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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을동환해장성 (제주시)
제주시 화북1동 배를 타고 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주도에서는 해안선을 따라가며
성을 쌓았는데 이를 환해장성이라 한다.
현재 성벽이 남아있는 곳으로는 온평리, 행원리, 한동리, 동복리, 북촌리, 애월리, 고내리 등 14곳
이 있다. 김상헌이 지은 『남사록』에는 환해장성을 일러 ‘탐라의 만리장성’이라 부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곤을동 환해장성의 성벽 길이는 약 140m이다. 성벽은 바깥쪽으로 배가 부른 형태
로, 성 위에는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뚫린 여장이 있다.
배를 타고 들어오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제주도에서는 해안선을 따라가며 성을 쌓았는데 이
를 환해장성이라 한다.
귀덕연대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한림읍 귀덕리에 있는 한림읍 명월리의 명월진 소
속의 성으로 귀덕연대는 동쪽으로는 애월연대[직선 거리는 3.2㎞], 서쪽으로는 도내봉수[직선 거리
2.7㎞] 와 교신하였으며, 소속 별장 6명, 봉군 12명이 배치되었다.
주변 해안과 비교하여 완만하게 안으로 들어온 속칭 ‘복덕개’라 부르는 포구 가까이 귀덕 초등학교
의 교내 북쪽 울타리 안에 위치하고 있다.
연대는 높이 3m 정도의 모래 언덕 위에 세워졌으나, 지금은 지대석만 4.9x3.8m 길이로 가지런히
‘ㄷ’ 모양으로 남아 있다. 석재의 크기는 17x91x19㎝, 17x83x24㎝로 조사되었는데, 당대에 쌓았던
석재가 아니고 최근에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남두연대 (제주시)
제주시 애월읍 신엄리에 있는 조선 시대 애월진 소속의 남두연대는 동쪽으로 수산봉수(직선 거리
2.5㎞), 서쪽으로 고내봉수(직선 거리 2.7㎞)와 교신하였으며, 별장 6명, 봉군 12명을 배치하였다.
해안 도로가 시작되는 구엄리에서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2㎞ 정도를 가면 ‘남뜨르’라 불리는 동산
위에 남두연대가 있다.이 연대는 1977년에 고증을 거쳐 개축하였다. 상부 6.3x6.4m, 하부 7.9x7.6
m, 높이 3.9m의 밑변이 윗변보다 큰 사다리꼴로, 연대 위 난간 벽의 폭은 1.7m, 높이 0.6m이며, 출
입구는 1.2m의 폭이다. 축조 방법은 사선 방향의 거친돌 허튼층 쌓기이고, 테두리는 바른층 쌓기를
하여 높이 5단마다 심석(心石)을 물려 쌓았다.
당포연대 (서귀포시)
제주 서귀포시 하예동 제주목 대정현에 소속되었던 당포연대는 제주 서귀포시 하예동 해안 북쪽
구릉에 있다.
횃불과 연기로 평상시에는 1개, 수상한 배가 나타나면 2개, 육지로 가까이 접근하면 3개, 육지에
침범하면 4개, 전투가 시작되면 5개를 올렸다고 한다.
동쪽으로 별노천 연대, 서쪽으로 산방 연대와 신호를 주고 받았다. 이 당포 연대는 제주민주항쟁
때 연대의 기단석을 헐어 마을보호를 위해 잣담(자질구레한 돌로 쌓아올린 탑)으로 사용되었는데, 1
998년에 복원한 것이다.
동쪽으로 별노천 연대, 서쪽으로 산방 연대와 신호를 주고 받았다
대정성(남제주군)
제주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보성리, 인성리에 있으며 1418년(태종 18)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대정현감 유신(兪信)에 의해 처음 축조되었다. 당시는 성의 둘레가 약 1,450m, 높이 약 6m이고, 동·
서·남에 각각 문이 있었는데 문 위에는 망루가 있었다.
그러나 중종 때에는 성 안에 우물이 없기 때문에 외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식수의 어려움과 화재에
대한 예방 대책이 없다 하여 다른 곳으로 이전할 것을 조정에 건의한 적이 있었으나 이루어지지 않
았으며, 임진왜란 후인 1599년(선조 32)에는 성문을 방어하는 옹성과 포대를 더 쌓기도 하였다.
남문은 당초 해안루라 편액하였는데 1770년(영조 46) 현감 이관이 이를 중건하였으며, 동문은 17
95년(정조 19)에 현감 고한록이 중수하였고, 1827년(순조 27)에는 현감 박상률이 동·서문을 각각
중수하였다. 이후 1855년(철종 6)에는 역시 대정현감 신성흠이 북성 위에 망미정을 세웠다.
성은 현재 대부분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으며 그 중 북쪽의 성체는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
는데, 성벽의 너비는 2.75~3.85m, 높이는 2.75~3.095m이다. 당시의 성안에 있던 관청 건물인 객
사동헌·어변청·아사·향사당·영안관 등이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대포연대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금릉리에 있는 조선 시대 명월진 소속의 연대가 있었던 터로서 대
포연대는 동쪽으로 배령연대(직선거리 4.4㎞), 서쪽으로 두모연대(직선거리 873m)와 교신하였으
며, 소속 병장 6명, 봉군 12명을 배치하였다.
판포리의 민가가 밀집된 마을에서 두모리(頭毛里) 쪽으로 일주 도로를 따라 500m 정도 떨어진 곳
에 이르면 주변 지형보다 3.5m 높은 곳에 연대가 있었다.
현재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지만 연대 자리에 서면 서쪽으로 두모연대가 가까이 보이고, 동쪽으로
배령연대가 있는 금능리 해안이 보인다.
해안과는 180m 떨어져 있으나 지형이 주위보다 높아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대포 연대는 동쪽으로 마희천 연대, 서쪽으로 별노천 연대와 신호를 주고 받았다.
두보연대
자료 미수집
말등포연대 (서귀포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에 위치한 정의현에 소속된 연대로 말등포 연대는 제주읍
성의 139리, 정의현성에서 동남 20리에 해당하는 연대로 북동쪽으로 협자 연대, 남서쪽으로는 천미
연대와 교신했으며, 직선거리로는 협자 연대와 5.3km이고 천미 연대와 6.9km이다. 소속별장 6명,
연군[직군] 12명이 배치되었다.
신양리에서 해안선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다가 온평리를 지나면서 지형이 밖으로 돌출되는 곳에 연
대가 위치하여 있다. 연대 북동쪽으로는 수산봉과 협자 연대, 서쪽으로는 독자봉 그리고 남서쪽으로
는 달산봉과 천미 연대가 위치하고 있다.
말등포 연대는 상부 9.9m×9.4m, 하부 10.4m×10.5m, 높이 3.6m인 사다리꼴로 다른 연대에 비하
여 비교적 규모가 크다. 연대 위에는 지름 1.9m, 높이 0.6m의 불을 피웠던 화덕자리가 있다.
천미 연대·협자 연대와 축조 방식은 유사하지만 폭 0.7m인 입구는 일반적인 연대와는 달리 한쪽으
로 치우쳐 있으며, 돌계단은 연대 상부까지 연계되지 않고 높이 1.1m 정도까지 설치되어 있다. 축조
방법은 허튼층쌓기이며 모서리는 높이 23cm, 폭 62cm의 큰 판석(板石)에서부터 높이 10.2cm, 폭
33cm의 작은 판석으로 한 바른층쌓기이다. 제주도 고유의 전형적인 연대 축조방법으로 여겨진다.
명월성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명월리와 동명리 일대에 있는 명월진성은 둘레가 3천 20척, 높이가
8척이었으며, 동쪽과 남쪽 및 서쪽에 각각 성문이 있었다.
성안에는 수량이 풍부한 샘이 있었고, 건물로는 객사·별창·군기고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도 남
아 있지 않다.
명월포는 1270년(고려 원종 11)에 삼별초의 별장(別將) 이문경(李文京)이 고려에서 파견된 관군을
진압하고 탐라를 점령할 때 상륙한 곳이며, 김방경(金方慶)이 삼별초를 정벌할 때에도 그 일진이 이
곳으로 상륙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목장을 관리하기 위해 몽고에서 파견된 몽고인 목자[牧胡]들이 반란을 일으켰
을 때, 이를 진압하기 위하여 최영(崔瑩) 장군이 상륙한 곳도 명월포였다.
이곳에는 원래 성이 없었으나 1510년(중종 5)에 장림(張琳) 목사가 이곳은 비양도(飛揚島)로 왜선
이 가까이 댈 수 있는 곳이라 하여 그 대비책으로 목성을 쌓았는데, 1592년(선조 25)에 목사 이경록
(李慶祿)이 이를 석성으로 개축하였으며, 1764년(영조 40)에는 어사 이수봉(李壽鳳)이 조정에 건의
하여 진장(鎭長)을 조방장(助防將)에서 만호(萬戶)로 승격시키고 제주인으로 선발하여 임명하도록
하였다.
명월진성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에 있는 조선 시대 성곽이다. 이성은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
여 목성(木城)으로 만들었다가 훗날 석성(石城)으로 쌓은 조선 시대 성곽이다. 명월진성이 있는 명월
포는 고려 후기인 1374년(공민왕 23) 제주에 살던 목호(牧胡: 원나라가 운영하던 국영 목장 관리자)
가 반란을 일으키자 최영 장군이 상륙하여 난을 진압하고 돌아간 곳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인 1510년(중종 5) 제주목사 장림이 비양도 인근에 출몰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목성
(木城)으로 축조하였다. 그 후 1592년(선조 25) 제주목사 이경록(李慶祿)이 돌로 바꿔 쌓았는데, 제
주목의 서북쪽을 방어하는 진지였기 때문에 1764년(영조 40)에 조방장을 승격하여 만호를 두고, 제
주 출신을 임명토록 하였다. 명월진성의 원래 둘레는 3,020척이고 높이가 8척으로 성 안에는 풍부
한 양의 감천(甘泉)이 있었다. 동문과 서문·남문 위에는 1칸씩의 초루를 두었다. 성벽은 북서와 남동
방향으로 장축인 타원형으로, 성벽의 요소에 치성을 두어 접근하는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성 안에는 진사(鎭舍: 3칸), 객사(客舍: 3칸), 사령방(使令房: 2칸), 공소(供所: 2칸), 공수(公需: 2
칸), 무기고(武器庫: 4칸), 도청(都廳: 4칸), 진고(賑庫: 4칸), 창대청(倉大廳: 3칸), 중화청(仲和廳: 2
칸), 진졸청(鎭卒廳: 3칸)과 창고 4동(각각 2칸)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성벽은 동
문과 남문 사이 120m의 외벽 성석(城石)이며, 각 문에 있었던 옹성(甕城)은 동문 쪽에 외벽만이 남
아 있다.
모슬진 (남제주군)
제주도남제주군 대정읍 하모리에 있는 성이다. 1676년(숙종 2)에 윤창형(尹昌亨) 목사가 동해 방
호소를 옮겨서 축성하였다. 3면이 바다이므로 뭍 쪽으로 성문 하나만 두었다. 따라서 성 안에는 물
이 없어 성 밖에 있는 ‘신영물’을 이용하였다.
둘레는 100m,이고 높이는 약 4m였다. 그 후 모슬포항 개발로 부근이 매립돼 개인 주택이 들어서
면서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다.
배령연대 (제주시)
제주시 한림음 옹포리에서 협재리까지 해안선이 일직선으로 오다가 금릉리에서 밖으로 돌출되는
곳에 위치했다.
축조 방법은 잡석 쌓기이며, 그 크기는 하부 직경 4.9m, 상부 직경 1.6m, 높이 1.9m로 연대의 높
이가 낮다. 연대 위는 불을 피웠던 것으로 보이는 흙으로 된 화덕자리가 있으며 그 둘레는 5m 정도
된다.
1996년 조사 당시 배령연대의 평면은 일반적인 방형(方形)의 평면을 한 연대들과는 다르게 원형의
평면을 하고 있다. 처음 보면 방형의 연대가 허물어진 것이라고 느낄 수 있는데, 방형으로 배치된 지
대석(地臺石)이 보이지 않고, 연대를 축조한 돌이 크기가 대체로 작은 것으로 보아 평면이 원형에 가
까운 것으로 생각된다.
배령연대는 동쪽으로 만조봉수(4.3㎞)와 서쪽으로 대포연대(직선 거리 4.4㎞)와 교신했으며, 소속
별장 6명, 봉군 12명을 배치하였다.
별도연대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조선 전기의 통신 시설로 일반적인 연대의 형태인 사다리
꼴 형태에 기단 주위에 타원형의 방호벽이 설치되어 있다.
연대의 하부 폭은 8.74m×9.1m, 높이는 2.5m이다. 연대의 계단은 폭 1.4m, 길이가 2.7m이다. 지
면에서 방호벽에 오르는 계단은 길이 4.95m, 폭 1.4m이다. 축조 방식은 허튼층쌓기로 축조되었다.
화북진에 소속된 별도연대는 동쪽으로 원당봉수, 서쪽으로 사라봉수와 상응하면서 군사 소식을 전
했다. 17세기 이후 별도봉수는 폐쇄되고 별도연대가 설치되었다.
별도연대는 제주목에서 동쪽으로 12리(6.71㎞)에 위치하였으며, 봉군으로는 별장(別將) 6명, 직군
(直軍) 18명이 있었다.
별도환해장성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고려 후기인 1270년(원종 11)년 고려 군사들이 남하하는
삼별초 군사들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같은 해 삼별초 선발대가 들어와 제주에 있던 고려군 수
비대를 물리치고 여몽 연합군을 막기 위해 다시 정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성으로 활용되어 1845년(헌종 11)까지 증축, 수리되었
다. 또한 서쪽 방향에는 제주도의 관문의 하나였던 ‘화북포구’가 있다. 선박만을 이용하여 내륙과 왕
래했던 당시로서는 지리적인 중요성이 컸던 지점이기도 하다.
외벽은 궁형(弓形)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일부 단일경사의 형태를 띠고 있는 곳도 있다. 성의 높
이는 3.8m이고 길이는 640m이다.
성의 내부에는 너비 1.2m의 회곽도(回郭道)가 설치되어 있다. 여장 역할을 하는 곳은 높이 1.3m,
너비 0.5m이다. 성석의 평균적인 크기는 기단부 90×60㎝, 40×33㎝, 55×44㎝이고, 중단부 50×3
0㎝, 30×32㎝, 30×27㎝이다. 상단부는 25×25㎝, 23×20㎝, 23×20㎝, 25×18㎝이다. 바닷가의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막돌허튼층쌓기로 축조하면서 잔돌끼움을 하였다.
별방진(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에 설치한 외부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별방진은 1510년(중
종 5) 장림(張琳) 목사가 김녕방호소를 이곳으로 옮겨 별방이라 이름하였다.
성의 총길이는 1,008m, 높이는 35m 정도로 성에는 관사와 창고가 있었고, 동·서·남의 세 곳에 문
이 있다.
둘레 2,890척(960m), 높이 7척의 타원형 성으로 전체적인 지형은 남고북저이다. 동·서·남문은 1칸
씩의 초루(礁樓)가 있었고, 성 안에는 진사(3칸), 객사(3칸), 공수(3칸), 사령방(2칸), 무기고 등이 있
었다. 제주목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대변청(待變廳)과 별창고(別倉庫)가 있었는데, 1848년
(헌종 14)에 장인식(張寅植) 목사가 이를 중수하였다.
북촌환해장성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북촌리에 있는 적선의 침범을 막기 위해 현무암을 이용하여 바다
를 빙둘러 단단히 쌓아놓았다.
왜구의 침입하지 못한 것은 섬을 돌아가며 석벽이 바다 속에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해안 도로 개설 등으로 북촌환해장성 역시 거의 훼손되어 있는 실정이며 해안가에 250m 정도가
남아 있다
산방연대 (서귀포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의 산방산(山房山, 높이 395m) 앞에서 용머리해안쪽으로
능선이 이어지는 일주도로와 인접한 해안 쪽 언덕인 연디동산 또는 연디목에 조선시대 세종 19년(1
437)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없어져 현재는
연대의 주춧돌로 보이는 돌들만 곳곳에 박혀 있다. 이 연대에는 대정현(大靜縣)에 소속되었던 별장
6명, 봉군 12명이 배치되었고, 별장 1인과 봉군 2인이 1조가 되어 5일씩 6교대로 24시간 내내 해안
선을 지켰다 한다.
동쪽으로는 직선거리로 5.7km 떨어진 당포연대(唐浦淵臺, 제주도기념물 제23-11호), 서쪽으로는
직선거리로 6km 떨어진 무수연대와 교신하였다. 제주읍성으로부터는 서쪽으로 53.4km, 대정현에
서는 동쪽으로 3.9km 거리에 있었다. 산방산(山房山, 높이 395m) 앞에서 용머리해안쪽으로 능선이
이어지는 일주도로와 인접한 해안 쪽 언덕에 있는데 이 언덕은 연디동산 또는 연디목으로 알려져 있
다. 언덕에 서면 동쪽으로 월라봉(月羅峰) 앞 해안, 서쪽으로 송악산(松岳山, 높이 104m)까지 훤히
보인다.
숙종 28년에서 29년(1702~1703) 사이, 이형상(李衡祥 1653~1733)이 제주목사로 재임할 때 제
주도관내를 순력하며 제주의 자연·역사·산물·풍속 등을 자세히 기록한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보물
제652-6호)의 산방배작(山房盃酌) 그림에 산방연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삼양환해장성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삼양동에 있는 바위성으로 성벽은 단일경사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허튼층
쌓기를 했으며 속은 잡석으로 채워져 있다.
성의 높이는 2.3m이고 길이는 280m이다. 성석의 평균적인 크기는 하단부 40×35㎝, 30×26㎝, 4
0×35㎝이고, 중단부 25×14㎝, 20×17㎝, 34×20㎝이다. 상단부 20×15㎝, 17×14㎝, 23×18㎝이
다.
성석과 면석의 구분이 없으며 바닷가의 자연석을 다듬지 않고 축조하였 고 지형은 성안에 해당하
는 육지부가 높고 성밖인 바다 쪽은 낮다.다.
고려 후기 1270년(원종 11) 고려 군사들이 남하하는 삼별초 군사들을 막기 위해 축조한 성이다.
같은 해 삼별초 선발대가 들어와 제주에 있던 고려군 수비대를 물리치고 여몽 연합군을 막기 위해
다시 정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후 조선 시대에는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던 성으로 활용되어 1845년(헌종 11)까지 증축, 수리되
었다. 바닷가에 길게 축조된 성은 군사적인 목적 외에도 해풍으로 인한 농작물의 염분 피해를 줄이
기 위한 역할도 겸하고 있어서 근래까지 활용되었다.
서귀진 (서귀포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에 있었으나 그성의 자리에 조선 초기부터 방호소가 설치되어 있
었는데 해변가 홍로천 위였다.
1439년(세종 21) 한승순 제주목사가 잦은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성을 쌓았다. 성종 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에는 “서귀성은 석축으로 주위가 161척[48m],
높이 5척[1.5m]”이라 기록되어 있다.
1590년(선조 23) 이옥 목사가 서귀진 자리를 서귀포구 동쪽으로 옮겼는데 이때 진성의 규모는 주
위 251m, 높이 3.6m에 이르렀다고 한다. 서문과 남문이 있었고, 성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성 밑
으로부터 구멍을 파서 물을 끌어왔다고 한다.
성 밑 포구가 넓고 암벽으로 되어 있어 자연 방풍이 되므로 수백 척의 선박을 감추어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서귀진 주변에 사람이 살지 않았으므로, 폐지된 목장을 백성에게 나누어주고 진 주위에 살
도록 했으며 정방연 상류의 물을 끌어와 식수와 농사에 이용하였다.
서귀진지는 일제 강점기에는 기와 건물 3동과 성담이 남아 있어 일본군이 활용하였다고 한다. 4·3
사건이 일어나자 서귀진성의 성담을 헐어 마을방어용으로 축성하고, 이후에는 집의 울타리나 밭담
으로 활용되면서 대부분 훼손되어 버렸다.
<참고자료>
해안의 방어를 위하여 북변과 해안지대에 구축된 군사행정구역으로서, 조선 시대에 와서 왜구의
방어를 위하여 남방 연변에 많이 설치되었다. 조선 시대에 제주도에서는 방호소 또는 진으로 불렸
다. 조선 후기에는 9진으로 정착되었고 모든 진에 성이 축조되었는데 9진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서귀
진이었다.
서림연대 (서귀포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일과리의 해안도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무수 연대, 서쪽
으로 차귀진 소속의 우두 연대와 서로 교신하여야 하지만, 우두 연대를 대신하여 당산 봉수가 중계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직선거리로는 무수 연대와 3.2km이고 당산 봉수와 2.1km이다. 소속
별장 6명, 연군[직군] 12명이 배치되었다.
서림 연대는 1977년에 복원되었으며 상부 8.5m×8.6m, 하부 9.4m×9.8m, 높이 3.9m인 사다리꼴
이고, 연대 위 난간벽의 폭은 1.5m, 높이 0.4m이다. 주위 해변의 석재를 사용함으로써 북측과 동측
부분이 많이 허물어져서 돌계단의 형태는 확인할 수 없다.
소마로연대 (서귀포시)
제주특별치도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의현에 소속된 연대로 동쪽으로는 천
미 연대, 서쪽으로는 벌포 연대 그리고 북쪽으로는 매 오름이 있다. 천미 연대와의 직선거리는 5.2k
m이고, 벌포 연대와는 6.7km이다. 소속 별장 6명, 연군[직군] 12명이 배치되어 있다
소마로 연대는 상부 7.4m×7.6m, 하부 7.6m×7.9m, 높이 2.6m인 사다리꼴로 테두리는 다른 연대
와 다르게 각이 없고 둥글게 등이 진 모양이다. 연대 하부는 돌의 크기가 105cm×112cm×100cm
[높이×폭×깊이]로 크며, 축조 방법은 거친돌 허튼층쌓기이다. 보존 상태는 양호하며 연대 위에는
깃발이 세워져 있다.
연대주위에 잡목이 우거져 전체의 모습을 쉽게 확인할 수 없으나 연대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원조의 『탐라지초본』[1842]에 이 연대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다른 연대들에 비해 조
금 일찍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소마로 연대는 동쪽으로 천미 연대, 서쪽으로 벌포 연대와 교신
하였는데, 19세기에 이르러 연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천미 연대와 벌포 연대가 직접 교신한 것
으로 파악된다.
수근연대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용담동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사라봉수(직선거리 4.6㎞), 서쪽으로는 도원
봉수(직선거리 2.8㎞)와 서로 군사 소식을 주고받았다. 봉군은 별장 6명, 직군 12명이 있었다.
수근연대는 1978년에 제주도 내 일반적인 연대의 형태로 복원되었다. 연대의 상부는 7.1m×7.1m,
하부는 7.4m×7.6m, 높이는 2.9m로 큰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다.
연대의 난간 벽은 폭 1.1m, 높이 0.6m이며, 출입구는 1.1m의 폭에 돌계단이 4단의 디딤돌로 되어
있다. 축조 방법은 테두리에 통줄눈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 한 층은 길고 한 층은 짧게 9단으로 엇물
림하여 쌓았다. 그 위에는 마름모 쌓기에 가까운 거친 돌로 쌓기를 했다.
수산진 (서귀포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수시로 조선시대 9개 진성 중 하나로 1493년(세종 21)에 도안무
사(都按撫使) 한승순(韓承舜)이 축조하였는데, 당시 성의 둘레는 3,841m이고 높이는 53m라고 전해
진다.
서쪽의 차귀성과 함께 동쪽에서 침입해 오는 왜구를 막기 위한 성으로, 다른 '진성'들이 해안가에
있는 것과는 달리 중산간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현존하는 성의 둘레는 352.72m(1164척)이고 높이는 4.84m(16척)이다. 성 안에는 해방 직전까지
병사와 객사, 민가들이 있었으나 제주 4.3사건을 거치면서 모두 소실되었다.
동쪽 성벽과 북쪽 성벽이 만나는 지점에는 폭 6.1m, 담 높이 2m 규모의 ‘진안할망당’ 이 있는데,
이곳은 성을 축조할 때 공출을 내지 못한 부모 대신 희생된 아기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세웠다고
한다.
성의 원형과 유구 등이 잘 남아 있어 보존상태가 좋고, 축조 방식과 평면 형태가 특이하다.
신산환애장성 (서귀포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 신풍리 경계에 위치한 신산목장 남쪽 해안에 있으며 남아
있는 성의 규모는 길이 600여m, 높이 1.12~1.35m이며, 성벽에는 약 20m 간격으로 방위초소와 유
사한 사방 2m 내외 정사각의 석곽이 있었다.
환애장성(참고자료)
제주 환해장성은1270년(고려 원종 11년) 고려 조정이 삼별초가 진도에서 탐라로 들어오는 것을 막
기 위하여 영암부사 김수와 장군 고여림을 보내 축성하였다. 그후 조선시대에 와서 3성9진 25봉수
38연대로 방어 시설을 정비하면서 다시 축성되었다.
환해장성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도 왜구의 잦은 침범을 막기 위해 여러 차례 증축되었으며, 1845
년(헌종 11)에는 권직 제주목사가 제주도민을 다수 동원하여 대대적으로 환해장성을 증축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환해장성 중 일부는 이양선이 출범하는 19세기 중반 이후에 보수, 증축한 것이라고
보기도 있다.
애월연대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 있으며 애월진 소속의 연대로 동쪽으로 고내봉수(직선 거
리 2.7㎞), 서쪽으로 귀덕연대(직선 거리 3.2㎞)와 교신하였으며, 소속 별장 6명, 봉군 12명이 배치
되었다.
애월진이 있었던 곳에서 서쪽으로 6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속칭 ‘연디왓’이라 불린다.
밖으로 돌출된 해안과는 450m 정도 떨어져 있지만 지형이 주위보다 높아서 동쪽으로는 남두연대
가 있는 신엄리, 서쪽으로는 귀덕연대와 우지연대가 있는 귀덕리 해안을 거쳐 멀리 수원리 해안까지
감시할 수 있다. 애월연대는 대지가 경사져 있어 높이 1.2m의 석축을 쌓고, 그 위가 상부 8.3x8.2m,
하부 9.3x9.4m, 높이 4.8m인 사다리꼴이다. 난간 벽의 폭은 1.1m, 높이는 0.7m이고, 입구의 폭은
1.4m이다.
다른 연대와 비교하면 연대의 높이가 매우 높고, 입구 또한 중앙에 있지 않고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다. 축조 방법은 거친 돌 허튼층 쌓기로, 테두리는 심석(心石)을 상부와 하부 사이의 중간 높이에
2단 물려 쌓았으며, 총 수는 13단이다.
서남측 귀퉁이 돌 사이가 25㎝ 정도 벌어진 것을 제외하고는 원형(原形)이 잘 보존되어 있다.
애월진 (제주시)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 제주도에 있는 성이다. 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들어와서 관군을 방어하기 위
해 쌓은 목성(木城)을 방어시설로 사용하다가, 1581년(선조 14) 목사 김태정이 애월 포구 가까이에
돌로 성을 쌓아 진을 옮겼다.
석성(石城)은 둘레 약 166m, 높이 약 2m이며 남·서 두문에는 문루를 두었고, 객사와 무기고 등이 있
었다.
현재 바다와 접한 북측 성벽은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미석(楣石), 총안(銃眼), 회곽도(廻廓
道), 여장(女墻) 등이 남아 있어 당대 해안성의 방어 성격을 파악하는 좋은 자료이다.
애월환해장성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애월리에 있으며 왜구 등 적을 막기 위해 애월읍 해안가를 돌아가
면서 돌로 단단하게 담을 쌓은 약 360m의 환해장성이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으며, 현재 총 5,120m에 이르는 곳이 제주도 지방기념물로 지정되
어 있다.
애월환해장성은 군데군데 허물어지고 훼손되었는데, 최근 해안 도로의 개설과 양식장으로 훼손 정
도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다.
연동연대 (서귀포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호동에 위치한 서귀진에 소속된 연대로 동쪽으로 보목 연대, 서쪽으로
변수 연대와 교신했으며, 서귀진에 소속된 연대로 삼매양 봉수와의 직선거리는 2.1km, 변수 연대와
는 2.9km이다.
해안에서 100m 정도 떨어진 ‘망밭’이라 불리우는 해발 52.6m의 높은 언덕 위에 있다.동쪽으로 삼
매봉 앞 해안, 서쪽으로 속칭 ‘썩은섬’ 앞까지 바라다 볼 수 있는 위치이다.
지금은 연대의 돌들이 무너져서 하부 직경 9.5m, 상부 직경 6.3m, 높이 2.4m의 원형에 가까운 평
면 형태를 하고 있지만, 축조 당시 연대의 평면은 방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소포연대 (서귀포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오조리에 위치한 수산진에 소속된 연대로 남쪽으로 합자 연재,
북쪽으로 종달 연대와 교신하였으나 19세기 중반경에는 종달 연대 대신에 금로포 연대와 연락을 취
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연대와 연대의 연결이 어려울 경우 성산 봉수가 그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종달 연대와의 직선거리는 9.2km, 성산 봉수와의 직선거리는 약 2.2km 정도이다. 소속 별장 6명,
연군[직군] 12명이 배치되었다.
연대의 북쪽으로는 종달 연대와 봉수대가 있는 지미봉, 남쪽으로는 합자 연재와 식산봉 그리고 일
출봉이 있다.
복원되기 전 연대는 거의 허물어져 49cm×72cm, 46cm×77cm 크기의 석재들만 1단 남아 있었으
며 상부에는 밭의 돌담이 쌓여 있었으며 가로 8.4m, 세로 6m 정도의 방형의 평면이란 것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왜포연대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신흥리에 있는 조선시대 조천진 소속의 연대로서 동쪽으로 함덕연
대(직선 거리 1.4㎞), 서쪽으로 조천연대(직선거리 1.4㎞)와 교신하였으며, 소속 별장 6인, 봉군 12
명이 배치되었다.
일반적으로 연대의 평면은 방형(方形)인 데 비하여 왜포연대는 타원형의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다.
벽체 또한 이중벽으로 내벽과 외벽의 돌담으로 분리 축조되어 있다.
내벽과 외벽은 이중벽 역할을 하여 제주도 특유의 강한 바람을 막아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포연대는 외부 직경 7.6m, 내부 직경 2.4m 정도이고, 외벽과 내벽 사이의 폭은 1.8m이다. 난간
벽 역할을 하는 외벽은 폭이 1.5m나 되며 바깥 높이가 2.7m, 안쪽 높이는 1.2m로 사람이 통로에 서
서 해안을 감시하기에 알맞은 높이이며 포구의 서쪽 해안 가까이 주위 지형보다 약간 높은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우지연대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림읍 귀덕2리에 있는 조선시대 명월진에 소속된 연대로 동쪽으로 도내
봉수(직선거리 3.2㎞), 서쪽으로 죽도연대(직선거리 2.3㎞)와 교신하였으며, 소속 별장은 6명, 봉군
은 12명을 배치하였다.
대지가 경사져 있어 높이 0.5~1.2m의 석축을 쌓았고, 그 위는 상부 8.5x8.5m, 하부 8.9x8.7m, 높
이 2.3x2.7m 크기의 사다리꼴 모양으로 쌓았다. 난간 벽은 폭 2m, 높이 1.4m이고, 입구 폭은 1.1m
이며 돌계단을 12단 쌓았다.
지형이 높고 돌출된 곳에 위치하고 있어 해안으로 접근하는 적을 감시하기 적당하다.
다른 연대에 비하여 계단 경사가 완만하고 난간 벽 또한 폭이 매우 넓다. 축조 방법은 거친 돌 허튼
층 쌓기이며, 테두리는 허물어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심석(心石)을 2단마다 엇물려 쌓았다.
정의성
자료미확보
제주성
자료미확보
조천연대 (북제주군)
제주시 북제주군 조천읍 조외리에 있는 조천연대는 대체로 원형대로 보존되어 높이 4m·가로 8m·
세로 10m이고, 여기에 12명의 망지기가 교대로 근무하였다.
조천진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에 있는 조선 중기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된 군사 시설. 조천
진은 9개 진(鎭)의 외곽을 빙 둘러서 축조한 성곽 중 하나이다. 조천(朝天)은 조선 초기부터 조천
방호소와 조천포수전소가 있던 방어의 요충지였는데, 처음 축조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선조 때 개
축하였다. 고서의 기록을 통해 조천은 천자의 나라에 조회하러 나간다는 의미로 왕명을 받는 곳이
었음을 알 수 있고, 육지로 나가는 사람들이 풍향을 관측하는 곳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조천진성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천진은 조선 초기부터 방어의 요충지로
서의 역할을 해왔다. 거기에다 육지에서 온 경래관의 출입이 잦았던 포구였다. 이에 따라 절제사
이옥후는 1590년(선조 23) 전 부장 서만일을 통해 성곽 일부를 개축하도록 했다고 한다. 이 외에
도 조천진성에 대한 기록은 고서에 군데군데 나와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38권에는 제주목 관방에 조천관방호소의 소재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남사록(南?錄)』에는 조천성 둘레와 높이 등 규모와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그밖에 『제주순무어사서계(濟州巡撫御使書啓)』, 『탐영방영총람(耽營防營摠覽)』 등에도 조천
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조천진성은 해발 1~2m의 완만한 경사면, 남고북저(南高北低)의 지형에
위치하고 있다. 진성의 북측은 해안에 접해 있고, 진성의 둘레는 128m이다. 남측 성벽 위에는 한
양을 바라보며 임금의 정을 사모한다는 연북정(戀北停)이 있다.
종달연대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 있는 조선 시대 수산진 소속의 연대로 동쪽으로 오조연
대, 서쪽으로는 지미봉수와 교신하였으며. 소속 별장 6명, 봉군 12명이 배치되었다.
지금은 높이 1.5m의 지반(地盤) 위에 47x50x55㎝, 40x45x56㎝, 60x70x50㎝ 크기의 석재가
1단으로 7.7m 가량 남아 있다. 연대의 축조 방법은 알 수 없다.
좌가연대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에 있는 조선 시대 별방진 소속의 연대 좌가연대는 동쪽으로
왕가봉수(직선 거리1.2㎞), 서쪽의 무주연대(직선 거리 4.7㎞)와 서로 교신을 하였으며, 소속 별장 6
명, 봉군 12명이 배치되었다.]
해안과 조금 떨어져 주위보다 조금 높은 동산 위에 위치하였다. 주변 지형을 보면 지금은 소나무
숲으로 시야가 막혀 있지만, 동쪽으로 별방진이 있는 하도리 해안, 서쪽으로 행원리 해안까지 바라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55x40㎝, 50x40㎝, 50x50㎝ 크기의 거친돌을 허튼층으로 막쌓
기하였으며 허리 부분은 각을 주지 않고 둥글게 모접기하였다.
바다 쪽으로 향한 북측 면과 동측 면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너진 상태이나 그 윤곽은 뚜렷하다. 하
부 폭은 7.6x8.4m이고, 높이는 1.8m~2.2m 가량 남아 있다. 상부 폭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하부의
폭으로 미루어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환경면 고산리 풍경>
제주도 서귀포 한경면 고산리에 위치한 성이다. 본래 이곳은 고려 충렬왕 때부터 공민왕 23년까
지 원나라 목마(牧馬) 관리자인 목호가 말을 기르기 위해 서아막(목축관리소)을 설치했던 곳이다.
1652년(효종 3) 이원진 목사가 차귀도를 의지 삼아 침략하는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진을 설치하
고 성을 쌓았다.
성 둘레는 약 360m이고 높이는 약 3m이다. 처음엔 여수(旅帥: 약 125명의 병력)를 두었으며, 조
방장을 거쳐 만호로 승격되었다가 다시 조방장으로 환원하였다. 현재 성의 윤곽은 찾아보기 힘들
다.
천미연대 (서귀포시)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신천리에 위치한 정의현에 소속된 천미 연대는 동쪽으로는 말등
포 연대와 응소(應召)하였고, 서쪽으로는 소마로 연대와 응소하다가 이후 벌포 연대와 직접 교신하
였으며 북쪽으로는 남산봉이 있다.
말등포 연대와의 직선거리는 6.9㎞이고 소마로 연대와는 5.3㎞이다. 소속 별장 6명, 봉군 12명이
배치되었다.
천미 연대라는 이름의 유래는 표선면 하천리와 성산읍 신천리 경계의 하천을 천미천이라 하며, 그
해안가를 천미 포구라 한 데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천미 연대는 상부 7.2m×7.4m, 하부 7.8m×7.9m, 높이 3.6m인 사다리꼴 형태이다. 연대 위의 난
간벽은 폭 1.1m, 높이 0.7m로 난간벽 내부 모서리는 각이 지지 않고 둥글게 되어 있어서 다른 연대
에 비하면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더해준다. 폭 1.2m인 입구는 일반적인 연대와는 다르게 해안 쪽으
로 향하여 있다.
축조방법을 보면 다양한 크기의 돌을 사용하여 높이 64㎝, 폭 130㎝의 큰 돌에서부터 높이 60㎝,
폭 65㎝의 작은 돌로 된 거친돌 허튼층쌓기이며, 테두리는 높이 28㎝, 폭 80㎝ 정도의 높이에 비하
여 길이가 긴 판석을 무려 18단이나 쌓아 올렸다. 말등포 연대·협자연대와 축조방법은 동일하며 난
간벽 또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한동한해장성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한동리에 있으며 조선 시대에 왜구의 침범이 끊이지 않자 왜구를
철저히 막기 위하여 한동환해장성은 중축이 거듭되었다.
1845년(헌종 11)에는 왜구의 침범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여겨지자 권직 제주목사가 제주도민들을
동원으로 환해장성을 대대적으로 중축하였다.
제주의 돌을 이용하여 단단하게 성벽처럼 쌓아놓았으며 약 290m에 이르는 길이가 남아 있다.
함덕연대
항파두리토성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고려 시대의 토성 항파두리 토성은 제주 지역의 삼별초 지휘부가
들어섰던 곳으로 항몽의 주요 거점이었다.
항파두리 토성은 해안에서 좀 올라온 지역에 위치해 있지만 자연적으로 형성된 가파른 절벽과
비교적 풍부한 음용수 조건, 양호한 토양 조건 등을 갖추고 있었다. 바닷가에는 용암이 흘러 굳은
거친 바위들이 많아 방책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해변에는 크고 작은 포구들이 형성되어 있어
군사용으로 쉽게 활용할 수 있었다.
길이는 대략 6㎞였고, 외성과 내성을 갖춘 이중성이었고 외성은 흙으로 만들어진 토성이고, 내성
은 외성 안 중심부에 돌을 쌓은 둘레 750m의 정사각형 석성이다.
성의 둘레는 약 6,000m, 면적은 113만 5,476㎡다. 장축은 남동에서 북서로 연결되는 선으로 직
경이 1,450여m이고, 최단축은 남서에서 북동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직경은 660여m에 달한다.
성의 중앙부는 해발 150~165m의 평탄한 대지로, 내성을 쌓기에 적합한 지형이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내성은 석축으로 쌓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돌을 서로 얽혀 쌓아 그 안을 잡석으로 채운
형태의 석축성 잔해가 일부 남아 있다.
1273년(원종 14) 고려 개경 정부의 김방경(金方慶)과 몽골의 홍다구 장군 등이 여·원(麗·元) 연
합군 2,000명을 이끌고 제주도에 들어와서 4일, 함락시켰다.
이로써 3년여 동안 이어진 제주 삼별초의 항몽 활동은 종식되었다.
항파두성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있는 고려 시대의 성곽으로 항파두리·항바두리라고도
한다. 진도의 싸움에서 패한 삼별초(三別抄)는 1271년(원종 12) 5월, 장군 김통정(金通精)의 영도
아래 제주도에 들어와 이곳에 내외 이중으로 된 성을 쌓았다.
내성은 사각형의 석성을 쌓았으며, 외성은 언덕과 계곡을 따라 타원형의 토성을 쌓았는데, 그 길
이가 15리에 이르러 성안의 면적은 약 30만평이나 되었다. 성에는 4대문을 설치하고 성 안에는 대
궐을 비롯하여 관아·병사·군기고·후망소(堠望所)·옥사·훈련장 등을 시설하였으며, 우물과 저수지
도 마련하였다.
김통정은 이 항파두성 외에도 명월(明月)과 애월(涯月)에는 목성(木城)을 축조하고, 조공포(朝貢
浦: 제주시 외도 포구)·귀일포·애월포·명월포·조선포 등에는 군항시설을 갖추었으며, 적의 상륙이
예상되는 해안 300리에는 이른바 환해장성을 쌓기도 하였다.
삼별초는 이 항파두성을 본거로 내륙지방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여 몇 차례 승리하였으나, 1273
년 여·원연합군에 대패하여 전멸하고 말았다.
항파두리유적지대에는 당시에 쌓았던 토성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돌쩌귀·기와·자기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밖의 당시의 시설이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행원환해장성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 있는 적선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바닷가를 돌아가며 돌
담으로 쌓았던 성으로 310m가 남아있다.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자연대
자료미수집
화북진성 (제주시)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1동에 있는 조선 전기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하여 설치한 9개
진(鎭)의 외곽을 빙 둘러서 축조한 성곽 중 조천진에 축조한 조선 시대 제주 지역의 대표적인 수
전소로 방어의 요새였다. 이
원진의 『탐라지』에 의하면 화북포에는 판옥전선이 중부, 좌부, 우부에 각각 1척씩 있다. 또한
비상 양곡이 6석, 격군이 180명, 사포가 87명 있었다고 한다.
1678년(숙종 4)에 최관 제주목사가 진성을 축조하였다. 진성의 규모는 둘레 303보, 높이 10자
로, 조방장을 두고 있었다.
화북진성은 해발 1~4m의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하고 있다. 진성의 규모는 동서 120m, 남북 75
m로, 둘레는 187m의 타원형 형태이다. 화북진성의 보존 상태는 축성 당시의 성곽 187m가 대부
분 남아 있고, 높이는 1.5~3.8m이며, 성곽의 상부 폭은 0.7~1.5m이다.
축조 방식은 제주산 현무암을 거칠게 다듬어 허튼층쌓기로 협축에 잡석을 채웠다. 외벽의 기울기
는 궁형(弓形)에 가까운 직선형 성벽으로 단경사를 이루고 있다. 화북진성에 대한 기초 조사 결과
관아 시설에 사용되었던 기와 및 백자 등 생활 용기가 출토되었다.
환해장성 (10개 읍동리에 연결)
환해장성은 제주 해안을 전체적으로 둘러친 3백리 장성이다. 삼별초가 진도를 거점하고 있을 시기
에 개경정부가 보낸 관군이 삼별초 진입을 막기 위해 쌓기 시작했지만, 이어 제주에 들어온 삼별초
가 개경정부군과 몽골군 공격에 대비해 계속 쌓았다.
그리고 조선시대에도 계속 보수 작업이 행해졌다.
환해장성은 제주시의 화북동, 삼양동, 북제주군 애월읍의 고내리, 조천읍의 북촌리, 신촌리, 신흥
리, 함덕리, 구좌읍의 김녕리, 행원리 등의 지역에 남아 있으며, 남제주군 성산읍의 신산리, 온평리,
대정읍의 일과리, 영락리, 서귀포시의 보목동, 하예리 등의 지역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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