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선교역사적 측면
태국이라는 불교왕국에 기독교의 복음이 처음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선교의역사는 금년들어 168년이 된다. 천주교는 이보다 한참 더 앞서서 들어와 선교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 프랑스, 영국 등지의 서구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선교활동을 시작했을 때는 전도의 문이 열리지 않아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에서 선교를 했다고한다. 어떤 선교사는 18년 동안 선교하여 한 명의 신자를 얻어 세례를 주었다고 하니 그 어려움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라나 복음에 대하여처음으로 긍정적으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 지역은 태국 북부의 지역이었다. 그들은 현재의 치앙마이를 중심한 지역의 주민들이었는데 비교적 부지런하고 온건한기질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이 북부 지역이 기족교 인구의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태국이 기족교 선교를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핍박한 역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핍박을 받아 순교한 역사는 치앙마이지역에서 두명의 경우가 있었을 뿐이다. 그 들은 단순히 자기네들의 종교를 고수하며 기독교의 복음에 문을 열지 않았던 것이다.
태국인이 이처럼 자기네들의 종교를 고수하게 된 데는 종교작인 이유만이 전부는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서구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시작할때에 서구의 문명이 자기들의 그것보다 더 발달했음을 발달했음을 깨달았고 서구 열강의침약에서 자기들을 보호해야 된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복음을 경계하도록 만들었다고 본다. 고로 태국은 서양의 문물은 선교사들을통하여 조심스럽게 받아들이면서도 기독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은 선교사들을 서구 열강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선발대정도로 오해한 것이었다. 태국에서는 지금도 외세의 침략을 두려워하는 의식이 남아 있으며 기독교는 서양 종교이며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배신행위로 비난하고 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그러자 서구의 선교사들은 전도와 교회개척 등 직접선교를 하는 것보다 병원, 학교, 사회사업 등 간접선교를 통하여 서서히 전도의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태국의 선교역사상 교회부흥의 물결이 한법 태국 전역을 휩쓸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서구 선교사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내려온 부흥사겸 선교살였던 존 숭(John Sung)에 의해서 일어난 부흥운동이었다. 지금도 태국의 교회들은 그 때의 부흥을 회상하면서 그리워하고 있다. 태국의 교회들 중 뿌리가 잘 밖힌 교회들 대다수가 이 부흥운동의 결과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부흐운동은 존 숭이 지나가자 그 뒤를 잇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계속될 수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태국교회에서는 이러한 교회의 부흥이 다시 한번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다.
3. 태국내의 기독교 단체들
태국내에는 정부를 상대로 하는 기독교 단체가 5개 있다. 1) 천주교 2) 태국기독교회(CCT) 3) 태국복음주의연맹(EFT-The Evangelical Fellowship of Thailand) 4) 미국남침례교선교부 5) 제칠일 안식교 등이 그것이다. 태국의 종교계에서는 이들 모두를 기독교 단체로 간주하고 있으며 기독교 종교단체들로는 이것들 밖에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 외에 모든 선교단체는 이 5개 종교단체를 통해서만 정부를 상대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들 중에 개신교로 이해되고 있는 것들은 태국기독교회(CCT), 태국복음주의연맹(EFT) 그리고 미국남침례교선교부(Southern Baptist) 등 3개 단체이다. 이들 무두는 총회가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상황과 비교한다면 교단의 기능과 유사한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다. 태국에서는 한국식의 교단 또는 교파의 개념은 별로 없고 또 그런 식으로 교파가 난립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교단의 모양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는 것은 미국 남침례 선교부이나 이는 교세가 별로 크지 못하며 70여 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여러 교단과 교파를 함께 수용하면서 총회를 구성하여 교단의 기능도 수행하고 종교성을 통하여 정부를 상대하는 두 종교단체는 태국기독교회와 태국복음부의연맹이다. 한국 선교사들은 이 둘 중의 하나에 소속하여 일하고 있으며 우리 성결교단의 선교사들은 태국 복음주의연맹에 소속되어 일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종교단체에 대해 좀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태국의 기독교(개신교)는 원래 하나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태국교회에 WCC계통의 자유주의 신학이 들어와서 판을 치자 복음주의 노선에 서 있던 선교단체나 교회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탈퇴하여 나와서 구성한 것이 태국복음주의연맹이다, 이 때에 미국남침례교는 별도로 행동했기 때문에 별도의 선교부가 되었고 그 외에 복음적인 교회나 선교단체는 모두 태국복음주의연맹(EFT)에 모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WCC의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선교사는 태국인을 지배하려고 해서는 안되며 태국인 밑에서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태국기독교회의 선교이론은 처음에는 대단한 호응을 얻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태국기독교회의 선교활동을 점점 퇴조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반면, 복음적인 신앙을 고수하며 선교사와 현지인의 자유로운 협력 관계를 표방하고 선교협의체로 출발한 태국복음주의연맹(EFT)은 점점 선교가 왕성해져서 현재에는 선교의 규모나 활동하는 선교사의 수에 있어서 가장 큰 종교단체가 되었다. 태국기독교회의 경우 80여명 정도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데 비하여 태국복음주의연맹의 경우는 현재 800여명의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되고 있다. 여기에는 OMF, CMA 등등의 큰 선교단체들이 모두 들어와 있으며 한국인의 선교단체로는 장로교 선교부와 지구촌선교회가 여기에 등록되어 있으며 타선교단체들도 등록기회만 열리면 선교부 등록을 하려고 기다리고 있다. 현재 EFT에 등록된 외국선교단체는 51개 단체이며 국내선교단체는 43개가(1990년 12월 현재)있다.
현재 태국 정부는 태국내의 기독교 단체들에게 선교사 쿼타제도를 적용하여 선교사의 수를 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 선교를 제한하는 1단계 조치라고 본다. 이 조치는 1981-82년에 내려진 조치인데 그 때에 선교사의 명단을 제출하여 쿼타를 신청한 선교단체나 교회는 필요한 만큼의 선교사 쿼타를 얻을 수 있다. 이 때에 기존의 선교단체들과 태국의 몇몇 개교회가 그들의 상황에 따라 필요한 수의 쿼타를 신청했다. 그러나 그 후 태국의 개교회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되는 쿼타문제로 정부가 일일이 개교회를 상대하는 일은 번거로운 일이므로 종교성에서는 이 몇몇 개교회의 쿼타들은 모두 EFT가 맡아서 관리해 주도록 부탁했기 때문에 현재 이 개교회의 쿼타들은 모두 EFT에서 관리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선교단체들이 받아낸 쿼타들도 그 자리가 비었을 경우에는 EFT가 조정하고 알선하여 그 쿼타가 필요한 선교사들에게 돌아가도록 하고 있다. EFT의 한 정통한 소식통에 의하면 EFT내의 남아도는 모든 선교사 쿼타를 다 쓰고도 모자랄 경우에는 태국정부에 정식으로 추가요청을 할 수 있어서 정부에 일아본 결과 먼저 남아도는 쿼타를 다 쓴 다음에야 다시 신청할 수 있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한다.그러므로 앞으로 당분간은 이와 같은 EFT의 조정역할을 통하여 남아도는 선교사 쿼타는 모두 꼭 필요한 사람에게 제공될 것으로 본다
2.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한국동란 후 최찬영 선교사와 그 뒤를 따라 6개월 쯤 후에 들어온 김순일 선교사가 태국땅을 밟고 선교를 시작한 최초의 한국 선교사들이었다. 최 선교사는 태국에서 성서공회를 중심으로 15년 정도 사역하다가 홍콩으로 가서 중국을 상대로 선교를 계속했고 김 선교사는 태국 북부의 치앙라이를 중심으로 20년간 사역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정착하고 말았다. 그 후 한 동안 태국에 오는 한국선교사가 없다가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홍식 선교사가 들어왔고 다음에 김정웅 선교사와 윤수길 선교사 등이 들어온 후로 오늘에 이르러는 40여 가정에 들어와서(80여명)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 선교사들에 하는 일들을 보년 다양한 사역들을 전개해 나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도와 교회개척을 하는 선교사도있고 사ㅏ부족을 상대로 선교하는 선교사도 있으며 신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는 선교사도 있고 사회사업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는 선교단체도 있으며 스포츠 선교와 같은 특수선교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국 선교사들은 무슨 일이나 다 손을 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구 선교사들이 있는 곳에는 시끄러운 일들이 발생하는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넘치는 의욕을 가지고 헌신적인 열정으로 일을하기 때문에 비교적 선교의 성과는 서구 선교사들보다는 더 빨리 그리고 더 많이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3. 교단 선교사들의 선교활동
성결교단의 태국선교는 이미 이루어져 있던 므앙타이교회에 1981뇬 2월에 박희성 선교사를, 같은 9월에는 홍성철 선교사를 각각 파송함으로 시작되었다. 홍 선교사는 이전에 벌써 서너 차례 태국을 방문하여 므앙타이교회의 신자들을 제자훈련시켰던 적이 있었지만 선결교단의 선교가 정식으로 시작된 것은 1981년도부터였다. 박 선교사는 처음에 태국어를 배우며 므앙타이교회를 중심으로 열심히 일하다가 홍 선교사가 온 후에는 사역지를 옮겨서 반프랐크릿교회와 함께 일하다가 2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갔다. 반면 홍 선교사는 므앙타이교회의 난타차이 부부가 헌신하여 미국 애즈베리 신학교에 가도록 도왔으며 므앙타이교회에서 사역하면서도 초교파적으로 초청을 받아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영어로 집회 및 세미나를 인도하면서 사역을 했다. 이 때에 므앙타이교회에 전도폭발 프로그램을 소개했는데 후에는 전도폭발 태국지부로 발전되기도 했다. 홍 선교사는 2년동안 이처럼 열정적으로 일하다가 단기사역의 임기를 마쳤다.
1983년에 홍 선교사가 태국을 떠날때 당시에 방글라데시에서 선교하다가 비자문제가 걸려서 잠시 태국에 머물러 있던 송희천 선교사를 교단 선교사로 영입하여 태국에서 일하도록 했는데, 이 때에는 므앙타이교회의 난타차이 부부가 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므앙타이교회를 맡게 되었고 송 선교사는 므앙타이교회를 중심으로 성가대와 서ㅓ극을 지도하는 사역을 했다. 당시 성극을 통한 선교는 태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서 공영 TV에 방영 되기도 했다. 또한 선교지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훙 선교사 때부터 구상된 신학교의 건축계획을 계속 추진하여 므앙타이교회와 함께 장소를 마련하는 등 기본적인 준비를 했다. 송 선교사는 태국에서 4년 동안 일한 후 1987년에 안식년을 맞아 한국으로 돌아갔다.
반면, 1986년에는 이영기 선교사가 파송되어 태국말을 공부하면서 사역 준비를 하다가 1987년부터는 전도및 교회개척 사역을 시작했다. 이 선교사는 특별히 므앙타이교회와 협력하여 태국 십자군을 창설하고 교회개척 사역을 전개해 나갔는데 이 사역은 KEHC와 OMS가 협력하여 지원한 사역이었다. 이 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지난 5년도안 5개 교회가 개척되었는데 그 개척일을 년도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87년 2월 28일-<므앙타이코랏>교회(태국 동북부)
1989년 7월 26일-<므앙타이남펀>교회(방콕시내)
1989년12월 16일-<므앙타이차이야>교회(태국 남부)
1990년10월 23일-<므앙타이팡아>교회(태국 남부)
1991년 5월 25일-<므앙타이황>교회(태국 북부)
이 중에 <코랏>교회는 자립을 시도하고 있으며 <남펀>교회는 1년 후에 므앙타이교회에서 독립했다. 그리고 나머지 3교회는 아직 태국 십자군의 재정지원및 사역지도 아래 있다. 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개척된 이 교회들 외에도 이선교사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사역을 지도하는 가운데서 2교회가 더 개척되었는데 그 개척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89년 12월 2일-<므앙타이치앙마이>교회(태국 본부)
1990년 5월19일-<시온꾸룽텝>교회(방콕시내)
또한 1987년 2얼부터는오랫 동안 모금하며 기도로 주비해오던 교회겸 신학교의 건축이 시작되어, 건축비용의 부족으로 어려움도 없지는 않았지만, 다음 해 7월 16일에는 감격스러운 헌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원래의 계획은 4층 건물로 짓는 것이었으나 우선 2층 건물로 지어서 교회겸 신학교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므앙타이교회의 난타차이 목사는 이미 1986년 6월 학기부터 므앙타이교회에서 헌신한 3명의 신학생을 모아놓고 강의를 시작한 터였기 때문에 더 이상 신학교의 건축을 뒤로 미룰 수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므앙타이 신학교는 처음에 대학원으로 시작했다. 그래서 한 때는 15명의 대학원생을 확보하기도 했지만 교수진이 약할 뿐만 아니라 응시자들도 한정되어 있음을 느끼면서 1990년부터는 대학부를 신설하고 신학 대학원생과 대학원생을 동시에 모집하기 시작 했는데, 현재는 모두 합하여 20명 정도의 신학생을 가지고 있다.
1988년도에는 이용우 선교사가 추가로 파송되어 태국말을 공부하고 1989년 7월에 개척된 <남펀>교회를 개척하여 현지인을 세워 놓고 사역을 지도해왔다. 그러다가 1991년 10월부터 돕다가 다음 해 곧 1990년 6월에는 <롱니란>교회를 개척하여 현지인을 세워놓고사역을 지도해왔다. 그러다가 1991년 10월부터는 그 동안 신학교의 학장으로 일하다가 유학을 준비중에 있는 난타차이 목사를 도와 신학교 학장의 중책을 떠맡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91년 12월부터는 현지 목회자의 영적 재충전과 재교육을 위하여 므앙타이 신학교 부설기관으로 <목회자 훈련원>을 개설하여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매년 25명의 목회자들을 선발하여 매월 첫째 주간에 합숙훈련을 시키면서 1년간 집중교육을 받게하는 훈련이다.
1989년 8월에는 태국 북부의 산부족 선교를 위하여 박윤식 선교사가 증원 파송 되었다. 박 선교사는 방콕의 언어학원에서 1년동안 태국말을 공부한 후 태국의 제2의 도시인 치앙마이로 자리를 옮겨서 산부족들 중 하나인 <라후>부족의 언어를 또 다시 공부하면서 전도대상 마을들을 선정하고 전도자들을 훈련시키며 <라후> 부족 선교를 시작하였다. 현재 미전도지역 중 9개마을을 선정하고 7명의 전도자들을 훈련시켜서 파송하고 있으며 3개의 교회(짜터, 짜웍, 도이랑)를 설립했으며 부족 마을들의 절대빈곤을 해결하기 위하여 잠업을 실시하는등 영농대책도 세우고 있다. 또한 신학생 육성, 마약중독자 진료, 신자양육을 위한 기숙사 운영 등 다방면의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1991년 10월 말에는 피은형 선교사가 교단의 편신도 선교사로서 태ㅐ국내 스포츠 선교를 위하여 파송받아 현재 언어를 공부하며 사역을 시작하고 있다. 사실은 피 선교사는 축구코치로서 지난 88년에 태국에 잠시 들어와서 이영기 선교사와 함께 태국 스포츠 선교회의 기독교 축구팀을 구성하고 국내 King's Cup 대회에 출전시킨 바 잇다. 그러다가 좀더 장기적인 안목에서 선교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본국에 들어가서 한 동안 기도하며 준비한 후에 이처럼 교담평신도 선교사로 다시 나오게 된것이다. 현재에는 언어공부 중이지만 므앙타이 신학교와 협력하여 축구팀을 구성하여 여러가지 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2. 태국선교의 전망 앞으로 택구선교는 전보다 훨씬 더 빠른 템포로 전개될 것으로 본다. 현재 12군데의 신학교 또는 선경학교가 설립되어 교회의 일꾼을 양성하고 있으며, 그 중에는 100여명이 넘는 신학생을 훈련시키는 곳도 있는 것이다. 아울러 교회개척의 관심도 증대되고 있음은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일들은 외부의 재정지원이 있을 때에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가 있을 것이다. 신학생들 중에 자비로 공부하는 학생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으며 외부의 지원이 거의 없이 교회를 개척하는 일도 현재로는 거의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는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매스컴을 통한 선교, 스포츠를 통한 선교, 문서를 통한 선교, 찬양과 율동을 통한 선교, 전도여행단을 통한 선교 등 다양한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기독교의 복음이 사회적 관심사가 되도록 만들어 갈 것이다. 앞으로 태국에서는 교회의 큰 부흥이 대대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본다. 과거의 한 때에 존 숭에 의하여 일어난 부흥보다 더 깊고 더 넓게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전도운동 부흥운동이 일어날 것이다. 이 부흥운동의 주역은 역시 태국인이 되어야 하겠지만 이들 속에 불을 지르는 불쏘시게의 역할을 누가 감당할 것인가? 한국교회의 부흥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한극 선교사가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앞으로 태국교회의 큰 부흥이 있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또한 큰 핍박이 잇을 것도 예상하게 된다. 태국의 선교적 상황이 항상 평안치는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이 순교를 각오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이쩌면 이 일이 왕가의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나게 될런지도 모른다. 기독교의 선교가 태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증대되고 불교왕국이 이를 도전적 세력으로 인식하게 되는 날 일전이 불가피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곧 핍박을 의미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태국의 목회자들은 이런 일들을 미리 알고 신자들을 미리 준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이 전도와 선교의 문을 열어놓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힘써 전파하게 하시는 기간이라고 믿는다.
2. 신학교분야
앞으로 신학교는 현재의 건물에 3, 4층을 증축하고 적절한 시기에 기숙사도 별도로 건축해야 할 것이다. 현재는 교수진 확보와 신학생 모집에 어려움이 없지 않지만 앞으로 점점 나아질 것으로 본다. 부설기관으로 태국내 목회자 훈련원을 운영하여 이를 통하여ㅕ 택국내 목회자들의 연장교육을 위하여 일익을 담당한다. 또한 이 신학교가 주변국 선교를위해서도 일익을 담당할 수 있도록 한다. 태국은 동남아 지역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고 라오스, 버마, 말레이지아, 캄푸치아, 베트남 등의 나라들과 인접해 있어서 주변국 선교를 위해 전략적인 위치에 있다. 가장 큰 장애물은 역시 언어장벽이나 각 나라에서 이주해 들어온 사람들 중 태국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일은 현재에도 가능하다.
3. 산부족 선교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별도로 게재하도록 한다.(태국-참고자료2)
4. 스포츠선교
피은형 선교사를 중심으로 스포츠 팀을 구성하여 이 팀들을 활용한 다양한 전도방법을 개발한다.
5. 선교종합훈련센터
태국내에 사도행전적 선교를 가능케 하는 전도훈련, 제자양육, 목회자 훈련, 그리스도인의 생활 훈련 등을 다양한 방법으로 실시할 수 있는 종합훈련센터를 건립한다. 이를 위하여 도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2만평 정도의 땅을 마련하여 훈련생들이 공동생활을 하면서 훈련을 받을 수 있는 썰을 갖추고 환경을 조성하도록 한다.
1. <므앙타이>교회
므앙타이교회의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에 복음을 먼저 받은 몇몇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여서 시작한 모임이 후에는 교회로 발전되 것을 알 수 있다. 그 초창기 멤버 중에는 파이툰 교수 부부, 왈 라이폰 자매, 난타차이 교수 부부, 와라퐁(씻니)형제, 유타영 형제 쑤왓 형제 등이 이었다. 그들이처음으로 교회보임을 시작한 것은 1974년의 일이었다. 그들은 주로 대학생을 대사으로 전도할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처럼 므앙타이교회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중대한 영향을 끼친 한국인 한 사람은 홍성철 목사이다. 1971년에 그는 억학훈련을 위해 뉴질랜드에 갔다가 연수중에 우본완이라는 자매를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되고 불교를 전하던 우본완 자매는 극적으로 물교에서 기독교로개종하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유학중에 있던 그녀의 약혼자 난타차이는 이 소식을 듣고 심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체를 파악하여 그의 약혼녀를 다시 불교로 돌어오도록 설들할 목적으로 교회를 찾아갔던 그도 얼마 후에는 성경을 읽는 가운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적격적으로 개종하게 된다. 그후 그들은 태국에 돌아와 기독교식으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태국에서 만남 몇몇 기리스도인들과 함께 복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이러한 관련 속에서 홍성철 선생은(당시) 네 차례나 걸쳐서 채국을 방문하며 그들을 제자훈련시키면서 그들이 참여하는 모임에서 집회및 성경공부를 인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1년 9월에성결교단에서 정식으로 선교사를 파송을 받아 태국에 와서 상주하면서 그들을 돕게 되었다. 홍 선교사는 우선적으로 그 동안 가르쳤던 난타차이/우본완 교수 부부를 헌신시켜서 교수직을 사임하고 신학교에 기도록 도운후에 므앙타이교회를 맡아서 2년간 지도하다가 임기를 마치고 유학길에 올랐다. 난타차이는 홍 선교사의 소개를 받아 성결교단에 잘 알려지게 되었고 또 성결교단에서 장학금을 받아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 때에 파이툰 교수도 스스로의 힘으로 후원을 찾아 미국에 건너가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박사과정까지 마치고 돌아오는 관계로 므앙타이교회와는 오랬동안 떨어져 있게 되었다. 반면 그 사이에 난타차이 교수는 미국 내즈베리에서 부인 우본완 여사와 함께 신학석사(M. DIV.)를 마치고 돌아와서 므앙타이교회를 먼저 맡아서 일하게 되었다. 이들 외에도 와라퐁(씻니)교수, 쑤왓/완나 부부, 쏨차이 형제가 미국에 가서 신학석사를 공부하고 돌아왔으며 현재는 파다 자매가 유학중에 있다.
이들이 이처럼 유학을 장려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후에 택구에서 신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전부터 세우고 있었기 때문에 교수요원을 확보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닌타차이 부부는 므앙타이교회를 맡아서 목회를 하면서 전부터 홍성철 선교사와 함께 구상하여 성결교단과 OMS에서 모금하며 기도로 준비해오던 신학교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1987년 2월에는 방콕시내의중심지에서 그리멀지 않은 쌈쎈나이 지역에 마련된 1,200평의 대지위에 신학교겸교회의 건축을 시작하여 1988년 7얼 16일에는 헌당식을 하기에 이르렀다. 원래는 이 건물이 4층으로 설계된 것이었으나 재정적인 어려움이 있어서 우선 2층 건물로 지어 1층은 주로 교회로 쓰고 2층은 주로 신학교로 쓰고 있는형편이다. 이 건축비용은 대지를 포함하여 3억6천만원 정도가 들어갔는데 비용의 50%정도는 성결교단에서 지원했고 25% 정도는 OMS에서 지원했으며 나머지는 므앙타이교회의 건축헌금으로 충당이 되었다.
므앙타이 신학교는 1986년 6월에 므앙타이 교회에서 3명의 신학생을 대학원 수준으로 무집한 이래 오늘까지 10명의 ㅣ대학원 졸업생을 배출했으며, 1990년도부터는 대학부를 신설하고 신학생을모집함으로 말미암아 현재 20명 정도의 신학생을 확보하고 있다. 또한므앙타이교회도 그 동안 어려운 시기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고비들을 잘 넘기면서 꾸준히 성장하여 현재는 장년이 150명 정도에 이르고 있다. 앞으로 므앙타이 신학교와 므앙타이교회가 우리 성결교단과 협력하여 일하면서 선교기지및 모교회의 역할을 잘 감당하게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 우리 성결교단의 선교사들은 므앙타이교회와 함께 교회개척에 힘을 기울여 현재까지 모두 13개 교회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개척된 교회들을 간략하게 소개하기로 한다. 이 교회들은 우선 그 사역을 지도한 주체에 따라서 3분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로는 므앙타이교회가 사역을 지도한 경우로 여기에는 <쏭클라>교회, <치앙마이>교회, <농폭>교회가 있다. 둘째는 태국 십자군 사역을 지도한 경우로 여기에는 <코랏>교회, <남펀>교회, <차이야>교회, <팡아>교회, <황>교회 등이 있다. 셋째로 태국 선교부가 개척을 지도한 경우로 여기에는 <시온>교회, <룽리란>교회, <짜터>교회, <짜웍>교회, <도이랑>교회 등이잇다 이 교회들을 좀더 자세히 소개하자면 다음과같다.
2) <치앙마이>교회-신길성결교회의 박성철 장로의 재정후원으로 1989년 12월 2일에 므앙타이교회가 지도하는 가운데 개척된 교회임. 재정지원은 3년간 교회 임대료및 교역자 생활비를 지원하기로 약속함. 담임 교역자는 므앙타이 신학교를 졸업한 와니 여전도사이며 그 남편은 사역보조자로 일하고 있음. 현재 출석신자 20명 정도
3) <농폭>교회-<코랏>교회의 유타영 전도사 밑에서 십자군 사역 보조대원으로 일하던 위타야 전도사(BBC)를 담임 교역자로 두고 므앙타이 교회의 재정지원으로개척된 교회. 1991년 7월에개척됨. 현재 출석신자 15-20명 정도
4) <코랏>교회-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1987년 2월 28일에 개척됨. 재정지원은 성결교단과 OMS에서 3년간 지원한 후 4년째에는 부분 지원했으며 현재ㅐ에는 자립을 시도하고 잇으나 완전자립을 위해서는 교회건축이 시급한 실정임. 교회건축을 위해 필요한 돈은 5천만원 정도. 개척교회이나 7명의 신학생 배출. 담임교역자는 유타영(BBC)/지라폰 전도사 부부. 출석신자는 현재 35명정도.
5) <남펀>교회-태국 십자군 을 통하여 1988년 7월 26일에 개최됨. 담임교역자는 쑤왓(BBC, 애즈베리)/안나(애즈베리)전도사 부부. 개척된지 1년 후에 독립교회가 되었으나 아직도 외부의 재정지원이 필요한 상태. 현재 출석신자는 20명 정도.
6) <차이야>교회-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1989년 12월 16일에 개척된 교회. 담임 교역자는 므앙타이 신학교 졸업생인 타원 전도사. 꼬이 형제가 사역보조자로 돕고 있으며(부인)도 간호원으로 일하면서 교회를 돕고 있음. 그러나 어려운 상황에서 전도하고 있으며 현재 출석신자는 10명-15명 정도
7) <팡아>교회-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1990년 10월 23일에 개척됨. 담임 교역자는 파야우 신학교 출신인 쁘라껍/나라왓 전도사 부부. 이 둘이 모두 심자군 대원으로 일하고 있음. 현재 출석신자는 25명-30명 정도
8) <황>교회-태국 십자군을 통하여 이영기 선교사의 지도로 1990년 5월 19일에 개척된 교회. 신길성결교회의 박성철 장로의 후원으로 개척된 교회이며 현재 모든 등록조건을 갖추어 EFT에 등록을 신청해놓고 잇음. 1년간은 이 선교사가 직접 지도하며 일꾼을 훈련시켰음. 담임 교역자는 낙티니(파야우) 여전도사이며 유핀(BBC) 여전도사 사역을 돕고 있음. 현재 출석신자는 25-30명 정도. 때로 40명 이상 모일 때에는 장소가 협소하여 넓은 장소로 이전하는 것이 시급함. 방콕에서 교회건물을 마련하려면 8천만원 정도의 비용이 필요함.
10) <룽리란>교회-태국 선교부를 통하여 이용우 선교사의 지도로 1990년 6월에 개척된 교회. 담임 교역자는 빤야((므앙타이) 전도사 부부이며 래라 전도사가 사역보조자로 일하고 있음. 광복성결교회(최경수 목사)의 후원으로 개척된 교회이며, 45평 정도의 콘도미니엄을 매입하여 교회장소의 문제를 해결 하였음. 이 교회에서 믿게 된 녹 자매는 헌신하여 므앙타이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음. 현재 출석신자는 20-25명 정도
11) <짜터>교회, <짜웍>교회, <도이랑>교회는 박윤식 서ㅓ교사가 지도하는 가운데 태국선교부를 통하여 개척된 교회들임. 라후부족의 전도마을 중에 교회설립이 가능한 지역에 개척된 것임.
2) 가정-종족마다 다르나 일부다처가 대부분이며 근친간의 결혼이 허용된다.
3) 경제-고산지대에서 쌀, 면화, 아편 등을 생산한다. 절대빈곤 상태로서 질병을 해결하지 못한다.
4) 사회-무당이 제정(帝政)을 다스리며 씨족사회를 형성한다.
5) 교육-글자가 없으며 선교사가 알파벳을 이용하여 만든 글자가 있으나 보급이 미흡하며 성경 이외에는 책도 없으므로 절대무지 속에 산다.
6) 선교-부족에 따라서 선교가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지역적인 구분과 종족의 문화차이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미전도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
* 태국내 인구 : 30,000--60,000명으로 추정(확실하지 않는 이유는 인구 이동이 심하여 교통문제로 파악이 어려움)
* 라후부족 전체인구 : 50만-70만
3. 태국내 라후부족 선교
2) 현재 라후부족 선교의 선교단체들
3) 현재 라후부족 선교의 전략과 비판
현재 라후부족 선교에서 전파하는 일은 현저하게 축소되고 있다. 침례교회는 이제 전파하는 일을 중지했다. 그들은 기숙사를 통해서 일꾼을 양성하며 그들이 스스로 전파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자립하는 교회는 극히 드물며 대부분이 다른 직업으로 전환하고 있거나 다른 단체를 통해서 일하려고 하고 있다. 기타 다른 선교회들도 그들의 전도모임을 해산시켜 버렸다. 60여개의 아카마을을 전도하던 한 선교사는 현재 하카족 훈련쎈타만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코 전파하는 일이 다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서구 선교회의 퇴조현상과 초기에 양육을 염두하지 않은채 너무 지나치게 많은 수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현재 기독교대한성결교회가 전도하는 지역에는 57개의 라후부족 마을이 있으나 전도자가 관계하는 마을은 고작 7개뿐이며 그들도 아직 신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아직 전파하는 일은 주요한 과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울러 이후의 전파는 양육하는 일을 동반하여 자전의 시기를 가져 올 수 있도록 전략을 전환시켜야 한다. 선교정책은 통계를 위한 것이 아니며 한 사람에게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도심주변으로 부족민을 불러내어 훈련시키는 정책이 활기를 띤다. 현재 거의 모든 선교부의 정책은 기숙사 운영, 신학교 운영, 선교쎈터 운영에 집중한다. 이러한 활동은 도심 주변의 선교부 건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활동은 제자양육과 지도자 육성에 활기를 갖게 하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이 부족들을 떠나서 도심지 주변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문제가 있다. 도심주변의 생활이 익혀지면 모두가 산으로 가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훈련을 마친 사람들은 선교사나 선교부의 도심활동을 돕기를 원하거나 아니면 다른 직업에 종사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훈련 내용이 부실함에도 있으나 훈련의 내용과 장소가 산부족들과 격리되어 있는 데서 온다. 또한 너무 많은 수를 훈련시키므로 실제로 개인에 관심을 두지 못하는 데도 있다고 본다.
전도를 위한 중간 관리자 도입-선교사가 산부족으로 사랑하지만 결코 산부족과 문화차이를 완전히 극복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선교사와 산부족간에 이해의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 주요정책을 결정 시행하는 데도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다. 또한 넓게 산재해 있는 전도마을을 찾아가는 것은 시간의 소모와 위험과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위험을 극복하는 데에 신실한 라후인 중간 관리자를 두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으로 중간 관리자를 두고 선교사를 돕게 하고 있다. 중간 관리자 도입 정책은 선교사의 문화극복과 언어장애를 극복케 하는 좋은 정책이다. 그러나 이 정책을 도입함에 있어 중간 관리자와 선교사의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하며 선교사가 부족에 대한 이해를 소홀히 하기 쉬운 점을 항상 조심해야 할 것이다.
라후부족의 실제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의 부재-서구 선교회의 축소현상으로 서구 선교회의 보다 전진적인 노력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반면 라후부족의 실제 문제인 마약중독, 극빈, 질병, 문맹, 관광지 개발로 인한 부족의 피폐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 장기적인 대책은 거의 없는 형편에 있다. 한국 장로교회개혁측 선교부에서 근간 카렌족을 위한 병원을 산마을 근교에 세우고 영농쎈터를 게획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한국 선교사의 노력은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라후부족의 실제문제 해결을 위한 지역교회를 중심한 태국어훈련, 라후어 글자 보급, 마약진료, 현대문명의 악습으로부터 보호계몽, 장기영농대책 및 기술제공 등의 실제사역이 간절히 요청된다.
4) 기독교대한성결교회의 선교전략
1989년 박윤식/여명순 선교사 부부를 소수 산부족을 위하여 태국에 파송하므로써 구성됨. 박 선교사 부부는 1년간 태국어를 연수한 후, 현재 치앙마이를 근거로 라후어를 연수하며 사역을 하고 있다.
그 동안의 활동보고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5) 지향해야 할 라후부족 선교전략
현재 라후부족의 가장 큰 도전은 현대문명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국토개발과 관광지 개발에 따라서 정글 속으로 밀려드는 현대문명은 폐쇄적이던 라후부족에게는 수용할 수 없으리만큼의 큰 도전이 되는 것이다. 이 도전적인 현대문명의 접근을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라후부족은 사랑의 하나님 안에 있는 인간의 참모습을 찾게 될것이다. 만일 수용치 못할 경우에는 그들의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먼저 파멸 되었던 소수민족들처럼 파멸로 가고 말것이다. 따라서 라후부족에 대한 선교는 단순히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전략을 넘어서 다각적인 선교를 시행하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