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내 나이 19세.
새해 첫 일기장을 펼쳐보니 맨 첫 장에 이런 글이 쓰여 있다.
" 생활이 그대를 속이더래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간다
그리고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열 아홉 살인 나는 이런 글이 참 내 맘에 들었다.
오늘은 내 생일이다.
동생은 양말 한 켤래 사오고 형과 형수는
예수님 십자가 석상을 사 오셨다.
케이크 대신 떡 위에 촛불을 켜고 노래를 불렀다.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한강 물이 7년 만에 얼었다는 뉴스가 나온다.
오늘은 일요일.
동생 정길이 용돈 100 원주고 교회 보냈다.
조금 있으니 동생과 조카 혜숙이가 빨래를 싸 들고 큰 형님 집으로 왔다.
노량진에 지하수 물이 안 나온다고.
지하수라 어떨 땐 그런다.
큰누나네는 노량진 맨 꼭대기 산자락에서 사신다.
물을 한번 받으러 수십 계단을 내려가야 공동수도가 있다.
그것도 남의 마당에 있는 대문도 없는 조그만 집에 지하수.
집 주인을 떠나 많은 사람이 받아가니 어떨땐 물이 안 나온다.
방도 연탄아궁이다.
어떨 땐 연탄가스가 들어와 머리가
어지러울 때도 잦았다.
언젠간 자는데 가스가 들어와 잠자는 어린 미숙이가 울고불고 난리다.
일어나는데 어지럽다.
형님도 형수도 모두 토하고 난리다.
미숙이 아니었으면 모두 하늘나라에 가 있었을 우리.
대성산업 의자공장에서 (천호동)
일 한지도 벌써 1년째.
며칠전 공장에 난 불로 경찰서에
불려다니느라 좀 힘들었다.
내용은 이랬다.
작업장 바로 밖에 의자에 넣는 스펀지
자르는 기계톱이 있다.
스펀지 자르는데 추워서 항상 빈 깡통에다
나무를 넣고 모닥불을 피운다.
하루는 일하는 동료에게 내가 작업하고
들어가면서 일 마무리 되면
물 떠다가 불 확실하게 끄고 들어가라고 하고 퇴근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어두워졌는데 " 불이야~! "
불씨가 남아 있던 깡통에 겨울바람이
불면서 살아난 거다.
불이 옆 산더미 같은 그리 양은 많지 않지만
스펀지에 옮겨붙으며 불이 났다.
불이 유리창을 깨고 안에 있던
철제 의자까지 모두 타고 그을려졌다.
공장들이 덕지덕지 밀집해 있는 곳인데
그래도 빨리 잡아서 다행이지 옆 공장은
목재 공장이라 목재를 많이 쌓아 놨는데
하마터면 큰불이 될뻔했다.
다음날 내 잘못은 아니지만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 쓰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저께 노량진에 가시던 형님 가족은 오시질 않는다.
방안에 들어오니 연탄냄새가 진동한다.
환기를 시키고 연탄을 갈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아침에 방문을 잠그고 출근을 했다.
저녁에 집에 오니 형과 형수,미숙이 조카가 와 있다.
왜 안 오셨냐고 물으니 어젯밤
미숙이가 아파 고생을 했다는 거다.
연탄불이 꺼져서 춥게 잤는지 어린 미숙이가 체를 해서
다 토하고 난리가 났다는 거다.
늦은 새벽이라 차도 없고 가까운 병원도
문 닫고 급하고 해서 두 분이 업고
노량진에서 영등포 병원까지 걸어 갔다는 거다.
그 거리가 얼만데 걸어가.
주사 맞히고 걸어왔는데 지금도 보니
아무것도 안 먹고 축 늘어져 있다.
쉬한 기저귀를 갈아주고 옆에 누웠다.
" 아이고 불쌍한 두 살 먹은 내 조카 미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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