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산항 일출과 목은 이색이 걷던 산책길(해파랑길 22구간)
2018년 1월 7일(일) 날씨 : 맑은 후 흐림 가온 : 섭씨 -1~10도
구간 거리 : 16km 걸린 시간 : 6시간 동행 : 귀연산꾼 26명
코스 : 죽도산 전망대-축산항-대소산 봉수대-사진구름다리-목은이색선생유적지-괴시리 전통마을-대진항-대진해수욕장-덕천해변-고래불 해변
<축산항 앞 바다 여명>
<죽도산 등대>
죽도산 전망대 : 죽도에는 대나무가 많다고 해서 북도라 하며, 1935년 해발 80미터 정상에 처음 등대가 세워졌다.
당시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서 축산으로 들어오는 어선의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포항 장기와 울진 증간에서 북극성처럼 빛났다고 한다.
2011년 5월 동해안 푸른 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죽도산 전망대가 설치되었다.
<축산항 일출>
2018년 황금개띠라고하는 무술(戊戌)년이 밝았지만 음력으로 따지는 12간지의 새해는 아직 멀었다. 많은 인명을 앗아갔던 6. 25 전쟁 시기에 태어났던 58년 개띠들이 회갑을 맞는 해인데 그들은 변화하는 시대적 운명이어서인지 말도 많고 길흉도 심하다.
1월 1일 동해안 해돋이는 교통지옥으로 도저히 엄두를 내기 힘들다. 이번 해파랑길은 특별히 일출을 보는 행사를 곁들여 진행하기로 했는데 다행히 날씨가 좋다.
이른 새벽 대전 시내를 한 바퀴 돈 버스는 당진-영덕간 고속도로를 빠르게 달린다. 잘 뚫린 고속도로 덕분에 영덕까지 2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으니 세상은 급속도로 좋아졌다.
축산항은 요즘 세종시의 새로운 정동진으로 간주되어 각광받고 있다.
바닷가는 바람은 불지만 다행히 기온이 낮지 않아 해돋이 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하지만 해무가 끼어 온전한 일출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보는 감정은 이루 표현하기 어렵다. 상당히 오랜만의 바닷가 일출 보기였기에 삼각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한참을 기다린다.
구름의 색깔이 현란하게 변하는 장관이 근사하다. 어쩌면 쾌청한 날씨에 뜨는 일출도 멋지지만 구름 사이로 솟는 붉은 해의 모습도 볼만하다.
가끔씩 조연으로 나타나는 어선과 갈매기의 출연도 근사한 배경이 된다.
특히 여명의 어둠을 밝히는 죽도산 등대의 환한 불빛은 가뜩이나 위태로운 대한민국호의 안위를 책임져 주는 등불처럼 우뚝하다.
<2018년 새해 해맞이>
<해안과 죽도산을 연결하는 블루로드다리>
떡국을 끓여 한 사발씩 나이를 먹는 모습도 재미있고, 한 해를 시작하는 동호인들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보인다.
커다란 양푼의 떡국이 모두 소진되고 일행은 그룹을 지어 해파랑길 걷기에 나선다.
<21구간 말미산>
<죽도산 해안 데크>
<축산항>
조금 늦게 출발했지만 죽도산 데크를 따라 해안가를 답사하고 축산항에 들어섰다.
어선이 정박한 후 어촌의 생명줄인 새벽 수산시장 경매가 열리고 있다. 풋풋한 생존의 삶이 보이는 어시장의 아침을 오랜만에 보았다.
강릉의 정동진이 서울의 정동쪽인 것처럼 축산항은 세종시의 새로운 정동진으로 불린다.
<축산항 새벽 경매 모습>
<해파랑길 입구(남씨발상지)>
<축산항>
<남씨휴허각>
<와우산 월영대>
<와우산 일광대>
<블루로드와 해파랑길 갈림길>
와우산(66.3m) 입구에는 남씨발상지 표지석이 보이고 바로 월영대와 일광대 표석이 나타난다.
밤에 달빛을 볼 수 있고, 아침에는 햇빛을 맞는 장소로 와우산이 제격이었던 모양이다.
길은 약간의 오르막을 지나 대소산봉수대에 이른다. 흡사 커다란 왕릉처럼 만들어진 봉수대는 현대판 통신중계탑과 같이 있는데 옛날과 현대의 통신 수단이 제대로 만난 형국이다.
봉수라는 표현은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고 밤에는 불빛을 사용하여 정보를 먼 곳까지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는 신호였다.
인근의 봉수대에 차례대로 전달하여 한양까지 도달하였는데 봉수 신호를 잘 받고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산꼭대기에 세운 것이다.
대소산은 해발 278m이지만 바닷가이기에 상당히 높은 편이다. 근처에는 해발 226m의 망월봉과 152m의 망일봉이 있다.
대소산봉수대는 근처 별반봉수대와 광산봉수대 그리고 북쪽의 후리산봉수대에 신호를 보냈다. 광산봉수대에서는 남각산봉수대로 다시 신호를 보내는 체계를 이룬다.
함께 걷던 일행들이 궁금해 했던 봉수대와 봉화대는 같은 의미이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확인했다.
대낮에 연기로 위급함을 알리는 것을 봉(熢)이라 하고, 저녁에 불을 놓아 위급함을 알리는 것을 수(燧)라고 한다.
<대소산 봉수대>
봉수대(烽燧臺) : 우리나라에서 약 120년 전까지 사용하였던 봉수는 과학적으로 잘 갖추어진 통신 방법이다.
봉수대에서는 낮에는 연기를 이용하고, 밤에는 불빛을 이용하여 정보를 먼 곳까지 신속하게 전달하였다.
신호가 전달하는 내용은 봉수대의 굴뚝에서 올리는 연기나 불꽃의 수에 따라 달랐다.
이렇게 연기나 불빛을 이용하여 만든 신호는 인근의 봉수대에 차례대로 전달되어 한양(현재의 서울)까지 전달하였다.
봉수대는 봉수 신호를 잘 받고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높은 산꼭대기에 세웠다.
평상시 연기나 불빛으로 알아볼 수 있는 거리를 두고 봉수대를 세웠는데, 이렇게 설치된 봉수대는 전국에 600개 이상 되었다.
높은 산의 정상에 세워졌던 봉수대 자리는 지금의 전파 중계소가 있는 곳과 거의 같다.
봉수대는 봉수 신호를 잘 받고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높은 산꼭대기에 세웠다.
평상시 연기나 불빛으로 알아볼 수 있는 거리를 두고 봉수대를 세웠는데, 이렇게 설치된 봉수대는 전국에 600개 이상 되었다.
높은 산의 정상에 세워졌던 봉수대 자리는 지금의 전파 중계소가 있는 곳과 거의 같다고 한다.
봉화대(烽火臺) : 고대 변방에서 봉수(烽燧)를 이용, 긴급 상황을 알리기 위해 토성(土城)으로 축조한 초소. 봉후(烽候)라고도 한다.
대낮에 연기로 위급한 상황을 알리는 것을 ‘봉(烽)’이라 하고, 저녁에 불을 놓아 위급함을 알리는 것을 ‘수(燧)’라고 한다.
영덕대소산봉수대(盈德大所山烽燧臺) : 경상북도 기념물 제37호. 대소산은 해발 282m의 영덕 동남쪽 해안의 주봉인데, 산의 정상부에 지형을 이용하여 직경 약 20m 되는 넓이의 둘레에 대석을 쌓아 올렸으며, 그 안에 원추 모양의 직경 11m, 높이 2.5m의 봉돈(烽墩)을 쌓았다.
봉수대 중앙부는 역시 석축으로 된 연통(굴뚝)이 구축되어 있다.
연통의 외형은 단경 10m, 장경 12m에 높이가 약 3m되는 원통형이며, 구조는 대소형의 할석을 이용하여 두께 1.5m 되는 석축 벽으로 둘러 있다.
현재 영해읍에서 동남쪽으로 직선거리 3㎞, 축산항(丑山港)에서 서북쪽으로 약 1㎞, 해안으로부터도 약 1㎞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대소산 봉수대를 중심으로 보았을 때 남쪽으로는 별반봉수대(別畔 烽燧臺), 북으로는 평해(平海)의 후리산봉수대(厚里山烽燧臺), 서로는 광산 봉수대(廣山烽燧臺)를 거쳐 진보(眞寶)의 남각산 봉수대(南角山烽燧臺)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었다.
이들 여러 봉수대 가운데 대소산 봉수대가 가장 형태가 뚜렷하게 남아 있어 이 지역의 조선시대 통신수단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대소산 봉수대에서 보이는 낙동정맥>
<봉수대에는 현대식 통신 중계탑이 세워져 있어 옛날과 현재가 공존한다>
<봉수대에서 귀연 단체 촬영>
<대소산 또는 봉화산 정상>
<망월정과 현판>
<솔밭 오솔길로 이어지는 22구간 블루로드-멀리 후포항이 보인다>
<해파랑길 이정표>
<망월봉을 내려서 건너는 사진구름다리>
망월봉에는 망월정이 있는데 동해 바다가 잘 보인다. 사진리와 영해면을 잇는 골짜기 사이로 사진구름다리가 설치되어 해파랑길 걷는 이들에게 편리함을 준다.
길은 계속하여 소나무 숲길로 이어진다. 솔밭을 걷는 이색적인 오솔길이 너무도 푸근하고 좋다.
목은 이색이 사색하며 걸었음직한 오솔길은 상쾌함과 더불어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시며 걷는 평화로움이 함께 한다.
약간의 구불거리는 오솔길은 이내 망일봉을 지나 목은이색기념관으로 연결된다.
아주 좋은 터에 자리한 이색기념관은 해파랑길 순례의 유익한 시간이 되었다.
목은 이색의 삶을 생각해 보고 그가 지은 시와 멋진 글씨에 감탄도 해 본다.
고려 말 대학자가 비운에 처해 망해 가는 나라를 생각하는 애처로움이 시 곳곳에 배어 있다.
이색(李穡, 1328~1396) : 고려 말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며 유학자, 시인이다.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성리학을 고려에 소개, 확산시키는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의 제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들은 다시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 유창(劉敞) 등의 스승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부정적으로 보고 협조하지 않다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한다.
그는 이종학(李種學)의 아버지이고 박상충(朴尙衷)의 손윗처남이며 박은(朴誾)의 외숙부이고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목은 이색 생가>
영해 동녘바다 해돋이(寧海東溟看出日)
외가댁은 적막한 바닷가 마을에 있는데 풍경은 예로부터 사람들 입에 올랐었네.
동녘 바다 향하여 돋는 해를 보려 하니 갑자기 슬퍼 두 눈이 먼저 캄캄해지누나.
황량한 마을서 하룻밤 단란하게 묵으면서 젊은 시절 회포를 자세히 못 논해 보았는데,
회상컨대 몇 년 새에 선배들은 다 떠났고 아침까지 지저귀더니 어느 덧 또 황혼일세.
백설이 자자해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늬 곳듸 피엿는고
석양에 홀노셔서 갈 곳 몰나하노라.
<해설>
흰 눈이 녹은 골짜기에 험한 구름이 몰려 있구나.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있는가?
날은 점점 저물어서 어두워지고 있는데 나는 어디로 가야할 것인가?
목은 선생께서 쇠퇴해 가는 고려 왕조와 무력해 지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나타낸 시로서,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해지고 있는 노래이다. 이 작품은 고려 말 새 왕조를 이룩하고자 하는 급진파가 득세하고 있는 터에, 힘을 잃고 심산유곡으로 몸을 숨긴 고려의 충신들을 한없이 그리워하면서 점점 허물어지고 있는 고려 왕조의 무기력해진 선생 자신을 한없이 한탄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있다.
부벽루(浮碧樓)
昨過永明寺 暫登浮碧樓(작과영명사 잠등부벽루)
城空月一片 石老雲千秋(성공월일편 석로운천추)
麟馬去不返 天孫何處遊(인마거불반 천손하처유)
長嘯倚風磴 山靑江自流(장소의풍등 산청강자류)
어제는 영명사를 들러서 구경하고 지금은 부벽루에 올라왔네.
성 안은 달빛으로 아름다운데 너무도 적막하구나.
수 천 년의 세월 속에 성곽의 돌도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
그 옛날 주몽과 그의 준마는 어디로 갔는지 돌아올 줄 모른다.
천손은 어디에 있어 소식도 없나.
휘파람을 불면서 비탈길을 올라가니
산은 언제나 푸르고 강물도 스스로 흐르는구나.
목은이 원(元)나라로 가는 도중 고구려의 유적지인 평양성을 지나자 찬연했던 고구려의 옛 모습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오언율시이다.
특히 고려의 국운이 쇠약해지고 있는 터에, 목은은 찬란했던 고구려의 퇴색 자취만 쓸쓸이 남아 있음을, 인간의 유한과 자연의 영원함을 한 조각의 달과 구름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웅혼한 역사를 이룩한 고구려 동명성왕의 위업을 천손으로 비유하여 그리워하고 있다.
이 작품은 현재에서 과거를 비추어보는 시각과 또 과거에서 현재를 다시 비추어 보는 시각을 절묘하게 조화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노령(老呤) - 괴정 남준형
聰明有限理無窮(총명유한이무궁) 총명은 유한하나 이치는 무궁한데
謾作書中六十翁(만작서중육십옹) 부질없이 책 속에서 예순 살 늙은이 되었네.
近復天花墜滿案(근복천화추만안) 요즘 다시 천화가 책상 가득 떨어져
翻將黑白幻靑紅(번장흑백환청홍) 흑백을 가져다가 청홍으로 바꾸었네.
憶寧海 - 이색 목은
동해서애일점산(東海西厓一點山) 동쪽 바다 서쪽가로 한 점 산이 있으니
太平煙火畵圖間(태평연화화도간) 태평한 민가들은 그림 속 같기도 하건만
欲敎長句全篇好(욕교장구전편호) 긴 시구는 전편을 다 좋게 만들려 하면서
未辯浮生半鴩閑(미변부생반일한) 덧없는 생은 한나절 한가함도 목 이루네.
夢裏銀河連赤岸(몽리은하연적안) 꿈속의 은하는 적안의 물과 연하였고
病中華髮照蒼顔(병중화발조창안) 병중의 흰머리는 쇠한 얼굴을 비추누나.
恭柔敬榟眞無賴(공유경재진무뢰) 조상을 받들고 싶어도 진정 어쩔 도리가 없어
空望遙天鳥自還(공망요천조자환) 괜히 먼 하늘만 바라보니 새만 절로 돌아오네.
<목은이색기념관>
기념관을 나오면 괴시리 전통마을을 지나는데 오래된 한옥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고려 말 목은 이색 선생의 출생지로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호지촌(濠池村)의 지형이 중국의 괴시와 흡사하다하여 괴시라 하였다고 전해진다.
200여 년 된 전통가옥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전통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큰 즐거움을 준다.
목은이색의 시에는 쇠퇴해 가는 고려와 무력해 지는 자신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남준형이 지은 노령(老呤)이라는 시는 60세 먹은 노인의 현실을 잘 표현하고 있어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처지임을 일깨워준다.
<해파랑길 22구간 안내도>
<괴시리 전통마을>
괴시리 전통마을 : 200여년 된 고가옥들이 30여 동이나 즐비한 괴시리 전통마을은 영양 남씨 집성촌으로 400여 년간 세거를 누리며 살고 있는 팔자 형국의 마을이다.
마을 전면에는 영해 평야가 광활하게 전개되어 있고, 옛날에 호지가 있었다고 하여 호지골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일명 호지마을(濠池村)로도 불리고 있다.
그리고 괴시라는 현마을 명칭은 고려 공민왕 8년 때 목은 이색 선생과 교분이 두터운 중국 사신이 마을을 방문하다 마을 형상이 괴시리 수구 풍면의 호지촌과 비슷하다하여 괴시리라 칭하게 되었다.
도내에서도 보기 힘든 고가옥들로 남씨 괴시파종택외 6점의 고택이 지정되어 문화재로 관리되고 있다.
<괴시마을 고택>
<대진항 어부들의 그물 손질 모습>
추운 겨울에도 어부들의 손놀림은 쉴 수 없다. 어구와 그물을 손질하며 물때를 기다린다.
하지만 동해안은 중국 어선들의 남획으로 물고기의 씨가 말랐다고 한다.
명태가 사라지고 이젠 오징어도 귀한 생선이 되었다고 한다.
바다 속은 백화현상으로 하얗게 변하고 물고기의 종류도 많지 않다고 한다.
<대진항 과매기 말리는 모습>
<칠보산과 대진해변>
대진항까지의 해파랑길은 대로를 따라 걷는다. 멀리 상대산(185m) 꼭대기에 관어대가 보인다. 이색 선생이 유년시절 이곳에 올라 관어대부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길옆으로 빈집도 보인다. 대부분의 집들이 인기척이 들리지 않고 어린이의 모습은 더더욱 없다. 텅 빈 대진항 마을을 돌아 공원에서 일행들은 점심을 먹으려다 앞서 간 팀의 전갈을 받고 도시락을 들고 한참을 걷는다.
도중에 점심을 해결하고 걸으니 바로 대진해수욕장이다. 우리의 버스가 서 있고, 일행들이 텐트를 치고 작은 회 파티를 열고 있다.
백사장을 가로질러 흐르는 송천에서는 담수욕도 즐길 수 있다.
대진해수욕장은 이문열의 ‘젊은 날의 초상’ 배경지로 백사장을 가로지르는 송천이 바다와 만나고 수심이 얕아 가족 휴양지로 좋다.
<고래불대교>
잠시 쉰 후 고래불다리를 건너는데 송천이 보인다. 송천(松川)은 신평리와 송천리 그리고 괴시리를 거쳐 내려온 하천으로 물길을 돌려 덕천과 병곡면까지 이어져 있다.
담수는 바다와 만나는데 신기하게도 사구로 막혀 담수호를 이룬다.
덕천해수욕장과 영리해수욕장은 지방자치제에서 개발과 보존이 한창이다. 갈대숲을 조성하고 캠핑카와 야영장을 만들어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공사가 진행 중이다.
특히 염수대에 갈대숲과 송림숲길 그리고 근처에 해양수련원과 연수원이 들어서 좋은 해양체험장으로 이용될 것 같다.
<대진해변 송천 해수와 담수가 구분되는 곳>
<덕천해수욕장>
<봉송정>
우뚝한 봉송정도 중요한 쉼터로 제격이며 이어진 고래불해변이 송림 20리와 황금해변 20리의 별칭으로 불릴 것이다.
고래불해변은 목은이색이 동해 바다에서 고래가 하얀 분수를 뿜으며 노는 것을 보고 ‘고래가 노는 뻘’이라 말 한데에서 유래하였다.
상대산에 올랐다가 바다에서 고래가 뛰어노는 걸 보고 ‘고래불’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고래불에서 ‘불’은 ‘뿔’로도 발음하는데, ‘갯벌’을 뜻하는 옛말이라고 한다.
또 10,000그루의 소나무를 심어 해풍을 막아 농사에 해가 없도록 하였다.
정자 주위에는 울창한 수목과 능원과 사봉(沙峰)에는 학이 서식하고 푸른 동해의 파도와 갈매기가 어울려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어 조선시대 말까지 시인 묵객이 찾아왔다.
이송정(李松亭) 또한 연접해 있었다고 하나 1800년대 대호수로 정자는 모두 유실되고 그 뒤 하천 제방이 정리되어 경지가 조성되자 송림도 없어졌으며, 가끔 초석과 와편이 발견되었다.(영덕군 병곡면지 수록된 참고 문헌)
<봉송정 현판>
<봉송정에서 바라보이는 동해 바다>
<덕천해변 갈대밭-멀리 보이는 산은 성대산으로 관어대가 있다>
관어대 : 상대산(185m)은 고래불해수욕장 남쪽 끝에 솟은 산으로 정상에 기막힌 경치의 정자가 있어 예부터 관어대(觀魚臺)라 불렀다.
영해면 괴시리에서 태어난 이색 선생은 유년시절 이곳에 올라 ‘관어대부(觀魚臺賦)’라는 시를 지었다.
이색 선생은 고려 말 성리학자로 충절이 높았던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등과 함께 고려 삼은이라 불린 인물이다.
<덕천해변 염습지와 해안 사구>
<고래불 해변>
고래불해수욕장 : 고래가 하얀 물줄기 뿜는 명사 20리 해변으로 영덕에서 북방으로 24km를 중심으로 영해면 대진해수욕장과 이웃한 해수욕장이다.
울창한 송림에 에워싸여 있으며, 금빛 모래는 굵고 몸에 붙지 않아 예로부터 여기에서 찜질을 하면 심장 및 순환기 계통 질환에 효험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해변 길이가 8km에 이르는 긴 백사장 덕분에 대진해수욕장과 함께 동해의 명사 20리로 불리며 길고 긴 백사장, 얕은 수심, 깨끗한 에메랄드빛 바닷물, 울창한 송림이 만들어주는 시원한 그늘로 가족 피서지로 적합하다.
또 해수욕장내에 샤워장, 화장실, 급수대, 매점, 주차장 등의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이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다.
주변에 위정약수터와 고려후기 명승 나옹선사가 창건한 장육사가 있으며, 영해면 괴시리에는 고건축물이 산재해 있고, 해안도로를 따라 200년된 고가옥이 30여 동이나 있는 전통마을이 있다.
맑고 깨끗한 청정바다로 해안도로의 해맞이공원과 인근방파제 어느 곳이던 낚시를 드리우면 우럭, 학공치, 고등어, 돔 등이 심심찮게 낚인다.
강구에서 고래불까지의 해안도로는 그 경치가 절경으로 해안 드라이브코스로서 제격이며, 영덕의 특산물인 대게와 맑고 깨끗한 청정해역에서 잡힌 신선한 생선회는 식도락가들의 입맛을 돋운다.
해안도로를 따라 즐기는 해안절경과 고래불 해수욕장에서 7번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쭈욱 달리면 동해안의 유명한 관광지는 거의 다 돌아볼 수 있는 하나의 드라이브 코스가 된다.
<고래불 해수욕장 광장>
고래불 해안(Goraebul Coast) : 긴 초승달 모양의 해안선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길이는 약 4.6km에 달한다.
‘고래불’이라는 이름은 고려 말 학자 이색이 동해 바다에서 고래가 하얀 분수를 뿜으며 노는 것을 보고 ‘고래가 노는 뻘’이라 말 한데에서 유래하였다.
이색 선생이 상대산에 올랐다가 바다에서 고래가 뛰어노는 걸 보고 ‘고래불’이라 이름 지었다고 전한다.
고래불에서 ‘불’은 ‘뿔’로도 발음하는데, ‘갯벌’을 뜻하는 옛말이다.
고래불 해안을 따라 분포하는 염습지와 해안사구는 지형학적, 생물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다.
염습지는 바닷물과 강물이 만나 섞여서 염도 변화가 큰 습지를 말하는데, 이곳에서는 바다나 육지에서 보기 힘든 식물들이 많이 자라며 조류, 어류 등 다양한 생물들의 산란지가 된다.
또한 해안사구는 해안선을 보호하는 자연제방 역할을 하며, 사구에 저장된 지하수는 해수의 침입으로부터 육지를 보호하고 사구 식물의 성장을 돕는다.
<고래 형상물이 조성된 광장>
고래를 형상화한 기념 조형물이 광장에 우뚝하다.
대천해수욕장 보다 커 보이는 백사장과 해변이 하얗게 포말처럼 퍼지는 파도와 함께 평화롭다.
이번 구간은 영덕 해파랑길의 마지막 구간이다.
영덕 블루로드로 잘 알려져 있었는데 해파랑길과 같이 하면서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특히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지나며 사람들의 눈과 귀에 전파되어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다고 한다.
인증 기념 스탬프로 세 곳에서 패스포트에 찍었다. 걷기와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가끔씩 인증소를 지난다.
산길과 바닷길이 조화를 이룬 이번 길은 목은 이색 선생의 사색하며 걷는 여정이었다.
특히 솔밭 송림을 걷는 노정이 많아서 행복했다.
이젠 50구간 중 거의 반을 지나는데 참가자들이 자꾸만 줄어서 안타깝다.
꾸준히 참가하는 분들의 수가 너무 적어서 운영에 애로가 많다.
통일전망대까지 완주해야 되는데 일행들의 분발이 필요하다.
대소산봉수대와 이색기념관 그리고 괴시리전통마을과 대진해변, 고래불해변은 한동안 기억될 아름다운 여정이었다.
Happy New Year - ABBA
첫댓글 청산님 마지막 통일전망대까징 화이팅 퐈이야
고래불의 지명이 궁금했는데 표지판을 보고 고래는 알겠는데 불이 무슨 의미일까?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는데 속시원히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아는 것이 힘이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