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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의 주요사찰>
실상사
전북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 50번지 일원에 있는 실상사(實相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산인 금산사 (金山寺) 말사이다. 실상사는 서기 828년(신라 흥덕왕 3년) 증각대사 홍척(洪陟)이 당나라에 유학, 마조 도일선사의 제자인 서당 지장선사의 선맥을 이어받고 귀국하여 2년여 동안 전국의 산을 다닌 끝에 그의 고향인 이 자리에 창건하였는데,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최초의 사찰이 되었다.
이후 증각대사의 불심을 높게 기린 흥덕왕은 후일 태자 선광(宣光)과 함께 이 절에 귀의하였다. 증각은 실상사를 창건하고 선종을 크게 일으켜, 이른바 실상학파(實相學派)를 이루었다. 그의 문하인 제2대 수철화상(秀徹和尙: 817~893)을 거쳐 3대 편운대사(片雲大師: 생몰연대 미상)에 이르러 이 실상사는 크게 중창되었으며, 그들이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은 전국에 선풍(禪風)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라 불교의 선풍을 일으키며 번창했던 실상사는 여말선초의 잦은 병화로 쇠퇴를 거듭하다 조선 세조 때인 1468년 원인 모를 화재로 전소되며 폐사되었다. 이후 실상사의 승려들은 1679년(숙종 5년)까지 약 200여 년간 방치되어 있는 동안 백장암에서 기거하였다. 그러다가 1690년(숙종 16년) 300여 명의 수도승들과 함께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36채의 대가람을 중건하였다. 1821년(순조 21년) 의암대사가 두 번째 중건하였으나, 1883년(고종 20년) 실상사 땅을 차지하려는 속인들의 방화로 또 전소된 것을 1884년(고종 21년)에 월송대사가 세 번째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현대에 들어와 6.25전쟁 중 실상사는 낮에는 국군, 밤에는 빨치산들이 점거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으나 다행히 전화는 입지 않았다.
실상사에는 백장암,서진암,약수암 등의 암자가 있으며, 신라시대 때의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다. 국보 제10호로 지정된 실상사 백장암 3층석탑은 전형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설계되어 있으며, 당시의 대표적인 석탑이기도 하다. 실상사 내 문화유적 중 보물급으로는 수철화상 능가보월탑(제33호, 905년)?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제34호) 석등(제35호, 개산당시),부도(제36호, 고려),3층석탑(제37호, 887년),증각대사 응료탑(제38호, 861년 이후), 증각대사 응료탑비(제39호),백장암 석등(제40호, 9세기 중엽),철조여래좌상(제41호, 개산당시),청동은입사향로 (제420호, 1584년),약수암 목조탱화(제421호, 1782년) 등 11점이 있다. 지방 유형문화재로는 극락전(제45호, 1684년),위토개량성책(제88호, 토지대장),보광전 범종(제137호, 1694년),백장암 보살좌상(제166호, 고려), 백장암 범종(제211호, 1743년) 등 5점이 있다.
중요민속자료로는 실상사 입구 만수천을 가로지르는 해탈교 양쪽에 1725년(영조 1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석장승 3기(중요 민속자료 제15호)가 있다. 절을 향해 건너기 전에 세워진 한 쌍의 돌장승 중 오른편 장승은 1936년 홍수 때 떠내려갔다. 잡귀를 막기 위해 세워진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은 두 눈과 코가 크고 둥글며,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손에는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쌍계사
설리갈화처 쌍계사
723년(신라 성덕왕 22년) 대비(大悲),삼법(三法) 두 화상이 중국 남종선(南宗禪)을 창시한 육조혜능의 정상(頂上) 을 모시고 귀국하여 “지리산 설리갈화처(雪裏葛花處)에 봉안하라.”는 꿈의 계시를 받고, 호랑이의 인도로 이곳에 이르러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 후 이 절은 한때 퇴락하였으나, 843년 중국 남종선의 법맥을 잇고 귀국한 혜소 진감(眞鑑)선사(774~850)가 대가람으로 중창한 후, 선(禪)과 범패(梵唄)를 널리 보급하였다.
쌍계사는 두 계곡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쌍계사라 불린다. 처음에는 이름을 ‘옥천사’라 하였으나, ‘옥천사’라는 절 이름이 당시 근처(고성, 固城)에 또 있었기 때문에, 887년(정강왕 2년) 쌍계사로 바꾸었다. 쌍계사를 크게 중창한 혜소가 입적하자, 헌강왕(875~886)은 그에게 ‘진감선사(眞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어서 정강왕(886~887)은 쌍계사라 제호를 내리고, 최치원에게 대공영탑(大空靈塔) 비문을 짓고 쓰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최치원이 31세 때 위 비문을 써서 887년(정강왕 2년)에 세웠는데, 이것이 ‘진감선사대공탑비’이다.
일주문,금강문,천왕문을 지나면 1990년에 준공된 8각 9층 석탑이 있다. 그 탑 뒤에는 팔영루(八泳樓)가 있는데, 진감선사 혜소가 중국의 여산에 있는 동림사를 모방하여 지은 다음, 여기서 섬진강에 뛰노는 물고기를 보고 여덟 음률로 된 범패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쌍계사 대웅전은 쌍계사의 본당으로서, 조선 선조 때 벽암선사가 쌍계사 승군5천여 명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을 축조한 공에 대한 보답으로 나라에서 지어 주었다.
쌍계사도 다른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창건 이래 소실과 중건을 거듭하였다. 그 중 1506년 진주목사 한사개가 크게 중수하였고, 1549년(명종 4년)에는 서산대사가 중창기를 썼다. 그러나 1593년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침입하여 불을 질러 소실된 것을 1601년(선조 34년)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1623년 전후로 다시 여섯 차례의 큰 화재가 있었는데, 1640년 학명(學名)과 의오(義俉)가 중수하였다. 그 후 1850년의 대화재에 이어, 1968년 2월 19일에는 적묵당이 불타는 등 여러 번 소실되었으나, 1975년부터 고산스님에 의해 크게 중창되어 현재와 같은 사격을 갖추고 있다.
쌍계사에는 국보 1점(진감선사대공탑비, 국보 제47호), 보물 6점(대웅전-보물 제500호, 쌍계사 부도-보물 제380호, 팔상전 영산회상도-보물 제925호 등)의 국가지정 문화재와 지방문화재 22점이 있다. 그리고 일주문,금강문,천왕문, 청학루,마애불,명부전,나한전 등의 부속 건물과 칠불암,국사암,불일암,도원암 등의 부속암자가 있다. 쌍계사는 차(茶)와도 인연이 깊어 쌍계사 입구 계곡주변에서는 차(茶)가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근처에는 ‘차시배추원비 (茶始培追遠碑)’와 ‘차시배지(茶始培地)’기념비가 있다.
내원사 최고(最古)의 비로자나불과 내원사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 말사이다. 이 절은 657년(신라 태종 무열왕 4년) 무염(無染, 801∼888)국사가 창건하고 처음에는 덕산사(德山寺)라 하였다. 창건 초기에는 무염국사가 상주하고 많은 대중들이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자세한 사력(寺歷)은 없으나, 1609년경 원인모를 큰 화재로 전소된 후 오랫동안 폐사되어 절터가 마을 주민들의 전답으로 사용되었다. 그 후 1959년경부터 원경(圓鏡, 속명: 홍진식)스님이 대웅전을 비롯하여 심우당,비로전,산신각,칠성각,요사채 등을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절 이름도 이때 내원사로 바꾼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치는 않다. 경내에는 석남암수석조 비로자나불좌상(石南巖藪石造 毘盧舍那佛坐像, 보물 제1021호)과 내원사 3층석탑 (보물 제1113호) 두 점의 보물이 있는데 이 두 보물은 우리나라에 불교문화가 융성하였던 8세기의 불상과 석탑 양식을 갖고 있는 귀중한 유물이다. 이 중 비로자나불상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로자나불상으로서, 1980년대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다가, 1990년 3월 5일 보물 제1021호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이 불상 대좌에서 나온 ‘영태이년명납석제호(永泰二年銘蠟石製壺)’라 새겨진 사리함은 1986년 10월 국보 제233호로 지정되어 현재 부산광역시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내원사 경내에 있는 이 탑은 원래 사리와 보물을 간직할 목적으로 657년(신라 무열왕 4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4.8m 가량의 이 3층 석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얹은 후 꼭대기에는 상륜(相輪)을 장식하였다. 기단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 부분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긴 조각이 있었으나 화재로 심하게 손상되었다. 특히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 기둥을 2개씩 만들었고,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새겨 차례로 쌓아 올렸으며, 1층에 비해 2?3층은 대폭 줄어들었다. 얇고 평평한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4단씩 만들었으며, 윗면은 약간 경사지게 하였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고 있으나, 네 귀퉁이는 살짝 들어올렸다. 그러나 탑의 머리 부분은 아무 장식이 남아 있지 않아 아래에서 올라오던 탑의 흐름이 갑자기 단절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아래층 기단에서 보이는 2개씩의 가운데 기둥은 이 지역에서는 흔치 않은 예로, 일부 파손되긴 하였으나 대체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이 석탑 북쪽에 옛 법당지가 있고, 주변에 석등부재와 석탑의 상륜부재, 각종 조각석의 파편들이 높여 있는 것으로 보아, 본래 남향한 1탑 가람이었고, 현재의 위치가 원 위치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대석(地臺石)과 하층기단 면석(面石)은 같은 돌 4매로 구성되었는데, 하층 기단 각 면에는 두 개의 우주(隅柱)와 두 개의 탱주(撑柱)가 모각되어 있다. 탑신부(塔身部)에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 돌로 조성되었고, 옥개석(屋蓋石) 받침은 4단씩이며, 물매는 얕고 추녀는 직선이다. 2단으로 구성된 기단이나 지붕돌 밑면의 받침을 4단으로 만든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탑으로 추정 된다. 그러나 이 탑은 1950년경 도굴꾼에 의하여 사리장치가 있던 1층 몸돌과 맨 위쪽 옥개석, 그리고 상륜부가 크게 파손됐다. 1961년경 원경스님이 당시 주지로 있을 때, 이 탑을 복원하면서 사리함도 새로 만들어 끼워 놓았다. 현재 보물 제1113호로 지정돼 있다.
이 불상은 원래 지리산 동쪽 중턱 석남암사지에 있다가 현재 내원사로 옮겨 놓은 석조 비로자나불상이다. 석남사지는 지금의 내원사에서 위쪽으로 약 6㎞쯤 떨어진 장당골 상류쯤에 있는데, 현재는 절터와 2기의 석탑만이 도괴(倒壞)된 채 남아 있다. 1945년 이 마을의 이성호 형제가 이 석남사지로 나무하러 갔다가 이 불상을 발견하고 지게로 지고 와 집안에 보관하였던 것을 1965년 이곳 내원사로 옮겼다. 그러나 이들 형제가 석남사지 에서 마을로 불상을 지고 올 때 무게를 줄이기 위하여 무릎 밑과 등 부분을 깨뜨려 내어 원형이 크게 훼손된 데다가, 입자가 매우 거친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풍우로 인해 심하게 마멸되어 있다. 눈.코.입 등 자세한 얼굴 모습은 마멸되어 남아 있지 않으나, 전체모습은 당당하고 세련되어 있다. 머리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 (육계)는 높고 큼직한 편이나 약간 파손되었으며, 둥근 얼굴은 부피감이 풍부하여 8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상체는 건장한 모습으로 자연스러운 가슴.허리의 굴곡.어깨나 팔의 부피감 등을 사실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전신을 감싸고 있는 옷은 얇아서 신체의 굴곡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옷주름 역시 촘촘하고 부드럽게 표현하였다. 손모양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어 비로자나불임을 알려주고 있다.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는 상대.중대.하대로 이루어졌는데, 8각의 하대에는 아래를 향한 연꽃무늬를 새겼다. 중대는 8각의 각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상대에는 2겹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는 연꽃무늬와 불꽃무늬가 새겨져 있었는데, 운반과정에서 위에서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하단까지 파손시켜 약 3분의 1정도가 없어져 버렸다. 이 불상의 대좌 중앙 중대석 안에 보관되어 있었던 사리호(舍利壺) 표면에 신라 혜공왕 2년(766) 이 불상을 조성하여 석남암사에 모셨다는 내용을 새겼다. 즉, 영태(永泰) 2년(776년, 신라 혜공왕 2년) 두온애랑(豆溫愛郞) 이라는 화랑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그의 부모가 죽은 자식을 위해 불상을 제작하여 석남사(石南寺) 관음암 (觀音庵)에 모시고, 법승(法勝),법연(法緣)이라는 두 스님으로 하여금 명복을 빌어 주게 하였다는 내용을 136자의 이두문으로 새겨 놓았다. 이로서 이 불상은 조성연대와 동기가 확실하게 새겨져 있어, 우리나라 비로자나불 중 가장 오래된 불상임이 밝혀졌다.
대원사
처음에는 평원사(平原寺)라 하였다. 그 뒤 1천여 년 동안 폐사되어 왔던 것을, 1685년(조선 숙종 11년) 운권(雲捲) 선사가 문도들을 데려와 평원사 옛 절터에 사찰을 건립한 뒤 대원암(大原庵)이라 개칭하였고, 선불 간경도량을 개설하여 영남 제일의 강원이 되었다. 그 후 서쪽에 조사영당(祖師影堂)을 보수하고, 동쪽에는 방장실과 강당을 건립하여 현재의 절 이름인 대원사로 바꾸었다. 1914년 1월 12일 밤 화재로 또 절이 모두 불타버린 것을 1917년 경부터 여러 스님들이 다시 중창하여 전(殿),누(樓),당(堂),각(閣),요사채 등 12동 184칸의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여.순사건과 한국전쟁 때 또 다시 파괴되어 방치되었다가, 1955년경부터 김법일스님이 대웅전,사리전, 천광전,원통보전,봉상루,범종각,명부전 등을 중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원사에는 보물 제1112호인 대원사 다층석탑과 시.도유형문화재 제362호인 대원사강희신사명반자가 있고, 대원사가 소재한 계곡일원은 시.도 기념물 제114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원사다층석탑은 646년(신라 선덕여왕 15년)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하여 처음 건립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의 이 탑은 조선 전기에 다시 건립된 것이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1784년(정조 8년)에 중건하였다. 탑 구성은 2층 기단위에 8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만들었고, 탑 꼭대기에 상륜(相輪)을 장식하였으나, 현재는 그 일부만 남아 있다. 상층기단 각 면에는 두 손을 모아 합장한 공양상 (供養像)이 새겨져 있다. 2단의 기단 위층 네 귀퉁이에는 기둥 모양을 본떠 새긴 우주(隅柱)대신 인물상이 새겨져 있으며, 4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탑신 각 지붕돌은 처마는 두꺼우며, 네 귀퉁이에서 약간 올렸고, 8층 각 지붕돌에는 풍경을 달아 놓았다. 이 탑은 소박하나 전체적인 체감비율이 맑은 사람은 과거 근처에 있었다던 연못 속에 비친 탑 그림자 속에서 탑 안의 사리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화엄사
화엄종찰 화엄사
지리산 노고단 서쪽,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12번지 일원에 있는 화엄사(華嚴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다. 서기 544년(백제 성왕 22년, 진흥왕 5년)에 인도승 연기조사가 창건하였다 하며, 절의 이름은 화엄경에서 ‘화엄’ 두 글자를 따서 지었다. 처음에는 해회당(海會堂)과 대웅상적광전(大雄常寂光殿)만 세워졌으나, 그 후 643년 (선덕여왕 12년) 자장율사에 의해 증축되었다. 645년(선덕여왕 14년)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73과를 모셔와 4사자 3층 사리석탑을 세운 다음 그 안에 봉양하였으며, 원효대사는 해회당에서 화랑도들에게 화엄사상을 가르쳤다고 한다. 또 677년(신라 문무왕 17년)에는 해동 화엄종 시조인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 법장(중국 화엄종 제3조)의 화엄경수현기를 국내 화엄 10찰(華嚴 十刹)에 나눠줬는데, 이 절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후 3층의 장육전(丈六殿, 현 각황전)을 짓고, 그 안에 황금장육불상을 모신 다음 사방벽면에 화엄경을 돌에 새긴 석경(石經)을 두르는 등 이 화엄사를 크게 중창하면서 화엄종 전파 도량으로 삼았다.
경덕왕(742~764) 때에 이르러서는 8원(院) 81암(庵) 규모의 대사찰로 이른바 화엄불국 연화장세계를 이루었다고 하며, 875년(신라 헌강왕 1년)에는 도선국사가 다시 중창하면서, 동?서 5층석탑을 만들고 화엄사를 대총림으로 승격시켰다.
고려시대 때인 943년(태조 26년)에는 왕명으로 다시 화엄사를 중수하였고, 광종 때에는 홍경선사가 퇴락한 당우와 암자를 보수하였다. 문종(1047~1083) 때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인종(1126~1146) 때에는 정인왕사가 중수하였다. 그리고 1172년(명종 2년)에는 도선국사비가 세워졌고, 충렬왕(1236~1308) 때에는 원소암(圓炤庵) 이 중건되었으며, 충숙왕(1313 ~1330) 때에도 조형왕사에 의하여 전면적인 보수가 있었다 한다.
조선시대인 1426년(세종 6년)에 선종 대본산으로 승격된 화엄사는 배불정책의 와중에도 설응,숭인,부휴,중관 무렴 등의 고승대덕들에 의해 크게 중창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화엄사 승려들은 승병을 일으켜 왜군들에 대항하였다. 화엄대선 겸 선교판(華嚴大選 兼 禪敎判)을 맡고 있었던 윤눌(潤訥)은 수군에 입대하여 이순신 장군의 부장(副將)으로 발탁되었고, 후에는 제2차 진주성전투에도 참가하였다. 또 해안(海眼)도 의병을 모집하여 진주성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주지 설홍(雪泓)이 화엄사 승병 153명을 조직, 인솔하여 군량미 103석과 함께 석주관 방어전투에 참가하였으나, 주지를 포함하여 화엄사 승병 전원이 순절하였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8원 81암자에 이르는 화엄사의 모든 당우(堂宇)를 불태우고 화엄석경 등 보물들은 깨뜨리거나 약탈해 갔다. 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화엄사 승군들의 공적을 치하하고, 어필서책 (御筆書冊)을 하사하는 등 화엄사 복구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 후 1630년(인조 8년) 벽암선사가 절을 다시 세우기 시작하여 6년만인 1636년(인조 14년)에 완성하였다. 1649년(효종 원년) 화엄사가 선종 대가람으로 승격된 후, 숙종(1699~1703) 때에는 계파선사와 문도들에 의하여 장육전 자리에 각황전이 건립되었고, 선교 양종 대가람이 된 이후 근세에는 도광(導光)선사의 대대적인 중창에 의하여 지금과 같은 규모로 중흥되었다.
그러나 화엄사는 현대에 들어와서 또 한 번 연진(煙塵) 속으로 사라질 뻔하였다. 즉 6?25전쟁이 발발한 이듬해인 1951년, 지리산 빨치산 토벌작전을 위하여 아군은 화엄사를 소각시키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화엄사지구 관할 전투경찰대 제2연대장이었던 차일혁 총경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화엄사는 보존되어 현재와 같이 전해져 오고 있다. 최근에 들어와서는 종원선사(宗源禪師)가 1989년부터 대적광전,문수전 ,관음전,적멸당,원응당 일맥당(一麥堂) 등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화엄사 일주문을 지나 들어가면 금강역사(金剛力士),문수보살,보현보살상을 안치한 금강문에 다다른다. 그리고 대개의 절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람이 배치되어 있으나, 화엄사는 대웅전과 함께 각황전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대웅전에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각황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주불(主佛)로 하고 있다. 화엄사 경내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12호인 석등, 국보 제35호인 사사자3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67호인 각황전이 있으며, 보물 제132호인 동5층석탑(東五層石塔), 보물 제133호인 서5층석탑, 보물 제300호인 원통전앞 사자탑(圓通殿前 獅子塔), 보물 제299호인 대웅전 등이 있다. 그 외로 천연기념물 2점(올벚나무, 매화),지방문화재 2점(보제루, 구층암석등) 등 많은 문화재와 20여 동의 부속건물이 있다. 부속 암자로는 구층암(九層庵),금정암 (金井庵),지장암(地藏庵) 등이 있다. 지난 1995년에는 서5층석탑 보수공사 도중에 부처님 진신사리 22과와 성보 유물 16종 72점이 발굴되어 화엄사는 선교 양종 대본산으로서의 품격을 더욱 높이게 되었다.
화엄사상
화엄사상은 세상 삼라만상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 대립하지 않고, 서로의 원인이 되며, 각자 초월하여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이다. 이와 같은 화엄사상은 신라가 삼국통일 후, 고구려와 백제유민들을 포섭하고, 왕을 중심으로 귀족과 백성들을 하나로 융합?조화시키는데 이념적?이론적인 뒷받침을 하였다. 이 화엄종은 중국 수.당시대 때, 인도불교의 성격에서 벗어나 중국적 특색을 갖는 불교 종파들이 발생하였는데, 화엄종도 이때 시초되었다 한다. 초조(初祖)는 두순(杜順, A.D 557~640), 제2조는 지엄(智嚴), 제3조는 법장(法藏 A.D 643~712)으로 이어지며, 화엄종은 체계화되고 크게 발전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신라시대(중대) 때 원효와 의상에 의하여 화엄종이 수입되고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화엄종은 대방광불(大方廣佛) 화엄경을 소의(所依)로 하고, 5교 10종을 교판으로 하며, 중중무진(重重無盡)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교설(敎說)로 한다. 이 교설을 펴기 위하여 십현연기[十玄緣起: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 碍門- 등]와 육상원화(六相圓和), 그리고 사법(四法)을 설한다. 또 F. Capra는 ‘우주본체의 진리는 영원불변한 것으로서, 우주의 본성은 항상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살아있다고 보는 것이 화엄 중심사상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그리고 화엄경이란 화엄종의 기본경전으로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약칭이다. 이는 ‘크고 방정하며, 넓은 이치를 깨달은 부처님의 장엄한 글(經)’이라는 뜻이다.
법계사 운상(雲上)고찰 법계사
법계사(法界寺)는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873번지, 지리산 천왕봉 동쪽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3교구 본사 쌍계사의 말사이며, 한국에서 가장 높은 해발 1,450m쯤에 위치하고 있다. 법계사는 544년경 연기조사가 구례 화엄사에 이어 세운 사찰로서, 1천5백여 년 가까운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는 전국을 두루 다녀본 후, 천하의 승지가 이곳이라 하여 여기에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말에는 최치원이 이 절에 머무르며, 법당 남쪽에 있는 바위에 자주 들렀다 하는데 이 바위를 문창대 (文昌臺)라 하고 그 문창대 넓은 반석 앞에는 ‘고운최선생장구지소(孤雲崔先生杖?之所)’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절은 수난도 많이 겪었다. 1380년(고려 우왕 6년) 왜구의 방화로 소실되었고, 이어 1405년(태종 5년) 에 정심선사가 중창하였으나, 1908년 의병들의 근거지였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하여 다시 화염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 1938년 신덕순이라는 신도가 복구하였으나,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 때 다시 불태워졌다. 이후 불자들의 원력으로 중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용이 서리고 범이 웅크린 듯한 산세가 좌우로 급박하게 둘러싸고 있으며, 오직 동남쪽으로만 트인 이 절은 춘분과 추분에 남극성인 노인성(老人星)이 잘 보인다고 한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73호인 법계사3층석탑이 있다.
○법계사 3층석탑
법당 왼쪽에 보물 제473호로 지정되어 있는 3층 석탑이 있다. 이 탑은 자연암석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부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으며, 몸돌 각 모서리에는 기둥을 넓게 새겼다. 각 층의 지붕돌은 두터운 편이며, 지붕돌 밑면 받침은 3단이다. 이 석탑은 높이가 2.5m이며, 탑의 구조는 기단부로 이용된 자연암석에 상면 중앙에 탑신을 받치기 위하여 2단의 굄을 마련하였고, 그 위에다 별석으로 3층 탑신을 얹었다. 각 옥신에는 우주를 모각한 외에는 별 다른 장식이 없다. 옥개석은 하면에 3단의 받침을 모각하고, 상면에는 옥신을 받치기 위한 굄이 1단 모각되었다. 1층의 탑 몸체는 매우 높고 2층과 3층은 급격히 줄어들어 낙수면 경사가 심하다. 옥개는 둔후한 편으로 받침은 각층 3단이고, 추녀는 전각(轉角)부분에 이르러 약간 휘어 졌다. 옥개석의 전각은 약간 반전(反轉)되었으며, 전체적으로 중후한 감을 주고 있다.
탑의 머리장식 부분인 상륜부에는 포탄 모양의 돌이 얹혀있는데 나중에 보충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처럼 바위를 기단으로 이용한 탑은 신라 이후로 유행하였는데, 이 탑처럼 아래 기단부를 간략하게 처리한 경우는 드물다. 양식이 간략하고 투박한 느낌을 주고 있어서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에서 벗어난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연곡사 애국지사와 운명을 같이 한 연곡사
전남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1017번지, 피아골 입구에 위치한 지리산 연곡사(燕谷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화엄사 말사로서, 543년경 연기조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창건 초기에는 인근 화엄사의 영향으로 화엄종의 성격을 많이 갖고 있었으나, 점차 화엄사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참선도량(선종사찰)으로의 독자적인 위치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고려 원종 때 종암 진정선사가 중건하였으며, 도선국사,진각국사,현각선사 등 역대 많은 고승들이 이 절에서 수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선 임진.정유왜란 때, 왜군들에 의하여 연곡사는 전소되었다. 특히 정유재란 때인 1598년(선조 31년) 하동 악양을 거쳐 침입한 왜군 4백여 명은 쌍계,칠불사와 이 연곡사 등을 불태우며 약탈과 살인을 자행하였다. 그 후 1627년(인조 5년) 서산대사의 제자 소요(逍遙)대사가 중창하였고, 1655년(효종 6년)에는 석가여래성도기(釋迦如來成道記) 목판을 개판(改板)하였다. 1745년(영조 21년) 10월 21일 봉상사(奉常寺) 율목으로 봉산(封山)하였고, 1779년(정조 3년) 동파당(桐坡堂) 정심선사(定心禪師)가 대웅전을 중수하였다. 그러나 구한말인 1907년 9월, 고광순 의병장이 연곡사를 본거지로 일본군들과 싸울 준비를 하던 중, 일본군들의 기습공격을 받아 순국하자, 일본군에 의해 연곡사는 또 다시 전소되었다. 그 후 1924년 신도 박승봉이 다시 심우암(尋牛庵) 등을 중건하였으나, 이번에는 여,순사건 관련 패잔병들이 지리산 피아골로 피신 해 들어오자, 그들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이 1950년경 다시 불태웠다.
이후 1965년에 대웅전을 다시 중건하였고, 1981년 종인스님이 대적광전과 관음전을 지었다. 1994년경에는 현 주지 종지(宗智) 스님이 부임하여 일주문,삼성각,명부전,설선당,무설전,요사채 등을 10여 년 동안 복원함 으로써 현재와 같은 모습이 갖추어졌다.
이처럼 연곡사는 피아골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해 있어 전란이 있을 때마다, 많은 애국지사들과 함께 운명을 같이 하였다. 경내에는 고광순 의병장 순절비와 국보(연곡사 동부도?연곡사 북부도) 2점과 보물 (3층석탑,연곡사서부도,현각국사탑비,동부도비) 4점이 있다.
국보 53호이며 연곡사 위편에 있다. 이 동부도는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부도는 네모난 바닥돌 위로 세워져 있으며, 전체적으로 8각형 구도를 하고 있다. 기단(基壇)은 세 층으로 아래 받침돌, 가운데 받침돌, 위 받침돌로 이루어졌다. 아래 받침돌은 두 단인데 구름에 휩싸인 용과 사자 모양을 각각 조각해 놓았다. 가운데 받침돌에는 둥근 테두리를 두르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몰려든다는 8부 중상(八部 衆像)을 새겼다. 위 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뉘어 두 겹의 연꽃잎과 기둥 모양을 세밀하게 새겼는데, 둥근 테를 두르고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조각하였다.
탑신은 몸돌 각 면에 테두리를 두르고, 그 속에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양각 하였다. 지붕돌에는 서까래와 기와골을 새겼으며, 기와를 마무리할 때 두는 막새기와까지 정교하게 조각하였다. 머리장식으로는 날개를 활짝 편 봉황과 연꽃무늬를 새겨 아래위로 쌓아 놓았다. 이 부도는 기단이 좀 높아 보이 기는 하나 전체적으로 안정된 비례감을 잃지 않으면서 훌륭한 예술성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후기를 대표할 만한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부도는 도선국사의 부도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연곡사는 유서 깊은 참선도량이어서인지 이 부도 외에도 북부도(국보 제54호)와 서부도(보물 제154호) 등 2기가 더 있다. 이 동부도는 그 중 형태가 가장 아름답고 우아한 작품이다.
○연곡사 북부도
국보 제54호이며, 동부도 위쪽 약 50m 지점에 있다. 이 북부도는 동부도를 본떠 고려 전기 때 만든 것으로 보인다. 구조와 크기 등 형태는 동부도와 거의 같고, 단지 세부적인 꾸밈에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기단은 동부도와 마찬가지로 역시 세 층으로 아래 받침돌, 가운데 받침돌, 윗받침돌을 올렸다. 아래 받침돌은 2단으로, 아래에는 구름무늬를, 위에는 두 겹으로 된 16잎의 연꽃무늬를 각각 새겼다. 윗받침돌 역시 두 단으로 나누어 연꽃과 돌 난간을 아래위로 꾸몄다. 특히 윗단에는 둥근 테를 두르고 탑신의 몸돌 각 면에는 향로와 불법을 수호하는 방위신인 사천왕상 등을 꾸며 놓았다.
얇고 잘록한 중대석 각 면 안상(眼象)에도 조각하여 장식하였다. 상대석에는 꽃무늬를 넣은 앙련을 둘러 새겼으며, 윗면에는 가운데 둥근 마디가 있는 난간을 모서리마다 세우고, 그 사이 안에는 동부도와 마찬가지로 극락세계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를 양각하였다. 8각탑신 각 면에는 문짝(門扉)과 향로를 모서리에는 기둥을 양각하였다. 옥개석(지붕돌)에는 목조건물의 지붕을 모방하여 서까래,기왓골,막새 등을 세밀하게 새겼으며, 아랫부분에는 비천상(飛天像)을 조각하였다. 상륜부는 보주만 없을 뿐, 앙련의 대석 위에 날개를 편 봉황의 모습을 새긴 돌을 얹고 다시 보륜 등을 올렸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동부도와 마찬가지로 역시 누구의 부도 인지는 알 수 없어 ‘북부도’라고만 부르고 있으며, 8각형 부도를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칠불사
경남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1605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칠불사(七佛寺)는 다음과 같은 창건 유래가 전해져 온다. 경남 김해 지방을 중심으로 낙동강 유역에 있었던 가락국의 태조이자, 김해김씨 시조인 김수로왕은 인도 갠지스강 상류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許黃玉)을 왕비로 맞아들여 10남 2녀를 두었다. 큰아들 거등(巨燈)은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고, 차남 석(錫)과 삼남 명(明)은 모후의 성씨를 따라 김해 허(許)의 시조가 되었다. 나머지 일곱 왕자는 외삼촌이자 허황옥의 오빠인 인도스님 장유보옥(長遊寶玉)선사를 따라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가야산에서 3년간 수도하다가 의령 수도산,사천 와룡산 등을 거쳐 서기 101년 지리산 반야봉-토끼봉 아래에 절을 짓고 수도하였다. 처음에는 절 이름을 운상원(雲上院)이라 하였으나, 이후 이 절에서 일곱 왕자가 모두 성불하자 칠불사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일곱 왕자들의 도의 경지가 깊어가던 서기 103년(수로왕 62년) 음력 8월 15일 밤, 보옥선사는 유난히 밝은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즉흥시를 지었다. 이에 한 왕자가 화답하기를 “달은 중추를 맞아 제대로 보름달이고, 바람은 8월이라 더욱 시원하네.”라고 하자, 둘째 왕자는 “푸른 하늘 삼경, 밝은 달이 심담(心膽)을 환히 비추네.”라고 하였다. 셋째 왕자는 땅위에 일원상을 그리고는 지워 버렸다. 나머지 왕자들은 아무 말 없이 고요히 바라보았다. 이때 선사가 지팡이로 땅을 힘껏 내리치자 일곱 왕자는 함께 손뼉을 치고 크게 웃으며 현지(玄旨)를 깨달았다 한다.
이들 일곱 왕자 혜진(慧眞),각초(覺初),지감(智鑑),등연(等演),주순(柱淳),정영(淨英),계영(戒英)은 성불한 후, 각각 금왕광불(金王光佛),금왕당불(金王幢佛),금왕상불(金王相佛),금왕행불(金王行佛),금왕향불(金王香佛), 금왕성불(金王性佛),금왕공불(金王空佛)이라 불렸다.
칠불사는 통일신라 이후 동국제일선원이라 불리며, 금강산 마하연(摩訶衍) 선원과 더불어 각각 우리나라 남,북을 대표하는 참선도량(參禪道場)이었다 한다. 그러나 고려시대 몽고의 침입으로 한때 불타버린 것을 1371년(공민왕 20년) 복원하였고, 그 후 조선조에 서산,부휴선사가 중수한 후, 벽송(碧松),조능(祖能),벽암각성(碧巖覺性), 백암성총(栢巖性聰) ,백곡처능(白谷處能),무가(無價),인허(印虛),월송(月松),이봉(?峰) 선사 등이 칠불사에서 수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대은(大隱), 금담(錦潭) 두 율사는 이곳에서 수도 후 서상수계(瑞相受戒)를 받아 지리산 계맥인 해동계맥(海東戒脈)을 이었다 한다.
또 근세 선,교,율(禪,敎,律)을 겸한 용성(龍城)선사는 이 칠불사에서 귀원정종(歸源正宗)을 저술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석우(石牛),효봉(曉峰),금오(金烏),서암(西庵),도천(道泉),자운(慈雲),지옹(智翁),일각선사 등이 이곳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하였다. 그러나 이 칠불사는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전소된 데 이어, 1820년 실화로 보광전,약사전 등 10여 동의 건물이 소실되었다. 후일 금담,대은 두 율사에 의해 복원되었으나, 여,순사건 관련 빨치산 토벌을 위해 1948년 12월경, 아군이 대웅전인 보광전과 아자방(亞字房),벽안당 등 모든 건물들을 또 전소시켰다. 이후 30여 년 동안 폐사상태로 있었던 것을, 현 주지인 제월통광(霽月通光, 속명: 우춘성)선사가 1978년부터 20여 년 동안 중창하여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갖추었다.
○아자방(亞字房)
아자방은 신라 효공왕(897~911) 때 김해에서 온 담공(曇空)선사가 선방인 벽안당 건물에 ‘아자(亞字)’ 형으로 구들을 놓았는데, 방모양이 ‘아자(亞字)’와 같다 해서 아자방이라 이름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정면 우측 2칸은 부엌이고, 좌측 3칸은 온돌방이다. 내부는 트여져 있는 하나의 공간(가로 8.7m, 세로 6m, 52.8㎡)이나, 높이가 다른 이중 온돌 구조로 되어 있다. 방안 네 모퉁이와 앞.뒤 가장자리 쪽의 높은 곳은 좌선처이고, 가운데 십자형으로 된 낮은 곳은 좌선하다가 다리를 푸는 곳이다. 이중 구조의 온돌방은 높고 낮은 구조와 상관없이 방안 전체가 모두 똑같은 온도로 유지되어, 건축하였던 당시에는 일곱 짐 정도의 장작을 넣고 불을 때면 석 달 이상 따뜻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건축기법의 탁월한 과학성이 인정되어 1979년 발간된 세계 건축사전에도 수록되었다. 이 아자방도 여.순사건 관련 빨치산 토벌을 위해 1948년 12월경, 아군에 의해 불태워졌었는데, 1982년 제월통광선사가 폐허된 칠불사를 복원하면서 아자방도 다시 복구되었다. 경상남도 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영지(影池)
칠불사경 내 바로 앞에 둥근 연못을 말하는데, 일명 영담(影潭)이라고도 한다.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과 왕비는 출가한 아들들을 보고 싶어 김해에서 배를 타고 남해를 거쳐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 칠불사 골짜기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일곱 왕자들의 스승인 장유보옥선사는 수도 중인 왕자들의 마음이 흐트러질까봐 상봉을 허락하지 않았다.
칠불사 아래에 임시숙소를 마련하고 머물면서 왕비는 계속해서 아들들을 만나고자 찾아왔으나, 오빠인 장유화상은 매번 왕비를 꾸짖어 되돌려보냈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장유화상으로부터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소식을 듣고 운상원을 찾아와 왕자들을 만나보았으나 옛 모습 그대로이라 의아해 하며 실망하였다. 이에 일곱 왕자가 “연못 아래로 저희를 보세요.”라고 외치길래, 왕비가 연못 속을 보니 과연 일곱 왕자가 금빛(金身)의 부처님 모습으로 변하여 물속에 비쳤었다 한다. 그 연못이 바로 지금의 이 영지이다. 소식을 들은 수로왕도 크게 기뻐하며, 왕이 머물던 곳에는 범왕사(梵王寺)를, 대비가 머물렀다는 곳에는 대비사(大妃寺)를 지었다 한다.
신라 진평왕 때 옥보고는 거문고를 메고 이곳 운상원에 들어와 50여 년간 수도하며, 거문고를 공부하여 30여 곡을 지었다 한다. 어느 날 경덕왕이 길가 정자에서 달을 감상하고 꽃을 구경하다가 문득 옥보고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들었다. 왕이 악사(樂師)인 안장(安長 : 일명 문복, 聞福)과 청장(請長 : 일명 견복, 見福)에게 “이게 무슨 소리인가?”라고 묻자, 두 사람은 “이는 인간세상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닙니다. 바로 옥보선인(玉寶仙人)이 거문고를 타는 소리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왕이 7일 동안 재계하고 그를 부르자 비로소 나와 30곡을 연주하였다. 왕은 크게 기뻐하고 안장과 청장으로 하여금 그 소리를 배우게 하여 악부에 전하게 하였다. 그리고 옥보고가 머무르던 이 운상원 자리에 큰 가람을 세우니, 주변 37국이 모두 이 절을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운상원을 일명 옥보대(玉寶臺)라 부르기도 하였는데, 신라 임금들은 거문고의 맥을 잇기 위해 나라 차원에서 지원하여 이곳 운상원을 크게 일으키고 거문고를 널리 보급시켰다 한다. 옥보고는 이곳에서 왕산악 이후의 금법(琴法)을 정리함으로써, 우륵의 가야금과 더불어 우리나라 현악의 쌍벽을 이루게 되었다.
서암정사 년간에 걸쳐, 전쟁의 참화로 지리산에서 희생된 원혼들을 위로하고, 나아가 모든 인류가 부처님의 대자비 안에서 이상사회가 실현되기를 발원하면서 불사한 도량이다. 석굴법당은 1989년부터 자연암반에 조각을 시작하여 10여 년 만인 2001년 완공되었고, 사경법보전내에는 원응스님이 평생을 걸쳐 사경한 화엄경금니사경본과 기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찰입구에는 불교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대방광문이 있고, 바위에 조각된 사천왕상을 지나 도량 안으로 들어서면 극락세계를 형상화한 석굴법당이 있는데, 아미타여래를 주불로 하고 있다. 도량 위편에는 많은 보살들이 상주하는 광명운대, 그리고 스님들의 수행장소인 사자굴 등이 있다. 모두 자연암석에다 굴을 파거나 조각하였다.
벽송사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이며, 경남 전통사찰 제12호로 지정된 사찰이다. 발굴된 유물이나 절 뒤편 창건 당시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3층 석탑으로 미루어보아, 신라 말이나 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나, 사적지가 전하지 않아 확실한 역사는 알 수 없다. 1520년(중종 15년) 벽송지엄(碧松智嚴, 1464∼1534)이 중창한 뒤 현재의 명칭으로 바꾼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절에서 조선시대 불교 선맥인 벽계정심,벽송지엄,부용영관,경선일선, 서산휴정,부휴선수,사명유정,청매인오,환성지안,호암체정,회암정혜,경암응윤,서룡상민 등과 같은 조사들이 수행하였고, 또 선교를 겸수한 대종장들을 108분이나 배출하여 벽송사는 일명 ‘백팔조사 행화도량(百八祖師 行化道場)’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벽송사 제2대 조사는 부용영관(芙蓉靈觀)선사인데, 그의 문하에서 가장 뛰어났던 제자는 서산대사인 청허휴정 (淸虛休靜)과 부휴선수(浮休善修)이었다. 서산대사는 벽송사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벽송산문의 제3대 조사가 되었으며, 서산대사의 제자인 사명대사와 청매조사도 이곳 벽송사에서 오도하여 크게 불법을 떨쳤다 한다. 1704년(숙종 30년)에 선교겸수의 대종장인 환성지안(喚醒志安)대사가 벽송사를 크게 중수하여 불당,법당,선당 강당,요사 등 30여 동의 전각을 지었는데, 상주하는 스님은 300여 명에 이르렀고, 부속 암자는 1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선교를 겸한 큰스님들이 벽송사에 주석하였으며, 강주(講主)를 역임한 스님만도 약 10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근대 선지식인 경허선사도 벽송사에서 주석하며 서룡선사 행적기를 집필하였으며, 벽송사 강원의 마지막 강주를 역임한 초월동조(初月東照)대사는 일정 때 동국대학교 전신인 혜화전문학교의 교장을 역임하였고,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그러나 400여 년간 참선 수행처로 지속되어 왔던 벽송사는 1950년 한국전쟁 중 지리산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국군에 의해 방화되어 완전 소실되고 말았다. 이렇게 6..25전쟁으로 황폐해진 벽송사를 1960년대에 이르러 원응구한(元應久閒)대사의 원력으로 선원,법당,요사채 등 건물들이 중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송사 경내에는 신라양식을 계승한 벽송사 3층 석탑(보물 제474호)과 벽송사 목장승(경남 민속자료 제2호)이 있다. 유물로는 묘법연화경 책판(경남 유형문화재 제315호)과 벽송당지엄영정,화엄경 금자사경 등이 전해오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법당인 보광전(寶光殿)을 중심으로 좌우에 방장선원(方丈禪院)?간월루(看月樓), 청허당(淸虛堂),안국당(安國堂) 등이 있으며, 선방 뒤 탑전 앞에는 도인송(道人松)과 미인송(美人松)이 서 있다. 그리고 벽송사 입구에 서 있는 목장승 2기는 해학스러운 표정으로 민중미학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이 장승들에서 변강쇠와 옹녀의 전설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목장승들은 순천 선암사 앞에 있었던 목장승과 쌍벽을 이룰 만큼 조각솜씨가 뛰어나다. 전체 높이는 4m 정도인데 예전에는 지하에 1m 정도만 묻혀 있었으나, 썩은 몸통을 지탱 하기 위해 1m 정도를 더 흙으로 북돋아 현재는 2m 정도만 드러나 있다. 왼쪽 장승은 몸통 부분에 ‘금호장군’, 오른쪽 장승에는 ‘호법대장군’이라 음각돼 있다. 두 장승에 새겨진 명문으로 미루어 보아 사찰 입구에 세워져 사천왕이나 인왕을 대신하여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문장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은사
남방제일선찰 천은사
지리산 서남쪽, 전남 구례군 광의면 방광리 70번지 일원에 있는 천은사(泉隱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9교구 본사 화엄사의 말사로서, 화엄사,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지리산 가운데서도 특히 아늑하고 따뜻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이 절은 신라 중기인 서기 828년(흥덕왕 3년) 인도의 덕운(德雲)대사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명산을 두루 살핀 후, 이 터에 지었는데 처음에는 ‘감로사’라 하였다. 그 뒤 875년(헌강왕 원년) 전남 장흥 가지산 보림사를 개창한 보조 선사가 증축하였으나, 고려.조선조를 지나는 동안 여러 번 소실되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이 절은 크게 번성하였는데, 특히 충렬왕 때(1275 ~1308)에는 사격(寺格)이 높아져 남방제일 선찰이라 불렸다. 그 후 많은 수도자들이 이 절에서 수행.정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절의 역사 가운데 많은 부분이 공백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임.정 왜란 등의 병화를 겪으면서 대부분 소실되는 등 크게 피폐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이르러 혜정선사(惠淨禪師)가 폐사된 가람을 중창하고 선찰 로서의 명맥을 이어왔다. 이후 1679년(숙종 5년) 단유대사(袒裕大師)가 중창하고 1715년(숙종 41년)에는 팔상전에 영산회 상도를 조성하였다. 또 1749년(영조 25년)에는 칠성탱화를 그렸다. 그러나 1773년(영조 49년) 화재로 이 절은 다시 소실되었다. 이에 그 이듬해인 1774년(영조 50년) 5월, 혜암선사(惠庵禪師)가 당시 남원부사 이경륜과 지리산 내 여러 사찰들의 도움을 받아 2년간에 걸친 중창불사 끝에 지금과 같은 모습의 가람을 이루고, 절 이름도 현재와 같은 천은사로 바꾸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보전,팔상전,응진전,수홍루 등 20여 동의 건물이 있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현 법당인 극락보전(전남 유형문화재 제50호)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또한 기둥 위와 기둥사이에 지붕 처마의 무게를 받치기 위한 공포를 여러 개 겹친 다포형식으로 꾸몄으며, 조선 후기 대표적인 건물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경내에는 18세기쯤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법당 내 아미타후불탱화(보물 제924호)가 있는데, 이는 조선후기 불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 금동불감 (보물 제1546호),괘불탱(보물 제1340호),삼장탱화(전남유형문화재 제268호)가 있으며, 천은사사찰 일원은 현재 전남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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