네까지 울려퍼져 왔다. 향토지에 나오는 오성鰲城이 오섬에 있는 토성을 말하는 듯한데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오鰲자는 섬이 자라같이 생겼다는 뜻일 터인데. 1999년 말, 오섬과 슬항리는 다리가 놓여지면서 이어 졌다.
영랑사
영랑사 건설에 관해서는 신라 진흥왕 25년에 아도호상이 창건했다는 설, 통일신라 시대에 불심이 깊은 당나라 공주 영랑影浪이 절터를 물색하다가 채운교 위에 절을 지었다는 설 등이 있다. 영랑사 대웅전의 기둥은 (중간이 배가 부른) 배흘림 기둥인데 이것은 그리스의 도리아식 건축양식이 인도의 불교 문화를 타고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동서문화 교류의 중요한 자료의 하나이다. 아울러 한진(漢나루), 당진(唐나루-어디?)이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삼국시대 이전부터 중국 산동과 한반도를 잇는 거점임을 의미한다. 그 말사인 성당사는 영랑사 서산 넘어, 천의 못 미친 곳에 있는 고두절로 현존하고 있다.
영랑사른 비구니의 절로, 점심 때는 방문객에게도 식사를 내주는 인심 좋은 곳이다. 영랑사는 이곳 초등학교학생들이 즐겨 소풍을 가는 곳으로, 이곳 출신들에게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대촌리 고분
대촌리 고분은 배다리 윗쪽 선동에 위치했고, 왜군 수천명이 죽어 묻힌 곳으로 원슬항 김장식의 집 너머 선구리로 가는 중간에 위치, 중조 때까지 뱃조각이 출토되었다. 태종 8년(1408년) 왜구는 홍성군 결성에 상륙하여 홍주(홍성)를 약탈하는 한편 당진포를 거쳐 주원포(지금의 당진읍 우두리-북창과 오섬 사이의 포구로 어리라고 부른다)에 상륙하여 살인과 방화를 자행했으나 이 왜구들은 당시 당진 현감이었던 김흥석金興奭이 이끄는 군사와 주민에 의해 전멸되었다. 용덕의 말에 따르면 주민들은 이 일본군의 시체 수백 구를 한꺼번에 매장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펄에서 이 일본군이 타고 왔던 배의 파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수년 전에 이들의 ‘원혼을 달랜다’며 일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찾아 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민중에게 가장 큰 피해를 준 임진왜란 때에는 당진과 면천은 이렇다 할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유물로 통일신라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무문의 경질 토기편이 발견되고 있다.
고산 봉수대
고산 봉수대는 대산․풍도 → 고산 → 아미산 → 온양 뒷산을 거쳐 한성 남산으로 이어지는 봉수대의 하나이었으며 70년대 미군 미사일기지의 공사 때 흔적마저 완전히 뭉개졌다.
성산리 산성
성산리城山里 산성은 성산리 방앗간의 동남쪽에 위치한 산성이다. 김유신의 아들로 추정되는 장군이 삼? 들판에서 중국 산동에서 출발하여 당진포리에 상륙하여 이곳으로 이동한 당나라 군사를 맞아 싸웠다. 산성은 산의 정상부를 둘러 싼 산정식의 토축산성으로 둘레는 약 210m, 외벽의 높이는 5m이다. 성벽은 정상부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구축하였는데 경사면을 깎아 조성하였다. 성은 비교적 규모가 작으며 1.5km 동으로로 해안에 인접해 있어 해안의 제방을 쌓기 전에는 해안성으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용덕의 말에 따르면 김유신은 아들들에게 “남자는 싸우되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도망을 가서는 안된다”고 가르쳤다. 이 아들 장군은 패전한 뒤 고향에 돌아가 모친을 통해 귀가를 허락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김유신의 거부로 집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멀리 인천 제물포로 가 인천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김해김씨와 인천이씨가 결혼하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장고항성
이 성은 장고항 영 방죽 남쪽에 있는 낮은 야산에 있었다. 높이 2m, 폭 3m, 길이 270m 이었으나 삼봉리에 있는 태창염전을 만들 때 일부가 파손되고 다시 1988년 석문 방조제 공사 때 나머지가 없어졌다고 한다.
해창나루
해창 나루는 세미-구실세를 보관, 운송하던 항구이다. 지금은 대호간척지에 갇혀 있다.
전설
백제부흥운동의 현장 백촌강변이 당진인가
덕산 출신의 박성흥(84)은 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망한 뒤 백제가 패망한 뒤 백제를 되찾으려는 항전이 지금의 당진군과 홍성군을 중심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당진시대』 2000, 9. 25.
이 때 왕으로 추대된 의자왕의 아들 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풍왕을 중심으로 663년까지 재건을 꾀하였다.
662년 풍왕은 ‘주유성’(홍성군 장곡면)이 적을 막기에 적합하나 전답에서 멀고 토지가 척박하여 오래 머물련 백성이 굶주리게 된다“며 피성을 왕도를 옮긴다. 그러나 신라군의 공격을 사평성을 비롯한 4개 성이 함락되자 풍왕은 663년 2월 다시 주유성으로 왕도를 옮겼다.
한편 일본서기에 따르면 같은 해 8월 신라군은 주유군을 함락시키기 위해 당나라에 중위군 파병을 요청, 그 병력 중 군선 170척이 백촌강에 전열을 구축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 백제를 지원하기 위해 보낸 일본군선이 여기에 이르러 회전, 일본군이 참패하였다.(백촌강 전투) 결국 주유성이 함락되자 백제의 지도층은 그해 9월 일본군선을 타고 일본에 망명하게 된다.
백제재건 운동의 중심지 주유성으로 거론된 지역은 홍성, 서천, 부안, 연기 등 네 곳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백제가 멸망한(660) 뒤 백제 장군 福信 등은 임존성(지금의 대흥부근)에서 부흥운동을 일으키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일본에 체류하던 왕자 余豊璋을 귀국시켜 왕으로 세웠다. 663년 福信과 豊璋의 관계가 악화되어, 복신이 풍장을 살해하고 백제부흥운동을 대표하였다. 한편 신라의 김유신의 군대와 당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이 백촌강에서 회전하여, 일본군이 패배하고, 풍장은 고구려로 도피하였다. 여기에서 백강 또는 백촌강은 금강 또는 동진강 입구로 보고 있다.
그 가운데 정설로 받아들여져온 서천의 성은 최근 고려시대의 성으로 판명되었다. 박성홍의 홍성-당진설은 19세기 『대동여지도』에서 “홍주목이 본래 백제의 주유성인 바”에 근거한 것이다.
박성홍은 주유성에서 도읍을 옮겼던 피성이 바로 면천의 몽산산성이라고 한다. 그 근거로 피성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가졌다는 ‘고련단경수’가 현재 ‘승전목’과 일치하는 등 주변환경이 동일한 점, 홍성 주유성과 걸어 하루 거리인 점 등을 든다.
1916년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는 고대면 대촌리에 당나라군대에 패망한 일본군 1만명이 시신을 묻은 ‘막무덤’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이곳 대촌리 사람들은 이 근처를 ‘맹무덤밭’ ‘맹무덤배미’ 등으로 불러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곳은 매립되기 이전에 해안가였던 곳이기도 하다.
박성홍은 기록에 남은 백촌강전투의 주요 정박지 지명인 손량(장항교밑 실제지명), 백사(장고항리 용무치-삼봉리 곰개), 장암(삼봉리 차돌배기마을 황새바위까지의 긴 암맥) 등이 당진의 지명이나 실제지형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백촌강은 흔히 알려진 대로 백마강 일대가 아니라 고대, 석문, 송산 사이의 해안(지금 매립된 석문호) 일대임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또 백제의 지도층이 일본으로 망명하기 위해 일본군선을 기다렸던 곳이나 그들을 실어나르기 위해 일본군선이 입항한 곳, 일본을 향해 떠난 곳이 송악면 정곡리의 배울마을과 돌무지항이라고 주장한다.. 백제사에 관심이 많은 일본인 600여명이 2000년 홍성 장곡면과 면천면의 몽산성과 주변의 승전목, 일본군 지원군 1만명이 묻혔다는 고대면 대촌리의 막무덤, 마지막 해전이 벌어졌던 백촌강전투의 현장이라는 석문명 장고항리와 삼봉리 차돌배기와 용무치, 그리고 항전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떠난 자리라는 송악면 정곡리 배울마을을 돌아보았다.(『당진시대』 2000. 9. 25)
‘빈대가 무서와 절을 태워’
사암사에 관해서는 “절에 빈대가 많아 빈대를 태우기 위해 절을 태워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잘못해서 절이 타 버린 것을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 전설 속의 사건은 근세의 일로, 수십년 전 만해도 절터를 파면 빈대와 깨어진 기와장이 나왔다고 한다.
종살이를 벗어나고 싶었던 처녀
“치더리(칡다리?)의 어느 지주 집에 노비 처녀가 있었는데 일이 아주 고되었다. 어느 날 이 처녀가 물을 길러 우물에 가 잠시 숨을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가던 중이 목마르다고 하며 물을 달라고 해서 바가지에 물을 담고 버들잎을 띄워 주었다. 물을 맛있게 마시고 난 스님은 고맙다며 처녀에게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처녀는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살아 보았으면 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노비로 일년 열두달 하루도 쉴 날이 없어 부엌일을 하니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들은 중은 처녀에게 오섬과 치더리에 사이에 놓인 (칡으로 만든) 칡다리 밑을 호미로 긁어 흙을 파내라고 했다. 처녀는 이 말에 따라 매일 다리 밑을 조금씩 팠고 그랬더니 어느 날 바닷물이 범람하면서 다리는 떠내려가고 치더리 일대의 농토가 바닷물에 잠기면서 손에 물을 묻히는 처녀의 신세도 바뀌었다. 송산 당산리와 오섬 사이에 바닷길이 있었는데(1999년말 다리 개통) 범람 후에 물길이 터져 현재의 지형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당시 인구의 50% 이상을 차지하던 노비의 신세를 벗어나고 싶은(免賤) 당시 노비들의 원망과 지각 변동․지반 침하 또는 큰 물의 범람에 의해 바닷물이 범람한 사실이 전설로 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같은 시기에 신평․한진과 평택 포승이 이어지던 넓은 뜰도 바다로 변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 신평이씨의 족보까지 유실되었다고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난 시기는 이토정李土丁(토정비결을 정리한 이)과 김복선金福善(실학자, 기호학파)이라는 인물이 살았던 임진왜란 직전인 1560, 70년대로 추정된다.
당진 바다쑥 이야기
조선 시대에 당진~대산~서산 해안에 나는 바다 쑥이 유명하였다. 가을이 되기 전에 쑥은 이미 색깔이 노랗게 된다. 약효가 좋아 상인들이 여름 내내 쑥을 말린 쑥을 한양에 갖다 팔았다.
그런데 어느 해엔가 배가 바다 쑥을 가득 싣고 한양을 향해 떠나려고 하는데 한 앉은뱅이 청년이 다짜고짜 배에 올라 한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하였다. 뱃사람들은 안된다고 하며 뭍으로 청년을 내려 놓았다. 그런데 이 청년은 어느 새인가 배에 올라오고 뱃사람들은 이 청년을 다시 내려놓고 하는 실갱이를 여러 차례 거듭하였다. 청년을 떼어놓은 뱃사람들은 청년이 이제 타지 않았겠지 하고 서울을 향해 떠났다. 열흘쯤 걸려 한강을 거슬러 마침내 한양 마포 선창에 닿았다.
쑥 상인이 쑥을 보려고 배위에 올라왔다. 그런데 이 상인이 쑥을 둘러보고는 쑥의 약효가 떨어져서 안되겠다고 하면서 혹시 쑥더미에 사람이 있었지 않았느냐고 말하였다. 뱃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하며 쑥을 뒤지는데 앞서 배를 태워 달라고 성가시게 굴던 청년이 쑥더미에서 나와 선창가로 내빼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청년은 성하게 된 다리로 달아나지 않지 않는가? 결국 쑥의 효험이 그 청년에게 가버리고 쑥은 아무짝에도 소용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쑥 상인은 한해 장사를 망쳐버렸지만 앉은뱅이 청년은 다리를 펴게 되어 신세를 고쳤다고 한다. 이렇게 당진의 바다 쑥은 약효가 뛰어나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첫댓글 잘 읽고 가네. 좋네
귀중한 자료.. 아하 그러했구나...모르고 있던 소상한내용 가끔 되새겨 읽어보리다...
야! 이렇게 자세한 고대의 내력을 어디서 가져온 것인고? 나도 이런 지역의 유래에 대하여 궁금했었는데, 잘 읽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