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7-그들은 또다시 예루살렘으로 들어갔다. 예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에 대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11:28-"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합니까? 누가 권한을 주어서 이런 일들을 합니까?" 하고 물었다.
11:29-예수께서 "나도 한 가지 물어 보겠다. 너희가 대답하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말하겠다.
11:30-요한이 세례를 베푼 것은 하늘에서 권한을 받아 한 것이냐? 사람에게서 받아 한 것이냐 ? 어디 대답해 보아라." 하고 반문하시자
11:31-그들은 자기들끼리 "하늘에서 받았다고 하면 어째서 요한을 믿지 않았느냐고 할 터이니
11:32-사람에게서 받았다고 할까? 하고 의논했으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 예언자로 알고있었기 때문에 군중이 무서워서
11:33-"모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는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들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지난 70강에서 다 말씀드리지 못한 것을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11:25절에 보면 죄의 용서에 대하여 나와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도 할 때에 어떤 사람과 등진 일이 생각나거든 그를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제가 처음으로 주님으로부터 멍청한 놈이라는 말씀을 듣고 화가 나서 주님께 따지니까 주신 성경 말씀이 마태복음18장 35절 네 형제를 용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결국 제게 주신 성경은 저의 회개를 주님이 이끌어 주시어 죄사함을 받게 하시려는 의도였습니다. 제 형제들이 나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슨 용서를 할 것이 있나 또 넓은 의미의 형제라 해도 제 성격상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있을 수도 없었고 또 저의 인생관이 “가해자의 입장에서 살자" 라는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피해의식을 갖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주님은 저하고는 전혀 관계없는 성경말씀을 주셨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참 후에야 주님께서 저에게 처음으로 주신 성경 말씀의 뜻을 알게 되었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70강의 성경 말씀도 11:25) 하느님에게 죄사함을 받으려면 나와 등진 일이 있는 자들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죄사함의 조건은 바로 내가 나와 등진 일이 있는 자들을 용서해야 나의 죄를 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입문의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몇 번에 걸쳐서 말씀드려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회개는 마음을 세상에서 주님 앞으로 돌리는 것이 회개라고 했습니다. 결국 회개가 온전히 되기 위해서는 죄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저도 가끔 잘못한 것이 있어 기도를 하는 중에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느냐는 변명을 자꾸 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됩니다. 이런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쌍할 수밖에 없고 주님께 죄인입니다. 인간에게 죄인이 아니라 주님께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어야 하는데 가만히 따지고 보면 내가 용서해 주어야 할 정도로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습니까? 혹시 은원 관계가 많아 용서해줄 사람이 많은 분도 있겠지만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용서해야할 정도로 자신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형편으로 보면 서로 용서를 해야 하는 경우가 가족관계에서 더 많을 것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끼리 자식과의 관계, 친형제들과의 소원함 특히 고부(시어머니와 며느리)관계, 부모와의 충돌 등의 가족끼리 용서해야할 것이 타인들을 용서할 것 보다 더 많을 수 있습니다. 남들이 나에게 잘못한 것은 쉽게 잊을 수도 있고 용서할 수도 있지만 가족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용서는 매우 어렵습니다. 어째든 내가 용서하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용서가 되면 참으로 좋지만 그렇지가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아마 내가 무엇이든지 용서할 수 있다면 그 분은 이미 주님과 같이 살고 계신 분이고 천국의 삶을 살아가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용서하기 힘든 것일까요? 또 내가 용서해야 하는 대상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처음으로 주신 말씀 "나는 누구에요?" 하고 물었을 때 "너는 멍청한 놈이야." 하시고 그 해답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할 자격이 있습니까. 실수투성이고 욕심 많고 시기하고 경쟁하고 남잘 되면 배도 조금은 아프고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또 재미도 있고 인간미도 있습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면 참 재미없지 않겠습니까.
이래서 우리는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 갈등을 하게 됩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데 이러면 안 되지 누구를 미워하면 벌 받지 또 시기하면 안 되지, 친구 아들이 좋은 대학 갔다는데 왜 기분이 이래. 화는 왜 나지. 예수 믿는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 이런 것이 우리의 마음 아닙니까. 우리가 이런 마음을 갖는다고 예수께서 우리를 혼내시고 벌주시겠습니까? 오히려 이런 감정이 생기면 주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을 더 좋아하실 것 같지 않습니까? "주님 난 심통 나서 죽겠습니다. 누구누구 아들은 이렇다는데 내 아들은 어찌 이 모양입니까." 라고 기도하세요. 이렇게 솔직한 것을 주님은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 자신을 내가 용서해야 합니다. 내 감정의 흐름을 잘 못된 믿음으로 막고 있습니다. 예수가 우리의 죄를 심판하시는 심판관이라고 모두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간이 생각하는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합니다. 그 것이 노력으로 됩니까? 내가 나를 용서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다른 이들을 용서합니까. 어떤 자매님은 공부 못하는 아들 난 것까지도 자신의 죄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내가 나를 용서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예뻐하십니다. 이것이 죄사함의 비밀입니다. 나를 내가 용서하는 것은 내 생각 내 감정에 솔직해 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에 대해 다 알고 계시는데 나는 계속해서 나를 속이고 주님을 속이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옷을 벗고 산다면 남자들이 여자를 본다고 해서 이상한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처럼 우리가 우리의 위선을 벗어버리는 것 이 중요합니다. 내 감정에 내가 솔직할 때 주님께서 더욱 사랑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죄사함을 받기 위해 주님 앞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위선을 하면서 믿는 믿음 이 아니라 내 감정이 아프면 아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간구함도 이성에 의지해서 기도하지 말고 내 안에 있는 그대로 간구해야 합니다. 주님을 직접 만나야 나의 속사정을 확실히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을 직접 만났는데 이성적으로 주님과 대화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이성은 사라지고 우리의 마음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죽을죄를 지어도 주님은 그 것을 책망하시거나 탓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이성적으로 많이 하게 됩니다. 내 기도를 하지 말고 남의 기도를 많이 해주면 내 문제는 스스로 해결된다니까 중보기도를 많이들 하십니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정말 내 마음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중보기도를 하라고 했으니까 하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이 간절하지 않으면 해서는 안 됩니다. 형식으로 하는 기도는 주님께서 들어주실 수 없습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잊어버리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주님이 계신대 내가 폼 잡고 기도해 보아야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한다고 해서 통하겠습니까. 오히려 주님 희롱 죄에 해당하지 않습니까. 전에는 저도 의무적으로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또 세계를 위해 많은 이들의 건강과 안위함을 위해서 몇 시간씩 기도를 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기도를 안 합니다. 주님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는 할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을 다 아시는데 입으로 만의 기도를 한다는 것이 주님께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정말 내가 걱정이 되고 내 마음속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를 합니다. 마음에 없는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잘하고 못하고는 입술의 말에 있지 아니 합니다. 또 시간의 길고 짧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것을 구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렇게 정직하게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는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또 죄사함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입술로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예수를 진짜로 만난 사람 앞에서는 말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만나 직접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이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유명한 부흥사의 말씀을 아무리 많이 듣는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죄를 용서받았다 해도 그 잘못에 대한 감정은 남아 있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 이야기하게 되면 자신 속에 있던 죄의 뿌리는 사라지게 됩니다. 나쁜 기억이 없어지는 것도 커다란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서할 수 있기 위해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러면 용서도 받고 또 내가 다른 이를 용서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어서 주님을 직접 만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오신지 3일째 되는 날에 성전에서 예루살렘 지도자들과 논쟁을 하는 복음입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아(표면적으로는 성전을 정화하신 것)라고 하는데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를 대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는 그들의 속을 아시고 세례요한은 무슨 권한으로 그러한 일을(세례를 준 것) 했는지 답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도 대답을 하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예수를 누구라고 믿고 있습니까? 분명히 우리는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시며 메시아라고 믿습니다. 조금 더 나가서 2003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신 분이고 부활하여 승천하심으로 우리의 소망이 되신 분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종말에(새로운 창세) 심판하러 오실 분(재림)이라고 믿는다고 정의를 하면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처럼 예수께 증거를 대라고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매일매일 기도도 열심히 하고 교회에서 하라는 일도 빠짐없이 잘하고 있는데 어째서 매일 요 모양 요 꼴인가 하고 한탄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또 주님을 직접 만나야 한다고 하니까 지금까지 알고 있던 지식과 습관적인 믿음 때문에 대답치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들이 주님께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왜 믿습니까? 하고 다른 이들이 물을 때 무엇이라 대답하시겠습니까? 예수를 믿으면 천당 가니까 믿으라고 한다고 지금 사람들이 믿을 리가 없습니다. 주님 살아생전에도 그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주님의 복음을 믿은 사람들은 극소수였습니다. 현대에서도 우리나라만 해도 기독교인이 인구 비례로 4분의1가량 밖에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진실로 주님을 직접 만나고 죄사함의 확신을 가지고 믿는 분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받아드리고 믿는다는 것이 쉬운 것 같지만 진실한 믿음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노력은 기도입니다. 주님을 직접 만나려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님을 직접 만나야 한다는 의지가 없다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시다고 하면서도 만날 수 없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는데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기가 왜 이다지도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내 삶 속으로 주님을 초청해 주님으로 하여금 참여케 하는 것입니다. 사소한 일부터 큰일까지 짐을 나를 때도 주님과 함께 나르는 것입니다. “주님 이 물건이 무거우니까 함께 들어주세요." 하고 말을 겁니다. 이와 같이 주님을 자꾸만 불러내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서 나를 도와주려고 대기하고 계신 주님을 일(?) 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마태복음20:26-28)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예수가 진정 나에게 어떠한 존재이며 내 삶 속에서 몇%를 차지하고 있는지 알아야합니다. 그래야 주님께 증거를 보여 달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현실적으로 주님을 받아드려야 합니다. 지금 당장 나를 도와줄 수 있고 내 인생을 바꾸어 주시고 눈을 뜨게 하고 팔을 고쳐주고 걷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을 직접 만나야합니다. 또 내 눈으로 직접 확인 할 수 있는데 왜 못 만나고 남의 이야기만 듣고 있습니까. 이것이 어리석은 믿음이 아닙니까. 그러니 주님을 만나기 위해 주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다른 곳에 계시면 주님을 잘 아는 이의 소개장을 하나 받아가지고 수박이라도 한통 사서 가서 만나지만 내 안에 계시니 내 삶 속으로 주님을 불러서 만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자 다시 그들에게 질문합니다. 세례요한은 무슨 권한으로 세례를 주었는지 답변을 하라고 그러면 대답하겠다고 그러니까 그들은 이렇게 저렇게 궁리하다가 모르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도 답변을 하지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주님이 자신의 의견이 없는 것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분명한 자신의 의사가 있어야 합니다. 시류에 따라서 휩쓸려 다니는 믿음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유명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적으로 볼 때는 은혜가 많다는 것입니다. 어느 유명한 강사님의 설교를 듣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면 은혜를 크게 받았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울어야 은혜가 크게 있다고 느낍니다. 또 그것이 사실입니다. 감동이 없으면 울음이 나오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무엇으로 감동했습니까.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감동을 한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 역사 했습니까? 그 강사님을 통해 역사하시어 우리에게 감동의 눈물을 쏟게 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눈물을 흘렸는가를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감사해서 흘린 눈물입니다. 무슨 은혜였습니까? 비가 많이 오게 해서, 꽃이 피게 해서, 이런 것이 아니고 대부분이 어떤 인간의 삶을 변화시켜 주었기 때문에 감동한 것입니다. 어떻게 변화시켜 주시었습니까? 주님을 영접하고 만나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처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분들은 대부분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슬퍼서 야단맞아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감동의 눈물입니다, 그냥 눈물이 흐른다고 합니다. 이처럼 다른 이들이 주님을 만나서 은혜를 받았다는 소리를 듣고서도 눈물을 흘리면서 왜 자신은 만나려고 노력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의사가 분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대답을 해주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한 의사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피상적이고 환상적인 주님으로 생각할 때 두렵고 무서운 주님이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려 노력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당당히 주님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거짓 맹세를 하지도 말고 너희는 그저 "예" 아니면 "아니오"의 둘 중의 한 가지 대답만을(마태복음5:37)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려울 때 우리는 주님을 찾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잘 살고 있을 때는 주님이 그다지 필요치 않은 것 같아 그럭저럭 믿다가 어려운 일이 닫치면 새벽기도니 뭐니 해서 무당 믿듯 믿게 됩니다. 이래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주님께 돌아 온 것만 보시고도 반가워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되면 그 믿음은 온전할 수 없습니다. 갈대와 같은 믿음이 됩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주님을 직접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이 누구이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러한 짓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만나면 이러한 믿음을 갖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고 아주 친한 동무처럼 아버지처럼 느끼게 됩니다. 주님을 직접 만나 그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이 바로 죄사함을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나 죄사함의 확신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처럼 주님을 시험하지 않게 되고 주님을 향해 올바른 믿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삶이 모두 주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주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것은 모두 허상이고 주님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내가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진정한 믿음이 생겨 주님을 믿게 됩니다. 주님 따로 나 따로 의 믿음은 없습니다. 주님과 나는 하나 일 수밖에 없는 것은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고 믿을 수 있기 위해서는 주님을 직접 만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 감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감정은 정직하고 단순합니다. 이성은 복잡하고 생각하게 하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으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기도도 이성적인 기도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이성을 이용하시지 않습니다.
부흥회에 가서 다른 성도의 믿음 간증을 듣고 우는 것은 감정이 우는 것입니다. 바로 본래의 나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우시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주님은 무엇인가를 이루려하십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또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것도 우리를 통해 사랑을 이루기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태하게 살아서는 안 되며 되는 대로 남들처럼 그렇게 살다가 죽으면 안 됩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는 주님께 각자가 물어야합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어서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일을 하며 이 지상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정체성의 확인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는데 힘들고 인생무상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들은 인생무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섭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주님이 운행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그 믿음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는 모두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됩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창조주 앞에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주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하시어 주님의 사랑으로 이 지구에서의 삶이 기쁨의 시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마가(마르코)복음72강
12:1-예수께서 비유를 들어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하나 만들어 울타리를 둘러치고는 포도즙을 짜는 확을 파고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그것을 도지로 주고 멀리 떠나갔다.
12:2-포도철이 되자 그는 포도원의 도조를 받아오라고 종 하나를 소작인들에게 보냈다.
12:3-그런데 소작인들은 그 종을 붙잡아 때리고는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12:4-주인이 다른 종을 또 보냈더니 그들은 그 종도 머리를 쳐서 상처를 입히며 모욕을 주었다.
12:5-주인이 또 다른 종을 보냈더니 이번에는 그 종을 죽여버렸다. 그래서 더 많은 종을 보냈으나 그들은 이번에도 종들을 때리고 더러는 죽였다.
12:6-주인이 보낼 사람이 아직 하나 더 있었는데 그 것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주인은 “내 아들이야 알아주겠지.” 하며 아들을 보내 보냈다.
12:7-그러자 소작인들은 “저게 상속자다. 자,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포도원은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며 서로 짜고는
12:8-그를 잡아죽이고 포도원 밖으로 내어 던졌다.
12:9-이렇게 되면 포도원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 와서 그 소작인들을 죽여 버리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것이다.
12:10-너희는 성서에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12:11-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고 한 말을 읽어 본적이 없 느냐?”
12:12- 이 비유를 들은 사람들은 그것이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 예수를 잡으려 하였으나 군중이 무서워서 예수를 그대로 두고 떠나갔다.
예수께서 지금까지는 유대인 지도자들로부터 공격만을 받으시다가 오늘은 그들에게 공격을 펼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도 성전이 강도들의 소굴이 된 것도 또 하느님에 속한 백성들을 억누르고 착취한 것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임을 밝히십니다. 포도원은 주님에 속한 백성들을 나타내고 농부들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을, 소작을 받으러 온 종들은 구약의 선지자들 예언자들을 포도원 주인은 하느님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도조를 받으려고 온 주인의 아들은 예수를 나타내며 결국 그 포도원 주인의 아들(예수)까지도 농부(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죽인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포도원 주인이 아들(예수)까지 죽이자. 주님은 그 농부들을 다 죽이고 포도원을 새로운 사람들에게 맡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또 시편 118:22-23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주님 자신에 대한 예언을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아니하고 죽였지만 예수께서는 부활하시어 메시아임을 나타내시고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분이 되시어 건물의 머릿돌 모양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셨습니다. 건축물의 머릿돌이란 대부분이 건물의 정면 밑 부분에 붙여져 있어서 그 건물이 준공된 날짜를 새기어 넣은 돌을 말합니다. 건축을 하면서 머릿돌은 건물의 시작이며 밑바닥에 깔려 있지만 마지막에는 그곳에 건물의 준공 날짜를 적어 넣음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돌이 됩니다. 대부분의 큰 건물에는 머릿돌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승천은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고 있었기에 구약성서 어딘가에 이 사건들이 예언되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찾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서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의 많은 말씀이 구약성서를 인용해서 예수는 메시아이며 구원자요, 십자가 사건과 부활의 영광은 구약의 예언을 이룬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우리도 구약성경을 볼 때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보고 또 내 안에서 성경을 보아야합니다.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성경이 아니라 내 안에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이럴 때 성경은 우리 안에서 살아 숨 쉬는 말씀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과의 대화를 요청하면서 대화가 잘 되지 않는 문제점 중의 하나가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배움에서는 이해를 잘해야 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 관해서도 이해하며 잘못이 있으면 용서하려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엇이든지 먼저 이해를 하려는 습관이 배어 있습니다. 이해한다는 것이 큰 미덕처럼 생각도 되고 겸손의 의미로도 받아 드리지만. 실질적으로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서 모든 문제점이 발생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 몸이 말을 안 들을 수 있고 또 도저히 이해를 못하는 부분이 생기어 그 것이 스트레스가 되고 병이 됩니다.
현대인은 이 이해라는 관점 때문에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게 됩니다. 관상기도를 통해 주님을 만나라고 하니까. 이것도 이해를 먼저 하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해는 이성의 작용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고 믿는 것은 이성의 작용입니다. 일단 이성적으로 확신이 되어야 하니까 이성적으로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이상 주님과의 대화와 믿음은 감성을 가지고 접근해야 합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이해를 해도 내 감정이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특히 남녀 문제(주님과 나와의 문제도)에서 그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성적으로 보면 아주 좋은 조건이고 행복이 보장된 사람인데도 감정의 흐름을 느끼지 못해 결혼을 안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이처럼 감정은 우리의 삶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면 스트레스라고 말하는 현대병도 전부 이성 때문에 생기어 난 것입니다. 우리의 감정이 우리 자신을 다스리고 있는데도 우리는 자꾸 이성에만 의존하려고 하니까 영혼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제가 정직해야 한다고 수차 말씀드리는 것은 인간과 인간사이의 정직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은 나를 감싸기 때문에 정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의 감정은 언제나 나에게 정직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감정을 가지고 주님 앞에서 대화를 청할 때 벌거벗은 모습이 되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의심이 나면 의심이 나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잘못 알고 있으면 잘못 알고 있는 대로 주님께 대화를 청해야 합니다. 이성적으로 주님을 볼 때는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분이지만 내 안에서 나를 도와주시려고 하는 분은 절대로 무섭고 두려운 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습관적 이성적인 분별을 버리고 감정적으로 주님을 바라다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주님과의 대화는 풀려가고 우리가 갈망하는 주님의 실체를 볼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도 이성적으로 보면 글 모두에서 말씀드리었던 강해로 충분히 설명이 됩니다. 그런데 위의 강해를 가지고 몇 번을 읽어보아도 나하고는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다만 주님은 진짜 메시아이구나 하는 정도 또 목회자들은 잘해야 한다. 포도원의 본문 말씀과 같은 농부가 되어서는 안 되지. 주님을 영접하고 포도원(성도들)을 잘 돌보아서 주님께 도지(열매)를 드리는 자들이 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종말에는 큰 벌을 받게 되겠구나. 이렇게 해석을 하고 믿게 됩니다. 이것이 이성적인 말씀의 접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설명이 틀린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했고 또 들어 왔습니다.
지난 2000여년 동안 많은 성도들이 성경에 쓰여 있는 대로 살아가며 율법을 잘 지키려고 노력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왜 지금 이 모양인지 알 수 없습니다. 믿는 자든 안 믿는 자든 구별도 할 수도 없고 범죄율과 스트레스는 점점 더 많아집니다. 그러면 성서는 우리에게 실천할 수 없는 또 효과도 없는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혹자는 세계인구의 모든 사람이 주님을 믿지 않아서 그렇다 또 공중 권세를 사탄이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죄가 없게 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해결 할 수 없는 섭리에 붙잡혀 있는데 유한한 우리를 탓하면 분명히 이것은 주님의 잘못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판단하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우리의 이성이 동원된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담대 하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많이 해 주십니다. 두려워하고 담대해지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무서운 것을 보며 두렵다든가 무섭다는 것은 감정에서 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의 소리인 감정이 두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에서 정직하려면 감정을 사용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도 감정을 가지고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면 그 도지(땅 사용료)를 내지 않은 농부들은 참으로 나쁜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도지를 받으러온 종들을 때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서는 주인의 아들까지도 죽여 버립니다. 이런 꼴을 우리가 당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포도원 주인이기도 합니다. 종들을 때리고 죽이는데 왜 금방 가서 요절을 내지 미련하게 아들을 또 보내서 죽게 합니까. 그리고 그 농부들도 상식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합니다. 어떻게 땅 주인이 있는데 도지를 내지 않고 버티고 도지를 받으러 온 사람들을 때리고 죽이고 또 그 아들까지 죽여서 내 버리면서 그 상속자가 죽었으니 이 땅이 우리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됩니까. 주님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금 하고 계시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스트레스가 생기지 않습니까? 답답하기도 하고 여지 것 전지전능하다고 믿기만 했던 주님의 말씀이 엉터리없는 비상식적인 이야기를 하시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 속에는 이처럼 우리의 상식과는 동떨어진 말씀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복음을 지금까지 이성을 가지고 접근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는 듯 하지만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복음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나에게 이야기를 했느냐에 따라서 그 영향력은 크게 차이가 납니다. 같은 말이라도 학생에게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과 부모님이 하시는 말씀의 차이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직접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많이 합니다. 형제 나 친한 사람일수록 돈 거래는 하지 말아야한다. 돈 빌려주고 의리상 하니 금전거래를 하면 안 된다고 말들을 합니다. 이런 논리가 바로 이성적 논리입니다. 그러면 돈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에게 가서 빌립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돈을 빌려주겠습니까.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더라도 돈을 빌려 줄 사람은 아주 가까운 친구나 형제들 아닙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며 많던 적던 돈을 빌려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돈을 빌렸을 때 누구에게 빌렸습니까? 이처럼 주님과의 문제에서도 이런 상식을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가진 자는 이성적이지만 못 가진 자는 감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벌 때는 이성적으로 벌은 것 같아도 감정적으로 결단을 해서 번 경우가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감정은 주님의 몫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포도원을 만든 분은 누구입니까?” 또 “그 포도원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이런 식으로 묻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포도원을 만든 사람은 나다.” 이렇게 대답하시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말씀해주시는 그 대답은 우리 인간에게 듣는 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느낌을 갖게 됩니다. 그 말씀 한마디가 나를 정화시키고 내 안의 모든 것들을 깨끗하게 해 주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단 그 대답을 들을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참을성 있게 물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어디에서 사랑을 찾았습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사랑을 찾지 않았습니까. 사랑은 먼저 각 개인 안에 계신 주님을 찾는 작업입니다. 또 남녀 간의 사랑은 완성을 향해 가는“주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를 듣기 위한 추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도 믿는 자들은 주님 안에서 찾아야 하고 주님을 직접 만났을 때 사랑을 알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치 못하는데 사랑을 한다는 것은 깨지는 사랑을 위함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남녀 간의 합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면 지금까지 남아 있을 부부가 몇 쌍이나 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주님을 만나려는 간구와 기도 즉 주님을 내 삶 안으로 초청해서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사랑을 이루어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 안에 분명히 계심을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어야합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러 떠나야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사랑하는 시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멘
마가(마르코)복음73강
12:13-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트집잡아 올가미를 씌우려고 바리사이파와 헤로데당원 몇 사람을 예수께 보냈다.
12:14-그 사람들은 예수께 와서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진실하시며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아무도 꺼리시지 않고 하느님의 진리를 참되게 가르치시는 줄 압니다. 그런데 카이사르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받치지 말아야 합니까?”
12:15-예수께서 그들의 교활한 속셈을 알아채시고 “왜 나의 속을 떠보는 거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하셨다.
12:16-그들이 돈을 가져오자 “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카이사르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12:17-“그러면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고 경탄해 마지않았다.
72강에서 다 말씀드리지 못한 것을 조금 더 이야기하겠습니다. 이해하려는 것이 우리 믿음에 걸림돌이 된다고 말씀드렸고 감정(감성)을 가지고 주님을 만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직접 만난 분들께 물어 보면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만난 적은 없습니다. 불치의 병을 고치신 분들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의학적으로 진찰하면 절대로 고칠 수 없는 병이 주님을 만나기만 하고서도 고침을 받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도 주님과 대화를 할 때 이성적으로 대할 때는 전혀 없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느낌으로 오시고 제가 초청하고 대화를 청하며 기도할 때 오시곤 하십니다. 강해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주님께서 제게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그 말씀을 저는 받아서 쓰기만 합니다. 제가 스스로 쓴 글은 읽은 때마다 고쳐야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면 몇 번을 읽어도 철자 틀린 것만을 고치게 됩니다. 저도 정말 신비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연애편지를 써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편지를 쓰고 다시 읽어보면 계속해서 고치다가 나중에는 찢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편지는 한번 쓰면 다시 읽지 말고 그대로 보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편지는 대부분 보내지 못하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이 하는 일들은 불완전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느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온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말아야합니다. 이해하려 말고 있는 그대로만 보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특별히 정성을 드리고 신경을 쓰며 일일이 간섭하려 하는 것이 자식들에게 관계되는 일입니다. 자식은 태어나면 부모는 죽을 때까지 애정(?)을 가지고 참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식을 모두가 사랑하는데 왜 자식들은 그 것을 몰라주고 있을까요? 한번쯤은 기도할 제목입니다. 그 이유는 자식들을 이해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이 지상에서 살아가며 자식들에게 하듯 모든 사람들을 대한다면 천국은 금방 올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논리는 자식에 대해 더 넓은 이해를 가지라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자식에 대해 학대를 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지만 대부분 부모님들은 최선을 다해 자식을 이해하며 기르려 노력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아들딸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1:12-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아이들을 볼 때 부모님들은 이해하려 노력하지 말고 관찰만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듯 말입니다. 그리고 잘못될 때 길을 일러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관찰하며 바른 길로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해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는 의미가 이것입니다. 어차피 그 아이는 나의 아들딸입니다. 다른 사람의 아들딸이 아니라 내 아들딸이라는 진리는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살아야 하는 것도 우리가 그분의 아들딸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유심히 관찰할 때가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보다 더 큰사랑을 줄 수 있고 그 아이의 장점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장점을 보시지 단점을 절대로 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대로 살고 있지 주님이 우리의 단점을 보고 계시다면 아마 성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들을 관찰하며 주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내가 관찰한 내 아이에 대하여 자세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자식에 대한 내 소원도 말씀드리고. 이렇게 될 때 주님과 나는 또 나와 내 아이는 한 몸이 되어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관찰하는 습관을 들이시기 바랍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해를 하게 되면 기대를 갖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 기대에 어긋나면 우리는 화가 나고 슬프고 섭섭하고 배신감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찰하는 삶으로 돌아갈 때 우리의 삶은 훨씬 자유스러워지고 상처를 받지 않게 됩니다. 내 자신이 상처가 많을수록 상처를 더 많이 받습니다. 상처는 모두 죄와 연결이 됩니다. 내가 주는 상처도 받는 상처도 모두 죄와 관계성을 갖게 되므로 죄 속에서 사는 듯 착각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믿고 사는 우리는 죄에서 놓여났음(골로사이서1:22-그러나 이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몸을 희생시키어 여러분과 화해하시고 여러분을 거룩하고 흠 없고 탓할 데 없는 사람으로서 당신 앞에 서게 하여 주셨습니다.)을 확고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큰 소리로 외칩니다. “나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
주님은 또 말씀하셨습니다. 시편118편22절의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라는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예언을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그 지도자들은 예수를 쓸모없는 돌같이 여겨서 죽였지만 예수께서는 부활하시어 머릿돌 모양 중요한 존재가 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저들처럼 쓸모없는 돌이라고 예수를 버린 적은 없습니까? 예수를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와 같은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를 쓸모없는 돌이라고 벼렸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일 것 같습니까. 바로 인간적인 논리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다보니 도저히 예수는 메시아 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난 자식이 도저히 저럴 수는 없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섭리는 다릅니다. 우리의 이성과 지식의 결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심을 확고히 느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청원 기도를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오늘도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실정법 위반으로 고소하려고 또 찾아와서 시비를 겁니다. 아주 교묘한 말로 주님을 치켜세우고 나서(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세금을 내는 것이 옳으냐. 안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묻습니다.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는 유대인들로서는 로마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예전에 우리도 일본의 식민지 일 때 여러 가지로 저항을 했듯 유대인들도 일부 층에서는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저항하는 세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면 민족의 반역자요, 내지 말자고 하면 로마의 실정법 위반이므로 잡아 널 수가 있으므로 교묘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간계를 아시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데라니온 한 닢( 장정의 하루치 품삯)을 가져오라고 해서 그 돈의 그림이 누구의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가이사(로마의 황제명칭)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치라고 합니다. 참으로 너무나 지혜로운 답변을 하십니다. 그래서 모함하려든 자들도 경탄을 하고 맙니다. 세상 것은 세상으로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세상 것이 많습니까? 주님 것이 많습니까? 눈으로 보이는 것은 모두 세상 것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느님의 것은 딱 한 가지 내 몸(육체)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육신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합니다. 세상 것은 모두 이 육신을 위해 있습니다. 결국은 세상 것도 하느님의 것이지만 내가 하느님께 돌려 드릴 것은 이 육신 하나뿐입니다. 그러므로 육신 안에 모든 것이 다 현존하고 있습니다. 마음도 생각도 이성도 오욕칠정이 모두 다 육신 안에 있어 이 육신을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도 육체를 통해 나타납니다. 또한 죄의 모습도 육신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주인에게 혼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이 우리 안에 상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너무나 사랑하셔서 우리를 관찰하시며 사랑의 길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이르는 길을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한 번이라도 내 몸이 주님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시었습니까? 그래서 몸을 사용하기 전에 주님께 허락 받고 사용하신 적이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이래서 아주 작은 일에도 주님을 초청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아가며 유대백성들처럼 주님을 무수히 시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도도 형식적인 기도를 많이 합니다. 구하라고 하니까 세상 것만 구하고, 두드리라고 하니까 무엇을 두드립니까? 찾으라고 하니까 어디 가서 무엇을 찾습니까. 무엇을 구해야 하고 무엇을 두드리고 무엇을 찾아야 하는지도 주님께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주님과 함께 할 때 주님을 시험치 않게 되고 주님과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주님과 일치가 이루어지면 사랑이 넘치고 사랑이 넘치면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기쁨이 솟아나면 행복해집니다. 내가 행복하면 주위에 있는 이들도 자연스럽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바로 이런 것이고 또 주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준비하시며 길을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의 삶을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을 하고 계시다가 올바른 길(하느님을 섬기고 믿는 것)로 인도를 해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주님의 인도를 따라가고 안 따라가고는 우리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인도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럴 때 우리의 삶은 온전해 지고 이 지상에서의 삶이 천국을 준비하는 시간이 되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에게 바치는 자들이 됩니다. 가이사르의 것은 가이사르에게 하셨는데 우리가 갖고 있는 세상의 것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의 생각입니다. 이 생각을 세상에 버려야 합니다. 모든 범죄는 이 생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 될 때 또 부족하다고 생각할 때 나를 상처 입히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이사르의 것은 가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받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가지고 하느님께 받치려 한다면 그 것은 카인의(창세기 4:1-16) 제물과 같은 것입니다. 지금도 카인의 제물을 주님께 받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 또 무엇을 우리에게 받기를 원하시는 지를 똑바로 알아야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분명히 죄인들이 이제는 아닌데도 불구하고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의 규정을 누가 합니까? 성경에 나오는 십계명을 가지고 규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십계명을 다 지킬 수가 있습니까? 아마 그 십계명을 인간들이 다 지킬 수 있었다면 예수께서 이 지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이 죄 때문에 여러 가지 제사를 지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신약에서 예수께서 한 번의 산 제물이 되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는데도 아직도 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는 죄사함을 공짜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받았으면 현실감이 있는데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심으로 이루어 놓으신 것을 은총으로 받았기에 실감을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인데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래서 주님을 직접 만날 때만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느끼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삶이 아니라 사랑을 하려는 삶으로 방향전환을 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는 잊어버리고 오로지 사랑과 기쁨을 위해 살아가며 이 지상의 삶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죄를 자꾸만 생각하면 죄의 논리에 빠지고 맙니다.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절대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죄라는 상처에서 벗어나 사랑을 찾고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에서 벗어나고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지게 됩니다. 이런 삶이 바로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받치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의 죽으심을 헛되게 합니까. 자꾸만 죄를 주님께 받칠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는 사랑과 기쁨과 자유함을 주님께 바쳐야합니다. 우리가 사랑만을 찾고 자유함을 만끽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때 내 안에 계신 주님도 행복해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는 죄의식에서 벗어나 사랑만을 기쁨만을 자유함과 행복을 찾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럴 때 주님은 우리를 예뻐하시고 더 많은 은총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아멘
마가(마르코)복음74강
12:18-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12:19-"선생님, 모세가 우리에게 정해 준법에는'형이 자녀가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자기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한다.'고 하였습니다.
12:20-그런데 전에 칠 형제가 있었습니다. 첫째가 아내를 얻었다가 자식이 없이 죽어서
12:21-둘째가 형수를 자기 아내로 맞았지만 그도 또한 자식 없이 죽고 세 째도 그리하였습니다.
12:22-이렇게 하여 그 일곱 형제가 다 자식 없이 죽고 마침내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12:23-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에 그들이 다시 살아나면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12:24-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성서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모르니 그런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12:25-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다음에는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된다.
12:26-너희는 모세의 책에 있는 가시덤불 대목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거기서 하느님께서는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삭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다.' 라고 하셨다.
12:27-이 말씀은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너희의 생각은 아주 잘못 된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은 부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인(천주교 신자들도 포함)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생명이며 또 이 부활이 없다면 예수는 우리의 메시아 일수 없고 기독교 전체가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고린도전서 15:12-14=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우리가 전파하는데 어찌하여 여러분 가운데 더러는 부활이 없다고 말합니까? 죽은 사람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여정은 십자가의 수난을 통해 부활에 이르러 새로운 창세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현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은 너무나도 십자가(수난)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이제는 부활로 나가야 합니다(새로운 삶, 속 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 십자가 수난은 부활을 이루기 위한 과정이며 십자가에 예수께서 매달리심은 우리의 죄사함을 위해 죽으시고 부활에 이르러 영생을 얻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15:17-19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이고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사람들도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표준 새 번역 개정판: 대한성서공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골로사이서 2:12-13절에 "여러분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고, 또한 그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또 여러분은 죄를 지은 것과 육신의 할례를 받지 않은 것 때문에 죽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났습니다." 라는 말씀을 하시며 우리가 죄에서 벗어났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주님께 와서 묻습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기원전 152년경 하스모네 가문의 요나단이 왕권과 대제사장직까지 갖게 되자 경건한 사람들이 반기를 들어 그 가운데 평민들을 주축으로 바리사이당을 만들고 일부 제사장들이 에쎄네당을 만들었으며 그중 예루살렘의 유지들과 대부분의 제사장들은 요나단왕에게 동조하여 사두가이 당을 만들었습니다. 사두가이파들은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만을 성경으로 인정하고 죽은 이들의 부활과 천사의 존재를 인정치 않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지금 주님께 와서 모세가 정해준 율법을 가지고 묻고 있습니다. 물음의 골자는 7형제의 맏이가 결혼을 해서 자식이 없어서 죽어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그 다음 동생들이 형수와 결혼하였고 그들 모두 자식이 없이 죽었는데 부활을 했을 때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서 살아야 하는지 묻고 있습니다.
사실 저도 부활에 대하여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었습니다. 부활하고 난 뒤에 지금의 모든 사람들을 알아 볼 수가 있는지 또 나의 조상들은 얼굴도 모르는데 알 수 있는지. 그리고 부활 뒤에도 지금의 가족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 많은 의문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의문과 궁금증을 저처럼 갖고 계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사두가이파 사람들의 물음도 어찌 보면 저와 같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다만 저는 부활을 믿으며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고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믿으며 주님께 묻고 있다는 점이 다를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을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풀어주십니다. 우리에게 성경도 모르고 하느님의 권능도 몰라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씀하시며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면 장가도 시집도 안가고 천사들처럼 된다고 하십니다. 오늘도 이 말씀을 가지고 주님께 직접 물어야합니다. "주님 시집 장가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또 "천사는 어떠한 존재라 우리가 천사처럼 된다고 하십니까?" 이처럼 천사가 무엇인지 시집 장가가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께 직접 물어서 듣게 되면 결혼의 의미가 또 천사의 삶(부활의 삶)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세기의 비밀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시집장가를 통해 남자여자의 신비도 알게 되고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결혼관에 대해서도 주님의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 주님은 설명하십니다. 모세가 가시덤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장면(출애굽3:6)을 상기시키면서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산 자의 하느님이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과연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고 확신합니까? 무엇이 살아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숨을 쉬고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직장이 있고 교회에도 열심히 나가고 모두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살아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으로 살아 있다고 스스로 자신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왜 허무한 생각 공허한 마음 등이 생겨나는 것일까요? 다시 내 자신에 대해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는 게 다 그런 것이지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뭐 어때". 이렇게 위안을 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는 왜 믿는지 설명을 해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잘 먹고 잘 사는데 구태여 힘들여 가며 예수 믿을 필요가 있나. 그냥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이런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교회를 나오면서도 남들이 믿으니까 나도 믿어야지, 천당에 간다니까 하면서 믿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 언제 흔들릴지 모릅니다. 내 스스로가 예수에 대한 확신이 없는 한 흔들리는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래서 더욱 주님을 직접 만나야합니다. 한번이라도 주님을 만나신 분은 흔들리는 마음이 생긴다 해도 그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는 않습니다. -
더군다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더욱더 주님을 떠나 살수 없게 됩니다. 모든 사람이 죽은 뒤의 문제를 어떠한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현재의 믿음 상태가 달라집니다. 오늘 주님께 묻고 있는 사두가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삶을 세상적으로 볼 때 매우 충실하게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한번뿐이 없는 인생이기에 더욱 열심히 권력과 기득권을 누려 가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자들은 내세의 결실을 믿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도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주님께 충성하는 삶을 살려 노력하게 됩니다. 부자들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어느 시대나 변화를 싫어합니다. 개혁이니 혁명이니 하는 단어들조차도 피하려 하고 현재의 삶에 안주하려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지위와 부를 지키려 하지만 창조의 원리는 이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살아가면서 창조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삶은 어떠한 것일까요? 한번쯤은 기도하며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도 또 이 지구가 가고 있는 방향이 무엇인지. 정말 우리는 멸망을 향해가고 있는 것인지, 주님은 우주적 구원을 이룩하시려는 분인데 종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에 심사숙고하게 기도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엽적인 것만 눈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근본적인 것을 해결치 못해 삶이 고달프고 기쁘지 않습니다. 사랑도 상념적 사랑만을 생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몸으로 봉사하는 사랑을 생각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내게는 느낌이 없고 손에 잡히는 것이 없게 됩니다. 사실 이 문제는 함께 모여 기도하며 풀어 나가야합니다. 부활이라는 현실적 의미를 모르고 육신의 죽음 뒤에 오는 부활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바리사이파처럼 살려합니다. 나는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믿었던 예수는 나에게 어떠한 존재이며 내가 구원을 받으려고 노력했던 것이 무엇이었고 또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면 그 뒤의 삶은 어떻게 변해 지금의 믿음은 어디쯤 와 있는지 또 나의 부활은 무엇인지 알아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주님께 묻고 있듯 우리도 그러한 관점에서 부활을 본 것은 아닌지 또 죽은 뒤의 걱정으로 주님을 믿은 것은 아닌지 이제는 다시 돌아다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믿는 자든 안 믿는 자든 심지어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까지도 세상 종말이 왔다고 말세라고 떠들어 대고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말세가 왔다고 하는데 우리는 말세를 맞이하려고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2000년 전에도 말세라고 했습니다. 또 지금도 말세라고 합니다. 종말에는 우주적인 종말과 개인적인 종말이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과연 말세가 우리에게 종말을 뜻하는 것일까요?
이 지구에서 살면서 부활이 없다면 말세의 의미는 무의미해질 것입니다. 또 말세가 있다고 해도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죽으면 그만인데 사실 부활이 있다고 해서 이 지상에서 올바르게 살려고 하는 것 아닌가요? 최후의 심판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최후의 심판이 있다는 것은 죽는다고 끝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죽은 뒤를 걱정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주님은 오늘만을 걱정하라고 하시었는데 왜 죽은 뒤를 걱정해야 합니까. 죽은 뒤는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은 살아 계신 자의 하느님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누구나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죽은 자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죽은 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께 와서 지금 묻고 있는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죽은 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살아 있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우선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세상적 논리로 주님께 다가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음행을 하지 말라고 하면 이성간의 문제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행은 무질서와 무계획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무질서 안에는 이성간의 문제도 들어가겠지만 이것보다는 원론적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일이 주님께 묻고 답을 들어야 왜곡 된 믿음을 갖지 않게 됩니다. “아! 나는 음행을 하지 않았어. 남녀 간의 문제는 깨끗하니 나는 주님말씀을 잘 지켰지” 라고 매사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뛰어 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사명이고 의무이지만 이 현실을 뛰어 넘기 위해서 꼭 지켜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현실 안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내게 가장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님께 달라고 요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주님 내가 지금 절실하게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어야합니다. 내가 보는 나와 주님이 보는 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라고 생각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나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신 분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내게 진짜로 필요 한 것을 알고 얻을 때 나의 존재는 의미가 있게 되고 기쁨의 삶이 됩니다.
부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 안에서 부활을 해야합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을 했습니다. 매일매일 부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활은 나의 매일 매일의 새로운 삶인 것입니다. 주님을 직접 만난 것이 부활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지구에서 살면서 매일 매일 주님을 만나 부활의 삶을 살아 갈 때 나의 삶이 풍요로워지고 성화의 과정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의 길을 나서시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마가(마르코)복음75강
12:28-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그들이 토론하는 것을 듣고 있다가 예수께서 대답을 잘 하시는 것을 보고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하고 물었다.
12:29-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12:30-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12:31-또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 는 것이다. 이 두 계명 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12:32-이 말씀을 듣고 율법학자는 “그렇습니다, 선생님. ‘하느님은 한 분이시며 그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은 과연 옳습니다.
12:33-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두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12:34-예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는 감히 예수께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늘 복음은 계명에 대한 것입니다. 유대교의 계명은 613가지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 248개는 명령조항이고 365개는 금령조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살아 계신 동안에도 유대인들은 이 많은 조항을 가지고 어떠한 조항이 더 중요하냐에 대해 많은 논란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한 율법학자가 예수께 와서 묻습니다. 실제적으로 이 율법학자는 첫 번째 지키어야 하는 조항이 무엇인지 확신이 없어서 물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가족들도 교회에 출석하면서 여러 가지 지켜야 할 조항들 때문에 은근히 압박을 받으며 교회를 섬기는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어떤 경우라 해도 억압하거나 겁을 주거나 두려움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일이 아니면 주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의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즐겁고 기쁜 마음이 아닐 때는 주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도처럼 정직한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서도 일을 해야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정직함은 세상적 정직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앞에서 아무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현대 교인들이 가장 압박을 받고 걱정하는 것이 십일조 문제입니다. 또 하나는 주일 성수를 지키는 문제입니다.
이 두 가지의 부담을 안고 믿음 생활을 하신다면 지금까지 주님을 믿은 것이 아니라 성전을 믿으신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서도 자유 해야 합니다. 자유롭게 하라니까 십일조도 안 내고 주일날에도 제 멋대로 교회에 빠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며 진정한 마음이 없으면 그 기도나 그 참석은 무의미해집니다. 부담이 되는 믿음 생활은 자신에게나 주님에게나 스트레스를 주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주님도 내 안에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자유하지 못하면 함께 슬퍼하시고 스트레스를 받으시게 됩니다. 율법적인 믿음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언제나 이 율법적인 행위가 2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우리의 발목을 잡고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할수록(교회에 출석한지 오래 될수록) 주님 은총 안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점점 더 자신을 어떠한 틀 속에 가두어 두고 그것을 지키지 못하면 괴로워하고 죄를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까지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모두 배척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라고 매도하기까지 합니다. 주님은 틀이 없으신 분입니다, 유대교가 만들어 놓은 틀을 깨뜨리시고 인간의 자유함을 위해(자유함은 창조주 하느님과의 화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자유함)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창조 당시에 아담과 하와는 벌거숭이였습니다. 벌거숭이란 자유함 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벌거숭이 일 때 자유를 얻을 수 있고 내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처음으로 접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생이라는 단어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죽어서 천당에 간다고 합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죽음으로부터의 자유함 입니다. 천당도 무엇입니까! 삶으로부터의 자유함, 주님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유함 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틀 속에 갇혀 있지 않기 위해서는 주님을 직접 만나야합니다. 자신의 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시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물어보아야 합니다. “주님 제가 만들어 놓은 틀은 무엇입니까?” 라고. 알아야 고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특히 정치하시는 분들을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창문 밖으로 쓰레기를 버리는 것, 또 공중 화장실에 있는 휴지를 갖고 가는 것 심지어 교회서재에 있는 책들을 가지고 가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어느 날 작은 딸아이가 학교에 갔다가 오더니 우리나라 대통령 하던 분이 돈이 십오 만원(?)뿐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묻습니다. 그래서 세금도 못 낸다고 하는데 그 분은 어떻게 저렇게 큰집에서 살 수 있느냐 묻습니다. 그래서 저는 잠시 망설였습니다.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지 결국은 사실대로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이 아이가 이해하고 못하고는 나중 문제이고 사실대로 이야기 해 주는 것이 낫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다 알아듣는 것을 보고 잠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저에게 종종 이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뉴스나 신문을 보고서 “그 기사에 나오는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모를까요?” 라고 그러면 저는 대답합니다. 모른다고 말합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추어 지는지 알지 못한다고, 이렇게 말씀 드리면 의아해하십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하시면서 진짜로 그 분들은 모르냐고 합니다. 인간이라는 것이 알면 못하게 됩니다. 어떻게 국회의원들이 국회에서 멱살을 잡고 싸울 수가 있습니까. 그것도 생방송으로 전국에 나가고 있는데 보통사람들이라면 창피해서도 못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합니다. 창피하다고 생각하면 하겠습니까. 아이들이 숙제를 안 해 가서 선생님에게 벌을 받거나 혼이 납니다. 숙제를 안 해가는 아이들은 정해져 있게 마련입니다. 그 아이들은 그것이 창피 한 것인지 또 그렇게 선생님에게 혼이 나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틀 속에 갇혀 있으면 창피한 것을, 무지한 것을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흔히 초심(처음 믿음)으로 돌아가라고 합니다. 오래된 성도일수록 더 자유롭고 기뻐야 하는데 틀이 점점 많아지는 것을 볼 때 슬프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더욱 나쁜 것은 안 믿는 자들보다 더 많이 가리는 것이 많고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교파 이외의 교회들을 인정치 않으려 합니다. 이러한 이유는 모두가 주님을 뵙지 못한 탓입니다. 이분들은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 놓은 예수를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상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우상 예수를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 기도해 보시기바랍니다.
오늘 율법학자는 주님께 묻습니다. 많은 계명 중에서 첫 번째 가는 계명이 무엇인지, 저는 성서를 읽다 보면 “참 주님은 속도 좋으신 분이다.” 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속이 좋지 않으신 분이면 저는 이미 죽어서 어딘가에 가 있겠지만 그래도 주님은 일일이 대답해 주시는 것을 보면 착(?)하신 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묻는 사람이 율법학자입니다. 유대교의 율법학자라고 하면 대단한 자들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성서학자들이고 율법에 대하여서는 능통한 도사들이라고 보아야합니다. 그런 사람이 주님께 와서 그것도 주님이 대답을 잘 하신다는 것을 알고서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주님은 대답을 해주십니다. “첫째계명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유대교에서 아침저녁으로 외우던 신앙 고백문( 쉬마=신명기6:4-5, 이스라엘은 들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오,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당신들의 하느님을 사랑하십시오.) 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 목숨, 생각, 힘을 다하여 무엇을 하라고 했느냐 입니다. 무엇을 하라고 했습니까? 하느님을 그것도 나의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은 무엇이고 목숨은 무엇이며 생각은 또 힘은 무엇인지 주님께 물어야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최선을 다하는 것인지 물어야합니다. 또 사랑이 무엇인지도 물어야합니다. 이렇게 주님께 물으면서 성서를 읽고 기도할 때 우리는 복음을 듣는 것이고 자유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을 창조주라고 믿을 때 하나뿐인 주님이라고 믿을 때 우리의 믿음은 솟아납니다. 믿지 않은 사람들은 하느님을 창조주로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들이 첫 번째 고백을 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두 번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선 내 이웃이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이웃은 자신들의 동포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금 이 율법학자에게 가르치고 있는 이웃은 누구일까요? 이것도 주님께 여쭈어 봐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은 진정 누구인지. 혹시 이 이웃이 주님은 아닐까요! 진정 주님을 사랑 할 수 있을 때 내 몸을 사랑하는 것이고 내 몸을 사랑함이 내 이웃을 사랑함이 아닐는지, 우리는 이웃이라고 하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진정한 내 이웃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아야 두 번째 계명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의 믿음은 말의 성찬이 있지 않습니다. 실전이고 참 삶입니다. 먼 하늘을 바라다보는 이상의 믿음이 아니라 현실 안에서 지금 당장 일어나고 있는 일들 안에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일요일에만 3일 밤에만 금요철야 예배에서만 있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예수가 나의 삶 속에 없다면 우리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피상적인 이야기를 가지고는 구세주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내 아이가 지금 아픈데 지금 당장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지 며칠 뒤의 그 아이가 큰상을 받는다 한들 지금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처럼 주님은 지금 이 시간에 이 순간에 나와 함께 하시기 위해 내 안에 상주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알아들은 율법학자는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그밖에 다른 이는 없다는 것과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 보다 훨씬 낫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스라엘인의 번제[ 燔祭, sacrifice ]란 이스라엘 민족이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여호와(야훼)에게 올린 가장 일반적인 동물의 희생의식입니다. 희생물을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 그 연기냄새가 하늘로 올라가게 하는 공희(供犧)의 방법입니다. 동물을 통째로 굽는다는 뜻에서 전번제(全燔祭)라고도 불리는데(시편 51:19), 하느님에 대한 봉헌자(奉獻者)의 모든 헌신을 상징하는 동시에 속량(贖良 속죄)의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번제는 매일 희생물을 바치는 외에도 속죄일(레위 6장)과 3대 절기(무교절 칠칠절=오순절. 맥추절 초실절. 초막절)에도 드렸습니다. 희생의 대상이 되는 동물은 흠이 없는 수컷에만 한하여, 주로 소, 양, 염소 등을 썼는데 가난한 이들의 경우에는 산비둘기, 집비둘기 등을 희생으로 바치기도 하였습니다(레위 5:7). (유대교의 제사와 히브리절기에 대해 따로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율법학자의 대답은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축복의 말씀을 이끌어냅니다.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 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은 무슨 소리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지금까지 믿었습니까. 육신의 죽음이 있어야 하늘나라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고 죽을 날이 다가 왔다고 하시는 말씀은 분명히 아닙니다. 대답을 슬기롭게 잘 하니까 이런 축복의 말씀을 해 주시었습니다. 그러니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습니다. 우리가 진정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기고 내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알고 있는 것만으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으니까 실천하면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현실 속에서 하늘나라를 이루며 살아야합니다. 주님을 만나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때 또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하늘나라는 이 지구에서 이룬다는 것을 믿어야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의 틀에서 벗어나 주님을 직접 만날 때 우리는 천국의 삶을 이 지상에서 이룰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감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으로 놀라운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큰 잘못이나 되는 것 마냥 이성이라는 옷으로 덮입고 있었기에.... 진정한 자유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성의 옷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 주시니 감사 감사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첫댓글 감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참으로 놀라운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큰 잘못이나 되는 것 마냥 이성이라는 옷으로 덮입고 있었기에.... 진정한 자유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성의 옷을 한꺼풀 한꺼풀 벗겨 주시니 감사 감사 우리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