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의 후예 정종택 정운찬 정덕기 배출
뿌리공원에 세워진 영일정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제공 | ||
조각가 : 김 영 석 (조각가협회이사) 작품설명 ; 원체(圓體)는 영일가문(迎日家門)을 뜻한다.양손은 희망찬 새날을 맞아 넓고 드높은 동녘하늘에 힘차게 치솟는 붉은 해를 우리 모두가 반기며 맞아 높이 받드는 참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하늘높이 치켜든 양팔은 하늘의 축복에 후손들의 웅비(雄飛)와 약진을 상징하고 원체(圓體)를 떠받들고 있는 성인(成人)과 아이의 군상(群像)은 자손의 번영과 가족간의 화합을 의미한다. |
뿌리공원에 세워진 영일정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제공
<뿌리공원에 새겨진 영일정씨 유래>
영일정씨의 연원은 신라 태종무열왕 원년 간의대부 諱 宗殷(이하 휘자 생략)을 시조로하여 그 후손 宜卿이 영일현백에 봉해졌으므로 그 후예들이 본관을 영일로 정하였다. 그후 지명이 수차 변경됨에 따라 烏川鄭氏 延 日鄭氏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중간에 세보의 실전으로 그 원류는 같으면서도 2대계파로 분립되는바 여말 감무를 지낸 克儒를 1세로 하는 監務公派(설곡계)와 역시 고려조 추밀원지주사에 오른 襲明을 1세로 하는 滎陽公派(포은계)가 그것이다.
역대문중의 대표적 인물로 雪谷 思道는 시호가 文貞이다 모친상에 3년간 시묘한 효성에 감탄한 공민왕으로부터 일성군에 봉해져 명성이 높았다. 圃隱 夢周의 시호는 文忠이다 동방성리학의 태두이며 순국충의의 사표로서 만인의 추앙을 한몸에 받고 있다. 靖元公의 다섯째 아들 孝全은 조선조 태종의 일성 부원군에 봉해졌으며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松谷 淵은 시호가 貞肅이다 안평대군의 장인이 된다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형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조선 조의 명상이자 가사문학의 일인자요 당대의 시성인 松江 澈의 시호는 文淸이다 관동별곡 사미인곡 성산별곡 등 수많은 단가와 가사를 남겼으며 1589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역임하였다. 文巖 澔의 시호는 文敬이다 송강의 현손으로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영일가문은 한국 현대시문학의 선구자 향수의 시인 芝溶과 대한민국 제 3공화국 공화당의장을 역임하면서도 삼선개헌 반대를 주도한 민주투사 求瑛등 수다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영일정씨는 학문과 의리와 지절을 생명처럼 지켜왔으며 인륜대도를 면면히 이어 온 명문세족이다 이제 자손들의 정성을 한데 모아 조상의 유덕을 금석에 새겨 오래도록 기리고자 일문을 초하니 선조의 참된 얼을 새삼 느끼는도다.
1997년10월1일
後孫 又松大學校 大學院長 奉允 述倂書
작품명 : 화합(和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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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씨(鄭氏)에 대해서...>
우리나라 정씨(鄭氏)의 원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고려인종때 김부식이 지음)와 삼국유사(三國遺史:고려말 승 일연이 지음)에 그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6촌 중(六村中) 자산(觜山) 진지부(珍支部)의 촌장이었던 지백호(智伯虎)가 서기 32년(신라 유리왕 9)에 신라 건국에 공을 세운 6촌장의 한 사람인 지백호(智伯虎)의 후손 동 충(東沖)에게 정(鄭)씨로 사성(賜姓)함으로써 성씨(姓氏)의 연원이 되었음을 기록하고있다.
당시 6촌장은 신라의 개국공신으로 모든 국가정책을 의결하였는데 이를 화백회의(和白會議)라 하였고 이 연맹은 신라건국의 모체가 되어 왕도(王道)를 토착시켰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정(鄭)씨는 후대에 여러 정씨(鄭氏)로 갈라져 본관을 달리하고 있으나 모두 득관조 겸 도시조(都始祖)인 지백호(智伯虎)의 후예들이다. 단,<서산정씨>와 <낭야정씨>는 시조를 달리하고 있다.
정씨(鄭氏)의 원류는 지백호(智伯虎)의 후예이나 오래된 성씨이기에 계대(系代)를 자세히 알 수 가 없어 지백호(智伯虎)의 원손중에서 각 본관별로 중흥시조(中興始祖)를 받들고 있다.
<집성촌>
영일정씨는 경상남.북도.경기도.강원도.황해도 등지에 주로 산거해있으며,
중부권은 충청북도 영동.옥천.진천.음성,충청남도 청양.서천.당진.공주일원이 집성촌이다.
감무공파(1세 정극유)는 14세인 정 제(鄭 濟) 이후 주로 인천에서 세거하며, 충남 청양군.서천군.당진군 일원으로 산거(散居)하였고, 16세 이후로는 충남 공주.충북 음성군등지로 세거지를 확대하였다.
정자양의 손자 정충남(鄭忠男)은 충북 영동군으로 정종남(鄭終男)은 충북 옥천군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정자제(鄭自濟)의 손자 정언탁(鄭彦濯)은 충북 제천시에 터를 잡았다.
또한 정자숙(鄭自淑)의 후손 중 12세 정 소(鄭沼)는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순천(順天)에 은거하여 터를 잡았고, 15세 이후로는 충북 제천.충주.진천.여주(驪州).원주 등지에 산거(散居)하였다.
<영일정씨 현대인물>
정주영(鄭周永)-철학박사.
정희택-전 감사원장.
정의택-전 서울시교육감.
정일영(鄭一永)-전 국민대학교 총장.
정연권-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정종택 11.12.13대 국회의원.전 충북지사.농수산부 장관
(현) 충청대학 총장(전국정씨연합 충북회장).
정종원 전 조흥은행장.정구호 전 경향신문 사장.정지용 예비역육군대장.
정진완 예비역육군소장.정연세 전 항만청장.정춘택 전 산업은행총재.정인택 전 충북지사.
정태성(鄭泰成) 6.7대 국회의원
정치근(鄭致根) 32대 법무부장관.변호사
정재철(鄭在哲) (제11·12·14·15대 국회의원), 정무 제1장관
정창화(鄭昌和) (제11·12·13·15·16대 국회의원)
정운영(鄭雲暎) 전 MBC TV 정운영의 100분 토론 진행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정동윤(鄭東允) 제 12, 13대 국회의원
정운찬-서울대학교 제23대 총장, 경제학자.현 국무총리(충남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 출생)
鄭德基(정덕기)-(하동정씨 河東鄭氏)
전 충남대학교총장(문학박사)
(현) 하동정씨대종회 회장
(현)대전광역시 정씨 연합회장
(사)한국청소년인성교육협회장
충남역사문화원장 역임
정만길(鄭晩吉)연세대학교 화학과 교수 - 인간 수명을 10배 연장시키는 페로몬 세계 최초 발견 및 합성
정수일(鄭守一)<신라.서역 교류사>저서 - 중동문제 전문가
정소성(鄭昭盛)) <소설가>단국대 교수
정호근(鄭好近) 전 국회의원.
정운근(鄭雲近) 전 국회의원.
정운갑(鄭雲甲) 전 국회의원.농림부장관
정해영(鄭海永) (7選 국회의원). 전 국회부의장
정소영(鄭韶永) 전 농수산부 장관.
정무식(鄭茂植) 전 국회의원.
정구중(鄭求中) 전 국회의원.
정종택(鄭宗澤) (11.12.13대 국회의원). 전 농수산부장관.현 충청대학 학장
정승화(鄭昇和) 육군참모총장(박정희대통령 서거때 계엄사령관)
정호용(鄭鎬溶) 전 국회의원. 육군참모총장.(전)전국정씨연합중앙회 총재
정희택(鄭喜澤) 전 국회의원(11대). 전 대검검사. 전 감사원장
정남택(鄭南澤) 전 국회의원.
<전국정씨연합중앙회 역대 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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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夢準(하동정씨.현 총재 6선 국회의원.한나라당대표) 鄭鎬溶(영일정씨.2.3대 역임, 現 名譽總裁, 전 육군참모총장) | ||||||||||||||||||||||||
鄭起勝(전 대법관.1988년 대법원장 후보) | ||||||||||||||||||||||||
鄭夢九(현 현대.기아 회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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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光益(물아껴쓰기운동중앙회장) | ||||||||||||||||||||||||
鄭在哲(전 국회의원.정무장관.산업은행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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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相千(전 부산시장. 국회의원) | ||||||||||||||||||||||||
鄭鍾復(전 서울대 교수) | ||||||||||||||||||||||||
鄭大哲(전 국회의원) 鄭奉和(영일기업회장) | ||||||||||||||||||||||||
鄭義和 鄭甲潤 鄭東泳 鄭柄國 鄭長善 鄭鎭碩 鄭鎭燮 鄭熙秀 | ||||||||||||||||||||||||
鄭斗彦 鄭亮碩 鄭泰根 鄭美京 鄭壽星 鄭玉任 鄭河均 | ||||||||||||||||||||||||
鄭柄睦(대영인테리어회장) | ||||||||||||||||||||||||
鄭泰元(前철도청 감사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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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광역시.도 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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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정씨(迎日鄭氏,연일,오천)
포은 정몽주,가사문학 대가 송강 정 철
1360년(공민왕 9년)에 치른 "정몽주 장원급제 답안지 발견"
영일정씨는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간관(諫官:왕에 대한 간쟁.봉박을 담당한 관원을 간관이라하는데 불체포특권 및 왕을 승정원을 통하지 않고 직접만나는 권한이있는 쳥요직임.산기상시(정3품).간의대부(종3품)등의 관원을 말함)을 지낸 정종은(鄭宗殷)을 시조로 받든다.
시조 정종은(鄭宗殷)은 신라에서 간관(諫官:조선조에는 3사,즉 홍문관.사간원.사헌부의 대간의 역할과 같음)으로 직언을 하다가 인동(仁同) 약목현으로 유배되었다고 한다.
그의 후손인 정의경(鄭宜卿)이 연일(迎日.연일)로 이주하여 호장(戶長:고을 아전의 으뜸벼슬)을 지내고
영일현백(迎日縣伯.연일)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영일로 하였으며, 그 고을의 별칭인 오천(烏川)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영일정씨는 시조 정종은의 후손인 정습명(鄭襲明)을 중흥시조(中興始祖)로 받드는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지주사는 고려때 중추원의 승지방에 소속된 정3품관으로 왕명의 출납을 맡아봄)와 정극유(鄭克儒)를 중흥시조로 받드는 감무공파(監務公派:감무는 작은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가 있다.
정습명(鄭襲明)은 고려 의종때의 중신으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고려때 정3품 문관의 품계,서기 995년(성종14)에 은청흥록대부로 바뀜)로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정3품 벼슬.추밀원은 중추원이 바뀐것으로 왕명의 출납과 궁중의 숙위를 담당한 관청)를 지냈으며 한때는 본고장인 오천(烏川)마을 이름을 따서 오천으로 쓰기도 했으나 지금은 영일(迎日)로 통일했다고 한다.
한편 "오등봉작제"의 현백(縣伯)은 고려 문종때 5계급으로 나누어 작위를 주던 제도의 4번째 작위로 그 고을 7백호의 세금을 거두어 쓸 수 있었으며 <정5품>의 벼슬을 내렸다.이후 1356년(공민왕 5)에는 공.후.백.자.남의 관품을 모두 <정1품>으로 하였다.
영일정씨(迎日鄭氏)는 조선시대에 5명의 상신(相臣:의정부 정1품벼슬.우의정.좌의정.영의정)과 3명의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문형)을 배출하였다.
이 두파는 시조를 같이 하면서도 중간 계보를 잃어 서로 촌수를 헤아리지 못한다고 한다.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는 포은 정몽주(鄭夢周), 감무공파는 송강 정철(鄭澈)이 잘 알려져 있다.
영일정씨는 조선시대에 배출한 상신(相臣:의정부 정1품 벼슬.우의정,좌의정,영의정) 5명과 대제학(大提學:홍문관과 예문관의 정2품으뜸벼슬) 3명 가운데 우의정(右議政:정1품 정승)을 지낸 정유성(鄭維成)만이 정몽주의 후손이며 인조때의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으뜸벼슬,문형)을 지낸 정홍명(鄭弘溟)과 영조때의 영의정(領議政:의정부 정1품 벼슬.정승) 정 호(鄭澔),우의정(右議政:의정부 정1품 벼슬.정승) 정우량(鄭羽良) 등은 모두 송강 정철의 집안이다.
이 밖에 지주사공파(知奏事公派)로는 정유성의 손자인 양명학의 거성(巨星) 정제두(鄭齊斗),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효종때의 학자 정극후(鄭克後),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고 감무공파로는 고려 공민왕때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진 정사도(鄭思道)가 유명하다.
정사도(鄭思道)는 충숙왕 복위 5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밀직부사(密直副使:정령을 출납하던 밀직사의 3품 벼슬)를 거친 뒤 공민왕 때 동북면상원사(東北面上元師) 도순문사(都巡問使)를 역임하고 우왕 때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올라 오천군(烏川君)에 봉해지고 공신이 되었다.
정 홍(鄭洪)은 정사도(鄭思道)의 아들로 우왕3년 문과에 급제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를 지내고 공간(恭簡)의 시호가 내려졌다. 또한 오성군(烏城君) 정 후(鄭煦)는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 품계)에 이르렀다.
<감무공파(監務公派)>
조선시대 중엽 송강 정철(鄭澈)은 시조(詩調)의 윤선도와 함께 우리 고전문학의 쌍벽으로 불리는 가사의 최고봉이다. 그는 당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당쟁에서 서인(西人)의 영수로 동인(東人)세력과 끝까지 맞선 투사였고 외관직인 여러지역의 관찰사(觀察使:종2품 벼슬.감사)를 지내고 좌의정(左議政:의정부 정1품벼슬.정승)에 올랐다.
그의 아들 정홍명은 인조 때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으뜸벼슬로 대제학은 최고의 영예로 여김)을 지냈으며 정 철의 현손(玄孫:손자의 손자.고손자)인 정 호(鄭澔)는 영조때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문형)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정1품 벼슬.정승)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정 호의 손자 역시 대제학(大提學: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벼슬.문형)에 올라 가문을 빛냈으며 이조판서(吏曹判書:정2품벼슬)를 역임했다.
증손인 정이환은 참판(參判:종2품 벼슬.차관)과 제학(提學:예문관.홍문관의 종2품 벼슬)을 지냈으며
영조 때 정우량(鄭羽良)은 우의정(右議政:의정부 정1품벼슬.정승)에 올라 유명하였다.
<지주사공파>
지주사공파는 포은 정몽주를 정신적 지주로 받든다.충신.효자.의인으로 일컬어지는 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나면서부터 어깨에 북두칠성처럼 검은점 7개가 박혀있어 이웃사람들도 모두 큰인물이 될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9세때 집에서 부리는 여종이 군에 나간 남편에게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그자리서 "구름은 모였다 흩어지고 달은찼다 이지러지지만 첩의 마음은 항시 변치 않습니다"라고 써주었다.
짧은 한시(漢詩)로 남편을 그리는 아내의 마음을 표현한 소년의 재능에 글방 스승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는 24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56세로 일생을 마칠때까지 기우는 민생을 구하는 일에 열과 성을 쏟았다. 그밖에 현종 때의 우의정(右議政:의정부 정1품벼슬. 정승)을 지낸 정유성(鄭維成)과 정유성의 손자인 양명학의 거성 정제두(鄭齊斗),선조 때 임진왜란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정대임(鄭大任),효종 때 학자 정극후(鄭克後),고종 때 산수화에 능했던 정문승(鄭文升) 등이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옛이름 쇄포촌(曬布村),일명 능골) 산 3번지는 마을에서 1Km 남짓 떨어진 문수산 기슭으로 이곳에 영일정씨의 정신적 지주인 포은 정몽주의 묘가 있다.
포은 정몽주 묘역 | ||
서기 1392년(고려 공양왕 4년) 음 4월4일 황해도 개성 선죽교에서 순절(殉節)한 후 처음 안장(安葬)한 곳은 개성부근의 해풍군(海豊郡.풍덕豊德)이다. 같은 해 음력 12월 부인 경순택주(敬順宅主) 경주이씨가 죽자 해풍군에 모셔졌고 순절한지 14년이 되는 1406년 3월 이곳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에 천묘 합장(遷墓合葬)하였다.
정씨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본래 포은선생의 고향인 경상도 땅으로 천묘지(遷墓地)를 정하고 면례행렬(緬禮行列)이 용인시 경계에 이르러 잠시 멈추어 쉬고 있을 때, 갑자기 돌풍이 불어 명정(銘旌)이 하늘 높이 날아가 이곳(현재 묘지)에 떨어지자 모든 사람이 이곳이 명당(明堂)자리라며 포은 유택(幽宅)을 이곳으로 정하였다고 한다. 또한 면례행렬이 멈추었던 곳의 풍덕래(豊德來)란 지명은 포은선생의 면례행렬이 개성 풍덕으로부터 왔다하여 풍덕래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600년(선조 33년)에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가 죽자 여러 지술관(地術官)을 각처에 보내어 능소(陵所)자리를 구할때 이곳 포은의 묘소자리가 적합처로 정하게 되었다.
선조대왕은 포은선생의 묘역임을 알고 "충현(忠賢)의 후골(朽骨)을 어찌 200년후에 발굴(發掘)할 수 있겠는가" 하고, 다른 곳에 구하도록 하였다. 지금의 능골은 그 당시 능소(陵所)의 적합지로 정해졌다는 연유에서 능골로 부르게 된 것이다.
후손들은 이곳 조상의 묘를 지키며 2백여년동안 산아래에서 살아온다고 한다. 마을의 40여가구가 정씨 한집안으로 인근에서는 양반동네로 부르고있다.
영일정씨가 용인이 세거지가 된것은 정몽주가 태종3년 충신으로 추존되고 용인을 사패지(賜牌地:임금이 내려준 전지(田地).사패지지)로 하사 받은데서 연유하며,포은의 7세손 정 준(鄭儁)이 병자호란을 겪은뒤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터를 잡아 지금의 집성촌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영일정씨(迎日鄭氏)는 조선시대에 문과(文科:대과)에 111명,무과(武科:무관을 뽑던 과거.시험은 무예와 병서였으며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였음)에 34명,사마시(司馬試:생원.진사를 뽑던 과거)에 277명,의과에 1명,음양과(陰陽科:천문.지리.명과학(命課學)에 밝은 사람을 뽑던 과거)에 2명,율과(律科;형률에 능통한 사람을 등용하던 잡과의 한 가지)에 1명 등 모두 426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연일정씨는
1985년에는 57,504가구에 인구는 237,219명 이었으며
2000년에는 67,418가구에 인구는 216,510명으로 조사되었다.
<인물 탐구>
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 초명은 몽란.몽룡,자는 달가(達可).시호는 문충 文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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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시호는 문충 文忠)
고려말의 문신 겸 학자로 널리 알려진 충신이다.그는 경북 영천에서 출생하였으며 의창을 세워 빈민구제와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개성에 5부학당을 세우고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의 진흥을 꾀하였다.
1360년 문과에 장원급제후 예문관검열(檢閱:정9품 벼슬).수찬(修撰;서책을 편집.찬술하던 홍문관의 정6품 벼슬).위위시승(衛尉寺丞:위위시는 고려때 의장과 궁중관계의 의식용 물건을 관리하던 관청.승은 종6품 벼슬)등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토벌에 참가하고,13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典農寺丞:제사에 쓰던 곡식을 맡아본 관청의 벼슬).예조정랑(정5품) 겸 성균박사(禮曹正郞兼成均博士).성균사예(成均司藝:음악을 가르치던 정4품 벼슬)를 지냈고 서기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 등을 거쳐 성균사성(成均司成:종3품)에 올랐으며,이듬해 정사(正使)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사신가운데 기록을 맡아보던임시벼슬)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정3품으뜸벼슬)으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을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되었으며,이듬해에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九州]의 장관에게 왜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정3품 으뜸벼슬).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정3품 벼슬).예의판서(禮儀判書:정3품 벼슬).예문관제학.전법판서.판도판서(版圖判書:호부상서로 고치기 전의 판도사 으뜸벼슬로 정3품)를 역임하고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의 휘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토벌하였고, 다음해 정당문학(政堂文學:종2품 벼슬)에 올라 성절사(聖節使:황제나 황후의 생일 축하사신)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同知貢擧:과거시험 감독관)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책록되었다. 서기1389년(창왕1) 예문관대제학.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정2품 벼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벽상삼한 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정1품 문관 품계).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종1품 재상).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都評議使司兵曹尙瑞寺判事)·경영전영사(景靈殿領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을 지내고 익양군충의백(益陽郡忠義伯)이 되었다.
그는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황주(黃州)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이방원(李芳遠:태종)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善竹矯)에서 이방원의 부하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격살되었다.
그는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고려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文廟)에 배향되었었으며 충남 공주 반포면 동학사에 삼은각(三隱閣).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한편 정몽주의 <장원급제 답안지>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정몽주의 장원급제 답안지 | ||
2009년 3월5일 정몽주를 포함한 고려말~조선 중종대의 문인 30여명이 쓴 과거 답안지의 후대 필수본을 수록한 일본 나고야 호사문고 소장 책문(策問,188쪽.조선중종대 제작 추정)의 사본을 입수했다고 도연철교수가 밝혔다. 책문(策問)은 왕이 '국가현안을 타개할 방법을 논하라'는 시험으로 대책문은 그 답안지를 뜻한다. 호사문고 소장 '책문'은 고려말 이색(1328~1396),조선 전기 이손(1439~1520)등의 과거 답안지 필사본을 수록한 일종의 '과거 기출문제집'이다.
서기 1360년(고려 공민왕 9년)에 문과에 응시한 정몽주는 당시 고려를 위협하던 '홍건적 대처법을 작성'해서 장원으로 뽑혔다.대책문에는 "강태공이나 제갈량처럼 문무를 겸비해 인의(仁義)로 적을 물리쳤기에 이런것을 모범으로 삼아 문무를 겸비한 사람을 써야 한다"고 적었다.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 | ||
<송강 정철(鄭澈:1536~1593,호는 송강,시호는 문청 文淸)>
송강 정철은 조선 중기의 문신겸 시인이자, <사미인곡>.<관동별곡>으로 널리 알려진 가사문학의 대가이다. 정철(鄭澈)은 돈녕부판관(敦寧府判官;돈녕부는 돈녕의 친목을 다지는 관청.5품벼슬) 정유심(鄭惟沈)의 막내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대승(奇大升).김인후(金麟厚).양응정(梁應鼎)의 문하생으로 인종(仁宗)의 귀인(貴人)인 맏누이와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 된 둘째누이로 인해 궁중에 출입하면서 어린 경원대군(慶原大君:뒤에 명종)과 친숙해졌다고 한다.
그가 10세가 되던 서기1545년(명종 즉위년)의 을사사화(乙巳士禍)에 계림군(桂林君)이 관련되자 아버지가 유배당할 때 배소(配所)에 따라다녔다.
큰 형은 귀양길에 죽고 아버지는 정평(定平), 연일(延日)에서 5년동안 귀양살이를 한다. 송강(松江)은 그동안 창평현(昌平縣)에서 그곳 부호의 도움으로 인근에 낙향했거나 귀양 와 있던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 등 석학(碩學)들에게 학문을 배우고 문장을 익혔다.
1561년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으며 다음해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나 병년(丙年)에 보던 과거)에 장원급제하였으며 전적(典籍:정6품 벼슬) 등을 역임하고 1566년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이이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문과 급제자중 덕행과 재능이 뛰어난 문신을 호당에 들어 오로지 공부만하도록 한것)를 하여 명성을 떨쳤다.
1578년(선조11)에 장악원정(掌樂院正:장악원에 속한 정3품 문관)으로 기용되고 승지(承旨:정3품 승정원의 당상관)에 올랐으나 진도군수 이 수(李銖)의 뇌물사건으로 동인(東人)의 공격을 받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0년 강원도관찰사(종2 외관직.감사)로 등용 3년 동안 강원.전라.함경도 관찰사를 지내면서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때 관동별곡(關東別曲)을 지었고 시조 훈민가(訓民歌)16수를 지어 널리 낭송하게 함으로써 백성들의 교화에 힘쓰기도 하였다.
1585년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가 4년동안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이 때 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등 수 많은 가사와 단가를 지었다.1589년에 우의정(右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으로 발탁되어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게 되자 서인(西人)의 영수로서 철저하게 동인(東人) 세력을 추방했고 다음해 좌의정(左議政:의정부 정1품 정승)에 올랐으나 1591년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여 동인(東人)인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함께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기로 했다가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혼자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했다. 이 때 신성군(信城君)을 책봉하려던 왕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어 진주(晉州)로 유배되었고 이어 강계(江界)로 이배(移配)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때 부름을 받아 왕을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왕가를 뒤따름)하고 다음해 사은사(謝恩使:우리나라에 호의를 베풀었을때 가는사신)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는 얼마 후 동인들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江華)의 송정촌(松亭村)에 우거(寓居)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상소로 관직이 복구됐으며 숙종10년 문청공(文淸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송강(松江)은 성질이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화(黨禍)를 입어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 어린 시절을 보낸 창평(昌平) 성산(星山)을 읊은 성산별곡(星山別曲)을 비롯하여 우리말로 된 수많은 가사(歌辭)들은 국문학상의 일품들이며, 당대 가사문학의 대가로서 시조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 시가사상 쌍벽으로 일컬어진다. 창평의 송강서원, 연일군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으로 송강집.송강가사.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작품으로 시조 70여 수가 전한다.
본관소재지 연일(延日)은 경상북도 동해안에 위치한 포항시 영일읍(迎日邑)의 옛 지명으로 서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임정현(臨汀縣)으로 개칭하고 의창군(義昌郡: 興海)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영일현(迎日縣: 延日)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에 경주부(慶州府)에 내속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작은현에 중앙에서 파견한 감독관)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조선초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병마를 지휘하던 종2품 벼슬.절도사)가 지현사(知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세종대에는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절도사의 지휘 아래 있던 종3품의 군직.첨사)로 고쳤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동래부 영일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 연일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연일군은 연일면 등 5개면으로 분면되어 장기.흥해.청하군과 함께 영일군으로 통폐합되었고 1980년 연일면이 연일읍으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 영일군이 포항시에 통합되었다.
<전국정씨연합중앙회.백과사전.조선왕조실록 및 한국인의 역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