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일이다. 모처럼 시간을 내어 동료들과 속리산(俗離山) 등반을 하는 날이었다. 전날 미리 산 주위의 여관에 투숙하여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정상을 향하여 출발했다. 산의 중심에 위치한 법주사(法住寺)를 가까이 두고 그냥 지나쳤다. 중요한 부분을 아껴놓고 내려오면서 들러 마지막 정리를 하고 싶어서였다. 산등성이를 한참 올라가니 그 높이까지 자동차를 몰고 와 등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높은 신선한 곳까지 차를 몰고 와서 공기를 흐리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으나, 명색에 속리산에 왔다는 생각에 작은 생각들은 접기로 했다.
더 올라가니 다리 하나가 나타났다. 놀랐다. 다리가 시야에 자리를 잡자 갑자기 뭔가에 흘린 듯 귀가 열리고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다리 이름만 크게 다가와 다른 것들은 안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다리가 아니라 다리 이름이었다.“이뭣고”다리! 순간, 숨이 멈추어오는 전율을 느꼈다. 아니, 느낄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먼저 내 모습이 정말 뭣고(무엇인고) 하는 생각이 들면서 초라한 내 모습이 스스로의 가슴속에 투영되었다. 나는 무엇인가? 왜 사는가? 나는 지금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 사람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나를 아끼고 보살펴주는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고 무슨 일을 해 주기를 바라는가? 나를 신뢰하고 배려해주는 사람들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가? 이 세상에서 나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가? 과연 나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내 자신의 주인공으로서 떳떳한 삶을 살고 있는가? 과연 어떤 일을 해야 나름의 의미를 찾고 행복할 것인가?
이 다리를 본 순간 그냥 스치고 지나가고 싶은 생각이 주저되었다. 뭔가 생각을 정리한 다음 통과하는 것이 다리에 대한 배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나름대로 자기 정체감이 있기 마련이다. 자신의 개성이 지속적으로 일정한 특징을 가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서 자신의 정체감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며 정리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그러나 정체감을 생각하고 정리하며 살아오지 않은 나로서는 많은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초등학생들의 생각 또는 사치스런 생각이라 할 만한 일들이 이때는 심각한 모습으로 내 마음에 들어오고 있었다. 삼각형에서 각이 하나 없어진다면 무엇이 될 것인가?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중병에 걸린다면 가족의 평화가 어떻게 될 것인가? 모두가 깨끗한 모습인데 혼자만 지저분한 모습을 하고 있다면 균형이 잡힌 조직인가?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상황에서 열심히 살아야한다는 것을 깨우쳐주려는 듯 입 다물고 가만히 서 있는 저 다리. 그래, 각자 나름대로 교훈을 안고 떠나가면 되겠지.
조금 더 올라가니 소위‘깔딱’고개가 나타났다. 이 고개는 충청도와 경상도가 한 지붕 아래에 함께 있는 곳이다. 고교 시절에 그곳에 갔을 때는 두 지역 사람들이 각자의 지방 사투리를 사용하며 살고 장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금은 충청도 쪽에서만 장사를 하며 생활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근무하는 어느 40대 불구 청년의 녹음기처럼 되풀이되는 상술적인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자꾸 그 말대로 손님들이 주문하고 마는 마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주인아줌마는 60살이 넘었는데도 착한 마음씨 때문인지 아니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 살면서 신선한 공기와 산의 정기를 받아서인지 늙은 모습은 보이지 않고 40대 후반쯤으로 보였다.
계속 정상을 향하여 올라갔다. 산 속에서의 허기(虛飢)를 달래는 데는 당분과 탄수화물이 풍부한 엿이 제 격이다. 특히 겨울에 엿을 먹는 이유는 쉽게 눅눅해지지 않아서 손에 달라붙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올라가면서 나눠먹기도 하지만, 혼자서도 톡톡 소리 내며 잘라먹을 수 있어 음향효과를 보는 재미도 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에게 엿을 나눠주며 맑은 목소리로‘수고하십니다.’라고 인사하면, 상대방도 미소를 지으며‘수고하십니다.’라고 끈적끈적한 정이 담긴 메아리를 보내온다.
정상에 올랐다. 문장대(文章臺). 조선시대의 세조 대왕이 여기서 문장을 읊었다 하여 생긴 이름이란다. 대왕이 했던 것처럼 새로운 문장을 지어 읊어보려 했다. 그런데 생각을 하는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모자가 날아가려고 해 잠깐 모자에 관심을 보인 사이 그 생각마저 날아가 버렸다. 속인(俗人)이 시를 지어 읊어보겠다는 그런 생각마저도 이 속리산에서는 사치스런 인간사의 일면인가 보다.
다시 하산하여 법주사에 이르렀다. 80kg으로 금도금이 된 불상. 시설만 늘리고 높이고 화려하게 꾸미고, 마음속은 그만큼 불심이 더 희박해지고… 절에 왔으니 먼 세계를 보고 넓은 마음으로 웬만한 것은 이해하고 살아야 하는데… 절에 크고 작은 많은 가게나 시설들이 있는 걸 보면서 불심이 적다고 넋두리를 하고 있으니, 역시 깨달음을 더 가져야겠다고 바로 옆의 금동 불상 앞에서 고개를 조아려야 할까.
이게 무언가? 왜 사는가? 우리는 자연 앞에 무언가? 지금 살고 있는 모습이 스스로 만족하는 존재인가? 존재가 존재다우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도대체‘이뭣고’?. 다리야, 너는 알고 있겠지? 한없는 의문을 안고 또 희망이 보일 듯싶은 다른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
속리산의 눈길-- 사진을 제공해 주신 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