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에 대한 예화 모음
감사와 찬양
예수님을 믿으면 과거에 여러 가지 어렵고 괴로웠던 것이 모두다 감사로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런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여러 분이 예수님을 더욱 잘 믿고 은혜 가운데 거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므로 과거의 감사할 것을 찾아내 감사하고 하나님께 찬양할 때 우리 의 마음은 밝고 맑고 환해집니다.
또한 우리의 환경 가운데 감사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남편 에게, 아내에게, 부모에게, 자녀에게 감사할 것을 찾아내고 또한 현재 환경에서도 감사할 것을 찾아내 감사하면 계속적으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불평을 하려면 얼마든지 불평할 것을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감사할 것을 찾아내면 감사할 것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결심하고 감사할 것을 찾아내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이웃에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속이 그 감사와 찬양을 통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우울에서 쾌활하게 되고 믿음 소망 사랑으로 꽉 들어찬 상태로 변화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마음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생산적인 태도가 될 때 우리는 정상적인 판단을 하게 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게 되어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편50: 23)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사와 찬양 2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는 그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바나나 한 개를 주어 보라. 그러면 나는 영원히 그에게 키스해 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십억 달러를 주면서 나를 욕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내 목숨이 달아나는 일이 있더라도 나는 그에게 지옥으로 가라고 저주할 것이다..." 한번 깊이 음미해 볼 말이다.
위에서 말한 사과하는 말이나 감사하는 일은 대인 관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부단한 생활 표현이어야 한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창조하시고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며 또한 우리가 그의 뜻을 거슬러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우리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근본적인 진리는 인간이 하나님께 대하여 저지른 자신의 과오를 깨달아 진심으로 뉘우치고 그 앞에 용서를 구하게 하는 것이요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용서와 참 사랑을 깨달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참 감사와 찬양을 드리도록 하는 것이다.
같은 노래라도..
영국의 클 경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헨델의 메시아를 연주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연습이 다되면 연주일 전에 오케스트라와 총연습을 했습니다. 한번은 메시아 오라토리오 중에 절정이라고 볼 수 있는 할렐루야 합창 후에 나오는 소프라노 아리아 내 주는 살아계시고라는 곡을 소프라노 가수가 부르는데 정확한 음정과 박자. 아름다운 음색과 감정표현 그리고 적절한 호흡을 조절해 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많은 청중이 야. 참 잘한다하면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래클 경이 갑자기 지휘봉을 멈추고 노래를 중단시켰습니다. 노래 부르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심지어 관중들까지 놀라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로 마주 보았습니다.
이 때 래클 경이 소프라노 가수에게
너. 정말 내 주가 살아 계신 것을 믿느냐.
그 때 이 가수가 그런 것을 생각이나 했었겠습니까. 너무 뜻밖의 질문이라 그저 당황해서 예. 예.하며 대답했습니다.
래클 경은 그러면 다시 불러 하면서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이 때 소프라노 가수는 음정. 음색. 호흡. 박자. 감정 같은 것을 생각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 주는 살아 계시고. 이 노래를 듣고 많은 청중들이 아까는 참 잘한다고 생각하며 노래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너무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들었다고 합니다.
꼭 같은 사람이 꼭 같은 노래를 불러도 확신을 가지고 부르는 노래가 이처럼 감동을 준 것입니다. 확신에는 힘이 있습니다. 모든 고통도 절망도 딛고 일어설 힘이 있습니다.
고통 중에도 찬양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에베소서1:3)
한 국제 인질 사건에서 영국의 용감한 중재자 테리 웨이트는 인질들의 석방을 교섭하려고 레바논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납치되어서 독방에 감금되었습니다.
길고 외로운 낮과 밤들을 보내면서 그는 자신의 목숨이 보존될 것인지도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1596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써 놓은 기도를 매일 아침 자신의 기도로 드렸습니다. 이 기도에서 그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저에게 그렇게 풍성하게 내려 주신 수많은 자비하심과 또 저를 창조하시고 지켜 주시고 변화시켜 주심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 주신 모든 당신의 은혜와 위대한 자비에 대해서 가장 겸손하고 뜨거운 감사를 드리나이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우리가 이런 식으로 반응합니까? 어려움이 우리를 삼킬 때에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병을 고쳐 주시고, 위로와 힘을 주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이러한 간구는 틀림없이 합당하고 마땅히 하나님 아버지께 기지고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감옥 깊숙한 곳에서 한 것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자애에 대해 감사기도 드리는 것을 기억합니까?(사도행전16:25) 우리는 축복된 영생의 약속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 자체를 주신 것을 하나님께 찬양 드립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자비를 인정할 때 우리는 고통 중에서도 그분께 찬양을 드릴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 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주신 축복 세어 보면 찬양이 저절로 나온다.
구하기에 앞서 찬양을 드리자 출 27~28/마 21:23~46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 69:30,31.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할지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큰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 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편.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까지도 오직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만 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히브리 사람들은 생명을 주신 창조주께 찬양과 경배와 감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것을 약탈하는 것이다라고 여겨 왔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찬양하라는 단어가 250번 이상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찬양은 기도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찬양은 꼭 노래로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노래하기에 불편한 장소라면 말이나 묵상으로 해도 무방합니다. 그리고 마땅히 찬양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면 찬양의 장인 시편을 소리 내서 읽거나 암송을 하는 방법도 좋습니다.
주님, 저희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는 간구에 급급하기보다는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을 즐겨 부르게 하시옵소서.
◉ 시편 150편을 기록하고, 오늘 하루 안에 암송하시기 바랍니다.
찬양은 기도보다 더 거룩하다. 기도는 하늘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주나 찬양은 이미 그곳에 먼저 가 있다.
기쁨과 찬송으로
어느 돈도 많고 문학도 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암에 걸려 많은 고통을 받고 있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이 고달프고 무거웠고 이렇게도 괴로웠던 것은 주님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젠 주님을 알았기에 암이란 것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며 죽음을 아주 기쁘게 맞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찬송하며 감사기도를 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어떤 여대생이 가난한 사람들만 입원하는 무료 환자 수용소에서 두 달 동안 외롭게 입원을 했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감사와 기쁨과 찬송으로 전도를 했다.
자신도 아프고 괴롭지만 찬송과 기도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전도를 했다. 그러던 그녀가 퇴원을 하게 되자 환자들이 손을 붙잡고 울면서 의사보다, 간호사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니 우리와 같이 있어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기쁨의 노래를
나는 오늘 우리 마을의 가장 번화한 거리 가운데 하나를 따라서 걸어 가다가 누군가가 시끄러운 차 소리에도 불구하고 노래 부르는 것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노래 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비록 혼자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불렀지만 나는 그의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는 휠체어를 탄 채로 자기 몸 가운데 유일하게 쓸 수 있는 두 팔의 힘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헤치며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를 뒤쪽아 간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서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당신의 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무한한 힘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이미 잃어 버려 없어진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대신 나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또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답니다."
남편을 변화시킨 찬송
6.25 동란 전 인민군 장교의 부인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 인민군 장교는 기독교가 몹시 못마땅해 기독교인인 아내를 알게 모르게 핍박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내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이 알려지면 그의 생명에도 큰 위험이 뒤따르므로 그는 아내에게 제발 예수를 믿지 말라고 사정도 해보고 협박도 해보았으나 그 아내는 더욱 열심히 교회에 나가 남편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남편이 잠들 때엔 그의 손을 잡고 "내 주를 가까이 하려함은" 하며 찬송을 불렀다.
6.25 전쟁이 나자 그녀의 남편은 전쟁터로 나가게 되었고 전방에서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 그가 포로수용소에 있을 때 미군 군목이 와서 기독교 신자가 있으면 나오라고 했다. 군목은 한명씩 찬송가를 시켰다. 이 때 인민군 장교는 아내가 매일 밤 들려주던 찬송이 생각났다. 이 찬송을 부르다가 자신도 모르게 감동을 받아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다.
내 모습 이대로
무디 목사님이 스코틀랜드를 여행하시면서 그곳에서 전도 집회를 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그 집회에 한 소녀가 참석했습니다. 이 소녀는 영혼의 고민을 안고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을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기는 구원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는 생각 때문에 소녀의 마음은 괴로웠습니다. 나는 배운 것도 없는데. 예쁘지도 않고. 명성도 없으며. 돈도 없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아서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는 자격지심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던 이 소녀가 그 집회의 마지막 날 무디 목사님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해 설교하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설교가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소녀는 우뚝 서서 정면을 향해 달려 나오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내 모습 이대로. 부족한 모습 이대로 하나님은 받아 주시지요.
달려 나오는 소녀를 끌어안으면서 무디 목사님은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께서 그대로 받으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매를 받으시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녀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날 하나님이 자기를 받으시고 죄를 용서하셨다는 해방감에서 주님 앞에 찬양과 감격의 기도를 올리고 있을 때에 그 옆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성가대의 에리사 헤밀턴이라는 여자가 붓을 들어서 작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서 있던 무디 목사님과 평생을 음악 목사로 동역했던 생키가 작곡을 시작합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 하시사 날 받으옵소서. 큰 죄에 빠져 영 죽을 날 위해 피흘렸으니 주 형상대로 빚으사 날 받으옵소서.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으옵소서.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소서.
높으신 이름
인도의 개척 선교사였던 스코트 목사는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미개척 선교지를 향하여 가다가 적의를 품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붙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긴 창으로 그의 심장을 겨누었습니다. 이젠 꼼짝없이 죽게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서서 늘 가지고 다니던 바이올린을 켜면서 원주민들의 언어로 찬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주 예수 이름 높이어 다 찬양하여라. 그 앞에 무릎 꿇고서
면류관 드리세. 금 면류관을 드려서 만유의 주 찬양"
스코트 목사는 잠시 후면 다가 올 죽음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찬양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3절이 다 끝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눈을 떠보니 그를 겨누고 있던 사람들의 손에서 창이 떨어져 있었으며,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찬양을 받으실 그 높으신 이름이 누구인지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그들과 함께 집으로 가서 여러 해 동안 그들 가운데서 거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다가동(多佳洞)의 소년
"여보......저 이상한 꿈을 꾸었어요."
전주 전매청에 다니고 있던 윤기수(尹基秀)의 아내 김애순(金愛順)이 어느 봄날 남편에게 그런 말을 했다. 4년 전에 아들을 낳고서 태기가 없던 아내가 그렇게 말하자 윤기수는 태몽이 아닌가 싶어서 귀가 번쩍 띄었다.
"무슨 꿈인데......?"
"깨끗한 그릇 하나를 보았어요."
"그릇......?"
호랑이나 돼지라면 모르겠는데 그릇을 보았다고 하자 윤기수는 심드렁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태몽이었는지 아내는 이듬해 정월 31일에 얼굴이 하얀 아들 하나를 낳았다. 부친이 용섭(勇燮)이라고 이름지어준 그 아들은 자라면서도 모친이 꿈에 보았던 그릇처럼 그 성품이 매우 깔끔한 편이었는데 그의 모친은 나중에 아들을 따라서 교회에 나가게 되어서야 그 이상한 꿈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딤후2:21)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그릇이었기 때문인지 윤용섭은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 집안에 아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는데 용섭 소년은 혼자서 동네의 서문교회에 나가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던 용섭이 음악적인 재능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때부터 이었다. 전주서중 음악부에 들어가서 클라리넷 연주를 하더니 그는 드디어 악대장이 되었고 교회 학생부에서도 음악부장이 되었던 것이다.
용섭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은근히 고개를 끄떡였던 것은 그의 부친 윤기수였다. 본래 전주는 줄풍류 대풍류의 본고장으로 많은 음악인들을 배출한 지역인데다가 윤기수는 본래 시조의 전문가였고 바이올린을 하다가 손을 다쳐서 중단한 음악 지망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부친의 응원을 받으며 윤용섭의 음악적 재능은 점점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다.
그는 다시 서문교회 재단에서 설립한 신흥고등학교에 특기장학생으로 입학했고 역시 악대장이 되었으며 교회에서는 고등부 성가대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나오면서 그는 곧 조선대학교 기악과에 장학생으로 뽑혔다. 그리고 청년기의 윤용섭은 광주 양림교회 성가대를 지휘하면서 그의 전공인 클라리넷 보다는 색소폰 쪽에 점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의 천부적인 풍류기질이 그로 하여금 클라리넷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색소폰에 대한 관심은 차츰 윤용섭을 세상 쪽으로 내몰기 시작했다. 한 일 년쯤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윤용섭은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에 와서도 영천교회에 출석하며 성가대 지휘를 했으나 그는 결국 색소폰을 들고 미 8군 무대에 서는 악단장이 되었다. 그가 색소폰으로 연주하는 '대니 보이'나 '로라'같은 곡들은 상당한 호소력이 있어서 인기를 독차지하곤 했다.
이 시절에 그는 친구의 소개로 두 살 아래의 처녀 남기옥(南基玉)을 만난다. 1년쯤 교제를 하다가 그는 여자가 불교 집안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사에 깔끔한 윤용섭의 기질이 나타났다.
"저는 말입니다...... 예수 안 믿는 여자와는 결혼 못합니다."
여자는 별 이상한 사람 다 본다는 듯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믿으면 될거 아녜요!"
이렇게 해서 그들은 결혼했고 영천교회의 집사 부부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고등학교를 함께 나와 연극 연출을 하고 있던 문고헌의 소개로 안양영화예술학교의 음악교사가 되었다. 최은희 교장은 그를 매우 아껴서 늘 자신의 차에 그를 태우고 다녔을 정도였다. 장덕, 노고지리 등의 가수들이 이 학교에서 윤용섭의 지도를 받고 자라났다.
그러나 이 때 윤용섭은 대중음악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느라고 가끔 술을 마시곤 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위장병을 얻었다. 폭음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한 달 동안 죽도 못 먹을 정도로 증세가 심각해졌다. 교회에서 자라난 사람으로 술을 입에 대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이것 역시 그의 깔끔한 성격을 드러내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의 위장병은 날로 심해갔다. '내 말을 전해다오', '너와 나' 등 대중가요 몇 곡을 작곡하여 천국희라는 가수의 취입으로 음반을 냈는데 그것도 보기 좋게 실패하고 말았다. 마침 그 때 최은희 납북사건이 터졌기 때문에 그는 학교에 사표를 내고 부부가 함께 오산리 기도원으로 들어갔다. 부부가 함께 열흘간을 금식하며 기도하는 중에 윤용섭은 대중음악을 그만두고 그의 음악을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만 사용하기로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가 우선 시작한 것은 색소폰을 찬양의 악기로 쓰기 시작한 것이었다. 본래 색소폰이란 악기는 사람의 심금을 뒤흔들기 때문에 잘못 사용하면 흔히 타락의 도구로도 쓰이지만 주인을 잘 만나면 영혼을 치유하는 은혜로운 악기로도 사용될 수가 있는 것이었다.
그가 먼저 색소폰으로 연주하기 시작한 것이 박재훈의 '어서 돌아오오'와 나운영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였다. 그가 이 곡들을 색소폰으로 연주하기만하면 듣는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회심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 그는 오산리 기도원에서 음악담당을 하다가 최초의 보컬 찬양단인 '할렐루야 음악선교단', '오산리 음악선교단' 등을 창단해서 운영했고 장충 스튜디오를 빌려서 최초의 복음성가 취입을 시작했다.
단지 찬양일 뿐
어느 부활절 아침, 한 자매가 아름다운 찬양을 했다.
“주님은 살아계시도다. 주님은 살아계시도다. 그리스도 예수는 오늘도 살아계시도다. 그는 나와 함께 걸으시고 나와 함께 말씀하시며 내 인생의 좁은 길을 함께 하시 도다. 당신이 만약 내게 그분이 살아 계신지 어떻게 아느냐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겠네. 그분이 나의 마음속에 살아 계시다고.”
모든 사람이 그 찬송에 갈채를 보냈다. 그런데 예배 후 한 집사님이 그녀에게 물었다.
“자매님, 그분이 당신께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던가요?” 그러자 찬양을 불렀던 자매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죠?”
“최근에 자매님과 그분이 나눈 대화에 대해 알고 싶다고요.”
“그분이라뇨. 누구를 말씀하시는 거죠?”
“예수님이시지요.”
“뭐라고요? 제가 예수님과 대화를 해요? 집사님 어떻게 되신 것 아니에요? 예수님은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집사님, 주의하세요. 만약 예수님이 집사님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단지 집사님 자신의 생각일 수도 있고 사탄의 장난일 수도 있어요. 우리들은 속아 넘어가기 십상이죠. 그러니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을 읽으며 그것에 따라서만 살아야 해요.”
“하지만 자매님. 자매님은 분명 '그분이 나와 함께 걸으시며 나와 함께 말씀하신다네.'라고 찬양하셨잖아요.”
“예, 하지만 그건 그저 찬양가사일 뿐이에요. 사실 그분은 저에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세요.” “그렇다면 왜 그 찬송을 부르셨나요.”
“글쎄요. 왜냐하면 그 찬송이 찬양 집에 있었기 때문이죠 뭐.”
우리가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고 확신시킬 수 없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단지 찬양집 속에 그 곡이 있다고 해서 그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들을 확신시킬 수 없다.
데오크리트의 찬양
상점에서 일하는 데오크리트는 가난했지만, 온 종일 일을 하면서 피곤해하지도 않고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는 그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기쁨을 주는 것이었다.
어느 날 데오크리트가 노래하며 일하고 있는 곳에 한 수도사가 지나갔다. 기쁨에 찬 소년의 노래를 듣자 수도사가 발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네 노래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하나님께서 네 찬양의 노래를 들으실 거다. 그러나 네가 로마의 교황이 되어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부활절 날 노래를 부른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이 소리를 들은 데오크리트는 “제가 죽기 전 성 베드로 성당에서 꼭 하나님께 찬양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이 간구의 기도를 들은 천사 가브리엘은 지상에 내려가 이 소년을 로마로 인도해갔다. 그리고 그 소년을 대신해서 자신이 데오크리트 같은 소년이 되어 상점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천사는 소년이 하던 일을 잘 해낼 수 있었지만 소년의 노래는 흉내 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브리엘은 “내가 한 소년의 노랫소리를 듣고 있으나. 그 소리에는 데오크리트의 노래처럼 어찌 경외심과 간절함이 없는가”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결국 가브리엘은 천사의 휘장을 버리고 로마로 달려갔다.
“내가 잘못 판단했습니다. 당신의 옛집에서 노래 부르는 일은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작은 찬양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돌아와서 다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러주십시오”
데오크리트는 비록 그토록 바라던 성베드로 성당에서 노래를 할 수는 없게 되었지만, 다시 가난한 집으로 돌아와 노래를 불렀을 때 그 노래를 듣는 수많은 생명들과 하나님께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주님, 내가 처한 지금의 모습에서 주님께 영광 돌리고 감사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지금에야 깨닫습니다. 사소한 부분에서 느끼는 감사도 주님께는 똑같은 무게로 상달되는 것임을 바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돈 코 삭합 창단의유래
1917년 러시아에서는 조국을 지키려는 백색군과 적색 혁명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이 전투는 적색 혁명군의 승리로 끝났다. 백색군중 젊은 장교 일부는 러시아를 떠나 유럽으로 갔는데 그 중에 돈 코삭이 있었다.
돈 코삭은 그 [험난한 여정]에서 기도하던 중 "그래, 합창단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용기와 위로를 받자"고 부르짖게 되었고 곧 합창단을 조직,[지친 영혼들]에게 소망을 주었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돈 코삭 합창단]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메시야
1741년 8월 22일, 56세 때 헨델은 자택의 조그마한 방에 앉아 신들린 듯 오선지에 악보를 그려놓고 있었다. 무아지경에 빠져 곡을 짓고 있었다. 남자 하인이 먹을 것을 갖다 주었으나 한 시간 이상이 지나도록 음식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구슬픈 아리아 부분을 작곡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따금씩 멍하니 창문 밖을 응시하였고 미친 듯이 어깨를 구부리고 있었다.
드디어 21일 이 지나 9월 14일, 완성된 악보를 책상 서랍에 넣은 다음 촛불을 끄고 깊은 잠에 빠졌다. '메시야'가 완성된 과정이다. 그는 전 3부에 약 2시간 30분 소요되는 이 최대 작을 불과 22일 만에 완성했던 것이다(제1부는 7일, 제2부는 9일, 제3부는 6일 동안).
1743년 런던 초연 때 영국의 왕 조지 2세가 임석하였는데 '할렐루야 코러스'부분에 다다르자 왕은 감격한 나머지 벌떡 일어났으므로 측근은 물론 청중들도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습관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어느 부활절, 시내교회 연합성가대가 열렬하게 합창할 때 감명 깊게 들었던 추억을 가지고 있다. 한 번쯤 아니 수십 번 들어도 벅차오르는 기쁨은 '메시야'가 단순히 명곡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도 마치 성령의 감화를 받아 성경을 기록한 방식대로 신령한 기운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헨델은 메시야를 작곡하고 있는 동안 깊은 영적세계로 빠져들곤 했다. 책상 앞에서 끊임없이 흘린 눈물, '할렐루야 합창'부분이 완성되는 순간 외친 탄성, 곧 "나는 내 앞에서 열린 천국을 보았으며 위대한 신을 만났다"고 한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메시야'가 단순히 한 인간의 천재나 영감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성령께서 보이지 아니하는 가운데 헨델과 함께하셨던 것이다. 영원토록 통하는 영적 노래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우리 인간에게는 기쁨이요 평화이다.
바하의 성실
교회 음악의 대가라고 불리는 작곡가 바하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토마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로 일하고 있으면서, 주일마다 부르는 성가대의 노래를 새로 작곡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출판되지도 못했고 별도의 작곡료를 받은 바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매주일 꾸준히 사명감과 신앙으로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그런데 훗날 바하의 음악 세계를 이룩하는 데 있어서 보수도 없이 매주일 작곡했던 그 곡들이 기초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하가 만든 265개의 오르간곡과 263개의 합창곡과 162개의 피아노곡, 그리고 그 외에도 수백 개의 오르간 곡들은 그가 날마다 주일마다 꾸준히 작곡했던 성실과 신실성이 낳은 작품들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일을 맡는 것은 쉽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되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신실과 성실을 다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 차례의 충성은 쉽지만 일생 충성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맡은 일을 입으로 모조리 해치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마음속으로만 골백번 결심하고 다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충성은 마음과 실행이 병행해야 하는 실천 윤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별들의 찬양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지어다"(시편 148:3)
허블 우주 망원경은 우리들에게 머나먼 하늘 저쪽 별나라의 극적인 장면들을 보여줍니다. 사진들은 태양계의 해와 같은 별들이 발하는 자외선으로 밝게 조명되어 6조 마일이나 치솟아 오르는 별과 별 사이의 수소가스의 구름을 보여 줍니다.
이 망원경은 우주 공간의 먼지와 가스를 합쳐서 새로운 별들을 생성시키는 막대한 충격 파장을 초래하는 거대한 은하계의 충돌의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허블 망원경의 렌즈는 에타 카리에라고 불리는 별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 별은 인간에게 알려진 가장 밝고 거대한 별들 중의 하나로서 수시로 굉장한 에너지를 방출합니다. 그리고 이 망원경은 "별들이 수십 개씩 다량으로 생성되는" 오리온 좌에 있는 "별들의 산실"의 일면을 보여 주었습니다(타임지 1995. 11. 20).
허블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관찰한 천문학자들은 자신들의 반응을 "위엄에 눌린" "압도되는" "놀라운"이라는 말들로 표현했습니다. 이 말들은 "명하셔서 지음을 받도록"(시편 148:5) 하신 하나님을 생각해 볼 때 우리의 경우에는 역시 적절한 반응이 됩니다.
별들은 주님의 창조의 권능을 감동적인 찬양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별들마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얼마나 더 찬양해야 하겠습니까!
말씀의 권능으로 하나님은 세상을 지으셨네
하늘을 가로질러 별들이 내던져졌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네
우리들의 찬양의 말들과 기도와 찬송으로써.
모든 창조에는 하나님의 서명이 들어 있다.
복음 가수들의 대부(代父)
윤용섭이 처음으로 작곡한 복음 성가는 '주님 내게 오시면'이었다. 기도원에서 부부가 함께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만 살겠다고 서원하던 내용을 담은 노래였다.
세상 부귀 안일함과 세상 근심하다가
주님 나를 찾으시면 어떻게 만날까
주님 내게 오시면 나 어찌 대할까
멀리 방황하던 나 불쌍한 이 죄인
이제 주만 생각하며 세상 근심 버리고
두손 들고 눈물로써 주만 따라 가오리다......
그는 이 노래를 어렸을 적에 성가대의 경험이 있다는 맹인 가수 이용복에게 부르게 했다. 이용복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이용복은 예능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여 집사가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이 첫 번째 복음성가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반향을 일으켰다. 하루는 작곡가 나화랑의 부인인 유성희가 찾아와서 '주님 내게 오시면'을 취입하고 싶다며 졸라서 취입을 했는데 그녀는 나중에 윤용섭 작곡의 복음성가들을 중심으로 세 개의 테이프를 내게 되었고 마침내 복음가수로 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가수 나애심은 유성희의 친구였는데 하루는 유성희의 찬양집회에 끌려갔다가 이 곡을 듣고 감동하여 예수를 영접했다. 그 나애심이 한번은 윤용섭의 군 교도소 위문집회 때 함께 가서 '주님 내게 오시면'을 부르게 되었다. 그 날 나애심은 흐느껴 울면서 그 노래를 불렀고 위문 갔던 사람들과 재소자들이 모두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울기 시작하여 온통 눈물바다를 이룬 적도 있었다.
그가 잠원 중앙교회에 찬양집회를 나갔을 때였다. 그 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우리 교회에 좋은 재능을 가진 청년이 하나 있는데 잘 지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가 바로 나중에 '사랑의 종소리',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등 많은 복음성가들을 작곡한 김석균이었다. 윤용섭의 주선으로 데뷔작 '어부들'을 취입하게 된 김석균은 윤용섭을 복음가수들의 '대부'라고 부르며 고마워했다. 이 때 전용대도 안철호 목사가 작곡한 '주여 이 죄인이'를 취입시켜서 복음가수로 등장시켰다.
그 후로 윤용섭은 본격적인 찬양사역을 위해 신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입학을 하자마자 하나님의 연단을 받게 되었다. 그의 아내 남기옥이 시름시름 앓으면서 가슴이 아프다고 하더니 원자력 병원에서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던 것이다. 신학교에 입학을 하자마자 이런 일을 당하면서 그는 잠시 신앙의 흔들림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주의 은혜로 평탄한 길을 걸어 왔던 것을 생각하면서 그는 이 시련을 새로운 헌신의 기회로 삼았다. 병원에서 1년을 넘기기 어렵다고 하던 아내의 유방암은 수술을 받은 후 부부의 결사적인 금식기도로 호전되기 시작하여 다시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많은 복음성가들을 작곡했고 자신의 스튜디오를 가지면서 김희영, 박정미 등 복음가수들을 길러내기 시작했다. 사랑과 진실, 바니 걸스 등에게도 복음성가를 취입시켰다. 필자가 윤용섭의 이름을 알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때쯤이었다. 필자는 김희영이 부른 '이몸을 적십니다' '춤추며 찬양하리' 등으로 많은 위로를 받았고 그의 색소폰 독주곡 '길'을 듣고 반해서 윤용섭의 테이프라면 무조건 사서 모았던 것이다.
필자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그가 목사 안수를 받고 연예인 선교회의 지도목사로 있을 때였다. 연극 '건너가게 하소서'의 제작을 위해서 전계현, 문고헌씨 등과 만날 때에 그를 함께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얼굴이 하얗고 깔끔하게 보이는 이 목사님이 어떻게 그토록 심금을 울리는 연주와 작곡을 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으나 나중에서야 나는 그분이 무릎으로 작곡하는 즉 '기도하는' 음악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건너가게 하소서'에서 우선 관심사는 주제곡이었다. 나는 윤용섭이 심금을 울리는 곡들을 많이 쓴 것을 알고는 있었으나 히브리 백성들의 광야 행군을 웅장하게 나타내야 하는 주제곡을 과연 이 분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궁금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것이 그에게도 부담스러웠다는 것이었다. 곡 가운데는 광야 행군의 고달픔이 나타나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승리를 나타내는 행진곡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소화하기가 몹시 힘들더라는 것이었다.
그는 오산리 기도원에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모세의 시대 속에서 모세와 함께 광야를 걸으며 하나님께서 곡을 주시기를 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하늘로부터 한줄기 선율이 흘러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는 부지런히 그것을 오선지에 채보했다. 그가 이 선율을 가지고 필자를 만나자마자 입으로 그 주제를 들려주었다.
"짠 짠......짜자자 짠......"
마치 어린아이처럼 들려주는 그 주제를 들으면서 나는 깜짝 놀라 무릎을 쳤다.
"목사님, 바로 그겁니다! 그게 어떻게 나왔지요?"
그렇게 해서 막이 열리기 전부터 관객을 사로잡는 '건너가게 하소서'가 작곡되었던 것이다.
부부의 찬송
어떤 부부가 화해를 하려고 별 수단을 다 써도 미워하는 마음만 더해갔다. 술을 먹고 싸우고 같이 여행도 해보고, 또 자살을 하려고 수면제를 먹어 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화해가 되지 않아서 별거를 하기로 했다. 그래도 해결이 안 되면 이혼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이 부부가 `우리 가정에 불화가 생긴 것은 못된 것이지만 아무리 해봐도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니까 이제 이 상황도 하나님께 맡기면서 찬송하자' 하면서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계기가 되면서 마음이 변화되었다.
남편의 마음에 아내를 사랑할 마음이 생겼고, 용서할 마음이 생겼고, 돌아갈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아내에게 편지를 띄웠는데 아내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한날 같은 내용의 편지를 띄웠다고 한다.
비록 그럴지라도
미카엘 코스타가 한번은 예행연습을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는 많은 연주자와 합창대가 동원되었다. 오르간 소리와 함께 웅장한 합창이 울려 퍼지고 북과 호른, 심벌즈 소리 등이 어울려 퍼졌다. 그런데 저쪽 구석에서 피콜로를 연주하던 한 사람은 속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이렇게 굉장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데 피콜로 연주쯤은 빠져도 별 지장이 없겠지."
그리고는 연주를 중단해 버렸다. 바로 그 때 갑자기 그 유명한 지휘자는 지휘를 중단하고 손을 쳐들었다. 모두들 조용해졌다. 지휘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피콜로는 어디에 있어!"
그 지휘자의 귀에 피콜로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피콜로를 연주하는 사람이 그의 몫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주 전체가 망쳐지게 되었던 것이다.
내 영혼은 힘을 다하여 내 몫을 이행하고 있는지! 당신은 심히 미약하고 무의미하고 감추어져 있는 그런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찬양을 듣기 위하여 귀를 기울이고 계신다. 당신이 하나님께 감사를 돌릴 때 하나님의 위대한 우주의 모든 음악은 한층 더 훌륭해지고 아름답게 되는 것이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새 노래로 찬양하자 대하 1~3/요 12:1~19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시 40:3.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시 40:5.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시 92:1
흑고래가 내는 소리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흑고래의 소리는 계속해서 변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흑고래가 맨 처음에 냈던 소리와 가장 최근에 냈던 소리는 사실상 완전히 다르다는 것입니다. 즉, 흑고래가 내는 소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라면 흑고래는 날마다 새로운 찬양을 드리는 것입니다.
당신의 입가에는 어떤 노래가 머무르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지금에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보다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유행가를 더 즐겨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아무런 느낌도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입에 배인 찬송가를 부르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늘 새롭게 찬양되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각 사람에게 세심한 사랑으로 다양하게 역사하시는 우리 주님은 찬양받으실 만한 것들이 무수히 많은 참 하나님이십니다.
저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 저희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새로운 찬양을 받으시옵소서.
◉ 지금, 당신 입술에서는 어떤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늘 새로운 노래로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새 노래...를 내 입에 두셨으니" (시편 40:3)
능숙한 연설가 로버트 잉거솔은 그의 재능을 기독교 신앙을 훼방하는데 바쳤습니다. 그의 정열적인 강연에서 그가 빈정댐과 해학을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해서 진실을 왜곡하여 믿는 사람들을 불신앙에 빠뜨린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가 죽었을 때 장례식 순서에 이러한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찬양은 없습니다." 그것은 영생의 진실을 부정했던 사람에게 정녕코 합당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에서는 비록 눈물이 눈을 적셔도 찬양순서가 있습니다. 죽음은 신자들을 상상할 수 없는 영광과 아름다움의 나라로 인도하며 그곳은 수많은 천사와 인간의 소리가 즐거운 찬양으로 합세하여 할렐루야로 큰 조화를 이루어 천국을 채웁니다.
그러므로 이런 좋은 이유로 인해 우리는 비록 목소리가 좋지 않더라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사정이 어떠하든지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즐긴다면 우리는 감사의 찬송을 드릴 수 있습니다.(야고보서 5:13)
고난을 당하면 우리는 바울과 실라의 본을 따를 수 있습니다. 매 맞고 감옥에 갇힌 후에도 그들은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사도행전 16:25).
삶의 어떠한 처지에서도 그리스도인은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의 찬양은 단지 천국에서의 즐거운 찬양에 참여하기 위한 예행연습일 뿐입니다.
승리하신 구세주를
내가 찬송하리로다
죄와 죽음 지옥 권세
주가 모두 이기셨네.
만일 당신이 천국에 주파수를 맞추면 당신의 마음에 찬송이 우러날 것이다.
새롭게 하소서
"모든 장식과 정성과 그리고 예술, 이 온갖 것들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나의 일생은 정초(정초)의 연속이다. 축제 기분에 나는 소리 없는 소리의 음악에 발맞추어 지구의 표면을 쉴 새 없이 춤을 춘다.
"새롭게 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영원토록 축하합니다." 나는 이렇게 아홉 번을 반복한다. 그리고 주님의 산상 보훈의 팔복(팔복)을 회상하면서 다시 열 번의 축하를 반복할 때에 내가 만물 중에서 으뜸가는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잠겨 있음을 직감한다.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 우리는 슬퍼하지 말라"하신 주님의 말씀같이, 환희의 음성은 영혼 깊숙이 넘쳐흐른다.
갈보리산(산)의 최후가 아무리 비참하였을지라도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은 영원히 비추인다. 불꽃놀이를 하는 자는 사라져간 연기 속에 미련을 남길 수 없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는 곧 하늘을 향한 불꽃놀이의 화약과 같다. 그 양(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늘로 솟아오르는 폭력은 강하다.
불꽃을 쏘아라, 오늘은 생명의 축제일이다. 영광이여! 영광이여! 만물은 다 같이 환호를 올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여라. 만물의 어느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리로다. 들의 새들도 어둠 속의 불꽃도, 숨겨진 설탕도 화초도, 철별(철병)도 원고지도, 물이끼도 인간의 때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할지어다.
생각만 해도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는 상태가 정말 신앙의 경지이다. 그분이 주님이시기에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무엇을 해주셔서 감사하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높은 차원의 감사이며 찬양이다. 나의 주님이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그분을 발견하고 만날 때 그분의 품안에 덥석 안기는 기쁨이 왜 크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찬양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나의 상태를 발견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내가 찬양하는 분의 위대하심이 점점 분명하게 드러날수록 나의 보잘 것 없이 "미천한 신세"가 더욱 확실해 진다. 칠흑처럼 어두운 데 있을 때에는 나의 추한 몰골이 문제도 되지 않다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 불끈 솟아 대지를 눈부시도록 환하게 비출 때 나의 미천한 모습이 너무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이렇게 나의 미천함이 확실해 질수록 그분의 밝으심과 위대하심이 돋보이는 것이다.
나의 낮고 천한 모습이 확인될 때 미천한 신세를 돌보시는 분에 대한 고마움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지없이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말할 수 없이 천한 나를 돌보신다고 생각될 때에 느껴지는 축복이 얼마나 컸겠는가?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해 주신"은덕을 생각하면 할수록"온 백성이 복되다"고 할 터이니 얼마나 그 기쁨이 크겠는가?
어느 때 찬양할 것인가?
1) 도움을 받았을 때
출15:2 - 구원을 받았을 때
삼하22:4 -원수에게 승리했을 때
왕상12:48 - 왕위를 계승할 때
시13:6 - 후대를 받았을 때
시98:1 - 구원을 베풀어 주실 때
눅1:68 - 속량해 주실 때
행3:8 - 병을 고쳤을 때
2) 어려운 때
수6:16 - 전쟁시에 찬양하라
대하20:22 - 전쟁을 앞에 두고
시74:21 - 가난할 때에도
마26:30 -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도
행16:25 - 감옥에서도
3) 범사에
시34:1 - 늘 찬양하라
대상23:30 - 저녁마다 찬양하라
시71:8 - 종일토록 찬양하라
시61:8 - 영원히 찬양하라
시104:33 - 죽을 때까지 찬양하라
어떻게 찬양할 것인가.
1. 목적적으로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은 뚜렷한 목적이 있는 생활이셨다. 주님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곧 인류를 구원하실 계획을 하셨다. 우리는 그 의도와 목적대로 살아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찬양은 신중해야 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축복이 되어야 한다(시150).
2. 응답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을 응답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잊어버리거나 소홀히 함으로 하나님의 올바른 복을 외면한 채 세상적인 물욕에 눈이 어두워 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복이며 또한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온다(약1:17). 하나님은 찬송 받으실 분이시므로 우리는 화답해야 한다.
3. 정다움으로
어떤 그리스도인은 가볍고 경솔하게, 경건하지 않은 태도로 주님을 찬양하는데 그러한 그들의 삶은 대부분 영적인 깊이가 결여되어 있다. 신실하고 애정이 있는, 기도하는 자세로 주님을 찬양하자. 주님의 위대한 사랑과 희생에 우리는 아낌없는 찬양을 넘치도록 돌려드릴 뿐만 아니라 매사에 사랑의 영적 교통을 가져야 한다(시145:8-10).
4. 영감적으로
주님을 찬송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훌륭한 영감을 주므로, 많은 사람들은 기쁨을 추구하고 있으며, 행복이 발견되어 지는 곳으로 갈 것이다. 기쁜 찬양에는 전염성이 내포되어 있다. 넘치는 감동으로 주님을 찬양할 때 다른 사람의 참여를 유발시키며, 모든 사람이 함께 주님을 찬양하게 된다.
(시148:11-13).
5. 자발적으로
숨겨진 죄나 자존심은 주님을 자발적으로 찬송하지 못하게 만들am로 반드시 이러한 것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은 억제되지 않고 자연적으로 흘러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영적으로 주님을 충분히 찬양할 수 없다(시146:1-2)
6. 영구적으로 주님을 찬양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영히 주의 이름을 송축한다고 읊었다(시145:2). 그리스도인의 입에서는 찬양이 끊어지면 안 된다.
열려진 찬양의 샘
이를 닦던 중, 나는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음을 인하여 진한 감사를 드렸다. 나는 욕조 옆에 무릎을 꿇고 앉음으로 보다 '영적인'자세를 취했다. 가득히 차서 넘치려 하는 것은 욕조가 아니라 내 자신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으로서 결코 전에는 이러한 느낌을 가져보지 못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맛보아 '즐기면서' 욕조 옆에 꿇어 앉아 한 시간이나 보냈다. 마침내 나는 침대에 드러누워서 얼굴에 미소를 띤 채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감사를 드렸으며 나의 믿기 어려워하는 이성이 제기하는 모든 방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혀를 통해 흘러나오는 새로운 영적 언어를 조심스럽게 말하려고 노력하였다. 마침내 나의 녹슨 내면의 마개가 열렸다.
거기에서 나온 것은 나의 영혼에서 영원한 찬양과 경배의 물결이었다. 열려진 찬양의 샘은 내가 그 샘물을 퍼마시려 할 때면 언제나 나의 갈 증을 깨끗하게 해갈시켜주었다. 나는 '나의' 경험을 다른 사람에게 권장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진리와 약속을 통하여 각 개인들에게 매우 특별하고 독특한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것은 무궁하신 그분 자신을 예배하는 예배의 본원에 우리 자신을 몰입시키고 영원히 하나님의 영을 찬양하는 것이며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의 마음과 몸을 통하여 구세주 예수와 천부의 사랑을 나타내는 가운데 우리 자신의 영과 연합할 재량을 행사하시도록 하는 것이다.
열줄 비파
어느 날 밤 기도회에서 한 노인이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우리가 열 줄 비파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다.” 기도회에 모인 사람들은 열 줄 비파가 무엇인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는 계속 기도했다.
“우리는 우리 눈으로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 귀로 오로지 주님의 음성만을 들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 손으로 주님을 섬김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 발로 주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감으로써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 혀로 주님의 인자하심을 간증함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우리 마음으로 오로지 주님만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찬양하겠나이다.”
우리는 열 줄 비파를 주님의 손에 두어서 주님께서 인생의 가락을 연주케 함으로써 가장 훌륭하게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우리 눈으로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께 우리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 우리 눈이 주님에 대한 비전으로 가득할 때 삶은 참된 의미와 목적을 갖게 된다. 우리는 우리 귀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때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손을 주님을 위해 사용함으로, 발로 주님을 위해 심부름을 함으로, 혀로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에 대해 이야기함으로.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을 찬양한다.
열 줄 비파―우리 삶―를 하나님께 맞추어서 그 분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 분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이다.
영원한 찬양
우리는 그 옛날 여리고에서 승리의 소리로 울려 퍼졌던 찬양의 외침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찬양은 언제나, 낡고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예비해두신 것을 계시해주는 새로운 시작이 되곤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늘의 거룩한 예배의 문지방에 있는 존영들 속으로 막 들어가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찬양은 금방 사라져버릴 일시적인 종교적 유행이 아닙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영원 속으로 이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5:8, 8:3) '성도의 기도'의 향기로 가득찬 대접과 향로를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기도'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또한 '예배'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성도들의 기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세대를 뛰어넘어 하나님 앞에 상달되었고, 향기로운 것이 되어 하나님 앞에 보존되어 있는 예배와 찬양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이 영원토록 천국에 보존되어 있는 예배와 찬양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찬양이 영원토록 천국에 보존되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보존하시고 선택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한정적인 삶속에도 영원한 그 어떤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구라는 이 혹성에서 놓여나 하나님의 어마어마한 천국으로 인도될 때,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은 아마 찬양에 대한 영감일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의 한가운데에 우리의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찬양을 끼워놓을 수 있습니다. 찬양은 영원합니다.
- 저드슨 콘월 (찬양) -
영혼의 평안
예수님을 참 사랑하던 변호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가족들과 유럽 여행을 계획하고 네 자녀와 아내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1873년 11월 15일 뉴욕을 떠나 유럽을 향해서 가다가 영국 근교 해협에 이르러 자욱한 안개 속에 앞을 향해서 오는 배를 보지 못하고 두 큰 배가 충돌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266명이 바다에 침수를 당했습니다. 그때 스탱포드 변호사는 자기의 네 아들을 물속에서 잃어버리는 비극을 경험했습니다. 가까스로 부인과 둘이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 수 많은 가족들이 모여듭니다. "힘을 내세요. 용기를 내세요"라고 위로하는 조객들에게 이 스탱포드 변호사는 한 마디로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내 영혼은 평안합니다." 조객들이 떠나간 후에 그의 마음속에서 영감이 솟기 시작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바로 이 찬송을 작사하게 된 것입니다. 환경이 빼앗지 못하는 평안, 나를 둘러싸고 있는 구름과 폭풍우가 빼앗아가지 못하는 이 기쁨이 있는 사람만이 폭풍우 다음에 벌떡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내일을 향해서 도전하며 걸어갑니다. 미래는 이 사람들의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위대한 성가를 많이 작곡했던 조셉 하이든은 훌륭한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이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는 영감을 어디에서 얻습니까." 하이든이 대답합니다. "나는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이 내게 지혜를 주셔서 내가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작곡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악을 주님 앞에 드릴 것입니다'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가 작곡한 곡 가운데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지 창조'입니다. 성경의 창세기와 존 밀톤의 '실락원'에 근거해서 그는 이 위대한 '천지 창조'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이 비엔나에서 공연하게 되던 날입니다. 그때 하이든은 몸이 몹시 아팠습니다. 그래서 이 위대한 곡이 공연될 때 그는 환자로서 뒤에 앉아 있게 되었습니다. 그 날 지휘를 하던 지휘자는 정말 놀랍게 이 음악을 하나님 앞에서 지휘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서서 지휘자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때 지휘자는 청중들의 박수를 중단시키면서 뒷좌석 발코니에 앉아 있는 하이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입니다. 저 분이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서 하이든을 바라보며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이든이 갑자기 청중들을 중단시키면서 말합니다.
"아니오." 그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왕에게 눈을 돌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골1:18)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죤 죠웨트 목사님은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참석했던 경험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왕의 존엄으로 가득 찼습니다. "고위층의 귀족들이 입장할 때마다 머리 굽혀 절하며 많은 경의가 표해졌습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왕이 도착했을 때 온 청중은 갑자기 조용해졌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눈은 왕에게 집중되었고 그보다 지위가 낮은 다른 저명인사들은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주목과 흥미를 끌지 못했습니다. 모든 신민들은 주의를 그들의 지도자인 왕에게 집중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생활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왕 중의 왕이시며 최상의 자리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믿음의 동역자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이 으뜸이 되셔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항상 주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을 뺏는 모든 활동으로-- 심지어 교회의 사역과 프로그램조차도--- 인해 우리의 눈을 주님으로부터 돌리기가 너무 쉽습니다.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왕 되신 예수님을 결코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하늘의 음성들과 함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요한계시록4:11)라고 찬양합시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지존자이십니다!
주님을 경배하고 그에게 그의 권리를
모든 영광과 힘과 지혜와 능력을
하늘의 천사들과 함께 모든 존귀와 축복을 드리세
그리고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을 감사하세.
우리들의 주먹질을 받음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사53:5)
저의 아들 스티비가 테이프에 실린 이야기를 듣는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옛날에 교실이 하나뿐이던 학교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어느 작은 아이가 큰 아이의 점심을 먹어버리고는 어려움을 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스티비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점심을 도둑당한 큰 학생이 점심을 훔쳐 벌을 받아야 할 나이 어린 학생을 대신해서 매를 맞겠다고 하는 장면입니다. [그가 나대신 매를 맞았다]라는 제목으로 되어있는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기꺼이 우리의 죄를 위해 벌을 받으시겠다는 예수님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점심때 제 아내는 세살반짜리 아들이 이 이야기의 영향을 받고 처음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이 좋은 날씨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한 예수님이 대신 맞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스티비가 점심을 먹기 전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 드렸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벌을 받고 돌아가신 것을 뜻했지만 그로서는 그런 어려운 말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소년으로서 주먹질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주먹질"을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것에 대해 기뻐했습니다.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겪으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를 읽을 때 스티비가 옳았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서 예언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상처받으시고 멍이 드셨습니다. 예수님은 채찍으로 매를 맞으시고 창피를 당하시고 심한 고문을 받으셨습니다. 정말 주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모든 벌을 쾌히 받으셨습니다.
주님을 찬양하세! 그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주먹질"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저에게 영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제 대신 죽으심을 감사합니다.
저의 벌을 대신 받으심을 감사합니다.
저에게 은총을 나타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명상: 예수님 손의 못자국은 사랑으로 충만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신다.
위대한 능력
1900년도에 중국에서 의화단이라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많은 선교사들이 핍박을 받고 죽어 갔습니다. 중국의 여기저기서 선교사들이 죽임을 당하며 산속으로 쫓기고 이 사람 저 사람의 집으로 피신하는 고통과 박해를 경험하면서 지치다 못한 글로버라는 선교사의 부인이 어느 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정말 살아계십니까? 나는 이제 하나님을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내가 당하는 고통의 모든 한계를 지나갔습니다." 동굴에 숨어 있던 다른 선교사들과 가족들은 글로버 부인의 이런 불평을 듣자 얼마나 기운이 떨어졌겠습니까? 그러나 그 옆에 게이트라는 유명한 선교사 한 분이 있었습니다.
이 선교사는 글로버 부인의 불평이 끝나자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성의 영역을 넘어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이 고통을 주시는 줄을 믿기에 제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진심으로 믿음이 있었던 이 선교사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찬양이 이상스럽게 선교사들을 핍박하던 순교의 행진을 그 순간 멈추게 하고 다시 중국 땅에 놀라운 하나님의 부흥을 가져오게 만드는 역사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증언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주님께 나아갈 준비
나폴레옹이 정복한 지역에 사는 어떤 사람이 아주 예사롭지 않은 부탁을 하기 위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사람은 나폴레옹이 정복한 영토 중 상당한 부분과 많은 사람들을 자기 관할에 붙여달라고 그에게 요청했습니다. 나폴레옹의 참모장은 그가 하는 요청 사항이 하도 터무니없는 것이어서 나폴레옹이 고려해보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기어이 나폴레옹을 만났습니다.
그와 몇 분간 대화를 나눈 나폴레옹은 막사에서 나오더니. 참모장에게 그 사람이 요청한 것을 다 들어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참모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어떻게 그런 엄청난 요청을 들어줄 수가 있는지 나폴레옹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폴레옹은
그는 엄청나게 큰 것을 요청함으로써 나를 찬양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폴레옹은나를 그렇게 위대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모른체 할 수가 없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찬양으로 채우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기꺼이 주고자 하시는 그분의 성품에 대해 올바른 시야를 갖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곰곰이 생각하며. 그분이 과거에 행하신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리고 나서 그분이 이미 행하신 것들로 인해 그분께 감사드리는 데 많은 시간을 들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커다란 요청 사항을 가지고 나아갈 준비가 된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하라
찬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칭찬하다, 찬미하다, 즐겁게 들어간다"라는 뜻이다. 찬양은 영혼의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노래다. 그러므로 찬양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칭송하며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찬양을 원하신다. 찬양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축복하심에 대한 감사와 예배의 반응이다. 사랑하는 창조주가 베풀어주신 여러 가지 은택에 대하여 피조물이 충심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경배
말로만 듣던 찬양 모임에 바로 오늘 내가 참석한다는 생각에 버스에 오르기 전부터 나는 이미 흥분되어 있었다. 도착하자 이미 그곳은 만원이었고 나는 보조 의자를 구해 앉게 되었다. 정말로 그 많은 젊은이들이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면서 기뻐했다. '찬양 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은 압도당했고 회개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나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오직 주님만을 높이며 찬양했다. 그때 내 앞에 있는 한 자매가 유난히 눈에 띄었다. 너무도 기뻐하며 손뼉 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 드리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저 자매는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찬양을 드릴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후 늦게 오신 한 아주머니가 자리가 없어 기웃거리다가 마침 그 자매 옆 자리가 비어있음을 보고 “저, 조금만 비켜주실래요”라고 하셨다. 그때 손을 들고 찬양하던 그 자매는 방해받은 것이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짜증스럽게 “아휴!” 하고선 아주머니를 본체만체하고 계속 찬양을 드리는 것이었다. 찬양 모임이 끝났다.
그러나 나는 그 자매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님께서 진정으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찬양은 어떤 모습일까? 주님은 분명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드려지는 그런 삶의 고백으로서의 찬양을 원하실 것이다.
찬란한 주의 영광(헨델 메시야)
오라토리오 <메시야>를 쓴 죠지 프레드릭 헨델은 많은 오페라를 작곡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몇 편의 가극이 실패하고 그의 라이벌 보눈치니의 쉴새 없는 공격으로 거의 파산지경에 봉착했을 때 "헨델은 이제 끝났다"는 소문이 런던에 파다하게 돌고 있었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 작곡한 것이 <메시야>이다. 그는 불과 23일간 기도하다가 작곡하고 작고하다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엄청난 일을 해낸 것이다. 그의 행운이 쇠퇴한 때요, 소생의 가망이 없다고 하던 때에 그는 영력의 호스를 하늘에 꽂고 계속 능력을 공급해 달라고 울부짖었다.
그가 합창곡 제 44번 <할렐루야>의 작곡을 완료했을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고 "내 앞에 천국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나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았다. 오! 주여, 주여-"라고 외쳤다.
그리고 모든 악보를 완성한 후 "오, 하나님이 나를 찾아오셨구나."라고 함
찬송
한국 전쟁이 낳은 일화 중에 [노래하는 헌병]이 있다.
주인공은 미 해병 제5연대 F중대의 셜츠하사이다. 그는 수시로 찬송을 불렀다. 노래를 썩 잘 부르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의 찬송을 듣는 군인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다.
어느 날 밤 개인 참호에서 보초를 보다가 유격대의 습격을 받아 총을 맞았다. 갑자기 조용하던 밤이 사나운 총소리로 깨졌다. 그 한가운데에 조용한 찬송이 울려나오고 있었다.
셜츠 하사가 죽어가며 부르는 찬송은 "저기 갈보리 산 험한 십자가"였다. 놀라운 것은 침입했던 적군이 이 노래가 끝나기 전에 모두 도망쳤고 오히려 습격 받은 해병들은 용기백배하였다는 것이다. 5연대의 군목이 셜츠 하사를 회상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의 찬송은 정말 신비한 힘이 있었다. 목청은 과히 좋지 않았으나 정성을 다해 간절히 부르는 그의 찬송을 들으면 무한한 용기와 위로를 받았었다"
찬송의 능력
1870년 크리스마스 때는 독불 전쟁 중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도 양군은 서로의 진지 속에서 한동안의 총격전을 치른 후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병사들은 참호 속에 누워서 반짝이는 크리스마스의 별을 바라보며, 고향의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우리는 서로 싸워야만 하는가?' 그들은 추위와 바람 속에서 긴장을 풀지 못한 채 크리스마스의 밤을 지새우고 있었습니다.
그 때 프랑스군의 참호에서 한 병사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테너의 음성으로 [오 거룩한 밤]을 노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 거룩한 밤, 별들 반짝일 때 거룩한 주 탄생한 밤일세.
오랫동안 죄악에 얽매여서
헤매던 죄인을 놓으시려
우리를 위해 속죄하시려는
영광의 아침 동이 터 온다.
경배하라! 천사의 기쁜 소리,
오! 거룩한 밤, 주님 탄생하신 밤,
그 밤, 주 예수 나신 밤일세."
아기 예수를 향한 찬송은 전선의 밤하늘을 은혜롭게 퍼져 나갔습니다. 독일 병사들은 깜짝 놀라 총을 겨누었지만 어느 누구하나 총을 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불란서 병사의 찬송이 끝나자, 이번에는 독일군 참호 속에서 바리톤의 굵은 음성이 들려 나왔습니다. 그가 부른 노래는 루터가 작사한 [하늘 위에서 땅으로 내가 왔노라(Form heaven above to I come)]라는 곡이었습니다.
찬송하라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 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찬송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요 인간의 슬픔을 치료하는 최대의 양약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사람은 음악을 알고 음악에 대하여 흥을 발할 줄 아는 동물임을 볼 수가 있다.
음악을 틀어놓고 일을 하면 능률이 오른다. 음악을 틀어놓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이 음악의 근원은 기독교적 종교음악에 기인한다.
하나님은 전쟁터에서도 군대와 무기를 찾지 않으시고 비파(음악)를 찾으셨다.
굿모닝 베트남이란 영화에서 보았더니 월남전에 참전한 군인들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팝송을 듣고 사기충천한 것을 보았다.
요즈음 농촌에서는 젖소의 외양간에도 음악시설을 갖추어 놓고 밤새껏 노래를 틀어준다. 음악을 틀어 놨을 때는 젖소의 젖이 잘나오고 양적으로도 많이 나오는데 음악을 안 틀어노면 젖의 양과 질이 저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밤새도록 불을 밝히고 음악을 틀어놓는다.
괴롭거나 실망될 때에는 잊지 말고 찬송을 불러야 한다. 찬송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난 후에는 우리에게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사도행전 16장 25절에는"하나님을 찬미함에 죄수들이 듣더라."라고 했다.
찬송하리로다 엡 1:3-3-14
`찬송하리로다'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신 그 복에 대한 최고 최선의 성도의 응답이다. 성도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임을 가르쳐 준다.
1. 성부 하나님의 택하심을 찬송함
본문 3-6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찬송함에 대한 이유로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말씀하고 있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것과 `그 기쁘신 뜻대로'라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서 나온 것이며 그것은 성도를 거룩케 하심과, 성도를 자기 아들 되게 하심에 있음을 밝혀 주고 있다. 이 얼마나 놀랍고 크신 신령한 복인가! 그러므로 성도는 목숨을 다할 때까지 찬송으로 그 영광을 높이 돌려야 할 것이다. 찬송은 택함 받아 거룩케 된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에게 주어진 특전임과 동시에 또 삶의 목적이다.
2.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찬송함
본문 7-12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을 찬송하라고 말씀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곧 그의 피로 말미암은 죄사함이다. 택함 받은 모든 성도들의 죄 사함을 위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 곧 그의 주권적 의지에 근거한 예정에 의한 것임을 9절, 11절에서 강하게 말씀해 주고 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 라고 기도하셨다. 우리를 속죄하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보혈을 찬양해야 한다.
3. 성령 하나님의 인치심을 찬송함
본문 13-14절에서 성령님의 사역을 말씀하는데 성도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듣게 하시고 또 믿게 하시어 기업의 보증으로 인을 치시니 이것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령의 사역이시다. 성령의 역사, 곧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받게 하심은 불가항력 적인 은혜이기에 구원받은 성도는 찬송이 저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자. 나의 구원을 확신하는가? 구원받은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감격한 삶을 살면서 찬미의 생활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찬미의 제사가 아니면 우리는 입술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히13:15).
찬송 한 장 성경 석장
성경 속에는 음악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노래도 있고 악기도 있고 성가대도 있고 전문 음악 용어들까지 있다. 음악들이 점점 퇴폐적으로 흐르고 있는 이때 성도는 신령한 노래와 찬미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성도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찬송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힘을 얻었으며 때로 자신들의 감정을 찬송을 통해서 표현했다. 사람들이 자꾸 완악해져 가는 이면에는 나쁜 음악의 영향도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성도는 좋은 음악을 사랑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한다.
좋은 음악을 자꾸 듣다보면 마음속이 깨끗이 청소되어 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우리의 마음속에는 생활의 찌꺼기들이 쌓여 진다. 이것을 깨끗이 소제해 내는 데는 무엇보다 좋은 책과 좋은 음악의 힘을 빌려야 한다. 성도는 성경과 찬송이 있어서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성경과 찬송은 영혼 깊숙이 숨어 있는 어두움까지도 깨끗이 일소 시키는 능력이 있다.
사람은 생활하는 동안 습관이 자신의 생활 속에서 생기게 된다. 습관은 하루아침에 만들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습관이 몸에 밴 후에는 좀처럼 버리기 어렵다. 좋은 습관을 많이 가진 사람은 자연히 그 삶이 발전적이다. 반대로 나쁜 습관이 많이 가진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생활이 많이 파괴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우리가 가져야 할 습관 중에 꼭 필요한 습관은 책을 읽는 습관과 좋은 음악을 듣는 습관이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나 아무리 좋은 책이 있다고 하더라도 습관화 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것이다. 주님은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가셨다고 했다. 좋은 습관을 가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삶이란 이미 만들어진 습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며 우리 삶 또한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하루에 찬송 한곡 부르기 운동과 성경 석장 보는 훈련이 습관화 되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는 마음을 가질 때가 많다. 육신의 자식을 키우면서도 자녀들이 노래하고 책을 읽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큰 즐거움이 부모에게 또 어디에 있으랴!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러한 본을 자녀들에게 하나도 보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 더 나아가서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모습을 보여 드리는 생활을 못하고 있다. 아이들의 눈에 비친 부모의 모습 중에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는 모습보다 더 훌륭한 본이 어디에 있으며 더 훌륭한 교육이 없을 것이다. 집집마다 책들은 책장에서 잠자고 영혼을 향한 메시지는 없고 마음을 자극하는 소리들로 가득하다.
늘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대문을 출입하며 늘 찬송하는 발걸음으로 거리를 걸어야 한다.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맑고 깨끗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오늘 하루도 음악이 있는 하루가 되게 하시고 말씀이 있는 하루가 되게 하소서! 오른손에는 말씀의 의지를 들려주시고 왼손에는 찬송의 감정을 안고 사는 이 하루가 되게 하소서!
찬송했던 아내의 덕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파사디나에서 세상을 떠나신 옥호열 선교사님은 6.25 때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군목으로 계시면서 북한의 인민군 포로들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저녁 식사 후 막사를 한 바퀴 돌다가 화장실에서 어떤 포로 청년이내가 죽일 놈이지. 내가 죽일 놈이지하며 울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청년. 나는 아시다시피 여기서 여러분을 돕기 위해 있는 군목인데 무슨 사정이 있으면 이야기하시오. 내가 도울 테니라고 말하자. 이 청년은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북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한 아내가 어떻게 예수님을 진실 되게 잘 믿는지 나는 마음이 상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한번은 아내를 찾으러 교회에 갔는데 예배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보란 듯이 신발을 신고 뚜벅뚜벅 들어가 제 아내의 머리칼을 휘어잡고서 예배당 뜰에서 한참 때려주었습니다. 그래도 한 번도 반항하지 않더군요. 이상한 것이 다른 말은 제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내는 아내인데, 교회 나가지 말라는 말은 전혀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인민군에 징집이 되어 전쟁을 하다가 유엔군에게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 미군 장교가 나오더니 우리 포로들을 한 줄로 세우고 뭐라고 말을 하면서 손짓을 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을 골라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살고 싶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제 차례가 되었는데 가슴에 십자가를 그렸더니 노래하라고 손짓을 하지 않겠어요.
그런데 제가 찬송가를 압니까. 갑자기 머릿속에 제 아내가 저한테 매 맞고 부르던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그저 살기 위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O.K.하면서 저를 따로 세워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지금은 예수님을 내 구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구원받게 된 것은 제 아내의 찬미 때문이었습니다.
찬양(웨슬리의 마지막순간)
1791년 3월 1일 화요일,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마지막 날, 어디 아프냐고 물으면 그는 "아니"라고 대답하였으며 꼭 한번 그가 숨을 내쉴 때 왼쪽 가슴이 결린다고 한 외에는 그 아픈 중에서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는 찬송을 부르기 시작 하였다.
모든 영광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그리고 땅 위에는 평화가 깃들고 두 마디를 부르고 기력이 쇠진해 누워있어야 했다.
오전에 그는 "일어나겠다"고 하였다. 그의 일이 차차 준비되어 가고 있는 동안 그는 그처럼 약한 가운데서도 우리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축복의 말씀을 하였다.
숨 쉬는 동안 나를 지으신 이를 찬양하리. 또한 내 목소리가 죽음 속으로 사라지는 때에도 나의 숭고한 힘을 다하여 찬양하리. 생명과 생각과 존재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죽지 않는 시간 속에서도 내 찬양의 날은 끝나지 않으리니 이것은 우리의 존경하는 자애스런 아버지께서 씨티 로우드채플에서 우리에게 들려준 마지막 말씀이었다. 즉 화요일 저녁 "우리는 오로지 성령을 기다린다." 는 말씀 등으로 설교하기 전에 하신 말씀이었다.
찬양
웹스터 사전(Webster's Dictionary)에 의하면, 찬양이란 말은 '칭찬','찬미', '존경', '환호' 그리고 '특별한 인정'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찬양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하여 우리들이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이며 또한 특별한 인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인정하고 있는 것을 용납하며, 그것과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질병과 재난 같은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생활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이 우리들의 생애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될 일들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에 대한 기쁨이 없이는 진정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찬양이란 감사와 기쁨 양면을 포함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운명의 여신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사실은, 우리들의 생애 가운데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데 대한 우리들의 긍정을 의미합니다. 그렇지 않다면,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의미를 상실하게 됩니다.
찬양의 낱말 뜻
1. 히브리어
자마르 - 기본어근 ; 본래 의미는 악기의 현이나 부분을 `만지다', 즉 `연주하다', 음성에 맞추어 음
악을 연주하다', 따라서 노래와 음악으로 축하하다 - 찬양하다, 찬송하다, 성 가, 시.
쉬르 - 추상적으로 `노래함' - 음악의(음앙적인), 노래하다(노래하는 사람, 노래함), 곡.
2. 헬라어
아이네오 - (하나님을)`찬양하다', `찬양'(롬15:11)
에파이노스 - `칭송'(구상명사) `찬양할만한 것',찬양
찬양의 의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은 인간의 적절하고도 올바른 임무이다
상원 의원이었던 로버트 케네디가 브라질을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는 부족의 처지를 보기 위하여 내륙지대를 여행하였다. 로버트 케네디는 한 인디언을 소개받았다. 그런데 그 인디언은 그리스도를 믿은 지가 별로 오래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로버트 케네디는 그의 통역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을 가장 즐겨하는지 물어 보세요."
그 때 놀랍게도 그 인디언은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로버트 케네디는 그 인디언이 자기의 질문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줄로 생각하였다. 그 인디언의 대답은 고기 잡는 일이나 혹은 사냥하는 일 따위의 어떤 일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그 인디언은 지금에 있어서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었기 때문에, 그의 삶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찬양으로 승리의 삶을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대하 20:16)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출14:14)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여호사밧 왕은 적에게 포위되어 사면초가가 되었을 때 성가대를 조직하여 찬송을 부름으로 적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어떠한 난관이라도 기도하고 찬송하며 주를 기뻐하면 승리할 것이다.
찬양하는 자의 결과
욥1:21 - 영광이 하나님께 돌아감
시22:26 - 마음이 영원히 살찌게 됨
시40:3 - 많은 사람이 주를 의지함
시56:4 - 두려움이 없어짐
욜2:26 - 영원히 수치를 당치 아니함
행2:47 - 구원받는 자를 날마다 더하게 하심
행16:25-30 - 옥문이 열리고 간수가 회개함
천지창조
오스트리아의 하이든은 <천지창조>와 같은 오라토리오 <종교적 아극>를 발표한 위대한 작곡가이다. 언젠가 그의 교회음악이 어쩌면 그렇게 감동적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는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면 풍성한 기쁨으로 인해 곡조들이 춤추듯이 떠오르며, 그러면 나는 펜을 움직여 용서받은 기쁨과 감사하는 영혼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음악을 작곡합니다"라고 말했다.
하이든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아름다운 오라토리오를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고의 기도
저는 찰스 웨슬레가 지은 어떤 찬송시를 참 좋아합니다. 그것은 “놀라운 사랑”이라는 찬송 시입니다. 그 찬송시가 담고 있는 내용이 얼마나 은혜스러운지요.
“하나님. 당신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하나님. 벌레 같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합니까.”
웨슬레는 이 찬송을 부를 때마다 벅찬 감격으로 차서 뜨겁게 불렀습니다. 그의 마음이 뜨거웠기 때문에 이 찬송을 불렀다기 보다도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와 같이 사랑해주셨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뜨거운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자 하나님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히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오십시오. 주님의 십자가 밑에서 성경을 펴들고 주님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영의 눈을 열고 깨달으십시오. 그 다음에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세요. 그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부어주신 사랑을 뜨겁게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랑이 마음의 빈 곳이 없도록. 가득히 채우고 넘치는 자리까지 이르도록 기도하세요. 가장 최고의 기도는 바로 이것입니다.
“주여. 다른 것 다 없어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흠뻑 젖게 하옵소서. 주여. 다른 것 주시지 않아도 좋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으로 행복할 수 있게 하옵소서.”
최영민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상계백병원 신경정신과 교수)
민군은 고등학교 졸업반 학생이었다. 고 3이 시작되면서 생긴 두통은 4개월이 넘게 지속되었고, 소화도 안 되고 불면증까지 생겼다. 좋은 목소리를 가졌고 노래를 썩 잘하는 민군은 음대에 진학을 하여서 성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막노동을 하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부모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하기를 원했고, 민군이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그 길 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성적이 중상위권에 속하는 민군의 고통의 원인은 일반적인 고 3병과는 다른 면을 가지고 있었다. 시험의 압박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음대를 가지 못하고 성악가가 될 수 없다는 좌절감이 민군을 괴롭히고 있었다.
좋은 소질을 갖고 있는 민군이 음대를 진학하려는 것은 사실 정당한 바람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정당한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분노와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런 좌절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환경 때문에 비롯되었을 때,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니다. 민군도 이런 고통이 지속되면서 두통과 소화불량 그리고 불면증까지 초래하게 된 것이다.
민군으로 하여금 우선 가족에 대한 실망과 균등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고 발산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였다. 더구나 민군의 가정형편이나 사회적 여건이란 쉽게 변경된다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치료자: 왜 꼭 성악가가 되고 싶은 거지?
민군: 성악가가 되지 못한다면 나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다.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받은 달 란트는 노래를 잘하는 것이다. 성악가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해 본적도 없다. 무대 위에서 노 래를 부르고 싶다. 많은 사람들에게 노래의 아름다움 을 전하고 싶고 또 그들로 부터 환호도 받고 싶다.
성악가가 되고자 하는 민군의 바람은 집요하였다.
치료가 진행되면서 유명해져서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는 성악가가 되고자 하는 민군의 집요한 욕망 속에는 막노동꾼이라는 그의 아버지의 직업에 대한 열등감을 보상하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심리 때문에 민군은 그가 받은 달란트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어떻게 사용할까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그의 열등감만을 보상해 주는 것으로서 즉 환호를 받는 수단으로 주로 노래를 해왔던 것이다.
상당 기간의 치료과정을 통하여서 자신의 이러한 심리를 이해한 후에야 민군은 그의 내면의 열등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로소 그가 받은 달란트의 참된 의미를 알게 된 것 같았다.
치료자: 성악가가 되지 못한다면 민군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을까?
민 군: 성악가가 되고 안 되는 것이 내 인생의 전부는 아닌 것 같다. 그동안 성가대에서 노래를 할 때도 사실 타인을 의식하며 내가 노래를 잘한다는 어떤 우월감 같은 것을 느끼느라 노래 속으 로 깊이 빠지지 못하곤 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 노래하는 것이 즐겁다.
졸업 후 취직하면 직장 합창반을 만들겠다. 비록 성악가가 되어 무대에 서진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있는 직장에서 노래를 즐겁게 부르겠다. 그리고 노래를 통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음악의 아름다움을 나누겠다. 아마 그런 삶이 하나님이 허락하여 주신 나에게 의미있는 삶인 것 같다.
그동안 나는 나에게 의미 있는 삶을 살려 하기보다, 나의 열등감을 감추고 지우려는 투쟁을 해 온 것 같다. 내가 가진 노래의 달란트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에 맞게 잘 써보라고 이 세상 살 동안 잠시 나에게 맡겨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타이타닉 호 사건
1912년 [타이타닉 호]라는 유명한 여객선이 대서양을 항해하고 있었다. 당시로서 사상 제일 크게 건조된 호화선이었다. 이와 같이 유명한 배가 처음으로 대서양을 횡단하게 되니 유럽과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이 이 배에 많이 탔다. 불행히도 이 배가 대서양에서 빙산에 부딪쳐 침몰하기 시작했다. 구명정 몇 개를 풀어 어린 아이와 부녀자들을 먼저 구하였으나 여객의 대다수는 구할 길이 없었다. 배는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승객들은 정신을 잃고 불안과 공포 가운데서 갑판에 나와 아우성을 쳤다. 그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가? 그 배에 타고 있던 악대가 정복을 입고 각각 악기를 들고 갑판 가운데 나섰다. 그 아우성 속에 꼼짝하지 않고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서 한곡, 두 곡 위대한 곡을 계속 연주하였다. 마지막에 찬송가가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모든 승객은 악대의 연주에 맞춰 찬송가를 입에 모아 부르며 물속에 잠겨갔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야곱이 잠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 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마지막 절을 부르면서 물속에 잠겨가던 승객들은 죽음의 공포도 잊은 채 하늘을 향해서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나님은 찬양
지금 당신은 궁지에 몰려 잇습니까? 그런 일들이 왜 자신에게 일어나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알려고 발버둥쳐 보았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시며 또한 그런 상황들이 당신에게 유익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허용하셨다는 사실도 지혜롭게 인정해 보십시오.
찬양이란 매매적인 행위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여, 내가 주를 찬양하오니 주는 나에게 복을 주옵소서"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의 마음에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 주시리라"(시37:4).
헨델의 믿음
미국 보스턴 시에는 헨델과 하이든회라는 것이 있어서 150년간을 계속해서 보스턴에서 연극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얘기를 실었던 타임지가 계속해서 헨델이 “메시야”를 쓸 때의 얘기도 조금 썼는데. 이때 헨델이 런던의 어떤 집에 들어가서 23일간을 조용히 방에 앉아서 두문불출하고 하나님을 묵상하며 영원한 나라를 묵상하는 가운데서 이 메시야를 썼다고 합니다.
그 메시야를 쓰는 동안에 어떤 날 한 번은 그 집의 일꾼이 들어가니까 헨델의 두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하면서 울고 있기에 그 일꾼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묻자, 헨델이 대답하는 말이
하늘이 내 앞에 열렸다고,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 자신을 내가 뵈었다고 하였답니다.
헨델은 그런 위대한 작곡을 하기 전에 하늘을 보았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면한 것입니다.
헨델의 할렐루야
브루크 가(Brook Street)에 있는 한 작은 런던 하우스 안에서, 어떤 하인이 음식이 잔뜩 올려져 있는 쟁반을 정리하면서 체념한 듯 한 숨을 쉬고 있다. 그는 주인이 이번에도 그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일주일이 넘도록 그는, 독방에서 혼자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괴짜 작곡가인 주인을 충실하게 계속 시중들어왔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때 그 하인은 구미가 당길 만한 맛있는 식사를 준비하여 그 작곡가에게 갖다 주지만, 나중에 다시 가보면 그릇들과 접시들이 대부분 손도 대지 않은 상태로 있기 일쑤다.
음악가들이란 참 이상하리만큼 신경질을 잘 내는 사람들이라고 숨죽여 중얼거리면서, 다시 한 번 그 하인은 마음을 강하게 먹고 전과 똑같은 작업을 한다. 그 하인이 작곡가의 방문을 홱 열어젖혔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만다.
무척 놀란 얼굴을 한 작곡가가 얼굴에 눈물이 철철 흐르는 채로 하인을 향하여 소리 지른다.
"나는 내 앞에서 펼쳐지는 천국과 거기 계신 위대하신 하나님 그 분을 뵈옵는 것 같았어."
죠지 프리데릭 헨델은 역사상 "할렐루야 합창"으로 자리매김 될 곡 쓰는 일을 막 끝내었던 것이다.
확신이 주는 힘
영국에 래클 경은 해마다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헨델의 메시아를 연주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연습이 다되면 연주일 전에 오케스트라와 총연습을 했습니다.
한번은 메시아 오라토리오 중에 절정이라고 볼 수 있는 할렐루야 합창 후에 나오는 소프라노 아리아 “내 주는 살아계시고”라는 곡을 소프라노 가수가 부르는데 정확한 음정과 박자. 아름다운 음색과 감정표현 그리고 적절한 호흡을 조절해 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많은 청중이 “야. 참 잘한다.”하면서 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래클 경이 갑자기 지휘봉을 멈추고 노래를 중단시켰습니다. 노래 부르던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오케스트라 단원들. 심지어 관중들까지 놀라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로 마주보았습니다. 이 때 래클 경이 소프라노 가수에게 “너. 정말 내 주가 살아계신 것을 믿느냐.” 그 때 이 가수가 그런 것을 생각이나 했었겠습니까. 너무 뜻밖의 질문이라 그저 당황해서 “예. 예.”하며 대답했습니다.
래클경은 “그러면 다시 불러” 하면서 지휘를 시작했습니다. 이 때 소프라노 가수는 음정. 음색. 호흡. 박자. 감정 같은 것을 생각할 여지도 없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내 주는 살아계시고.” 이 노래를 듣고 많은 청중들이 아까는 “참 잘한다.”고 생각하며 노래를 들었는데 이번에는 너무너무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들었다고 합니다.
꼭 같은 사람이 꼭 같은 노래를 불러도 확신을 가지고 부르는 노래가 이처럼 감동을 준 것입니다. 확신에는 힘이 있습니다.
모든 고통도 절망도 딛고 일어설 힘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