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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방문기 1
4월 21일, 새벽 6시쯤에 오사카에서 신칸센 열차를 탔다. 나를 히로시마의 우리학교들에 데려다 줄 두 분을 만나기 위해서다. 아침 8시가 약속 시간이었다. 장소는 신쿠라시키역. 신오사카역에서 산요신칸센으로 일곱 정거장. 오카야마역을 지난다. 오카야마현의 쿠라시키시에 있는 신칸센역이다. 거기서부터 학교까지는 자동차로 약 20분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루 안에 오카야마와 시코쿠의 조선학교 두 곳을 방문하고 싶다고 전했을 때, (소풍콘서트)실행위원회 측에서는 적잖이 당황했다는 것, 나중에 두 학교를 모두 방문하고 나서야 알았다. 오사카에서라면 두 시간 만에 왔다가 갔다가 점심까지 여유 있게 먹을 수 있는 학교 두 곳 방문이지만, 여기는 달랐다. 오사카에서 오카야마까지 신칸센으로는 1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오카야마에서 시코쿠까지 약 2시간, 시코쿠에서 히로시마까지 약 3시간의 여행은 저녁을 히로시마에서 실행위원회분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는 만만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초행인 나를 위해 실행위원회에서는 가이드 두 사람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분 중 한 분은 50대, 히로시마 조선초중고급학교 교장 김영웅 선생님이셨고, 한 분은 실행위원회 사무국의 요코마 선생님, 70대이시다. 두 분이 5시간이 넘는 거리를 번갈아 가면서 운전해 주시고, 나는 뒤자석에 편안히 앉아서 부족한 아침잠을 보충해가며 아~주 편안히 두 학교를 방문할 수 있었다.
<그림 1> 왼쪽이 김영웅 교장선생님, 그리고 오른쪽은 요코마 선생님. 김영웅 교장은 몇 년 전까지 시코쿠 조선학교 교장으로 단신부임 생활을 계속해 오셨다. 약 5년 전에 히로시마 교장으로 전근. 일흔이 넘은 요코마 선생은 아들이 한국에서 유학을 하고 현재 일본에서 한국어 선생님을 하신다고... 오래 전 부터 조선학교와 재일조선인의 인권에 대해서 활동하고 계신다. 이번 소풍 콘서트 실행위원회의 사무국장 역을 맡으셨다. 무려 5시간이 넘게 두 분이 운전을 해 주시지 않았다면 이번 방문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2000년 밀레니엄을 맞아 통합된 오카야마 우리학교
오사카부를 중심으로 왼쪽으로 효고현, 오카야마현, 히로시마현, 야마구치현, 후쿠오카현 순으로 펼쳐진다. 그리고 오사카, 효고, 후쿠오카에 각각 조선고급학교가 있고, 고급학교가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학군이 나누어지기 때문에 히로시마 조선고급학교를 중심으로 오카야마, 시코쿠(일본 열도의 네 개의 섬 중 히로시마에 인접한 섬), 멀게는 야마구치현까지를 아우르는 지역이 바로 히로시마 학군인 셈이다. 야마구치현의 야마구치 조선초중급학교의 학생들은 중학교를 졸업하면 일본학교로 진학하거나, 큐슈 조선고급학교, 또는 히로시마 조선고급학교로 진학하게 된다. 어쨌든 오카야마, 시코쿠의 우리학교를 졸업한 동포학생들은 주로 히로시마 조선고급학교로 진학하게 되는데, 그 중 오카야마 우리학교는 오카야마현, 히로시마현 서부지역, 그리고 산요지역(일본 효고현 왼쪽에서 야마구치까지의 지역을 주고쿠(중국)지방이라고 하는데, 산요는 그 주고쿠의 남쪽을 주로 가리킨다.) 의 동포자녀들이 그 대상이라고 한다.
<그림2> 독도문제로 유명한 시마네현, 오카야마현, 히로시마현과 그 왼편의 야마구치현을 중국(中國)지방이라 한다. 자도에 스티커로 표시된 곳이 조선학교가 있는 지역이다. 중국지방에는 우리학교가 네 곳, 히로시마, 오카야마, 시코쿠, 야마구치에 있다.
쿠라시키 시에 위치한 오카야마 조선초중급학교는 2000년에 두 개의 조선학교가 통합된 학교다. 서로 다른 지역의 구)쿠라시키 조선초중급학교와 구)오카야마조선초중급학교가 통합된 것이다. 역시 그 이유는 학생수의 감소와 운영의 어려움, 그리고 교육의 질 향상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해방 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계속되어 오던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정책과 핵가족화, 재정의 어려움은 한 때 학교 160여개, 학생수 5만여명을 웃돌던 시절에서 학교수 60여개, 8천여명으로 60여년만에 반도 미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것의 시대의 추세이고, 학생수가 줄어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면 자연스럽게 학교를 통합하고, 학생 각자가 좀 더 많은 동무들과 학창시절을 보내면 좋은 것이 아닌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르지만, 정작 통합이라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는 동포들의 입장에 서 보면 간단한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림3> 오카야마 조선학교 전경. <출처 - 위키피디아> 3층 건물, 2,700여평 1974년에 지금의 자리에 신교사를 건설해 두 학교가 통합했다.
우연이든 아니든, 조선학교는 자연스럽게 그 태동부터 재일동포 공동체의 중심이었다. 소위 말해서 동포들이 모이고, 잔치하고, 의논하고, 뭔가를 축하하거나 위로할 수 있는 ‘중심공간’으로서의 ‘우리학교’는 60여년이 넘게 동포사회가 끈끈히 유지될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일조선인총연합(이하 총련)이 운영하는 조선학교이기 때문에 마치 총련이라는 조직이 먼저 있고 나중에 조선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애초에 해방 직후 45년부터 자발적으로 각지에 ‘국어강습소’의 형태로 귀국을 준비하던 것이 바로 ‘조선학교의 모태’이고, 그 활동을 했던 사람들이 주로 ‘재일조선인연맹’(조련 – 총련의 전신)의 활동가들이었다. 그리고 당시 패전국 일본을 지배하던 사상의 조류는 평화, 반전, 반제국주의 사상이었으며, 재일조선인 활동가들 역시 민족주의적 성향과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는 것이 대세였다. 이러한 기류는 조선학교라는 거점을 중심으로 급속히 전개되었고, 조선학교는 ‘조련’에 이어 ‘총련’ 조직을 60여년 동안 지탱해 준 뿌리 같은 존재인 것이다.
우리의 오해 속에는 ‘총련’이라는 조직에 대해서 정치집단으로서의 존재양식만 유난히 부각시키는 측면이 강한데, ‘총련’과 ‘조선학교’, 그리고 ‘동포 공동체’의 상호관계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총련 산하에 ‘상공회’, ‘신용조합’, ‘결혼상담소’ 등 일상생활에 밀접한 조직들이 오랜 기간 동안 ‘공동체’ 유지를 위해 활동해 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일상생활의 핵심인 교육기관 ‘학교’와 더불어 ‘총련’이라는 조직이 유지되어 온 또 하나의 근간이다. 1세 동포의 손자, 손녀들이 가까운 우리학교에 다니며 운동회와 학예회, 졸업식에 그 가족과 친지들이 모이고, 손자, 손녀들은 오랜 학창시절 동안 추억을 만들며, 동포 커뮤니티 속에 들어가 생계를 유지하고.. 등등, 다시 말해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동포 커뮤니티 속에서만 생활하는 게 가능한 시스템이 ‘총련’과 ‘조선학교’가 융성했을 때의 모습이었다.
<그림4> 해방 직후 조선학교는 국어강습소에서 시작하였다. 49년 조선학교 폐쇄령을 거쳐 50년대 초 재건설 시기, 59년 이후 귀국사업이 시작되면서 조선학교는 급격히 증가했다. 사진은 초기 시코쿠 조선학교 건설의 모습. <출처- 시코쿠 조선학교>
이러한 이해가 있어야만, 조선학교가 오로지 북을 찬양하는 학교, 총련의 조직원 양성소라는 1차원적 발상에서 해방될 수 있다. 더불어서 일본정부 및 우익인사들이 왜 그토록 ‘조선학교’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지 이해할 수 있다. 동시에 ‘조선학교의 통합’이 그 지역 동포와 ‘총련’이라는 조직에 어떤 의미인지 또한 쉽게 이해할 수 있기도 하다. ‘조선학교의 통합’은 곧 하나의 지역에 동포 공동체의 핵심인 ‘우리학교’가 패쇄 됨을 의미하고, 그것은 동시에 그 지역 동포 공동체가 소멸함을 의미한다. 함께 한 과거의 추억은 있어도, 함께 할 미래의 추억이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을 잘 아는 동포들이기에 조선학교의 통폐합은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며, 결정의 순간까지 감당해야 할 수 많은 고통의 시간을 생각하면, ‘통합’된 조선학교의 현대식 새 교사를 남쪽의 우리가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바라 보기가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들의 그 고통스런 시간들에 아무것도 감당하지 않았다.
<그림5> 우리말로 선명하게 써 있는 학교 정문의 '오까야마 조선초중급학교' 그 옆의 기둥에는 한자로 같은 이름이 쓰여져 있다.
유치반 22명, 초급부 48명, 중급부 26명. 오카야마 조선초중고급학교 학생수는 2014년 현재 총 96명이다. 초급부 중에 가장 적은 수의 학급은 2학년 5명, 올 해 초급부에 입학한 아이들은 6명이다. 가장 많은 학급인 중급부 1학년이 13명, 중급부 2학년은 5명이다. 열명이 넘는 학급이 두 개 밖에 되지 않는 학교이지만, 유치반까지 포함하더라도 결코 적은 수의 학생은 아니다. 일본 전국의 조선학교 중 대도시를 제외한 조선학교 중에서는 그나마 준수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흐름이 그렇게 되었다. 게다가 유치반이 무료로 운영된다고 하니 이 지역 동포들의 교육열 ( 즉, 재정 보조)이 대단하다 싶다. 몇 년 전부터 자체적으로 진행되는 ‘1인 1계좌(1인1구) 운동’이 그나마 재정에 큰 역할을 한다고 한다. 시에서 각종학교에 해당하는 조금의 보조금이 지급되고 있으나, 교재와 교구를 마련하는 데에 쓰면 없다. 학생수가 급감하는 시대에 수업료 만으로는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교장과 교육회장은 다양한 방법으로 다음 해의 재정을 마련해 왔고, 한 사람의 경제적 부담이 적고 쉽게 참여할 수 있는 ‘1인 1구 운동’이 졸업생, 지역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기부금 마련의 적절한 방안이 되었다. 1947년 해방 직후 450명, 1960년 귀국사업 시작 직후 200여명, 신교사 건설 등 학생수가 넘쳐났던 시절을 생각하면, 여름ㆍ겨울 방학 때 먼 지역의 동포들을 찾아 돈을 구하러 떠나야 하는 현재의 교장ㆍ교육회장의 ‘여행’이 애처롭다.
J 리거 이한재를 낳은 운동장
오카야마 조선초중급학교 정문에 들어섰다. 조선학교가 어디나 마찬가지이듯이 정문의 양쪽에는 각각 우리말과 한자로 된 명패가 있다. 경비업체가 학교의 밤을 지키고 있는 일본학교는 상상할 수 없는 ‘숙직 선생’이 아직도 있고, 부족한 재정으로 ‘경비 아저씨’ 조차 없는 우리학교는 굳게 문을 잠그지 않는 이상은 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한 때 우리학교 앞에서 확성기로 반북선전활동을 하는 우익들의 빈번한 출현 등으로 굳게 잠겨있던 조선학교의 교문. 이것을 보고 매스컴과 우익들은 다시 ‘폐쇄’적인 학교 운운하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림 5,6> 정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아이들의 표정이 보이는 친절한 인사말 ' 잘 오셨습니다'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벽을 따라 아이들의 그림과 반가운 우리말. “잘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중급부 47기 졸업생 일동’ 이 회색의 시멘트 벽돌 화단에 그려 놓은 꽃들. 익숙하지 않은 새벽활동의 피곤을 말끔히 씻어준다. 고향에서 온 카메라를 든 아저씨를 반갑게 맞아주는 건 초급부 1학년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을 따라 나온 초급부 담임 선생님. 아직은 봄이 완전히 자리 잡지 못한 차가운 날씨 때문일까. 저고리 위에 걸친 가디건이 오히려 포근하다. 아이들의 눈 높이에 늘 자신의 눈을 맞추는 초급부 선생님들. 그 다정다감함에 우리학교에 온 것이 실감났다. 일본 전국의 우리학교를 참 많이 다녀 봤지만, 예외를 발견하지 못했던 이 풍경. 선생님과 아이의 시선이 교차하는 그 선에는 우리가 어린 시절 경험하지 못한, 그래서 더욱 애틋한, 탁한 마음, 근심들이 잠시 자리를 비워주는 그런 힘이 있다. 한 번 조선학교에 매료되면 잊지 못하고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이 시선이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평화가 깃든 시선이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의 정화를 바라는 인간의 근본적인 태도 때문이 아닐까?
< 그림 7> 오까야마 우리학교 교정의 초급 1학년 아이들과 선생님.
1학년 아이들을 따라 교실에 들어갔다. 마침 국어시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조선학교에서는 우리말만 사용하고, 일본말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법칙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나 우리말을 배우고 쓰기 위해 학교에서의 일상이 많은 부분 할애되지만, 여기는 정규 교육기관이다. 그리고 이 아이들은 북에서도, 남에서도 살지 않고 일본에서 살고 있는 아이들이다.우리말 뿐 아니라, 과학도, 수학도, 사회시간도 다 중요하다는 의미다. 물론 수업은 기본적으로 일본어 수업을 제외하면 학생이나 선생님이나 우리말로 진행한다. 그러나 쉬는 시간, 점심시간, 소조(특별활동)시간에도 반드시 우리말을 의무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종의 권고사항일 뿐. 다만, 한 학기에 한 두 번 진행하는 ‘소년단 운동 기간’에는 100퍼센트 우리말을 써야 한다는 것이 전통적으로 고수되어 왔던 법칙이었다. 오카야마 우리학교는 유치반이 있기에 1학년 아이들도 제법 우리말이 능숙하다. 그래도 역시 ‘모어’는 일본말. 아이들은 정규교육의 첫 1년, 아직 머리가 부드러울 때 우리말을 발음에서부터 배워나간다. 역시 일본어를 모어로 태어난 아이들인지라, 몇 가지 우리말 발음을 잘 하지 못하고,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렇게 정성을 다해 한 단어씩 우리말을 소리내어 읽는다. 그 모습을 보며 본토의 아름다워야 할 우리말이 외래어와 각종 조어, 은어로 상처받고 변해가는 과정이 못내 부끄러웠다.
<그림 8> 오까야마 조선학교의 초급부 수업 풍경. 정다운 선생님과 귀여운 아이들. 차렷, 선생님 안녕하세요. 동무들 반가워요! 칠판에는 '여기가 어디니?' 라고 적혀있다.
한편으로 벌써 10년이 넘게 조선학교를 드나들고, 동포들을 만나면서 나름으로 결론 내린 초급부 1학년 아이들의 우리말 배울 때의 그 열성?! 그 이유!
유치반이 있는 경우는 특히 그렇고, 그렇지 않더라도 초급부 1학년들은 공통적으로 그 위 학년 언니 오빠들이 공통으로 사용하는 ‘우리말’ 대화에 빨리 끼고 싶다. ‘소외’에 대한 두려움. 어쩌면 모든 아이들의 마음일 것이다. 우리학교에 가면 선생님도 ‘우리말’, 언니 오빠들도 ‘우리말’, 가끔 학교에서 배워 간 우리말로 엄마 아빠에게 말을 걸면 무지하게 좋아하는 그 분들. 이런 환경이 아이들을 우리말에 열정적이게 만드는 요인이라는 거다. 처음 배우는 우리말은 초급부 1학년 어린 마음에 단지 ‘외국말’이 아니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 구성원이 되기 위한 과정이다. 존재함과 동시에 하나의 사회에 자연히 속하게 되는 ‘본토’ 사람들과는 다르게 재일조선인 아이들은 이렇게 아주 어린 시절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그 사회구성원이 된다. 어쩌면 우리학교 아이들이 남쪽, 북쪽, 일본의 아이들과 다른 ‘정체성’을 가지게 되는 시작점이 아닐까 싶다. 또 이 경험은 ‘집단’을 대하는 자세에 보다 복잡한 감성과 태도를 결정할 지도 모른다. 누군가 우리학교에 관심이 있는 사회심리학자가 있다면 한번 연구해 봄직한 주제가 아닐까 싶다. 이것은 일본사회에 태어나 일본학교를 다니는, 그래서 나중에 자신이 ‘조선사람’임을 깨닫게 되는, 또는 늘 숨기며 살아가는 대다수의 재일동포 아이들과는 또 다른 지점이다.
<그림 9> 초급부 2학년 교실. 개구장이 남자 아이 5명이 함께 생활한다. 부모님들의 걱정과 상관없이 아이들은 학교생활이 즐겁다. 선생님이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같은 조선사람이라고 친근하게 대해주는 우리학교 아이들.
초급부 2학년 교실에 들어갔다. 음악수업이었다. 다섯 명 모두 남자 아이들이다. 학생 수가 줄어들면서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는 지점이다. 이 아이들이 초급부 1학년부터 그랬는지 아니면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여자아이 한 명이 일본학교로 전학했는지 어땠는지 알 수 없다. 초급부 1학년의 대상자 수가 워낙 적어지는 요즘인지라,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입학할 우리학교가 모두 남자, 혹은 모두 여자일 경우 입학 자체를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고 한다. 같은 성의 아이들이 초급부 6년을 같은 반으로 보낼 경우, 아직 충분히 자아가 성장하지 못한 아이들의 인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고민하는 것. 동시에 자신의 아이가 여자일 경우, 남자아이 밖에 없는, 그래서 여자 동무가 없는 초급부 시절을 보낼 것을 생각해도 여전히 같은 문제가 남는다. 때문에 입학을 결심하고도, 마지막 순간 자신의 아이가 유일한 여자일 경우, 혹은 모두 같은 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입학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우리가 단순히 조선학교의 어려움을 ‘재정’으로만 바라보기 어려운 지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학교에 보내는 부모의 경우, 일반 초등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수업료’, 때마다 해야 하는 학교 지원 활동, 불리한 교육환경, 졸업 후의 차별 등 그 모든 것을 감당하면서 ‘우리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것이다. 학교를 지킨다는 것. 해방 후 60여년, 1세부터 4,5세까지…. ‘조선학교’를 처음 발견했을 때 ‘어쩌면 이것은 기적이 아닐까?’ 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알면 알수록 확신에 가까워지는 이유다.
**히로시마 방문기 2편은 시코쿠 조선초중급학교 편입니다. ^^
<그림 10> 오까야마 학교 운동장. 일본 프로축구 J리그의 이한재 선수를 낳은 운동장이다. 비가 오는 날이면 운동장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기는 초라한 운동장이지만, 이곳에서 그는 국가대표의 꿈을 키웠고, 결국 북한 국가대표가 되었다.
<그림 11> 중급부 1학년. 오까야마 조선초중급학교의 가장 학생수가 많은 학급이다. 13명.
<그림12> 사진을 찍자고 하니 처음에는 어리둥절, 수줍어 하던 아이들이 선생님이 크게 웃어주니 따라 웃어준다. 어른의 표정을 그대로 닮아가는 아이들, 아니 아이의 표정을 닮아가는 어른.
<그림 12> 우리학교 교실에는 '하자요'로 맺음하는 문장이 많다. 북에서 쓰는 말일지 모르지만, 유독 입에 잘 붙고 말하기 쉬운 우리말. 그리고 '동무'라는 우리가 잃어버린 친근한 우리말. 요즘 20대는 기억에 없을 지모르지만 3,40대는 어렸을 때 이 말을 들어 보았다. 어린 시절 '내 동무'라는 말이 교과서에 나올 정도 였지만, 반북 이데올로기는 그 정겨운 마을 앗아갔다.
<그림 13>오까야마 조선초중급학교 유,초,중급부 학생들과 학부모의 '아이 러브 학교 프로젝트' 행사 기념. <빛나라 과외수업과 급식>이라는 제목인데, 빛나라는 오까야마 기숙사의 이름이라고 한다. 단체사진 앞 쪽에 있는 구조물은 일본에서 여름에 소바를 즐겨 먹는 방식으로 찬물이 흐르는 대나무를 타고 소바를 흘려 보내면 중간에서 건져 먹는 풍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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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히로시마 방문기 2편이 기다려 집니다. 언제나오나요?
우리학교 방문기 계속해서 올려주세요^^
김명준감독,먼길을 수고했으며 많은 글을 써주셔서 고마와요.함께 지낸 하루는 아주 의의가 깊었어요.시코쿠방문기를 기다립니다.단 방문글에서 하나만 수정한다면 히로시마교장은 50대인데요...^^
죄송합니다. ^^ 선생님. 제가 착각했었나 봐요. 60대인데 얼굴이 참 동안이시네 라고 혼자 생각했었는데. ㅋㅋ 수정하였습니다. ^^
빨리 안올려주시면 촛불 듭니다 ~~
동천님. 저 이 글 쓰느라 밤 샜어요. ㅠ..ㅠ 또 밤새야 할 듯이요.
@김명준 할 수 없군요. 밤새시는데 불 밝히는 촛불을 들어야 하겠꿍요. 흐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