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화살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시 86:1-5)
우리는 여기서 선한 사람이 화살통에서 끼내 하늘로 쏘아올린 화살 다발들을 봅니다. 이 일련의 간구는 여러 면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이 기도들은, 실은 같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한 가지 복을 모든 면에서 눌러보며, 그 복이 참으로 크므로 그 복을 소유하려는 그의 소원도 그만큼 간절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가지 관련된 사실로 마음을 경건하게 만들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응답을 받은 옛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말씀이 있고, 우리가 그런 말씀을 사용하여 기도드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간구들이 거의 모두가 이전 시편들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이 간구들의 구조는 매우 획일적입니다. 각 간구에는 기도가 있고 탄원이 있으며, 거의 모든 간구에 하나님께 드리는 직접적인 기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모든 간구를 다 합쳐 놓으면, 참된 기도의 기원과 청원과 탄원에 대해 어떤 교훈들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붙들 수 있는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고, 어떻게 해야 응답을 확실히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을 붙드는 방법에 대한 교훈을 봅시다.
이 시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자주 나오고 의미심장하게 사용됩니다. 그리고 그 이름들이 사용되는 순서에 어떤 의도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맨 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에시 여호와라는 중대한 언약의 이름을 봅니다.
그것은 마치 시 전체를 황금 고리로 묶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딧붙여서 말하자면, 다음에 그 이름이 이 시의 다른 두 단락에서 각각 한 번씩 나오는데, 그 단락들을 현재는 다루지 않겠습니다. 다음으로, 또 그 단락 각각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을 봅니다. 그 다음에, 여호와와 같지는 않지만, 탁월과 권위의 단순한 개념을 포함하는 주라는 이름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다음으로, 이 시의 각 부분에서 시인이 이 세 이름, 곧 “여호와” “나의 하나님” “주”라는 이름을 거론하며, 그 이름들에서 자신의 신뢰 의 근거와 부르짖음의 이유를 찾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기도할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 틈을 메우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형식적으로 반복해서 부르는 것만큼, 헛되고 진실하지 못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호와의 이름을 부른다”(시 116:13)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크고 무한하신 성품의 여러 면을 마음에 떠올리는 것인데, 이 면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하는 이름에 전부 모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여호와”, “주”라고 말할 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즉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나오고 스스로의 동기로 움직이고 스스로 다스리시는 존재, 곧 그 이름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일 수밖에 없는 분에 대한 장엄하고 영광스러운 생각을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의 이름은 “나는 지음 받은 나다” 혹은 “나는 지금까지 되어온 나다” 이지만, 그분의 이름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입니다. 그분 자신 밖의 어디에서도 그분 존재의 이유가 없고, 그분 존재를 형성하는 법칙도 없고, 그분이 이르러야 하는 목표도 없습니다. 이 무한하시고 변치 않으시는 반석, 곧 영원하신 여호와, 스스로 존재하고 스스로 충족하신 분을 우리의 의지할 이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이름에는, 그 이상의 사상이 담겨 있습니다. 그 이름은 영원하고 무한하며 변함없는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과 맺으신 언약을 이루려고 계획하시는 일을 시작하셨다는 진리를 또한 표현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옛적부터 있어온 언약의 보증입니다. 비록 그 형태는 사라졌을지라도 본질은 지속되는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 때문에, 폐지할 수 없는 약속들로써 자신을 우리에게 묶으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여”하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약속들을 불러 모으고 신뢰의 근거로 붙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들을 그 같이 불러낼 수 있다면, 하나님의 행동, 하나님 자신의 무한한 존재, 하나님의 언약하신 은혜를 요구하는 우리의 동기로서 그 약속들을 하나님 앞에 겸손히 내놓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본문의 시는 “내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그 이름은 경배해야 할 권세에 대한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름에 “내”라는 간단한 단어 하나를 덧붙임으로써, 우리는 피조물이 하나님께 개인적인 관계를 요구할 수 있고, 깊은 의미에서 이미 그 관계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놀라운 사상에 이르게 됩니다. 알프스 산봉우리에서 떨어져 나온 작고 얇은 돌조각이, 알프스 봉우리와 자기가 같은 친족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보잘것없고 잘 자라지 못한, 그래서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을 조금밖에 쥘 수 없는 손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전부를 붙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주”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무한한 통치권, 곧 모든 환경과 피조물, 존재의 질서, 세상, 모든 시대를 주관하는 권세를 표시합니다. 하나님은, 계시는 모든 곳을 다스리십니다. 그래서 내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엄마”하고 소리칠 때, 그것은 다른 모든 간구 이상의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때, 그것은 애무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바, 아버지”하고 속으로 속삭이고 하나님께 말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여러 이름에 축적되어 있는 이루 말로 할 수 없는 많은 달콤함을, 믿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정으로 이해하고서 부르도록 하십시오.
2. 자, 둘째로 여기서 우리는 구해야 하는 것에 관한 교훈을 봅니다.
물론 본문에 나오는 간구들은 기도의 전 분야 가운데 한 부분만을 다루는 것입니다. 시인은 우리가 알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간구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사실 하나로 축소할 수 있지만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이제 그 간구들을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이것은 단지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불쌍한 종의 소원에 사랑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이고 관심을 가져달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들음이란 피조물의 소원하는 바가 하나님의 마음에 인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 그 간구에 응답하고 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여기서 바라는 것의 가장 좋은 실례는 다른 시에시 찾을 수 있는데, 그 시에서 또 다른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들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이에 팡이 진동하고 산들의 티도 요동하였으니" (시 18:6,7). 여러분은 수력 프레스 한쪽 끝에 물 한 스픈을 넣으면, 다른 쪽에서는 몇 톤(tons)을 압착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한쪽에서는 슬픔에 잠긴 한 사람의 목소리가 불쌍하고 가녀리게 흐르고, 그러면 다른 쪽에서는 지진이 일어납니다. 바로 그것이 “들음”과 “귀를 귀울임”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다음에, 이 기도는 세 가지 탄원으로 이어지는데, 이 탄원들은 모두 구원이나 도움을 요청하는 다양한 행동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이 단어는, 수비대가 요새를 지켜 안전하게 하는 보호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와 같은 뜻의 히브리어입니다. 이 말은, 무방비 상태의 사람이나 물건이 빙 둘러서 강력한 보호를 받는 것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이 단어가 표현하는 소원은 어떤 고통이 되었든지 간에, 영혼이 고통 가운데서 악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종을 구원하소서”하고 구하는 탄원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래서 고통 가운데서 안전하게 지켜주시기를 구할 뿐만 아니라,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시기를 또한 구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탄원은, 열등한 존재에게 내리는 은혜, 훨씬 다른 것을 받아야 마땅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적합하다고 여기는 대로 베푸시는, 힘을 북돋우는 일이나 도움 혹은 구원 같은 행동들에서 나타날 수 있는 은혜를 갈망합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탄원은,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라는 것입니다. 이 연속적인 간구는 “들으시기를” 구하는 데서 시작하여,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고, 이어서 “구원하시기를” 그리고 “은혜”를 베푸시기를 구하며, 끝으로 그토록 괴로워하고 근심해 온 “영혼을 기쁘게 해주시기를” 구합니다. 기쁨은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고자 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쁨을 주시기를 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기쁨은 모든 고통 끝에 받도록 계획된 결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바라며 삶의 고난을 견디며 지나갈 때에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 기도들은 탄원들을 한데 모아놓은 것입니다. 이 탄원들에서 두 세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모든 소원과 괴로움을 기도의 재료로 삼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시인은 어떤 성격의 고난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고난으로 괴로움을 당하였습니다. 시의 후반부에서는 영적 소원을 구하는 좀 더 고상한 영역으로 나아가지만, 본문의 첫 부분에서 시인은 무엇인지 밝히지는 않지만, 자기를 괴롭게 하는 환경과 씨름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을 주저 없이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그 환경에서 구원하는 도움을 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여러 가지 소원이 일어날 때 기도로 가져가지 않으면, 사람을 초조하고 혼란스럽게 하며 불안하게 만듭니다. 그 소원들을 기도로 아뢰면,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복이 됩니다. 스탠리(Stanley: 영국의 탐험가, 1841-1904)와 그의 대원들은 몇 주 동안을 독이 든 나무뿌리로 연명하였습니다. 그 나무뿌리를 날 것으로 먹었다면 온갖 질병을 일으켰을 것인데, 흐르는 물에 담가 쓴 즙이 뿌리에서 씻겨나가자, 건강에 좋은 식품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소원을 기도라는, 흐르는 시내에 담가두면, 여러 소원들에 들어 있는 독이 씻겨나갈 것입니다. 그 소원들 가운데 어떤 것은 억압되고, 어떤 것은 깨끗해지며, 어떤 것은 진정될 것입니다. 고민거리들이 있으면, 크고 작은 것에 상관없이 다 가지고 가서 기도해야 합니다. 같은 숨이라도 한숨만 쉬면 아무 소용이 없지만, 기도에 사용하면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지”(살전 5:17) 않으면, 그 사람이 도대체 기도하는 사람인지 의심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어떤 여행자에게 값진 술이 있는데, 그 사람이 겨우 아침에 한 방울, 저녁에 한 방울만 맛본다고 하면, 혹은 튼튼한 지팡이가 있는데 피곤한 길을 가면서 어찌다 한 번 그것도 아주 잠깐씩만 지팡이를 사용한다고 하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원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탄원하고,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은 다 하나님 앞에 펼쳐놓도록 합시다.
진지하게 탄원을 되풀이하는 것은 쓸데없이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도록 합시다.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습니다(26:44), 이 복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동안에, 복이 임하도록 기도를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쓸데없이 중언부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한 번 구하고 나서는 응답을 받았는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진실되게 구하는 사람은, 간절함이 없이 그것을 한 번 구하고 마는 것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는 의식에서 기도를 시작하고, 하나님의 충족하심을 믿는 마음으로 더 기도를 하면, 기도의 피를 계속해서 공급하게 되고, 그 결과 삶이 건강하고 튼튼해질 것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범위 안에서 소원을 품고 기도하는 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본문에 나오는 기도들 대부분이 성경 다른 곳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들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 내 믿음을 지지하는 한, 내 믿음은 성공할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베네치아의 꼬불꼬불한 좁은 길에는, 보도나 담벼락에 빨간 돌을 박아 넣어서 만든 가느다란 선이 있습니다. 가느다란 이 붉은 선을 따라가면, 구불구불한 모퉁이를 다 지나서 큰 예배당이 서 있는 중앙 광장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서 약속의 붉은 선을 놓치지 않는 한. 믿음이 그 선을 따라가서 마침내 성전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선이 멈추는 곳에서, 스스로 앞서 나가는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고, 추측에 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내려 쪼이는 햇살입니다. 참된 기도는 기도의 거울에 햇살을 받아서 다시 하나님께로 반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들으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하게 “주의 귀를 기울이소서”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겠다는 약속에 서 있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소서” 하고 부르짖을 용기를 갖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것이라곤 “주께서 말씀하신 바를 우리에게 행하소서 주는 우리에게 주 하나님이 되소서”하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배울 교훈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실 지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결정하시도록 맡기라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보존과 구원과 기쁨을 주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복을 자기에게 어떻게 전달하실지에 대해 하나님께 처방을 내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당하는 고난을 없애 달라고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없애 주실 수도 있고, 고난을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나은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는 고난 속에 있되, 거기에 함몰되지 않기를 구하고, 파도가 높이 칠 수 있지만 파도가 볼품없는 작은 조가비 같은 배를 침몰시키지 않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는 방법을 하나님께 지시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 모든 것을 하나님 손에 맡기는 이것이, 참된 기도의 가장 깊은 핵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편지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전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실”(딤후 4:18) 것을 안다고 당당한 확신 가운데 말하였습니다. 또한 사도는 자기의 가는 길이 끝났고,이제 자기 앞에는 면류관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어떻게 사도가 "천국에 늘어가도록 구원을 받고 사자의 입에 서 전짐을 받았습니까?"(4:17) 그토록 오랫동안 하나님의 교회를 생각하느라 지친 머리를 벤 칼이, 해방의 도구요 구원의 수단이었습니다. "주의 종을 보존하소서" 하고 드린 기도에, 더 예리한 고통을 응답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여” 응답하시는 일이, 부스러진 옥수수를 더 잘게 부수는 더 미세한 몰러가 분은 제분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고난의 마지막과 의미는, 마침내 더 깊은 기쁨으로 “종의 영혼을 기쁘게 하려는” 것입니다.
출처
맥클라렌 강해설교 시편(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