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눈물 송호준2009년 5월 7일 영광도서 4층서 강연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훌륭하신 분들이 계시는 자리에서 강연 하게 되어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처럼 화창한날, 여러분의 가정에도 좋은 일 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내일은 어버이날 이라 돌아가신 어른들이 더 보고 싶은 마음 입니다. 오늘 제가 이야기 하려는 것은 행복한 눈물 에 대한 것입니다.
얼마전이였습니다. 제가 사는 해운대 역 근처 책방에 가는 길에, 40대 중반의 아주머니 한분이 작은 명함용 광고지를 움켜지고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짧은 순간에 지나가며 보니 처음으로 그러한 일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귀찮은 듯 피하자 주눅이 든 표정 이였습니다.
엄청나게 짧은 순간에 느낀 나의감정은 그냥 슬퍼 습니다. 내가 한발 짝 뒤돌아 그 광고지를 받을까도 생각하며 잠시 발을 멈추었으나 , 광고지 한 장 을 내밀지도 못하는 그 아주머니의 상태를 발견하곤 곧장 걸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잠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왠지 구걸하는 거지 보다 도 더 안타까웠기 때문 이였습니다. 가정에서 집안을 돌보는 엄마로서 그 역할만 하고 있을 수 없는 지금의 현실 때문에 부득이 길에 나온 그 아주머니의 모습은 곧 나와 우리의 모습 이였습니다. 젊은이들 로 가득한 그 백화점 근처는 아주머니의 존재 자체도 모르는 듯 웃음소리와 차 소리 로 넘쳐났습니다.
그날, 저는 생각했습니다. 제가 평생의 가치로 여겨오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이렇게 현실로 부족한 때엔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몇 년 전에 삼성에서 비자금용으로 보관하고 있던 미국의 팝아트 작가인 로이리히텐쉬타인 이 그렸던 행복한 눈물 이 생각났습니다. 행복한 눈물로 이름 지어진 이 작품은1964년 작품으로 한 여성이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는 만화 이미지를 확대한 가로×세로 96.5㎝의 회화작품입니다.
2002년 11월 13일 뉴욕 크리스티 경매의 현대미술 이브닝 세일에서 이 작품을 당시 환율로 약 90억 원에 낙찰 받았습니다.
지금의 시세로 200억 원에 호가하는 그 작품을 팔아 가난한 이들을 돕는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것도 잠깐의 효과 밖일 것입니다. 그 작품을 미술관에 두어 외국인 관광객들이 지속적으로 오게 하는 전략이 문화도 키우고 돈도 벌수 있어 훨씬 이롭겠지요. 장기적으로 본다면!
여하간 대단합니다. 구입할 당시 90억 원에 산 것이 5년 만에 200억 원이 되었으니 어마어마한 이윤이지요.
이렇게 만 계속된다면 우리나라도 금방 부자가 될 텐데.
저도 이렇게 시대를 앞서고 현물 적 가치도 높은 역작을 탄생시켜 우리나라의 예술적위상도 높이고 외화도 벌어오는 작품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그래서 여기계신 분들에게만 알려드리는 정보인데요, 제 그림 값이 지금은 얼마안하니 미리 구입해 두시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요 .하하!
문제는 그 별것 아닌 그림 하나가 왜 그리 비싼가 하는 의문이 드실 겁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이유는 그 작품이 한시대의 미적취향을 바꾼 결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면에는 현대미술시장을 노렸던 미국의 정치적 이유도 있었고, 시대적 배경과 복잡한 이유로 가득 하지만,그 이야기는 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다루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제가 꼭 드리고 싶은 이야기의 소재는 단 세 단어 입니다.
첫째 눈물
둘째 예술
셋째 감동
이 세 가지입니다.
그럼 첫 번째 눈물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겠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께서는 얼마나 아프고 외롭고 슬퍼서 울었던 날 들이 많았겠습니까. 저희 부모님들 만 봐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특히 엄마! (사전적으로는 어머니 라 해야 하지만) 6.25때 아들 하나를 잃고 얼마나 슬퍼했을지 상상이 됩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전 까지는 공부도 잘하고 똘똘해서, 꿈도 그 당시 가장 멋져보였던 공군 사관생도였습니다. 빨간마후라의 파일럿이 되겠다며 매일 학교만 다녀오면 친구들이 보는 높은 곳에 올라가 뛰어내리기를 하며 잘난 척 많이 했습니다. 제가 얼마나 자주 다쳤으면, 저희 집에서 별명이 짜깁기였습니다. 매일 한 가지씩 다쳤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들도 매일 그렇게 다치는 줄 알았는데 대학교 때 애인을 만나 물어보니 자기는 한번 도 다친 기억이 없다 하여 신기했습니다. 다친 이야기는 너무 많아 강연 끝나고 시간이 남으면 말씀드리기로 하고, 그중에 가장 큰 사건 하나만 우선 소개 하겠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3학년 어느 날 밤 숨기놀이 하는 중에 저는 친구들을 데리고 목수아저씨가 수북이 쌓아둔 나무 위에 올라가 납작하게 엎드려 술래가 어디로 가는지 몰래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술래가 우리가 있는 반대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고 군대의 작전참모처럼 앞으로 조금 씩 조금씩 진격하는 자세로 계속 가다가 그만 허공까지 가서 떨어졌고 그곳이 하필 비탈이라 굴러 훨씬 높은 2층높이의 시멘트바닥에 떨어 졌습니다. 그때 저는 정신을 잃었고 그로부터 수술을 받고 3일 후에 처음 눈을 떴답니다. 머리뼈가 깨어지는 뇌출혈을 일으켰고 저를 업고 정신없이 봉생병원 으로 갈 때 또 엄마는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 까요
피가 입으로 쿨컥 쿨컥 넘어오는 막내아들을 늦은 시간이라 의사가 없어 차가운 병실에 두고 응급조치조차 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 때 의 엄마는 또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요.
원장선생님이 오시고 수술을 받을 려고 해도 어느 정도의 기력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했답니다. 인공호흡기에 달려있는 어떤 용기에 물이 담겨 있었는데 제가 숨을 쉴 때마다 보글보글 올라오는데 이것이 가라앉으면 수술도 할 수 없고 죽는다고 하셨답니다. 하루를 꼬박 지켜보셨는데, 엄마가 잠이 오면 거품이 가라앉는 것 같아 눈을 비비고 다시 보면 그 상태고 해서 그 밤 내내 마음을 졸이셨답니다.
그러한 엄마였기에 훌륭히 자라 좋은 모습으로 보답해야 했는데 엄마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돌아가셨습니다.
그때 저는 3일 내내 울었습니다. 지금도 가끔 하얀 빨래가 걸려있는 집을 볼 때나 음식을 먹을 때 특히 물에 말은 밥에 김치 하고만 먹을 때, 그 당시의 엄마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고이곤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슬픔의 눈물을 흘린 일 과 아파서 운적은 많았지만 진정 행복하여 흘린 눈물은 몇 번 이나 될까요? 여기계신 어르신들은 행복한 눈물 을 흘리신 기억을 간직하고 있으신지요? 있으신 분 손 한번 들어 보아 주세요. 예. 의외로 많지 않군요. 그렀습니다. 어르신들! 사람들이 삶을 마감할 때 꼭 하는 말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임종을 앞둔 분이 “아! 나는 회사에 다닐 그때 좀 더 많은 일을 했어야 했어! 그리고 돈을 더 많이 벌어야 했어, 또,2009년 5월7일 영광도서 사랑방에서 강연한 송호준 서양화가가 한말을 꼭 기억했어야 했는데,” 이런 말은 결코 안한답니다.
돌아가시는 분 거의90%로 이상이, “내가 그 친구 에게 좀 더 잘해 주었어야 했는데, 또는 너 기억나나 그 개울가에서 물고기 잡던 일이, 매일 막걸리한잔 할 때가 좋았는데,” 이렇게 살아 있을 때 가장 행복했고, 잘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용서라고 합니다.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순간이지요. 그럼 우린 왜 미리 이렇게 하지 않을까요? 지금처럼 건강할 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무언가를 더 잘해줄 수 있고 또 용서해 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화가 표현하고 포옹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며, 개인의 감수성이 굳어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생수업 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다를 본 것이 언제였는가?
아침의 냄새를 맡아 본 것은 언제였는가?
아기의 머리를 만져 본 것은?
정말로 음식을 맛보고 즐긴 것은?
맨발로 풀밭을 걸어 본 것은?
파란 하늘을 본 것은 또 언제였는가?
누군가 옆에 있다는 것은 죽음의 순간에도 가장 중요한일이랍니다. 사랑은 바로 곁에 있어주는 것이며 돌봐 주는 것이라지요.
열렬히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이 한 번도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언젠가 헬렌 켈러가 말했듯이 "삶은 하나의 모험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 라고 했지요.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가슴 뛰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십시오. 친구들과 만나기만 해도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청소년 시절엔 누구나 시인이 되었습니다. 깡패같이 행동하던 녀석들도 여학생들 에게 보내는 편지만큼은 정성을 쏟았지요.
예술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 그 내면을 읽어 나갈 수 있는 감성을 통해 새로운 삶의 관점을 발견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감성교육의 부재로 인하여 얼마나 삭막하고 긴장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가 가르치는 회화과, 디자인과, 건축과 학생들 만해도 모두 예술분야에 속하지만 그들의 내면을 보면 매우 빈약한 상태입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세계 열한 번째 경제국이면서도 이렇게 힘들까요? 왜 이리 바쁘고 싸우는 일들이 많은지요. 그렇게 해서 행복해 졌나요?
제가 20년전 에 한 달간 유럽여행을 혼자 갔었는데, 첫 귀착지가 영국 이었습니다.영어한마디 못하면서 겨우 공항에서 통과해 조그만 호텔에 짐을 풀고 미술관으로 가는데 건널목을 건널 때마다 나만 뛰고 있는 겁니다. 아 ! 이게 왜 이런가 하며 그때 좀 부끄럽더라고요. 그러던 중 신호가 막 꺼졌는데도 할머니 한분이 건널목에 발을 내리는 순간 4차선 도로의 모든 차들이 출발 하지 않고 그 할머니가 완전히 건널 때 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보고 마~이 놀랬습니다.
그때가20년전 이니 지금은 또 우찌 바겼는지 모르지만,
여하간 저는 그때 그7개국 여행을 하면서 놀라고 부러웠던 것은 그들이 소장하고 있는 대단한 미술작품 뿐만 아니라 그들이 사는 작은 길, 보도블럭 하나하나 가로등 우체통, 전화박스 등등이 다 아름다워 계속 걷고 싶어진다는 것과 거리가 곧 미술관처럼 느껴진 일입니다. 이태리에 갔을 땐 경찰 복장과 일반 시장 거리에서 본 사람들의 패션 감각 을 보고 모델인줄 알았으니 그들에게는 사는 공간이 디자인이고 미술교육의 장으로 느껴졌었습니다. 호주는 유치원에서 대학교 까지 디자인 과목이 교양과목이랍니다. 미를 알아야 삶이 풍요로워 진다는 것 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고 미술과목이 없어 지려 하는 판입니다.
유럽의 겨울은 바바리코트 와 밤늦은 시내거리의 조명으로 낭만적 이여서 저절로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기분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제가 돌아와 공공미술에도 관심이 생겨 건축과 박사를 수료 하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떻습니까? 해운대 신도시라 해서 프랑스의 라데방스 처럼 새로운 개념의 도시인줄 알았는데, 모조리 아파트로 채워진 아파트촌 이였습니다. 이런 걸 신도시라 하면 안 되지요. 이렇게 획일화된 공간과, 획일화된 교육과, 획일화된 가치기준이 ,우리의 아이들 속에 잠재된 감성을 예술로 승화시키지 못함으로서 그들이 살아야할 미래도 삭막해질까 두렵습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우리가 좀 더 풍요롭고 행복해지는 길은 예술을 통한 삶 임 을 인식해야 한다 는 것입니다.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하는 것만이 예술이 아닙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 늘 보는 집이나 서면 일대의 간판,
이러한 모든 일상이 미 의 영역이며 그러한 감성이 우리의 삶을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제는 경영을 잘하는 뛰어난 CEO의 용병술을 보고도 예술이라 하고, 요리를 아름답고 맛있게 해도 예술이라 하며, 마시는 막걸리 맛도 좋으면 예술이라 표현하는 시대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어떤 분야에서라도 최고의 정점에 도달하면 감동을 불러오고 그 감동을 통해 느낀 감정이 예술품을 볼 때 느끼는 것과 유사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더 많이 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월드컵 축구를 볼 때 모두들 그렇게 감동한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간발의 차이만 있어도 골이 터지지 못하는 순간들의 연속일 때, 절묘한 슈팅에 의해 1초의 순간이 골인으로 연결되는 것을 보면, 우리 모두는 감격하게 됩니다. 그 때의 순간들을 천천히 한 장면 한 장면 돌려보면 모두의 표정 자체가 열정의 덩어리며 감동 그 자체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할 수 없기에 한 컷의 사진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한 컷의 사진! 예술이지요!
예술은 이렇게 뜻밖에 찾아온 행운을 잘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카소도 “나는 찾지 않는다. 다만 발견할 뿐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아는 한 사립 중학교 선생님은 20년 넘게 한 직장에만 있다가 어느 날부터 점점 수업이 지루해지고 가르치는 사명감마저 고통으로 변하는 우울증 증상을 보였습니다. 병원에서 상담도 받아보고 약물치료도 했지만, 잠깐의 효과 뿐 이였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 졌습니다. 꼼짝도 하기 싫은 날들이 많아지고. 결국 학교를 그만 두고 절에 다니시며 조금 나아졌을 때, 저랑 가까운 곳을 산책하러 갔었는데, 제가 걸어 면서 보이는 것 마다 좋아하고 관심 있어 하니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야 내 백수 되고 나서 자주 산에 친구들하고 다니 고 해도 별 재미없더니만 화가하고 다니니 똑같은 길을 가는데도 억수 로 재미있네." 이러시는 겁니다.
그 이후 자주 제 화실에 들렀고 급기야 1주일간 둘이서 일본 투어도 했습니다. 요즘은 완전히 회복해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상담하고 술도 즐기는 돈 있는 백수로 행복해 하고 계십니다. 영화, 전시회는 저보다 더 많이 보러 다니고, 미술관련 강좌도 듣는다 합디다. (오늘 오실려고 해서 말렸습니다. 그런데 오셨네요 하하)
이렇게, 좋은 그림을 접하면 아름다운 음악이 더 잘 들리고 아름다운여자나 멋진 남자가 눈에 더 자주 발견됩니다. 그래서 좀 더 행복한일이 많아지지요. 조금 전 그 선생님은 절에만 가면 아주머니들에게 인기 짱이랍니다. 그림 공부 덕분에 세상이 훨씬 다양하게 보이니 즐거운 이야기가 저절로 나오고, 그러니 아주머니들과 친해져서 좋은데, 아 돈 쓸 일이 많아져 좀 고민된다고도 합디다, 하하.
중국의 대가 임어당 선생님도 이렇게 말씀 하셨지요. “훌륭한 사상도 좋지만 한 접시의 맛있는 돼지고기도 좋다. 여색을 경계하는 글도 가치 있지만 미인도 버리기 아깝다.”
멋진 말씀입니다! 이성과 감성이 교차하는 매우 인간적인 글 이라 생각 됩니다. 저도 이렇게 살고 싶습니다.
그럼 이렇게 필요한 예술은 어디에서 만들어 질까요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수시로 만들어 지고 있지만 일상의 바쁜 일과와 평소 자신의 감정을 지켜보지 않아서 잘 발견하지 못하곤 합니다. 그러니 오늘 당장 주변의 것에서부터 아름다운 것을 찾아 보시길 바랍니다.
아름다운 것을 본다는 것이 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요즘처럼 자연과 만나기 좋을 때 아 그냥 좋구나 하시지만 말고 꽃이 아름다우면 왜 이 꽃은 이리 이쁜가 잘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하찮은 꽃잎 몇 장도, 그 색깔과 모양의 조화를 보면 신 의 일부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연물의 어떠한 것이라도 제대로만 바라볼 수 있다면 언제나 똑같은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물방울이 조용한 연못에 떨어질 때, 그 파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리듬을 정확히 선으로만 그려도 대부분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하는 사람의 눈동자 색깔이 무슨 색인지 아십니까? 그 사람의 목소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이 얼마를 벌어오고 몇 층짜리 집에 살고 나이가 몇 이고하며 숫자만 알면 다 안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뒷모습만 봐도 무슨 걱정이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랑의 눈길이 지금 필요합니다.
제가 딱 1주일 전부터 몸이 으실 으실 추웠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무리하게 일을 강행했습니다. 수업하고 회의하고 편집하고 그림 그리고 또 강연준비 하며 불안하기도 하니 술도 계속 마셨습니다. 결국 몸살까지 겹쳐 온 몸이 쑤시고 기침에 한기까지 동반하여 꼼짝 못하고 침대에 누워 있어보니 법정 스님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스님은 한겨울 동안거를 잘 마치고 날이 따뜻한 봄이 오면 오히려 심하게 한번 씩 앓는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긴장이 풀린 까닭이라 했지요. 그러면서 자신은 이렇게 심하게 아픔을 겪고 나면 도리어
착해져서 좋다고 하셨습니다.
건강을 자랑하며 교만해지지 않고 나와 남을 다시 보게 된다는 것이 지요. 이렇게 어떠한 상황을 지혜롭게 판단하는 것도 그분의 맑은 정신 때문이겠지요.
법정스님이 얼마나 자연을 잘 관찰 하셨느냐하면 여름 강풍이 불어도 가지하나 꺾이지 않던 소나무 가 겨울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면 소나무가지가 그 가벼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뚝 뚝 꺾이는 것을 보고 결국 강한 것이 부드러운 것에 꺾인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렇게 어떤 현상을 보고 지혜롭게 판단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 생각 듭니다.
제가 고등학교시절부터 좋아하던 글이 있습니다. 생땍쥐베리의 어린왕자에 나오는 글 중에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 이야.”라는 대목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중한 마음을 읽어내는 것이 예술가의 몫입니다.
신이 자연과 현상을 통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를 발견할 때 마다. 우리는 감사드려야합니다. 아침에 건강한 햇살을 받으며 눈뜰 수 있음에 감사해야합니다. 우리 몸속에 숨어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잠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고등학교 축구 선수는 그 축구부의 주장 이였고 가장 슛팅 을 잘하는 유망주 였는 데 전국 고교 축구대회 연습을 앞두고 자꾸만 오른쪽 무릎이 아파오더랍니다. 그래서 진단을 해보니 뼈를 갉아먹는 심각한 골육암 이라 하여 부득이 다리를 잘라야만 했습니다. 그가 수술실에서 마취에 취해 잠들었을 때 그 부분을 해부해보니 다행이 일반 종양이라 그것만 때어내고 수술을 마쳤습니다. 나중에 마취에서 깨어난 그 학생은 자신의 다리가 붙어있고 암이 아니라는 내용을 전달받고 한참을 울었답니다. 그 학생은 요즘 아침에 일어날 때 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 다리가 붙어있게 해주셔서.. 제가 건강하게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박수치고 할 수 있음에 감사합시다.
틱낙한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맨발로 들판을 걸을 수 있는 것이 기적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이 기적의 연속이며 감동의 연속이며 예술의 연속입니다,
이제 마지막 으로 감동에 대하여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예술이란 기술의 정점을 넘어 우리의 마음에 크던 작던 감동으로 다가 올 때 예술로서 인정받고 그 감동으로 인해 우리의 삶이 행복하고 풍부해진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우리가 일상에서 수시로 감사하고 감동받는다면 삶이 곧 예술이며 기적입니다.
미국의 교육학자이신 레오버스카 걸리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달려가 사랑한다! 라고 말해라 했습니다.
“멀리 떨어져 전화 밖에 할 수 없다면 새벽 4시에도 전화해라! 그 사람이 그 일로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지 않는 이상 그날을 가장 아름답게 기억 할 것이다.”
저는 대학 다닐 때 이 말에 감동받아 지금의 아내 집에 그녀가 좋아하는 해물을 사서 새벽4시 에 그녀의 집으로 갔지요.
중앙시장 좁은 골목집에도착하여 문 앞에서 조용히 이 사람을 불렀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지금의 장인어른이 턱 나오시는 겁니다. 아버님도 놀라신 얼굴 이였고, 아이고! 저는 반바지에 세수도 안한 얼굴로 얼른 인사드리고 해물 든 봉투를 드리고 내 뺐습니다. 그 때 새벽. 집 사람 감동받는 모습 상상하고 갔다가 도둑으로 오해받을 뿐 했습니다.
그 이후 제대로 찾아뵙고 인사 잘 드려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는데, 나중에 장인어른께서 제가 마음에 든 것은, 그날 찾아온 용기와 식사할 때 그 집에 큰아들 둘째아들 아무도 땡초를 못 먹는데 제가 5개 모조리 다 먹는 것 보고 장골이다 하며 좋아하셨다 합니다. 여하간 어떤 이유 던지 누군가에게 감동을 준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요
가까운 예로 이번2009년 세계4대륙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 여자 싱글 금메달 을 딴 김연아의 공연은 너무나 아름다워 모든 관객을 기립박수 치게 만드는 감동을 일으켰습니다.
저도 혼자 TV를 보며 박수치고 기뻐했습니다. 그 예술이 감동을 만들어 내었으며, 최초의200점 돌파를 하는 순간 놀라워하는 김연아 와 코치의 표정은 또 한 벅찬 감동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시상대에 서 금메달을 걸고 서서히 올라가는 태극기를 보며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리는 우리의 딸 김연아를 보며 우리 모두는 잠깐이지만 행복한 눈물 을 경험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행복한 눈물을 흘릴 때 에는 웃을 때 나오는 엔돌핀 의 3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너무나 기쁘고 즐거워서 깔깔 그리며 웃을 때도 몸에 좋은 물질이 나와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감동으로 인해 울컥 눈물을 쏟게 만드는 순간에는 더욱 좋은 결과를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교 다닐 때, 예술 한다는 핑계로 매일 술 마시고, 친구 집에도 자주 갔었는데 이 친구 아버지가 조금 무서웠습니다. 늦어 면 현관문을 잠거 두셨는데 우리들은 취한상태에서 친구 동생 방 창문을 넘어 들어가서 살금살금 마루를 지나 반대편 친구 방에 안착하여 매우 기뻐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침에 우리들이 친구 아버님보다 먼저 이방에 있었다고 말하면 되니까 하며 밤새 소곤거리다 잠들었습니다. 아! 그런대 아침부터 큰소리로 “너희들 다 나와”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작전대로 왜 그러시냐고, 우린 일찍 들어와 잤을 뿐인데 왜 그랍니까? 뭐 걸릴 일이 없으니 큰소리 쳤지요. 그러니까 마 시끄럽다. 일로 나와 바라. 아 그래서 당당하게 와 그랍니까 자꾸 하며 밖에 나와 보니 친구동생 창문 밑에 신발이 쪼로미 놓여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날 우린 물동이 지고 나르고 고생 마이 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친구들이 자주 저희 집에서 자곤 했습니다. 자고나면 엄마는 새벽 일찍 재첩 국을 사서 끓여주시던지 김치 국 에 계란까지 매번 챙겨주셔서 제 친구들 에겐 우리 집이 제일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저는 별로 해드린 것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그땐 생신선물조차 사드리지 못했었습니다.
누나와 형들은 다들 선생님이고 직장인 이여서 매년 생신이면 과일과 옷들을 선물했고 용돈도 드렸지만 저는 유일하게 작은 종이카드를 만들어 한쪽에는 엄마 얼굴 크게 펜으로 만화같이 그렸습니다.
뚱뚱한 우리엄마 얼굴은 동그랗게 눈과 코는 작지만 늘 웃는 얼굴에 머리는 꼬불꼬불 파마머리를 그렸고, 다른 쪽 면에는 54번째 생신을 축하드립니다. 엄마를 늘 사랑하는 막내아들올림 이라 적고 카드만 달랑 드렸었습니다.
우리 집은 범일동 데레사 여고 뒤쪽 산동네라 북 항이 잘 보이는 곳 이였지만 엄마가 지내시기엔 힘든 곳 이였어요. 가까운 가게를 두고 멀리 부산진시장까지 매번 시장보고 오시는 길에 뚱뚱한 몸으로 관절이 아픈데도 걸어 다녔습니다. 마을버스 차비 아끼신다고.
그렇게 세월이 10년 이상 지나서 67세로 엄마는 골수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가족들은 엄마의 유품을 정리했는데 누나와 형들이 준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으시고, 매년 미국에 이민 가 있던 큰형이 고생한다며 돈을 보내셨던 통장이 발견 되었습니다. 수첩엔 엄마가 좋아하던 나훈아 와 현철, 송대관, 조미미 등등의 노래가사가 빼곡히 적혀있었습니다. 그중에 송대관 의 차표 한 장 가사가 눈에 들어왔지요. "차표 한 장 손에 쥐고 떠나야하네 예정된 시간표 대 로 떠나야 했다.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모든 가사가 마음에 차올라 눈물을 감추려고 부엌 으로 피했는데, 10년이 넘어 색이바란 카드 속 엄마의 웃는 얼굴이 찬장 유리안쪽에서 나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뚱뚱한 우리엄마 얼굴! 눈과 코는 작지만 늘 웃는 얼굴에 머리는 꼬불꼬불 파마머리.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엄마는 다른 어떤 선물보다도 막내아들이 직접 그리고, 마음을 전했던 카드를 좋아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자신이 항상 일하는 찬장 앞에 두시고 기뻐했으리라 믿습니다.
엄마가 돌아가실 때 중환자실에서 아무말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고 간호사들이 못들 어 오게 할 때 제가 억지로 들어가 엄마의 귀에 대고 울면서 엄마를 얼마나 사랑한줄 아 시죠! 라고 했을 때,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 일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에게 진심으로 표현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손자들의 취직소식에, 친구의 전화한통에, 노을이 지는 하늘빛에, 푸른 나무와 꽃들을 보며 진심으로 축하하고 기뻐해야합니다. 그리고 감사해야 합니다. 나를 반겨주는 가족이 있음에 감사해야합니다. 서로 인사하고 격려해주는 친구가 있음에 감사해야 합니다. 아직도 혼자의 힘으로 걸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합니다. 이러한 것이 감동이고, 예술이며, 행복한눈물입니다. 여러분들이 꼭 그렇게 행복한 사랑을 주고 얻으시길 바라면서 오늘 강의를 접을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부록으로
제가 좋아하는 시 하나를 소개합니다.
제목-우화의 강
시-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 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 주고
그대를 생각할 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세계적인 음악가인 슈만은 예술의 필요성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마음속 어두운 곳에 불을 비추는 것이야말로 예술가의 임무이다." 라고 . 그러므로 저는 여러분들이 더 좋은 예술을 자주 접하시어 지금보다 더욱 밝아지고 건강해 지시길 기원합니다.
송호준은 예술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자하는 화가이자 교육자며 건축디자이너이다. 동아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하고 동교육대학원 미술교육을 전공했으며 건축학 박사를 수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