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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否 (비)
(天地否 , 乾上坤下 : 하늘과 땅이 비괘가 되니, 하늘은 위에 있고 땅은 아래에 있다)
[傳] 否는 序卦에 泰者는 通也니 物不可以終通이라 故受之以否라하니라 夫物理往來하니 通泰之極이면 則必否하니 否所以次泰也라 爲卦 天上地下하니 天地相交하여 陰陽和暢이면 則爲泰요 天處上하고 地處下면 是天地隔絶하여 不相交通이니 所以爲否也라
[程頤의 설명] 비괘(否卦)는 <서괘전(序卦傳)>에 “태(泰)는 통함이니, 물건은 끝내 통할 수만은 없다. 그러므로 비괘(否卦)로 받았다.” 하였다. 물건의 이치는 가고 오니, 통하여 편안함이 극(極)에 이르면 반드시 비색(否塞 ; 운수가 꽉 막힘)해지니, 비괘(否卦)가 이 때문에 태괘(泰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으니, 천지가 서로 사귀어 음양(陰陽)이 화창하면 태(泰)가 되고, 하늘이 위에 처하고 땅이 아래에 처하면 이는 천지(天地)가 가로막혀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비(否)가 된 것이다.
否之匪人이니
비(否)는 인도(人道)가 아니니,
[傳] 天地交而萬物生於中然後에 三才備하나니 人爲最靈이라 故爲萬物之首하니 凡生天地之中者 皆人道也라 天地不交하면 則不生萬物이니 是无人道라 故曰匪人이니 謂非人道也라 消長闔闢이 相因而不息하나니 泰極則復하고 否終則傾하여 无常而不變之理하니 人道豈能无也리오 旣否則泰矣라
[程頤의 설명] 천지(天地)가 사귀어 만물이 가운데에서 생겨난 뒤에야 삼재(三才 ; 우주의 근원이 되는 天·地·人)가 갖추어지는데, 사람이 가장 영특하므로 만물의 우두머리가 되니, 무릇 천지(天地)의 가운데에서 태어난 것은 모두 인도(人道)이다. 천지(天地)가 사귀지 않으면 만물을 낳지 못하니 이는 인도(人道)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인(匪人)’이라 하였으니, 인도(人道)가 아님을 이른다. 사라지고 자라남과 닫치고 열림이 서로 인하여 쉬지 않으니, 태(泰)가 극에 이르면 돌아가고 비(否)가 끝나면 기울어서, 항상하고 변하지 않는 이치가 없으니, 인도(人道)가 어찌 없겠는가. 이미 비색(否塞)해지면 통하여 편안하게 된다.
不利君子貞하니 大往小來니라
군자(君子)의 정(貞 ; 正道)에 이롭지 않으니, 큰 것(陽)이 가고 작은 것(陰)이 온다.
[傳] 夫上下交通하여 剛柔和會는 君子之道也어늘 否則反是라 故不利君子貞이니 君子正道 否塞不行也라 大往小來는 陽往而陰來也니 小人道長하고 君子道消之象이라 故爲否也라
[程頤의 설명] 상하(上下)가 서로 통하여 굳셈[剛]과 부드러움[柔]이 화합하고 모임은 군자(君子)의 도(道)인데, 비(否)는 이와 반대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의 정(貞 ; 正道)에 이롭지 않은 것이니, 군자(君子)의 정도(正道)가 비색하여 행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대왕소래(大往小來)’는 양(陽)이 가고 음(陰)이 오는 것이니, 소인(小人)의 도(道)가 자라나고 군자(君子)의 도(道)가 사라지는 상(象)이므로 비(否)가 된 것이다.
[本義] 否는 閉塞也니 七月之卦야라 正與泰反이라 故曰匪人이니 謂非人道也라 其占이 不利於君子之正道하니 蓋乾往居外하고 坤來居內하며 又自漸卦而來하니 則九往居四하고 六來居三也라 或疑之匪人三字 衍文이니 由比六三而誤也라 傳不特解하니 其義亦可見이라
[朱熹의 본 뜻] 비(否)는 폐색(閉塞 ; 운수가 막힘)함이니 7월의 괘(卦)이다. 태괘(泰卦)와 정반대이므로 ‘비인(匪人)’이라고 하였으니, 인도(人道)가 아님을 이른 것이다 이 점괘는 군자(君子)의 정도(正道)에 이롭지 않으니, 건(乾)이 가서 밖에 거하고 곤(坤)이 와서 안에 거하며, 또 점괘(漸卦)로부터 왔으니, 구(九 ; 양)가 가서 사(四 ; 넷째 자리)에 거하고 육(六 ; 음)이 와서 삼(三 ; 셋째 자리)에 거하였다. 혹자는 “‘지비인(之匪人)’ 세 글자가 연문(衍文 ; 잘못된 군더더기 글자)이니, 비괘(比卦)의 육삼(六三 ; 세 번째 음효) 효사로 말미암아 잘못되었다. <상전(象傳)>에서 특별히 해석하지 않았으니, 그 뜻을 또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彖曰 否之匪人不利君子貞大往小來는 則是天地 不交而萬物이 不通也며 上下 不交而天下 无邦也라 內陰而外陽하며 內柔而外剛하며 內小人而外君子하니 小人道 長하고 君子道 消也라
<단전(彖傳)>에 말하기를, “‘否之匪人 不利君子貞 大往小來 ; 비(否)는 인도(人道)가 아니니, 군자(君子)의 정도(正道)에 이롭지 않으니, 큰 것(陽)이 가고 작은 것(陰)이 온다.’는 천지(天地)가 사귀지 않아 만물이 통하지 못하고, 상하(上下)가 사귀지 않아 천하(天下)에 나라가 없는 것이다. 음(陰)이 안에 있고 양(陽)이 밖에 있으며, 유(柔 ; 부드러움, 陰)가 안에 있고 강(剛 ; 굳셈, 陽)이 밖에 있으며, 소인(小人 ; 陰)이 안에 있고, 군자(君子 ; 陽)가 밖에 있으니, 소인(小人)의 도(道)가 자라나고 군자(君子)의 도(道)가 사라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傳] 夫天地之氣不交면 則萬物无生成之理하고 上下之義不交면 則天下无邦國之道하니 建邦國은 所以爲治也라 上施政以治民하고 民戴君而從命하여 上下相交는 所以治安也어늘 今上下不交하니 是天下无邦國之道也라 陰柔在內하고 陽剛在外하며 君子往居於外하고 小人來處於內하니 小人道長하고 君子道消之時也라
[程頤의 설명] 천지(天地)의 기운이 사귀지 않으면 만물이 생성할 이치가 없고, 상하(上下)의 의(義)가 사귀지 않으면 천하(天下)에 나라의 도(道)가 없으니, 나라를 세움은 다스리기 위해서이다, 윗사람은 정사를 베풀어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은 군주(君主)를 떠받들어 명령을 따라서 상하(上下)가 서로 사귀는 것은 다스려져서 편안할 수 있는 것인데, 이제 상하(上下)가 서로 사귀지 못하니, 이는 천하에 나라의 도(道)가 없는 것이다. 음유(陰柔)가 안에 있고 양강(陽剛)이 밖에 있으며, 군자(君子)가 가서 밖에 거하고 소인(小人)이 와서 안에 처하니, 소인(小人)의 도(道)가 자라나고 군자(君子)의 도(道)가 사라지는 때이다.
象曰 天地不交 否니 君子 以하여 儉德辟(避)難하여 不可榮以祿이니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천지(天地)가 사귀지 않음이 비(否)이니, 군자(君子)가 보고서 덕(德)을 검약(儉約)하여 난(難)을 피해서 녹(祿)으로써 영화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 했다.
[本義] 儉德辟難이라
[朱熹의 본 뜻] 덕(德)을 검약(儉約)하여 난(難)을 피하니, 녹(祿)으로써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
[傳] 天地不相交通이라 故爲否하니 否塞之時엔 君子道消하나니 當觀否塞之象而以儉損其德하여 避免禍難이요 不可榮居祿位也라 否者는 小人得志之時니 君子居顯榮之地면 禍患必及其身이라 故宜晦處窮約也라
[程頤의 설명] 천지(天地)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비색함이 되었다. 비색할 때에는 군자(君子)의 도(道)가 사라지니, 마땅히 비색한 상(象)을 보고서 그 덕(德)을 검약하고 덜어내어 환난을 피하여 면할 것이요, 영화로이 녹과 지위에 거해서는 안된다. 비(否)는 소인(小人)이 뜻을 얻는 때이니, 군자(君子)가 드러나고 영화로운 지위에 거하면 환난이 반드시 그 몸에 미친다. 그러므로 마땅히 숨어 궁약(窮約 ; 곤궁)함에 처하여야 하는 것이다.
[本義] 收斂其德하여 不形於外하여 以避小人之難하여 人不得以祿位榮之라
[朱熹의 본 뜻] 그 덕(德)을 거두며 밖에 드러내지 않아서 소인(小人)의 난을 피하여 사람들이 녹(祿)과 지위로써 영화롭게 하지 못한다.
初六은 拔茅茹라 以其彙로 貞이니 吉하여 亨하니라
초육(初六 ; 첫 음효)은 띠풀의 뿌리를 뽑는 것과 같다. 동류들과 더불어 정고(貞固 ; 곧고 굳음)히 지킴이니, 길(吉)하여 형통하다.
[本義] 以其彙니 貞하면 吉하여 亨하리라
[朱熹의 본 뜻] 동류들과 함께 하니, 정(貞)하면 길(吉)하여 형통하리라.
[傳] 泰與否 皆取茅爲象者는 以群陽群陰同在下하여 有牽連之象也일새라 泰之時則以同征爲吉하고 否之時則以同貞爲亨이라 始以內小人外君子로 爲否之義하고 復以初六否而在下로 爲君子之道하니 易은 隨時取義하여 變動无常이라 否之時엔 在下者君子也라 否之三陰이 上皆有應이나 在否隔之時하여 隔絶不相通이라 故无應義라 初六은 能與其類로 貞固其節하니 則處否之吉而其道之亨也라 當否而能進者는 小人也요 君子則伸道免禍而已니 君子進退에 未嘗不與其類同也라
[程頤의 설명] 태괘(泰卦)와 비괘(否卦)가 모두 띠풀을 취하여 상(象)을 삼은 것은 여러 양(陽)과 여러 음(陰)이 함께 아래에 있어서 서로 견연(牽連 ; 끌고 이어짐)하는 상(象)이 있기 때문이다. 태(泰)의 때에는 함께 감을 길(吉)함으로 삼고, 비(否)의 때에는 함께 정도(正道)를 지킴을 형통함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소인(小人)이 안에 있고 군자(君子)가 밖에 있는 것으로 비(否)의 뜻을 삼았고, 다시 초육(初六)이 비색하여 아래에 있는 것으로 군자(君子)의 도(道)를 삼았으니, 역(易)은 때에 따라 뜻을 취하여 변동하여 일정함이 없다. 비(否)의 때에는 아래에 있는 자가 군자(君子)이다. 비(否)의 세 음(陰)이 위에 모두 응(應)이 있으나, 비색하고 막히는 때에 있어서는 가로막혀 서로 통하지 못하므로 응(應)하는 뜻이 없는 것이다. 초육(初六)은 동류들과 더불어 절개를 굳게 지키니, 이는 비(否)에 대처하는 길(吉)함이어서 그 도(道)가 형통하다. 비(否)를 당하여 나아갈 수 있는 자는 소인(小人)이요, 군자(君子)는 도(道)를 펴고 화를 면할 뿐이니, 군자(君子)가 진퇴함에 동류들과 더불어 함께 하지 않음이 없다.
[本義] 三陰在下하니 當否之時하여 小人連類而進之象이나 而初之惡則未形也라 故戒其貞則吉而亨하니 蓋能如是면 則變而爲君子矣라
[朱熹의 본 뜻] 세 음(陰)이 아래에 있으니 비(否)의 때를 당하여 소인(小人)이 무리와 이어져 나오는 상(象)이나, 처음의 악(惡)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도(正道)를 지키면 길(吉)하여 형통하다고 경계하였으니, 이와 같이 하면 변하여 군자(君子)가 될 것이다.
象曰 拔茅貞吉은 志在君也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발모정길(拔茅貞吉 ; 띠풀의 뿌리를 뽑는 것은 곧아서 길하다)’은 뜻이 군주에게 있는 것이다.” 하였다.
[傳] 爻는 以六自守於下로 明君子處下[一作否]之道하고 象은 復推明하여 以象君子之心이라 君子固守其節以處下者는 非樂於不進獨善也요 以其道方否하여 不可進이라 故安之耳니 心固未嘗不在天下也라 其志常在得君而進하여 以康濟天下라 故曰志在君也라하니라
[程頤의 설명] 효사(爻辭 ; 여섯 개 효에 딸린 말)는 육(六 ; 陰)이 아래에서 스스로 절개를 지키는 것으로 군자(君子)가 아래에 처하는 도리를 밝혔고, <상전(象傳)>은 다시 미루어 밝혀서 군자(君子)의 마음을 형상하였다. 군자(君子)가 절개를 굳게 지키면서 아래에 처하는 것은 나아가지 않고 홀로 선(善)하게 함을 좋아해서가 아니요, 도(道)가 막 비색하여 나아갈 수 없으므로 편안히 여길 뿐이니, 마음이 진실로 일찍이 천하에 있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뜻이 항상 군주를 만나 나아가서 천하를 편안히 하고 구제함에 있다. 그러므로 “뜻이 군주에게 있다.”고 말한 것이다.
[本義] 小人而變爲君子면 則能以愛君爲念하여 而不計其私矣리라
[朱熹의 본 뜻] 소인(小人)이 변하여 군자(君子)가 되면 군주를 사랑함을 생각하여 사사로움을 따지지 않을 것이다.
六二는 包承이니 小人은 吉하고 大人은 否니 亨이라
육이(六二 ; 둘째 음효)는 품고 있는 것이 순히 받드는 것이니, 소인(小人)은 길(吉)하고 대인(大人)은 비색하니, 형통하다.
[本義] 大人은 否라야 亨하리라
[朱熹의 본 뜻] (포용하여 순히 받는 것이니 소인은 길하고) 대인은 비색하여야 길(吉)하리라
[傳] 六二는 其質則陰柔요 其居則中正하니 以陰柔小人而言이면 則方否於下하여 志所包畜者 在承順乎上하여 以求濟其否로 爲身之利하니 小人之吉也라 大人當否하면 則以道自處하니 豈肯枉己屈道하여 承順於上이리오 唯自守其否而已니 身之否는 乃其道之亨也라 或曰 上下不交하니 何所承乎아 曰 正則否矣니 小人順上之心은 未嘗无也라
[程頤의 설명] 육이(六二 ; 둘째 음효)는 재질이 음유(陰柔)이고 거처가 중정(中正 ; 가운데이고 음이 짝수 자리에 있음) 하니, 음유(陰柔)한 소인(小人)으로 말하면 막 아래에서 비색하여 마음에 쌓여 있는 것이 윗사람을 받들어 순종하여 비색함을 구제함으로써 자신의 이로움을 삼으려는데 있으니, 이는 소인(小人)의 길(吉)함이다. 대인(大人)이 비(否)를 당하면 도(道)로써 자처하니, 어찌 몸을 굽히고 도(道)를 굽혀서 윗사람을 받들어 순종하려 하겠는가. 오직 스스로 비색함을 지킬 뿐이니, 몸이 비색함은 바로 도(道)가 형통하는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상하(上下)가 사귀지 않는데 무엇을 받든단 말입니까?” 하기에, “정도(正道)가 비색한 것이니, 소인(小人)이 윗사람에게 순종하려는 마음이 일찍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本義] 陰柔而正中하나 小人而能包容承順乎君子之象이니 小人之吉道也라 故占者小人이면 如是則吉이요 大人則當安守其否而後道亨이니 蓋不可以彼包承於我而自失其守也라
[朱熹의 본 뜻] 음유(陰柔)로서 중정(中正)하니 소인(小人)으로서 군자(君子)를 포용하고 받들어 순종하는 상(象)이니, 소인(小人)의 길(吉)한 도(道)이다. 그러므로 점치는 자가 소인(小人)일 경우에는 이와 같이 하면 길(吉)하고, 대인(大人)일 경우에는 마땅히 비색함을 편안히 지킨 뒤에야 도(道)가 형통할 것이니, 저 소인(小人)이 나를 포용하고 받든다 하여 스스로 지킴을 잃어서는 안 된다.
象曰 大人否亨은 不亂群也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대인비형(大人否亨 ; 대인(大人)은 비색하니 형통하다)’은 소인(小人)의 무리에게 어지럽혀지지 않는 것이다.” 했다.
[傳] 大人은 於否之時에 守其正節하여 不雜亂於小人之群類하니 身雖否而道之亨也라 故曰否亨이라 不以道而身亨은 乃道之否也라 不云君子而云大人은 能如是면 則[一无則字]其道大也일새라
[程頤의 설명] 대인(大人)은 비(否)의 때에 바른 절개를 지켜서 소인(小人)의 무리에게 섞이고 어지럽혀지지 않으니, 몸은 비록 비색하나 도(道)는 형통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형(否亨 ; 비색하니 형통하다)’이라고 말한 것이다. 도(道)로써 하지 않고서 몸이 형통함은 바로 도(道)가 비색한 것이다. 군자(君子)라고 말하지 않고 대인(大人)이라고 말한 것은 이와 같이 하면 도(道)가 크기 때문이다.
[本義] 言不亂於小人之群이라
[朱熹의 본 뜻] 소인(小人)의 무리에게 어지럽혀지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六三은 包羞로다
육삼(六三 ; 셋째 음효)은 속에 품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
[本義] 包羞라
[朱熹의 본 뜻] 부끄러움을 품고 있는 것이다.
[傳] 三以陰柔로 不中不正而居否하고 又切近於上하니 非能守道安命이니 窮斯濫矣니 極小人之情狀者也라 其所包畜謀慮邪濫하여 无所不至하니 可羞恥也라
[程頤의 설명] 삼(三)은 음유(陰柔)로 중정(中正)하지 못하면서 비(否)에 거하고 또 위와 매우 가까우니, 도(道)를 지키고 명(命)을 편안히 여기는 자가 아니다. 궁하면 이에 넘칠 것이니, 소인(小人)의 정상을 지극히 한 자이다. 마음속에 품고 있는 지모(智謀)와 생각이 사특하고 넘쳐서 이르지 않는 바가 없으니, 수치스러울 만하다.
[本義] 以陰居陽而不中正하니 小人志於傷善而未能也라 故爲包羞之象이라 然以其未發이라 故无凶咎之戒하니라
[朱熹의 본 뜻] 음(陰)으로서 양위(陽位 ; 홀수 자리)에 거하여 중정(中正)하지 못하니, 소인(小人)이 선인(善人)을 해치려는데 뜻을 두고 있으나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수(包羞 ; 부끄러움을 품고 있음)’의 상(象)이 된다. 그러나 아직 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흉구(凶咎 ; 흉한 허물)를 경계함이 없는 것이다.
象曰 包羞는 位不當也일세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포수(包羞 ; 속에 품고 있는 것이 부끄럽다)’는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였다.
[傳] 陰柔居否而不中不正하니 所爲可羞者는 處不當故也라 處不當位는 所爲不以道也라
[程頤의 설명] 음유(陰柔)로서 비(否)에 거하여 중정(中正)하지 못하니, 하는 바가 부끄러울 만한 것은 처함이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다. 처함이 자리에 마땅하지 않음은 하는 바가 도(道)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九四는 有命이면 无咎하여 疇離祉리라
구사(九四 ; 넷째 양효)는 군주(君主)의 명령에 맡기면 허물이 없어 무리가 모두 복을 누리리라.
[本義] 有命이요
[朱熹의 본 뜻] 천명이 있고
[傳] 四以陽剛健體로 居近君之位하니 是는 以濟否之才로 而得高位者也니 足以輔上濟否라 然當君道方否之時하여 處逼近之地하니 所惡在居功取忌而已니 若能使動必出於君命하여 威柄이 一歸於上이면 則无咎而其志行矣라 能使事皆出於君命이면 則可以濟時之否하여 其疇類皆附離其福祉리니 離는 麗也라 君子道行이면 則與其類同進하여 以濟天下之否하리니 疇離祉也라 小人之進에도 亦以其類同也라
[程頤의 설명] 사(四 ; 넷째 효)가 양강건체(陽剛健體 ; 양효)로 군주와 가까운 자리에 거했으니, 이는 비색함을 구제할 수 있는 재주로 높은 지위를 얻은 자이니, 족히 윗사람을 보필하여 비색함을 구제할 수 있다. 그러나 군도(君道)가 막 비색한 때를 당하여 군주와 너무 가까운 자리에 처했으니, 껴려야 할 것은 공(功)을 차지하여 시기를 취함에 있을 뿐이다. 만일 동(動)함이 반드시 군주(君主)의 명령에서 나오게 하여 위엄과 권세가 한결같이 윗사람에게 돌아가게 한다면 허물이 없어 그 뜻이 행해질 것이다. 일이 모두 군주(君主)의 명령에서 나오게 한다면 때의 비색함을 구제하여 무리들이 모두 복지(福祉)를 누릴 것이니, 이(離)는 걸림이다. 군자(君子)의 도(道)가 행해지면 동류들과 함께 나아가서 천하의 비색함을 구제할 것이니, 이는 무리들이 복을 누리는 것이다. 소인(小人)이 나아갈 때에도 또한 동류들과 함께 한다.
[本義] 否過中矣니 將濟之時也라 九四以陽居陰하여 不極其剛이라 故其占爲有命无咎而疇類三陽이 皆獲其福也아 命은 謂天命이라
[朱熹의 본 뜻] 비(否)가 중(中)을 지났으니, 장차 구제될 때이다. 구사(九四 ; 넷째 양효)는 양(陽)으로 음위(陰位 ; 짝수 자리)에 거하여 강(剛)함을 지극하게 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점(占)이 천명(天命)이 있고 허물이 없어서 무리인 세 양(陽)이 모두 그 복(福)을 얻음이 되는 것이다. 명(命)은 천명(天命)을 이른다.
象曰 有命无咎는 志行也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유명무구(有命无咎 ; 군주(君主)의 명령에 맡기면 허물이 없다)’는 뜻이 행해지는 것이다.” 하였다.
[傳] 有君命이면 則得无咎니 乃可以濟否하여 其志得行也라
[程頤의 설명] 군주(君主)의 명(命)에 맡기면 허물이 없으니, 비로소 비색함을 구제하여 그 뜻이 행해지는 것이다.
九五는 休否라 大人의 吉이니 其亡其亡이라야 繫于苞桑이리라
구오(九五 ; 다섯째 양효)는 비색함을 그치게 하는지라 대인(大人)의 길(吉)함이니 망할까 망할까 하고 두려워하여야 총생(叢生)하는 뽕나무에 매어 놓듯이 편안하리라.
[本義] 大人이 吉하니
[朱熹의 본 뜻] 대인(大人)이 길(吉)하니
[傳] 五以陽剛中正之德으로 居尊[一作君]位라 故能休息天下之否하니 大人之吉也라 大人當位하여 能以其道로 休息天下之否하여 以循致於泰호되 猶未離於否也라 故有其亡之戒라 否旣休息하여 漸將反[一作及]泰에 不可便爲安肆요 當深慮遠戒하여 常虞否之復來하여 曰其亡矣其亡矣라야 其繫于苞桑하니 謂爲安固之道 如維繫于苞桑也라 桑之爲物이 其根深固요 苞는 謂叢生者니 其固尤甚하니 聖人之戒 深矣로다 漢王允과 唐李德裕 不知此戒하니 所以致禍敗也라 繫辭曰 危者는 安其位者也요 亡者는 保其存者也요 亂者는 有其治者也라 是故君子安而不忘危하고 存而不忘亡하고 治而不忘亂이라 是以로 身安而國家可保也라하니라
[程頤의 설명] 오(五 ; 다섯째)는 양강(陽剛 ; 양효임) 중정(中正 ; 가운데이고 양효가 홀수 자리에 있음)의 덕(德)으로 존위(尊位 ; 왕의 자리)에 거하였다. 그러므로 천하의 비색함을 종식시킬 수 있으니, 대인(大人)의 길함이다. 대인(大人)이 지위를 담당하여 도(道)로써 천하의 비색함을 종식시켜서 태(泰)를 순치(循致 ; 점차 이르름)하게 하나 아직 비색함을 떠나지 못했음으로 ‘망할까’ 하는 경계가 있는 것이다. 비(否)가 이미 종식되어 점점 태(泰)로 돌아올 때에는 곧바로 편안히 여기고 마음을 놓아서는 안되고, 마땅히 깊이 생각하고 멀리 경계하여 항상 비색함이 다시 올까 염려하여, ‘망할까 망할까’ 하여야 총생하는 뽕나무에 매어 놓듯이 편안할 수 있으니, 편안하고 튼튼하게 하는 도(道)가 총생하는 뽕나무에 매어 놓음과 같음을 이른 것이다. 뽕나무라는 물건은 뿌리가 깊고 견고하며, 포(苞)는 총생함을 이르는데 그 견고함이 더더욱 심하니, 성인(聖人)의 경계가 깊다. 한(漢)나라의 왕윤(王允)과 당(唐)나라의 이덕유(李德裕)는 이 경계를 알지 못하였으니, 이 때문에 화패(禍敗)를 불러들였던 것이다. <계사전(繫辭傳)>에 말하기를 “위태로울까 함은 그 지위를 편안하게 하는 것이요, 망할까 함은 그 보존한 것을 보전하는 것이요, 어지러울까 함은 그 다스려짐을 간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편안하여도 위태로워질 것을 잊지 않고, 보존하여도 망할 것을 잊지 않고, 다스려져도 어지러워질 것을 잊지 않는다. 이 때문에 몸이 편안하고 국가가 보존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本義] 陽剛中正으로 以居尊位하여 能休時之否하니 大人之事也라 放此爻之占을 大人遇之則吉이라 然又當戒懼를 如繫辭傳所云也라
[朱熹의 본 뜻] 양강(陽剛 ; 양효) 중정(中正 ; 가운데이고 홀수 자리에 양효임)으로 존위(尊位 ; 왕의 자리, 다섯째 자리)에 거하여 당시의 비색함을 종식시키니, 대인(大人)의 일이다. 그러므로 이 효(爻)의 점을 대인(大人)이 만나면 길(吉)한 것이다. 그러나 또 마땅히 경계하고 두려워하기를 <계사전(繫辭傳)>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여야 한다.
象曰 大人之吉은 位正當也일세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대인(大人)이 길(吉)함은 지위가 바로 해당되기 때문이다.” 하였다.
[傳] 有大人之德而得至尊之正位라 故能休[一有息字]天下之否하니 是以吉也라 无其位면 則雖有其道나 將何爲乎아 故聖人之位를 謂之大寶라하니라
[程頤의 설명] 대인(大人)의 덕(德)이 있으면서 지존(至尊)의 바른 지위를 얻었다, 그러므로 천하의 비색함을 종식시킬 수 있으니, 이 때문에 길(吉)한 것이다. 지위가 없다면 비록 도(道)가 있으나 장차 무엇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성인(聖人)의 지위를 대보(大寶)라 이른 것이다.
上九는 傾否니 先否하고 後喜로다
상구(上九 ; 맨 위의 양효)는 비색함이 기울어져 엎어짐이니 먼저는 비색하고 뒤에는 기쁘다.
[傳] 上九는 否之終也라 物理은 極而必反이라 故泰極則否하고 否極則泰하나니 上九否旣極矣라 故否道傾覆而變也라 先極은 否也요 後傾은 喜也니 否傾則泰矣니 後喜也라
[程頤의 설명] 상구(上九)는 비(否)의 끝이다. 사물의 이치는 극(極)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온다. 그러므로 태(泰)가 극(極)에 이르면 비색해지고, 비(否)가 극(極)에 이르면 통하여 편안해지니, 상구(上九)는 비색함이 이미 극에 이르렀으므로 비(否)의 도(道)가 기울고 전복되어 변한 것이다. 먼저 지극함은 비색함이요 뒤에 기울어짐은 기쁜 것이다. 비색함이 기울면 통하여 편안해지니, 이는 뒤에 기쁜 것이다.
[本義] 以陽剛으로 居否極하여 能傾時之否者也니 其占이 爲先否後喜라
[朱熹의 본 뜻] 양강(陽剛)으로 비(否)의 극에 거하여 때의 비색함을 기울게 할 수 있는 자이니, 그 점(占)이 먼저는 비색하나 뒤에는 기쁨이 된다.
象曰 否終則傾하나니 何可長也리오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비(否)가 끝나면 기울게 되니, 어찌 장구하겠는가.” 하였다.
[傳] 否終則必傾이니 豈有長否之理리오 極而必反은 理之常也라 然反危爲安하고 易亂爲治는 必有剛陽之才而後에 能也라 故否之上九則能傾否로되 屯之上六則不能變屯也라
[程頤의 설명] 비(否)가 끝나면 반드시 기울게 되니, 어찌 장구히 비색할 리가 있겠는가. 극(極)에 이르면 반드시 돌아옴은 떳떳한 이치이다. 그러나 위태로움을 돌려 편안하게 하고 난(亂)을 바꾸어 다스려지게 함은 반드시 양강(陽剛)의 재주가 있은 뒤에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비괘(否卦)의 상구(上九)는 비색함을 기울게 할 수는 있으나 둔괘(屯卦)의 상육(上六 ; 맨 위의 음효)은 어려움을 변하게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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