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을 찾아서」
별밭을 우러르며
진도 동외리 농부시인 석가정(石佳亭)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흔히 정치인이라고 볼 수 있다. 집권정당의 교체, 입후보자의 세대교체를 통해 ‘젊은 피의 수혈’이라는 통속한 수사를 동원하면서 그럴듯하게 국민의 갈망을 충족시켜주는 듯 하다. 우리들의 현실은 이를 받아들이게 한다.
그러나 백성들은 늘 샘가에서도 목마름을 해소하기 어렵다. 시대의 팩트를 꿰뚫어내기 보다는 자기 집단의 이해를 위해 온갖 현란한 슬로건이 난무할 뿐이지 정작 서민 대중의 절박한 염원과의 소통에는 한계를 드러내기 마련이다.
예술은 지배집단과 소외집단간의 고비사막같은 소통부재의 간격을 오아시스처럼 끌어들이는 마력이 있다. 그것은 진정으로 생명성과 인본주의를 기본가락과 밑그림으로 하는 예술가들에게 한정된 헌사가 될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조악한 수식과 구태한 양식성에 매몰된 예술작품은 그저 신기루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지난 7월 11일부터 목포시 목포역 대합실 2층에서 전국 통일평화시 전시회가 열렸다. 진도에서는 민예총 소속 박남인 시인과 농사짓는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진도읍 동외리의 석가정선생이 참여했다.
시인은 우리에게 샘물과도 같은 존재이다. 또는 어둔 밤길을 걷는 나그네와 동해하는 하늘 은하수의 그 별빛같은 언어들로 두려움을 맑게 씻어내는 역할을 해준다. 과연 우리 곁에 그러한 존재가 몇 분이나 될까? 진정한 자기 고뇌의 회랑을 수없이 넘어 와 마침내 영혼의 땀을 쥐어 짜낸 언어의 물방울이 모여 우리의 갈증을 적셔주는 샘물이 되는 것이지 ‘타고난 천재성’의 발현은 단지 건전지에 기대인 조명등에 불과할 뿐이다.
석가정은 돌을 다듬어 지어낸 쉼터 정자이다. 그는 그렇게 사십년이 넘게 진도 동외리 들녘과 더 동쪽에 자리한 성죽골에서 거친 밭고랑을 파고 사랑의 둑을 쌓아올리면서 아내와 함께 초막집을 향해 밤길을 걷다 하늘 한번 쳐다보고 아내 한 번 쳐다보며 한없는 우주의 정기를 담아 맺히는 밤이슬같은 시어들을 촘촘히 꿰어 마침내 “이 지상에 산다는 것”이란 시조집을 세상에 내 놓게 되었다.
“만약 네가 시인이라면 쓴 시가 한 사람에게 백번 읽히는 게 좋을 것인가 아니면 백 명의 독자에게 한 번씩 읽히는게 더 나을 것인가?” 문학창작에 입문하던 청소년시절 선배들은 문청에게 주는 화두처럼 이런 질문을 했었다. 당시에는 서로 다른 답들이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고전의 명작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당대의 베스트셀러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의 기성 문인들의 고뇌가 담긴, 스스로에게 던지는 곤혹스런 질문이었을 것이다.
석가정의 첫 시집인 “이 지상에 산다는 것”은 아직도 우리 지역은 물론 호남의 많은 문인들에게 하나의 전범으로 남아 문학과 삶의 이정표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이제 석가정시인이 다시 고희를 앞두고 새 작품집 발간에 몰두하고 있다. 늘 창창한 말투로 술자리의 대화를 이끌어내던 청년같은 기상도 오랜 노동의 피로가 쌓인 병마와 싸우느라 기력이 많이 떨어진 것도 사실이다. 애호박처럼 서방님의 잎그늘에 좀처럼 드러내지 않으려던 수줍음 많은 부인께서도 간병하느라 어려운 살림살이 하느라 그 고운 혈색이 좀 바래진 듯하다.
이 쯤에서 석가정시인의 시 한편을 감상해보자.
「닭 울면 깨어 앉아」
닭 울면 깨어 앉아
하루 살림 준비하다
가만 샛문을 열고/ 하늘을 우러른다
미물도/ 이 새벽에 깨어/ 나를 닮아 있구나.
미물도 생명인 것/ 나 또한 미물인데
싸잡아 약을 치던/ 푸성귀 남새밭에
아서라,/ 맥고모 허수아비/ 고개 갸웃 외면한다.
빚지고 살지 말자/ 침묵하는 대지 위에
엉겅퀴 자란 엉새/ 낫 갈아 베고 나면
일굴 땅/ 반달 만큼이/ 내 몫으로 눈 뜬다.
그는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그 “대지에 빚을 지지 말자”는 신조를 버리지 않았다. 땅과 땀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미물에 대한 생명성을 어쩔 수없이 적으로 바라보는 인간의 욕망을 외면하는 허수아비의 고개짓이 그의 농사법을 알게 한다.
석가정선생은 젊은 시절 객지바람도 조금 맞아보았다. 한 때는 서울에서 우편배달부 생활을 하기도 했다. 산동네로 오르는 발길은 자꾸 고향의 산비탈을 향했다. 그리고 미련없이 다시 돌아왔다. 본 성씨는 청주 한씨이다. 이름 또한 ‘승배’로 문학판 바깥에서는 한승배라는 호적 명이 버젓이 있지만 세상사람들은 ‘석가정’이 더 정겨웁다.
벌써 5년 쯤 지난 때다. 석가정선생이 몹시 아파 목포의 어느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기적적으로 치유되어 고향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넉넉지 않은 가세라 진도의 문인들과 주변 인사들이 병문안을 하고 쾌유될 것을 간절히 바랬던 염원의 덕과 아직 못 다한 문학의 꿈이 그의 핏줄을 힘차게 흔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석가정의 시조시집은 진도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흔히 진도를 시서화창의 예향이라 부르지만 해방 이후 현대로 오면서 한시의 맥락을 제대로 잇고 풀어내는 작업에 부족함이 없지 않았다. 석가정 이전에 진도에 시가문화가 없으며 석가정 이후에도 그를 뛰어넘어 진도군민들의 한없는 사랑을 받는 시작품집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지나친 말일까?
석가정이라는 이 든든한 디딤돌로 인해 진도는 많은 시인들을 배출하기 시작한다. 함께 문학의 황무지같은 진도에서「섬문학」을 결성, 진도문학계의 큰 기둥으로 자리한 천병태시인, 아동문학의 선구자인 이병진 선생, 공직에 있으면서 남다른 시작 열정을 잃지 않았던 이무영 시인과 구도적인 시어를 찾는 오판주시인, 매년 시집을 엮어내는 놀라운 열정을 자랑하는 김영승시인, 문학박사가 된 박영관 교장, 글의 바다를 건너온 오성수 진도타래시회장, 시중유화 화중유시를 지향하는 김민재씨, 청초한 멜로디를 담은 김춘화 시인외에도 또 하나의 농부시인 박채훈, 국전특선작가를 겸한 박진설 현 진도문인협회장, 품격과 서민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담은 박명준, 조금난리 장터의 정서를 엮어내는 김권일 씨 등이 앞 다투어 시화를 꽃피우고 있으니 그 감화가 얼마나 큰 것이랴. 그는 그래서 이제 우리들에게 영원한 옥주 문학마을 촌장으로 깊이 각인되었다.
삼십대 후반 시절, 나를 비롯해 김권일, 이창준 이계웅 등은 석가정선생과 어울려 술집 순례를 하며 문학창작에 대한 이야기로 괜스레 몸이 달아오르곤 했었다.
나는 사적으로 어린 시절 석가정이 농사를 짓는 성죽굴 길을 걸어 진도읍으로 학교를 다녔다. 비끼내 산골 촌놈은 책보를 등에 매고 “삐약다리”로 힘들게 몇 고개를 넘어 보리밭 강낭콩밭 참외 수박밭 양배추밭을 지나며 괜스레 침을 흘리기도 했다.
우리들은 늘 배가 고팠다. 양은 도시락에 담긴 밥은 아침에 한 고개 넘고 호랑이처럼 먹어치우는 게 다반사였다. 가파른 산길을 넘고 또 넘어 학교를 다녀야 하는 처지라 진달래꽃, 삐비, 꿩밥 꽃, 찔구 동, 산 칡순을 뜯어 먹거나 봄물이 가득 오른 산야초 동을 꺾어먹기도 했다. 좀 실건 녀석들은 성죽굴 밑에 즐비한 밭작물에 눈독을 들이고 한 밤중에 빤스만 입은 채 서리를 하다 경을 친 녀석들도 많았다. 대낮에도 오이 참외를 따다가 들키면 꿩 새끼처럼 요리조리 잘도 피해 산길로 도망가곤 했던 추억들이 지금도 선명하기만 하다. 석가정은 그때부터 수박 등 과일을 남의 땅에 재배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밤에는 글농사에 게으르지 않았다.
시조문학 추천으로 등단하여 진도문인협회장을 역임하고 항재문학상, 전남문학상을 수상한 것도 그의 지난한 인간애가 담긴 시작(詩作)에 대한 보은이 아니겠는가?
주머니가 늘 헐렁해도 후배들에게 술 사주기를 결코 마다하지 않던 석가정. 다시 원기를 찾은 석가정시인은 이제 두 번째 시작품집을 마무리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가 성죽굴 노지에 심어 키워낸 수박처럼 달고 시원한 시어들을 음미하며 우리가 이 여름의 무더위 삼복을 잊을 수 있기를.
세상과의 소통은 그에게도 힘이 들었던 모양이다. 신명을 얻는 일이 잘 빚은 술 한병을 요구하듯이 그도 하루 해가 저물면 술 한병이 달처럼 떠올랐을까? 다 털지 못한 밤 이슬같은 술 한 모금이 세상에의 갈증을 해소하고 “똑바로 걸어서 갈 수 없는” 이상향을 미리 그려보면서 자미성 갈지자로 시운을 짚어 귀로를 더듬었으리라.(박남인)
맹아(萌芽)
석가정
벌거숭이 그루마다/ 터울들은 부활하고
여린 잎 속 살들이/ 햇살 속과 뺨 부빈다.
쟁기날/ 흙을 뒤집던/ 가슴 싸함 아니냐.
목마(木馬)를 떼로 타고/ 서로 경주(競走)를 손뼉치며
신화(神話)의 건널목을/ 막 달리는 새 싹들이
아직은/ 지성(知性)이 입을 다문/ 조물주의 형상이다.
산란기의 주접살은/ 이랑마다 몫을 놓고
정답게 닮아가는/ 터울들의 이목구비(耳目口鼻).
늘 푸른/ 살림살이는/ 하늘 뜻이 아니냐.
도덕율이 즐비한/ 대지의 천재(天才)들이
하늘 빛 닮을수록/ 질서를 문답하며
성깃한/ 터울 틈새로/ 서로 빗겨 앉는다.
경칩(驚蟄)
향로(香爐) 지핀 산수화(山水畵)석/ 후후 불고픈 아지랭이
동면하던 언어들이 개미집을 꿰뚫고,/ 성긴 빛/ 간지러움을/ 비늘 곱게 털어라.
안빈(安貧)의 주름살이/ 홍안(紅顔)으로 웃는 낙도(樂道)
먼 기다림의 여울목에 친근한 대화가 흐르고,
인연의/ 끈을 내리는/ 터울들의 설레임.
탈 바꾸는 이목구비(耳目口鼻)/ 꽃샘바람 쏘삭인다.
홍역살로 돋아나는 눈(芽)꽃의 어진 피질(皮質),
그 인동(忍冬),/ 장년기지형을/ 갈이하는 자화상.
아지랭이
신방을 나선 요정들이/ 사랑탑을 쌓는 진미로
춘사(春思)한 허리 어우르며/ 가는가,/ 오는가.
상사(相思)의 돛을 올리고/ 자유항에 닿는 정.
마냥 그리 그리움에/ 보송한 가슴을 열고
아른체하는 미소들이/ 얼마만인가?
오랜만일세!
동정녀(童貞女) 벙근 옷깃에/ 흰 나비 떼 날아라.
자유분방한 동행들이/ 한결 가벼운 반려로
밀낭(蜜囊) 속의 밀어들을/ 주는가,/ 받는가.
오오랜 애모(愛慕)를 밝혀/ 강산마다 빠곰한 문.
그의 시어는 간결하다 못해 차라리 ‘안빈(安貧)’하다. 그가 성죽굴 부근에서 수십년 수박 참외 농사 하면서 고랑마다 첫 순을 또옥 똑 따 내는 작업처럼 조금은 아쉽기도 할 터이지만 늘 자신의 고아한 잣대로 솎아내기를 꺼려하지 않는다. 바로 그 안빈에서 낙도를 얻는 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래서 수 십년 시작업도 너무 과작이라 이제사 두 번째 시집을 간추려 엮는데 애를 쓰는 듯하다.
석가정 시인에게 평생의 동반자, 아내는 늘 귀항의 닻을 내리고 정박하고픈 ‘자유항’의 이미지로 새겨진다.
밖으로 떠날 땐 ‘상사(想思)의 돛’을 올리고 미리 “오랜 애모를 밝혀” 다시 “밀낭(蜜囊) 속의 밀어”들을 주고받을 설레임에 잠긴다. 부인은 남편의 손길 가득 잘 익은 참외의 색깔을 물들인 노란손수건을 그 자유항의 등대불빛처럼 한 밤에도 펄럭이고 있을 터이니 50년이 지난 들 이 향기로운 사랑의 항로를 어찌 잊을 수 있을 것인가. 이들의 식지 않은 순정한 사랑이 부럽기만 하다.
그의 시를 풀면 삶이 되고 다시 삶을 간추려 한 소절 나누면 절창의 시가 된다. 직접 살펴보자. “박꽃 피는 산마을에/ 다사한/ 초가집 짓고/ 이엉 엮어 덮는 정.” “별빛에 잠을 깨어/ 동트는 들녘에서/ 두렁을 쌓는 뙈기/ 빛을 캐는 호젓함에 일구는/ 가난한 마음/ 씨 뿌리며 삽니다.” 석가정의 시 「아내에게」중에서.
군더더기 하나 없는 산골마을 생활일기다. 늘 자신을 먼저 경계하는 잠언의 기품을 담아낸 시작들은 특별한 누구를 의식하지 않기에 무애하다.
그에게도 외로움이 없을 리 없다.
“눈물 고인 이승에 어두움이 털리”지만 다시 “털리는 비늘마다 별이 되어 살아나”는데 미리내 하늘 별강에 “하나 둘 모이는 행렬 속” 기어코 “나의 별이 떨고 있다.”며 땅위의 내 자신의 실존성과 언젠가 저 하늘에 투영될 또 하나의 내 별이 떨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은 우주 속 홀로임, 모든 인간의 아득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살펴진다.
그는 천하가 아는 농부이며 시인이지만 결 깊은 시대의식을 잃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쓴 6.25관련 갈매기섬의 비극을 담은 ‘진혼시’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청태 낀 서리서리 움켜쥔 삶의 갈망
반세기 기운 세월 그 껍질을 벗기는 일
맺힌 고
매듭을 풀며
한 시대를 앓습니다.
겨냥한 총구 앞에 멀뚱한 눈 그대로
이념의 진창 속으로 떨어진 목숨들이 원 풀고
왕생안락하기를 헌작하며 비옵니다. 진도 동외리 석가정.(진혼시 중에서)
진정한 화해는 용서보다는 왜곡된 역사의 껍질을 벗기고 진실의 알맹이를 찾아낼 때 이뤄진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석가정은 이 씨눈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다음시대의 진정한 평화를 기원합니다.
시인은 한 시대의 문화적 표상입니다. 끝 모를 탐욕이 지배하는 천민자본주의 시대에 허우적대는 인간정신의 오염을 정화시키는 역할은 고대로부터 한울님과 인간의 신탁을 매개할 때부터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 시대에 와서는 오히려 자기반성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기사 우리에게 반성의 계기를 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해질녘 / 석가정
화로를 다둑이던
할아버지 무덤위에
잉걸인 불씨를
솔개가 쪼고 있다
저승의
초가삼간 섬돌 아래
나막신이 놓여 있다.
눈물 고인 이승에는
어두움이 털리고
털리는 비늘마다
별이 되어 살아나고
하나 둘
모이는 행렬 속에
나의 별이 떨고 있다.
아내에게
당신은 한 송이 꽃
나는 나비 옷 입고
어룬 사랑의 나라
박꽃 피는 산마을에
다사한
초가집 짓고
이엉 엮어 덮는 정.
별빛에 잠을 깨어
동트는 들녘에서
두렁을 쌓는 뙈기
빛을 캐는 호젓함에
일구는
가난한 마음
씨 뿌리며 삽니다.
낯설은 이웃을 모아
낯익은 고향에서
피고 맺는 꽃망울 보며
미명에 불 밝히고
한 움큼
소금이 되어
뿌리 깊은 사랑아-.
일월 빛 학으로 늙어
삼행시 피리 불고
그 가락 가훈을 빚어
자식들과 구문(構文)을 하며
소망의
언덕에 올라
화석으로 됩시다.
시인 채정은 씨는 아예 “석가정시인”을 제목으로 해 헌시를 작성했다.
바다가 있는 땅 위에/ 그가 산다
오늘은 모내기/ 내일은 수박 참외 모종을
올해는 수박값이 좋아야 할 텐데
그러다 막걸리 한 잔에
곤히 잠이 든다
주름진 얼굴에 장화를 신고
워워 논을 갈며
이랑 이랑에 모종을 심는다
언젠가 성죽굴 땅 위에
육신을 던지고
나는 천상 농사꾼이여
그 땅 때문에
시인이 산다.
채정은 시인은 전남 진도(금호도 금계리)에서 태어나 완도에서 완도수산고를, 여수에서 여수수산대학을 다녔다. 1983년 섬문학(현 진도문학)에 참여하는 한편, 진도문학에 광주민중항쟁을 소재로 한 시 <광야를 건너면> <목각인형> <남도로 가는 예수> 등 다수를 발표했다.
1984년 전남 진도에서 천병태 시인과 진보적 시동인지 <제3의 시>를 창간 하기로 한 후, 강원도 원주에서 채정은 주간으로 그해 12월31일 <제3의 시>를 창간함. 초대시에 천병태 시인, 이혜옥 시인이 참여했으며, 정세용. 김명돈. 채정은. 서은철. 조정환 시인이 참여함. 박록담 시인이 창간 축사.
이후 홍천에서 2집, 춘천에서 3집, 전남 광주에서 4집(1988년)을 발간. 초대시인에 청록파 시인인 박두진 시인, 춘천 이무상 시인, 대구 문무학 시인이 참여했다.
1992년경 민족문학작가회의 공동시집인 <시는 어디 있는가>에 <광야를 건너면 .3>를 발표하고, 94년 계간 <시인과 사회>에 <자유>를 발표했다.
분단 이후 59년만에 개최된 남북작가대회(2004.8.24~29. 5박6일, 평양, 묘향산, 백두산에서 개최)에 2003년 남측 대표로 선발됐으나 북측이 연기(1년후에 행사 개최됨)함에 따라 참석치 않음. 대신 중국 길림성 연길(엔지) 연변대에서 개최된 정지용문학제 참석.
2008년 9월 석가정은 진도 갈매기섬의 보도연맹사건을 주제로 진혼시를 발표했다.
<진혼시>
이승의 갈매기섬 반세기 전 떼주검들
깨어나라, 깨어나라 번뜩이는 눈빛들이 한 핏줄
치닫는 연민
울먹이고 있습니다.
절규도 아비규환도 삼켜버린 절망의 섬
삭은 뼈 피리소리 모발위에 술렁이고
허공중
바람처럼 구름처럼…
균열진 인토 위에 고해의 거센 물살
소용돌이 치고 싶은 벌거숭이 가슴들이
온전한
화해를 위한
흔적들을 찾습니다.
혼돈하는 선과 악이 무상을 앓는 바다
긴 염불 자진 가락을 토해내고 있는 파도
이 저승
먹장 가슴을 찢는
요령소리 높습니다.
청태 낀 서리서리 움켜쥔 삶의 갈망
반세기 기운 세월 그 껍질을 벗기는 일
맺인 고
매듭을 풀며
한 시대를 앓습니다.
겨냥한 총구 앞에 멀뚱한 눈 그대로
이념의 진창 속으로 떨어진 목숨들이 원 풀고
왕생안락하기를
헌작하며 비옵니다.
진도 동외리 석가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