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다섯 개나 넘어 다녔어요. 고향을 떠난 후에는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나중에 아이들 데리고 꼭 같이 가보고 싶어요.'
군북면 지오리에서 죽향초등학교까지 산을 넘었던 오솔길이 그의 뇌리에 아주 또렷하게 박혀있는 듯 했다. 어찌 잊겠는가? 옛 고향이 품고 있는 추억들이 제일 값지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는 머릿속에 장중하게 펼쳐진 파노라마처럼 그것을 되살려 냈다.
'지오리에는 마작골, 지파실, 양짓말, 음짓말 등의 자연마을이 있어요. 그 중 양짓말, 음짓말이 가구수가 가장 많았죠. 대청댐이 생기기 전에는 얼마나 경관이 수려했던지 학교에서 소풍을 오면 거의 그 곳으로 갔어요. 지오리 앞이 아니면 이지당이나 월전리 서화천으로 소풍을 갔었죠. 어찌나 물이 맑았던지…. 지금은 예전의 물빛을 보지 못해 아쉬워요.'
그의 고향이야기는 점점 무르익어 갔다.
'8남매 중 일곱째였어요. 아침 7시부터 출발해 한 시간 정도 산을 넘어야 학교가 나왔는데 눈 올 때는 미끄러워 고무신에 새끼줄 칭칭 감아서 다니고 그랬죠. 산딸기 날 때는 한 아름 따먹으면서 오고, 어떨 땐 풀과 나무로 조그만 움막을 지어서 학교도 안 가고 거기서 도시락을 까먹고 놀다가 집에 오기도 했죠. 그런데 며칠동안 그러니까 슬슬 겁이 나서 다시 학교에 가고 그랬죠. 긴긴 겨울밤에는 아이들끼리 논둑의 흙덩어리를 뽑아 편을 갈라 던지면서 일명 '흙덩어리 싸움'이라는 것을 하고 그랬죠. 봄에 먹다가 버린 고구마껍질은 겨울에 다시 먹고, 그것도 영양분이 상당하거든요. 콩서리, 밀서리, 보리서리 안 해본 서리가 없었죠.'
◆뒤돌아 보게되는 사십대 중반의 삶
이제 나이 45살, 요즘 흔히 부르기 좋아하는 말로 `사오정'라고 부른다. 이태백, 삼팔선을 넘어 사오정까지 온 그는 자신만 해도 요즘 세상에 어쩌면 운이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이엠에프보다 더 어려워요. 주위에서 명퇴하는 것 지켜보면 자영업하는 친구들이 가장 부러워요. 요즘 신문이나 방송에서 회사 그만두고 다른 사업을 벌여 성공한 사례가 나오면 눈이 번쩍 뜨여요.'
충남기계공고를 나오고 현장에 있다가 대우를 못 받는 현장직보다는 관리직이 낫겠다 싶어 그는 다시 공부를 했다. 한양대 기계공학과를 졸업 후 한라공조에 입사, 18년째 다니고 있는 그는 구매개발팀장으로 최근 평택으로 발령됐다. 현재 직장에 만족을 하고 있지만, 시대가 시대인만큼 늘 쫓기고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듯 했다.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에 차량용 에어컨을 납품하는 회사에요. 지금까지 정붙여온 직장이니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죠.'
◆신선한 자극이 된 고향의 의미
그래서 그에게 고향의 의미는 더욱 신선한 자극이 됐다. 죽향초 61회 동창회는 요즘 그에게 다가온 몇 안 되는 희소식 중의 하나이다. 오랜만에 만나본 친구들 못 알아보면 어떻게 하나 미리 졸업앨범을 꺼내들어 예습까지 해갔다는 그는 옛친구들 만나니 참 좋다고 했다.
정말 초등학교 졸업이후 30년 만에 보는 친구도 있었고, 그 넓디 넓었던 학교 운동장이 조막만해 보여 처음 봤을 때는 팔아먹은 줄 알았단다. 그는 현재 죽향초 61회 대전모임 총무를 맡고 있다.
'처음에는 그 만남 자체에 의미를 뒀는데 이제 학교와 고향을 위해 뭔가를 해야죠. 거기에 죽향초61회가 중추적인 구실을 담당할 겁니다.'
튼튼한 몸과 여유있는 마음가짐, 자연과의 조화 등 시골 농촌의 삶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줬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된다는 그는 다시 걱정하면서 물었다.
'옛날에는 컴퓨터나 TV없이도 재미있게 잘 놀았던 우리들은 이렇게 고향생각하면서 세월을 달래는데, 요즘 아이들은 나중에 어떤 것을 추억하게 될 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