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단종의 슬픔
세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문종은 2년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종의 뒤를 이어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오른 단종은 나이가 12살이었습니다. 상복을 입은 단종은 2년이 지나서야 장가를 들 수가 있었습니다. 경복궁에서는 어린 임금만이 외롭게 지낼 뿐이었습니다. 또한 어린 임금이 아무리 총명하다고 하지만 정치를 제대로 처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왕에게는 어머니와 할머니도 없었으므로, 대리로 수렴청정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임금은 수많은 관리를 임명하고 또 파면해야 합니다. "나는 너무 어려서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여기 이렇게 노란 표시를 해 올렸습니다. 저희가 표시해 놓은 대로 처리하시면 됩니다." 의정부의 세 정승이 이름 위에 노란 표시를 하여 올리면, 단종은 그 사람을 임명하거나 파면시켰습니다. 이것을 '황표 정치'라고 합니다. 의정부의 세 정승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본이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황표 정치를 함으로써 자기들 마음대로 관리를 임명하고 파면해가며 정치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정의 정치가 그렇게 되자, 이것을 지켜보는 종친들의 불만이 늘어났습니다. 종친 가운데서도 특히 임금의 숙부가 되는 수양대군의 불만이 가장 컸습니다. 더욱이 수양대군은 '분경을 금한다'는 말을 듣고 화를 내었습니다. 분경이란, 분주히 경쟁하여 드나든다는 것으로, 권세 있는 집에 드나들며 벼슬을 얻는 운동을 한다는 뜻입니다. 수양대군은 즉시 황보인과 김종서를 찾아갔습니다. "나는 오늘 분경을 금한다는 첩지를 받았습니다. 조정의 당상관 이상의 벼슬자리에 있는 사람의 집과, 대군의 집에 드나들며 분경하는 자를 법으로 금한다 하였습니다. 때문에 나, 수양대군의 집에도 사람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면, 이것은 나를 비롯한 종친들을 집 안에 가두어 두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나와 우리 종친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사람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오?" 수양대군이 따지고 들자 황보인과 김종서는 대꾸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황보인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마 사헌부에서 그렇게 정한 모양인데, 잘 알아보아서 대군들만은 그 법을 풀도록 하겠습니다. 오해를 푸십시오." "정녕 믿어도 되겠습니까?" "예, 믿어 주십시오. 그런 일로 조정과 공실 사이에 틈이 벌어져서야 되겠습니까?" "알았소이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 말이 허튼 말이 안 되도록 해 주시오." 이로써 분경 금지법은 있으나마나 하였으며, 수양대군의 위세는 더욱 높아 갔습니다. 한편, 안평대군도 왕손으로서 글을 좋아하고 서예에 뛰어나서 많은 선비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찾아오는 문객 중에는 별로 뛰어난 인물이 없었습니다. 이와 반대로 수양대군을 찾아가는 문객 중에는 지혜를 갖춘 뛰어난 문객이 많았습니다. 이 무렵에는 명군인 세종 대왕의 정치에 힘입어서 아직도 태평한 세월을 누렸습니다. 정치가 안정되고 사회 질서가 잡혀감에 따라 유능한 인재들이 등용되고, 실력이 없는 사람들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여 불평과 불만으로 세월을 보내기 마련이었습니다.
청주 한씨의 개국 공신인 한상질은 대제학을 지냈고,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받아 온 사람이었습니다. 한상질의 손자가 되는 한명회는 하도 못생기고 몸집이 작아서, 어릴 때부터 '칠삭동이'라는 별명이 붙어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칠삭동이란, 어머니가 10달도 안 차서 일곱 달만에, 미리 낳았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한명회는 명문 집안의 자손이라 하여 10살이 넘자 중추부사 민대생의 사위로 장가를 들었습니다. 한명회의 장모되는 허씨부인은 사윗감이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여보, 대감. 한명회는 칠삭동이가 분명합니다. 그토록 모자라는 사람을 사위로 고르다니요." "허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사람은 겉만 보고 그 사람의 앞날을 점치면 아니되오. 지금은 사위가 칠삭동이 같이 보이지만, 두고 보시오. 뒷날 반드시 크게 성공할 것이오." "머리통만 컸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것 같아요." "바로 그거요! 머리통이 큰 것으로 한 몫 단단히 할 사람이오." 사실, 한명회는 머리가 남달리 커서 '대갈 장군'이라는 별명도 붙었습니다. 대갈이란, 머리를 속되게 이르는 말입니다.
"아무리 그렇지만, 곱디고운 우리 딸아이가 불쌍합니다. 글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그 사람에게 어떻게 시집보낸단 말씀입니까?" 허씨 부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대생은 한명회를 사위로 맞았던 것입니다. 한명회와는 반대로, 민대생의 딸은 보기 드문 미인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 한명회의 딸은 예쁘게 잘 낳아서 왕비로 시집까지 보내었습니다. 아무튼 한명회는 나이가 서른이 되도록 과거 하나 급제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낭인 신세가 되니, 처갓집에서 좋아할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장인인 민대생만은 그를 잘 대접해 주었습니다. 한명회의 친구이며 집현전 학사였던 권람은 과거를 보아 세 번이나 장원을 하여 이름을 떨쳤으나, 웬일인지 출세의 길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세 번은 그만두고도 한 번 과거에 급제하기도 어려운데, 세번씩이나 그것도 장원으로 급제했다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 할 정도입니다. "여보게, 과거에 급제해서 무엇하나? 세 번 장원한 내 신세도 요모양 요 꼴이지 않나." 권람은 한명회를 만날 때마다 푸념을 하였습니다. "세 번씩이나 장원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세 번씩이나 장원을 했어도 벼슬하나 제대로 얻지 못한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네 그려. 어쩌면 자네는 남이 하지 못하는 힘든 일만 골라서 하는가?" 이처럼 한명회는 말솜씨 하나만은 뛰어났습니다. 권람은 한명회에게 송도의 경복궁 궁지기 자리를 구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한명회는 궁지기 노릇이 마음에 들지 않아 큰 뜻을 품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로 올라온 한명회는 권람의 추천으로 수양대군의 장자방이 되었으며, 뒤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올려놓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수양대군의 집에 들어간 한명회는 본격적으로 일을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거사하는 무인으로 홍달손, 양정, 유수를 불러들였습니다. 무서운 음모의 불길이 타올랐습니다. 1453년 늦가을, 이 날 수양대군의 집에는 활쏘기를 한다는 구실로 무사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 수는 60명 가량이나 되었습니다. 이들은 잘 차린 음식을 배불리 먹으며 하루를 즐겁게 지냈습니다. 뒤뜰에 따로 마련된 술자리에는 수양대군을 비롯하여 권람, 한명회 등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제일 윗자리였습니다. 그 다음 자리에는 무장인 강곤을 비롯하여 홍윤성, 안경손, 홍순로, 민발, 곽연성 등 무예에 뛰어난 장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이 날의 주역인 권람과 한명회는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거사에 필요한 계획을 세우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밖에도 거사 계획에 떠오른 인물로는 권언, 홍달손, 유수, 양정 등이 있으며 권람의 아우인 권경도 이 자리에 나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결정을 보기 위해, 수양대군은 홍달손을 김종서의 집 근처로 보내어 동정을 살피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백두산 호랑이로 알려진 김종서를 없애기로 하였으나, 반대하는 의견이 나와서 좋지 못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종서의 집을 살피러 갔던 홍달손이 돌아왔습니다. "그 집 근처에 무사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사를 뒷날로 미루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한명회가 적극 반대를 하여 예정대로 일어나기로 하였습니다.
수양대군은 무사를 데리고 김종서의 집에 들어가 그를 죽이고, 곧장 대궐로 들어가서 어린 왕인 단종을 찾았습니다. 단종은 마침 자형 정종의 처소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입직승지 최항이 문을 열고 수양대군을 맞이한 다음, 단종을 모셔다가 용상에 앉혔습니다.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아뢰었습니다. "김종서, 황보인 등은 오래 전부터 나랏일을 제멋대로 하다가 이번에는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 충청도 관찰사 안완경 등의 무리와 역적 모의를 꾀하였습니다. 일이 하도 급하여 그 우두머리인 김종서를 먼저 죽였습니다." 단종은 새파랗게 질렸습니다. 낮에만 하더라도 어버이처럼 믿고 있던 김종서였던 것입니다. "수양 숙부님." "예, 전하." "김종서는 역적이 아닙니다. 역적질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성상의 나이가 어린 것을 노려서 그자는 안평대군을 내세워 왕위를 찬탈(빼앗음)하고자 하였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정종이 보다 못해 한 마디 하였습니다. "아무리 성상께서 어리신 들 충신과 역적을 구별하지 못하시겠습니까?" "어허, 영양위는 답답도 하구료! 나이 많은 사람도 그것을 구별하기 힘든데, 어찌하여 성상께서 아실 수가 있겠소?" 정종은 더 이상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전하, 그러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옵소서. 이렇게 신이 옆에 있사옵니다. 어서 승지를 시켜서 역적의 무리를 잡아죽이라는 영을 내리십시오. 궁성과 사대문은 신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습니다." "나는 누가 역모를 하였는지 모르지 않습니까?" "여기에 있는 승지 최항에게 명령만 내리시면 됩니다. 어명만 내리시면, 신이 모든 일을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수양숙부님이 알아서 잘 처리하시오." 이제 왕명이 떨어진 셈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은 어명을 핑계삼아서 승지 최항에게 정승·판서급의 각 대신들을 모조리 대궐로 들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은 나라에 급한 변란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대권 문앞에는 거사를 총지휘하는 한명회가 생살부를 들고 지켜 서 있었습니다. 생살부는 이름을 죽 적어 놓고 누구는 살리고 누구는 죽여야 한다는 명단 기록부였습니다. 한명회 곁에는 홍윤성, 구치관 등 세 명이 쇠뭉치를 쥔 채 대신들이 대궐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맨 먼저 영의정 황보인이 들어오자 한명회는 '쳐라'하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으윽!" 쇠뭉치를 얻어맞은 황보인은 그 자리에 쓰러져 죽었습니다. 황보인은 김종서와 함께 10여 년 동안 북쪽 국경의 개척에 공이 큰 충신이요, 문무를 겸한 노재상이었습니다. 이튿날 그의 두 아들과 손자도 참흑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황보인 다음에 차례로 죽은 사람들은 이조판서 조극관, 우찬성 이양이었습니다. 안평대군과 그의 아들은 감옥에 갇혔으며, 병조판서 민신은 능공사장에서 감독하다가 수양대군이 보낸 서조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튿날, 안평대군 부자는 귀양을 보냈습니다. 조극관의 아우인 조수량도 파직시켜 귀양을 보내고, 충청감사 안완경도 귀양을 보냈다가 죽였습니다. 다음에 가장 두려운 사람은 국경을 지키는 이징옥이었습니다. 이징옥은 김종서의 심복이며, 안평대군과도 친했습니다. 수양대군이 박호문을 이징옥의 후임으로 임명하여 보내고, 이징옥이 오면 죽일 계획을 세웠습니다.
일을 일단 끝낸 수양대군 일파는 새 조정을 이끌어 나갈 사람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수양대군은 뒤에서 조정하고, 권람과 한명회가 승지 최항을 시켜서 관리 임명을 단종에게 허락 받도록 하였습니다. 어린 단종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들이 가지고 온 문서에 옥새를 찍고 교지를 내렸습니다. 수양대군은 영의정과 이조·병조 판서를 겸하고 경연의 영사까지 겸했으므로 정권과 군사권을 한 손에 쥐게 되어 수양대군은 왕이 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수양대군 일파가 모두 중요한 벼슬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로써 황표 정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