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2024. 2. 27.~29.(화~목) - 음력(1. 18.~20.), 일출 07:05~일몰 18:26
●산행지: 태청지맥 2구간 졸업
●산행코스: 봉정사-539.4m봉-태청산(593.4m)-태청지맥 분기점-울타리우회-사선치-202.9m-213.8m-삼봉산(163.1m)-149.8m-수양사거리-태산(206.9m)-제당산(158.8m)-158.1m-전도마을-91.4m-월악산(167.5m)-삼광군봉-116m-병풍산(161.4m)-수선사-외치재-만중산(101.3m)-129m-가암산(151.4m)-칠성삼거리-822번 국도-232.1m-병풍산(265.4m)-망산(289m)-절재-벌레고개-삼광시군봉-801번 국도-구절봉(297m)-211.6m-국사봉(281.6m)-272.1m-818번 국도-246m-313.7m-백룡산(347.2m)-1번국도/호남선-144.8m-청림산(189.1m)-169m-석관정 합수점
●먹거리: 생수1리터, 튀김건빵2, 밀키스 캔, 사탕5, 캔맥, 게토레이
●준비물: 하계텐트, 윈드스토퍼, 고아바람막이, 메트리스3, 스틱, 헤드랜턴, 피부연고, 비상약품, 부직반창고, 충전지3, 충전짹, 손수건, 휴지, 물티슈, 하계용 긴팔, 비닐우의, 말방울, 안대, 귀마개, 예비양말, 띠지22
●거리: 약 77.6Km
●소요시간: 37.45h
●누구랑: 나홀로
●경비: 고속버스33,800, 아침12,000, 직행2,400, 택시10,440, 향토(저녁)13,000, 찜질방15,000, 음료4,000, 택시8,000, 직행버스5,700, 고속버스33,300
●날씨: -1~13
●산행경과:
* 2. 27(화): 35.1Km
- 07:20 : 봉정사
- 07:50 : 539.4m봉
- 08:13 : 태청산(593.3m)
- 09:23 : 봉정사길
- 10:04 : 202.9m봉
- 10:26 : 유천고개
- 10:44 : 197.3m봉
- 11:02 : 어랑고개
- 11:18 : 213.8m봉
- 11:38 : 149.8m봉
- 11:45~12:14 : 삼봉산갈림길
- 11:55 : 삼봉산(163.1m)
- 12:00 : 153.1m봉
- 12:26 : 효사랑병원/ 수양사거리
- 13:00 : 능선
- 13:04 : 충의숭모단
- 13:10 : 태산(206.9m)/ 소쿠리명당
- 13:28 : 제당산(159.7m)
- 13:30 : 제당산(158.8m)/ 삼각점
- 14:00 : 보생리/ 생동길
- 14:30 : 91.4m봉
- 15:04 : 금산로/ 5번군도
- 16:04~08 : 월악산
- 16:11 : 삼광군봉
- 16:22 : 116m봉
- 16:48 : 로렌시아의집
- 17:05 : 병풍산(161.4m)
- 17:22 : 빛그린산단로
- 17:39 : 외치터널
- 17:43~18:12 : 저녁식사
- 18:19 : 만중산(101.3m)
- 18:53 : 129m봉
- 19:00 : 양지고개/ 갈동길
- 19:16 : 쌍둥이부화장
- 19:23 : 송암길
- 19:41 : 가암산(150.8m)
- 19:56 : 전망대
- 20:12 : 삼거동고인돌군
- 20:20 : 칠성삼거리
* 2. 28.(수): 32.16Km
- 03:10 : 출발
- 03:33~04:16 : 사한산갈림길
- 03:52 : 사랑산(185.4m)
- 04:57 : 822번도로/ 노안상도로
- 05:24 : 대야고개
- 05:29 : 82.5m봉
- 05:34 : 우치
- 05:40 : 75.3m봉
- 06:08 : 임도
- 06:32 : 232.1m봉
- 06:43 : 병풍산(265.4m)
- 06:52 : 추선사
- 07:09 : 활공장
- 07:17 : 망산(288.5m)
- 07:29 : 절재
- 07:54 : 충치/ 벌레고개
- 08:00 : 삼광시군봉
- 08:21 : 분매동고개/ 월암로
- 09:20 : 구절봉(297m)
- 09:44 : 249.3m봉
- 10:38 : 월계재
- 11:04 : 211.6m봉
- 11:24 : 국사봉(281.6m)
- 12:38 : 186.6m봉
- 12:58 : 만년고개/ 만년길
- 12:07 : 272.1m봉
- 13:29 : 221.5m봉
- 14:13 : 국사봉(246m)
- 14:39 : 218.3m봉
- 15:26 : 236.m봉
- 16:05 : 313.7m봉
- 16:27 : 백룡산(347.2m)
- 17:27 : 삼봉정도전유배지
* 2. 29.(목): 10.4Km
- 05:35 : 출발
- 05:49 : 희망축산
- 06:07 : 1번국도
- 06:27 : 호남선
- 06:39 : 39.1m봉
- 07:06 : 흥성장씨세장산비
- 07:37 : 144.8m봉
- 08:05 : 청림산(189.1m봉)
- 08:28 : 169m봉
- 08:48 : 숭조원
- 09:00 : 동당교차로
- 09:10 : 석관귀범
- 09:14 : 이별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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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청지맥(太淸枝脈)이란
영산기맥의 장암산과 월랑산 사이에 우뚝 솟은 태청산(太淸山, 593.3m)에서 분기된 지맥길이며 삼봉산(三峰山, 163m→0.5k), 태산(太山, 206.9m), 제당산(158.8m), 월악산(月岳山, 167.5m), 병풍산(屛風山, 161m), 외치재, 만중산(101.3m), 가암산(151.3m), 사한산(186m→0.6k), 병풍산(屛風山, 265.4m), 망산(望山, 288.5m), 구절봉(297m), 국사봉(國士峰, 281.6m), 백룡산(白龍山, 347.2m), 대박산(大朴山, 55m), 청림산(靑林山, 189.1m)을 거쳐 고막원천이 영산강에 합류하는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석관정나루터에서 그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50.6km에 달하는 산줄기로 고막원천의 우측 분수령이 된다.
♤ 태청지맥 개념도
♤ 태청지맥을 지나는 동네
* 영광군(靈光郡)
전남 북서부에 있는 군으로 굴비의 산지로 유명하며, 쌀·누에고치·소금·눈이 많은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4백(四白)의 고장으로 불렸다. 인구감소의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지역으로 군내 가장 적은 인구가 거주하는 낙월면의 인구는 1천 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홍농읍에는 1980년대에 건립된 국내 서남지역의 유일한 원자력발전소인 한빛원자력발전소(구 영광원자력발전소)가 있다. 행정구역은 영광읍·백수읍·홍농읍·대마면·묘량면·불갑면·군서면·군남면·염산면·법성면·낙월면 등 3개읍 8개면 127개 동리가 있다. 군청소재지는 영광읍 중앙로이다. 본래 백제의 무시이군(武尸伊郡)인데,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무령군(武靈郡)으로 개칭했다. 이때 영현으로 장사현(長沙縣: 고창군 무장면 일대)·무송현(茂松縣: 고창군 성송면 일대)·고창현을 관할했다. 고려초인 940년(태조 23)에 오늘날의 이름인 영광군으로 바꾸었으며, 속군으로 장성군(長城郡)·압해군(壓海郡: 신안군 압해면 일대)을, 속현으로 함풍현(咸豊縣: 함평)·모평현(牟平縣: 함평)·장사현(長沙縣)·무송현·해제현(海際縣: 무안군 해제면 일대)·삼계현(森溪縣: 장성군 삼계면·삼서면 일대)·임치현(臨淄縣: 영광군 염산면·백수읍 일대)·육창현(六昌縣: 영광군 군남면 일대)을 거느린 대읍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영광군을 유지했으나, 1629~38, 1755~64년에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영광의 별호는 기성·정주(靜州)였다.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1895년에 전주부 영광군, 1896년에 전라남도 영광군이 되었다. 1906년의 월경지정리로 비입지인 망운면·진하산면·다경포를 무안군으로 이관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홍농면·불갑면·위도면·낙월면은 그대로, 진량면을 법성면으로, 동부면·도내면이 영광면으로, 남부면·남죽면·관산면이 군서면으로, 금마면·봉산면이 백수면으로, 원산면·염소면이 염산면으로, 마산면·외간면·육창면이 군남면으로, 묘장면·황량면이 묘량면으로, 대안면·마촌면이 대마면으로 통합되었다. 현내면·내동면·삼북면은 삼계면으로, 삼남면·외서면은 삼서면으로 통합, 장성군으로 이관되었다. 1955년에 영광면이 읍으로 승격되고, 1963년에 위도면이 전라북도 부안군으로 편입되었다. 1980년에 백수면이, 1985년에 홍농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되었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장성군(長城郡)
전남의 가장 북단에 위치한 군으로 동쪽은 순창군과 담양군, 서쪽은 고창군과 영광군, 남쪽은 광주광역시, 북쪽은 전북 정읍시와 고창군에 접하고 있다. 군 전체가 대부분 산지를 이루며 영산강 최상류인 황룡강과 장성호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산줄기가 뻗어 내려오며, 그 한줄기인 북서쪽의 산줄기는 고창군과 영광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장성갈재(일명 노령(盧嶺)에서 태청산(太淸山)으로 이어지는 북동-남서 산줄기이고, 또 하나는 순창군과 담양군의 경계를 이루며 노령에서 도장봉(459m)으로 내려오는 산줄기이다. 이는 남서 방향으로 이어져 병풍산(屛風山, 826m), 불태산(佛台山, 636m) 등을 이룬다. 영산강의 상류 지류인 황룡강이 북동~남서 방향의 구조선을 따라 흐르고, 북하천·약수천·개천·동화천 등의 지류들이 산지 사이를 흐르면서 들을 이루고 이곳에 마을이 입지한다. 노령을 중심으로 각 고속국도 및 철도의 관문이다. 금성산성과 백양사가 유명하며 홍길동의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지명은 산세가 깊고 성곽처럼 둘러싸여 있다고 해서 유래되었으며, 고려 시대부터 지명이 사용되었다. 백제 시대에는 고시이현(古尸伊縣, 현 장성), 구사진혜현(臼斯珍兮縣, 현 진원). 소비혜현(所非兮縣, 현 삼계)으로 이루어진 군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고시이현이 갑성군(岬城郡)으로, 구사진혜현은 진원현으로, 소비혜현은 삼계현으로 개칭되어 무진주 관할이 되었으며, 940년(고려 태조 23)에 갑성군을 장성군으로 고쳐 처음 장성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장성군과 삼계현은 영광군의 속현이 되고, 진원현은 나주목에 속했다. 1413년(태종 3)에 장성은 나주목의 관할이 되고, 진원은 장흥도호부의 관할이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본래는 백제의 고시이현(古尸伊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고쳐서 갑성군(岬城郡)이라 하였고, 고려에서는 지금 이름으로 고쳐 영광군에 붙였다가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서는 현감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문헌의 「동람도」에는 장성과 진원이 분리되어 있다. '1872년 지방지도'를 보면, 황룡강 물줄기를 중심으로 산줄기 남북방향으로 뻗어내려 오는 것이 뚜렷할 정도로 산지가 많다. 고시미(古尸伊), 갑성(岬城), 오산(鰲山), 장성(長城)이 모두 '산울타리의 골짜기 고을'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산이 둘러있고 불이 굽이쳐 스스로 하늘이 이루었네"라는 조종생의 시에 산지가 많은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1895년(고종 32)에 군제 실시로 장성군이 되었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함평군(咸平郡)
전남 북서부 해안에 위치한 군으로 동쪽은 광주광역시와 나주시, 남쪽은 무안군, 북쪽은 영광군·장성군, 서쪽은 황해에 면해 있다. 호남정맥의 여맥이 수지상(樹枝狀)으로 뻗어내려 구릉성 산지를 이루고, 그 사이를 영산강 지류들이 흘러 비교적 평탄한 지세를 이루고 있다. 북부에는 불갑산(佛甲山, 516m)·모악산(母嶽山, 348m)·군유산(君遊山, 403m) 등 노령산맥의 봉우리가 영광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솟아 있다. 중앙부에는 발봉산(鉢峰山, 179m)·천주봉(天柱峰, 376m)·고산봉(高山峰, 359m)·기산봉(箕山峰, 148m) 등 잔구들이 발달해 있다. 기산봉은 함평읍의 진산으로 산정에는 기산산성이 있으며, 산 아래로 함평천이 흐르고 고산봉이 보인다. 남서부에는 감악산(紺嶽山, 258m)이 무안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하천은 나산천(羅山川)과 고막천(古幕川)이 동부를 남류하여 영산강에 합류하며, 함평천(咸平川)이 중앙을 남류하여 영산강에 합류한다. 영산강은 영암군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남서류하며, 엄다면과 학교면을 흐르는 중류는 사호(沙湖)라고도 한다. 토양은 대부분 이토층 및 점질토이며, 해안의 일부 토양은 염기성을 띠고 있다.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유물·유적은 아직 발견된 바 없으나, 청동기시대에서 초기철기시대에 걸치는 유물은 나산면·월야면·학교면 일대에서 다수 발견되었다. 그리고 월야면을 중심으로 전 군에 걸쳐 230여 기에 이르는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삼한시대에는 이 지역에 정치조직체가 존재했으리라는 것은 고인돌이나 학교면·나산면·월야면에 분포되어 있는 옹관묘·석실분으로부터 확인되나, 그 소국의 이름은 알 수 없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에 속하여 굴내현(屈乃縣)과 다지현(多只縣)이 설치되었다. 삼국통일 후 경덕왕 때에 굴내현은 함풍현(咸豊縣)으로, 다지현은 다기현(多岐縣)으로 각각 개칭되어 모두 무안군에 속하였다. 이 시기의 유적으로는 대동면에 철성산성(鐵城山城)터가 남아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나주에 주둔하면서 파군교(破軍橋)에서 후백제군을 격파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중요한 싸움터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초에 함풍현이 영광군의 속현으로 편입되었고, 다기현은 모평현(牟平縣)으로 개칭되어 역시 영광군의 속현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는 함풍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1273년(원종 14)에 고승 고막대사가 도술로써 세웠다는 돌다리가 학교면 고막리에 있다. 1409년(태종 9) 함풍현과 모평현이 합쳐져 함평현(咸平縣)으로 개칭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따르면, 당시 함평현의 호수는 315호, 인구는 남자가 1,608인이다. 대굴포(지금의 학교면 곡창리)에 전라우수영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우수영이 1440년(세종 22)에 해남으로 옮겨갈 때까지 함평은 전라도 수군의 중심지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직접적인 피해를 당하지 않았지만, 정유재란 때에 향교가 소각당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때 의병장으로 정운길(鄭雲吉)·정충량(鄭忠良)·이극성(李克誠)·김수연(金壽淵) 등 많은 사람들이 활약하였다. 또한, 정호인(鄭好仁)·정경득(鄭慶得)·정희득(鄭希得)은 포로가 되어 일본에 끌려갔다가 돌아와서 당시의 사정을 기록한 『정유피란기(丁酉避亂記)』·『만사록(萬死錄)』·『해상록(海上錄)』 등을 각각 남겨 정유재란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함평현에서 나주부 함평군으로 되었다가, 다음해에 다시 전남 함평군으로 고쳐졌다. 1906년 5개 면이 더 편입되어 19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가 해제면과 다경면이 무안군에 이속되었고 동현내면과 서현내면이 합쳐져 기성면으로 개명되어 16개 면 482개 리로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10개 면으로 통합되어 대개 현재와 같은 윤곽이 갖추어졌고, 1932년에 다시 식지면(食知面)과 평릉면(平陵面)이 합쳐져 나산면으로 개명되어 모두 9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근대 인물로는 한말에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태원(金泰元)·김률(金聿) 형제와 심수택(沈守澤) 등이 유명하다. 특히 심수택의 의병활동은 그의 저술인 『진지록 盡知錄』에 잘 전해지고 있다. 1963년 7월 1일에 함평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73년 7월 1일에 학교면의 상옥리·금곡리·뱃호리·월송리가 대동면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1987년 1월 1일에 학교면 사가리 일부와 함평읍 성남리 일부가 엄다면에 편입되어 1읍 8면의 행정체계를 갖추었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광주광역시는 5개 자치구로 구성돼 있는데, 광산구(222.9 ㎢)는 광주 면적 절반에 가까운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 전남 함평, 장성, 나주시와 접하고 있어 광주의 문호 같은 지역이며, 광주송정역과 공항이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광주송정역과 첨단지구를 벗어나면 광산구도 제법 농촌의 느낌이 난다. 최근 신세계가 스타필드 부지로 점찍은 어등산 일대는 자연과 마을이 조화를 이룬 한적한 공간이다. 송산근린공원은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 특별한 곳이자 아는 사람만 아는 보물섬이다. 공원으로 들어오는 다리와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황룡강도 제법 운치 있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광주광역시 광산구(光山區)
광주광역시 서부에 위치한 자치구로 북쪽으로는 장성군, 서쪽으로는 함평군, 남쪽으로는 나주시와 접하고 동쪽으로 극락강(極樂江)을 경계로 북구·서구·남구와 접한다. 1988년 전국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송정시와 광산군을 통합하여 신설되었으며 광주광역시 전체 면적의 45%를 차지, 광주광역시의 구 가운데 가장 넓으며 대한민국 자치구 중에서도 가장 넓다. 또한 광주광역시의 자치구 중 유일하게 방위명을 사용하지 않은 곳이다. 광산(光山) 김씨, 광산 탁씨의 본관인 광산이 바로 이 곳이다. 엄밀히 말하면 '광산' 자체가 광주광역시의 조선시대 별칭이다. 조선시대에는 '-주(州)'의 이름을 가진 곳을 '-천(川)', '-산(山)'으로 바꾸기도 하였는데 반란 등으로 고을의 등급을 낮추는 지역 연좌에도 그런 식으로 변경하는 일이 있었다. 이에 따라 '광주목'이 '광산현'이란 이름으로 일시적으로 강등/개칭된 사례가 있다. 광주광역시에 통합이 되어 자치구가 되었지만 과거만 해도 송정읍(시)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한적한 시골이었다. 하지만 현재 광주의 근간산업인 광(光)산업을 유치하기 위해 조성된 첨단지구를 시작으로 신창동, 신가동, 수완동, 우산동 등 광산구 중북부지역을 중심으로 대규모 택지개발 사업이 벌어지기 시작했으며, 20년도 안되어 국회의원 선거구가 분리되고 인구가 2배 이상 뛰어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특히 수완지구(수완신도시)는 광주에서 가장 인기있는 지역으로 비싼 아파트, 단독주택, 타운하우스가 있다. 광주공항과 광주송정역으로 인해 광주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호남선과 호남고속선이 구의 중심을 관통하고 있으며 관내에 소재한 역으로 광주송정역, 북송정역, 하남역, 임곡역(이상 호남선), 동송정역(경전선), 극락강역(광주선)이 있다. 그러나 여객영업을 하는 역은 광주송정역과 극락강역 뿐. 2016년 12월 19일부터 SRT개통을 대비하여, 광주역-광주송정역 사이간에 셔틀열차가 운행을 시작하였다. [통합포탈에서 발췌정리]
* 나주시(羅州市)
전남 중서부에 위치한 시로 동쪽은 화순군, 서쪽은 무안군·함평군, 남쪽은 영암군, 북쪽은 광주광역시와 접하고 있다. 남동부에 용제산(龍帝山, 323m)·덕룡산(德龍山, 376m) 등이 있고, 북서부에 옥산(玉山, 336.2m)·금성산(錦城山, 450m)·신걸산(信傑山, 368m) 등이 있다. 높이 약 400m 내외의 이들 산지지역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20∼50m의 구릉지와 10m 이하의 평야이다. 구릉지는 과수원으로 개발되었으며 나주평야는 전남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특히, 지석천 연안에 남평들과 산포들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남평읍 소재지에서 화순군 능주 사이를 흐르는 지석천은 일명 ‘드들강’이라고도 부른다. 이 부분은 길이가 4km이며, 유역에 발달된 남평평야와 화순평야 등의 주요 미곡산지를 관개한다. 시의 북동쪽에서 황룡강(黃龍江)과 극락강(極樂江)이 남류하다가 다시 지석강(砥石江)과 합류하는데, 이 지석강의 지류를 막아 건설한 나주댐이 영산강 유역의 넓은 나주평야를 관개하고 있다. 영산강은 시의 중앙을 북동에서 남서로 흐르면서 시를 양분하고 있다. 영산강 하류는 너비가 좁은 관계로 낮은 지대는 상습 수해지역이 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유적·유물은 보산동을 비롯해 남평읍·세지면·다도면·다시면·문평면·왕곡면 등 거의 시 전 지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고인돌군과 그 아래에서 출토된 간돌검·돌도끼·돌창류가 있다. 따라서 일찍부터 인문활동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한의 54소국 중 임소반국(臨素半國)과 신운신국(臣雲新國)이 나주·광주의 접계지역에, 불미지국(不彌支國)이 반남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백제 시대에는 발라군(發羅郡)·반나부리현(半奈夫里縣)·미동부리현(未冬富利縣) 등의 군현이 설치되어 있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뒤 설치한 대방주의 6현 가운데 죽군현(竹軍縣) 등 4현이 나주지역에 위치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이 대방주는 6년 만에 폐지되었다. 신라는 686년(신문왕 6)에 발라군을 통의군(通義郡)으로 고치고, 757년(경덕왕 16)에는 통의군을 금산군(錦山郡, 혹은 錦城郡)으로, 반나부리현은 반남현(潘南縣)으로, 미동부리현은 현웅현(玄雄縣)으로 개칭하였다.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한 뒤에는 한때 후백제의 영역에 속했다가 왕건에 의해 점령되었으며, 이때 이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에 적극 협력하여 고려 건국에 큰 도움을 주었다. 940년(태조 23)에 금산군을 나주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 전국에 12목을 둘 때 나주목이 되어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로써 종래 전라도 남부의 수부였던 광주(무주)를 대신해 계수관(界首官)으로 등장,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996년(성종 15)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라 하여 해양도에 속하게 되었다. 1011년(현종 2)에 거란의 침공을 피해 왕이 잠시 피란을 와서 10여 일을 머물다가 환도한 일이 있었다. 1018년에 다시 목(牧)이 되어 이후 조선 말기까지 거의 변화 없이 남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1270년(원종 11)에는 삼별초군에 의해 공략받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으로서 전라도 남부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1457년(세조 2)에는 진관체제에 따라 거진(巨鎭)이 설치되었으며, 목사가 병마첨사를 겸하였다.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정여립사건으로 인해 많은 선비들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그 후로도 선비들 상호간의 대립과 갈등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1592년의 임진왜란 때는 김천일(金千鎰)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의병에 참여하였다. 1645년(인조 23)에 향리가 목사를 구타한 강상지변(綱常之變)이 일어나 금성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54년(효종 5)에 다시 복구되었다. 그 후로도 현종 때와 영조 때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1755년(영조 31)에는 임금을 비난하는 벽보가 관아 앞에 내걸리는 사건이 발생해 또 많은 선비들이 처형당하였다. 『경세유표』에는 조선 후기 나주목의 토지결수가 2만 8000결로 전국 제일이라 하였다. 1895년에 관제개혁으로 나주군으로 개칭되었다. 다음해 새로운 지방제도의 개편이 이루어져 13도제가 시행되고 각 도에 관찰사가 파견되는 체제로 바뀜에 따라, 광주가 새로이 전라남도의 관찰부가 되었다. 이로써 나주는 오랫동안 누려왔던 전라도의 중심도시 구실을 광주에 양보하게 되었다. 동시에 영역의 축소도 이루어져 오산면은 광주로, 대화면은 장성으로, 금마·원정·비음·종남면은 영암으로, 삼향면은 무안으로,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은 함평으로 각기 이관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그 동안 별도로 존속해 왔던 남평군을 없애 남평면으로 하고 그 예하에 있던 여러 면들을 합병하면서 함평에 이속했던 적량·장본·여황면 지역을 다시 회복하였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조선시대에 비하면 훨씬 축소된 영역을 갖게 되었다. 1927년 영산면이 영산포읍으로 승격하고, 1929년에는 나주면과 나신면이 합쳐져 나주면이 되었다가 1931년에는 나주읍으로 승격하였다. 한편, 영산면·왕곡면·세지면 등은 이 시기에 이른바 궁삼면(宮三面)이라 불렸다. 1888년의 대흉년으로 인해 많은 농민이 떠돌게 되자 악덕 관리가 토지를 불법으로 빼앗아 엄상궁(嚴尙宮)의 소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일제강점기에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소유권 주장, 소작료 징수 등의 탄압과 횡포로 인해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이에 맞서 싸우는 궁삼면토지분쟁을 계속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경제적 수탈에 저항한 사례로서 유명한 사건이 되었다. 1949년에 삼도면·본량면·평동면이 광산군으로 이속되었다. 1973년부터 다도면 일대에 나주 댐 공사가 시작되어 1976년에 완공되었다. 1981년 7월 1일에는 나주읍과 영산포읍을 합하여 금성시라 하고 나주군에서 분리, 승격하였다. 1986년 1월 1일에 금성시를 다시 나주시라 개칭했다가 1995년 1월 1일 시·군 통합에 의해 나주시와 나주군이 새로운 나주시가 되었다. 같은 해 3월 1일에 남평면이 읍으로 승격하고, 1996년 2월 10일 삼도동 일부가 금천면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1개 읍 12개 면 6개 동으로 편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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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부 구간거리
태청산(593.3m)-5.9km-삼봉산(163m→0.5k)-2.3km-태산(206.9m)-7.3km-계봉산(101m→1.4k)-0.2km-월악산(166.9m)-2.9km-외치재-4.4km-사랑산(186m→0.6k)-4.7km-망산(289m)-1.3km-충치-4.3km-옥녀봉갈림길(139.1m)-0.7km-국사봉(281.6m)-8.3km-백룡산(347m)-5.1km-대박산(55m→2.3k)-2.6km-청림산(189m)-1km-고막원천/영산강합수점
* 구간거리
- 접속: 영광 죽동마을 ~ 태청산 2.5km
- 봉정사 ~ 태청산 2.7km(영산기맥 1.5km)
- 태청산 ~ 우치 32.3km
-. 태청산 ~ 생동마을 14.8km
-. 생동마을 ~ 우치 17.5km
- 우치 ~ 고막원천/영산강합수점 32.3km
-. 우치 ~ 만년재 12.7km
-. 월계재 ~ 만년재 4.5km
-. 만년재 ~ 고막원천/영산강합수점 19.6km
-. 월태리 현대의원 ~ 합수점 7.3km
* 식수 공급지 및 산행 정보
- 장성 삼계면 사창 택시: 061)395-2500, 편의점
- 수양사거리 마을길 물보충 가능
- 생동마을 경로당
- 로렌시아집(장애인 요양시설), 외치마을 물보충 가능
-. 월야택시: 061)323-2277, 061)323-5462
- 외치교차로: 향토식당
- 칠성삼거리(문장터미널 가까움)
-. 문장택시: 061)323-0425, 061)323-0049
- 불교사 → 추선사
- 월계재/ 월계마을회관(300m), 물보충 가능
- 문평면 택시: 010-3628-0630
- 만년고개/ 만년마을
- 영용마을 물보충 가능
- 문평산업단지 끝 1번국도/ 현대의원: 추어탕집, 농협하나로마트, 한식뷔페
- 다시면 택시: 010-9696-0036
* 서울에서 태청지맥 분기점 내려가는 길
- 용산역 ~ 정읍역: 05:07~06:46, 1.40h, 39,500원
- 용산역 ~ 광주송정역: 05:07~07:06, 2h, 46,800원
- 용산역 ~ 장성역: 06:24, 07:33, 08:27, 09:43, 09:46, 12:02, 13:33,~ 19:10, 20:02, 3.40h, 20,900~31,000원
- 센트럴시티터미널 ~ 장성터미널: 09:50, 14:55, 16:05, 3.15h, 27,400원
- 센트럴시티터미널 ~ 영광터미널: 07, 08:20, 08:50, 09:40, 09:50, 11:20, 3.20h, 20,700~30,600원
- 영광터미널 ~ 대마슈퍼 ~ 죽동마을: 군내버스
- 센트럴시티터미널 ~ 광주유스퀘어: 05:30, 05:40, 06:15, 07, 07:10, 07:20, 07:30, 07:55, 08, 08:05, 08:10, 08:15,08:20, 08:25, 08:28,~ 22, 22:10, 22:20, 23, 23:20, 23:40, 23:50, 00:45, 01, 3.20h, 20,800~33,800원
- 광주유스퀘어 ~ 장성터미널: 25번홈(06:15, 06:45 ~ 20:50, 21:40, 22:30), 2,400원
- 장성터미널 ~ 사창리행 노선버스: 상무대 정문 하차(봉정사입구로 봉정사까지 도보 18분 소요)
※ 장성터미널에서 광주유스퀘어발 첫 직행버스에 맞춰 사창리행 노선버스 출발
- 사창리 ~ 봉정사: 택시(10,440원)
* 고막원천/영산강 합수점에서 서울 올라오는 길
- 석관정 ~ 두만마을: 도보
- 석관정 ~ 함평역: 다시면 택시 010-9696-0036
- 함평역 ~ 익산 ~ 서울역: 07:40, 16:46, 18:00, 5h, 41,100원
- 석관정 ~ 다시터미널: 택시 8,000원
- 석관정입구(동당교차로) ~ 다시터미널(19:25) ~ 나주터미널(19:25, 20:18, 20:50, 21:37) ~ 유스퀘어터미널
- 다시터미널 ~ 광주유스퀘어 직행: 07:55, 10:10, 10:30, 11:55, 13:25, 15:25, 18, 20:25, 0.50h, 5700원
- 광주유스퀘어터미널 ~ 동서울: 12:40, 13:20, 14, 14:50, 17, 19:10, 19:50, 21:20, 3.30h, 22,500~33,300원
- 광주유스퀘어터미널 ~ 센트럴: 19:45, 20, 20:10, 20:20, 21, 21:15, 22:30, 23:20, 24, 3.20h, 30,800~4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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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내장산 순창새재에서 분기한 영산기맥이 목포로 향하던 중 영광군과 장성군의 경계인 태청산에서 남으로 한 갈래를 다시 내 보내며 출발하여, 전반 왼쪽에 병풍지맥 후반 오른쪽에 철성지맥과 함께 나주시와 함평군의 경계인 고막원천이 영산강으로 합수하는 지점에서 마무리 짓는 태청지맥은 잔디와 숲의 고장 장성에서 야산지대인 함평을 걸쳐 평야지대인 나주로 내려가며 광주광역시의 좌측면을 스쳐 지나기에 광주광역시와 장성, 함평 그리고 광주광역시와 함평, 나주가 만나는 삼광시군봉 두 곳을 지난다. 함평은 평야지대라 멀리 내다보고 후손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으리란 바람으로 입향한 파시조가 유독 많고 나주 또한 본관이 나주인 성씨가 67개가 될 정도로 '나주에서 양반 자랑하지 말라'는 말처럼 세를 과시했던 동네이다. 고려의 자매도시이기도 한 나주에는 태조 왕건과 연관된 스토리가 많다. 백룡산을 내려서면 1번국도가 지나는 나주시 다시면에 접어들어 지맥을 차지한 3M회사를 우회하며 다시면 소재지 월태리에서 잠시 숨을 돌려 후반부를 마무리 지을 수 있다. 지대는 낮지만 작은 고추가 매운 것처럼 조망이 터지는 산봉을 자주 만나며 병풍산과 국사봉이 두개씩 있다. 가시 잡목이 드세 맥꾼들에게는 겨울에 하는 지맥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태청지맥의 합수점은 철성, 옥룡지맥과 인접하여 가까이 두 지맥을 예약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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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영광군 대마면(大馬面)
군의 동부 끝단에 위치한 면으로 면소재지는 월산리이다. 본래 영광군 지역으로 대안면이라 하여 세평리·섬암리 등 21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마촌면의 33개 리와 도내면의 우평리, 묘장면의 창동리, 전북 무장군 장자산면의 자석리, 춘산리 일부가 편입되고 대안면과 마촌면의 이름을 따서 대마면이 되었다. 동쪽은 장성군 삼계면(森溪面), 서쪽은 영광읍과 묘량면(畝良面), 남쪽은 장성군 삼서면(森西面), 북쪽은 전북 고창군 대산면(大山面)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면의 남동쪽은 호남정맥의 기맥이 이어 내리고 고성산(古城山, 545m)·태청산(太淸山, 593.3m), 월랑산(458m) 등이 솟아 산지를 이루고 있어 북쪽과 서쪽으로 갈수록 지형이 낮아진다. 소하천이 흐르는 성산리·홍교리·월산리 일대에 발달한 충적지를 중심으로 논농사가 활발하다. 원흥리에 영광정렬각이 있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이며 특용작물로 고추와 잎담배 재배가 성하고, 사과와 감 등의 과실도 재배한다. 교통은 면의 동북부의 고성산과 월랑산 사이의 속칭 게재를 통해 장성군과 전북을 잇는 지방도가 통과한다.
♤ 죽동(竹洞) 마을/ 전남 영광군 대마면 송죽리
영광군 대마면 송죽리 죽동마을은 동쪽으로는 태청산이 위치하며 대부분의 지역이 낮은 산지와 평지로 되어 있고 남쪽으로 묘량천이 흐른다. 자연마을로는 연동, 송촌, 죽동 등이 있다. 연동은 마을 앞에 있는 조그마한 소류지에 연꽃이 많아 마치재를 넘어 영광과 장성을 오가는 장사꾼 및 행인들이 다른 연꽃에 비해 유난히 아름다워 연동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송촌은 마을 뒤쪽에 송림과 죽림이 울창하여 경관이 좋아 송촌(松村)이라 불린다.
죽동은 마을 뒷산을 육봉, 옆산은 주봉, 마을터를 대실이라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대나무가 많음을 상징하여 죽동(竹洞)이라 하였다. 들머리에서 초반에 도로를 따라 올라가다 오른쪽 인삼밭을 지나는데 직전에 오른쪽으로 올라가거나 태청산 주차장에서 올라가는 것이 낫다.
♤ 전남 장성군 삼계면(森溪面)
전남 장성군 남서부에 있는 면으로 대부분의 지역이 500m 내외의 구릉성산지로 면의 중앙으로 남류하는 중심적 하천이 삼계(森溪)천이고, 그 이름을 따라 면 이름이 태어났다. 삼계천은 ‘삼림이 울창한 시내’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그 동쪽으로 나란히 남류하는 하천 역시 ‘숲이 우거진 시내’의 의미를 안은 평림(平林)천이다. 두 개의 하천 이름이 숲에서 연유하고, 지역을 상징하는 하천의 이름을 따라 면 전체로 확대됨으로써, 숲의 본고장임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평림천·삼계천 등이 산간을 흘러 남류하며, 하천 양안에 발달한 충적지가 농경지로 이용된다. 면의 남부 경계에 있는 함동저수지는 농업용수지로 이용된다. 쌀·보리 등의 생산과 잎담배·과수 재배가 활발하다. 이곳은 전라 남·북도를 가로지르는 호남정맥의 분수령을 뒤로 한다. 면 경계를 따라 고성산(546m)·태청산(539m)·수련산(541m) 등 험준한 산지가 솟아올라 울창한 숲의 근거지를 마련하며, 조선조에 전곡 등 조세 수송을 위한 산창(山倉)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옛날 같으면 숯과 목재 등 산림(山林)의 활동 기반에 알맞은 곳이지만, 최근에는 초지를 이용한 낙농업이 활발하다. 산지에 기초한 환경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마찬가지다. 서쪽으로 인접한 면 이름은 ‘숲의 서쪽’을 의미하는 삼서(森西)면이다. 유적으로 기영정·관수정 등이 있다. 교통은 담양-함평 방면의 국도가 동남부를 가로지르고 장성∼함평을 연결하는 국도와 고창군 성송면과 대산면을 각각 연결하는 지방도가 있어 편리하다. 상무대가 이전해 오면서 신도시 형태로 개발되고 있다. 행정구역은 사창·월연·주산·상도·능성·발산·수옥·덕산·수산·죽림·생촌·부성·화산·신기·내계 등 15개리가 있다.
봉정사에서 출발한다면 약 1.5km를 진행하여 539.4m봉을 지나 영산기맥에 합류하고, 영산기맥을 따라 약 1.2km를 더 진행하여 태청산으로 오릅니다. 태청산 정상에서 함동저수지를 기준으로 앞쪽으로 태청지맥이 흐르고 장성시내 뒤쪽 멀리 병풍지맥이 바라보입니다.
♤ 태청산(太淸山, 593.3m)/ 4등삼각점(고창 469/ 2010 재설)/ 군면계(영광군 대마면 - 장성군 삼서면)
태청산은 전남 영광군 대마면과 장성군 삼서면, 삼계면 사이에 걸쳐 있는 산이다. 내장산에서 호남정맥을 벗어나 남서쪽으로 뻗은 능선에 입암산(626m), 방장산(743m), 문수산(606m), 고성산(546m)과 함께 솟아 오른 산이며 영광군 내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큰 바위가 있다고 해서 석태산(石太山) 이라고도 한다. 광주에서 이전한 육군상무대(보병,포병,공병,기갑,화학학교)와 활공장을 갖춘 산이라서 그런지 어려운 산은 아니지만 결코 쉬운산도 아니다. 정상에서는 장성군, 함평군 등은 물론 인접 전북 고창군까지도 선명하게 보인다. 태청산을 중심으로 왼쪽 고성산, 고산 넘어 방장산, 백암산, 그리고 우측으로는 병풍산, 불태산이 조망되고 남쪽으로는 금성산, 월출산, 그리고 가까운 불갑산까지 그야말로 파노라마 영상을 돌려보는 것처럼 선명하다. 오른쪽으로 광주 무등산도 시야에 와 닿고 멀리 염산과 백수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으며 대마면 곡창지대의 젖줄이기도 한 태청산은 수량이 풍부하고 물 맛이 빼어나기 때문에 '대마막걸리'라는 명주가 생산되는 곳인데, 그래서 영광에서는 대마 막걸리 맛을 보지 않고 다른 술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할 정도라고 한다.
♤ 570m봉/ 헬기장/ 태청지맥분기봉/ 삼면봉(장성군 삼서면, 영광군 대마면 → 장성군 삼계면)
전망대쪽으로 계단을 조금 내려선 헬기장이 태청지맥 분기점이다. 준희선생님 태청지맥분기점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태청지맥은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와 삼계면 신기리의 경계를 따라 시작한다. 급경사에 너덜지대, 암릉지대라 길찾기가 애매하다.
♤ 전남 장성군 삼서면(森西面)
전남 장성군 남서부에 있는 면으로 북부의 태청산(593m)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200~500m 내외의 낮은 구릉지와 평야를 이루고 있으며, 곳곳에 월악산(164m)·삼봉산(150m)·낭월산(185m) 등이 솟아 있다. 조선 시대 영광군 삼남면과 외서면에 해당되었다. 백제 때 소비혜현에 속하였으며, 신라 때 삼계현(森溪縣)으로 명칭이 바뀌어 갑성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1018년(고려현종 9) 영광군에 내속되었다. 1914년 삼남면과 외서면을 통합하여 삼서면이라 하였으며 장성군에 편입되었다. 『지승』에서 옛 서삼면 일대는 영광군 소속의 외서면과 삼북면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지형도』에는 삼서면이 나온다. 삼봉산(三峰山, 163m)을 중심으로 북동쪽의 삼계면과 경계를 이룬다. 장암산(318m)을 경계로 영광군 묘량면과 경계를 이룬다. 삼서면은 고막원천의 상류지역으로 남쪽으로 함평군 월야면과 접하고 있다. 대도천, 유평천 등 소하천은 고막원천에 합류되어 함평으로 유입된다. 황룡강 수계와는 다른 곳이다. 하천유역에 해당하는 소룡리·수해리 일대를 중심으로 농경지가 분포한다. 쌀·보리 생산과 잎담배 재배, 누에치기가 활발하다. 장성-함평을 연결하는 24번국도가 면 중앙을 지나고 상무대가 자리하고 있다. 유적으로는 삼계리에 계산사, 보생리에 만곡사가 있다. 수양리에 있는 함동저수지는 붕어 낚시터로 유명하다. 관할리는 면 소재지인 대곡(大谷)리를 포함해, 삼계(三桂)·학성(鶴星)·대도(大都),소룡, 수해, 우치, 금산, 석마, 보생, 홍정, 두월, 수양, 유평 등 14개의 법정리이다.
♤ 장성군 삼계면 신기리(新基里)
삼계면 신기리는 사선, 신정, 유천 세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원래 영광군 삼북면에 속했으며 1789년 발간된 "호구총수"에 검손리, 신정, 사선동이 나온다. 1914년 침천, 신정, 백기, 사선을 신기리라 하여 장성군 삼계면에 편입시켰으며, 사선동은 상무대 시설지역에 편입되어 1990년에 없어졌는데 당시 17호가 살고 있었다.
♤ 사선치(242m)/ 헬기장
폐헬기장에서 1분을 내려서면 만나는 희미한 등로삼거리에서 급우틀로 내려선다. 뚜렷한 등로따라 직진하면 알바이다. 10분쯤 내려서면 묵묘가 나오고 여기서 좌틀로 휘어져 급경사 등로를 내려간다. 슬랩지역과 너덜지대를 지나 통신시설이 있는 군부대울타리에 닿는다. 사선치는 사선마을로 넘나들던 고개인데 부대 안으로 편입되었다.
♤ 장성군 삼계면 신기리 사선마을
신기리에는 10여 년 전 없어진 마을이 하나 있다. 신정 앞 고라실 부근에 있었던 사선마을이 1990년 상무대 부지에 편입되어 사라졌다. 당시 사선마을의 호수는 17호 였다고 한다. 사선마을 자리엔 지금 상무대의 골프연습장이 들어서 있다. 울타리와 헤어지고 비포장도로를 따라 화산신기길로 향하며 앞쪽으로 또 다른 태청산(265m)이 보인다. 이후로도 도로를 따라 약 2km를 우회한다. 화산신기길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갈라지는 신정로 2차선 도로를 따른다.
♤ 화산신기길
군부대 철책을 따르다 봉정사가는 소로길과 만나고 군인관사 후문을 지나 정문으로 나갑니다. 상무대 정문을 지나 철책을 내려서면 논두렁이고, 다시 철책을 따라 건너편 삼각점봉에 올라 마루금을 회복한다.
♤ 육군보병학교울타리/ 나를 따르라!
급경사 암봉 사면을 따라 내려서고, 묵묘를 지나고, 군부대를 만나 울타리를 따라 왼쪽으로 크게 우회한다. 면계를 따라 마루금으로 직진하면 0.9km 정도인데 군부대를 돌아가느라 삼계면으로 들어서서 무려 4km를 우회하여 마루금을 회복한다. 사계청소를 해둔 울타리를 따라 약25분 진행하면 포장도로와 만나 우틀하고 상무대 정문을 지나 202.9m봉 입구까지 비산비야 도로로 진행한다.
장성터미널에서 광주에서 오는 첫차에 맞춰 상무대 정문 봉정사입구(사창리행)로 가는 노선버스가 있습니다. 상무대정문에서 봉정사까지는 도보로 약 18분 소요됩니다.
♤ 봉정사(鳳停寺) 입구
봉정사 오르는 양회임도이다. 봉정사로 오르는 도로를 만나 도로를 따라 상무대 동문까지 걸어 나간다. 봉정사는 한국불교태고종에 속해 있는 사찰이다. 불덕산 자락에 위치한 이 사찰은 주변 산세가 "봉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하여 봉정사라 하였다고 한다. <장성군마을사>에 ‘1402년(태종 2) 창건되었다고 구전된다.’라는 기록이 있지만 경내에 고려 중기에 조성한 장성 봉정사 석조여래입상(長城 鳳停寺 石造如來立像,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08호)은 대좌(臺座)와 불신을 각기 다른 돌로 만들었다. 일부에서 심한 파손을 보여주고 있으나 현 봉정사의 변천 과정을 말해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만든 시기는 고려 중기로 여겨지며 인근에 있는 영광신천리3층석탑(보물 제504호)과 함께 당시의 조각사 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하였는데 1643년(인조 21) 5월 봉정사에서 개간한 금강경 목판본이 발견된 것을 보면 그때 절이 중건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전쟁 때 불에 탔다가 다시 복원되었다. 대웅전·삼성각·요사 등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규모이다.
♤ 신정로/ 신정마을
신정로를 계속 따라도 되지만 지름길로 오른쪽 농로를 따라 신정로와 다시 만나는 건손교에 닿고 건손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 양회임도를 따라 202.9m 삼각점봉으로 오른다. 삼계면 소재지에서 서북쪽으로 2.5km 떨어진 신정마을은 건손, 신정, 방곡(침천)마을을 합친마을로써 해발 110m의 동남향 마을이다. 태청산의 남동지맥인 서당터를 등진 건손과 건치봉을 등진 신정마을이 뒷골을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으며 방고개산 아래 방곡이 있다. 신정마을 뒤 봉정산 계곡에서 내려온 물과 태청산에서 내려온 물이 마을뒤 상둣보에서 만나 마을앞의 신기저수지를 이룬다.
군부대 울타리가 가로막는 바람에 0.9km 거리를 약 4km 돌아돌아 왔습니다.
♤ 202.9m봉/ 4등삼각점봉/ 삼계면 신기리
군부대 울타리를 우회하고 건손교를 지나 급우틀하여 태청지맥 마루금으로 다시 달라붙는다. 잡목이 자란 벌목지를 지나 약700m 거리의 202.9m봉을 다녀온다. 맨발대선배님과 백두산악회 산패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삼각점은 +방향표시만 보이고 흙에 묻혀 알아볼 수가 없다. 울타리를 따라 우회한 맥길을 끝까지 가보고 돌아온다.
♤ 유천길/ 장성군 삼계면 신기리 유천(柳川) 마을
잔등에 장승이 있어 장승배기로 부르다가 마을 앞들에 버드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현재는 유천(柳川)이라고 부른다. 태청지맥은 계속해서 세장산비가 자주 나오는데 세장산이란 중종묘지로 묘똥밭, 집안의 공동묘지를 말한다.
♤ 유천재
202.9m 삼각점봉에서 되돌아 내려 편백나무 묘목지를 지나고 우틀로 잡목과 가시지대를 헤치면 묘지를 만난다. 농로 왼쪽이 과수원인 양회임도를 따라 내려서면 장성군 신계면 신기리 유천마을의 2차선 도로인 신정로와 다시 만나는 유천재 사거리에 닿는다. 바로 중종 묘지로 이어지는 돌 계단으로 오른다.
♤ 197.3m봉/ 면리계/ 삼계면 신기리 - 삼서면 삼계리
소나무 가지에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매달려 있다. 오름길은 괜찮은데 내림길 쪽은 잡목과 산죽이 우거진 흔적없는 길이다. 남서쪽 멀리 해보면 들판 뒤로 불갑산으로 이어진 영산기맥과 그 왼쪽 벌판으로 흐르는 낮은 경수지맥을 방향만 가늠해 본다.
♤ 어랑(漁浪) 고개/ 삼봉로/ 장성군 삼서면 삼계리 어랑마을
묘지를 만나 전남 장성군 삼계면과 삼서면을 잇는 2차선 도로인 어랑고개로 내려선다. 장성군 삼서면 삼계리 어랑마을은 삼서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4km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삼서면과 삼계면의 경계를 이루는 태청산의 동남지맥인 계량산(190m)과 망월산 서쪽기슭에 자리잡은 남향 마을이며, ‘문안등’, ‘서당거리’, ‘우데미’, ‘아래데미’ 등 4개의 뜸으로 이루어졌다. 마을 남쪽에 삼봉산이 솟아 있고 망월산에서 발원한 냇물이 어랑 안골들을 지나 남쪽 수해리로 흐르며, 북쪽 망월산을 넘으면 삼계면 신기리, 동쪽 만선봉을 넘으면 삼계면 월연리가 인접하고, 냇 건너 동남쪽에 초정마을, 서남쪽에 월계리가 인접해 있다. 어랑마을의 형국은 배형국이라 한다. 마을에 뜸이 많고 집터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어 마치 물고기가 잔물결을 치며 노는 형국이라하여 어랑(漁浪)이라 했다고 한다. 풍수설에 의하면 행주형(行舟形)으로 배가 떠나면 마을의 재물이 빠져나간다고 하여 이 마을에서는 가는 배를 잡아두기 위해 매년 보름날 줄잡아댕기기를 하고 제를 지내며 당산에 줄을 감아준다. 어랑고개는 그 마을 위에 있는 고개를 말한다. 차량은 뜸하고 도로를 건너 동해정씨 합동제단이 있는 묘지로 오른다.
♤ 213.9m봉/ 면계/ 삼리봉(삼서면 삼계리, 삼계면 신기리 → 사창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오르막은 잡목이고 내리막은 괜찮은 길이다. 조금 더 진행하다 지맥의 왼쪽이 사창리에서 월연리로 바뀐다.
♤ 149.8m봉/ 삼서면 삼계리 - 삼계면 월연리
임도 수준의 등로를 걷다가 등로 옆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는 봉우리 같지 않은 봉우리이다.
♤ 삼봉산갈림길/ 면계/ 삼리봉/ 삼계면 월연리, 삼서면 삼계리(三桂里) → 대곡리(大谷里)
능선상 149.8m봉에서 2~3분 지나니 몇개의 산행 띠지들이 걸려있고 등로는 왼쪽으로 꺽여 내려가는데 오른쪽인 남서 방향 삼서면으로 마루금에서 0.6km 벗어난 삼봉산과 152.1m의 삼각점봉이 있어 다녀오기로 한다.
♤ 삼봉산(163.1m→0.5k), 왕복 1km/ 삼서면 삼계리 - 삼서면 대곡리
백두산악회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고 무한도전 띠지도 있다. 삼봉산 아래에는 삼봉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남쪽으로 3분 더 내려서면 152.1m의 삼각점봉이 있다. 삼각점도 인식하지 못하고 조망도 없지만 청주한공 무덤이 있는데 삼봉산의 기를 받았는지 부인을 셋이나 두었다.
♤ 24번국도/ 삼봉로/ 효사랑요양병원
삼봉산에서 다시 면계인 갈림길로 되돌아 나와 우틀로 등로가 희미한 잡목길을 내려서면 임도를 만나고 효사랑 요양병원 내부를 통과하여 24번 국도에 닿고 도로를 넘어 언덕으로 진행한다. 오른쪽으로 수양사거리다. 효사랑요양병원은 오래전 화재 이후로 운영하지 않고 폐쇄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잘 정비된 등로가 생동마을 앞 도로로 이어진다.
이 지역 특산물인 잔디와 과수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 수양사거리/ 장성군 삼서면 수양리(首陽里)
24번 도로인 수양사거리에 도착하고 왼쪽 삼서면 대곡리 방향으로 진행한다. 수양리는 월봉, 중수, 하수마을로 이루어졌다. 옛날 영광군 삼남면 지역으로, 1914년 중수,진천,도봉,월봉,하수,월송,양곡,하백 일부와 삼계면의 백산,부연 일부지역을 수양리로 병합하여 장성군 삼서면에 편입했다. 현재 1리 월봉, 2리 중수, 하수로 편성되었다.
♤ 학산(鶴山)/ 해삼로
해삼로를 따라 전남 장성군 삼서면 대곡리 학산버스정류장을 지나자마자 사각정자 있는 삼거리에서 좌틀하여 해삼로를 따라 산쪽으로 오른다. 대곡리 마을 잔디를 지나 만나는 공장과 과수원 끝이 들머리이고, 면계를 따른다.
♤ 장성군 삼서면 대곡리 한실마을
한실마을은 장성군 삼서면 대곡리의 자연마을로 논과 들이 넓고 낮은 산이 많아 골짜기가 많으며 큰 골짜기 안이 된다 하여 한실 또는 대곡이라 부른 것이라 한다. 산 아래로 바짝 공장이 들어서 있다.
태청지맥이 삼서면과 삼계면의 경계를 벗어나 여기부터 좌우 모두가 삼서면 내안으로 들어섭니다.
♤ 충의숭모단 복원비/ 애곡지사 추모단/ 면계/ 삼리봉(삼서면 대곡리, 삼계면 월연리 → 삼서면 수양리)
능선으로 올라 북쪽 월봉마을에서 오르는 길을 만나 남쪽으로 진행하면 지맥의 좌우가 온전하게 삼서면으로 진입하고 산중에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곳에 애국 유림들이 모여 일제를 규탄하였고,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자 지방 애국 유림이 모여 주권회복을 외치며, 울분을 참지 못하고 땅을 치며 광무 황제를 향해 방성대곡한 곳이다. 1919년 1월 고종(광무황제)이 일국에 의해 독살 승하하자 이곳에 망곡단을 축단하고 인산(국장)일까지 902일 산통곡 북향하였으며 1926년 4월 순종(융희황제)이 승하하자 이곳에 융희황제 숭모단향비를 같은 자리 왼쪽에 세우고 함께 향사하였다. 왼쪽으로 수양저수지를 바라보며 삼서면 대곡리와 수양리의 경계를 따른다.
♤ 태산(太山, 206.9m)/ 테미산/ 삼서면 대곡리 - 수양리
백두산악회 산패가 나무에 매달려 있다. 정상에 소쿠리명당이라는 묘가 있다. 소쿠리에 물을 담아둘 수 없듯이 사방이 막힌듯 음푹하게 꺼져 있지만 물빠짐이 좋은 명당자리이다. 지맥길은 좌틀로 90도 꺽어 쉼터 정자도 있고, 신우대(조릿대) 사이로 잘 정비된 등산로를 따라 내려선다.
♤ 소쿠리 명당
소쿠리명당은 소쿠리 같이 생겼고 아무리 많은 양의 비가 내려도 절대로 물이 고이지 않는 명당을 말한다. 그 유래가 적혀 있는데 내용을 보면 여름에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신기하게 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하며 삼서면 수양리 중수마을 상산김씨가 이곳에 분묘를 함으로써 소쿠리 명당이라 이름하게 되었다. 소쿠리 명당에는 주민들의 구전을 통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 탁발승이 김씨 종가집에 들러 시주를 하였는데 부호인 종가집에서 시주를 궁색하게 했던 모양이다. 스님이 괘씸하게 생각하여 대문을 나서면서 이 집에 명당이 있는데 이 명당이 동서남북이 막혀서 운이 들어오지 못한다 하고 탄식을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종가집에서는 운을 받기위해 봉분의 앞을 허물었는데 이후로 가문이 기울어지고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종가집은 고심끝에 다시 봉분의 끝을 막았고 머지않아 가문의 영광을 다시 회복 하였다고 한다. 탁발승은 소쿠리명당을 알고 있었을까.
♤ 제당산(159.7m)/ 4등삼각점(고창 404/ 1984 재설)/ 삼리봉(삼서면 대곡리, 수양리 → 보생리)
왼쪽으로 삼계면과 삼서면의 경계에 있는 함동 수양저수지가 보인다. 벌목을 하고 편백나무를 식재해서 잡목이 많다. 오른쪽으로 잡목을 뚫고 5m쯤 더 가서 지도상 제당산으로 표시된 158.8m봉을 들른다. 밤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달려 있다. 삼각점은 판독하기 어렵다.
♤ 158.1m봉
이정표에서 인지마을 쪽으로 조금 들어가니 약간의 거리를 두고 준희선생님의 158.1m봉 산패가 설치되어 있다. 생동마을 방향으로 가며 삼서면 보생리 내로 접어든다.
♤ 생동고개/ 태산로/ 제당산입구 등산로표시/ 4번도로
잔디밭을 지나고 전남 장성군 삼서면 보생리 2차선 도로인 생동고개에 내려선다. 인근에 생동마을이 보이고 도로를 건너서 공장주택을 끼고 왼쪽으로 진행하여 잔디 재배지를 지나고 통신탑이 설치된 봉을 넘어서면 잡목구간이 이어진다. 전남 장성군은 전국 잔디 유통량의 60~70%를 점유한다. 역사가 40년이 되었고, 잔디 식재 면적이 약 400만평으로 전국에서 가장 넓다. 잔디는 다른 과일과 농산물에 비해 재배가 덜 힘들지만 넓은 땅이 필수인지라 주로 협동조합으로 농사를 짓는다.
♤ 장성군 삼서면 보생리 생동마을
생동마을은 장성군 삼서면 보생리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곳으로 지석묘가 있고 백제시대 석실분이 있으며 오래 전 남씨와 정씨가 살았다고 한다. 1460년경 하음봉씨가 단종복위 사건때 낙담하였다고 하며 그후 1900년대 초 영월신씨가 들어왔고 조금 후 함평이씨가 들어왔으며 해방 후 60여 호가 살다가 6·25때 불갑산에서 40여명이 죽었다. 동명유래는 가뭄에도 물이 많아 또는 앞산이 시체형이기 때문에 생골이라 했고 유물유적으로는 지석묘 3기의 대형고분이 있다.
♤ 전도고개/ 보생로/ 보생리 - 석마리(石馬里)
까칠한 잡목지대를 내려서니 장성군 삼서면 보생리 전도마을 표지석이 있는 입구 삼거리에 닿는다. 도로는 왼쪽으로 돌아 전도마을로 나가고 지맥은 오른쪽으로 임도길을 따라 과수원을 지난다. 보생리와 석마리의 경계이다.
♤ 91.4m봉/ 4등삼각점(나주 419/ 1984 재설)/ 과수원
왼쪽으로 감나무과수원 안쪽 최상단부에 판독하기 어려운 삼각점이 있다.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감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고 법광대선배님 띠지도 나무에 걸려있다.
♤ 보생로/ 장성군 삼서면 석마리
임도에서 우틀하여 창고인지 막사?옆 밭두렁길로 내려서고 축사 입구로 나가 축사 앞으로 진행한다. 보생리와 석마리의 경계를 따른다. 장성군은 공식적으로 1982년부터 천연 잔디를 생산해 왔다. 잔디는 논밭에서 재배하지만 임산물로 취급한다. 전국 잔디 생산량의 70%를 차지하는 최대 잔디 생산지로 ‘잔디 메카’로 불린다.
♤ 유리자연농원/ 삼리경계면(석마리, 보생리 → 금산리)
녹색한우 유리자연농원 대형축사 입구에서 보생로 아스팔트를 따라 4분쯤 진행하다가 오른쪽으로 꺽어지는 곳에서 왼쪽 수렛길로 들어선다.
♤ 금산로/ 태양광발전시설/ 석마리 - 금산리
농기계 창고 앞마당으로 5번군도(산본로, 2차선도로)를 만나서 직진하며 금산리와 석마리의 경계를 잠시 걷다가 금산리로 진입한다.
♤ 안바랭이골
임도길에서 축사로 이어지는 둑을 따라 진행한다. 잔디농장과 태양열발전시설을 지나는데 잔디 재배지가 상당히 광활하다. 전국 잔디의 70% 정도가 장성군 삼서면에서 생산된다. 이제는 장성 잔디의 고급화와 관광자원화를 꾀하고 있다고 한다.
♤ 73.9m봉
등로가 크게 꺽이는 길주의 지점이다. 해피마당쇠님 띠지가 걸려있다. 가선대부 김해김공 묘 앞의 양회임도를 건너 월악산을 보며 수레길을 따른다. 월악산으로 이어지는 비산비야의 마루금은 잔디밭과 과수원으로 분포되어 산행이라기보다는 산책하는 기분이 든다.
태청산에서 분기한 태청지맥이 장성군 삼계면과 삼서면을 통과하여 함평군과 만나는 지점입니다.
♤ 계봉산갈림길/ 계봉산(桂鳳山, 116.9m→1.4k)/ 군면리계/ 장성군 삼서면 금산리 -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계봉산은 형세가 날아가는 봉황의 형국으로 오른쪽 바로 앞으로 마루금에서 약 1.4km 벗어나 있다. 임도길로 월악산 오름길은 잡목길이고 능선에 오르면 일반등산로를 만나는데 장성군과 함평군의 경계이자 계봉산갈림길이다. 왼쪽에 묘들이 있다.
♤ 함평군 월야면(月也面)
월야면은 함평군에 위치한 면으로 백제시대에는 다지련, 신라시대에는 다기현, 고려와 조선초에는 모평현에 속했으며 1409년(태종 9) 함풍현과 모평현이 합해져 함평현이 되면서 함평현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지금의 월야면 지역에는 월악, 갈동, 대야면이 있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월악, 갈동, 대야면이 합쳐 월야면이 신설되며 약간의 지역간 조정이 있게 된다. 용월 양정리에 해보면 성산 일부가, 정산리에 해보면 문암일부가, 예덕리에 삼서면의 반학 일부가, 월악리에 죽산 일부가, 외치리에 삼가면의 일부가 편입되고 편출된 지역은 월악면 용촌 일부가 해보면 용산리로, 대야면의 복룡 일부가 해보면 금덕리로, 갈동면 내기 일부와 월악면 외치 일부가 광산군 삼도면 양동리로, 월악면 고와, 복만 일부가 본양면 덕림리로, 월악면 주곡 일부가 삼서면 금산리로, 대야면 연정, 용계, 신월, 신평, 팔기 전역이 영광군 묘량면 연암리로 편출되었다. 월야면이라는 이름은 월악과 대야에서 한자씩 따서 월야면이 되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연접 생활권이라 2,3차 산업의 발달 여지가 많고 광주광역시의 배후 기능을 할 수 있는 전원주택 단지로 적합하며 인근 도시와 연계한 역사, 문화, 자연관광 휴양지 조성에 적합하다. 또한, 국도 22호선의 확장개통으로 상무신도시와 10분대 시대를 열면서 지역경제 활성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 갈림길삼거리/ 군면계/ 삼리봉(장성군 삼서면 금산리,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 → 외치리)
갈림길삼거리에서 지맥 오른쪽이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서 외치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월악산은 오른쪽으로 약100m 벗어나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와 외치리의 경계에 있어 다녀온다.
그닥 높지않은 지대에 비해 조망이 훌륭하게 나옵니다. 월야면과 해보면을 바라보며 해보 뒤쪽으로 영산기맥이 흐르는 불갑산 연실봉을 찾아보고, 왼쪽 나산면 뒤쪽으로 천주봉도 보입니다.
♤ 월악산(月岳山, 167.5m)/ 2등삼각점(나주 22/ 1995 복구)/ 월악정/ 월악산성(月岳山城)
월악산은 월악리 동산 마을의 북동쪽에 자리하고 월야면 월악리와 외치리의 경계에 있는 자그마한 산이다. 오수산과 함께 남북의 뚜렷한 산지로 보이는 산으로 태청지맥의 산줄기를 가르는 고막원천의 발원지이다. 1872년 지방지도(함평)의 월악면에 월악산으로 보이는 서쪽의 높은 봉우리가 산명은 표기되지 않았으나 산세가 뚜렷이 나타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함평지에 동쪽으로 40리 월야면에 있고 기가 모여 엄숙히 솟았고 인재가 뭉쳐 나오며 명랑한 숙기(淑氣)가 완연히 달과 같기에 월악산이라 한다고 수록되어 있다. 조선지지자료의 월악면에 월악산은 우리말로 달악산이며 내동리 뒤편에 있다고 기재되어 있고 조선지형도에는 지명이 나타나지 않는데 일설에는 함평노씨 7세손인 신이 고려 말 벼슬을 하다가 나라가 망하자 이곳에 와 살면서 달밝은 밤이면 산에 올라 송악(松岳)을 바라보며 고려의 임금을 그리워하여 월악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영산기맥 마루금 상의 영광 불갑산이 조망되고 왼쪽으로 분기되어 나가는 철성지맥 라인도 조망된다. 월악산성은 이 산의 정상 부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이다. 장성군 삼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주위에 완만한 구릉들이 펼쳐져 있어 사방의 전망이 잘 조망되어 방어를 하는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월악산성은 축성 연대나 폐성 연대, 그리고 규모에 관해서 전해오는 기록이 전혀 없어 산성의 연혁을 알 수 없으나 주변의 고분군 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여진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600m이며 높이와 폭은 구간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높이 5∼6m, 폭 6m이고 성의 서벽과 북벽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다시 삼리봉인 갈림길로 돌아와 우틀하여 3시 방향으로 내려선다.
태청지맥에서 광주광역시와 만나는 삼광군봉이 두군데 있는데 별다른 특징이 없다는게 특징인것 같습니다.
♤ 삼광군봉(함평군, 장성군 → 광주광역시)
월악산에서 다시 삼리봉인 삼거리로 되돌아 나와 장선백이산(53.9m) 분기점에서 우틀하며 산죽지대를 잠깐 지나고, 월정사갈림길 쪽으로 다시 우틀하는 삼거리 지점이 지맥의 왼쪽이 장성군 삼서면 금산리에서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으로 바뀌는 삼광군봉 지점이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德林洞)
덕림동은 광산구 서북부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후기 나주목 장본면에 속했던 지역이다. 1906년 함평군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함평군 장본면 을림리, 덕산리, 복만리, 고암리, 학동리, 복암리, 금동리와 월악면 고와리, 복만리 일부를 병합하여 나주군 본량면 덕림리가 되었다. 1949년 나주군 평동면, 삼도면, 본량면이 광산군에 편입되면서 광산군 본량면 덕림리가 되었다. 1988년 광주직할시의 구역 확장으로 전라남도 광산군이 광주직할시로 편입되고 광산구가 신설되면서 광주직할시 광산구 본량출장소 관할 덕림동이 되었다. 1995년 광주직할시가 광주광역시로 승격되면서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본래 평림천과 그 지류가 합류하는 지역이었다. 덕림동의 자연마을로는 을림마을, 복만마을, 수성마을, 금동마을, 학동마을이 있다. 을림마을 앞이 평림천과 평림천에 흘러드는 작은 지류가 합류하는 지점이었으나, 경지 정리를 하면서 평림천과 합류하는 작은 지류가 없어졌다고 한다. 을림마을 서북쪽에 자리한 복만마을은 행정동인 본량동 소재지 관내에서 최서단에 있으며 전라남도 함평군 월야면과 경계를 이룬다. 문화재로는 광주광역시 기념물 범세동선생묘가 있다.
♤ 116.5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사람주나무에 매달려 있다. 116.5m봉에서 신우대 숲길로 무작정 내려서면 알바이다. 잠깐 내려서다 좌틀하여 신우대 숲속으로 들어서며, 정비된 신우대밭을 두군데 통과하고, 정비가 되지않은 신우대밭도 두군데 통과한다. 대단한 신우대(조릿대)밭이다.
가까운 곳에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가 작별하였다는 용진산(聳珍山, 351m)이 있고, 동림동과 왕동이 있어서 견훤대와 왕조대를 찾아보았습니다. 나주공략에 성공한 왕건은 차츰차츰 군사를 내륙으로 진격시켜, 영산강과 서창들녁 광주천 하류의 너른 들에서는 왕건과 견훤 군사들이 수많은 전투를 치렀습니다. 왕건은 지금의 서창 들녘 쪽 산(사월산 혹은 백마산)에 진을 치고 견훤은 운암동 일대 산(대마산)에 군사를 배치했는데 왕건이 진을 친 곳을 왕조대(王祖臺, 王建臺), 견훤의 군사들이 진을 쳤던 곳을 견훤대(甄萱臺)라 부릅니다. 광주전투는 사월산(獅月山)과 대마산의 중간 지점인 지금의 치평동(상무대)일대에서 벌어집니다.
♤ 견훤대(甄萱臺)/ 광주서 건국 기틀 마련했던 견훤, 광주가 잃어버린 언덕
견훤은 전주나 상주에 못지않게, 그리고 원주보다는 훨씬 더 역사적으로 광주와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견훤은 광주에서 처음 신라에 반대하는 세력을 키웠고 사실상 후백제 건국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견훤이 광주 북쪽에서 태어났다는 설화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왕건에 맞서 최후까지 후백제의 명맥을 고수하고자 했던 지역도 광주였다. 조선시대 광주사람들은 견훤대와 방목평을 통해 견훤을 기념하고자 했다. 문제는 그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지금 이 견훤대와 방목평의 위치를 놓고 아직도 광주사람들은 설왕설래를 계속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광주읍지’에 의하면, 견훤대는 견훤이 군사를 지휘한 곳으로, 방목평은 견훤이 군마를 기른 곳으로 나온다. 두 곳은 서로 이웃해 있다고도 했다. 그런데 그 위치에 대해선 막연히‘읍내에서 북쪽 15리에 있다’는 설명으로 그치고 만다. 사실 당시엔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 굳이 길게 설명한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후대사람들은 이런 기억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김정호의 유명한‘대동여지도’에 견훤대가 등장한다. 이 지도에서 견훤대는 지금의 동림동 일대에 있는 것으로 묘사돼 있다. 물론 대동여지도가 완벽한 역사기록은 아니다. 그리고 이 기록만으로 견훤대의 위치를 비정하기도 성급하다. 그런데 ‘비변사인 방안지도’란 지도첩 속의 광주지도에는 보다 분명한 어조의 이런 글이 들어있다. “견훤대는 황계면에 있다.” 황계면은 동림동을 가리키던 조선시대 지명이다. 현재 서영대학교가 들어선 운암산의 다른 이름이 황계산인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운암산이 견훤대일까? 그렇지는 않다. 운암산 옆에는 대마산이란 또 다른 산이 있다. 높이 100여 미터인 운암산에 비해 대마산은 그보다 조금 낮은 93.9m이다. 두 산은 같은 줄기에 나란히 있다. 그런데 광주읍지에서 방목평으로 지칭한 너른 들을 끼고 있으며, 대동여지도에 산줄기의 끝자락에 있는 것으로 묘사한 것과 부합하는 위치에 있는 것은 대마산이다. 대마산은 석산, 돌산, 뱀산, 배암산, 대무산 등으로 불려왔다. 1970년대 산 아래에 펼쳐진 들 너머의 광주공항을 정탐하던 무장공비들이 발각돼 총격전이 벌어진 적이 있다. 그만큼 시계가 잘 트인 곳이다. 그리고 이 산을 옛 광주사람들이 견훤대라 인식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록이 ‘동국지도’란 지도첩 속 광주지도에 명확히 나와 있다.
♤ 왕조대(王祖臺)
견훤에 맞선 왕건도 그 맞은편에 진을 쳤다. 훗날 사람들은 당시 왕건이 진을 친 곳을 일러 ‘왕조대(王祖臺)’라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이름을 가진 건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펴낸 <여지도서>란 책은 왕조대의 지명 유래에 대해 이렇게 썼다. “왕조대는 견훤대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할 때 주둔했던 곳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고려 태조의 성과 이름을 그대로 붙어 불렀다. 다행히 지금은 다른 이름, 즉 왕조대로 바꿔 부르고 있다”고 했다. 요컨대 왕조대의 본디 이름은 왕건대(王建臺)였던 것이다. 다만, 한때 임금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게 결례라 여겨 왕건대를 왕조대로 고쳐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왕조대의 위치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여지도서’는 왕조대의 위치를 설명하면서 “견훤대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고 했다. 서로 마주 본다는 것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뜻이다. 왕조대의 위치에 대해 여러 기록들이 광주 서쪽 30리에 있다고 했는데 조선시대 지리학자 김정호가 쓴 ‘대동지지’에도 사월산/백마산 아래의 나루인 생압진나루가 일러 서쪽 30리에 있다고 기록한 대목이 있다. 사월산 꼭대기에 오르니 옛 방목평의 들녘을 가득 메운 건물숲 때문에 건너편 견훤대(대마산)가 속 시원히 보이지 않았으나 그래도 건물숲 사이로 견훤대가 간신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건 확실했다. 만일 사월산에 올라 눈앞의 건물들을 치운다면 견훤대는 훨씬 가깝고 또렷하게 보였을 것이 틀림없었다.
♤ 댓골재/ 금동학동길/ 광역시군구면동리계/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 함평군 월야면
태양광단지 옆으로 내려서면 일반 가정집 마당으로 나오고 대문을 나서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과 전남 함평군 월야면의 경계인 댓골재이다. 건너편 로렌시아의집으로 올라선다.
♤ 로렌시아의집(사회복지법인금옥재단)
장애우(지적장애인)들을 위한 요양시설인 로렌시아집으로 들어가 산책로를 따라 사각정자 방향으로 올라서면 조망터가 나온다. 사회복지법인금옥재단 설립자 백금옥(세레명 로렌시아)여사는 일제강점기인 1918년 대구에서 출생하여 장사와 부동산 사업으로 부를 쌓아 금옥여중을 설립하였으나 학생들이 입학도 하기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전재산을 들여 금옥재단을 설립하였다고 한다.
계속 능선으로 올라서면 칠봉산갈림길 삼거리에서 우틀하여 함평군에 속하는 병풍산으로 이어지고 현재는 그 앞으로 빛그린 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 칠봉산(七峰山, 110.9m→0.3k)
광산구 본량동 관할 덕림동에 위치한 산이다. 박광일(朴光一, 1655~1723)의 문집 손재집(遜齋集)에 안여해(安汝諧)를 기리는 만사(輓詞)가 있는데, 여기에 칠봉산이 등장한다. 안여해는 강진 백련사 누각 만경루 현판 글씨를 쓴 유학자다. 만사에는 ‘만경루 머리에서 헤어진 뒤로 칠봉산 너머에서 만날 약속 막혔는데, 한번 꿈결에 천고의 객 되셨으니 만사 쓰며 옛 생각에 슬픔 어찌 견뎌내랴(萬景樓頭分散後 七峯山外阻佳期 居然一夢成千古 臨挽何堪感舊悲)’라며 애도하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면암집에도 ‘칠봉산 아래에서 은거하고 있다’는 글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옛 문헌에도 칠봉산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름의 역사가 오래됨을 짐작할 수 있다. 산은 옆으로 길게 펼쳐진 형태인데, 7개의 봉우리가 있다 하여 칠봉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칠봉산 안쪽에 자리잡은 삼거동 칠성마을은 병풍산, 호암산, 치마산, 사랑산 등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마을 앞으로 들이 펼쳐져 있다.
지맥이 우틀하여 병풍산을 지나 잠시 광주광역시와의 경계를 벗어나 함평군 월야면 외치리 내안을 통과합니다.
♤ 병풍산(161.4m)/ 광역시군구면동리계/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 함평군 월야면 외치리
맨발님 산패와 백두산악회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태청지맥엔 병풍지맥도 아니건만 유래도 없는 조그마한 병풍산이 두개나 있다.
병풍산에서 정자가 있는 도로를 만나 오른쪽 위 숲길로 가야하지만 외치고개로 내려가는 길은 중앙분리대가 있는 22번국도가 끊어놓아 절개지인지라 왼쪽 마을로 내려가 도로로 우회해야 합니다. 능선에서 내려서며 월야면 외치리 내안으로 들어서고 빛그린산단로 도로를 횡단해 마지막봉까지 올라 22번국도 건너편 만중산을 바라보고 외치고개로 내려서는 경우도 있습니다.
♤ 함평군 월야면 외치리(外峙里)
외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백제 때부터라고 전하며 처음에 이 마을을 이룬 성씨는 봉(奉)씨였고 그 뒤 오(吳)씨들이 자가일성을 이루고 살았다고 하나 현재 그의 후손들은 단 1호도 없고 1600년대 말경 진주정씨 정수증(鄭遂曾)이 본면 월악리에서 옮겨와 정착했다. 그의 후손들이 주종을 이루며 살고 있다. 현존 성씨 중에서는 진주정씨 다음으로 함평이씨가 250년 전에 여양진씨가 35년 전에 입촌했다. 1983년 5월 적벽돌 제조업체인 광일연와 공업사가 이 마을에 들어섬으로 해서 30여 가구가 이주해 왔다. 처음에는 마을형국이 꿩 5마리가 앉아있는 것 같다 해서 오치(五雉)라 했었다하며 1789년 호구총수 지명에 외치(外峙)로 표기돼 있다. 이 마을은 광주직할시와 인접한 마을로 면내 자연마을 중 유일하게 재(峙)를 넘어야만 가게 되는데 재(峙) 밖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외치(外峙)라 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 외치고개/ 외치근린공원/ 외치교차로/ 영광로/ 22번국도
국도를 우회하느라 외치리 마을길을 따라 백련암(청용사)을 지나고, 새로운 공단지역이라 분양되지 않는 땅이 많다. 빛그린산단로 넘어 마지막 봉을 올랐다 내려서면 광주로 나가는 버스장류장이 있는 22번 도로를 굴다리로 통과하고 오른쪽 외치재 방향으로 만중산을 오른다. 인근에 천일추모공원이 있다.
♤ 만중산(101.3m)/ 삼각점( / )
도로 가운데에 섬처럼 서있는 만중산은 울타리를 열고 시멘트계단을 타고 올랐다가 곧바로 내려선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벚나무에 매어 있고 삼각점의 글씨는 애초 새기지를 않았다.
♤ 밀재로/ 구도로
만중산을 내려서서 밀재로를 건너 왼쪽으로 진행하여 통신탑이 서있는 맞은편 산으로 올라간다.
♤ 129m봉
만중산은 잠깐 올랐다 곧바로 내려섰지만 129m봉은 약간 길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달려 있다.
♤ 양지고개/ 갈동길
함평군 월야면 양지리와 외치리를 잇는 2차선 도로인 양지고개에 내려선다. 갈동길을 건너 숲으로 올라서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양동과 시군경계로 올라서서 좌틀로 내려선다.
양지고개에서 다시 광주광역시와 경계로 올라서고 잠시 함평군과 광주광역시의 경계를 따르다가 완전하게 광주광역시 내안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 송암고개/ 월석복만길/ 광역시군구면동리계/ 함평군 월야면 - 광주 광산구 양동
광역시군경계를 따라 왼쪽에 공장들이 보이고 쌍둥이 오리부화장 축사가 있는 도로로 내려선다.
마을이 나오고 다시 산길로 들어섭니다.
♤ 송암로/ 광역시군구면동리계/ 삼리동봉(광주광역시 광산구 양동, 함평군 월야면 외치리 → 광산구 삼거동)
양회임도인 송암길에서 직진하여 비포장임도로 들어선 대나무밭이 경계능선이고, 지맥은 오른쪽으로 온전하게 광주광역시 광산구로 들어서서 삼거동과 양동의 경계를 따르고 절재로 내려서기 직전 채일봉갈림길까지 광주광역시 광산구를 지난다. 왼쪽으로 광산구 삼거동 송암마을이 보인다. 송암마을은 국도 제22호선에서 왼쪽으로 굴다리를 지나가다 보면 보인다. 잔등을 따라 길이 있고, 그 길을 따라 양옆으로 집들이 들어서 있다. 마을 동쪽에는 동산, 서쪽에는 불갑산, 남쪽에는 범바위산이 있고, 북쪽은 함평과 경계를 이룬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거동(三巨洞)
광산구 서북부에 자리한 법정동이다. 조선 후기 나주목 삼가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삼거동의 명칭은 세 갈림길이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자연 마을로는 칠성마을, 송암마을, 응유마을, 삼암마을이 있다. 산길에서 825번도로(체암로)에 내려서면 왼쪽으로 삼거동 고인돌군 표지판이 보이고 825번 도로를 따라 왼쪽으로 진행하여 822번 도로 방향으로 나간다. 삼거동 고인돌은 평동과 삼도간 도로와 함평과 나산간 도로의 삼각 지점의 구릉지대에 위치해 있는데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이 곳에는 반경 200m 이내의 구릉상에 삼암마을 5기, 칠성마을 49기가 분포되어 있다. 고인돌의 형태는 덮개 돌과 덮개 돌을 받치는 굄돌과 무덤방으로 이루어지나 굄돌이 없는 경우도 있으며 굄돌의 유무와 높이에 따라 남방식과 북방식으로 구분되는데 이 곳 고인돌은 모두 굄돌이 낮거나 없는 남방식이다. 빛그린국가산업단지가 자리잡고 있고 여기에 광주글로벌모터스의 생산공장이 위치하고 있다. 서남대 재단이었던 홍복학원이 짓다만 학교 건물이 있다. 복지시설로는 백선바오로의 집과 과거 영화 도가니의 배경이 된 인화학교가 있었다.
♤ 가암산(151.4m)/ 4등삼각점(나주 437/ 1984 재설)/ 광산구 양동 - 삼거동
맨발님과 백두사랑 산패가 소나무에 매달려 있다. 방구돌이 있는 133m봉 전후로 능선길은 흐리지만 조망이 좋다. 광산구 임곡동 소재 용진산(솟돌뫼, 351m) 석봉이 뾰족하게 보이고 병풍지맥 어등산도 찾아볼 수 있다. 가암산 지나 불이 난 벌목구간에서 백선바오로병원으로 내려서는 길은 가시 잡목길이다.
♤ 백선바오로의 집
백선바오로의 집은 한국전쟁 당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백선엽장군이 지리산 토벌작전으로 인한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1952년 백선육아원을 발족하여 운영하다가 1983년 백선사회봉사원으로 명의를 변경하였고, 1988년에 현 운영주체인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대구 관구에서 인수하여 사회적 필요와 함께 보건복지부와 광주광역시 요청에 목적사업을 지적장애인거주시설로 변경하였다. 백선바오로의 집은 지적장애인 아동의 자립생활을 위한 교육, 의료, 직업, 사회활동지원을 목적으로 현재 60명의 지적장애인들이 살고 있다.
♤ 채암로
백선사회봉사원 어린이집 울타리가 지맥을 막고 문이 잠겨 있어 넘어서야 한다. 삼거동 고인돌군을 지나 채암로로 내려선다.
약 30km 지점으로, 여기서 문장터미널이 가까워 문장택시를 불러타고 문장으로 나갈 수 있기에 끊어갈 수 있는 지점입니다. 태청지맥의 중간지점은 우치이기 때문에 두 구간으로 한다면 야간산행을 불사하고 우치를 넘어서야 합니다.
♤ 칠성삼거리/ 822번도로/ 광산구 대산동
822번 도로와 825번 노안삼도로가 만나는 삼거리로, 횡단보도를 건너 약30m 진행하다 왼쪽 배수로 절개지 사면으로 오르는데 효정요양병원까지 진행해서 횡단보도로 도로를 건너 능선으로 오르면 편안하다. 칠성네거리에서 맥길로 오르는 곳에 822번 도로변으로 철조망이 쳐져있다. 다시 철조망을 왼쪽에 두고 북쪽으로 걸어 오르면 오른쪽으로 비포장임도 갈림삼거리가 나타나 능선방향으로 들어서고 나주임공 묘지 두기가 차례로 보이며 묘지지대가 나온다. 사한산갈림길에서 사한산을 다녀와 822번 도로로 나가 도로를 건너 광산구 대산동으로 들어선다.
♤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大山洞)
광산구 대산동은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동으로 원래 조선 후기 나주목(羅州牧) 도림면에 속했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나주군 도림면 가산리, 우치리, 대야리를 병합하여 나주군 삼도면 대산리라고 하였다. 1949년 나주군 평동면, 삼도면, 본량면이 광산군에 편입되면서 광산군 삼도면 대산리가 되었다. 1988년 광주직할시의 구역 확장으로 전남 광산군이 광주직할시로 편입되고 광산구가 신설되면서 광주직할시 광산구 삼도출장소 관할 대산동이 되었다. 1995년 광주직할시가 광주광역시로 승격되면서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대산동은 망산과 사랑산 능선에 자리한 곳으로 광산구 서북부에 있으며 행정동인 삼도동의 관할하에 있으며 주민들은 벼농사 위주의 농업에 종사한다. 관내 자연마을로는 대야(大也)마을, 우치(牛峙)마을, 가산(佳山)마을이 있다. 대야마을은 동쪽으로 도래굴, 서쪽으로 우치마을, 남쪽으로 금성산, 북쪽으로 삼화제가 있고, 서남간에 망산이 보인다. 우치마을은 동쪽으로 매생이 고개 너머 대야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내산동의 대봉마을과 망월마을, 남쪽으로 망산, 북쪽으로 둥둥재 너머 양동의 마암마을이 있다. 가산마을은 동쪽으로 석문산, 서쪽으로 망산, 남쪽으로 금성산, 북쪽으로 사랑산이 있다.
♤ 함평군 해보면 문장리(文場里)
해보면은 함평군 동북방에 위치한 광주광역시 및 상무대 인근지역으로 미래 지향적인 개발여건이 좋다. 옛부터 문장시장 등 5일시장이 발달하여 외지에서 이주 상업에 종사하는 주민이 많고 정서적으로 농촌보다는 도시적인 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해보면과 월야면 사이 함평 문장터미널은 함평군에서 장성군, 영광군 그리고 광주광역시까지 두루 가까워서 함평의 사통팔달이라 불리는 곳이다. 이 지역의 대표적인 볼거리 용천사계곡에 군락을 이루는 꽃무릇(일명 상사화)은 9월 초부터 9월말까지 온 산을 붉은 빛으로 물들여 한국 자연백경 가운데 하나로 선정될 만큼 일품으로 매년 꽃무릇큰잔치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해보면의 대표적인 특산품으로는 돗자리와 한과, 된장이 있다.
칠성삼거리 근동에서 비박하는데 잠이 오지 않아 오들오들 떨다가 자는둥마는둥 새벽 3시에 출발합니다. 나주오공 묘지는 중종의 공동묘지인데 둘레석으로 둘러싸인 봉분이 커서 귀티가 납니다.
♤ 사랑산갈림길/ 사랑분맥
나주오공 중종 묘지 위가 사랑산 갈림길이다. 선답자 띠지가 매달려 있다. 사랑산은 약 0.6km 떨어져 있고 지맥은 오른쪽이지만 왼쪽으로 올라 사랑산을 다녀온다. 여기서 장성천과 영산강의 합수점인 석현교로 가는 약 25km 사랑분맥이 분기하는 지점이다. 태청지맥은 고막원천 합수처로 향한다. 사랑산에서 뾰족한 용진산을 또 한번 바라본다. 답십리 현대시장 끄트머리에 "용진산"이라는 식당이 있어 사장님께 용진산에 대해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선초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이 전국을 주유할 때 며칠 머물기도 하고, 일제강점기에는 어등산과 함께 의병들의 활동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일제시대 어김없이 수탈 목적의 큰 금광이 있어 한때 번창했었다고 한다.
♤ 사한산(獅恨山, 185.4m→0.6k)/ 사랑산/ 광주 광산구 삼거동, 대산동, 오운동
백두산악회 산패가 참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사한산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삼거동, 대산동, 오운동에 걸쳐 있는 삼동봉이며 왕복 1.2km(약 45분)를 다녀와야 한다. 칠봉산에서 남동쪽 기암산을 거쳐 내려선 능선이 네거리 마을 뒷등을 지나 동쪽으로 솟아 있다. 남쪽으로 향하다 동쪽 희어치에서 낮아지고 오운동 광암과 복림 마을의 배산이 되는데 삼도동의 명산으로 형세가 사자를 닮아 사한산(獅恨山)이라고도 한다. 예전에 사한산은 기우제를 올린 무제봉이라 묘를 쓰지 못했는데 만약 묘를 쓰면 가뭄이 들기 때문에 아낙네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묘를 파냈다고 한다. 영험하게도 동이에 물을 이고 가서 뿌리면 반드시 비가 내렸다고 하며 지금도 양력 1월 1일이면 삼도동 유지들이 간단히 의식을 치른다. 장성 태청산과 연결되어 동학농민 혁명때 농민군과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통로가 되었다고 하는데 광암 마을은 사랑산이 바위로 되어 있어 칭했고, 복림 마을은 호랑이가 수풀 속에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복호(伏虎)라고 했다. 다시 묘지지대로 돌아와 나주오씨 묘지대를 지나 비포장임도를 따라 내려선다.
철조망이 나오면 재빨리 뛰어넘어야 하는데 도로가 거은 닿는 곳까지 따라내려가느라 고생 했습니다. 외딴집 개가 시끄럽게 짖는데 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안 갈 수도 없고...
♤ 임도
또 다른 나주오씨묘역과 광산김씨세장산을 지나 만나는 비포장 임도에서 지도상 지맥길은 직진이다. 칠성삼거리부터 설치된 철조망을 뛰어넘어 822번 도로를 건너고 외딴집 철문으로 들어선다. 하지만 지독한 잡목숲으로 여름에는 도저히 뚫고갈 엄두가 안나 그대로 비포장임도로 오른쪽으로 끝까지 우회를 하고 822번도로를 넘어 2차선 포장도로가 갈리는 분기점에서 82.5m봉과 75.3m봉을 지나기도 한다.
선답자 띠지가 지켜서 있고, 트랭글에 위치표시만 하고 지납니다.
♤ 82.5m봉
822번도 오른쪽의 남아 있는 구도로를 따라 올라가 지맥이 이어지는데 민가가 있고, 밭과 과수원으로 진입할 수가 없다. 민가 앞에서 조금 되돌아 내려와 밭둑을 가로질러 삼화저수지에서 올라오는 도로에 닿고, 도로 따라 약50m 진행하여 왼쪽 과수원 안으로 진입, 과수원을 지나 잡목 등로를 헤치며 무명봉으로 오른다. 소나무가 둘러싼 진주정공 참봉, 참의묘가 있다. 우틀하여 묘지길로 내려선다.
마을인데 별다르게 찍을만한 이정표가 없습니다.
♤ 대야(大也)고개/ 양회임도/ 대야로/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
봉우리도 없는 무명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 대야(大也)마을이 있는 대야고개에 닿는다.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마을길을 따르다 감나무과수원을 지나 산길로 오른다. 장씨묘지를 지나 우틀로 내려선다.
우치고개도 찍을만한 이정표가 없습니다. 더더군다나 시커면 밤중인지라....
태청지맥의 중간지점입니다. 광주 송정리로 오가는 송정97번 버스가 65분 간격으로 운행합니다.
♤ 우치(牛峙)/ 대산로/ 2차선도로/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
광주 광산구 대산동 우치마을 우치고개에 도착하여 비포장 임도를 따르다 오른쪽 숲길로 오른다. 우치고개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에 있는 자연마을 중 한 곳인 우치마을에 있는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 후기 나주목 도림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88년 광주직할시 구역 확장으로 광주광역시 광산구 대산동으로 편입되었다. 대산동은 망산과 사랑산 능선에 자리한 곳으로 광산구 서북부에 있다. 대산동 관내 자연마을로는 대야(大也)마을, 우치(牛峙)마을, 가산(佳山)마을이 있다. 우치마을은 동쪽으로 매생이 고개 너머 대야마을이 있고, 서쪽으로 내산동의 대봉마을과 망월마을, 남쪽으로 망산, 북쪽으로 둥둥재 너머 양동의 마암마을이 있다.
묘지가 있는 곳입니다. 상배형님과 걸어서하늘까지님 띠지가 지키고 있습니다.
♤ 75m봉/ 임도
숲길로 오르면 가시나무가 있고 조금 더 진행하니 좋은 길이 나온다. 75m봉 작은 둔덕을 넘어 습지같은 넓은 잡초 개활지를 건너 산길로 든다. 개활지 칡덩굴 가시박을 지나니 임도를 만나면서 병풍산 등산로가 이어진다.
♤ 232.1m봉/ 대산동 - 내산동
소나무에 맨발대선배님 산패가 매어 있다. 광산구 내산동마을이 바라 보인다.
사방으로 조망이 매우 좋아 지나온 지맥과 동북쪽으로 병풍지맥을 찾아보는 곳인데 여명이 밝아옵니다.
♤ 병풍산(屛風山, 265.4m)/ 산불감시카메라/ 4등삼각점(나주 436/ 1996 재설)/ 삼동봉(광산구 내산동, 대산동 → 송학동)
태청지맥에서 두번째 병풍산이다. 쑥개떡을 쌓아 놓은 듯한 바위를 지나고, 조망이 가능한 암봉으로 산은 낮아도 광주시내 송학동, 신동, 삼도동 일대와 무등산과 장원지맥이 시원하게 바라보인다.
♤ 불교사(佛敎寺) → 추선사(推善寺)
양회임도를 따라 절 입구까지 가서 경내로 들어가지 않고 뒤의 능선을 지난다. 일주문 앞엔 보호수인 300년생 팽나무가 서있다. 본래 가을매미 형국으로 추선사(秋蟬寺)가 있었고 폐사된 뒤 불교사로 이름을 바꿨다가 한자를 달리해 추선사(推善寺)로 표기했다. 대한불교 원효종이다.
♤ 활공장
임도가 끝나는 지점에 페러글라이딩 활공장이다. 오른쪽 묘지 뒤로 가야할 구절봉(九節峰, 297m)이 보이고 광산구 삼도동 일대가 조망된다. 조금 오르면 소나무가 있는 전망바위가 또 나온다.
♤ 망산(望山, 288.5m)/ 금성분맥갈림길/ 광산구 내산동 - 대산동
봉우리가 밋밋한 지나치는 능선에 둔덕봉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100m쯤 진행하다 직진 능선은 옥산-금성산-뚜껑봉-나주시내로 향하는 금성분맥이고 지맥은 우틀로 꺾어서 흐릿한 가시덤불을 헤치며 양회임도로 내려선다.
드뎌 지맥이 나주에 도착했습니다. 나주라는 지명은 왕건이 서해안을 돌아 당시 후백제 점령지역인 금성군을 점령하면서 나주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 채일봉갈림길/ 시도계/ 광주광역시 - 나주시 문평면
지맥은 채일봉(遮日峰, 288.5m) 갈림길에서 오른쪽 잡목숲으로 내려선다. 채일봉은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학동, 내산동과 나주시 문평면 학교리(學橋里)의 경계이다.
♤ 금성산(錦城山, 451m)
금성산은 호남정맥에서 분기한 영산기맥의 태청산에서 뻗어내린 태청지맥의 망산에서 시작한 작은 산줄기의 끝에 자리 잡고 있다. 금성산은 나주 1천여 년의 역사를 지켜온 진산이며, 어느 봉우리에 올라도 곡창지대인 나주평야를 굽이치며 흐르는 영산강을 한눈에 조망하는 남도의 명산이다. 금성산이라는 산 이름은 나주의 옛 이름 금성에서 유래됐다. 고려시대부터 국가에서 산신제를 지냈던 영산이었으며, 금성산의 산신은 '금성대왕'이라 불렸는데, 현재도 이 신을 모시는 무당들의 기도처로도 잘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 "금성산사(錦城山祠) 사전에 소사(小祀)로 기록됐다. 사당이 다섯 개 있으니 상실사는 산꼭대기에 있고, 중실사는 산허리에 있으며, 하실사는 산기슭에 있고, 국제사는 하실사의 남쪽에 있으며, 미조당은 주성(州城) 안에 있다"고 기록됐다. 예로부터 금성산은 나주평야 일대와 영산강을 아우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1011년 고려 현종이 거란족의 침입을 피해 10여 일 머물렀던 금성산성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금성산 석성은 둘레가 1천 95보요, 샘이 5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또 못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금성산은 우리나라 최고 명당이 있다고 소문난 산으로 그 품 안에 호남의 3대 명촌 중의 하나며, 조선 초의 정치가이자 학자였던 신숙주가 태어난 나주시 노안면 금안동을 품고 있다. 나주는 통일신라 때까지 금산, 금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가 후백제 때에야 지금의 나주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조선시대 지리지인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주의 금성산이 멋들어지게 나타난다. "나주는 금성산을 등지고 영산강을 두르고 있어 읍의 지세가 한양과 비슷하므로 예부터 이름난 인물이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나주공방전/ 금성전투(錦城戰鬪)
왕건의 나주공방전은 903년, 909~914년 금성(현 나주)를 둘러싸고 태봉과 후백제 사이에서 벌어진 후삼국시대의 전투를 말한다. 궁예정권 아래에서 왕건은 903년에 처음으로 금성군(나주)을 공략하였다. 이후 왕건은 909년에 甄萱이 오월국으로 들여보내는 배를 사로잡고, 진도군과 고이도를 공략하였다. 甄萱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910년에 금성군을 에워싸고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911년에 궁예정권은 새로운 서남해의 중심으로 선택한 금성군을 나주로 개명한다. 왕건이 애초에 공략하고자 했던 목표는 무주였다. 왕건은 나주공방전에서 승리자가 되면서 후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 견훤은 호남땅의 막강한 쌀 생산력과 함께 엄청난 인구로 인해 막강한 군사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반면 궁예는 강원도 척박한 지역이기 때문에 쌀 생산력과 군사력이 취약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왕건이 나주공방전에서 승리를 하면서 호남의 막강한 쌀 생산량을 후고구려에 보탬이 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후고구려 입장에서 왕건을 달리 보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호남의 막대한 쌀 생산량을 후고구려에게 조달될 수 있으니 경제력으로도 풍부해질 수밖에 없다. 나주평야는 영산강을 끼고 있기 때문에 엄청난 쌀 생산량을 자랑했다. 그런 나주평야를 후고구려가 확보했다는 것은 견훤에게는 뼈아픈 대목이다. 왕건의 둘째부인 오씨의 아들 왕무가 훗날 2대 황제인 혜종이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나주의 막강한 경제력이 바탕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다만 혜종의 뒤를 이어 신명순성왕태후 유씨(충주 호족 딸) 아들들인 정종 왕요와 광종 왕소가 잇따라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둘째부인 오씨의 가문을 천하게 취급했다. 왕건이 즉위한 후에도 나주는 계속해서 중시되고 있었다. 시중을 지낸 구진을 나주의 책임자로 보내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930년 고창군전투이후의 어느 시점부터 935년 4월 이전까지 甄萱에게 나주를 빼앗겼다. 백제의 내분을 틈타 왕건은 935년 4월에 다시 나주를 되찾는다. 두 달 후에 왕건의 평생의 적인 甄萱이 나주로 귀부해 온다. 이때 甄萱은 나주를 작은 배 한척으로 왔을 것이다. 왕건은 40여 척의 배를 보내 甄萱을 개경으로 정중히 모셔온다. 이처럼 나주는 왕건에게 있어서 보배와 같은 존재였다. 이후 통일을 완수할 때까지 나주는 튼튼한 高麗의 땅이 되었다.
♤ 절재/ 광주광역시 - 나주시 문평면
양회임도에 내려서서 왼쪽의 마루금을 바라보며 비포장임도 갈림삼거리인 절재에 닿는다. 절재는 절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고개이름으로 추선사로 넘나드는 길이다. 전남 나주시 문평면 학교리(學橋里)와 광주광역시 광산구 내산동을 이어주는 고개를 말한다. 절재에서 나주 임도를 따라 약80m 걷다가 임도가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지점에서 임도를 버리고 왼쪽 산으로 들어선다.
♤ 나주시 문평면(文平面)
군의 북서부에 위치한 면으로 본래 나주군 지역으로서 거평부곡이었고, 조선시대에 거평면이 되어 남산·평산·고호 등 24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용문면의 본촌·청계 등 15개 리와 아계면의 백룡·복룡 등 18개 리, 도림면의 방동·신량 등 4개 리, 시랑면의 문암동 일부와 목포부 금동면의 장동·중사지·양산·금곡 일부, 함평군 식지면의 은구리 일부, 평릉면의 죽림리 일부를 거평면과 병합해 용문과 거평의 이름을 따서 문평면이라 하고 15개 리로 개편하였다. 1983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청정리·운봉리·신광리가 다시면에 편입되어 12개 리를 관할하였다. 면의 서남부에는 산호평야가 펼쳐져 있으나 비교적 산지가 많아 동부는 금성산·옥산, 북쪽은 국사봉, 남쪽은 신걸산 등의 산지가 발달해 있다. 고막천(古幕川)과 문평천 등 하천유역에는 비옥한 평야가 발달하였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이다. 시설원예를 이용해 각종 소채류를 재배하며, 구릉지에서는 참깨 등 특용작물과 과일을 생산하고 있다. 중소기업의 육성의 일환으로 공업단지가 조성되어 축협 나주배합사료공장 등이 가동중이다. 도로는 광주∼목포 간의 국도와 호남선 철도가 통과하고, 고막원역(古幕院驛)이 관문 역할을 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문화유적은 오룡리의 나대용(羅大用) 생가 및 묘소와 봉강사(鳳岡祠), 북동리·학동리의 선돌, 동원리의 송재사(松齋祠)를 비롯해 사·재 20여 개소가 있다. 무형문화재로 쪽염색장 윤병운이 있다. 안곡·송산·북동·동원·대도·계로·학동·학교·국동·옥당·산호·오룡 등 12개 리가 있다.
♤ 충치(蟲峙)/ 벌레고개
준희선생님 산패가 있다. 양회임도 사거리 안부인 벌레고개를 지나 작은 둔덕봉으로 올라 왼쪽으로 빙 돌아서 내려선다. 왼쪽 아래로 포장도로가 보인다. 벌레고개는 나주시 문평면 학교리와 광산구 내산동을 이어주는 고개인데 충치, 벌레고개라고 한 연유는 실전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별다른 특징이 없는 삼광시군봉입니다. 지맥은 여기서 광주광역시와 헤어지고 함평과 나주의 경계를 따릅니다.
♤ 205m봉/ 삼광시군봉(나주시 문평면, 광산구 내산동 → 함평군 나산면)
벌레고개에서 올라선 이름도 없는 무명봉이 광주광역시 광산구 내산동과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 나주시 문평면 학교리의 삼광시군봉이다. 정상은 잡목숲으로 거칠고 급좌틀로 휘어져 편백나무 숲을 지나 내려선다. 지맥은 여기부터 광주광역시를 떠나 나주시와 함평군의 경계를 따른다.
8, 90년대 한때 잘 나가던 자수성가형 나산그룹의 창업주 안병균 사장의 고향 마을이 나산입니다. 극장식 식당, 무랑루즈, 초원의집, 홀리데이인서울을 운영하고 유통, 건설, 방송, 금융까지 야심차게 진출했으나 부도로 그룹 해체 수순을 밟았지요.
♤ 전남 함평군 나산면(羅山面)
함평군의 동부에 위치한 면으로 동쪽으로 광주광역시 광산구와 맞닿아 있다. 본래 식지면(食知面)과 평릉면(平陵面)으로 분리되어 있었으나, 1932년에 두 면이 합해져 나산면으로 개칭되었다. 면의 동쪽과 서쪽에 호남정맥의 여맥이 뻗어 있어 천주봉·승두봉·구절봉·옥녀봉 등 수많은 봉우리가 솟아 있다. 나주시와의 경계에 국사봉(國士峰)이 있다. 나산천·구산천·해보천이 면의 중앙을 흐르며, 이들 하천 유역에는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주요 산업은 농업으로 평야지대에서 쌀과 보리가 생산되며, 양파·당근·딸기·완초 등도 많이 생산된다. 산지에서는 목재 생산이 많으며, 오랜 역사를 가진 용두리의 돗자리는 특산물로 유명하다. 그 밖에 방울토마토·동충하초·메주딸기 등이 생산된다. 교통은 함평∼장성 간의 국도가 면의 중앙을 통과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이문리와 송암리에 조선시대의 자기 가마터가 있으며, 삼축리 상축마을 뒷산에 평릉(平陵)이라는 고분군이 있다. 초포리에 옹관묘·이규행가옥·사산사, 이문리에 사기요지와 증산사가 있다. 매년 가을에는 장승·솟대·허수아비 축제가 열린다. 초포리에는 함평이씨, 이문리에는 상산김씨의 동족마을이 있다. 삼축·나산·수하·신평·송암·이문·수상·용두·우치·초포·월봉·원선·구산·덕림 등 14개 리가 있다.
♤ 분매동고개/ 801번도로/ 불매동고개/ 월암로/ 나주시 문평면 - 함평군 나산면
2차선도로인 월암로로 내려서고, 나주 문평면 학교리(學橋里)에서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를 이어주는 801번 도로를 건너 밭가장자리로 가파르게 구절봉에 오른다. 왼쪽으로 10m거리에 있는 비포장 임도로 들어서면 편하다.
♤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 분매/불매 마을
분매/불매 마을은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에 있는 여러 자연마을 중 한 곳으로, 문성공 안유(安裕)의 후손인 순흥안씨가 전북 운봉에서 이 마을로 이주해 와 정착하였으며, 바로 그 후에 경기도 수원에서 해주최씨가 이주해 정착하였다고 전할 뿐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으며 마을 당산나무는 순흥안씨가 입주할 당시 심었다고 전한다. 마을 뒤의 시묘산에 죽산안씨의 선산이 있는데 어느 날 중이 와서 풍수지리상 이곳의 지형이 연화형(蓮花形)이며 바로 이곳이 불모명당이라고 했다 하는데 이에 따라 마을 이름을 불매(彿梅)라 불렀다 한다. 분매동고개는 그 분매/불매마을에 있는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으로 함평군 나산면 송암리와 나주시 문평면 학교리 및 광주시 광산구 내산동을 이어주는 고개이다.
♤ 구절봉(九節峰, 297m)/ 4등삼각점(나주48?/ 1984 복구)/ 시군면계/ 삼리봉(나주 문평면 학교리, 함평 나산면 송암리 → 신평리)
잡목과 경사가 있어 힘들게 올라서지만 조망은 없다. 백두사랑산악회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고 알아볼 수 없는 삼각점이 있다. 좌틀로 진행한다.
직진하여 한참을 알바하다 되돌아 왔습니다. 오른쪽 갈림길이 눈에 잘 띄도록 띠지를 잘 정비하고...
♤ 249.3m봉/ 시군면계/ 삼리봉(함평군 나산면 신평리, 나주시 문평면 학교리 → 계로리)
준희선생님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급우틀로 휘어서 내려서면 임도가 보인다. 이름없는 고개를 지나 왼쪽으로 오른 무명봉(220m)에서 급우틀로 휘어져서 내려서면 묘지를 만나 마을길로 내려선다. 오른쪽을 잘 보고 가야 한다. 직진하면 알바이다.
♤ 나주시 문평면 계로리(桂老里)
계로리 1구 월계마을과 2구에 만년(萬年), 불로(不老), 세실, 대족암마을이 있으며 월계(月桂) 마을은 형태가 반달형이며, 뒷산이 구름모양이라서 운중반월이라 해서 월계라 하였다 하고 계로리2구는 부락 설기 당시 만년 산하에 터를 잡을 때 산의 명칭을 따서 만년부락이라 칭하고 산천이 수려하여 사람들이 늙지 않을 것이라 해서 불로촌이라 하며, 산과 산사이에 있는 마을로써 "사이실"이 변하여 세실이라 칭했다 한다.
묘지 지대를 내려서서 오른쪽 양옥집은 비어 있고, 왼쪽 흙집에 노인이 혼자 사는데 수돗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 월계재/ 월산길/ 함평군 월계마을 표지석
제주양공 묘지지대를 지나 빈집인 양옥집과 흙집 사이로 내려선다. 함평군 나산면 신평리와 계로리를 잇는 2차선 도로인 월산길을 건너 하우스 사이로 진행하여 오른쪽 묘지가 보이는 산으로 오른다. 월계마을 표지석 왼쪽으로 300m 내려가면 마을회관이 있다. 월계리에서 도로를 따르면 계로리 만년마을까지 자동차로 10분 거리이고 남쪽 멀리 국사봉과 그 뒤로 복룡산이 바라다 보인다.
♤ 211.6m봉/ 시군면계/ 삼리봉(나주시 문평면 계로리, 함평군 나산면 신평리 → 수하리)
지맥의 오른쪽이 나산면 신평리에서 수하리로 바뀌는 지점이다. 오른쪽으로는 고막원천 가의 옥녀봉(139.1m)으로 가는 능선이 분기한다. 지맥은 좌틀하여 잡목능선으로 오른다.
태청지맥에는 국사봉이 두개 있는데 모두 정상을 빙둘러 석축이 쌓아 있어 한때 의식을 치른 장소 같았습니다.
♤ 국사봉(國士峰, 281.6m)/ 폐헬기장/ 함평군 나산면 - 나주시 문평면
맨발대선배님과 백두산악회 산패가 나무에 매어 있다. 정상이 석축(돌담)으로 둘러져 있는 국사봉을 급좌틀로 휘어져 내려선다. 국사봉은 전남 함평군의 동남단으로 나산면 수하리와 나주시 문평면 계로리 경계 지점에 위치한 산으로 나산의 옥녀봉과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으며 고막원천으로 합류하는 수하리 2개의 지천들이 발원한다. 1872년지방지도(함평)에 국사봉 대신 마흘산(馬屹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서편의 고막원천이 보이며 조선지형도(나주)에 국사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한자를 달리해 국사봉(國寺峰) 또는 국사봉(國士峰)으로 표기된 곳도 있으나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 형국이라 하여 국사봉(國駟峰)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 산 아래에 있는 마을 이름이 「호구총수」와 「1872년지방지도」(함평)에 마흘산(馬屹山)으로 나오는데 예전에는 마을 사람들이 정월 보름에 꼭 산신령제를 지냈다고 하며 절골에서는 지금도 기왓장이 출토되고 있다고 한다.
지맥이 함평군과 시군경계를 떠나 좌우 완전하게 나주시로 들어서는 지점입니다.
♤ 272.1m봉/ 함평군 → 나주시 문평면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잡목으로 조망은 없으며, 지맥은 급좌틀로 내려서서 함평군과 헤어지고 나주시 문평면 계로리 내안으로 들어선다.
만년고개 불로마을은 동네 뒤편으로 대죽나무 숲이 있는 마을인가 보네요. 대죽숲을 우회해서 내려섭니다.
♤ 186.6m봉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 있다. 186.6m봉에서 우틀하여 내려서는 길에 대나무숲을 지나는 길찾기가 애매하다. 약간 좌틀로 내려서면 통정대부 호조참의 함평이씨 묘가 나온다. 빽빽한 대나무밭을 좌우로 살펴 임도나 묘지를 발견하고 우회길을 따라 임도로 도로에 내려서고 도로를 따라 만년고개에 도착한다. 지맥길은 빽빽한 대밭이라 왼쪽으로 우회하여 도로로 빠져 나갑니다.
나주시 문평면으로 오가는 53번 마을버스정류장이 있습니다.
♤ 만년고개/ 만년마을 입구/ 만년길/ 버스정류장/ 문평로/ 818번도로
대나무숲을 내려서면 왼쪽으로 만년마을이 바라다 보인다. 버스정류장 맞은편 절개지를 치고 오르면 밭이 나오고 그물망이 쳐져 있는 밭가장자리를 지나 산으로 오른다. 여름에는 만년마을 표지석이 있는 만년고개에서 마루금은 가시잡목이라 왼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묘지로 통하는 임도가 보인다. 임도를 따라 오르다가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약 187m의 무명봉에 오르고, 지맥 마루금은 좌틀이다.
♤ 221.5m봉/ 삼리봉/ 문평면 대도리(大道里), 계로리(桂老里) → 국동리(國洞里)
한 무리의 띠지가 정상을 지키는 암봉으로, 왼쪽으로 무안-광주고속도로 문평5터널로 드나드는 차량 소리가 들리고, 바로 앞에 송전탑도 지난다. 중앙 멀리 금성산이 보인다.
문평면 내안을 지나온 지맥이 다시면과 만나 1번국도를 지나 호남선철로까지 면계를 따릅니다.
♤ 국사봉(246m)/ 면계/ 삼리봉(문평면 대도리, 국동리 → 다시면 청정리)
가파르게 오르고 여기에도 무슨 의식을 치르는 장소처럼 봉우리를 빙 둘러 축대가 있다. 좌틀하여 내려서는데 가시잡목길이다. 왼쪽으로 백룡저수지와 가야할 백룡산이 보이고 지맥의 왼쪽이 문평면에서 다시면으로 들어선다.
♤ 나주시 다시면(多侍面)
나주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면으로 본래 나주군의 지역으로서 고려 때의 수다소(水多所)가 조선 때 수다면이 되어 월곡·동촌·반계 등 20개 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죽포면의 신기·죽지·산두 등 17개 리와 시랑면의 동강·사직 등 12개 리, 거평면의 평산리 일부, 남평군 욱곡면의 방축리 일부를 병합해 수다와 시랑의 이름을 따서 다시면이라 하고 12개 리로 개편하였다. 북부에 백용산, 북동부에 신걸산이 솟아 있어 구릉성 산지가 발달하였다. 남동쪽 거마산(112m)에 이르러 고도가 낮아지며 서부에도 청림산(187m) 등 산지가 분포하고 있다. 남부에는 영산강이 흐르고 문평천 유역에 넓은 다시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농토가 비옥하고 수리가 좋아 농업이 발달하였다. 주요 산업은 쌀생산의 주곡농업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배·복숭아 등의 과일과 보리·수박·무·양파·고추·참깨 등이 재배된다. 예전에 보광골이라 불리던 보덕마을에서 재배된 열무는 ‘보광골 열무’라 하여 목화밭이나 콩밭에 간작으로 심었다. 다른 지역의 열무와는 다르게 김치를 담으면 잘 시지 않고 맛이 좋았다. 특산물이던 보광골 열무는 최근 거의 심지 않고 있다. 한때 특산물로 명성을 날리던 구진포의 장어도 지금은 생산량이 적어 그 명맥을 유지하기가 힘들다. 또, 옛날에는 혼수감에 물들이던 ‘쪽물감’ 생산지로 가흥리 일대가 유명했으나, 지금은 각종 화공염료의 발달로 몇 세대만이 맥을 잇고 있다. 도로는 광주∼목포 간의 국도가 통과하고 호남선 철도가 통과해 교통이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가흥리에 신석기시대유적과 무숙사(武肅祠)·최희량장군신도비, 동당리에 석곶정(石串亭)·모인재(慕忍齋), 회진리 사직마을에 백제시대 토성인 회진성(會津城), 문동리에 송촌사(松村祠), 복암리에 고분 4기, 동곡리에 고분군·임란첩보서목, 송촌리에 영사재(永思齋), 회진리에 매곡재(梅谷齋)·영모정, 죽산리에 장춘정(藏春亭), 영동리에 무열사(武烈祠)·보산사(寶山祠) 등이 있다. 무형문화재로는 샛골나이 노진남고와 쪽염색장 정관채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고, 나주대학이 있다. 월태·영동·가운·회진·복암·가흥·신석·죽산·문동·동당·송촌·동곡·운봉·신광·청정 등 15개 리가 있다.
♤ 임도
246m봉에서 넓은 임도에 내려서서 임도를 따라 7분 정도 걷다가 국가지점번호가 있는 임도삼거리에서 산으로 오르는데 가시잡목 지대이다.
♤ 218.3m봉
산벚나무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어 있고 정면에 대도저수지가 보인다. 좌틀로 내려서서 꾸준하게 걷는다. 왼쪽으로 백룡제가 보인다.
♤ 236.8m봉/ 면계/ 삼리봉/ 다시면 청정리, 문평면 대도리(大道里) → 동원리(東院里)
안부를 지나는 임도를 건너 마루금으로 올라 송전탑(NO.63)을 지난 봉우리로 조망은 없으며 금동마을이나 소사마을 쪽 능선이 분기한다. 여기부터는 백룡산 등산로가 정비되어 걷기 편하다.
백룡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조망과 비슷하나 여기가 백룡산보다 조망이 더 좋습니다.
♤ 313.7m봉/ 팔각정자, 운동시설/ 면계/ 삼리봉(다시면 청정리, 문평면 동원리 → 오룡리)
팔각정 안쪽에 준희선생님 산패가 매달려 있다. 오른쪽으로 불갑산과 해보면 시내가 보이고, 서편 함평쪽으로 철성지맥이 나란히 바라다 보인다. 그 뒤쪽으로 특출한게 영암의 월출산이다. 바둑판처럼 경지정리된 문평면 안곡리 방향 뷰가 멋지다. 지맥의 오른쪽이 짧은 거리의 312.4m봉에서 오룡리에서 학동리로 또 바뀐다.
♤ 장군 나대용(羅大用)/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마을
오륜마을 깊숙이 체암(遞菴) 나대용(羅大用) 장군의 생가가 초가로 복원되었는데, 그 초가에서 대대로 후손들이 살다가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새로 단장했다. 나대용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이충무공 막하에서 거북선 건조에 전력을 기울인 실질적인 공로자로 평가되고 있다. 1556년(명종 11)에 나주에서 태어났으며, 1583년(선조 16) 훈련원 별시무과에 응시, 병과로 합격하였다. 고향인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오륜동에서 10여년간 거북선 설계도와 제작과정을 연구한 후 마을 앞 방죽골에서 첫 시험을 끝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인 이순신 장군을 훈련원주부의 신분으로 찾아가 그 제작을 협의하니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았고,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북선 3척을 처음으로 진수했다 한다. 나대용 장군은 충무공과 함께 사천승첩을 비롯하여 당포전, 당항포전, 견내량전, 안골포전, 노량대첩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쾌속정인 해추선을 발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충무전서 난중일기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뒷받침해 주고 있다. 묘소는 생가가 있는 마을에서 약 3km 떨어진 무평면 대도리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나대용 장군 생가에서 산모퉁이만 돌아가면 나대용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소충사가 있다.
♤ 백룡산(白龍山, 347m)/ 3등삼각점(나주 315/ 1984 재설)/ 산불초소/ 헬기장/ 면계/ 삼리봉(문평면 학동리, 다시면 청정리 → 운봉리)
백두산악회 산패가 참나무에 매어 있다. 산불감시초소 처마에 매어있던 준희선생님 산패와 선배님들 띠지는 까칠한 바람이 떼어냈는지 보이지 않는다. 지맥길은 좋은 일반등산로를 버리고 우틀하여 백동마을쪽인데 지맥길로 들어서서 희미하고 가파른 맥길을 따라 내려서다 대전의 산객선배님 띠지에서 우틀하여 임도로 닿는다. 백룡마을 이후로는 비산비야이다. 백룡산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와 청정리 및 문평면 오룡리와 학동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호남정맥 태청산 자락이 남쪽으로 내려서 문평 학교리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충치를 거쳐 함평군 나산면과 경계를 이룬다. 문평 계로리와 북동리 경계에서 남동쪽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대도리에 이르러 남쪽으로 연결되어 이 산지를 이루며, 봉우리는 과거 기우제를 올린 제단은 없어지고 헬기장이 만들어져 있다. 북동쪽으로 내려서면 용굴이 나오고 영정굴 앞까지 땅속으로 물길이 나 있다고 전하며 남쪽에는 치마와 줄바위 및 연소혈 명당이 남동쪽 기슭 백동마을 어귀에 관바우가 서있다. 대오개 안고랑에는 정도전이 유배 생활을 했던 소재사터가 있으며 소쿠리 명당이라 하고 1375년(고려 우왕 1) 회진현(會津縣) 거평부곡으로 와 황연(黃延)의 집에 거처하며 1377년까지 지냈다. 백룡산은 다시 벌의 어디에서나 보이는 명산으로 대룡촌에서 보면 학(鶴)의 형국이다. 동쪽에 다시면 수리조합에서 축조한 백룡저수지가 있고 저수지 안에 20여기의 고인돌과 용문장터가 있었다.
백룡산에서 좋은 등산로를 따라 약 0.4km 내려서다 가파르게 우틀로 내려서며 비실이부부대선배님 띠지를 확인하고, 더 내려가다 대전에 산객선배님 띠지가 있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을 살펴보았으나 직진으로 그냥 갔더니 알바입니다. 이게 아닌데 하며 다시 그 갈림길로 오르고 있는데 저 아래에서 동밖에 대장님이 부르는 소리가 들리네요. 정도전초당에 차를 세워두고 음료수를 들고 마중나오신 것입니다. 오른쪽으로 내려서니 임도가 시작되는 곳에 도착합니다. 반갑게 동밖에 대장님을 만나고 오늘은 대고개에서 정도전사당을 구경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하고 정도전사당 옆에 있는 나주정씨 묘지를 둘러보고 영산포 홍어1번지로 향했습니다.
대고개 이후로 마루금으로는 길이 마뜩찮아 우회길을 택하기도 하고, 지근거리에 삼봉 정도전선생의 유배지가 보이는 곳입니다.
♤ 대고개/ 대오개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 백동마을 서쪽에 있는 한적한 산골짜기인 소재동에서 서쪽 문평면 학동리 덕산골로 넘나드는 고개이다. 옛날에도 대나무가 많아서 대고개였을까. 잡목 둔덕을 넘어 묘지들이 일렬로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내려서서 삼봉 정도전 유배지를 다녀와 지맥에 복귀하여 대밭을 빠져 나간다.
♤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 유배지
인의예지신(仁義禮知信) 오상(五常)의 나라 조선을 디자인한 혁명가 삼봉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봉화 지역의 향리였다. 고려 시대까지 향리는 우리가 아는 조선조의 향리와는 그 격이 달라, 지방의 토착세력을 말한다. 정도전 집안은 경상도 봉화지역의 토착세력인 셈이다. 부친 정운경의 뒤를 이어 과거에 급제한 정도전은 22살 때 충주 사록에 임명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공민왕의 유학 육성 사업에 참여해 성균관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몽주∙이숭인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정도전에게 시련의 시작이었다. 공민왕의 뒤를 이어 우왕이 즉위하였는데, 우왕이 재위하던 때는 정도전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인임 등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양측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고, 결국 원나라 사신의 마중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정도전은 오늘날의 전라도 나주에 속해 있는 회진현에서 유배 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주시 다시면 백룡산 자락 소재동 백암마을은 삼봉 정도전이 3년 동안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다. 나주시는 그의 유배지에 초가를 짓고 비석을 세워 여행자를 반기고 있다. 권문세족의 친원정책을 반대하던 정도전에게 원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영접사의 일을 맡겼는데 정도전이 거부하자 이를 빌미로 그를 나주 소재동으로 유배시킨 것이다. 정도전의 나이 34세 때 일이다. 소재동은 나주의 속현인 회진현이 관할하던 촌락으로 농사를 짓는 양민들이 살고 있었다. 정도전은 소재동에 유배된 3년 동안 그의 정치철학에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민본정치의 싹을 틔우게 된다. 유배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고향 영주와 삼각산, 부평, 김포 등지를 전전하면서 개혁사상을 키웠다. 고려 우왕 9년(1383), 이성계와 혁명을 모의하고 도탄에 빠진 농민을 위하여 전제개혁을 성공한 뒤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왕조 건설을 차근차근 준비했다.
♤ 은현목장 삼거리/ 면계/ 삼리경계면(문평면 학동리, 다시면 운봉리 → 월태리)
백용길에서 우틀하여 학동봉학길로 들어선다. 마루금을 고집하며 대나무숲과 묘지를 연거푸 지나오면 학동봉학길로 나온다. 축사 은현목장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동옥선로 2차선 차도를 따른다.
♤ 나주시 다시면 월태리(月台里)
다시면 소재지이다. 면소재지가 좀 커서 시가지가 월태리와 영동리에 걸쳐 있다. 백룡산을 뒤로 하고 문평천 옆 들판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시면의 중앙에 해당되는 위치로 광목간 신작로와 철도가 있어 더불어 발전하다가 1970년대 국도 1호선이 확장되면 정류장이 북쪽(현 위치)으로 이동한 뒤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금호그룹 창업주 박인천의 고향, 복암리 고분군과 나주천연염색문화관이 있다. 나주시 서부의 소중심지 역할을 하며, 호남선 다시역은 아직도 영업중이나, 무인역으로 운행되고 있다. 고구려대학교가 복암리에 있다. 광주에서 목포, 무안, 신안 방향으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소가 있다. 자연마을로는 대용, 월명, 원동마을 등이 있는데 대용(大用)마을은 백룡산 아래에 위치하고 다시면에 속했기 때문에 다룡촌이라 부른 뒤 1935년 마을이 크게 형성되면서 대용(大用)이라 하였다. 월명(月明)마을은 조선시대에 나주목사가 이곳을 지나다가 마침 마을 뒤편에 떠오르는 달이 유난히 밝아 이곳을 월명이라 칭하였다 하고 원동마을은 삼국 통일시 신라에 원병 왔던 당나라 대군이 물러가면서 복암사를 불지르고 횡포하여 동리 앞에다 인마의 수급을 묻자 이에 분함을 참지 못한 백제의 백성들이 인마의 수급을 발굴하여 제를 지내고 원한을 달래어 줬다 하여 원동(怨洞)이라 불리어 오다 원동(元洞)으로 개칭하였다.
♤ 신걸산(信傑山, 371.1m)/ 승걸산(僧傑山)
금성산(錦城山, 451m) 용이 20km쯤 남서쪽으로 휘돌아 맺은 산으로 다시에서는 금성산을 제외하고 가장 높은 봉우리다. 남서쪽 기슭에 복암사란 절이 있다. 해발 220미터에 있는 이 절 뒤편에 물통바위란 복암이 있다. 승걸산(僧傑山)으로 칭하고 있는 것은 이 사찰을 비롯 신걸 자락에 절이 많았다는 것을 반영한 듯하다. 멧부리 북서쪽 골짜기가 절골이다. 옛 보광사터가 최근 확인된 바 있다. 동쪽 거석골에도 절이 있었다고 한다. 운암마을은 신걸의 서쪽 범박골 물이 내려선 옴팍지에 자리하고 있다. 남쪽으로 1.6km쯤 내려서면 임제 묘가 있는 백호봉(98m)에 이른다. 남서쪽 가동 골에 옛 시랑 면사무소가 있고, 자지고개 서쪽으로 넘어서 개계원이 있었다.
♤ 금산(衾山, 87m)/ 영용마을/ 면계/ 삼리경계봉(다시면 월태리, 문평면 학동리 → 옥당리)
백룡에서 대고개/대오개를 거쳐 내려온 등성이가 솟아 오른 87m의 봉우리로 금산이라고도 한다. 동쪽에 월태리 영룡마을이 있고, 남쪽에 문화류씨 마을인 문평 옥당리 유동을 비롯 금산과 옥정마을이 양지 녘에 자리잡고 있다. 동고선로 2차선 차도에서 오른쪽 비포장 영용길로 들어서고 목초지 끝 대나무숲을 빠져나오면 배나무과수원에 닿는다. 과수원 지나 만나는 삼거리에서 우틀로 휘어져 도로를 따라 1번국도로 간다. 영목제소류지를 지나 영용마을로 들어서서 마을회관 앞 정자에서 잠시 쉬어간다. 영용길로 다시 문평면 옥당리와 월태리의 경계를 따라 문평 농공단지로 향한다. 문평농공단지를 도로 따라 약 2km를 우회한다.
♤ 나주시 문평면 옥당리(玉塘里)
문평면 옥당리는 금성산 밑이 되며 고막천이 흐르는 평지에 위치한다. 자연마을로는 금옥, 금당, 동문마을 등이 있는데 금옥(金玉)마을은 마을 뒷산이 남도 8대 명당의 하나이면서 이불을 덮은 산과 같다하여 이름을 이불 뫼라 불리던 한 마을과 구슬같이 맑다하여 옥정이라 하던 두 마을이 합하여 금옥으로 불리고 있다. 금당(金塘)마을은 마을 주변에 금이 있다 하여 금의 집이라 하였다가 금을 체굴한다 하여 마을이름을 금당이라 부르고 있으며 통문(通文)마을은 예로부터 문필이 많이 나온 곳이라 하여 통문이라 칭한다.
♤ 1번국도/ 영산로/ 문평산업단지
1번국도는 중앙분리대가 높아 횡단보도로 돌아서 우회한다. 저 멀리 신호등이 켜져 차가 멈추는 사이 무단횡단을 하기도 한다. 지맥은 얕은 산을 넘어 문평지방산업단지와 사유지, 잡목숲을 통과하지만 여기서 다시면 소재지 문평천 쪽으로 우회하는 경우가 많다. 왼쪽으로 크게 우회하면 다시면 소재지이고 오른쪽 산으로 올라 한국3M 울타리를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서 회사를 지난다. 왼쪽으로 공장 안으로 들어서면 한국3엠 북문이다. 공장 아래 철망이 둘려쳐져 있지만 북문 입구 조금 못 미치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선다. 공장 사이로 잡초들이 자라는 곳으로 진행한다. 문평천 가까이로 다시면 소재지에 음식점이 많아 요기를 하고 갈 수 있는 장소입니다.
♤ 동양콘크리트/ 현대의원
메타세이아 가로수 도로를 지나 동양콘크리트 공장 입구 지난 월천경로당 갈림삼거리에 도착한다. 월태월천길을 따르면 왼쪽으로 문평천이 흐르고 다시로 2차선 포장도로가 지나는 갈림삼거리에 이르니 도로 건너편으로 호남선 철로가 높게 지난다. 가야할 방향 오른쪽으로 현대의원 버스정류장도 보인다. 2차선 도로따라 우틀해서 호남선 철길과 나란히 걷는다.
♤ 월성마을입구 표석/ 갈림삼거리
동곡리5구 월성마을 입구라는 표지석과 동촌마을 이정판이 서있고, 오른쪽으로 보이는 나주 문평산업단지와 농공단지를 빙 둘러서 여기까 온 셈이다. 다시 2차선 포장도로를 서쪽으로 보내고 왼쪽으로 이어지는 송촌동곡길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서쪽 방향으로 들어가면 옥당리가 나온다. 철로를 건너는 첫번째 육교앞 삼거리 옥당버스정류장에서 오른쪽으로 큰길따라 올라간다.
♤ 이불뫼재(39.1m)/ 4등삼각점(나주 467/ 1984 재설)/ 면계/ 삼리봉(문평면 옥당리, 다시면 월태리 → 다시면 동곡리)
영계촌 남쪽 국도 1호선이 지나는 고개를 이불뫼재라고 부른다. 백룡의 산줄기가 이불 뫼로 내려 국도1호선을 넘어 진등에서 서쪽 범산 능선과 남쪽 대양뫼 줄기로 갈린다. 다시면 동곡리 월성마을입구 표석이 있는 곳에서 우틀하여 계속 도로를 따른다. 나주나씨세장산비를 지나고 송촌동곡길을 따르다 갈림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밭경작지가 보이는 갈림삼거리가 다시 보이는데, 호남선 철로 두번째 육교 앞에서 오른쪽으로 걸어가니 오른쪽으로 그물망이 설치된 과수원과 왼쪽으로 밭경작지가 나타난다. 밭경작지 가장자리를 타고 걸어가니 묘지지대에 이르고, 잡목지대를 올라서니 호남선 철로 절개지 위에 맨발님 산패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39.1m봉이다. 다시 갈림삼거리로 되돌아 내려온다.
♤ 나주시 다시면 동곡리(東谷里)
다시 맥길로 복귀하여 철로를 건너면 월성마을(동곡) 버스정류장이다. 동곡리는 나주시 다시면에 있는 해발 30~50m의 구릉지에 기대고 양지바른 남동향을 취하며 자리하고 있는 동네이다. 자연마을로는 동촌, 대곡, 월곡, 시계마을 등이 있는데 동촌마을은 수다면 본촌 마을의 동쪽에 있다 하여 동촌마을이라 하였으며 대곡마을은 원래 물한실이라 부르고 이는 큰 마을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월곡마을은 마을 뒷산이 달모양 비슷하다 하여, 시계마을은 마을 앞에 하천이 흐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문평면과 다시면의 면계를 따르던 지맥이 좌우 완전하게 다시면 내안으로 들어서서 합수점까지 갑니다.
♤ 호남선철로/ 육교/ 문평면 → 다시면
갈림삼거리에서 송촌동곡길 2차선도로로 잠시 더 걸어가니 철로위 육교가 나타난다. 육교를 건너 삼거리에서 왼쪽 일등농장 방향으로 간다. 지맥이 문평면을 떠나 다시면 동곡리 내로 들어선다. 임도를 따라 월성목장을 지나고 함평이씨세장산비를 지나 직진한다.
♤ 대박산(大朴山, 54.6m→2.3k)/ 한박산
대양뫼 능선은 대곡마을 북서쪽에 이르러 남서쪽 청림과 남동쪽 대박줄기로 다시 분기한다. 지맥에서 2.3km 떨어져 있는 나주시 다시면 가흥리와 신석리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마루금이 살아있지 않아 다녀올 사람은 없을 것으로 보이지만 태청지맥에서 분기한 족보있는 산이다. 뒤를 돌아보니 복암사가 있는 신걸산(信傑山, 371.1m)이 다시면 오른쪽에 보인다.
♤ 송촌동곡길/ 다시면 동곡리 - 문동리
흥성장씨 세장산비와 제각, 선산김씨세장산비를 지나고, 청학한우농장 오른쪽 밭을 따라 진행하여 묘지 상단으로 올라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가야할 144.8m봉이 바라보인다.
♤ 144.8m봉/ 삼리봉(다시면 문동리, 동곡리 → 송촌리)
산줄길을 잠시 지나 약 67km 지점인 144.8m봉 닿기 전 능선 조망바위에 올라서니 북서쪽으로 문평 읍내 방향 뷰가 환하다. 송촌리에서 고막원천 방향으로 산줄기가 흘러가고 그 오른쪽 평야지대 한가운데 섬처럼 서있는 밤산(105.8m)이 인상적이다. 144.8m봉에 이르니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달려 있다. 서쪽으로 고막원천이 돌아나가는 월봉(149.7m)을 감상하고 그 왼쪽 뒤로 철성지맥의 속금산도 찾아본다.
청림산에서 철성지맥 속금산과 이별바우산이 보이고, 그 너머 남서쪽으로 더 멀리 옥룡지맥의 고문산(103.5m) 과 망해산(148m)을 찾아봅니다. 합수점 왼쪽 영산강 건너로 나주영상테마파크가 사면에 있는 중악산(116.8m)과 옥룡지맥의 구수봉(153.1m)도 찾아봅니다.
♤ 청림산(靑林山, 189.1m)/ 3등삼각점(영암 302/ 1999 복구)/ 삼리봉(다시면 문동리, 송촌리 → 동당리)
청림산은 민정골과 황새골 사이의 등성이로 기다가 치솟은 봉우리다. 오른쪽으로 합수점 날머리가 뚜렷하게 보이고 그 오른쪽 뒤로 철성지맥 마지막 이별바우산도 눈에 들어온다. 시계가 맑으면 목포로 향하는 영산기맥도 바라보고, 합수점으로 직선으로 향하지 않고 직진하여 왼쪽으로 돌아서 내려간다. 지맥의 오른쪽이 송촌동에서 동당리로 바뀌어 문동리와 동당리의 경계를 따른다. 청림산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와 문동리 경계에 있는 산으로 동당·문동리 일대의 어머니 산이 되고 있다. 호구총수에 죽포면 청림촌(靑林村)이 기록되어 있고 서쪽에 탐진 최씨 집성촌인 청림 마을이 있으며 마을에는 일제강점기 때 황석어 젓배가 닿던 힌모랑지(백두평) 포구가 있었다. 준희선생님과 백두산악회 산패가 소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다.
♤ 169m봉/ 다시면 문동리 - 동당리
청림산에서 잠깐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선 태청지맥의 마지막 봉우리이다. 준희선생님 산패가 소나무에 매어져 있다. 우틀로 내려선다. 맥길은 동당리 내로 들어서서 급내리막으로 탐진최씨 묘소인 숭조원으로 내려서는데 마루금이 대나무로 빼곡하여 우회해야 한다. 소나무숲길을 내려서서 산죽밭 직전에 왼쪽 밭으로 내려서서 밭가장자리 농로를 따르다 사자석상이 있는 묘지가 보이는 양회임도로 우틀한다. 목장 있는 곳에서 좌틀로 농로를 따르고 2차선 차로가 지나는 청림로에 닿으면 탐진최씨 숭조원(崇祖園) 표지석이 있는 곳이다.
♤ 청림길/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당촌마을
숭조원 (崇祖園) 앞 도로로 내려선다. 당촌마을 입구로 나오고 청림마을 입구를 지난다.
♤ 영산강로/ 동당교차로
동당교차로로 올라서서 횡단보도를 건너 우틀한다. 동당리는 동백리와 당촌리가 합해진 마을 이름이다.
♤ 석관로
801번 도로를 건너 합수점으로 간다.
♤ 영산강황포돛대나루터/ 석관나루/ 주차장/ 화장실
영산강황포돛대나루터를 지나고 묘지 옆에 함평이씨의 정자 석관정을 지나 이별바위 아래 합수부를 다녀온다.
석관정나루는 전남 나주시의 다시면 동당리 석관정(石串亭)에서 공산면 신곡리로 건너는 나루였다. 석관은 옛 이름 돌고지〉돌곶으로 강쪽으로 바위가 툭 튀어나온 곳 즉 벼랑에 위치한다는 의미로서 석관정은 함평 이씨 정자이고 강 건너편에는 금강정이 있다.
♤ 석관정(石串亭)/ 영산강 3경 석관귀범
석관정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동백마을에 있는 정자로 최초 건립연대는 1530년이다. 1530년(중종25)경 함평이씨 함성군 이극해의 증손인 신녕현감 석관(石串) 이진충(李盡忠)이 정자를 창건하여 석관정(石串亭)이라 정제(亭題)하였다. 1755년(영조31) 8세손 이시창(李時昌)에 의하여 초가(草家) 두어간을 세웠고 1906년 14세손 춘헌의 출연으로 후손 돈학 목헌등이 협력 중건하였으며 1937년 중수하고 1998년 정면 2간과 측면 2간 석조8작 골기와 지붕으로 중건 석관정기(石串亭記)를 비롯한 기문과 시문을 적은 현판들이 걸려 있다. 석관정 앞에는 관리가 되지않는 문화류씨 할머니 묘가 있다.
♤ 이별바위(別巖)/ 합수점
수백 번은 오갔을 물길 위의 이별바위는 숱한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사랑과 헤어짐의 장소였다고 하며, 전쟁 때마다 영산강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배로 장정들을 실어가면서 이곳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고 한다. 배에 몸을 싣고 떠나는 남편, 아들, 임을 보며 연인과 가족들은 강변을 따라 왔다. 그런데 이곳에 도착하면 강폭이 넓어지고 더는 강변을 따라 갈 수가 없어져 이곳 바위에서 이별을 하거나 강물에 투신했던 슬픈 역사가 전해져 내려오는 장소이다. 오른쪽 고막원천이 왼쪽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영산강/ 고막원천 합수점이다. 태청지맥의 이별바위에서 보면 철성지맥의 이별바위가 아주 가까이에 보인다.
♤ 고막원천(古幕院川)
고막원천은 장성군의 삼서면 태청산(593.4m) 남쪽 산록 일원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영산강으로 유입하는 하천으로 지방 하천과 국가 하천으로 구분되어 있다. 상류의 학성리 일대에 유정저수지가 있고 대곡리 일대에서 유평천을 우치리에서 대도천을 계림리에서 삼서천을 합류한다. 함평군으로 유입하면서 월야면 정산리 일대에서 용암천이 합류하고 용월리 일대에서 넓은 평야를 이루며 이후 나산면으로 유입하면서 국가 하천이 되고 계속 남쪽으로 흐르다가 나주시 다시면 동당리 일대의 석관정 나루터에서 영산강과 합류한다.
♤ 영산강(榮山江 136km, 다시면 구간 14.5km)
영산강은 전남 담양군에서 남서쪽으로 흘러 황해로 흘러드는 강으로 길이는 115.5km이고 담양군 용면 용추봉(560m)에서 발원하여 담양과 광주, 나주, 영암 등지를 지나 영산강하구둑을 통하여 황해로 흘러든다. 남서류하면서 광주천(11.8km)과 황룡강(45km), 지석천(34.5km), 고막원천(21.4km), 함평천(15km) 등의 지류와 합류한다. 장성 입암 갈재에서 불갑산으로 치달리는 노령과 담양 용추봉에서 금성 설산을 거쳐 무등산으로 올라 월출산까지 이어지는 남쪽 능선의 울타리 안에 흐르는 1,345개 2,740km의 물줄기를 통틀어 부른다. 이중 법정 하천은 185개 갈래에 1,472km다. 다시 앞을 흐르는 영산강은 담양 가마골에서 나온 극락강, 장성 입암과 담양 월산 병풍산 북쪽 쪽재골에서 나온 황룡강, 화순 쌍봉사 천리난골에서 발원한 지석강이 광탄에 이르러 노안에서 나온 장성천을 더해 남쪽으로 흐른다. 나주대교를 지나 남쪽으로 흘러가다 나주시가지에서 나온 나주천과 금천에서 나온 오강천을 보태 토계동을 감돌아 옛 노항포에서 새로 하구가 바뀐 영산천을 만나 서류하다 영산포 옛 위 선창에서 봉황천을 더해 영산포 옛 선창을 지난다. 옛 동척창고가 있는 주면창동네 서쪽 새끼내라하는 곳에서는 만봉천을 더하고 앙암바위와 제민창을 지나 구진포에 이르면 북쪽에서 나온 신광천을 보태서 회진리 회진을 지나 남서쪽으로 흘러가다 다시 신석리에서 하구가 새로 난 문평천(다시천)을 만나고 곧 남동쪽에서 흘러온 덕산천도 보태 재창포를 거치지 않고 직강된 유로를 타고 죽산리를 감돌아 북서류하다 동당리 석관정 서쪽에 다달아 북쪽에서 내려온 고막원천을 합해 학교면 중천포를 지나 월호리를 감돌아 곡창리 사포 서쪽에서 남류하는 함평천도 더한다. 이 구간은 맑은 모래와 강물이 조화를 이뤄 절경을 자아내고 있어 사호강(沙湖江)이란 이름을 얻었다. 조석의 영향이 나주 부근까지 미쳐 연안 농경지에 하천이 범람하고 농토가 침식되는 등의 피해를 주기도 하였으나 1981년 12월에 하굿둑이 축조됨으로써 감조구역(感潮區域)이 크게 줄어들었다.
♤ 에필로그
쉬이 덤비기 어려운 태청인지라 택일 하는데 오래 걸렸어요. 역시 명불허전 가시나무에 안면을 몇 번을 할켰는지 여기저기 피를 본게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간신히 겨울 막차를 타고도 이럴진데 여름에는 우회 또 우회뿐이 방법이 없을것 같습니다. 봄비가 잦아 조정하여 급하게 하루 당겨 출발해야 했고 다행히 마지막날 숭조원에 내려서니 그때서야 비가 듣기 시작하네요.
이번에도 나주 동밖에 대장님 신세를 크게 졌습니다. 첫날 분매동고개로 오신다는걸 어떻게 될지 몰라 사양하였고, 둘쨋날 일정이 취소되어 지원이 가능하시다며 백룡산 아래로 마중을 나와 주셨어요. 덕분에 첫구간을 정도전초당을 구경하는 걸로 마무리를 하고, 나주에 나가 홍어1번지에서 정식을 먹고, 혁신도시 중흥찜질방에서 잘 쉬고, 새벽 5시에 만나 2구간을 택배해 주셔서 비가 오기 직전에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한 구간으로 마칠려면 21시나 22시까지 운행해야 했기에 동밖에대장님께 오룩스를 사사받기 위해 일찍 마쳤답니다. 지도를 40G, 9G 두개를 깔아주셨고, 간단하게 운용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시는데 홀대모 모임에서 노란세이버님께 들은 강의로 벽창호는 아니었습니다만 아직 저장한 트랙을 옮기는 방법을 더 배워야합니다.^^
트랭글을 운용하며, 수시로 오룩스 두개의 지도도 바뀌가며 비교해서 걸으니 장님이 눈을 뜬거나 마찬가지더군요. 등고선이 보이니 어째서 어떻게 우회를 하는지 알 수 있어 좋았습니다. 삼각점을 찾는 것도 전혀 어렵지 않게 되었네요. 당연히 밥값이라도 제가 내야는데 그마저 선수를 빼앗겼습니다. 여러모로 대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태청 졸업 축하드립니다.
아즉 얼라라서 그런가, 무지 긴 거리를 한번에...
부럽습니다. 몸보신 잘 하셔요.. 병나지 않게...
고문님!
늙으면 애 된다잖아요. 너무 설워 마세요.
고문님도 왕년엔 펄펄 날으셨잖아요.. ㅋ~^^
이번엔 다욧 산행이 제대로 먹혔습니다.
일단 동밖에대장님이 사주신 홍어정식이 비싸지만 비만과는 거리가 멀었구요.
중간에 행동식으로 계속 튀김건빵을 이용했어요.
마지막날 서두르느라 아침을 먹지 않았는데,
게토레이 반병 두번 마시고도 끝까지 갔습니다.
다시터미널에 나와 시골 할머니들과 남은 건빵 한봉다리를 뜯어 나눠먹고,
그 길로 그냥 서울까지 올라와서 집에 와서 오후 네시쯤 저녁으로 백반 정식을 먹었으니 성공했죠!^^
길었습니다만 공부한 대로 척척 나오니 어렵진 않았어요.
하지만 백룡산 가는 길에 어디서부터 등산로가 좋아진다고 하던데
하날 넘어도 여기가 아닌가벼~ 또 하날 넘어도 여기가 아닌가벼~ ㅋㅋ
백룡산에 내려서면서는 의외로 거리가 짧았습니다.
1번국도에서 왼쪽 공단 끝으로 문평천까지 가서 월태리 시내에서 요기를 하고
현대의원으로 해서 다시 월성마을 입구로 걸어가던데...
1번국도에서 묘 있는 곳으로 얕은 산을 넘으니 공장이 나오고 울타리를 따라 내려서니 철로였습니다.
동밖에대장님 지원 덕분에 아주 재미있게 수월하게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태청지맥 완주 먼저 축하 드립니다
태청산 분기점을 봉정사에서 들머리를 삼았네요
우리는 예전 우리는 영광군 대마면 죽동마을에서 올라 갔지요
시간은 비슷하게 걸리는것 같습니다
태청산을 내려서다가 시누대구간을 바로 내려서서 알바를 하여 힘든 기억이 납니다
비온뒤라 가파르게 내려선 기억도 나도 넘어지기도 했지요
상무대 군부대를 빙돌아서 지나가는 곳이 이어진 기억도 나지요
태청산에서 내려서면 임도에서 x242.0봉으로 해서x202.9봉으로 이어지는 맥길이 올바른 지맥 산줄기 이겠지요
태청지맥에는 태산(太山) 월악산(月岳山) 병풍산(屛風山)도 있고 누구 들으면 엄청 대단한 산으로 여기겠지요
비록 낮은 산줄기지만 만만치 않는 지맥인데 한번에 마치시는 열정 대단 하십니다
호남지방에 있는 지맥들이 조금 있으면 진행하기 힘든 지맥에 속합니다
가시도 많고 그러나 두릅은 많이 채취한 기억이 많습니다
마지막 석관정나루에서 마무리 했고 관광객도 많던데 지금은 한산하겠지요
나홀로 늘 하시는 열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늘 안산 즐산 하시고 행복한 지맥 이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와룡산선배님!
태청 쉬운듯 하면서도 덤비기에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운달지맥 여우고개에서 비박하던 때가 영상 9도였는데 이번엔 새벽 기온이 -1~0도 였습니다.
움직이면 춥지 않지만 그냥 있으면 오들오들 떨리는 온도네요.
제가 꾸준히는 가지만 빨리 가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그래도 무게는 속도와 반비례하겠죠.
침낭을 가져다니자니 무게가 만만찮고 딜레마입니다.^^
짐을 가져다니면 좋습니다.
컨디션이 좋으면 자정까지 운행할 수 있으니깐요.
늦게까지 운행하고, 그 자리에서 자고 곧 바로 일어나서 가니깐 시간 관리가 효율적입니다.
혼자 다니면 가고 싶은 만큼 가고, 쉬고 싶은 때 쉬면 되니 아주 좋습니다.
주위 신경 쓰지 않고 혼자 사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저는 천상 홀대모입니다.
성격은 활동적이고 사귐성 좋게 태어났지만 세상 제 뜻대로 살아지는건 아니니깐요.
올해 70km 이상 지맥을 10개 이상은 할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퐁라라운영자님의 태청지맥 졸업을 축하드립니다.
2박3일동안 77km나 되는 장도를 주야없이 ~ 거침없이 질주 하셨네요.
영산기맥 태청산에서 분기되어 지맥 이름을 얻었고, 남으로 곧게 가지쳐 나주시 석관정에서 영산강을 보며 마무리하셨군요.
나주 동밖에님께서 도움을 주시고 오룩스맵 설치 등 잊지못할 추억을 나누셨습니다.
멋진 산행담을 즐감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방장님!
오늘 아침엔 일찍부터 옥룡지맥과 백룡지맥을 다듬고 있습니다.
백룡지맥 최고 잡목지는 호산 오르는 길이구요.
옥룡지맥 최고 잡목지는 두류산 내려서부터 나주C.C.위를 지나 삼장터널 건너 102.6m봉까지로 약 네시간에 걸친 7km 정도라고 하는군요.
동밖에대장님 회사가 두류산 아래에 있답니다.
대장님께 박배낭을 할매당고개로 옮겨주시도록
잘 부탁드려,
낫하고 전지가위를 가져가 길을 좀 넓혀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리고 백룡과 옥룡을 하며 서남해안을 접수하고 영산강 나주를 통해 무진주로 세력을 넓혀간 왕건과 견훤의 제1,2차 나주공방전을 읽고 있습니다.
주변 봉대와 태청, 옥룡, 백룡, 장원, 분적, 병풍까지 도움이 많이 될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