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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구사론 제15권
4. 분별업품 ③
[별해탈과 정려와 무루의 성취]
이러한 별해탈과 정려와 무루의 세 가지 율의는, 그러한 근거에 따라 한 가지를 획득하면 그 밖의 두 가지도 획득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1)
그렇지 않다.
어째서 그렇지 않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체와 두 가지와 현재에 따라
욕계의 율의를 획득하며
근본업도와 항시(恒時,즉 3세)에 따라
정려와 무루율의를 획득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율의란 별해탈율의를 말하는데, 이것은 일체의 근본업도(根本業道)에 따라, 그리고 가행(加行)과 후기(後起)에 따라 획득된다.2)
‘두 가지에 따라 획득된다’고 함은, 이를테면 두 가지 유형에 따라 획득된다는 뜻으로, 유정과 비유정, 성죄와 차죄가 바로 그것이다.3) ‘
현재에 따라 획득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현세의 온ㆍ처ㆍ계에 따라 획득되고 과거와 미래의 그것에 따라서는 획득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즉 이 같은 율의는 유정과 유정처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과거와 미래는 바로 유정과 유정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4)
그러나 만약 정려율의와 무루율의를 획득하는 경우라면, 그것은 다만 근본업도에 따라 획득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5)
나아가 이 같은 두 가지 율의는 그러한 가행과 후기에 따라 획득되지 않거늘 하물며 차죄(遮罪)에 따라 획득될 것인가?6)
그리고 ‘항시에 따라 획득된다’고 함은 이를테면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온ㆍ처ㆍ계에 따라 획득된다는 뜻이다.7)
나아가 이러한 차별(즉 율의의 획득이 동일하지 않은 차별)에 따라 마땅히 4구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온ㆍ처ㆍ계는, 그것에 따라 오로지 별해탈율의만을 획득하고 그 밖의 두 가지 율의는 획득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하는 따위가 바로 그것이다.
즉 제1구는 이를테면 현세의 가행과 후기 및 온갖 차죄에 따르는 경우이다.
제2구는 이를테면 과거ㆍ미래의 근본업도에 따르는 경우이다.
제3구는 이를테면 현세의 근본업도에 따르는 경우이다.
제4구는 이를테면 과거ㆍ미래의 가행과 후기에 따르는 경우이다.8)
선(善)의 율의를 바로 획득하는 때에는 현세의 악업도 등이 있을 수 없다. 그
렇기 때문에 마땅히 현재 [업도의] 소의처[處]에 따라 획득된다고 말해야 하는 것으로, 이치상 다만 미래의 [악계만을] 방호한다고 설해야 하지 결정코 마땅히 과거ㆍ현재의 그것을 방호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9)
1) 율의ㆍ불율의를 획득하는 것
모든 유정은 율의와 불율의를 획득하는 데 일체의 유정과 갈래[支]와 근거[因]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인가,10) 그렇지 않은 것인가?
여기에는 결정코 차이가 있다.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율의는 온갖 유정에 따라 획득되지만
갈래와 근거는 일정하지 않다고 설하며,
불율의는 일체의 근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일체의 유정과 갈래에 따라 획득된다.
[율의를 획득하는 것]
논하여 말하겠다.
율의는 결정코 일체의 유정에 따라 획득되는 것으로, 일부의 유정에 따라 획득될 리가 없다.11)
[본송에서] ‘갈래[支]와 근거[因]는 일정하지 않다’고 하였는데, ‘갈래가 일정하지 않다’고 함은 이러하다.
즉 [온갖 율의 가운데] 일체의 갈래에 따라 생겨나는 것은 이를테면 필추율의이며,
네 가지의 갈래에 따라 획득되는 것은 이를테면 그 밖의 율의이니,12) 오로지 근본업도만을 율의의 갈래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근거가 일정하지 않다’고 함은,
이를테면 혹 어떤 의미에서 일체의 근거에 따라 획득되는 경우도 있고,
혹은 또 다른 의미에서 오로지 하나의 근거에 따라 획득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인정된다.
일체의 근거에 따라 획득되는 경우란 이를테면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에 따른 것을 말하니, 그것들은 반드시 구기(俱起)하기 때문이다.
오로지 하나의 근거에 따라 획득되는 경우란 이를테면 상ㆍ중ㆍ하의 마음에 따른 것을 말하니, [이러한 세 가지 마음은] 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본송)서는 바야흐로 뒤의 세 가지 근거에 대해 설한 것이다.13)
그렇다고 할 때 혹 어떤 종류의 율의에 머무는 자로서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율의를 획득하였으면서, 일체의 갈래에 의하지 않고 일체의 근거에도 의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하심, 혹은 중심, 혹은 상심으로써 근사나 근책의 계를 받는 자가 그러하다.
또한 혹 어떤 종류의 율의에 머무는 자로서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율의를 획득하였으면서, 일체의 갈래에 의하고 일체의 근거에 의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하심, 혹은 중심, 혹은 상심으로써 필추계를 받는 자가 그러하다.
또한 혹 어떤 종류의 율의에 머무는 자로서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율의를 획득하였으면서, 아울러 일체의 갈래와 일체의 근거에 의하여 획득한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하ㆍ중ㆍ상의 세 가지 마음으로써 근사ㆍ근책ㆍ필추의 계를 받는 자가 그러하다.14)
또한 혹 어떤 종류의 율의에 머무는 자로서 일체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율의를 획득하였으면서, 일체의 근거에 의하고 일체의 갈래에 의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니,
이를테면 세 가지 마음으로써 근사ㆍ근주ㆍ근책의 계를 받는 자가 그러하다.
그리고 모든 유정을 두루 대상으로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율의도 획득하는 일이 없으니,
일체의 모든 유정의 소의에 대해 선한 의요(意樂)로 머물러야 비로소 율의를 획득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을 경우 율의를 획득하지 못하니, 악의 의요가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만약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다섯 종류의 한정을 짓지 않을 때 비로소 별해탈율의를 수득(受得)할 수 있는 것으로,
이를테면 유정과 갈래[支]와 장소[處]와 시간[時]과 조건[緣]의 한정이 바로 그것이다.
유정의 한정이란,
‘나는 오로지 특정[某類]의 유정에 대해서만 마땅히 살생 따위를 떠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갈래의 한정이란 말은,
‘나는 오로지 특정한 율의지[支]만을 마땅히 수지하여 범하지 않을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장소의 한정이란 말은,
‘나는 오로지 특정한 지역에 머무는 이에 대해서만 마땅히 살생 따위를 떠날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시간의 한정이란 말은,
‘나는 오로지 한 달 등의 시간 동안만 능히 살생 등을 떠날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조건의 한정이란 말은,
‘나는 오로지 전쟁 등의 조건을 제외하고서만 능히 살생 등을 떠날 것이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한정을 지어 계를] 받는 자는 율의를 획득하지 못하며, 단지 율의와 유사한 묘행(妙行)만을 획득할 뿐이다.
[그렇다면] 비소능경(非所能境) 즉 능히 해칠 수 없는 유정을 대상으로 하여 어떻게 율의를 획득하는 것인가?15)
널리 유정에 대해 목숨을 손상시키지 않으려는 뛰어난 의요(意樂)를 일으켰기 때문에 율의를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만약 한결같이 소능경(所能境)을 대상으로 하여서만 별해탈율의를 수득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율의에 마땅히 증감이 있어야 할 것이니, 소능경과 비소능경의 두 가지 종류의 유정이 바뀌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와 같다고 한다면 별해탈율의는 획득과 사기(捨棄)의 연(緣)을 떠나 획득되고 버려지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16)
그의 설은 옳지 않다.
마치 풀 등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그 후 생겨나고, 생겨났다가 말라버리는 것처럼,
그(바뀐 유정)에 대한 율의는 증가하는 일도 없고 감소하는 일도 없으니,
소능경과 비소능경을 대상으로 하여 획득되는 율의의 경계가 바뀔 때에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세친의 유부 別發說 비판)
그의 말은 옳지 않다.(별발설의 反難)
그 까닭이 무엇인가?
모든 유정은 전후의 존재[性]가 동등하지만 풀 등은 전후의 존재가 동등하지 않기 때문이다.17)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유정이 반열반(般涅槃)하고 나면 이전의 존재[性類]와 같은 것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그에 대한 율의는 어찌 감소하지 않은 것인가?
따라서 이와 같은 해석(즉 별발설)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앞서 설한 바(즉 총발설)가 이치상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세친의 힐난)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과거의 부처와 그에 의해 제도된 중생들은 이미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그 뒤의 부처는 그들을 대상으로 하여 더 이상 별해탈율의를 일으켜 획득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어째서 시라(尸羅)가 이전보다 감소하는 허물이 없는 것인가?(별발설의 反難)
일체 모든 부처님의 별해탈율의는 모두 일체의 유정처에 따라 획득되기 때문에 설사 그 같이 [열반에 든] 유정이 지금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 뒤의 부처는 그들에 대해서도 역시 율의를 획득할 것이기 때문에, 뒤의 시라가 이전보다 감소하는 허물은 없는 것이다.(세친의 답)
이상 그것(즉 본송)에 따라 온갖 율의의 획득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은 일체의 유정과 업도(즉 갈래)에 따르는 것으로, 일부의 유정을 대상으로 하거나 갈래[支]를 모두 갖추지 않은 불율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결정코 일체의 근거[因]에 따라 획득되는 일은 없으니, 하품 등의 마음이 동시에 생기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한 존재가 하품의 마음에 의해 불율의를 획득하고 그 후 시간을 달리하여 상품의 마음에 의해 중생의 생명을 끊었다면 그는 단지 하품의 불율의를 성취하고, 또한 역시 살생이라고 하는 상품의 표업 따위를 성취할 뿐이다.
그리고 중품과 상품의 마음에 의해 중생의 목숨을 끊는 경우도 마땅히 이러한 예에 따라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어떠한 이를 일컬어 불율의자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양을 죽이고, 닭을 죽이고, 돼지를 죽이고, 새를 잡고, 물고기를 잡고, 짐승을 사냥하고, 도둑질을 하고, 사형을 집행하고[魁膾], 감옥을 지키고[典獄], 뱀을 잡고[縛龍], 개를 삶고, 그리고 그물이나 덫을 놓아 짐승을 잡는[罝弶] 따위의 온갖 일을 말한다.
그리고 여기서 ‘따위’라고 말한 것은 왕(여기서는 인민을 억압하는 악왕)과 형벌을 담당하는 자와 그 밖의 탐문하고 살피는 이[聽察], 단죄하는 등의 사람[斷罪]을 유추하여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오로지 항상 해코지하려는 마음[害心]을 갖는 이를 불율의자라고 하니,
그들은 한결같이 불율의에 머무르기 때문에, 혹은 불율의를 갖기 때문에 ‘불율의자’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양을 죽인다[屠羊]’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생계[活命]를 위해 목숨이 다할 때까지를 기한으로 하여 항상 양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그 밖의 다른 불율의에 대해서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두루 유정계를 대상으로 하여 온갖 율의를 획득하는 것은 이치상 그럴 수 있으니, 널리 이익되고 즐겁기를 바라는 뛰어난 아세야(阿世耶)로 말미암아 수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을 죽이는 등의 불율의를 행하는 자들도 자기와 절친한 이에 대해서는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으며,
나아가 자신의 신명(身命)을 구호하는 인연에 대해서도 역시 죽이려 하지 않거늘,
어떻게 일체의 유정을 두루 대상으로 하여 불율의를 획득한다고 설할 수 있을 것인가?18)
그 같이 절친한 이라 할지라도 만약 그가 양이 되었다면 그에 대해서도 역시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19)
(유부)
절친한 이가 현재 양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에 대해 해코지하려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성자는 필시 양 따위가 될 리가 없는데, 어떻게 그를 대상으로 하여 불율의를 획득할 것인가?
또한 만약 현재의 상속신을 미래의 양 따위로 관찰하고서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현재의] 양 따위도 미래세에 역시 절친한 이나 성자가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니,
그 같은 양에 대해 결정코 해코지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그러한 즉 마땅히 미래를 관찰하여 현재의 양에 대해 불율의를 획득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20)
(경부)
양의 현신에 대해 이미 해치려는 마음이 있는데, 어찌 그것에 대해 불율의를 획득하지 않겠는가?21)
(유부)
어머니 등의 현신(現身)에 대해서 이미 해치려는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그를 대상으로 하여서도 역시 불율의를 획득한다고 하겠는가?
이는 [그대가 말한 바와] 동일한 사례이기 때문에 마땅히 다른 이치를 구해야 할 것이다.
또한 양을 죽이는 등의 불율의를 수득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일생토록 주지 않은 물건을 취하지 않고,
자기의 처첩에 대해 지족(知足)하는 마음을 갖으며,
그가 만약 벙어리여서 능히 말을 하지 못한다면 어업(語業)의 네 가지 허물(양설ㆍ망어ㆍ악구ㆍ기어)도 없을 것인데,
어떻게 그가 모든 갈래의 불율의를 모두 획득할 수 있을 것인가?
(경부)
그는 이미 선한 아세야(阿世耶)를 널리 손상하였기 때문에 설사 벙어리여서 말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설하려고 하는 뜻을 몸으로 나타내며, 따라서 7지(支)의 불율의를 모두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22)
(유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일찍이 두세 가지의 학처(學處)를 수지하였으나 혹 어느 때 [어떤 연을 만나] 다만 살생의 업을 수득하고 그 밖의 다른 학처에 대한 선한 아세야는 손상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7지의 악계를 모두 낳을 수 있을 것인가?23)
(경부)
그러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필시 갈래[支]를 결여하였거나 일부 유정을 대상으로 할 경우 불율의에 머무는 이라고 일컬을 수 없다.”
이에 대해 경부(經部)의 모든 논사들은 이와 같이 설하였다.
“기한에 따라 7지를 모두 갖추었거나 갖추지 않았거나, [유정] 전체를 대상으로 삼거나 일부를 대상으로 삼거나 간에 모두 불율의를 획득할 수 있으며, 율의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그것의 수량에 따라 선과 악의 시라(尸羅)의 성상(性相)은 서로 모순되고 부정되기 때문이다.24)
그러나 오직 8계(즉 근주계)만은 제외된다.”25)
그 같은 유정과 업도 등에 따라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비율의비불율의를 획득하는 방편]
그렇다면 불율의와 아울러 그 밖의 무표(즉 비율의비불율의)를 획득하는 데에는 어떠한 방편이 있는 것인가?
이에 대해 아직 논설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모든 불율의를 획득하는 것은
짓거나 맹서하여 받는 것에 의해서이며
그 밖의 무표를 획득하는 것은
전(田)과 수(受)와 중행(重行)에 의해서이다.26)
논하여 말하겠다.
모든 불율의는 두 가지 원인에 의해 획득되니,
첫째는 불율의를 가업으로 삼는 집에 태어나 처음으로 살생 등의 가행을 현행함으로써 획득되며,
둘째는 비록 그 밖의 다른 집에 다시 태어났을지라도 처음으로 맹서[要期]하고서 살생 등의 사업을 수지함으로써 획득된다. 즉
‘나는 마땅히 이와 같은 사업을 지음으로써 재물을 구하여 나 자신을 양활(養活)하리라’고 할 때, 바로 악계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 밖의 무표(處中, 즉 율의도 아니고 불율의도 아닌 무표)는 세 가지 이유에 의해 획득된다.
즉 첫째는 전(田)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이와 같은 온갖 복전(福田)에 시여된 원림(園林) 등을 대상으로 하는 그의 선한 무표는 처음으로 보시할 때 생겨나는데, 유의(有依)의 온갖 복업사(福業事)에서 설한 바와 같다.27)
둘째는 수(受)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스스로 맹세하여 말하기를,
“부처에게 예배하지 않고서는 결코 그 이전에 식사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혹은
“재일(齋日)과 반 달, 한 달, 그리고 일 년 동안 항상 음식 등을 베풀 것이다”는 서원을 세움으로써 [선한 무표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중행(重行)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이와 같은 은근하고 중대한 작의를 일으켜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원인에 의해 그 밖의 무표가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율의 등을 획득하는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2) 율의 등을 버리는 것
그러나 율의 등을 버리는 것[捨]에 대해서는 아직 논설하지 않았으니, 이제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별해탈율의를 버리는 것]
어떻게 하여야 별해탈율의를 버리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별해탈의 조복(調伏)을 버리는 것은
고의로 버리거나, 목숨을 마치거나
이형(二形)이 동시에 생겨나거나
선근을 끊거나, 밤이 다함에 의해서이다.
어떤 이는 설하기를 중죄를 범함에 의해
다른 어떤 이는 정법이 멸함에 의해서라고 설하지만
그러나 가습미라의 비바사사는 설하기를
범하고 지니는 두 가지는 부채와 재산과 같다고 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말한 ‘조복(調伏, vinaya)’의 뜻은 율의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것에 따라 능히 6근(根)을 조복시키기 때문이다.
오로지 근주를 제외한 그 밖의 일곱 종류의 별해탈율의는 네 가지 연에 따라 버리게 된다.
첫째는 의요(意樂)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有解人]에게 유표업을 발설하여 학처를 버리기 때문이다.28)
둘째는 중동분(衆同分)을 버렸기 때문이다.29)
셋째는 이형(二形)이 동시에 생겨났기 때문이다.30)
넷째는 율의의 근거[因]가 되는 선근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주계는 이상의 네 가지 연과 아울러 밤이 다함에 따라 버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별해탈율의는 다섯 가지 인연에 의해 버려진다고 모든 이가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이러한 다섯 가지 인연에 의해 계를 버리게 되는 것인가?
받을 때와는 다른 표업이 생겨났기 때문이며, 소의신을 버렸기 때문이며,
소의신이 변하였기 때문이며,
[율의의] 근거가 끊어졌기 때문이며, 기한이 지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다른 부파[有餘部]에서는 설하기를,
“지옥에 떨어지는 과보를 초래하는 네 가지 극중죄(極重罪) 가운데 만약 어느 한 가지라도 범할 때, 역시 또한 근책과 필추의 율의를 버리게 된다”고 하였으며,31)
또 다른 부파에서는 말하기를,
“정법이 멸함에 따라 역시 능히 별해탈율의를 버리게 되니, 법이 멸할 때에는 일체의 학처(學處)와 결계(結界)와 갈마(羯磨)도 모두 종식되어 소멸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32)
그러나 가습미라국(迦濕彌羅國)의 비바사사(毘婆沙師)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본죄(즉 4바라이법)를 범하였을 때에도 출가의 계를 버리는 것은 아니다.
왜냐 하면 하나의 극단적인 죄[一邊, 즉 4근본죄]를 범하였다고 하여 일체의 율의를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으로, 어떤 죄를 범하였다고 하여 시라(尸羅, 즉 戒體)가 끊어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33)
그런데 [극중죄를 범하는 자에게는] 두 가지 명칭이 있으니,
이를테면 ‘계를 갖춘 자[具尸羅]’와 ‘계를 범한 자[犯戒者]’가 바로 그것으로,
이는 마치 재산이 많은 자가 다른 이에게 빚을 졌을 때, 그를 일컬어 부자라고도 하고 부채자라고도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만약 [계를 범하였을지라도] 범한 죄를 드러내어 참회하여 제거하면 ‘시라를 갖춘 자’라고 이름하고 ‘계를 범한 자’라고는 이름하지 않으니,
마치 [부자가] 부채를 갚고 나면 단지 부자라고만 불리는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네 가지 중죄를 범한 자는 필추라고도 이름하지 않고, 사문이라고도 이름하지 않으며, 석가의 제자[釋迦子]가 아니니,
필추의 체성을 파괴하고 사문의 본성을 해손ㆍ괴멸하여 타락하였으니, 타승(他勝)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한다”고 설한 것인가?34)
(경부의 난문)
승의의 필추에 근거하여 밀의(密意)로서 이와 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35)
(비바사사의 답)
이 말은 대단히 잘못된 해석[凶勃]이다.36)
(경부의 힐난)
어떻게 잘못된 것인가?
(유부)
이를테면 세존께서 요의(了義)로 설하신 것을 별도의 뜻으로 해석하여 불요의(不了義)라고 하였으니, 이는 번뇌가 많은 자가 중죄를 범하게 되는 인연이 되는 것이다.37)
(경부)
이 말씀이 바로 요의설이라는 것은 어떻게 안 것인가?
(유부)
율장 중에서 스스로 해석하시기를,
“네 종류의 필추가 있으니,
첫째는 명상필추(名想苾芻)이며,
둘째는 자칭필추(自稱苾芻)이며,
셋째는 걸개필추(乞匃苾芻)이며,
넷째는 파혹필추(破惑苾芻)이다”고 하였다.38)
여기(앞서 언급한 박가범의 말씀)서 ‘필추가 아니다’고 하는 말은,
이를테면 한번 아뢰고 세 번 갈마(羯磨)하여 구족계를 받은 필추(즉 파혹필추)가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즉 이 같은 필추는 [그대가 말한 것처럼],
‘일찍이 승의의 필추였지만 그 후에 극중죄를 범하여 필추 아닌 자가 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바로 요의설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39)
그리고 그(비바사사)가 설한,
‘하나의 극단적인 죄를 범하였다고 하여 일체의 율의를 모두 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하는 말은,
바로 대사(大士,즉 세존)를 힐난한 것이니,
대사께서는 거기서 이와 같은 비유를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만약 다라수(多羅樹)의 머리부분을 잘라내게 되면 필시 더 이상 생장하여 광대해지지 못하는 것처럼 모든 필추 등이 중죄를 범해도 역시 그러하다.”
(경부)
대사께서는 거기서 무슨 뜻을 나타내고자 이 같은 비유를 설하신 것인가?
(유부)
[비유의] 뜻은 온갖 계 가운데 하나의 극단적인 근본중죄를 범하게 되면 그가 수지한 그 밖의 다른 계도 필시 더 이상 생장하여 광대해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이를테면 어떤 이가 온갖 중죄를 훼범(毁犯)할 때 그것은 필추의 근본행(불살생 등의 4바라이법)과 어긋나기 때문에 지극히 맹리한 무참(無慚)ㆍ무괴(無愧)와 함께 상응하게 된다.
따라서 계행의 근본[行根]이 이미 끊어졌으면 이치상 일체의 율의를 모두 버리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세존께서는 중죄를 범한 자에게는 한 덩어리의 승지(僧祗, 승가)의 밥도, 비하라(毘訶羅, vihāra, 승방)의 땅을 한 발자국이라도 밟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으며, 일체의 필추의 사업으로부터 배척하였던 것이다.
즉 대사께서는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나락 가운데 피는 신속히 제거해야 할 것이며,
썩은 기둥과 들보는 신속히 가려내야 할 것이며,
씨앗 가운데 쭉정이나 겨는 신속하게 까불러 날려 버려야 하니,
이와 마찬가지 대중 가운데 실로 필추가 아니면서 필추라고 칭하는 자들은 마땅히 신속하게 쫓아내어야 하는 것이다.”40)
그렇다면 그러한 [중죄를 범한] 필추의 계체(戒體)와 그 상(相)은 어떠한가?
(경부)
[중죄를 범한 필추의] 상이 어떠하든 계체는 반드시 존재하는 것이니,
세존께서 준타(准陀, Cunda)에게
“네 종류의 사문이 있을 뿐 다섯 번째의 사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말한 바 네 종류의 사문이란,
첫째는 승도사문(勝道沙門)이며,
둘째는 시도사문(示道沙門)이며,
셋째는 명도사문(命道沙門)이며,
넷째는 오도사문(汚道沙門)이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41)
(유부)
비록 이러한 경설이 있을지라도 그(즉 오도사문)는 오로지 그 밖의 다른 사문의 모습만을 띠고 있기 때문에 ‘사문’이라 이름한 것일 뿐이니,
이는 마치 불에 탄 목재[도 목재라고 이름하며],
[앵무새의 부리와 유사하게 생긴 물건을] 일시 앵무의 부리라고 하며,
마른 못[도 못이라 이름하며], 썩은 종자[도 종자라도 이름하며],
[불이 빠르게 원을 그리며 돌아가는 것을] 불바퀴라고 이름하며,
죽은 사람[도 사람이라 이름하는 것]과 같다.(경부)
만약 중죄를 범한 이를 필추가 아니라고 한다면, 마땅히 [중죄를 범한 이로서] 학처를 수여할 필추는 아무도 없어야 할 것이다.(유부)42)
중죄를 범한 이는 모두 타승죄(他勝罪)를 성취한다고 설하지 않으며,
다만 타승죄를 성취한 자만이 결정코 필추가 아니라고 설하고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의 상속에 수승한 [참ㆍ괴가] 있다면 비록 극중의 계를 범하였을지라도 타승죄가 아니니,
그에게는 한치의 숨긴 마음도 없기 때문으로, 법주(法主) 세존께서 설정하신 바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경부)
만약 타승죄를 범할 때 필추가 아니라고 한다면 어찌 거듭 출가하여 수계하도록 하지 않을 것인가?(유부)
그의 상속신이 이미 극중한 무참과 무괴로 인해 허물어졌기 때문에 능히 출가하여 율의를 낳을 만한 힘이 없으니,
마치 불에 그을린 종자와도 같다.
따라서 그에게 필추율의가 있다고는 관찰되지 않으며, 그래서 거듭 출가하여 수계하게 하지 않으신 것이다.
왜냐 하면 설령 [다시 수계한] 후 그를 필추라 일컬을지라도 다시 학처를 버리게 되면 또 다시 그가 거듭 출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
이같이 아무런 이익도 없는[無義] 이를 애써 구원하여 뭣할 것인가?
그럼에도 만약 이와 같은 자에게 필추의 본성이 있다고 한다면 마땅히 스스로 이와 같은 유형의 필추에 대해 귀의하고 예배해야 할 것이다.(경부)
나아가 [불타] 정법이 멸할 때 비록 일체의 결계(結界)와 갈마(羯磨)와 비나야(毘奈耶)가 없어지므로 아직 획득하지 않은 율의를 새로이 획득하는 일은 없다 할지라도 이전에 획득한 율의를 버리는 일도 없는 것이다.43)
[정려와 무루의 두 가지 율의를 버리는 것]
정려와 무루의 두 가지 율의는 어떻게 하여야 마땅히 버려지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정려에서 생겨난 선법을 버리는 것은
지(地)를 바꾸고 물러나는 것 등에 의해서이며
성법(聖法)을 버리는 것은 과(果)를 획득하거나
근을 연마하거나 물러나는 것에 의해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정려지에 계속(繫屬)되는 선법은 두 가지 연에 의해 버리게 된다. 즉
첫째는 지(地)를 바꿈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하지로부터 상지에 태어날 때, 혹은 상지로부터 몰하여 하지로 와 태어날 때가 그러하다.44)
둘째는 물러남을 획득함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이미 획득한 뛰어난 선정의 공덕으로부터 퇴실(退失)할 때가 그러하다.
그리고 [본송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중동분(衆同分)을 버릴 때에도 역시 일부의 수승한 선근을 버린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45)
그리고 지(地)를 바꾸는 것과 물러남에 의해 색계 선법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색계의 선법도 역시 그러하지만, 오로지 율의가 없다는 것만이 색계와 다를 뿐이다.46)
무루의 선법은 세 가지 연(緣)에 의해 버리게 된다.
첫째는 과(果)를 획득함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성과(聖果)를 획득할 때 이전의 향도(向道)와 과도(果道)를 버리기 때문이다.47)
둘째는 근을 연마함[練根]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근을 연마하는 상태에서 이근(利根)의 도를 획득함으로 말미암아 둔근(鈍根)의 도를 버리게 되기 때문이다.48)
셋째는 물러나 상실함[退失]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물러남을 획득할 때 과도(果道)와 승과도(勝果道)에서 물러나기 때문이다.49)
이와 같이 온갖 율의를 버리는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불율의를 버리는 것]
그렇다면 불율의는 어떻게 버려지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악계를 버리는 것은, 죽음에 의해
계를 획득하고 이형이 생겨나는 것에 의해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불율의는 세 가지 연(緣)에 의해 버리게 된다.
첫째는 죽음에 의해서이니, 소의신을 버렸기 때문이다.50)
둘째는 계를 획득함에 의해서이니, 이를테면 별해탈율의를 수득(受得)하거나, 혹은 정려율의를 획득함으로 말미암아 악계가 바로 버려지는 것이다.
즉 인연의 힘에 의해 율의를 획득할 때 온갖 불율의는 모두 다 끊어지니,51) 선계와 악계는 그 자성이 서로 모순되며, 그 중에서도 선계의 세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상속신에 이형(二形)이 동시에 생겨남에 의해서이니, 그 때에는 소의신이 변이하기 때문이다.
악계에 머무는 자가 비록 혹 어느 때 [악업을] 짓지 않으려는 의지[思]를 일으켜 칼이나 그물 등을 버렸을지라도 만약 온갖 선율의를 수득하지 않는다면 온갖 불율의는 버려질 리가 없으니,
비유하자면 비록 발병(發病)의 인연을 피하였을지라도 양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병을 끝내 치유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떤 불율의를 지닌 자가 근주계를 받고 밤이 다하면서 율의를 버리게 되었을 때 불율의를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처중(處中, 율의도 아니고 불율의도 아닌 것)의 무표를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유여사는 설하기를,
“불율의를 획득하니, 악한 아세야를 영원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뜨거운 쇳덩이를 가만히 놓아두면 붉은색이 없어지고 푸른색이 생겨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52)
또 다른 유여사는 말하기를,
“만약 다시 짓지 않는다면 그로 하여금 불율의를 획득하게 하는 인연은 없으니, 불율의는 표업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53)
[처중(處中)의 무표를 버리는 것]
다시 처중(處中)의 무표는 어떻게 버려지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처중을 버리는 것은, 받으려는 마음과 세력과
작업과 사물과 목숨과 근(根)이 끊어짐에 의해서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처중의 무표는 여섯 가지 연에 의해 버리게 된다.
첫째는 받으려는 마음이 단괴(斷壞)됨에 따라 버리게 된다.
이를테면 이전에 받은 바를 버리려고 할 때,
‘나는 지금부터 일찍이 받은 것을 버리겠다’고 생각하고 말한다.54)
둘째는 세력이 단괴됨에 따라 버리게 된다.
이를테면 처중의 무표는 청정한 믿음과 번뇌의 세력으로 말미암아 인기된 것으로, 그러한 두 가지의 세력이 단괴될 때 그것의 무표는 바로 버려지니,
마치 시위를 떠난 화살이나 옹기장이가 돌리는 물레의 바퀴가 시위 등의 세력이 다할 때 바로 멈추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셋째는 작업(作業)이 단괴됨에 따라 버리게 되니,
이를테면 이미 수득(受得)한 것을 그 후 더 이상 짓지 않는 것과 같은 경우를 말한다.55)
넷째는 사물(事物)이 단괴됨에 따라 버리게 된다.
여기서 ‘사물’이란 무엇인가?
보시된 사사(寺舍)나 부구(敷具), 제다(提多)나 원림(園林), [짐승을 잡으려고] 놓은 덫이나 그물 등의 사물을 말한다.56)
다섯째는 수명이 단괴됨에 따라 버리게 되니,
이를테면 의지(依止)가 되는 몸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선근(善根)이 단괴됨에 따라 버리게 된다.
즉 가행을 일으켜 선근을 끊을 때 그러한 선근에 의해 인기된 무표를 버리게 되는 것이다.
[욕계 비색의 선법을 버리는 것]
욕계 비색(非色)의 선법이나 그 밖의 다른 일체의 비색의 염법은 어떻게 버려지는 것인가?57)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 비색의 선법을 버리는 것은
근(根)이 끊어지고 상계에 태어남에 의해서이며,
대치도가 생겨나는 것에 의해
온갖 비색의 염법을 버리게 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일체의 비색(非色)의 선법은 두 가지 연에 의해 버리게 되니, 첫째는 선근을 끊는 것이며, 둘째는 상계에 태어나는 것이다.
3계의 일체의 비색의 염법은 한 가지 연에 의해 버리게 되니,
이를테면 그것은 다만 대치도가 일어나는 것에 의해 [버려진다].
즉 만약 이와 같은 품류의 번뇌를 능히 끊을 만한 도가 생겨나면 응당 이러한 품류의 번뇌나 그 조반(助伴)을 바로 버리게 되는 것으로, 그 밖의 다른 방편에 의해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3) 유정의 종류와 선ㆍ악의 율의의 관계
어떠한 유정에게 선ㆍ악의 율의가 존재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악계는 인간에게만 있으니, 북구로주와
두 가지 황문(黃門)과 이형자(二形者)는 제외되며
율의는 역시 천취(天趣)에도 있지만
오로지 인간만이 세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욕계의 천과 색계에 태어나면
정려생율의가 존재하며
무루율의는 무색계와 함께하니
중간정과 무상정은 제외된다.
논하여 말하겠다.
불율의는 오로지 인취(人趣)에만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북구로주를 제외한 세 주(남섬부주ㆍ동승신주ㆍ서우화주)에만 존재하며, 세 주 중에서도 다시 선체(扇搋)나 반택가(半擇迦),58) 이형(二形)을 갖춘 자는 제외된다.
나아가 율의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이를테면 인취 중에서는 앞에서 제외한 것을 제외하며, 아울러 천취 중에도 역시 존재한다.
따라서 율의는 두 취(趣)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선체 등이 소유한 상속신은 율의의 근거가 되지 않음을 아는 것인가?
경과 율에서 진실로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대명(大名)에게 고하기를,
“존재하는 모든 재가의 백의(白衣)의 남자로서 남근을 성취한 자가 불(佛)ㆍ법(法)ㆍ승(僧)에 귀의하여 크나큰 청정심을 일으켜 진실의 말을 발하여,
‘나는 바로 오파색가이니 원컨대 존자께서 기억하시어 자비로써 호념(護念)하소서’라고 스스로 일컬으면,
이 같은 이를 다 같이 오파색가라고 이름한다”고 하였던 것이다.59)
또한 비나야(毘奈耶) 중에서도 역시,
“그대는 마땅히 이 같은 색(즉 선체 등)의 종류의 사람을 제외해야 한다”고 설하였다.60)
그래서 율의가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 것이다.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그들에게는 율의가 없는 것인가?
두 가지 소의(즉 남ㆍ여)를 근거로 하여 일어난 번뇌가 하나의 상속에서 함께 증상(增上)하기 때문이며,
올바른 사택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며,
극중의 참괴심(慚愧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불율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들은 악계에 대해서도 마음이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이들에게 선의 율의가 존재한다면 악의 율의도 역시 그들에게 존재할 것이니, 이러한 두 종류는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61)
그리고 북구로주의 사람은 [계를] 받는 일도 선정에 드는 일도 없으며, 악을 지으려는 뛰어난 의요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악계도 선계도 없는 것이다.
또한 악취 중에는 맹리한 참괴심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율의와 불율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뛰어난 참괴심과 상응할 때 비로소 율의가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을 어기려고 할 때 불율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체 등은 마치 짠 갯벌과 같아서 능히 선계도 악계도 생겨날 수 없으니,
세간을 현견하건대 짠 갯벌에는 이로운 곡식도 해로운 잡초도 능히 자라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난생(卵生)인 용은 반월(半月) 팔일마다 궁(宮)으로부터 인간세계로 나와 8지(支)의 근주 재계(齋戒)를 받기 희구한다”고 말한 것인가?
이는 묘행(妙行)을 획득하는 것일 뿐 율의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62)
그렇기 때문에 율의는 오로지 인취(人趣)와 천취(天趣)에만 존재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인취 중에만 세 종류의 율의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니, 이를테면 별해탈과 정려와 무루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만약 욕계 천취에 태어나거나 색계에 태어나는 이라면 그들은 모두 정려율의를 획득할 수 있을지라도, 무색계에 태어나는 경우 그것(정려율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무루율의는 무색계에도 역시 존재한다.
즉 욕계천 중에 태어나 머물거나, 색계 중에 태어난 이로서 중간정(中間定)과 무상천(無想天)을 제외한 모든 이는 무루율의를 지닐 수 있다.63)
그러나 무색계 중에 태어나는 경우에는 오로지 [하계의 그것을] 성취할 수 있을 뿐으로, 그곳에는 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필시 현기(現起)하지 않는 것이다.
온갖 업의 성상(性相)이 동일하지 않음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4) 경 중에서 설하고 있는 온갖 업
이제 마땅히 경 중에서 설하고 있는 온갖 업에 대해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선ㆍ악ㆍ무기의 업의 상]
바야흐로 경 중에서는 업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선ㆍ악ㆍ무기가 바로 그것이다.64)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안온하고 안온하지 않고, 양자 모두 아닌
업을 일컬어 선ㆍ악ㆍ무기의 업이라고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것을 일컬어 선 등의 업의 상이라고 하니,
이를테면 안온(安穩)한 업을 설하여 ‘선업’이라고 한다.65)
즉 그것은 능히 애호할 만한 이숙과와 열반을 획득하여 잠시와 영원의 두 때에 걸쳐 온갖 괴로움을 구제하기 때문이다.
안온하지 않은 업을 일컬어 ‘불선업’이라고 하는데,
이로 말미암아 능히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이숙과를 초래하는 등 앞서 언급한 안온한 업과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가 아닌 업은 ‘무기’라고 이름하는데,
선ㆍ불선 어느 것으로도 기표(記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ㆍ비복ㆍ부동업의 상]
또한 경 중에서는 업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복(福)과 비복(非福) 등이 바로 그것이다.66)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복ㆍ비복ㆍ부동업(不動業)이 그것인데
욕계의 선업을 일컬어 ‘복업’이라 하고
불선업을 일컬어 ‘비복업’이라고 하며
상계의 선업을 ‘부동업’이라고 이름하니,
자지(自地)의 처소에 근거하는 것으로
과보는 업의 처소에서 이동함이 없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선업을 일컬어 ‘복업(福業)’이라 하는데,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를 초래하여 유정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이다.
[욕계의] 온갖 불선업을 일컬어 ‘비복업(非福業)’이라 하는데,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과보를 초래하여 유정에 손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上) 2계의 선업을 일컬어 ‘부동업(不動業)’이라고 한다.
어찌 세존께서는 아래 세 정려를 모두 ‘유동(有動)’이라 이름한다고 설하지 않았던가?67)
성자께서 이(아래 세정려) 중에 심(尋)ㆍ사(伺) 등이 있는 것을 일컬어 ‘이동함이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아래 세 정려에는 심ㆍ사 등이 있어 재환(災患)이 아직 종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동’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일 뿐이다.68)
그리고 『부동경(不動經)』 중에서는, 능히 부동의 이숙을 초래하여 획득한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부동’이라고 이름하였다.69)
어떻게 이동함이 있는[有動] 정려가 이동함이 없는[無動] 이숙과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인가?
비록 이 같은 정려 중에서는 재환의 이동이 있을지라도, 업의 과보가 욕계에서처럼 다른 처소로 이동하여 일어나는 일[動轉]이 없기 때문에 ‘부동’이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였다.70)
이를테면 욕계 중에서는 어떤 취(趣)나 처소[處]에서 향수(享受)하는 만업(滿業)도 별도의 인연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 밖의 다른 취나 처소에서 향수하기도 한다.
혹은 어떤 업(즉 만업)은 능히 내외의 재산과 지위, 생김새나 몸집[形量], 정력[色力], 즐거움 따위를 초래하는 경우가 있는데,
천취 따위 중에서 이 같은 업이 마땅히 성숙하게 되는 것은 별도의 인연의 힘에 의해 견인되어 일어났기 때문이며,
인취 등에서 그러한 것은 이 같은 업이 [별도의 인연의 힘에 의하지 않고] 바로 성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계ㆍ무색계에서는 어떤 지(地)나 처소의 업이 전전하여 그 밖의 다른 지나 처소에서 그 과보를 향수하는 일이 없으니,
업을 짓는 처소와 그 과보를 향수하는 처소는 [바뀌거나 이동하는 일이 없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부동’이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하게 된 것이다.
[순락ㆍ순고ㆍ순불고불락의 상]
또한 경 중에서 설하기를,
“업에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순락수업(順樂受業) 등이 그것이다”고 하였다.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순락과 순고와 순불고불락[非二]으로
제3정려까지의 선업이 순락이고
온갖 불선의 업이 순고이며
그 이상의 선업은 순불고불락이다.
유여사는 그 이하에도 역시 존재한다고 설하니
정려중간도 이숙을 초래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한 세 업은 전후가 아닌 동시에
성숙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순수(順受)에는 모두 다섯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자성(自性)과 상응(相應)과
그리고 소연(所緣)과 이숙(異熟)과
현전(現前)으로 차별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온갖 선업 중에서 욕계로부터 시작하여 제3정려에 이르기까지의 선업을 순락수업(順樂受業)이라고 이름하니, 온갖 낙수는 오로지 이곳(제3정려)까지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곳까지의] 온갖 불선업을 순고수업(順苦受業)이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세 정려를 지난 상지(즉 제4정려와 무색계)의 온갖 선업을 일컬어 순불고불락수업(順不苦不樂受業)이라고 하는데,
그 이상에는 고수와 낙수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온갖 업은 오로지 수(受)의 과보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수의 자량이 되는 것의 과보도 역시 초래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수’란 수와 그 자량을 말하는 것이다.71)
유여사는 설하기를,
“그(제3정려) 아래의 여러 지에도 역시 제3의 순비이업(順非二業)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중간정려의 업의 이숙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중간정려의 업에는 마땅히 이숙이 없어야 할 것이며, 혹은 마땅히 업도 없어야 할 것이니,
고락의 이숙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72)
또 다른 유여사는 설하기를,
“이러한 업은 능히 근본지 중의 낙근의 이숙을 초래한다”고 하였으며,73)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업은 수(受)의 과보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하였다.74)
이 같은 두 설은 모두 본론(本論)에 어긋나는 것이다.
곧 본론에서 말하기를,
“혹 업이면서 심수(心受)의 이숙은 초래하여도 신수(身受)는 초래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있다.
이를테면 선한 무심(無尋)의 업이다”고 하였다.75)
또한 본론에서 설하기를,
“혹 세 가지 업으로서 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닌 동시에 이숙과를 받는 경우가 있는가?
있다. 이를테면 순락수업이 색을, 순고수업이 심ㆍ심소법을, 순불고불락수업이 불상응행법을 받을 때이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다.76)
이 같은 사실에 의해 제3정려 이하의 지에도 역시 순비이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알 수 있으니,
욕계를 떠나 이 세 가지의 업이 동시에 성숙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업(즉 제3정려 이하의 순불고불락수업)은 선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불선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선하지만 저열한 것이다.77)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앞에서] 설한 바와 서로 모순되니, 이를테면
‘선업 중에서 [욕계로부터 시작하여] 제3정려에 이르기까지의 선업을 순락수업(順樂受業)이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으며,
‘애호할 만한 과보를 얻는 것을 일컬어 선업이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78)
그것은 대다수[多分]에 근거하여 그렇다고 말한 것일 뿐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79)
이러한 업(즉 앞의 3업)과 수(受)는 이미 체성(體性)이 다른데, 어떻게 ‘순락수’ 등이라고 설할 수 있는 것인가?
업은 비록 낙수와 체성이 다르지만 능히 인(因)이 되어 낙수를 이익되게 한다.80) 혹은 다시 이러한 업은 바로 낙(樂)에 의해 향수(享受)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낙수가 어떻게 업을 능히 향수하는 것인가?
낙수는 바로 이러한 업(순락수업)의 이숙과이기 때문이다.
혹은 다시 그러한 낙수는 바로 이러한 업에 의해 향수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업에 따라 능히 낙수의 이숙을 받기 때문으로,
마치 순욕산(順浴散)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81)
그렇기 때문에 ‘순락수업’이라 이름한 것으로,
‘순고(順苦)’ 등의 나머지 두 가지 업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수에 따르는 것의 다섯 가지 종류]
이 같은 순수(順受,vedanīyatā) 즉 ‘수에 따르는 것’에 대해 전체적으로 설해 보면 대략 다섯 가지의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성순수(自性順受)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일체의 수를 말하는데, 계경에서,
“낙수를 향수할 때에는 여실히 낙수를 향수한다고 안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82)
두 번째는 상응순수(相應順受)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일체의 촉(觸)으로서, 계경(위와 같은 경)에서
“낙수에 따르는 촉[順樂受觸]……(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말한 바와 같다.
셋째는 소연순수(所緣順受)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일체의 대상[境]으로서, 계경에서,
“눈은 색을 보고 나서 오로지 색을 향수하지 색탐을 향수하지 않는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한 바와 같다.83)
즉 색 등의 대상은 바로 수의 소연이 되기 때문이다.
넷째는 이숙순수(異熟順受)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이숙을 초래하는 업으로서, 계경에서,
“낙수에 따르는 업[順樂受業]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라고 말한 바와 같다.84)
다섯째는 현전순수(現前順受)이다.
이것은 이를테면 현행하고 있는 수로서, 계경에서,
“낙수를 향수할 때 두 가지의 수는 바로 소멸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한 바와 같다.85)
즉 이러한 낙수가 현재전할 때 그 밖의 다른 수가 있어서 능히 이 같은 낙수를 향수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낙수 그 자체가 현전함에 따라 바로 ‘낙수를 향수한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단지 이숙순수만을 설하여 [순락수업 등이라 한 것으로], 업이 능히 수의 이숙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업은 수와 그 체성이 다를지라도 ‘순락수’등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
[접업과 부정업의 상]
이와 같은 세 가지 업에는 그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적인 정업(定業)과 결정적이지 않은 부정업(不定業)이 있다.
그러한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여기에는 정업과 부정업이 있으니
정업은 세 가지로 순현(順現) 등이 그것인데
혹자는 업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고 설하며
유여사는 네 구(句)로 설하기도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순락수업 등은 각기 [그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적이고 결정적이지 않은 등의 차이가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으로,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정업’이란 명칭을 설정하였다.
정업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순현법수업(順現法受業)이며,
둘째는 순차생수업(順次生受業)이며,
셋째는 순후차수업(順後次受業)이 바로 그것이다.86)
이 같은 세 가지 정업과 앞에서 언급한 부정업으로써 모두 네 종류의 업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혹 어떤 이는 부정수업(不定受業)에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하였다.
즉 어떠한 이숙과를 받을 것인지가 결정되고 결정되지 않은 것이 바로 그것으로,87) 여기에 정업의 세 가지를 더하여 다섯 종류의 업을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순현법수업이란, 이를테면 이 생에서 짓고 바로 이 생에서 [그 과보가] 이숙하는 업을 말하며,
순차생수업이란, 이를테면 이 생에서 짓고 제2생(다음 생)에서 [그 과보가] 이숙하는 업을 말하며, 순후차수업이란 이 생에서 짓고 제3생(차후의 생) 이후에 순서대로 이숙하는 업을 말한다.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순현법수업은 [이 생 이외] 그 밖의 다른 생에서도 역시 이숙할 수 있지만,
처음으로 이숙하는 위치[初熟位]에 따라 업의 명칭을 순현법수업이라고 건립한 것이니,
[그 같은 정업은] 강력한 업이어서 이숙과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88)
그렇지만 비바사사(毘婆沙師)는 이 같은 뜻을 인정하지 않는다. 즉
“혹 어떤 업은 결과에 가깝지만 수승하지 않은 것도 있으며 혹 어떤 업은 이와 반대되는 경우도 있다. [즉 멀지만 이열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비유하자면 외적인 종자와도 같으니, 아마는 심은 지 3개월 반이 지나면 그 결실을 거두지만 보리는 요컨대 6개월을 지나야 비로소 결실을 거두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런데 비유자(譬喩者)는 업을 다음과 같은 네 구(句)로 설하고 있다.
“첫째,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는 결정되어 있어도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할지는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이 있으니,
이를테면 순현법수업 등의 세 가지 업으로서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하는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하는지는 결정되어 있어도 과보를 초래하는 시기는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이 있으니,
이를테면 부정업으로서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하는지 결정되어 있는 업이 바로 그것이다.
셋째, 두 가지 모두가 결정되어 있는 업이 있으니,
이를테면 순현법수업 등으로서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할지 결정되어 있는 업이 바로 그것이다.
넷째, 두 가지 모두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이 있으니,
이를테면 부정업으로서 어떠한 이숙과를 획득할지 결정되어 있지 않은 업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바로 온갖 업에는 모두 여덟 가지의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를테면 순현법수업에 결정적인 것과 결정적이지 않은 것이 있으며,
나아가 부정업에도 역시 이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이다.89)
앞에서 설한 업의 차별(즉 3時業과 4업ㆍ5업ㆍ8업 설)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리라.
4업설이 선설(善說)로서, 함께 지을 수 있으며,
동분을 인기하는 것은 오로지 세 가지 뿐이며,
모든 처소에서 네 종류의 업을 지을 수 있으나
지옥에서는 선에 상응하는 순현법수업이 제외된다.
이염지(離染地)에서 [물러남이 없는] ‘견(堅)’의
이생은 순차생수업을 짓는 일이 없으며,
성자는 순차생과 순후차수업을 짓지 않으며,
아울러 욕계ㆍ유정(有頂)으로 물러난 [성자도 그러하다].
논하여 말하겠다.
순현법수업 등의 세 가지 업은 오로지 정업(定業)이며, 아울러 여기에 부정업을 합하여 네 가지가 되었으니, 이러한 설이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설에서는 오로지 [과보를 받는] 시기가 결정되고 결정되지 않음을 나타내고 있을 뿐으로, [이는 바로] 경에서 설한 4업의 상을 해석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네 가지의 업을 동시에 짓는 경우도 있는 것인가?
있을 수 있다.
어떠한 경우가 그러한 것인가?
세 명의 사자(使者)를 보내고 나서 스스로 욕사행(欲邪行)을 행할 때 네 가지의 업을 동시에 성취하게 된다.90)
[네 가지 업 가운데] 몇 가지의 업이 능히 중동분(衆同分,즉 一期의 생)을 인기할 수 있는 것인가?
[중동분을] 인기하는 것은 오로지 순현법수업을 제외한 세 가지 업이니, 현신의 동분은 선행된 업에 의해 인기되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계(界), 어떠한 취(趣)에서 능히 몇 가지의 업을 짓는 것인가?
모든 계, 모든 취에서는 선이든, 혹은 악이든 그것에 상응하는 바에 따라 네 가지 업 모두를 지을 수 있으니, 전체적으로 나타내어 보면 이와 같다.
그러나 만약 개별적으로 짓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언급해 보면, 지옥 중에서는 선에 상응하는 순현법수업이 제외되니, 그곳에는 참으로 애호할 만한 과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밖의 업은 모두 지을 수 있다.
물러남이 없는 종성[不退姓]을 ‘견(堅)’이라고 하는데,
만약 그러한 이로서 이생의 존재라면 이염지(離染地)에서 순차생수업을 제외한 그 밖의 세 가지 업을 지을 수 있으며,
그러한 이로서 성자라면 이염지에서 순차생수업과 순후차수업의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 업을 지을 수 있다.
즉 이생으로서 물러남이 없는 자는 다음 생에 더 이상 [하계 즉 욕계에] 태어나는 일이 없지만 그 후 하계에 다시 태어나는 일은 있다.
그러나 물러남이 없는 성자는 필시 하계의 온갖 지에 다시 태어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순차생수업과 순후차수업이 제외된 것으로], 태어난 지에 따라 순현법수업을 짓는 것만이 허용된다.
그리고 부정업을 짓는 것은 어떠한 처소에서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온갖 성자로서 만약 욕계나 유정처(有頂處,즉 비상비비상처)에서 이미 이염을 획득한 자라면, 비록 물러남이 있을지라도 역시 순차생수업과 순후차수업을 짓지 않는다.
즉 그곳으로부터 물러난 자는 반드시 그러한 과위(果位,불환과와 아라한과)에서도 물러나기 때문으로,
이미 그러한 과위에서 물러난 이는 반드시 명종(命終)하지 않고 [다시 본래의 과위를 획득하게 되니],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마땅히 분별하는 바와 같다.91)
[중유(中有)의 업]
중유(中有)의 상태로 머물면서도 역시 업을 짓는 것인가?
역시 짓는다.
어떻게 짓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중유위에서는 능히
스물두 종류의 업을 짓는데,
모두 순현법수업에 포섭되니,
종류의 동분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 중에서 중유의 상태로 머무는 이는 능히 스물두 가지의 업을 지을 수가 있으니,
이를테면 중유의 상태와, 태(胎) 중에 처해서와 출태(出胎) 이후의 각 5위(位)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이 바로 그것이다.92)
여기서 태중의 5위란,
첫째는 갈랄람(羯剌藍)이며,
둘째는 알부담(頞部曇)이며,
셋째는 폐시(閉尸)이며,
넷째는 건남(鍵南)이며,
다섯째는 발라사가(鉢羅奢佉)이다.
또한 태외(胎外) 5위란,
첫째는 영해(嬰孩)이며,
둘째는 동자(童子)이며,
셋째는 소년이며,
넷째는 중년이며,
다섯째는 노년이니,93)
[스물 두 가지의 업이란] 중유의 상태에 있을 때 중유 내지 노년[을 초래하는] 정업과 부정업을 짓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중유에 의해 지어진 열한 가지 종류의 정업은 모두 순현법수업에 포섭되는 것으로, 각 종류의 동분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94)
말하자면 이 같은 중유의 상태와 자류(自類)의 열 가지 단계는 동일한 중동분으로서,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순중유수업(順中有受業)을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니, 그것은 바로 순차생수 등의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기 때문이다.95)
[정수업(定受業)의 상]
온갖 정수업(定受業)은 그 상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거운 번뇌나 청정한 마음에 의한 업과
아울러 늘 조작되어 행해지는 업과
공덕의 복전[功德田]에 대해 일으킨 업과
부모를 해치는 업이 바로 정업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지어진 업으로서,
무거운 번뇌, 혹은 맑고 깨끗한 마음[淳淨心]에 의한 것이나, 혹은 항상 습관적으로 행해진 것이나, 혹은 뛰어난 공덕의 복전(福田)에 대해 일으킨 것이면, 그것은 바로 정업(定業)이다.
여기서 공덕의 복전이란 불(佛)ㆍ법(法)ㆍ승(僧), 혹은 증상의 보특가라로서 뛰어난 과위(果位), 뛰어난 선정을 획득한 자를 말한다.96)
즉 이러한 공덕의 복전에 대해, 비록 무거운 번뇌나 맑고 깨끗한 마음이 없다고 할지라도, 또한 역시 항상 습관적으로 행해진 업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해 선 혹은 불선에 의해 일으킨 온갖 업이 바로 정업인 것이다.
혹은 부모에 대해 경중(輕重)의 마음에 따라 해코지[損害事]를 행하는 이와 같은 일체의 업도 모두 정업에 포섭되며, 그 밖의 것은 정수업이 아니다.
[현법과업의 상]
현법과업(現法果業,즉 현생에서 과보를 받는 순현법수업)은 그 상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승한 복전과 의요에 의한 업과,
아울러 결정코 이숙은 초래하지만
영리(永離)를 획득한 지(地)의 업은
결정코 현법에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97)
논하여 말하겠다.
‘수승한 복전에 대한 업’이란,
이를테면 어떤 필추가 대중스님[僧衆]들에 대해 여인이라는 말을 하여 [모욕을 줌]으로써 그는 현세에 여인으로 변화하였다고 전해들은 것이 바로 그 같은 예이니,
이같이 전하여 듣는 이야기는 그 종류가 한 가지만이 아니다.
‘뛰어난 의요에 의한 업’이란,
이를테면 어떤 황문(黃門, 성불구자)이 여러 마리의 소가 황문이 되는 것(즉 거세되는 것)을 구하여 주었기 때문에 그는 현세에 장부(丈夫)로 변화하였다고 전해 들은 것이 바로 그 같은 예이니,98)
이같이 전하여 듣는 이야기도 역시 한 가지만이 아니다.
혹은 이러한 지(地)에서 태어나 이러한 지의 염오를 영원히 떠날 때 이러한 지에서 행한 온갖 선ㆍ불선의 업으로서 이숙과는 결정되었지만 시기[位]가 결정되지 않은 것이라면, 이러한 업은 반드시 능히 현법(現法)에 그 과보를 받게 된다.99)
그러나 만약 [이러한 지에서] 그 밖의 다른 상태에서 지은 순정수업(이를테면 순생수 내지 순후수의 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시 염오를 영원히 떠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상태에서 반드시 이숙과를 받게 된다.100)
또한 만약 이숙과 역시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염오를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이숙과를 받지 않는다.
[공덕의 복전]
어떠한 복전에 대해 일으킨 업이 결정코 바로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부처님을 상수(上首)로 하는 승가와,
아울러 멸진정과 무쟁정(無諍定)과
자비정과 견도와 수도에서 나온 자에 대해
해코지하고 이익되게 하는 업은 바로 과보를 받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종류의 공덕의 복전[功德田]에 대해 선ㆍ악의 업을 행할 때, 결정코 바로 그 과보를 받게 되니,
여기서 ‘공덕의 복전’이란 부처님을 상수(上首)로 하는 승가를 말한다.
그러나 보특가라에 근거하여 말할 경우, [이러한 공덕의 복전에는] 다섯 가지의 차별이 있다.
첫째로는 멸진정에서 나온 자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선정 중에서는 마음이 적정(寂靜)을 획득하는데, 이러한 선정의 적정은 열반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선정으로부터 나와 처음으로 마음(즉 出定心)을 일으킬 때에는 열반에 들었다가 다시 나온 자와 같기 [때문에 공덕의 복전이라 하는 것이다].
둘째로는 무쟁정(無諍定)으로부터 나온 자이니,101)
이를테면 이러한 선정 중에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정을 소연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을 이익되게 하려는 뛰어난 의요가 수반되기 때문에,
이러한 선정에서 나올 때에는 무량 최승의 공덕(무쟁의 공덕)에 의해 훈습된 소의신이 상속하여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공덕의 복전이라 하는 것이다].
셋째로는 자비정[慈定]으로부터 나온 자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선정 중에서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유정을 소연의 대상으로 삼아 그들을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려는 뛰어난 의요가 수반되기 때문에,
이러한 선정에서 나올 때에는 무량 최승의 공덕에 의해 훈습된 소의신이 상속하여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공덕의 복전이라 하는 것이다].
넷째로는 견도(見道)로부터 나온 자(즉 예류과의 성자)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도에서는 일체의 견소단의 번뇌를 영원히 끊고서 뛰어난 전의(轉依)를 획득한다.102)
즉 이러한 도에서 나올 때에는 청정한 소의신의 상속이 일어나기 [때문에 공덕의 복전이라 하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수도(修道)로부터 나온 자(즉 아라한)이니,
이를테면 이러한 도에서는 일체의 수소단의 번뇌를 영원히 끊고서 뛰어난 전의를 획득한다.
즉 이러한 도에서 나올 때에는 청정한 소의신의 상속이 일어나기 [때문에 공덕의 복전이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를 설하여 ‘공덕의 복전’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만약 이 같은 공덕의 복전에 대해 해코지하거나 이익되게 하는 업을 지을 경우, 이러한 업은 반드시 능히 바로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나 만약 그 밖의 다른 선정이나 다른 과위(果位)로부터 나올 때에는,103) 이전에 닦은 것이 결코 수승한 공덕은 아니며,
수소단의 번뇌도 필경 아직 다 멸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상속은 뛰어난 복전(福田)이 아닌 것이다.
[심수와 이숙의 관계]
이숙과 중에서는 수(受, 즉 고ㆍ락의 수)가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온갖 업 중에서 오로지 심수(心受)의 이숙만을 초래하는 경우가 있는가?
혹은 신수(身受)의 이숙만을 초래하고 심수는 초래하지 않는 경우도 있는 것인가?104)
역시 있다.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갖 선한 무심(無尋)의 업은
오로지 심수만을 초래하는 것으로 인정되며,
악은 오로지 신수만을 초래하니,
이것이 바로 수(受)를 초래하는 업의 차이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선한 무심(無尋)의 업’이란 이를테면 중간정(中間定)으로부터 유정천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선업을 말하는데,
여기서 능히 수의 이숙을 초래하는 선업은 단지 심수만을 초래하고 신수는 초래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신수는 반드시 심(尋)ㆍ사(伺)와 구기(俱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온갖 불선의 업으로서 능히 수의 이숙을 초래하는 것은, 단지 신수 만을 초래하고 심수는 초래하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왜냐 하면 불선의 원인은 고수(苦受)를 결과로 삼지만, 우수(憂受:마음과 구기하는 고수를 우수라고 이름한다)는 필시 이숙과가 아니기 때문으로, 이미 앞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105)
[마음이 미치는 원인]
[우근(憂根)이 이숙이 아니라고 한다면] 유정들이 일으키는 심광(心狂), 즉 마음의 발광은 어떠한 식(識) 중에서,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어떠한 처소에 의지하여 일어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심광은 오로지 의식 중에서
업의 이숙에 의해 생겨나고, 아울러
두려움과 해코지와 어긋남과 근심에서 생겨나며,
북구로주를 제외한 욕계에 존재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유정의 심광(心狂)은 오로지 의식(意識)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5식(識)에는 필시 심광이 존재하지 않으니, 5식신은 무분별이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원인으로 말미암아 유정의 마음은 미치게 된다.
첫째는 유정이 지은 업의 이숙으로 말미암아 미치게 된다.
이를테면 약물이나 주술을 이용하여 다른 이의 마음을 미치게 하고,
혹은 또한 다른 이가 원하지도 않는 독이나 술을 마시게 하며,
혹은 위엄을 나타내어 날짐승과 길짐승 따위를 두렵게 하고,
혹은 맹렬한 불을 놓아 산과 못을 태우며,
혹은 구덩이를 파 중생을 거기에 빠뜨리며,
혹은 그 밖의 다른 사업으로써 다른 이의 정신을 잃게 하면,
이 같은 업을 원인으로 하여 미래세에 지금과는 다른 종류의 이숙을 초래하여 능히 마음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둘째는 놀라고 두려워함[驚怖]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이를테면 비인(非人, 예컨대 귀신) 등이 무서워할 만한 형상으로 나타나 핍박할 때 유정은 그것을 보고 나서 마침내 마음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셋째는 상해(傷害)를 입으므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이를테면 어떤 일을 도모함으로써 비인 등을 괴롭히면106) 그들이 진노하여 그의 지절(支節, 末摩 즉 급소를 말함)을 해치게 되고 마침내 마음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넷째는 조화되지 않음[乖違]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이를테면 몸 안의 풍(風)과 열(熱)과 담(痰)의 한계가 서로 어긋나 4대종이 조화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미치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는 근심[愁憂]으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이를테면 친애(親愛)하는 이를 상실함에 따라 수심의 독(毒)이 마음에 사무쳐 마침내 마음이 발광하게 되는 것으로, 예컨대 바사(婆私) 등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107)
만약 이 같은 심광이 바야흐로 제6 의식에만 존재하며,
또한 다시 이러한 심광이 업의 이숙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어떻게 심수(心受)는 이숙이 아닌 것인가?108)
심광이 바로 업의 이숙이라고는 설하지 않았으며, 다만 업의 이숙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하였을 뿐이다.
악업을 원인으로 하여 불평등한 이숙의 대종을 초래하며, 이러한 대종에 의해 마음이 바로 실념하니,
그래서 ‘미쳤다’고 설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심광과 심란(心亂)의 관계에 대하여 마땅히 4구(句)로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니,109)
이를테면 심광이면서 심란은 아닌 것이 있으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즉 심광이면서 심란이 아닌 것은, 이를테면 미친 자의 온갖 불염오심이다.
심란이면서 심광이 아닌 것은, 이를테면 미치지 않은 자의 온갖 염오심이다.
심광이면서 역시 심란인 것은, 이를테면 모든 미친 자의 온갖 염오심이다.
심광과 심란이 아닌 것은, 이를테면 미치지 않은 자의 불염오심이다.
[어떤 종류의 유정에게 이러한 심광이 있는가 하면] 북구로주를 제외한 그 밖의 욕계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유정들에게 심광이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욕계천에서조차 마음이 발광하는 자가 있는데, 하물며 인간이나 악취가 심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특히 지옥은 항상 미쳐 있으니, 많은 괴로움이 핍박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온갖 지옥에서는 항상 여러 가지 다양한 종류의 괴로움을 주는 도구[苦具]로 말마(末摩, marman, 死穴)를 상해하는 것이 지극히 맹리하여 참으로 참기 어렵다.
그러니 고수(苦受)에 핍박되는 것조차 스스로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시비(是非)를 알 것인가?110)
그래서 지옥 중에서는 원한에 사무친 마음[怨心]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미쳐 날뛰며 울부짖는다고 세상에서 전해지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로지 모든 부처님을 제외한 욕계의 성자는 대종이 조화되지 않을 때에는 심광이 있을 수 있지만 이숙생의 심광은 없다.111)
만약 [그들에게 이숙의 대종을 초래하는] 정업이 있다고 한다면 필시 마땅히 먼저 [심광의 과보를] 받고 난 후에 비로소 성자를 획득할 것이며,
만약 정업이 아니라고 할 경우 성도(聖道)를 획득하였기 때문에 능히 [심광의] 과보를 받게 되는 일도 없는 것이다.
또한 놀라고 두려워함도 없으니, 다섯 가지 두려움을 초월하였기 때문이며,
또한 역시 상해를 입는 일도 없으니,
모든 성자는 비인(非人) 등이 증오하고 혐오할 만한 일을 한 일이 없기 때문이며,
또한 역시 근심하는 일도 없으니, 법성(法性)을 깨달았기 때문이다.112)
[곡업ㆍ예업ㆍ탁업]
또한 경 중에서 설하기를,
“업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곡(曲)ㆍ예(穢)ㆍ탁(濁)이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
그 같은 업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경에서] 설하기를, 곡업과 예업과 탁업은
아첨과 진에와 애탐에 의해 생겨난다고 하였다.
논하여 말하겠다.
신(身)ㆍ어(語)ㆍ의(意) 3업에는 각기 세 종류가 있으니, 말하자면 곡ㆍ예ㆍ탁이 바로 그것으로,
이는 순서대로 아첨[諂]과 진에[瞋]와 애탐[貪]에 의해 생겨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즉 아첨에 의해 생겨난 신ㆍ어ㆍ의 업을 일컬어 ‘곡업(曲業)’이라고 하는데, 아첨은 왜곡[曲]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만약 진에 의해 생겨난 신ㆍ어ㆍ의 업이라면 그것을 일컬어 ‘예업(穢業)’이라고 하는데, 진에는 더러움[穢]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만약 애탐에 의해 생겨난 신ㆍ어ㆍ의 업이라면 그것을 일컬어 ‘탁업(濁業)’이라고 하는데, 애탐은 탁함[濁]의 종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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