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는 한반도의 3배 크기, 인구는 3,100만 명에 달하는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은 다민족국가로 종족간 갈등이 많은 곳이다. 아리아인 계열로 추정하는 남쪽 지방의 파슈툰족(Pashtun, 44%), 북동쪽에 사는 이란 계 타지크족(Tadzhik, 25%), 북쪽 지방의 우즈베크족(Uzbek, 8%), 몽골족의 후예인 중부 산악지방의 하자라족(Hazara, 10%), 기타 아이마크족(Aimaq)이나 키르기스족(Kyrgyz) 등 여러 민족이 각기 연고를 둔 지역에 살고 있으며, 한 민족이 집권하여 수도 카불(Kabul)에 입성하면 타민족이 반기를 드는 악순환이 반복되어왔다.
비록 탈레반(Taleban)에 대항하여 싸우던 북부동맹의 핵심은 우즈베크족과 타지크족이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절대 자수를 차지하는 민족은 파슈툰족이다. 따라서 탈레반을 전복한 이후에도 파슈툰족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정부란 없을 것임이 자명했다. 결국 파슈툰족 출신 정치인이 차기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되어야만 했다.
전시상황이니만큼 새로운 아프가니스탄은 '카리스마를 갖춘 전투적 지도자'를 필요로 했다. 그 조건에 맞는 후보자 중 하나가 바로 압둘 하크(Abdul Haq)였다. 하크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당시 이에 대항한 무자헤딘(mujāhidūn) 지휘관으로 파슈툰족에게 존경을 받았다. 치안장관을 역임한 그는 탈레반 정권이 들어서자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두바이(Dubai)에 정착하여 사업가로 변신했다.
미국 정부는 그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CIA에서 압둘 하크는 '할리우드 하크(Hollywood Haq)'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는데, 기자들 앞에서 말로만 떠들고 실제로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9.11테러가 발발하자 압둘 하크는 겨우 20여 명의 추종자를 이끌고 2001년 10월 22일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왔다.
출발 전에 그는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두 동생을 창구로 하여 미국의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CIA는 이전까지 공수표를 남발했던 그를 그저 담담히 지켜보기만 했다. 압둘 하크는 지지기반이 약해서 탈레반을 공격할 만한 병력을 모을 수 없음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압둘 하크 일행의 이동은 곧 탈레반에게 감지되었다. 도요타 트럭으로 추적하는 탈레반에게 당나귀로 이동하는 하크는 쉬운 먹잇감이었다.
파키스탄(Pakistan)의 한 호텔에서 형의 진군을 무전교신으로 지켜보던 하크의 동생들은 부랴부랴 이슬라마바드(Islamabad)의 미 대사관으로 전화를 해서 하크의 위기를 알렸다. 대사관의 CIA 직원은 이를 곧바로 정보보고로 올렸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오사마 빈 라덴(Osama bin Laden)을 찾아 사냥에 한참이던 프레데터 UAV팀1)은 대략 1시간 후에 압둘 하크의 위치를 파악했다.
공중에서 본 하크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탈레반에 완전히 포위된 하크에게 탈출구는 없어 보였다. 프레데터 무인기(UAV)는 장착하고 있던 헬파이어(Hellfire) 미사일을 날려 탈레반 트럭 몇 대를 파괴했지만 무인기만으로 하크를 돕기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압둘 하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탈레반에 체포되어 카불로 압송된 하크와 그 부하들은 심한 고문을 당한 뒤에 10월 26일 총살당했다.
압둘 하크가 죽자, 남부에서 탈레반에 대항할 파슈툰족 지도자는 단 한 사람이 남았다.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가 바로 그 지도자였다.
미국의 입장에서 마지막 카드는 바로 하미드 카르자이였다. 군벌이나 전쟁영웅은 아니었지만, 카르자이는 민주적 사상을 가진 합리적인 지도자였다.
【CC BY】 Harald Dettenborn
보통 키에 마른 체격인 하미드 카르자이는 전선에서도 옷을 잘 차려입는 신사였다. 표정은 온화하고 회색빛의 수염에 약간 머리가 벗겨진 그의 모습은 부족 지도자라기보다는 대학교수에 가까웠다.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 의회의 부의장을 지낸 압둘 아하드 카르자이(Abdul Ahad Karzai)의 아들이었다. 파슈툰어, 다리(Dari)어, 우르두(Urdu)어, 프랑스어, 영어에 능통한 그는 1980년대 소련과의 전쟁에서 공보업무와 대민지원업무를 담당했었다. 구 소련이 물러간 후 그는 새로운 독립정부에서 외무차관을 역임했다.
그러나 카르자이는 정계의 파워게임에 희생되었다. 파키스탄 정부의 스파이라는 혐의로 체포되어 당시 북부동맹 지도자 모하마드 파힘(Mohammad Fahim) 장군2)에게 신문을 당하던 카르자이는 자신이 갇힌 건물이 RPG 로켓으로 공격당하는 틈을 타 탈주했다. 이후 카르자이는 탈레반 정권에 잠시 가담했다가, 그들의 가혹한 원리주의에 반대하여 파키스탄으로 망명했다.
파키스탄의 망명 아프가니스탄인 사회에서 명망이 높았던 카르자이 집안은 공식 석상에서 여러 차례 탈레반 정권에 대한 반대의사를 밝혔다. 결국 탈레반 정권은 2000년 8월 파키스탄의 퀘타(Quetta)에서 그의 아버지 압둘 아하드를 암살했다. 탈레반과 카르자이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 되는 순간이었다.
9.11테러 직후 카르자이는 이슬라마바드의 미 대사관에 홀연히 나타나, 자신은 탈레반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며 곧바로 고향인 타린코트(Tarinkot)로 돌아가 반군을 조직하겠노라고 말했다. 카르자이의 가능성을 파악하고 있던 미국은 이에 반대했다. 적어도 미군이나 CIA 팀이 공조할 준비가 될 때까지는 기다리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카르자이는 자신의 의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아직 미국의 공습이 시작되기 전인 10월 초순에 단 3명의 측근을 데리고 아프가니스탄 남부로 향했다. 오토바이 2대에 분승한 이들은 탈레반이 장악한 지역을 돌파해나갔고, 타린코트 인근에서 지지자들을 모아서 반군을 형성했다. 하지만 카르자이에게는 무기와 탄약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카르자이를 존재를 눈치 챈 탈레반은 곧바로 인근 도시 칸다하르(Kandahar)에서 병력을 파병했다. 병력과 화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카르자이 일행은 곧바로 퇴각했다. 탈레반 병력에 포위당한 카르자이는 타린코트 동쪽의 산맥을 타고 파키스탄으로 도주하여 압둘 하크와 같은 비극을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미국의 지원이 없이 혼자서 아프가니스탄에 들어가는 것이 자살행위란 것을 깨달은 카르자이는 이제 파키스탄의 퀘타로 돌아가 미군과 CIA의 지원을 기다렸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CIA에는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활동할 특수작전팀이 없었다. 이에 따라 최초의 아프가니스탄 남부 작전팀으로 '조브레이커 에코(Jawbreaker Echo) 팀'을 만들었다. 10월 말 퀘타에서 비밀리에 에코팀과 회합을 가진 카르자이는 CIA로부터 전격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10월 말부터 시작된 북부동맹과 미군 특수부대의 총공격에 의해 11월 9일에는 마자르이샤리프(Mazār-i-Sharīf)가, 11월 12일에는 수도 카불이 함락되었다. 이런 대공세의 혼란을 틈타 카르자이는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카르자이의 최초의 목표는 타린코트였다. 그가 타린코트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곳이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은 탈레반 운동의 진원지 중 하나로, 타린코트 인근 지역은 탈레반의 주요지도자 가족들이 사는 곳이기도 했다. 타린코트 점령은 탈레반에게 정신적으로 커다란 타격을 줄 터였다.
전략적으로도 타린코트는 중요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70킬로미터 지점에는 탈레반 정권의 실질적 수도인 칸다하르가 있다. 타린코트는 탈레반의 공격을 막아내기 유리한 분지 지형인데다가 카르자이의 정치적 근거지이니 만큼 많은 수의 반군을 모집할 수 있었다. 탈레반 정권의 심장에 칼을 꽂을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타린코트가 있었던 것이다.
타린코트 공세를 앞둔 11월 14일, 4대의 헬리콥터가 타린코트 인근의 한 마을에 도착했다. CIA 소속의 조브레이커 에코팀은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프가니스탄 남부에 파견된 최초의 그린베레 작전팀인 ODA-574를 인도해왔던 것이다.
"텍사스 14"라는 호출명으로 불리던 ODA-574는 제5특전단 제2대대 소속으로 베테랑 대원들로 구성된 A팀3)이었다. 중대장인 제이슨 아메린(Jason Amerine) 대위는 레인저로 파나마에 참전하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소대장을 지내기도 한 베테랑 특수전 장교였다. 팀의 선임부사관인 제퍼슨 데이비스(Jefferson Davis) 상사는 걸프전 시절부터 제5특전단에 뼈를 묻은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9.11테러 당시 카자흐스탄(Kazakhstan)에서 특수전 교육을 실시 중이던 텍사스 14는 이런 노련한 팀 멤버들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아프가니스탄 작전을 위해 2개월간 철저한 준비를 해왔다.
당시 카르자이가 모은 파슈툰족 반군은 겨우 25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텍사스 14와 CIA팀 에코, 그리고 막강한 미 공군력이 지원하면 어떻게든 타린코트의 탈환은 가능해보였다. 카르자이의 제안은 타린코트로 향하는 통로를 모두 차단하고 기다리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알아서 항복해 올 것이라는 것이 그의 추측이었다.
그러나 카르자이의 추측은 크게 빗나갔다. 카르자이가 포위도 하기 전에 타린코트가 항복을 선언한 것이다. 카르자이와 미군의 연합군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게 된 부족민이 반란을 일으켜 탈레반 계열인 시장을 사살하고 행정관리들을 몰아낸 것이다.
예상치 못한 급박한 상황 전개에 텍사스 14와 카르자이는 당황했다. 이렇게 약한 병력으로 마을로 진군했다가는 칸다하르로부터 증원될 탈레반군의 역습에 전멸당할 위험도 있었다. 그러나 타린코트를 비워둘 수는 없었다. 이곳을 점령해야 아프가니스탄 남부에 반군의 근거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위험대비 성과분석을 마친 부대원들은 곧바로 잡아탈 수 있는 차량은 모두 동원해서 타린코트로 달려 들어갔다. 도착과 동시에 카르자이는 새로운 정부가 구성된 청사로 향하여 부족민의 지지를 이끌어냈고, 텍사스 14는 도시를 순회하면서 방어위치를 머릿속에 우겨넣었다.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편 타린코트에 반군이 진주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탈레반군은 곧바로 병력을 파견했다. 카르자이 같은 파슈툰족 지도자가 반군을 이끈다면 탈레반 정권의 기반인 파슈툰족의 지지와 함께 정권의 정당성을 잃게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칸다하르에서 80여 대의 차량행렬과 함께 300~500명 규모의 탈레반군이 타린코트로 진격해 들어왔다.
대대적인 반격을 위해 다수의 탈레반군이 이동하고 있다는 첩보는 02시경에 텍사스 14에 전해졌다. 그린베레와 CIA의 에코 팀원을 합쳐봐야 겨우 20명도 되지 않았다. 그들이 상대해야 할 것은 500여 명의 병력. 우선 총을 가진 마을 남성이라면 모두 반군으로 소집하여 타린코트를 방어하기로 했다.
대규모 반격이 있을 것을 진작부터 예측했던 그린베레 대원들은 이미 전날 저녁부터 타린코트의 각지로 흩어져 묵묵히 임무를 수행했다. 통신부사관은 지휘부로 절대다수의 탈레반이 반격을 가해올 것이라는 보고를 올렸고, 공군 공정통제사는 공군과 해군에 많은 항공기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미리 통보했다. 화기부사관은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무장한 남자들을 모아 일종의 방어부대를 구성했다. 선임하사는 대원들 사이를 돌며 병기, 공병, 통신 등에서 혹시나 놓친 것은 없는지 철저히 챙기고 다녔다.
칸다하르에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도로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서 근접항공지원을 부르는 일이다. 텍사스 14는 처음에는 도로가 한눈에 보이는 산 정상에다가 OP(관측소)를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로를 더 따라 올라가보니 험준한 지형이 끝나고 폭이 상당히 넓은 계곡이 눈앞에 펼쳐졌다. 험준한 지형이 끝나는 타린코트 방면에서 칸다하르 방면을 바로 보니 약간의 넓은 평지가 펼쳐진 후에 다시 높은 지형이 시작되었다. 이런 지형이라면 칸다하르 방면에서 들어오는 탈레반은 계곡으로 들어오면서 지형을 살필 수 없지만 텍사스 14는 적의 모습을 낱낱이 볼 수 있었다. 텍사스 14는 곧바로 OP를 설치하고 SOFLAM 레이저 조준기를 준비했다.
머지않아 계곡 사이에서 차량이 일으키는 먼지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탈레반의 차량행렬이었다. 텍사스 14에 배속된 공정통제사는 인근에 대기 중이던 전폭기들을 불러들였다. 비행 중이던 F/A-18 편대가 응답하고는 폭격에 나섰다.
첫 2발은 목표를 빗나갔다. 실제 종종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대원들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항공지원으로 막지 못한다면 40여 명의 인원만으로 여기를 사수해야 한다. 하지만 장갑차라도 온다면···.'
그러나 세 발, 네 발··· 불스아이! 선두에 선 도요타 픽업트럭은 폭염과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 첫 2발은 싱거운 조준정렬이었다는 듯 나머지 폭탄들은 정확히 탈레반의 위치에 꽂혔다. 시각은 05시였다.
막상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고 있는 가운데 우스운 상황이 벌어졌다. 방어를 위해 같이 나왔던 아프가니스탄 반군 병사들이 겁에 질린 것이다. 이들은 한두 사람씩 슬슬 차량에 올라 타, 곧바로 시동을 걸고 마을로 돌아가 버렸다. 미군은 이들을 막으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현장에 있는 대원들 중에서 파슈툰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도주하는 병사들을 말릴 수도 없었다.
결국 텍사스 14는 더 이상의 방어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마을로 돌아가 버렸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런 일이 종종 있기에, 그린베레 대원들 사이에서는 자동차 열쇠를 꽂아놓지 말고 항상 가지고 다니라는 충고가 나돌곤 했다.
마을로 돌아온 텍사스 14는 카르자이가 마련해 놓은 사령부로 돌아와 차량들을 다시 회수해가야만 했다. 시동을 걸고 타린코트를 벗어나려는 순간 전방통제기(FAC)로부터 무선이 들어왔다.
"텍사스 14, 자네들의 OP까지 적들이 몰려왔다. OP는 이미 넘어갔다! 반복한다, OP는 적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좋은 관측위치를 잃어버린 텍사스 14에게 남은 것은 마을 외곽의 산등성이 뿐. 비록 적 차량의 이동이 한눈에 다 보이는 위치는 아니었지만, 밀려들어오는 적의 선두를 확인하고 공중지원을 요청할 수 있는 위치였다.
만약 여기서 탈레반을 막지 못하면 마을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카르자이만을 데리고 빠져나가야만 한다. 바로 이 제한된 시야의 위치가 텍사스 14에게는 최종방어선이었다. 결전 시작 시간은 07시 30분경.
SOFLAM 레이저 조준기로 무장한 대원들은 조준점을 차량행렬의 선두에 집중했다. 매번 도로를 따라 올라오려고 할 때마다 선두차량이 집중적으로 폭격을 당했다. 선두가 공격당할 때마다 행렬은 옆으로 퍼졌다가 후퇴하고 또 산개했다가 후퇴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리고는 몇 번의 계속된 시도 이후 드디어 적군의 사기는 꺾여버렸다. 더 이상 공격을 위해 앞에 나서는 차량은 없었던 것이다.
공군의 F-16과 해군의 F/A-18 전폭기들이 계속 레이저 유도폭탄과 GPS 폭탄을 떨어뜨리는 가운데 드디어 적은 방향을 바꾸었다. 퇴각하는 적에 대해서도 전폭기들은 끈질기게 폭격을 가했다. 타린코트 전투의 승리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타린코트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아프가니스탄 남부에 최초로 반군세력이 형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군의 교두보도 마련되었다. 여기서 남쪽으로 70킬로미터만 내려가면 탈레반 정권의 실질적인 수도인 칸다하르였다. 칸다하르 점령은 카불 점령보다도 더욱 커다란 정치적인 승리였다. 즉 칸다하르 점령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최소한 정권교체의 차원에서는 실질적인 종료가 가능했다.
타린코트 전투의 승리는 전술적 이점보다는 심리전적인 요소가 강했다. 이곳이 미군과 반군 연합군에게 점령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탈레반은 이제 안주할 수 있는 도피처나 요새 같은 것은 없다는 절망감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탈레반을 지지해왔던 파슈툰족은 탈레반 대신에 카르자이를 더 신뢰하게 되었다. 특히 정치인 카르자이가 아닌 '카르자이 장군'으로서 일대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은 군벌이 지배해오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실제로 전투에 승리한 이후 많은 파슈툰족이 카르자이의 '해방군'에 가담했으며, 한동안 탈레반 측에 붙어 세력을 유지하던 군벌들은 이제는 카르자이 측으로 편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텍사스 14에게는 승리의 기쁨보다는 다가올 전투에 대한 걱정이 컸다. 반군은 칸다하르로 향하면서 적의 주공과 마주하기엔 적은 인원이었고 게다가 오합지졸이었다. 다행히도 타린코트 전투의 승리 덕에 카르자이 '해방군'의 규모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처음에 25명에 불과하던 병력은 11월 30일경에는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정도의 병력에 항공지원만 있다면 이제 칸다하르로의 진군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카르자이 반군이 페타우(Petaw)까지 이동하여 전방 배치하는 동안 텍사스 14는 병력에 지급할 무기, 식량 및 군복 등을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반군의 숫자는 계속해서 늘고 있었기 때문에 그 필요는 더 절실했다. 여기에 더하여 텍사스 14는 진군과 동시에 반군에 대한 훈련도 수행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었다. 같은 시기에 텍사스 14의 상급부대인 제5특전단 제2대대 본부, 즉 ODC-52가 카르자이와 행동을 같이하게 되었다. 제2대대장인 데이비드 폭스(David Fox) 소령은 이제 카르자이의 군사고문이 되어 칸다하르 점령을 지원해야만 했다.
12월 2일에 이르러서는 카르자이는 새로운 중도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었다. 이와 동시에 반군은 칸다하르로 향하는 교량이 있는 사이드 알림 카라이(Sayd Alim Kalay) 마을에 다다랐다. 이로써 칸다하르에 대한 본격적인 압박이 시작되었다. 그러기에 사이드 알림 카라이의 전투는 치열했다. 교량을 두고 남단의 탈레반과 북단의 미군-반군 연합군이 대치하는 형태가 이틀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칸다하르로 향하는 교두보를 지키려는 탈레반의 의지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여 이틀간 계속된 A팀의 정밀한 폭격지원에도 불구하고 교량은 함락되지 않았다. 심지어 폭격이 물러간 이후에는 탈레반이 교량 북단으로 반격을 가하기도 했다.
12월 4일이 되자 미군도 점점 초초해졌다. 공격부대를 조직하여 차량에 탑승시켜 일단 교량을 건너게 한 후에 양동으로 탈레반군을 소멸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아침 일찍부터 작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탈레반 측의 방어는 예상 이상이었다. 도요타 픽업트럭을 타고 교량을 질주하던 미군과 아프가니스탄 반군은 트럭에 정확한 사격이 작렬하자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더욱이 탈레반군은 말라버린 강을 타고 카르자이 측에 대한 반격을 개시했다.
무려 세 차례나 계속되는 탈레반의 역공에 전투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 텍사스 14는 하루 종일 공중지원을 불러대기에 여념이 없었다. 부상자 1명이 발생했지만 후송할 정신도 없었다. 이런 끈질긴 공격에 질렸는지 탈레반은 방어위치를 포기하고 퇴각해버렸다. 그리고 그날 저녁, 어둠을 틈타 진군한 A팀과 반군은 드디어 교량을 점령하고 칸다하르로 가는 공격로를 확보했다.
12월 5일 전열을 재정비한 카르자이 반군과 미군 A팀은 이제 본격적으로 칸다하르에 공격을 가했다. 연일 계속되는 공격 중에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칸다하르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샤왈리 코트(Shawali Kowt)라는 마을에서 텍사스 14는 적과 치열한 교전을 하고 있었다. 교량을 점령했지만 여전히 남쪽 언덕에서는 치열한 총격이 날아왔다. 정확한 사격은 아니었지만 아군에 위협이 될 만했으므로 잠재워야 했다.
텍사스 14 팀원들이 관측해본 결과 산 중턱의 동굴에 알카에다의 근거지가 있는 듯했다. 동굴의 출입구를 SOFLAM(특수부대용 레이저 표적지시기)으로 조준하자 지나가던 F/A-18 편대가 레이저 폭탄을 명중시키고 지나갔다. 그러나 폭탄의 위력이 약했는지 출입구는 무너지지 않고 동굴은 건재했다. 그러자 혈기 넘치는 젊은 공군 공정통제사 요시 요시다(Yoshi Yoshida) 중사가 극약처방을 내렸다. 2,000파운드짜리 합동직격탄(JDAM) GBU-31을 떨어뜨리기로 한 것이다. 그는 SOFLAM 레이저 조준기에 위성항법장치(GPS)를 연결하고 적의 좌표를 전투기 편대로 전송했다.
그리고는 약 30분 만에 비극이 발생했다. 공정통제사가 부른 GPS 폭탄이 바로 미군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이다. 이 피격으로 텍사스 14는 2명이 사망하고 나머지 7명은 중상을 입었다. 또한 ODC-52의 부사관 1명도 후송 중에 사망했다. 이와 함께 카르자이의 충실한 병사 23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폭탄은 간발의 차로 카르자이가 회의 중이던 건물을 빗나갔다. 카르자이는 이마가 약간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을 뿐 건재했다. 아군의 오폭사고로 아프가니스탄의 차기 지도자가 사망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사고의 원인은 GPS에 있었다. 요시다 중사가 SOFLAM에 GPS를 연결하고 좌표를 송신하려는 순간 GPS의 전원이 나가버렸다. GPS의 배터리가 방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시다 중사는 배터리를 새로 넣고 SOFLAM을 작동하여 읽은 좌표를 B-52 폭격기로 송신했다.
그러나 그가 몰랐던 것은 GPS의 독특한 특성이었다. 이렇게 전원이 도중에 나가버린 상태에서 SOFLAM과 연결된 GPS는 다시 전원을 넣으면 표적의 좌표가 아니라 자신의 현 위치좌표를 표시한다. 표적의 좌표를 알고 싶으면 SOFLAM과 연결을 끊었다가 다시 연결한 후 조준해야 한다. 이런 치명적인 사실을 모른 요시다 중사가 결국 아군 오폭을 유도한 셈이었다.
텍사스 14는 즉각 증강해야만 했다. 일단 새로운 병력이 올 때까지 약 절반의 인원으로라도 전쟁은 계속해야만 했다. 게다가 카르자이의 병사들은 베테랑 전사들도 아니었다. 그중 몇몇은 구 소련군에 대항하여 싸운 경험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저 평범한 마을 주민이었다. 이런 병사들에 의존하여 싸우는 와중에 그린베레 병력의 절반이나 손실을 입은 것은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폭격 덕분인지 치열했던 접전이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이르자, 텍사스 14는 아침 일찍 약 60명의 아프가니스탄 병력에게 마을 건너편의 언덕을 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병력이 부족한 그린베레를 대신하여 CIA 팀원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고지를 점령했다. 이들은 여유로운 커피 한 잔과 함께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고 하고 있었다. 아군 측 언덕을 바라보니 텍사스 14의 대원들도 픽업트럭에 모여 오늘의 일과를 준비하는 듯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총성이 울려 퍼졌다. 병사들이 점령한 고지 반대편, 그러니까 적 방향에서 사격이 시작된 것이다. 병사들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고 사격이 시작된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갑자기 반대편 언덕에서 3명의 사내가 모습을 나타냈다.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은 뭐라고 떠들다가는 갑자기 병사들이 점령한 언덕을 향해 달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적인 것만은 분명했다.
CIA 팀원이 쌍안경으로 본 적의 모습은 색다른 것이었다. 검은 색 터번에 검은 색 옷, 검은 색의 군장을 한 이들은 분명 탈레반군은 아니었다. 국적인 분명하지는 않았지만 현지인이 아닌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일렬횡대로 달려오던 3명의 모습이 어느 정도 확실해지자 갑자기 병사들이 외쳤다.
"체츠니야! 체츠니야!(체첸인이다!)"
미국인들에게는 꽤 놀라운 광경이었다. 체첸인이 탈레반과 함께 싸우고 있다는 루머가 나돌기는 했지만 이런 광경까지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체첸 출신 알카에다는 노련한 병사로 알려졌다. 특히 뛰어난 사격술과 과감한 전술로 북부동맹을 비롯한 반군들에게 커다란 피해를 안겨주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실제로 카르자이의 반군들 가운데서 미간에 정확히 총알 1발을 맞고 사망한 병사의 시체를 발견하자, 다른 병사들은 이것이 체첸인의 소행이라고 굳게 믿었다.
얼어붙은 카르자이의 병사들을 향해 CIA 요원들은 반격을 하라고 외쳤다. 전투 경험이 있던 몇 명의 병사는 호흡을 가다듬고 짧게 3~4발씩 끊으면서 달려오는 '체첸인'들을 향해 사격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사들은 "타다다다다당! 타다다다다다당!" 하면서 탄창 1개가 금방 빌 정도로 마구잡이로 쏘아댔다.
60여 명의 총알세례를 받으면서도 다가오는 3명의 적은 한 치도 움찔하지 않고 똑같은 속도로 언덕을 향해 올랐다. 정말 엄청난 용기였다. 미국인들은 그저 감탄을 하면서 지켜보았다.
탄창을 갈아 끼면서 병사들은 계속 사격을 해댔지만 1발도 명중하지 않았다. 그저 적 주변에 모래 먼지만 일으킬 뿐이었다.
이제 언덕을 다 내려온 3명의 알카에다는 언덕 정상의 카르자이군을 향해 외쳤다.
"알라 악흐바르!(알라는 위대하다!)"
그러자 병사들 중에 누군가 다시 "체츠니아"를 외쳤고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된 것인 양 60명의 병사가 고지를 포기하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CIA 요원들은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기다렸다가 한 번 붙어 볼까 하는 유혹도 있었지만 상대편은 3명이고 미국인은 단 2명. 일단 물러나기로 결정하고 도망가는 아프가니스탄인 대열에 합류했다. 한편 텍사스 14는 눈앞에 벌어진 광경이 도대체 무슨 일인지 어안이 벙벙해하고 있었다. 달려 나온 CIA 요원은 공군 공정통제사를 보고 물었다.
"근처에 대기 중인 B-52 폭격기 있어?"
"예, 우리 쪽에서 GPS 좌표를 불러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저기 언덕에다가 한 발 어때? 저기 세 마리한테 환영인사라도 해줘야 할 것 아냐."
그러자 2000파운드 GPS 폭탄이 준비되었다. 언덕을 바라보니 60여 명의 병력을 단숨에 몰아낸 3명의 적이 카르자이 반군을 비웃기라도 하듯 언덕 꼭대기에 서 있었다.
CIA 요원은 꼭대기에 서 있는 체첸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중 한 사람이 미국인의 인사를 보았는지 오른손을 들어서는 가운데 손가락만을 쭉 뻗으면서 화답했다.
바로 그 순간 GBU-31 폭탄이 언덕 꼭대기에 작렬했다. 지축을 뒤흔드는 충격파와 함께 엄청난 화염과 연기가 고지에 가득했다. 체첸인은 폭염 속에서 뼈도 남지 않고 증발했을 것이다. 카르자이의 병사들은 환호했다. 이렇게라도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지 않으면 이 전쟁은 이길 수 없었다.
카르자이군이 이렇게 북쪽에서 탈레반의 목을 조여 들어가는 사이 남쪽에서는 또 다른 반군 병력이 칸다하르로 진격하고 있었다. 타린코트에서 카르자이의 승리에 자신감을 얻은 또 한 사람의 지도자 굴 아가 셰르자이(Gul Agha Sherzai)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이끌고 11월 18일 TF 대거 소속의 또 다른 A팀인 ODA-583(호출명 텍사스 17)와 접선했다. 무기밀매상과 테러범, CIA의 놀이터랄 수 있는 파키스탄의 퀘타 시 인근에서 접선한 텍사스 17은 우선 800여 명의 셰르자이 병력에게 무기와 식량을 지원한 후 차량을 이용하여 아프가니스탄으로 잠입했다.
19일 신나라이(Shin Narai) 계곡을 향하여 별다른 저항 없이 북진을 시작한 이들은 21일 밤에 계곡 입구에 이르렀다. 부대의 이동에 앞서 셰르자이는 자신의 동생과 몇 명의 병사를 대표 자격으로 마을로 보냈다. 그 지역 탈레반 지도부의 항복을 받아냄과 동시에 부대의 안전한 이동을 보장받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협상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고 소수의 대표단은 오히려 총격전에 휘말렸다.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지만 텍사스 17은 신나라이 계곡을 통한 이동을 포기했다. 이들의 목표는 칸다하르였다. 카르자이의 부대와 함께 칸다하르를 동시에 공략하려면 전투에 앞서 전력을 최대한 보전할 필요가 있었다. 텍사스 17은 신나라이 계곡을 통한 통로를 포기했다. 대신 서쪽으로 방향을 꺾어 칸다하르 국제공항으로 향하는 4번 국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셰르자이의 부대는 카르자이와는 대조적으로 상당한 규모였다. 800여 명의 병력이 100여 대의 차량에 탑승하여 전진하고 있었다. 차량행렬에는 픽업트럭에서 화물트럭, 심지어는 트랙터까지도 있었다. 22일 4번 국도를 탄 셰르자이의 병력은 약 이틀간 더딘 전진을 계속했다. 차량행렬은 또다시 계곡이 나타나자 멈춰 섰다. 계곡 안쪽에 있는 타크테폴(Takht-e-pol)이라는 마을도 탈레반 세력이 장악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셰르자이는 다시 한 번 항복을 요구하기 위해 마을로 접근하려고 했다. 그러나 매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텍사스 17은 M4 카빈으로 응사하면서 셰르자이를 안전한 지역으로 피신시키고 언덕 쪽에 합동최종공격통제관(Joint Terminal Attack Controller; JTAC)4)을 파견하여 적에 대한 폭격을 실시했다. 매우 소규모의 교전이었지만 미군의 집중적인 폭격에 잔뜩 주눅이 든 탈레반은 아예 타크테폴 전역을 포기하고 퇴각해버렸다.
타크테폴을 점령함으로써 미군은 또 다른 지상보급로를 구축한 셈이었다. 4번 국도는 파키스탄의 차만(Chaman)까지 이어지는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핵심 도로였기 때문이다. 셰르자이와 텍사스 17은 즉각 타크테폴의 남단과 북단에 검문소를 설치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특히 타크테폴의 북단 검문소는 칸다하르 공항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타크테폴 북단의 능선에서 바라보면 칸다하르 국제공항과 칸다하르 시 남부를 쉽게 조망할 수 있었다. 텍사스 17은 이곳에 전방관측소를 설치하고 공습을 부를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셰르자이의 병력은 칸다하르의 탈레반 병력에 대항하기에는 아직 약체였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텍사스 17은 계속적인 공습을 통해 적의 의지를 꺾어 놓으려고 했다. 셰르자이를 공격하기 위해 북쪽에서 탈레반의 방어병력이 내려와 타크테폴의 북단 5킬로미터 지점의 와디(wadi, 사구)에 차단선을 구축했다.
비슷한 시기에 미 해병대가 칸다하르 남서쪽 90킬로미터 지점에 캠프 리노(Camp Rhino)라는 전진기지를 구축해 놓았다. 네이비 실 3팀의 1개 소대가 나흘 전에 미리 침투하여 비행장을 확보하자 미 해병대 소속 750여 명의 병력이 CH-46 헬리콥터와 CH-53 헬리콥터, C-130 수송기를 타고 날아왔다. TF-58 소속의 제15MEU(해병원정대)와 제26MEU 병력이 상륙모함 펠렐리우(USS Peleliu)와 바탄(USS Bataan)으로부터 항공기를 통한 상륙작전을 실시했던 것이다. 캠프 리노는 이후 급속히 군 기지다운 면모를 갖추어 갔다. 미 해군 공병단이 재빨리 전개하여 활주로 보수와 관제탑 건설, 전기연결 작업 등을 실시했다. 캠프 리노는 이후 해병대의 AH-1W 슈퍼 코브라(Super Cobra), UH-1N 휴이, CH-53 등 각종 헬리콥터의 전진기지로 톡톡히 제몫을 했다.
셰르자이·미 해병대와 탈레반의 대치 상태는 1주일 이상 계속되었다. 셰르자이는 그 사이 모든 병력을 전진 배치시켜 언제라도 칸다하르 국제공항으로 진격할 수 있게끔 준비를 갖추었다. 텍사스 17도 공항 주변에 넓게 포진한 적의 위치를 하나하나 레이저 지시기로 집어가면서 전폭기의 스마트 폭탄을 정확히 유도했다.
그리고 진격로상의 지뢰 및 장애물을 제거하고 탈레반의 의지를 꺾기 위해 다시 한 번 '빅블루 82' (BLU-82) 폭탄을 투하했다. 폭탄 투하와 함께 핵폭발에서나 있을 법한 엄청난 버섯구름이 칸다하르 인근을 뒤덮었다. 그리고 빅블루의 폭발 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몇몇은 항복하고 몇몇은 미쳐버리고 몇몇은 죽어나갔다. 그렇게 12월 초의 며칠이 지나갔다. 그리고 12월 7일 드디어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텍사스 17의 인도하에 셰르자이의 병력은 조심스럽게 공항으로 접근했다. 그러나 적으로부터의 총격은 없었다. 총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적 자체가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셰르자이에게 위성전화가 걸려왔다. 카르자이와 교섭한 탈레반이 칸다하르를 포기하고 물러났다는 것이다. 셰르자이의 부대가 총공세를 벌이기 하루 전인 12월 6일, 카르자이는 탈레반 수뇌부에 전화를 걸어 협상을 하면서 칸다하르를 비울 것을 요구했다. 폭격으로 인한 피해도 있었지만 카르자이는 셰르자이보다 앞서 협상을 통해 칸다하르를 함락했고, 이날 자신의 병력을 이끌고 칸다하르 시에 무혈입성했다. 셰르자이는 곧바로 친위병력을 이끌고 칸다하르 주지사 관저로 향했다. 탈레반에게 축출되기 전까지 셰르자이는 칸다하르의 주지사였다. 12월 8일 텍사스 17은 주지사 관저로 향하여 셰르자이와 이동을 같이 했다.
이날 TF-58의 제26해병원정대가 칸다하르 국제공항을 점령하면서 탈레반의 마지막 보루인 칸다하르는 쉽게 무너졌다. 탈레반 정권은 그렇게 허망하게 붕괴했다. 12월 8일, 전쟁을 시작한 지 단 2개월만의 일이었다.
비록 북부동맹처럼 군사력을 보유한 것도 아니었지만, 카르자이는 남다른 정치감각으로 군벌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있었고, 파슈툰족 출신이었기에 아프가니스탄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따라서 미국의 지원하에 새롭게 세워진 과도정부의 6개월짜리 수반에 카르자이가 선출되었다. 그리고 2002년 6월의 종족대표자회의에서 카르자이가 또다시 압도적 지지를 받아 차기 과도정부의 수반, 즉 대통령으로 재선출되었다.
이렇게 다른 군벌들과는 차원이 달랐던 카르자이를 미국은 십분 활용하여 새로운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비교적 단기간 내에 안정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카르자이가 정부 수반에 취임하면서 그의 경호는 제5특수전단 소속의 ODA로부터 합동특수전사령부(Joint Special Operations Command; JSOC) 예하부대로 이전되었다. 이런 중요인물의 경호임무는 '티어1' 특수부대인 델타포스나 데브그루가 담당하게 된다. '티어1'은 대테러 및 기타 정치적으로 민감한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특수부대 등급으로, 이런 '티어1' 부대는 실질적으로 국방장관이나 대통령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는다. 1994년 아이티에 대한 유엔(UN)의 군사개입에서 아리스티드(Aristide) 대통령을 경호했던 것도 델타포스와 데브그루였다.
카르자이와 같은 친미 지도자를 잃는다면 아프가니스탄은 다시 테러리스트의 천국이 될지도 몰랐다. 이에 따라 처음의 6개월간은 델타포스가 카르자이의 근접 경호를 맡았다. 1개 중대 16명이 24시간 밀착하여 경호임무를 수행했다. 대원들은 요인 경호에 적합한 M4 CQBR이나 MP5 기관단총으로 무장하고, 카르자이가 대중 앞에 나타날 때마다 그를 겹겹이 둘러쌌다.
8월이 되자 델타포스와 교대하여 데브그루가 카르자이의 경호를 맡았다. 원래 델타포스와 데브그루는 이런 식으로 순환하며 경호임무를 수행하는 일이 잦았다. 일례로 1994년 아이티 대통령의 경호도 처음은 델타포스, 그 다음은 데브그루, 이후에는 폴란드 특수부대인 GROM 등이 순환하여 수행한 바 있다. 데브그루 대원들도 델타포스처럼 캐주얼한 복장에 M4 CQBR이나 MP5로 무장하고 매섭게 카르자이를 보호했다. 특히 카르자이를 대동했기 때문에 언론에 노출되는 일이 잦았으므로, 대원들은 선글라스를 눌러쓰고 수염을 길렀다.
이렇게 데브그루의 경호를 받던 카르자이는 막내 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칸다하르로 갔다. 2002년 9월 5일, 카르자이 대통령은 저녁 예배를 마치고 차량을 이용하여 모스크 건너편에 있는 셰르자이 주지사의 관저로 향했다. 관저 앞에는 수많은 시민이 대통령을 보기 위해 몰려있었다. 차가 정차하고 문이 열리자 한 아프가니스탄 소년이 카르자이와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바로 그때 갑자기 총성이 울렸다.
아프가니스탄 정규군복을 입은 한 사내가 약 8발의 탄환을 카르자이 쪽으로 난사했다. 데브그루 대원들은 반사적으로 카르자이를 덮쳐 총알로부터 보호했다. 이 때 발사된 탄환 1발이 카르자이와 같이 차안에 있던 셰르자이 주지사의 목에 맞았다. 다행히도 치명상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근처에 있던 시민들이 암살범에게 덤벼들었다. 유단자인 한 가게 점원이 범인을 덮쳤고 다른 시민이 그를 도왔다. 그러나 데브그루의 판단은 냉혹했다. 시민과 테러범이 섞여 있는 상황임에도 테러범을 향해 총탄을 퍼부어댔다. 테러범은 그 자리에서 사살되면서 암살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테러범은 사살되었지만 카르자이를 보호하려던 시민 2명도 함께 사살되었다. 데브그루의 입장에서 보호해야 할 사람은 카르자이 뿐이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시민과 테러범을 격리하려다가 실패하여 요인을 보호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사살하는 게 더 낫다는 것이었다. 경호하는 쪽 입장에서는 요인 경호가 우선이며 시민을 보호하는 것은 그 다음 순위다. 문세광 저격사건 때 경호원의 사격에 사망한 여고생의 경우를 봐도 그렇다. 언론에는 특수부대가 카르자이의 암살을 막았다는 기사가 넘쳐났다. 그러나 무고한 2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망자에 대한 기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렇게 탈레반 정권의 전복, 새로운 지도자의 선출, 그리고 지도자의 목숨을 지키는 경호임무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중요한 역사의 현장에 특수부대가 있었다. 이렇게 특수부대는 4세대 전쟁에서 최고의 자원으로 한 나라의 흥망을 좌우할 수 있다. 우리도 이런 특수부대의 역할에 주목하고 전력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