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남편 권대복 아오스딩께서 선종하신지...,
(이경애 세레나의 회고)
남편 권대복 아오스딩(1932. 3.15 ~ 2000.11. 1.)께서 선종하신지 22주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엊그제 같은데 참으로 무심한 것이 세월이라더니 저의 감회가 깊군요. 남편의 생애는 남다른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분인 것 같습니다.
진보당 사건, 군사 구테타, 유신 체제, 세 번이나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고, 모진 고문으로 만신창이 되도록 몸이 망가져 몸이 쇠약해 졌고 정치 활동도 못하게 법에 묶여 있을 때 주님의 자비하심이 남편 아오스딩을 어여삐 여기사 성령의 신비를 체험케 하시고 삶의 가치관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만방에 하느님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정치 정당은 뒤로하고 예수 정당을 다 하시며 방방곡곡으로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동남아, 미국, 브라질, 이태리, 오스트리아, 독일을 선교하던 중 90년도부터 동북 삼성을 10여년간 선교 활동을 하였습니다.
성령 세미나를 통해 강렬한 불과같은 성령의 은혜를 체험한 남편은 인생의 가치관이 변하여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180도 달라 졌습니다. 불굴의 정치 이념을 버리지 못하고 오직 그 길만이 나의 전부라고 생각한 굳센 삶의 길을 변화 시키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제가 이 책을 펴내는 것은 다른데 뜻이 있는 있는 것이 아니고 내 가족을 사랑하고 추억하며 남편이 걸어 온 길이 범인(凡人)을 넘어 선 사회를 위한 평탄치 않은 삶이었기에 여러 사람과 공유하는데 뜻이 있음을 말씀 드리는 바이며 어여삐 보아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저는 세상에 단 한사람 이라도 제 남편 권대복 아오스딩을 기억하고 계신다면 보람되게 생각 하겠습니다. 이 작은 책 한 권을 따듯한 마음으로 받아 주시기 바라오며 인사 말씀을 가름하는 바입니다. 이 책을 펴 내는데 물심 양면으로 도와 주신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
3-3. ♡꿈 많은 소녀, 세레나의 추억
남편과의 첫 만남은 전쟁때였습니다. 서울이 수복되고 도강을 기다릴 때 영등포 일대가 피난민으로 들끓었고 대방동에 피난민 학교 훈육소가 설치되어 각급학교 학생들의 천막 교실에서 콩나물 시루마냥 빽빽이 앉아 공부를 하였습니다. 책상도 없이 맨 바닥에 책가방을 책상 삼아 선생님 강의에 귀기울이며 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도 마음만은 마냥 줄겁고 낭만이 넘쳤습니다. 이때가 중3 때였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내게 남학생을 소개했습니다. 덕수상업학교 고학년으로 학도호국단장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이 훗날 남편 권대복 회장입니다. 우리는 금새 사이가 가까워졌고, 연애로 발전합니다. 당시 영등포 데이트 코스로 주로 한강 뚝 길이 제격이어서 우리도 자주 걷게 됩니다. 이때도 남편의 머릿 속에는 위대한 정치인이 된다는 꿈이 있었고, 어느 날 그는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만일 자치 독립 운동하듯 맹렬히 정치를 하다가 감옥에 가게 된다면 경애는 내 곁을 떠나고 말겠지?”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안 그럴께요. 나는 끝까지 대복씨를 기다릴 꺼예요. 그런 걱정은 말아 주셨으면 해요.”
우리의 대화가 복선(伏線)이 되어서 훗날 현실이 될 것을 누가 알아 겠습니까? 내 반평생 남편의 옥바라지 하는 여인으로써 청춘을 바치게 될 줄이야...., 이것은 한참이나 훗날의 일이었고 당시는 하루하루가 생소했고 행복하기만 하였습니다. 당시 여의도는 비행장이 있었고, 여타의 지역은 농부들 농작지였습니다. 특히 땅콩밭으로 유명하여 개구쟁이들 서리에 이용되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는 경인선 기차를 타고 인천 송도와 월미도 아니면 소사 복숭아 밭을 찾았갑니다. 당시 소사 복숭아 밭은 서울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높아서 청춘남녀들 데이트 코스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른 봄, 소사 벌판이 연분홍 복사꽃이 흐트러게 필 때이면 그렇게 마음이 설렐일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대학을 졸업하여 사회인이 되었고, 나 역시 23세에 대학을 졸업하자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 집안에서는 반대가 이나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유는 상대 집안이 너무나도 가난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의 집은 도림동이었는데 지대가 낮고 물난리 격기가 일수였고 재산이라고는 오막살이 한 채가 전부였으니 부모 마음 그럴만도 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는 대학 졸업하고서도 취직하여 가정 이끌 생각은 않고 날이면 날마다 밖으로만 나 돌며 사회 운동으로만 정신이 팔려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때 남편은 영등포 학우회라는 단체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곳에 꿈을 심어 장래 정치가가 되려는 야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꿈을 품은 청년이었으나, 현실에서는 냉험하기만 했으니 남편의 마음은 타들어 갑니다, 그러나 어쩌랴! 총 돌격을 맘 먹습니다. 학생회 회원들을 동원하고 영등포구 국회 의원을 앞세워 집으로 처들어 옵니다. 아버지는 어이가 없습니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시다가 하시는 말씀...,
“참나.., 박력 하나 알아주어야 겠구먼....,”
우리의 사랑은 이로써 열매를 맺습니다.
이것은 운명의 장난...? 신혼의 단꿈....? 우리 신혼부부의 달고 단 꿈은 첫 아이 출생 이전뿐, 그 후는 지독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됩니다. 첫 아이 출생 직후 남편이 구속이 되고 서대문 구치소에 송치됩니다. 진보당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남편은 일찍이 진보당에 입당한 당원이었고 진보당 학생부장에 평화통일 위원회 10인 위원이었습니다. 27세 나이에 당의 중진 직위에 섰던 것입니다. 이때부터 옥바라지가 시작됩니다. 이러기를 2년의 세월, 진보당 사건의 재판은 온 국민의 관심속에 대법원에서 무죄로 판결이 나고 당 간부 전원이 석방됩니다. (당수 조봉암 선생만 빼 놓고서) 간첩죄로 올가미 씌운 조봉암 당수는 그해 7월 31일 사형을 시키고 맙니다. 이것은 엄연한 악법 살인(殺人)인 것입니다.
그리고 1년 후 악명 높은 자유당 정부는 4.19 학생 혁명으로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들어선 민주당 정권, 집권당이 된 민주당은 신구파로 쪼개지고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자유의 소리, 데모로 날이 세고, 데모로 날이 저뭅니다. 무능한 정부로 낙인이 된 민주당은 박정희 장군의 쿠테타로 자유당의 전철을 밟고 맙니다. 그리고 남편 권대복은 청천벽력(靑天霹靂)으로 군사 쿠테타 폭력에 의해 다시 구속이 됩니다. 그들이 말하는 구악(舊惡) 일소(一掃)라는 캐치프레스, 이른바 구정치인 소탕에 말려든 것입니다. 한 일이 무 있다고? 이때부터 나의 옥바라지는 다시 시작이 되고 남편은 혁명 재판 징역 15년 형량이 떨어집니다. 집에는 식량이 없어 생활고가 발등에 불이 됩니다. 한동안 저는 종교 단체에서 주는 외국 구호품, 옥수수 가루로 연명을 합니다. 집에는 노모가 한분 계셔 마음 안타갑습니다.
서글픈 얘기지만 형무소에서 남편은 관식이라도 굶지 않고 먹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만큼 나의 생활을 말이 아니었습니다. 누구 하나 도와 주는 사람이 없었고 당시는 진보주의 정당을 용공(容共)시 하여 우리집을 빨갱이 집이라고 손가락질 하고 얼굴 마주치기를 기피할 때였습니다. 그래서 생활 전선에 뛰어 든 것이 수금 사원이었습니다. 신고 나갈 신발이 없어서 친구한테 서 구두 한 켤레 빌려서 신고 다녔는데 맞지 않아 발병이 나 눈물을 흘렸고 쉐터 한 벌로 살아 갔는데 토요일이면 빨아서 널었다가 월요일 입고 나갑니다.
당시에 외판 사업이 일어날 때였다. 외판 사원이 가정 방문이나 각 직장에 깔아 놓으면, 수금 사원이 카드등..., 수금 사원이 이곳저곳을 방문하여 고객으로부터 수금합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편은 서대문 교도소에서 안양교도소로 이감이 되고 그 먼곳까지 면회를 다니게 됩니다. 그 사이에 시어머니가 돌아 가시게 되고 친정 아버지가 세상을 뜨십니다. 이때 허망함은 말로 이루다 할 수도 없습니다.
때만 잘 만났더라면, 아니 정당 선택만 현명했더라면 남편은 국회의원 하고도 남는 사람이었다. 저는 남편의 자질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현실이 이러하니 어떡하란 말인가. 숙명이란 말이, 운명이란 말이 우리를 두고 말일찌도 모른다.
지난 세월 이 순간 주마등(走馬燈) 같이 눈 앞을 스칩니다. 이나마 남편이 남은 생을 종교에 귀의(歸依)하여 재출발하게 된 것 환영하는 바입니다.
남편의 정치 인생은 신정 사회당 당수를 마지막으로 정치와 결별을 하게 됩니다. 남편의 새 세상 첫 발길은 천주교 시흥성당 총회장으로 내 딛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현실 세계와 맏 부딛쳐 헤쳐 나가면서 힘든 일을 극복하여 가겠습니다. 중차대한 사업의 하나가 시흥 성당의 새 건축을 신축하는 사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을 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설명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저도 남편의 새 출발을 마음 깊이 환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새로운 마음의 행로를 뚫어 나가기로 합니다. 안양 예술고등학교 교사직을 거처 시흥동에 유치원 운영을 20년 넘게 해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의 모진 고난에 대한 마음의 치유로 생각했습니다.
남편은 과거 정치에 쏟았던 정력을 하느님 사업에 기울여 전력을 다 하셨습니다. 과거 군사 정권때 모진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이끌고서 강론이라면 전국 천주교 성당..., 안간데 없이 피정을 다니셨고 그 숫자가 년360회 되고 어느 날은 세곳이나 피정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고 미국의 여러 도시, 캐나다, 브라질, 멕시코등 아메리카 대륙과 오스리아등 유럽과 서구라파 여러 나라, 동남아 국가를 두루 피정 나갔고, 특히 일본의 경우 제1회 성직자 대회를 주최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 유치원 운영을 딸에게 넘기고 홀가분이 남편 뒷바라지에 몰두하였습니다. (서울교구 성령쇄신봉사15년, 수원교구 성령쇄신 봉사15년)
성과가 괴도에 올려지자 남편은 새로운 세계 북방 선교로 운동을 펼칩니다. 그곳이 중국 삼성입니다. 마음은 북한 선교에 있었으나 그것이 어렵자 우선 중국을 지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한중 수교전 중국 따을 밟습니다.
사실 저의 고향은 서울이 아니 중국 흑룡강성 해림(海琳)입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랐고 광복이 되자 서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고향땅을 44년만에 다시 밟았을때 제 감회는 감격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에 대한 기억은 이렇습니다.
당시 만주도 마적떼, 도적떼가 많아 시시 때때로 출몰하여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 대비책으로 마을 구조를 독립 가옥에서 집단으로 전환하였습니다. 원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하는데 10체에서 15체 규모 정도였고, 그 안에서 집단 생활을 하였습니다. 집과 집 사이를 울타리로 엮어 큰 대문을 만들어 낮은 여러두고 밤중에는 잠금 장치를 합니다. 울타리 마을안에 대장간, 병원, 약방, 식당, 상점등등이 있습니다. 울타리 마을과 마을 사이를 오가며 상업 활동이나 정보 교환을 합니다.
아버지 직업은 목장 경영이었습니다. 소, 말, 양등을 사육하셨고 생활은 부유하셨습니다. 광복절을 맞이하여 아버지는 가족을 이끌고 귀국길을 오릅니다. 그때 내 나이 열두살이었고 언니가 있었습니다. 겨울 끝자락 2월에 할빈을 출발하였는데 조국을 찾는 인파가 강을 이루었습니다. 교통 수단이 없어 걷기도 하고 노숙도 수차례 하였고, 전염병으로 많은 은 이들이 죽어가는 것도 목격하였습니다. 계절이 셋이나 지나고 9월에 마침내 서울에 도착하게 됩니다.
1990년 11월 중국 위해가 개항이 되자 남편과 함께 여객선 훼리호를 타고 종국 땅을 밟습니다.
눈에 들어오는 중국의 첫 인상은 실망이었습니다. 중국이 이처럼 낙후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부는 배편에서 할빈행 기차에 올랐습니다. 완행 열차 3등칸이었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사람들 모습이 원시인(原始人)을 방불케 했습니다. 옷은 까맨 땟족이 흐르고 머리는 엉크러져 쑤세미 같고 냄새는 얼마나 고약한지 참 딱하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리는 간신히 침대칸을 얻어 타게 되었는데 시트는 올이 안보일 정도로 때에 쩔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닥은 해바라기 씨 껍질이 발목이 잠길 정도로 수북했습니다.
할빈에 내린 우리 부부는 소개받은 성당과 공소 신자를 방문합니다. 그리고 방문 취지를 애기하니 회장님 말씀이 생각은 좋으나, 시기상조(時機尙早)라는 것입니다. 국가간 수교기 않된 현실에서 외국인이 중국에 들어 와 활동을 한다는 것은 지칫 체포될 수 있으니 심사숙고 하라는 말씀이어서 발길을 돌리게 합니다.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중국 현지인을 한국에 초청하여 교육을 시킨다. 그리고 이들을 귀국시켜 선교 활동에 투입한다는 생각을 하고서 귀국길에 오릅니다. 그런데 다시 기차 탈 생각을 하니 용기가 나지 않아 알아 본 결과 국내서 비행기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공항에 와 보니 비행기 타는 것 30인승 프로펠라 여객기로 참 마음에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 밖에 없으니 이 또한 난감합니다.
여기서 조선족 공산당 당원을 한 사람 만납니다. 이 사람 우리를 보더니 어디서 왔고 무엇하는 사람이냐고 묻기에 우리는 한국 사람이고 하느님 사업을 하는 크리스찬이라고 하니 그게 무슨 말이란 겁니다. 이 사람 첨 듣는 말이라는 게 였어요. 아무리 공산 국가라지만 종교에 대해 그렇게 모른다니 기가차서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훈춘이라합니다.
그래서 다음 올 때 만나고 싶으니 연락처를 가르처 달라해서 주소 교환을 해 줍니다. 92년후 우리 부부는 직접 훈춘으로 가서 이자를 만났습니다. 포교의 발판으로 삼기로 한 것입니다. 훈춘 천주교회에 비밀리에 사람을 모아 달라고 훈춘회장에게 부탁하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작은 숫자를 모아 놓고 강론을 합니다. 이것이 첫 중국 선교가 된 것입니다.
우리 부부는 현지인 열명을 모아서 국내에 초청을 합니다. 모든 경비는 이쪽(한국)에서 지출하며 시흥 교회에서 교육을 실시했고 이들을 중국에 돌려 보냅니디. 이러기를 여러 차례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북방 선교의 장족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십여차례 중국을 넘나 들어 선교 사업은 차츰 활기를 띱니다. 갈 때마다 서적과 묵주를 갖어 가서 나누어 주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들에게는 묵주가 없어 종이에 묵주를 그려 놓고서 이것을 집혀가며 묵주 기도를 올렸다고 합니다. 다음으로 착수한 것이 성모상을 세우는 일 이 사업 애기도 다음 장에서 말하기로 합니다.
우리 선교 사업의 발전과 더불어 국가간 수교가 이루어 지고 선교 활동도 차츰 합법성을 띄우게 됩니다. 더욱 좋은 일은 중국이 발전해 가고 있다는 것, 중국 대륙이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에서도 북한 탈북민을 자주 보게됩니다. 이들의 고생도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북한의 고난 행군때 300만명 이상 죽었어요. 그 배고픈 참상을 우리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북한을 탈출한 사람들이 중국에서 겪은 고생 또한 간과 할 수 없어 우리도 많이 도울려 맘먹습니다.
제 남편 권대복 회장님도 지금 하늘 나라에 계십니다. 이 분은 살아 생전 하느님 사업에 죽음 던져 많은 성과를 걷우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늘 나라에서 이 공을 인정 받아 잘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분 뜻을 기리며 살아 있는 동안 이 한 몸 하느님 사업에 봉사할 것을 다짐하는 바입니다. 그가 정말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