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 음 소 주
최 화 웅
백로와 추석이 지나자 하늘은 드맑고 푸르다.
나는 무덥던 지난여름 내내 얼음소주를 마시며 쳐진 기운을 추스르곤 했었다. 얼음소주는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다. 맥주잔에 얼음을 채우고 그 위에 소주를 넘치도록 부으면 얼음소주는 완성된다. 얼음소주는 소주에 얼음 몇 알을 띄우는 게 아니라 잔에 가득 채운 얼음을 소주로 천천히 녹이며 마시는 것이다. 그때 쓰는 얼음은 큰 덩어리에서 깨낸 조각얼음이나 잘게 부순 것보다 냉동실에서 잘 얼린 적당한 크기의 질 좋은 각얼음이 그만이다. 한 더위 때는 얼음도 귀했다. 식당에 들어서면서 먼저 얼음이 있느냐고 물어야 하고 단골음식점에 가서도 얼음을 청하기에 눈치가 보이고 구차할 때가 있었다. 여의치 않을 때는 인근 수퍼나 편의점에서 봉지얼음이나 컵얼음을 사기도 한다. 그게 속 편했다. 400원 하는 컵얼음은 양도 적을뿐더러 얼음이 잘아서 빨리 녹는 바람에 소주 한 병을 마시기기가 어렵고 네댓 명이 어울릴 때는 1,100원하는 1.2Kg짜리 봉지얼음이면 넉넉했다. 운이 좋을 때는 얼음에 레몬까지 썰어다 주는 후덕한 주모를 만나기도 했다. 얼음소주는 17도 미만의 순한 소주로 만들어야 맛이 좋고 마시기가 수월하다. 차고 그윽한 얼음소주는 같은 재료지만 만드는 사람의 솜씨와 이를 함께 지켜보면서 즐길 수 있는 일행의 마음 씀씀이가 그 맛을 결정한다. S형이 처음 주창한 얼음소주를 마시게 되면서 제조를 내게 맡겼다. 시원한 해풍에 윤슬 눈부신 광안리 해수욕장을 한눈에 바라다 볼 있는 창가에서 얼음소주를 마시는 백수들의 출신과 면모는 다양하다. 내년이면 팔순인 광안동의 C형을 큰형님으로 고희를 한참 넘긴 반여동의 K형, 남천동 터줏대감 P형과 S형 등 줄잡아 십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24시간이 자유로워 청년보다 아름답고 화려한 노년을 보낸다. 한가롭게 얼음소주를 마시다가도 세상을 보는 제 나름의 시각과 견해로 뜨거운 논쟁을 마다하지 않는 고집과 성깔도 있다. 얼음소주는 점심 반주로 한두 잔이면 적당한데 드물게 술벗이 모이는 저녁 술시에 맞추어 분위기가 뜨면 대여섯 잔을 넘게 마시는 날이 있었다. 얼음소주 대여섯 잔을 마시면 소주 두병가까이 마시는 셈이다. 대화가 열려 잔속의 얼음이 다 녹을라치면 거의 냉수가 된 얼음소주로 시원하게 목을 축일 수 있다. 삼복더위에 목줄기를 타고 가슴 속으로 흘러드는 얼음소주는 좌절을 딛고 일어서는 새로운 반란의 조짐을 엿보이기도 한다. 찌는 더위에 얼음소주를 담은 맥주잔에 이슬이 맺혀 흐를 때쯤이면 내 몸에 달라붙은 더위는 한걸음 물러선다. 무엇보다 얼음소주는 착한 비용에 부담이 없어서 좋다. 얼음소주는 맑고 투명하다. 그 투명함 속에서 자신을 만나 숙연해지기도 하고 지난날의 회상에 젖으면 스스로 부끄러워질 때도 있다. 나이 탓인지 얼음소주를 마시는 자리에서도 간혹 밑도 끝도 없는 그리움과 고독을 느낄 때가 있고 이루지 못한 아쉬움이 잔잔한 슬픔으로 스친다. 그럴 때면 거침없는 나그네의 심정이 되어 이내 젊은 날 벗들과 어울려 목이 쉬도록 노래 불렀던 옛 추억이 되살아난다. 양명문의 시 ’명태‘는 “어떤 외롭고 가난한 시인이/ 밤늦게 시를 쓰다가/ 소주를 마실 때/ 그의 안주가 되어도 좋다/ 그의 시가 되어도 좋다”는 해학적인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기꺼이 안주가 되고자 했었다. 양중해의 시 ’떠나가는 배‘에서 “저 푸른 물결 외치는/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님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 남겨두고/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라고 외쳤던 기억은 이 나이에도 이별의 서러움이 온몸을 휩싸고 돌아 감상에 젖곤 한다.
모든 종류의 술은 마시는 만큼 취한다.
술은 마시는 만큼 취하고 취하는 만큼 흥겨워서 세상만사 다 잊는다. 술은 삶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즐기게 해준다. 그래서 술은 자신을 무와 무의미 앞에 맞닥뜨리게 한다. 술의 힘은 마음의 빗장을 풀어 사랑과 자유에 대한 갈망과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얼음소주는 2% 부족한 마음을 열어 자신을 접고 다른 이에게 다가서게 하는 소통과 교감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 2% 부족이라는 광고문구는 원래 스코틀랜드에서 위스키 원액을 오크통에 담고 밀봉해 12년 동안 숙성시키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양을 말한다. 사람도 나이 들어 갈수록 2%가 모자라고 숙성된 위스키향을 풍겼으면 얼마나 좋을까? 얼음소주 또한 오늘도 서산마루에 걸린 노을처럼 나를 물들이려고 한다. 기분 좋을 정도로만 술을 마시면 더위에 지친 심신에 기운을 불어넣고 자신을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훨훨 날게 한다. 마심과 취함은 전혀 다른 개념으로 짝지어져 있다. 그러나 마심과 취함은 접속사 ‘과’로 이어져 있어서 이 두 개의 개념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마심과 취함은 실과 바늘처럼 연결되어 있다. 술은 기쁨의 이유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해보면 무심코 마시는 한 잔의 소주에도 문화의 숨결과 아픈 역사가 배어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소주는 두 종류다. 그 하나는 증류식소주로 고려 말 몽골침략이 남긴 흔적이고 희석식소주에는 일제식민통치라는 시련과 고통의 흉터가 남아 있다.
나는 무덥던 지난여름 얼음소주를 마시며 지루한 일상탈출을 시도하곤 했었다.
일상을 깨뜨리고 싶은 욕망은 엄마의 젖꼭지를 문 애기의 몸부림 같았다. 얼음소주잔을 비울 때는 “쪼옥~ 쪽”하는 전복의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만큼 얼음소주는 맛있다. 술독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항상 술에 저려 있는 상태를 고주망태(高柱網殆)라고 했던가? 술은 넘쳐흐르기 쉬워 함부로 마시다간 망실수가 들거나 망신살이 뻗힐 수도 있다. 사람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주신(酒神)을 둘 만큼 술과 가까이 살았다. 행복한 무절제를 수반하는 술의 즐거움에 빠져들다 보면 때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대취하면 유혹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취함은 쉬고 비움, 차가움과 따뜻함, 좋고 싫음, 기쁨과 슬픔, 옳고 그름, 허식과 불안, 교양과 야만, 현실과 환상, 울분과 용서, 심지어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술의 신화, 종교적 상징성과 철학적 의미가 넓게 자리잡는다. 술을 마시는 만큼 우리의 삶이 존재의 미학으로 승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귀한 술을 통해 이 가을도 우리의 열망이 충만한 삶으로 이어지고 드높은 사랑과 의(義)로운 우정을 쌓아갔으면 좋으련만... 어느 틈에 창가에는 가을하늘이 흐르고 별빛 외로운 밤하늘에는 기러기 떼가 스친다.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저도 얼음 소주를 한 번 마셔보아야 겠습니다..^^*
선생님 애주가 시군요. 더울때 얼음 소주라도 취하면 더 더울것 같습니다.한번 먹어보겠습니다.
맛 잇을 것 같은데요. 특히 저 같이 술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도마+루시아 부부님! 얼음소주는 분명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약할 것 같은 얼음소주도 많이 마시면 취합니다. 디오니소스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술 이야기는 '술꾼'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존재와 관련된 문제가 아닐까요? 술의 종교적 상징성은 그리스도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첫 번째 기적이 웅변적으로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성혈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습니까? 포도주의 상징성은 우리의 믿음 속에 그리스문명보다 더욱 깊숙히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술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봅니다. 술은 생각 저편에 유토피아를 그립니다. 감사합니다.
'얼음 소주'가 저를 유혹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