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남금북정맥이란
속리산의 천황봉에서 분기하는 정맥으로 북쪽으로는 한강(494.5km)수계,
남쪽으로는 금강(401km)수계를 나누는 분수령으로 충청북도를 북서방향으로
연결하고 경기도 안성의 칠장산까지 총 도상거리 약 158.1km로 남한의 정중앙을
잇는 큰 산줄기로 속리산의 천황봉(1508m)에서 시작하여 말티고개,수철령(535.9m)
시루산(452.4m), 선도산(547m), 상당산성, 좌구산(657m), 보광산(531m),
소속리산(431.7m), 마이산(망이산 471.9m), 칠장산(492.4m)까지 이어지는
총 도상거리 약 158km에 달하는 산줄기이다.
칠장산(492.4m)의 분기점에서 북서 방향으로는 한남정맥(약 178.5km),
남서 방향으로는 금북정맥(약 282.4km)이 이어진다.
【 6구간 주요구간별 시간 】
- 09:20 이티재(511번 지방도로)
- 09:48 구녀산(484m)
- 10:12 분젓치(좌구정, 1번 군도)
- 11:25~40 방고개, 좌구산천문대(간식 및 휴식)
- 12:31 좌구산(658m)
- 13:28 새작골산 갈림길
- 13:43~14:15 질마재(592번 지방도로(중식 및 휴식)
- 15:07 칠보치, 임도
- 15:50 칠보산(542m)
- 16:00~16:15 쪽지봉갈림길,전(휴식)
- 16:20 쪽지봉(595.5m)
- 17:29 송치재
- 17:54 송전탑
- 18:05 모래재(34번 국도, 보광산 수련원)
◈도상거리 :약 22km(이티재~모래재)
◈소 재 지 : 충청북도 증평군~괴산군 경계지역
◈산행시간 :09:20~18:05 (8시간45분) 휴식 및 중식시간 포함
◈일 시 : 2013년 12월21일(토) 평년날씨
◈인 원 : 주 진용 (나 홀로)
【 교 통 편 】자가용-택시이용
< 갈 때 > 자가용(07:30분)~증평IC~내수읍~초정리~이티재(09:20)산행시작
< 올 때 > 이티재(18:44)택시이용 차량회수~음성ic~양평IC~남양주~귀가(20:50)
이번 산행을 출발 하면서 찬바람만 불지 않는다면 겨울산행의 눈꽃,상고대 자연의
선물을 마음껏 볼 수 있어 행복한 산행길이 되리라 기대하고 이티재 도착하였다.
날씨도 좋고 아무도 지나 간 흔적없는 마루금을 걸어가는 기분이 정말 행복하다.
내가 숨 쉬고 생동감 있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껴본다.
약간 흐린 날씨지만 가까운 지척은 충분이 조망이 되고 산행내내 눈꽃들이 환영해
주면서 정맥길을 보여주고 있으니 힘든 것도 잊져버리고 산행을 하였다.
이번 구간은 좌구산에서 질마재 가는 코스가 잡목이 많아 여름산행때 힘 들겠다.
정맥 마루금 갈림길마다 조금만 주의을 한다면 선답자 띠지 안내따라 어어가면
길 잃을 염려없다.
▼6차 산행코스: 이티재~모래재
▼이티재(360m)
이티재는 북쪽으로 충북 청원군 내수읍과 남쪽으로 청원군 미원면을 연결하는
511번 지방도로가 지나고 있는 고개 마루에 위치하고 있다.
이티재는 고개 넘는 데 이틀이 걸려서 ‘이틀재’가 이티재로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티재 북쪽에 초정약수로 유명한 초정리가 있다.
도로 700m 지점에 직진하면 "미원"우측으로 분기하는 "낭성" 방면 이정표가 있다.
예로부터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쌀농사를 잘 지었다해서 쌀안이라 불리었다.
미원장의 이름을 따서 미원면이라 하였다.
이티재에는 "등산로가든"이 있고, 도로를 건너 정상부에 이티봉주유소가 있었으나
폐업 후 이티성영토 가든으로 바뀐 모습이었다.
이티재에 도착하여 이티성영토 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하고 5구간때 내려 온
날머리를 비롯해 주변을 살펴본다.
▼옛전 이티봉주유소 및 휴게소가 있던곳에 이티성영토 가든으로 운영하고 있다.
가든 우측으로 돌아가면 "이티봉약수"가 있고, 등산로는 이티성영토가든
뒷쪽으로 들머리에 한남금북정맥 이정표가 있다.
▼이티성영토가든 뒤편으로 오르면 완만한 등로가 나오고 소나무와
펜스가 설치되어 있는 임도 등로길로 계속 오름길따라 간다.
▼운동시설이 있는 구녀성가는길 이정표와 "청원 구라산성" 안내문이 있다.
청원 구라산성 충북 청원군 미원면 대신리 산13 위치에 있는 구라산성은
청원군 미원면과 북일면 사이의 경계에 있는 해발 497m의 구라산(謳羅山)에
위치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축성 된 것으로 추정되며, 내외겹축의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성벽의 둘레는 960m이며, 대부분 붕괴되었다.
현재 동.서.남.북의 문터와 남.서.북쪽에 치성 흔적이 남아있다.
▼구녀산 직전에 있는 체육시설과 구녀산의 정자가 있다.
구녀성(九女城)의 유래
구녀성의 축성시기는 신라시대로 추정되며 석축형태로 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유래가 전해진다.
이곳 산정에 아들 하나와 아홉 딸을 가진 홀어머니가 있었다.
이들 남매는 모두 장사였는데 항상 불화가 잦아 마침내는 생사를 건
내기를 하게 되었다.
내기인 즉, 딸 아홉은 산꼭대기에 성을 쌓는 일이고 그 사이 아들은
나막신을 신고 서울을 다녀오는 것이었다.
내기를 시작한 지 5일이 되던날, 어머니가 상황을 살펴보니 성은 거의
마무리가 다 되어 가는데 서울간 아들은 돌아올줄 몰랐다.
이에 내기에 지게되면 아들이 죽게 될 것을 생각한 어머니는 가마솥에
팥죽을 끓여 딸들을 불러모아 팥죽을 먹으며 천천히 해도 되리라 했다.
뜨거운 팥죽을 식혀 먹고 있는 동안 아들은 부릅튼 다리를 이끌고 피를
흘리며 돌아왔다.
그리하여 내기에 진 아홉딸은 성위로 올라가 몸을 던져 죽고 부질없는
불화로 아홉누이를 잃게된 동생은 그 길로 집을 나가 돌아올 줄 몰랐다.
어머니도 남편의 무덤앞에 아홉딸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여생을 보내다가
숨을 거두었다.
이 때 당시 죽은 아홉딸과 부모의 묘는 이 성안에 2줄로 배열된 11기의
묘라고 전해진다.
▼구녀산[해발499m]의 모습
구녀산 정상부에는 돌탑과 구녀산 정상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정상을 둘러싸고 삼국 시대에 축조된 석축 산성 터가 남아 있었고,
후고구려의 궁예가 이 성에 진을 치고 북쪽 북이면 부연리의 낭비성에 있는
후백제왕 견훤과 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청주)에 "구라산(謳羅山)이 주의 동쪽 41리에 있다."는
기록과 동일 문헌에 "구라산성은 돌로 쌓았고 둘레는 2,790자이며 안에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청원군지』에 의하면 이 산은 원래 '구려산(句麗山)'·'구라산(謳羅山)' 등으로
불렸는데,이 산에 있던 절터에서 영해객(嶺海客)이란 인물이 쓴 등시(登詩)의
시구에 '구녀사시구려사 구려성시구녀성(九女寺是句麗寺 句麗城是九女城)'구절로
인해 절은 구녀사, 산성은 구녀성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구녀산 정상(한남금북정맥의 거리상 중간지점)
구녀산부터는 청원땅인 이곳이 백제이었던 시절에는 이곳을 상당현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곳을 신라가 점령하면서 ‘서원소경’이라 불렀으나 통일 신라의 경덕왕
시절에는 작다는 뜻의 ‘소(小)’가 떼어져서 ‘서원경’으로 정해졌다.
고려시대에 청주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고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시대까지
꾸준히 이어져 오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청원에서 떨어져 나와
청주부로 승격되었다.
충북도청이 있는 청주를 한바퀴 둘러싸고 있는 청원군의 면적이 괴산군 다음으로
넓고 충북에서 가장 넓은 미호평야는 미호천을 끼고 청주분지라 불리며 남북으로
구릉을 이루며 충북지역의 쌀 생산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구녀산 쉼터 지나고..
▼초정고개 갈림길 이정표 : 구녀산(이티봉)0.7km, 초정고개2.8km, 좌구정1.4km
구녀산 정상에서 쉼터지나 내려서면 초정고개 삼거리가 나온다.
좌측편으로는 초정약수로 유명한 충북 청원군 내수읍 초정리로 내려가는
등로길이고 마루금은 좌구정방면으로 이어진다.
▼삼기저수지 갈림길
삼보산 갈림길 이정표 : 좌구정 주차장 320m, 삼보산, 삼기저수지 마을 1.160m
삼기저수지는 충청북도 증평군 증평읍 율리746-1 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큰 저수지인데 나중에 분젓치에서 올라가면 조망이 된다.
이정표방향이 좌측으로 설치해야 하는데.. 구녀산 방향으로 잘못 됨.
▼분젓치와 좌구정의 도착
분젓치는 511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좌측편으로
좌구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분젓치는 옛날 장꾼들이 증평장과 미원장을 보기 위해 넘는 고갯길이다.
장꾼들이 고개를 넘나들며 막걸리로 목을 축이던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며
장도 보고 가벼워진 등짐을 주막에 내려놓고 "저 고개만 넘으면 고단한
하루가 지나려니.." 막걸리 한 사발에 국밥 한 그릇 말아 먹으면 고갯길은
나그네의 풍류일수도 있었겠다.
주로 증평장과 미원장을 오가던 마을 주민과 장꾼들이 넘나들었다는 분젓치는
이제 증평읍과 미원면을 잇는 2차선 도로가 나있어 걸음걸이로 넘나들던
분젓치의 아기자기한 사연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아 보인다.
북쪽으로 증평저수지(삼기저수지)가 내려 보이는 곳이다.
좌구정과 삼기저수지 사이의 방아다리골에는 좌구정 산림공원 산책로는
"비나리길"로 천주교,불교,기독교의 3대 종교를 의미하는 3곳의 쉼터가
조성되어 있다.
산경표에 나오는 분치(粉峙)가 분젓치로 바뀌었다고 한다.
도로포장이 잘되어 있지만 오가는 사람이 많이 없다.
분젓치가 있는 이곳까지 증평 땅이다.
“좌구정(座龜亭)” 정자 뒤로 동면중인 증평저수지(율리방죽)가 내려다보인다.
▼율리 웰빙타운 종합안내도가 있다.
▼분젓치 들머리 입구
증평군 이정표 간판 아래쪽으로 한남금북정맥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절개지 상단을 오르며 내려다본, 삼기저수지 방향 풍경이 보인다.
또한 산림청에서 설치한 작은 이정표가 산행길을 안내한다.
▼430봉 오름길에 갈림길 이정표
좌구정에서 오르고 또 오르는 마루금 초반부터 430봉까지 힘든 산행길이다.
▼536봉 쉼터 의자 앞으로 마루금 통과
쉼터에서 내려서면 삼거리가 나오고 삼거리에서 직진방향 버리고 좌측편
나무계단으로 내려서면 임도길 만나 좌측으로 가면 방고개에 도착한다.
▼방고개(栗峙, 해발360m)
증평읍 율리의 부점촌과 청원군 미원면 화원리의 삼흥을 잇는 고개로 또 다른
고갯길인 분젓치(해발 340m)와 함께 증평에서 미원으로 넘나드는 고갯길이다.
분젓치와는 상대적으로 길이 외지며 높이로는 분젓치 보다 약 20m 가량 높은
방고개는 지금은 비포장 길이지만 임도가 잘 닦여 있어서 승용차로 오르내리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이다.
원래는 율치라고 부르는 밤고개였는데 어떻게 방고개라고 부르는 연유를 모르겠다.
방고개 주변에는 좌측편으로 주차장과 정자가 있고 정면으로 좌구산천문대와
휴양림, 우측편으로 임도와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었다.
좌구산 등산로 노선 현황판과 건너편 나무계단으로 좌구산 올라가는 들머리다.
▼좌구산 천문대는 사업비 50억원을 들여 조성된다고 천문대는 증평읍
율리 산 61-1 4천290㎡ 터에 건립되며 건축규모는 연면적 820㎡,
높이 17.7m 이며 별자리관측 등 주관측실과 보조관측실, 홀, 시청각실,
전시실, 투영실, 사무실 등으로 꾸며져 있다고 한다.
좌구산 천문대 입구 천문대 표지석에서 증명사진 하나 남기고...
좌구산 올라가는 산행길이 힘들게 된비알 올라간다.
▼나무벤취 쉼터와 이정표가 있는 538봉을 넘고...
눈꽃으로 나를 환영하는 정맥길을 구경하며 힘든 것도 모르고 오르락 한다.
▼돌탑봉 도착
돌탑봉에서 좌측방향으로 내려섰다 오르면 칼춤바위가 나오고 잠시후
좌구산정상에 도착한다.
▼칼춤바위 도착
칼춤은 '검무, 검기무, 황창랑무' 라고 부릅니다 그 옛날 사냥이나 전쟁을
목적으로 추는 무기무용에서 시작하여, 궁중에서 큰 잔치 때에 추는
예술무용의 하나이며, 호국보훈의 의지를 담은 춤의 한종류라고 한다.
좌구산을 오르다 바라보는 이바위의 형상이 마치 칼춤을 추는 모습을
하고 있어서 '칼춤바위'라고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한다.
▼좌구산(657m)정상 도착
한남금북정맥 중 가장 높은 좌구산은 산의 모형이 마치 거북이처럼 생겼다고
하여 앉을 좌(坐), 거북 구(龜)자를 써서 좌구산(坐龜山)이라고도 하고,
또한 개 구(狗)자를 써서 좌구산(座狗山)이라고도 하는데 이것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좌구산(座龜山 유래) 일화
조선 광해군 때 정3품인 병조참지를 지냈던 진주목사 김시민의 양아들인
김치(金緻)는 점술과 천문에 능했는데 광해군의 학정이 날로 심해질 즈음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신의 관상을 보니 이듬해인 인조반정의 해에 죽을
운명인지라 관직을 사직하고 이곳 좌구산 밑의 율리 마을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이때에 김치는 한양의 심기원, 최명길 등과 내통하여 인조반정을 밀의했다고 하는데
어느 날 김치에게 심기원이 찾아와 능양군의 사주와 반정을 일으킬 일자를 점쳐
달라고 하였다.
이에 김치는 반정일자를 정하여 주고 깊은 잠에 빠졌는데 한밤중에도 동편
좌구산에서 개가 세 번이나 크게 짖어대므로 잠에서 깨어 그곳을 즉시 피하여
무사했다고 하는데 그 후 김치는 개가 짖음으로 사람을 구하고 나라의 큰일을
성공할 수 있게 하여 준 명산이니 개 구자를 써서 좌구산(座狗山)이라고
부르도록 했다는 것이다.
▼좌구산을 통과하면서 부터는 정맥꾼들만 걸어가는 듯 하고 등로길에 잡목과
잡풀이 많아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여름철 산행을 하면 고생좀 하겠다.
▼ 주의지점 갈림길
잡목을 헤치고 가다보면 직진으로 막 다른 곳에서 우측으로 희미하게
정맥길이 이어지는데.. 선답자띠지가 안내한다.
▼등로는 좋지 못하지만..풍경은 황홀해..
▼희미한 길.. 선답자 띠지가 정맥 마루금이라고 계속 진행하라고 한다.
▼이 근처 어딘 가? 삼군봉이라고 선답자 후기에서 보았는데..그냥 지나친 듯..
▼612봉의 멋진 소나무
몇년전 화재로 좌구산에서 질마재구간까지 벌목을 하여 나무들이 없고
그 자리에 억새와 잡풀들이 자리를 잡았다.
간간이 능선에 자리잡은 소나무가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다.
▼등로길 좌측편에 있는 경고문의 모습
이곳이 사유림으로 약초재배지역이라 약초 불법 채취자을 단속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절도시 7년이하의 징역 또는 2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처벌한다고 하니 사유지에 가지 마시라..ㅎㅎ
▼좌구산에서 여기까지 뒤 돌아 본 마루금..
▼암봉 통과하고..
▼새작골산[해발605m]갈림길
새작골산은 봉우리보다는 능선이라고 볼수있었다.
질마재방향에 등로가 희미해도 선답자 띠지가 안내를 하고 있다.
▼질마재
질마재는 괴산군 청안면과 청천면을 연결하는 592번 지방도 지나가는
고개가 질마재이다.
이곳 사람들은 질마재보다 청안고개로 잘아려져 있다.
이곳 올라가는 가는 길은 꼬불꼬불하여 꼭 강원도 고개넘는 기분이다.
질마는 수레를 끌때 말이나 소 등을 끌때 안장같이 얻는 제구로 그 모양이
질마와 같은 형국으로 된 고개와 같다고 해서 질마재라 불렀다고 한다.
崔元用 공덕비가 있다고 하는데 갈 길이 멀어 그냥 지나친다.
"최원용은 청안면 부흥리 출신으로서 그곳에 석회광을 개발하여 1, 2차 산업용
원료를 생산하고 지역의 유휴노동력을 흡수하여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했다 함.
길 건너 배수로 상단에서 우측 숲으로 마루금이 연결된다.
▼질매재에서 수로을 올라 우측능선으로 진행 하다가 능선에서 점심을 먹고는
410봉을 우측방향으로 진행하여 내려섰다 오르면 460봉 나온다.
460봉에서 내려서면 임도길이 나오고 임도길로 진행하다가 우측편 임도길 버리고
좌측편 능선으로 진행 하다 다시 임도로 내려선다.
임도에서 좌측으로 올라가면 묘지가 나오고 마루금은 묘지 위쪽으로 이어진다.
무명봉에서 우측방향으로 내려서면 칠보치에 도착한다.
▼칠보치(해발405m)
괴산군 청안과 부흥을 연결하는 고개인 칠보치는 현재는 거의 이용하는
사람이 없었고, 소형 트럭이 지나갈 정도의 작은 고갯길인 칠보치는
시골 풍경이 담겨져 있다.
건너편 절개지로 들머리가 이어지고 칠보치에서 한차례 오르면 무명봉 지나
마루금 우측 아래로 괴산군 종자보급소 건물이 보인다.
▼칠보산[해발542m] 삼거리의 도착
칠보산은 한남금북정맥 마루금은 약30~50m 비켜있어 칠보산 갔다
다시 빽해서 쪽지봉 방향으로 가야 한다.
▼칠보산 (해발585m)
칠보산이라 붙여놓긴 했지만 이름하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이 아닌가 싶다.
주위의 조망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명승지나 유명한 그 무엇하나도 없는데..
왜 칠보라고 햇을까?
▼빽해서 칠보산 삼거리 돌아 와 쪽지봉 방향으로 이어간다.
▼쪽지봉 갈림길.
칠보산에서 가파른 내림길을 내려선 후 다시 고도를 올리면 쪽지봉
갈림길을 지나는데, 한남금북정맥은 좌측 '사리' 방향으로 이어진다.
쪽지봉 정상은 우측으로 30m 정도 떨어져 있고 원형 삼각점이 매설
되어 있다고 하는데 눈속에 있어 찾지 못하고 공터만 갔다 다시 빽해서
삼거리에서 사리방향으로 내려간다.
▼염소목장 조망
쪽지봉을 들려 내려서면 우측편으로 목장이 보이고, 철조망으로
경계선을 만들어 놓았다. 철조망 옆으로 진행한다.
▼465봉 갈림길 통과
목장 철조망 옆으로 진행하다가 465봉에서 좌측방향으로 진행하면 암릉지대가
나오고 암릉지을 올라서면 목장휀스가 나오고 그옆으로 진행한다.
이후 철조망과 떨어지고 돌탑이 있는 송치재에 도착한다.
▼송치재.
조그마한 돌탑들이 있는 송치재에서 밤나무 농장 철망 휀스는 우측으로
꺾여져 내려가고, 좌측으로 마루금따라 조금 올라서면 우측 아래에서
올라오는 임도를 만나 의성김씨와 밀양박씨 부부묘가 있는 390봉을 오른다.
▼산림병해충[참나무시들음병]방제 안내문의 통과하고..
앞이 보이지 않기 시작해 디카를 야경으로 맞추고 정맥길을 이어간다.
▼한남금북정맥 마루금 우회
우측으로 묘지와 송전탑이 있는 곳에서 한남금북정맥 마루금은 이지점에서
직진으로 진행하여 34번 국도변으로 내려서면 되는데 도로가 생겨 절개되고
낙석방지 철조망이 가로막혀 우측방향 보광산관광농원으로 묘지 옆으로
진행하여 모래재로 이어진다.
묘지와 통신탑이 있는곳으로 내려서면 보광산 관광농원이 나오고 운동장을
직진으로 통과하면 34번 국도 모래재에 도착한다.
▼모래재 34번 국도 도착
모래재의병격전유적비(모래재義兵激戰遺蹟碑)
이 유적비는 의병장 한봉수(韓鳳洙)를 주축으로 모래재에서 일어난
항일구국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괴산군에서 건립한 것이다.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뜻을 품은 의병장 한봉수는 이정구 등 9명의 의병을
지휘하여 1908년 5월 이곳 모래재를 지나가는 일본군 우편물 호송대를 습격하여
이들을 사살하고 총기, 탄약, 우편물 등을 노획하는 성과를 올렸다.
한봉수 선생은 1883년 4월18일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나 대한제국군 진위대
상등병으로 복무하다가 1907년 군대가 강제 해산되자, 동년 8월(음)에 의병장
김규환(金奎煥) 의진(義陣)에 가담하여 일군 수비대 및 헌병대를 습격하는 등
맹활약 하였다.
가을에는 해산 군인 100여명을 규합하여 왜적구축대(倭敵驅逐隊)를 조직하였으며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오근장(梧根場) 부근에서 일 헌병대위 도기선치(島崎善治)를 사살하고
강원도로 수송되는 세금수송대를 습격하여 군자금을 확보하였으며 이후 일군과
33회의 격전을 치렀다.
1919년에는 고종황제의 국장(國葬)에 즈음하여 홍명희.손병희 등과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으며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3월7일 청주의 서문장터 입구
마차 위에서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군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주도 하였고
4월1일에는 묵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면민을 동원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다음 날에 다시 내수보통학교 학생 80여명과 같이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전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하였으며
괴산군에서는 국권회복과 민족의 정통성을 이으려는 선열의 우국충정을 길이
전하고자 높이 3M 넓이 2.5M 크기의 이 유적비를 1984년도에 건립하였다.
▼다음7구간 들머리 살펴보고 미리 택시콜 하여 택시가 도착하여 이티재로 가서
차량회수해 무사위 귀가 하였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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