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년도 첨으로 연길 공항에 사과박스 3개를 가지고 내렸어요. 허술하기 이를때 없는 세관절차라 쉽게 통과 된다고 생각하는 순간, 박스를 열라고 하는 거예요. 그안에는 성서책,묵주,십자가등 성물이 가득~ 그걸 보는 순간 공안들의 눈은 마귀눈으로 변해서 묵주와 십자가를 땅바닥에다가 패대기를 칩니다. '너 관광이 아니잖아.아편 퍼트리려 왔구만. 나갈때 찾아가! ' 이렇게 중국 첫선교는 공항에서 부터 시련이 시작 됨니다.
그래서 두번째 갈때부터는 꾀를 냅니다. 묵주를 다 연결해서 장단지부터 감아 올라 갑니다. 묵주는 20개정도는 감을수 있었어요. 넓은 등판과 가슴에도 십자고상 4개는 거뜬이 붙일수 있었어요. 온몸이 택배박스가 된겁니다. 그때 그공항에는 탐지기가 없어서 걸리지 않았어요. 몸큰거 얼마나 하느님께 감사 했다고요.
*중국편에는 새로운 기법이 동원 됬어요.사진에 글이 들어 갑니다. 당황하지 마세요! *
조광택 신부는 유학으로 한국에 와서 공부 마치고 작년 12월에 들어 갔고,염신부는 연길 본당 신부를 하고 있습니다.
모택동이 죽고나서 등소평이 달러를 벌기위해서 개방정책을 썼습니다. 그래서 외국 선교사들이 입국을 할수는 있어도 공식적인 종교활동은 안됬지요. 다닐대도 사제복은 안됬구요. 평신도와 5명정도 팀을 짜서 가곤 했어요.
조선족만 다니는 신학교는 없었고 한족 신학교에 같이 공부 했어요. 신학생 일년 기숙비, 학비가 천달러정도 들어 갔어요. 신학생 몇사람을 후원 했지요.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정말 못말리는 사람이예요. 복대동 대성당을 뻐빠지게 짓고 있으면서도 신학생 후원에다가 중국 선교라니... 그때 뭔 힘으로 그렇게 살았는지...
중국집은 넓은방 하나뿐이죠. 여자 남자 다같이 한방에서 자라니 환장하죠. 옷입은채로 등을 돌리고 잘수밖에, 또 화장실은 해결할 방법이 없었어요. 그얘긴 생략.
그래도 50년만에 피정이라는걸 첨해 보는 조선족 신자들의 기쁨 때문에 불편한건 문제가 안됬어요.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중국 선교하는데 의기투합이 되어 열심히들 했죠.
정말 가까웠어요. 담배좀 던져 달라고 할정도 였어요.
중국은 공무원 나라입니다. 천주교 회장들이 평소에 종교국장에게 잘 보였으면 피정이 가능했지만 그렇치 않은곳은 어림도 없었어요. 선교 다니다가 추방될뻔 한적도 여러번 있었죠.
5년을 조선족 선교 다니다가 여러가지 일땜에 한족 피정으로 방향을 바꾸었지요. 젤 먼저 간곳이 김대건 신부님,최양업 신부님이 부제로 계셨던 소팔가자라는 200년된 교우촌 성당을 갔어요. 끝 안보이는 옥수수밭 가운데 마을이 있는데 주민 전체가 다 교우였어요. 내가 도착하여 회장님이 종을 때리니 옥수수밭에서 나와서 성당 마당은 금새 사람으로 가득 찼어요. 얼마나 순박하고 신앙이 깊던지... 그곳 에서의 피정은 내 일생 잊지 못할 겁니다.
저 현수막도 한국에서 만들어 가서 걸었어요. 성당 바닥은 흙바닥,성작도 깨진 밥그릇으로, 제의는 다 달아 엷어져서 잠자리 날개 같았어요. 드디어 역사적인 피정이 시작 된겁니다.
북경에서 통역하러 먼거리를 오신 회장님
당시 소팔가자 주임신부. 물론 한족입니다. 밑에 앉져 있는 조선족 신학생들.
중국 수녀님들의 소개로 관광. 공중 화장실앞에서 수녀님들이 베일을 훌떡벗어 나에게 맡기고 일보러 들어가는 황당한일도 있었어요.
실제로 3년후에 다시 가보니 피정 시키고 떠난 다음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는 웅열이가 여럿 있었어요.
중경로 중국 성당 피정.
알아 듣든 못알아 듣든 상관 없죠. 못알아 들으면 하느님 당신 손해죠!
심양교구 신학생들. 중국은 눈에 보이는 애국교회와 지하로 숨어든 지하교회가 있지요. 이 신학생들은 물론 애국교회 신학생들.
맨왼쪽 신부님은 지하교회 신부님. 수용소에서 45년만에 석방 되었지만 여전히 감시 당하여 심양 주교님이 보호 하고 계셨어요. 두사람은 신학교 교수 신부들.
잘못먹고,잘못자고 선교를 다니다 보면 기력이 다 떨어집니다. 그래도 양들에게 줄건 줘야죠. 중국 선교 얘기가 이리 간단 하겠습니까마는 이것으로 선교 얘기는 끝내고 진천으로 넘어 갑니다.
* 이노래 찾는라고,제목 찾는라고 한시간이 걸렸음. 옥편까지 동원 하여 찾아낸 곡임. *
600원 + 한시간의 노력 = 월랑의 아적심
지나온 시간들이 담겨 있는 사진들 잘 보았어요. 감사합니다.
아버지, 우리도 내일 피정날이에요 아버지께서 시작하실때 우리가 그 때 거의 마침 시간일거에요^^ 기도 중에..아버지를 위해서도 드리고 많은 분들이 큰 은총과 힘과 용기를 받으실수 있도록 기도 하겠습니다 제 부족한 기도를 보내드립니다^^ 내일..화이팅 아버지 화이팅 갑자기 사진들 다시 보니까.. 중국어 생각났네요
와,,,중국에서 산지 벌써 8년이 되어가네요...처음에 중국 들어간다고 할때 성당이 없을까봐 걱정했는데 요즘엔 웬만한 도시 한국인들이 많이 사는 곳에는 한인 성당이 있고 한국 신부님들이 파견나오셔서 신앙생활에 무리는 없지요..^^ 저희 성당도 중국 성당을 빌려 허락받은 시간에만 미사를 드릴수 있어요...밖에서 모임하는건 몰래몰래 하고요..그래도 이만큼 신앙생활 할 수있는 것이 김 신부님 덕분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감사합니다..
느티 신부님 열정의 끝은 어디일까요?
끝이 있기나 할까요?
온 몸이 택배 박스가 되어 중국 선교하시며
몸 큰것에 감사했다는 신부님..
이런 편한 환경에서도
복음을 전하매 소홀했던 저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이 정말 우리와 함께 하심을 알고 감격 하던날..
이사야서 61장 말씀을 주셨어요.
구원의 기쁜소식..
제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담대히 주님의 복음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시길 소망합니다. 아멘!
신부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
10년전,한국순교복자 강학회 심화반 수녀님하고 심양..갔던 생각이 납니다.주님과 늘 함께하시는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