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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리자 스크랩 화엄사 괘불 - 설법하는 부처에서, 의식의 주존으로 -
靑光 추천 0 조회 125 16.04.17 17:2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화엄사 괘불

- 설법하는 부처에서 의식(儀式)의 주존(主尊)으로 -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도>는

조선시대 불교회화의 주요 테마로, 현존하는 괘불의 도상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법당 안에 걸리던 불화가 야외의식을 위해 제작되면서

 기능의 변화에 따른 형식의 변화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변화는 조성된 시기와 지역에 따라 점진적으로 나타났다.

 

화엄사 괘불보다 30여 년 전에 조성된 <죽림사 괘불(1622)>은

세로 5m, 가로 폭이 3m에 남짓한 비교적 작은 규모이다.

규모만으로는 법당 안의 불화로 생각할 수 있으나,

화기에 “정중괘불세존정(庭中掛佛世尊幀)”으로 기록되어

조성 당시에서부터 사찰 앞마당에 걸리는 괘불로 만들어졌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야외의식용 불화라는 화기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의식용 불화에 맞는 구성을 아직 갖추지 않았으며

<영산회상도>에서 주존인 석가모니부처만 분리시켜 그린 모습이다.

 

 

 

- 불교의식과 괘불 -

 

불교의식(儀式)은 부처의 힘으로 질병이나 기아, 전쟁, 천재지변 등과 같은

현실의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행해졌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불교의식 가운데

죽은 이의 영혼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천도의식이 왕성하게 거행되었다.

대표적인 천도의식으로 사십구재(四十九齋), 예수재(豫修齋), 수륙재(水陸齋), 영산재(靈山齋)

등이 있다. 이러한 의식을 행할 때는 멀리서도 보일 수 있는 대형의 괘불(掛佛)을 걸고 의식을 행한다.

 

이렇듯 의식을 행하기 위해 제작된 괘불은 법회나 재의 성격과 의식의 종류에 따라 봉안되는데

장수와 극락정토를 기원하는 영산재는 영산회상도를 걸고,

죽은 뒤에 행할 불사를 살아생전에 미리 지내는 예수재나,

물속과 땅 위에 널려 있는 모든 영혼을 달래고 이들을 천도하는 수륙재에는

지장보살도나 미륵불을 걸고, 관음재일에는 관음보살도를 건다.

그러나 실제로 각 사찰에 모셔진 괘불들을 보면 성격에 맞는 여러 종류의 괘불을 준비하지 못하고

한 점의 괘불로 다양한 의식에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괘불이 언제부터 그려졌을까?

 

그러나 이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현존유물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은 1622년(광해군 14)에 제작된 나주 죽림사 소장품이다.

따라서 적어도 17세기부터는 괘불이 그려지기 시작했고, 곧 정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괘불의 주제는 영산회상도가 가장 많고 보살상이 그려진 것도 있다.

17세기 중엽-18세기 중엽경에는 영산회상도가 지배적이고,

18세기 중엽-19세기 초까지는 보살상이 많이 그려졌으며,

19세기 중엽 이후에는 다시 영산회상도가 주류를 이룬다.

 

영산회상도 가운데 17세기 후반 경까지는 주존이 결가부좌한 좌불의 형태가 많고

그 이후는 대부분이 입불형식이다.

또한 주존불이 과대해지면서 좌우 인물들이 축소되고 화면 구성이 간략해진다.

 

 

 

화엄사 괘불

조선 1653, 삼베에 색, 국보 301호, 길이 11.95m, 폭 7.76m

  

 

 

 

 

석가모니불과 문수 · 보현보살을 중심으로

사천왕과 십대제자, 2구의 분신불, 시방제불(十方諸佛) 등이 적절하게 배치된

군집도 형식의 영산회상도이다.

 

화면 중앙에 높다랗게 마련된 단(壇)의 연화좌 위에 항마촉지인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는 본존불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키모양 광배를 지니고 있으며

좌우 협시보살과 함께 삼존상(三尊像) 중심이지만,

하단부에 큼직하게 표현되어 있는 사천왕상 2구와 더불어 마치 오존도(五尊圖)처럼 구성되어 있다.

사천왕 중 나머지 2구는 화면 상단 좌우에 그려 네 모서리를 지켜주는 것과도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본존불을 위시한 각 상들의 형태는 균형잡힌 모습으로

둥근 얼굴에 어깨 또한 동그스름하게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부드럽고 원만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각 상의 이목구비는 커다란 눈에 작은 코와 입, 기다란 귀를 하고 있다.

육계가 뾰족해진 석가불의 머리에는 중앙 계주와 정상 계주가 뚜렷하며,

커진 화면과는 달리 사용한 필선은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여

각기 상들에 개성과 함께 세련미를 더해주고 있다.

 

홍색과 녹색 위주의 색조는 밝고 화사한 중간색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은은하면서도 화사한 느낌을 주며, 특히 화려한 채색무늬와 금색무늬는 한층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조선 효종 4년(1653)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전반적으로 늘씬하고 균형잡힌 각 상들의 형태에 치밀하게 장식된 꽃무늬와 작고 둥근 꽃무늬,

밝고 선명하며 다양한 색채 등은 17세기 중엽경의 불화에서 보이는 양식적 특징으로

이 괘불은 당대를 대표하는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영취산에서 있었던 석가모니불의 설법회 장면을 그린 화엄사 괘불은

현존하는 가장 큰 영산회 괘불로, 영산회 괘불의 초기도상중 가장 완성된 구성을 보여준다.

 

부처의 백호(白毫)에서 발하는 빛은 다섯 방향으로 뻗어나가며

부처의 세계와 육도(六道) 중생의 모습을 비춘다.

좌우의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활짝 핀 연꽃에 앉아 석가모니부처를 보좌한다.

문수는 지혜를 상징하고 보현은 실천을 상징한다.

지혜와 실천이라는 대승불교의 두 가지 이상을 나타내는 두 보살은

석가모니 부처가 가르침을 펴고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돕는다.

 

조선시대 제작된 설법회도에는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들기 전에 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그려지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가섭존자와 아난존자이다.

부처의 제자 중 수행에 가장 뛰어난 가섭존자는 연륜을 보여주는 노승으로 표현되었다.

머리 중앙에 볼록하게 솟아난 살은 수행의 깊이를 드러낸다.

파르스름하게 깎은 민머리의 젊은 승려는 아난존자인데 부처의 사자로 가장 많은 불법을 들어

석가모니 부처 사후 교단을 결집하여 경전을 집대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가섭과 아난존자는 불교에서 말하는 두 가지 가르침인 선과 교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이다.

 

그 주위에는 나한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경전에서는 이들을 번뇌가 다하여 다시는 번뇌가 없고 자신의 이로움을 얻었으며

모든 존재의 결박으로부터 벗어나 마음에 자유로움을 얻은 자로 일컫는다.

 

그 위로는 부처의 가르침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도를 깨달은 벽지불(僻支佛) 역시

두 손을 합장한 공손한 자세로 설법을 듣는다.

 

불보살 앞에는 예불과 공양을 위한 작은 탁자가 놓여 있다.

사람들이 보시한 금, 은, 산호, 진주, 용뿔을 상징하는 공양물과 향은 다섯 가지 빛을 발한다.

빛과 향으로 인해 설법공간은 상서로운 분위기로 가득하다.

 

화면 가장 바깥에는 불법이 베풀어지는 곳을 수호하는 사천왕이 늠름한 모습으로 서 있다.

부처의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외호하도록 배치되어 있다.

위풍당당하게 서서 오른손으로 칼을 든 증장천왕(남)과

용과 여의주를 들고 선 광목천왕(서),

당과 보탑을 든 다문천왕(북),

비파를 든 지국천왕(동)은 먼 곳에 서있는 듯 거리감 있게 표현하여

설법회 무리를 앞뒤에서 외호하려는 의도를 효과적으로 구현하였다.

  

화엄사 괘불이 그 규모에도 불구하고 안정감을 보이는 것은

불화에 적용된 시점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인물의 구성과 배치는 전각 안의 영산회상도와 동일하나,

불화에 적용된 시점은 불상의 보조적 역할로 간주되는 영산회상도와 다르다.

 

석가모니불과 보살, 나한, 제자들은 불화를 예경하는 사람들이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그려졌다.

그림 속 시점은 신성한 인물을 나타내기 위해 종교화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식과 동일하다.

그러나 불보살의 앞에 놓인 탁자, 설법회를 옹호하는 화면 하단의 사천왕은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적인 시점이다.

 

한 화면에 적용된 두 가지 시점은 괘불에 도해된 영취산의 설법회가

괘불이 펼쳐진 실제의 사찰도량에 파노라마처럼 재현된다는 측면을 강조한다.

대형 불화를 펼침으로써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괘불 속 인물들이 현실의 도량에 막 내려오는 듯한 현실감을 갖게 되고,

마치 자신들이 불화에 재현된 설법공간에 참석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전각 안에 걸리는 불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스펙터클한 구성이

두 가지 시점의 대비적인 효과로 인해 부각된다.

 

괘불의 화기는 왕실의 세 어른, 즉 왕과 왕비, 세자의 안녕을 비는 문구로 시작된다.

이어서 괘불의 조성 일시가 나오고 다음은 후원자와 그들이 가져온 물품이 기재되어 있으며,

벽암당 각성을 비롯한 화엄사 고승들이 기록되어 있다.

괘불을 그린 화승은 지영, 탄계, 도우, 사순, 행철, 나협 등 모두 여섯 명이다.

이 시기 인근 지역에서 조성되어 현존하는 불화가 드물어 이들이 그린 다른 불화는 알려진 예가 없다.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불교회화실, 배영일

- 제102회 큐레이터와의 대화, 2008년 8월20일

 

 

 

한편 청주 <보살사 괘불(1649)>, 청원 <안심사 괘불(1652)>, 홍성 <용봉사 괘불(1690)> 등

충청권에서 조성된 영산회 괘불은 대웅전의 영산회상도를 큰 화폭에 맞게 확장시켰다.

등장인물의 구성과 배치는 법당 안의 영산회상도와 유사하거나

커진 화폭에 본존이 강조되어 신체의 비율과 양감에서 인상이 강한 점이 특징이다.

실제 의식도량에서 괘불을 보면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우리 눈의 착시현상으로

화면의 왜곡은 더욱 부각된다.

 

안성 <청룡사 괘불(1658)>은 영산회상도의 하단에 사리불존자의 청법 장면을 추가하였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시대 판각된 법화경 변상도에서 차용한 도상이 괘불로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죽림사 괘불

조선 1622, 삼베에 색, 보물 1297호세로 5m, 가로 폭이 3m

  

 

전남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 죽림사

괘불로서는 작은 크기이며,

화면 가득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석가모니불이 결가부좌한 좌상으로 홀로 그려져 있다.

 

화면 중앙에 큼직하게 연꽃 위에 결가부좌 자세로 앉은 석가모니의 등 뒤에는

보상화무늬의 금빛 광배가 있고

붉은색에 녹색이 섞인 옷에는 꽃무늬가 뚜렷해 밝고 화사한 느낌을 준다.

항마촉지인의 오른손은 크면서 팔은 유난히 가늘어 어색한데,

이는 안심사 괘불(국보 297호, 1652년), 곡성 도림사 괘불(1683년)에도 보이는 표현이다.

 

 

청원 안심사 괘불

조선 1652, 비단에 색, 국보 297호길이 7.26m, 폭 4.72m

 

 

 

석가모니 본존불이 영취산(靈鷲山)에서 법화경(法華經)을 설하는 장면을 나타낸 영산회상도로

문수(文殊)와 보현(普賢)보살을 협시로 하여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 용왕, 용녀, 시방제불(十方諸佛) 등이 좌우대칭으로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는

전형적인 군도(群圖) 형식이다.

 

중앙에 앉은 석가모니 본존불은 오른쪽 어깨가 드러나는 우견편단을 걸치고

손가락을 땅으로 향하게 하여 마귀를 물리치는 의미를 지닌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하였다.

나지막한 육계에 중간계주가 큼직하게 묘사되었다.

길어진 팔과 손의 처리 등 세부적인 표현은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본존의 광배로부터 인물에 이르기까지 사각형에 가깝게 표현하여 엄격함을 느끼게 하며,

전체적인 신체비례는 안정되어 있다.

광배에 있는 화려한 꽃무늬장식은 본존불을 강조하며 돋보이게 한다.

 

이와같이 본존불을 강조하는 표현은 하단 중앙부의 문수 · 보현 좌우협시 보살상을 비롯한

제석 · 범천과 사천왕상의 녹색 머리광배와 홍색과 녹색 위주의 천의(天衣),

복잡하고 화려하게 장식된 문양과 더불어 본존불을 떠받들 듯

호를 그리며 큼직하게 그린 인물의 배치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이에 비해 본존의 어깨 윗쪽 상단에 좌우로 대칭되게 자리하고 있는

십사대제자(十四大弟子)와 신중(神衆), 시방제불(十方諸佛) 등은

윗쪽으로 갈수록 크기를 작게 묘사함으로써 상승효과를 나타내었다.

 

채색은 주로 홍색과 녹색을 사용하였는데 두텁게 칠해

밝은 느낌을 주지 못하며 부분적으로 덧칠을 한 흔적도 보인다.

 

조선 효종 2년(1652)에 만들어진 이 괘불은

청주의 보살사(菩薩寺) 괘불이 조성된 지 3년 후의 작품으로,

구도상 비슷한 점이 있어 17세기 중엽 충청지역의 불화연구에 도움을 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홍성 용봉사 괘불

조선 1690, 비단에 색, 보물 1262호

  

 

 

   

충남 홍성군 홍북면 신경리 용봉사(龍鳳寺)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

화면 중앙에 석가를 화면 가득 그리고,

8대보살, 10대제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 등의 무리가 석가모니를 주위에 에워싼 좌우대칭 구도이다.

 

본존불은 이목구비를 작게 묘사한 원만한 얼굴에 머리는 윤곽선만으로 나발형을 만들고,

옆으로 퍼진 낮은 육계에는 반달형의 중간계주와 보주형의 정상 계주를 표현하여

전체적으로 단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수 · 보현보살, 관음 · 대세지보살 등 팔대보살은 갸름한 얼굴에 각기 지물을 들고

본존을 향하여 두 줄로 협시하고 있다.

 

보살상과 사천왕상 사이에는 제석천과 범천이 배치되어 있는데

제석천은 화관을 쓴 보살 형상이고, 범천은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홀(忽)을 든 모습이다.

십대제자상은 두광을 녹색과 흑갑사를 번갈아 사용하여 화면을 단조롭지 않게 구성하고 있으며,

협시 두 불상은 본존과 같은 머리형상이나 의습(衣褶)은 가사(袈裟)를 걸치고 있다.

 

이 괘불도에서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는 엄격한 2단 구도를 벗어나려는 시도와

본존의 크기가 줄어든 점을 볼 수 있으며,

채색은 홍 · 록 · 청색을 주조색으로 하고 옅은 청 · 연녹 · 자주색 등의 중간 색조를 써서

화면이 차분하면서도 가라앉아 안정되고 온화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이 그림은 조선 숙종 16년(1690) 숙종의 아들이 일찍 죽자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승려화가 진간이 그렸으며, 영조 1년(1725)에 그림을 고쳐 그리면서 적어 놓은 화기가

아랫부분에 있다.

 

이 괘불에서는 본존인 석가불의 크기가 작아진 점,

문양은 원문(圓紋)과 연화 · 당초 · 모란 · 국화,

그리고 변형된 화문과 점문 · 뇌문 · 기하학적인 문양이 병행되고 있는 17∼18세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안성 청룡사 괘불

조선 1658, 삼베에 색, 보물 1257호, 길이 9.18m,  6.5m

 

  

 

 

 

 

 

 

 

1658년 그린 조선 중기의 괘불 대표작으로

석가모니와 6대 보살, 10대 제자, 법을 청하는 사리불 등의 모습이 다채롭다.

석가모니의 몸 주위로 오색 광선이 뻗쳐나가고,

적녹색 화면에 꽃비가 내리는 듯한 옷과 바닥 꽃무늬,

인물 사이를 누비는 상서로운 구름 등이 표현되어 있다.

 

 

<참고>

-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 92회(2008년 6월 11일)

- 미술관 불교회화실 배영일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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