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윤 선 자*
1. 머리말
2. 기념사업회 결성과 동상 건립
3. 기념관 건립과 기념사업 기반 마련
4. 기념사업 확대와 활성화
5. 맺음말
1. 머리말
안중근은 오늘날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위인이다. 해방된 한국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진행된 안중근은 남·북한 모두가 함께 긍정적으로 평
가해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위인 가운데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
한 본격적 연구는 상당히 늦게 시작되었다. 북한에서는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사회주의 계열로 집중됨에 따라서 안중근 연구가 상대적으로 저
조하게 되었다. 남한의 경우에도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 1960년대까
지는 독립운동 연구가 지지부진했다. 그 때문에 안중근 연구 역시 활발
* 전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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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못하였다. 안중근의거는 이토 처단 직후 의병전쟁의 일환으로 간주
되었고,1) 의열투쟁의 典範으로 평가받았으며,2) 1970년대부터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다.3)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안중근에 대한 각종 기사가 신문이나 잡지에 다
수 실렸다. 안중근을 기념하는 사업이 진행되었고, 안중근의 일대기는 문
학작품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그의 의거를 기념하는 연극이 공연되었고,
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가 남·북한에서 각기 제작되었다. 일본에서도
안중근에 대한 긍정적 시각의 연구와 서술이 이루어졌다. 안중근에 대한
평가는 시간의 경과에 비례하여 더욱 강화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를
기념하는 각종 기념사업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활발하고 다양하게 추진
되고 있다. 2009년은 안중근의거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따라서 해방 이
후 곧 시작된 안중근 기념사업이 그동안 어떻게 추진되었는가를 추적하
는 것은 앞으로 안중근 기념사업은 물론 독립운동가 기념사업이 나아갈
방향을 기획하는 토대가 될 것이다.
기념사업이란 “어떤 뜻 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기 위하여 벌이는 사업”을 가리킨다. 기념사업의
대상은 사건·인물·장소·이념, 이것들이 아우르는 것들로 구분할 수 있
다. 또한 기념사업의 형태는 기념행사, 기념시설 건립, 학술 조사와 연구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본고는 안중근 기념사업을 시간의 추이에 따라 조
사, 분석해보려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념사업의 내용과 지역에 변
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본고의 시간 범위는 해방 이후부터 2009년 전반
기까지이고, 공간 범주는 한반도와 중국·러시아·일본·미주이다. 본고
1) 滄海老紡室, ꡔ安重根傳ꡕ(上海: 大同編輯局), 1914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ꡔ한국
학연구ꡕ 4 별집, 1992.
2) 「利害」, ꡔ丹齋 申采浩 全集ꡕ 하, 149쪽.
3) 김갑득, 「안중근에 관한 일연구-국권회복과 관련하여-」, 이화여대 대학원, 1975 ;
愼鏞廈, 「安重根의 思想과 國權恢復運動」, ꡔ韓國史學ꡕ 2,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
; 「安重根의 思想과 義兵戰爭」, ꡔ韓國民族獨立運動史硏究ꡕ, 乙酉文化社, 1985에 재
수록.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25
를 작성하기 위해 활용한 기초 자료는 해방 이후 공간된 신문자료들이다.
2. 기념사업회 결성과 동상 건립
한반도·동양평화를 위해 이토를 저격하였던 안중근을 기념한다는 것
은 일제식민통치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국내에서도 국외에서도 어려웠다.
그러나 안중근의거는 한국인들은 물론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기억은 일제의 패망 이후 안중근 기념사업
으로 구현되었다.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해방 후 안중근 관련 첫 기념사
업은 안중근 동상 건립이다. 1945년 12월 11일 장충단에서 대한민국임시
정부 요인을 비롯하여 각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民道會 주최로 “안중
근선생동상건립기금 및 장충단재건총회”가 개최되었다. 총회는 일본인들
이 건설한 博文寺 안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을 파궤하고 그 자리
에 안중근 동상을 건립하기로 하였다.4) 그리하여 “奬忠壇5) 재건과 의사
안중근동상건립기성회”를 조직하고 회장 이종대, 부회장 우덕순·고 오
를 선임하고 총무부장·재무부장·기획부장·지방부장도 선임하였다.6)
동상은 사건이나 인물의 동적인 성격과 현실감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기
념물이라고 할 수 있다.7) 이토 동상을 파괴하고 그 자리에 안중근 동상
을 건립한다는 것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 충분히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안중근 기념일은 의거일인 10월 26일과 순국일인 3월 26일로 이날 기
념식이 행해진다. 해방 후 안중근에 관한 첫 기념식은 1946년 3월 26일
4) ꡔ동아일보ꡕ 1945년 12월 12일 「死後雪恥: 안중근선생 추모 伊藤의 동상분쇄」.
5) 을미사변 때 殉死 충신·열사들을 제사지내기 위해 1900년 9월 고종의 명으로 마련
되었다가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폐사되었다.
6) ꡔ동아일보ꡕ 1946년 1월 8일 「안중근의사동상건립 장충단재건기성」.
7) 박명규, 「역사적 사건의 상징화와 집합적 정체성: 기념비, 조형물의 문화적 기능을
중심으로」,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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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운동장에서 순국 36주기 추도회로 진행되었다. 김구, 김규식, 조소
앙, 홍진, 김창숙, 김능권과 각 정당대표, 유가족 대표, 뉴맨 공보국장, 중
화민국거류민단대표 정원한 등이 참석한 추도식은 정인보의 추념문, 천
주교합창단의 추념가 합창, 안중근 영정에 2분간 묵념 순으로 이어졌
다.8) 추도식을 마친 후 안중근선생추도준비회는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안중근선생기념사업협회를 결성하였다. 위원장 우덕순, 부위원장 방응
모·김낙영·김효석, 고문 권동진·오세창·이시영 외 33명이 선임되었
다.9) 순국 36주기 추도식은 지방에서도 거행되었다. 독립촉성국민회이리
지부 주최로 이리시립유치원광장, 독립촉성국민협회전주지부 주최로 동
풍남초등학교에서 각각 안중근 추도식이 거행되었다.10)
이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거행된 안중근 기념식은 다음과
같았다. 1947년 3월 26일 안중근선생기념사업회 주최로 기독교청년회관
에서 순국 37주기 추념식,11) 1948년 3월 26일 안중근선생기념사업회 주최
로 명동 시공관에서 순국 38주기 추념식,12) 1949년 3월 26일 안중근기념
사업회 주최로 시공관에서 순국 39주기13) 추도식,14) 1950년 3월 26일 상
공회의소강당에서 순국 40주기 추도식15)이 있었다. 그런데 안중근 추모
8) ꡔ동아일보ꡕ 1946년 3월 29일 「안중근선생 추도회집행 휴간중의 기사보고: 동지의 애
끊는 추념 26일」.
9) ꡔ동아일보ꡕ 1946년 5월 12일 「고안중근의사 기념사업협회 결성」.
10) ꡔ동아일보ꡕ 1946년 4월 2일 「안중근의사 추도(이리)」 ; ꡔ동아일보ꡕ 1946년 4월 4일 「안중근의사 추도식(전주)」.
11) ꡔ동아일보ꡕ 1947년 3월 27일 「안중근의사 37주기 추념식 昨日 기청회관서 집행」.
12) ꡔ동아일보ꡕ 1948년 3월 27일 「안중근의사 추념식 거행 독립은 가까왔소이다 영령이
여 瞑目하소서」.
13) 1949년 3월, 백범은 ‘안중근의사 순국 39주년 기념’으로 ‘총욕불경’ 이란 시를 썼다.
“영예와 치욕에 놀라지 아니하고, 한가로이 뜰 앞에 피고 지는 꽃을 본다. 가고 머묾
에 뜻을 두지 않고, 부질없이 하늘가에 걷히고 펼쳐지는 구름을 따른다. 맑은 하늘
과 밝은 달을 어느 곳엔들 날아가지 못하리오. 그런데 나는 나방이는 오로지 밤 촛
불에 뛰어드는구나. 맑은 샘과 푸른 풀은 어느 것인들 먹고 마시고 싶지 않으리오.
그런데 올빼미는 오직 썩은 쥐를 즐겨 먹는다. 아, 슬프다! 세상에 나방이와 올빼미
같지 않은 자 몇이나 되는가(ꡔ서울신문ꡕ 1999년 6월 29일 「김삼웅 칼럼: 정도(正道)
냐 사도(邪道)냐」).”
14) ꡔ동아일보ꡕ 1949년 3월 27일 「안중근의사 추도식, 순국하신 지 4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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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는 그가 순국한 날에 집중되었고, 의거일에는 1946년 10월 26일 안중
근의사기념사업회 주최로 기독청년회관에서 의거 37주기 기념식과 강연
회가 있었을 뿐이다.16) 기념식이 의거일이 아니라 순국일에 집중되었다
는 것은 아직 안중근의거에 대한 인식이 충분하지 않았던 때문이 아니었
을까 여겨진다. 또한 의거보다는 순국이 더한 의미로 여겨진 것은 안중
근의 죽음이 의거 때문에 일어났으므로 순국일에는 의거도 함께 기억할
수 있었던 때문이라 여겨진다.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1955년 6월 일부 인사의 발의로 서울 장충단공원
에서 안중근 동상 건립이 결정되었다. 1945년 12월 11일 “장충단재건과
의사안중근동상건립기성회”가 조직되었었지만, 해방 공간의 혼란과 한국
전쟁 발발로 동상 건립은 추진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휴전이
성립되고 다시 안중근 동상 건립을 결정하였는데 이번에는 기금 관계로
공사를 중지하게 되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에서 1956년 6월 2일 고문·
이사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동상건립공사를 추진하기로 하였다.17) 그러
나 건립 장소 미확보로 공사가 지연되었는데 관계당국의 양해로 서울역
광장에 건립하기로 결정하여 의거일인 10월 26일 제막식을 목표로 1957
년 8월 7일 서울역광장에서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동상은 1957년 4월부
터 조각가 김경승에 의해 제작 중이었다.18) 그러나 그 후에도 공사는 원
활하게 진행되지 못하였고, 2년 후인 1959년 5월 23일에야 서울역광장이
아닌 남산 기슭 倭城臺 옛터에서 안중근 동상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대
통령 치사는 외무장관이 대독하였고, 입법부 추념사는 한희석 국회부의
장, 사법부 추념사는 김세완 대법관이 하였다. 이어 3·1만세운동 33인
중 생존자로 이갑성·박현숙(자유당)·조병옥(민주당)·왕동원 대사(주한
외국사절단장)의 순으로 추념사가 이어졌다. 동상 건립은 전국 학생·군
15) ꡔ동아일보ꡕ 1950년 3월 28일 「안중근의사 추도식 엄수」.
16) ꡔ동아일보ꡕ 1946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 의거추모식, 대의는 영생한다」.
17) ꡔ동아일보ꡕ 1956년 6월 6일 「안중근의사 동상건립 공사추진」.
18) ꡔ동아일보ꡕ 1957년 8월 5일 「안중근의사의 동상 서울역광장에 건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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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무원·은행원·기타 유지들이 바친 성금 2,300여 만환으로 완성되
었다. 동상은 안의사가 오른손에 태극기를 잡고 북쪽하늘을 응시하고 있
는 모습이었다.19)
안중근 동상은 해방 후 마련된 안중근 첫 기념시설이었다. 기념시설은
과거의 사건이나 그 의미를 되살리려는 집합적 노력의 결과로, 구체적인
가시성을 통해 직접적인 경험이 불가능한 과거사를 현재 속에 재현해주
고 지식인의 해석체계를 대중의 평범하고도 일상적인 기억 속에 접목시
켜주는 문화적인 매개물이 된다.20) 안중근 동상은 안중근 개인에 대한
기억은 물론 그의 의거, 그리고 국망과 피식민통치의 아픔을 기억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상징물이었다.
한편 1955년 10월 27일에는 전남 장흥군 장동면 萬壽祠21)에서 안중근
의사 위패 봉안식이 거행되었다. 만수사는 고려시대 유교를 일으켜 세우
는데 공이 컸던 安珦을 주벽으로 안씨일문이 선조들의 학덕을 기리기 위
하여 1946년에 건립을 시작, 1951년에 완공한 사우였는데 여기에 안중근
의사를 배향한 것이다.22) 그런데 봉안식에 문교부장관을 대신해 고등교
육국장이 참석하였다는 것은23) 문중사우에 모신 것이지만, 국가적인 의
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미 부여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사당은 배향된 이가 매년 사망한 일시를 기억하여 제사가 모셔지고 반복
되는 의례 행위를 통해 사건이 끊임없이 재해석될 소지를 지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징화의 기능이 강하다.24) 만수사에서는 이후 정례적으로
19) ꡔ동아일보ꡕ 1959년 5월 24일 「애국정신을 추모, 안중근의사동상 제막식」.
20) Grills John R. ed, Commemorations: The Politics of National Identit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p.6 : 박명규(2001), 「역사적 사건의 상징화와 집합적 정체성: 기념비, 조
형물의 문화적 기능을 중심으로」, ꡔ한국사회과학ꡕ 23-2,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
원, 2001-보고서, 2쪽.
21) 1984년 2월 29일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되었다.
22) 이해준, 「장흥지방의 유교유적」, ꡔ장흥군의 문화유적ꡕ, 국립목포대학교박물관·전
라남도·장흥군, 1989, 330쪽.
23) ꡔ동아일보ꡕ 1955년 10월 27일 「안중근의사위패 봉안식」.
24) 박명규, 「역사적 사건의 상징화와 집합적 정체성: 기념비, 조형물의 문화적 기능을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29
안중근 기념행사를 하였지만, 그것은 안씨문중의 일로 그쳤다. 1959년 4
월에는 고 안중근의사 慕義契 평의원회의가 광주시내에 안의사 義蹟碑
건립을 결정하였다.25) 그러나 이 계획도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순국 50주년이었던 1960년 3월 26일 순국선열기념사업전국위원회와 안
중근의사기념건립회는 안중근의사 동상 아래서 간단한 추념식을 거행하
였고, 3월 28일 50주기 추념식을 시공관에서 거행하였다.26) 의거 52주년
추념식은 안중근의사선양회에서 간소하게 거행하였다.27) 그러나 순국 52
주기 추념식은 ‘국민회당’에서 5·16군사쿠데타 주역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안중근의사선양회 회장 이강의 헌화로 시작
된 추념식은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문사위원장 대독), 내각 수반(박 법제
처장 대독),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의 추념사 순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가
독립된 것은 오로지 의사의 구국정신과 민족정기의 체모를 죽음으로 지
킨 결과이며 의사의 불요불굴의 기개와 만고불역의 구국지성은 민족의
귀감이라”고 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추념사는28) 안중근에 대한 국민
적인 관심을 제고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안중근에 대한 5·16군사쿠데타
주역들의 관심과 평가에 이어 ꡔ동아일보ꡕ는 다음날부터 5월 2일까지 31
회에 걸쳐 “처음으로 공개되는 공판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안중근 재판 기
록을 소개하였다.29)
추념식과 동상 건립 외에 안중근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이루
어졌다. 유묵·30)공판기가 발견·소개되고,31) 희곡으로 김춘광의 ꡔ안중
중심으로」, 5쪽.
25) ꡔ동아일보ꡕ 1959년 10월 8일 「안의사 순국 49주, 13일에 추도식」.
26) ꡔ동아일보ꡕ 1960년 3월 27일 「안중근의사 순국 50주년」.
27) ꡔ동아일보ꡕ 1961년 10월 26일 「안중근의사 오늘 의거 52주년 간소한 추도식」.
28) ꡔ동아일보ꡕ 1962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 가신 지 52년 국민회당서 추념식 엄수:안
의사 유훈 받들자 박정희 의장 추념사」.
29) ꡔ동아일보ꡕ는 1956년 4월 6일부터 41회에 걸쳐 황의돈의 「위국항일의사렬전: 안중근」
을 게재한 적이 있었다.
30) ꡔ자료 대한민국사ꡕ 제1권, 1946.1.1.
31) ꡔ동아일보ꡕ 1946년 1월 28일 「안중근의사 공판기 등 독립사상서적 도서관에서 삼천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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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사기ꡕ(청춘극장, 1946)와 서재수의 ꡔ안중근사기ꡕ(삼중당, 1946), 단행본
으로 박성강 편의 ꡔ안중근선생 공판기ꡕ(경향잡지사, 1946)·김진복 편의
ꡔ(왜놈이토오죽인)안중근실기ꡕ(중앙출판사, 1946)·김용필의 ꡔ안중근의
사ꡕ(동아일보, 1947)·김춘광의 ꡔ안중근사기ꡕ(삼중당, 1947)·이전의 ꡔ안중
근혈투기ꡕ(연천중학교기성회, 1949) 등이 간행되었다. 또한 “안중근 사
기”(게몽영화사, 1946)가 안중근을 다룬 첫 번째 영화로 만들어지고, “고
종황제와 의사 안중근”(태백영화사, 1959)이 두 번째 영화로 만들어졌다.32)
한편 천주교계에서도 천주교신자 안중근에 관심을 기울였다. 1946년 4
월에 조선천주교회의 대표적 잡지사였던 경향잡지사에서 ꡔ安重根先生公
判記ꡕ를 간행하였다. 안중근의거를 부정적으로 평가해 왔던 조선천주교
회의 공식 입장을 뒤늦게나마 거부한 것이었다. 이어 1947년 3월 26일에
는 안중근 가문의 요청으로 서울교구장 노기남 주교가 안중근 사망 37주
년 연미사를 거행하였다.33) 그리고 1957년 3월 26일에는 안중근 사망 47
주기 추도식에 노기남 주교가 참석하여 사도예절을 행하고 명동대성당
강당에서 추도식을 하였다.34) 공식적인 교회행사로서는 아니었지만, 현
직 서울교구장이 한국천주교회의 대표 성당인 명동대성당에서 안중근을
추모한 행사들은, 안중근의거를 단죄한 서구인 성직자가 통치권을 장악
하고 있던 동안에는 할 수 없었던, 긍정적인 태도와 입장으로의 전환이
었다.35)
중국에서도 안중근에 관심을 표명하였다. 일제가 패망한 직후 解放區
에서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애국주의사상을 수립하는 방법의 하나
해방」.
32) ꡔ동아일보ꡕ 1959년 2월 25일 「획기적인 대규모의 영화 수십 명의 외국인도 출연 화
제의 ‘고종황제와 의사안중근’」.
33) ꡔ노기남 대주교 연보ꡕ 1947년 3월 26일. 1949년부터는 같은 날 대통령 생일 축하식
에 갔다.
34) ꡔ노기남 대주교 연보ꡕ 1957년 3월 26일.
35) 윤선자, 「안중근의거에 대한 천주교회의 인식」, ꡔ한국근현대사연구ꡕ 33, 한국근현대
사학회, 2005, 70쪽.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31
로 ‘안중근’ 극을 공연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직후에는 안중근의
사적을 소학교 교과서에 수록하여 후대 교육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을 애국지사 내지 동아의 영웅으로 추대할 뿐, 그의 구체적인 행
적과 사상에 대하여는 깊은 관심을 가지지 못하였다.36)
해방 이후 1960년대 초까지 안중근 기념사업은 동상 건립과 순국일·
의거일에 거행된 추념식이었다. 추도란 “죽은 이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으로 ‘추념’도 비슷한 의미이다. 추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훈을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추도의 진정한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추도
란 정확한 사실에 토대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중근에
대한 자료 발굴과 그에 기초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 기간에는
몇 편의 희곡과 단행본이 출간되었을 뿐이다. 천주교회 측에서도 소극적
인 관심을 표명하였을 뿐이었다.
3. 기념관 건립과 기념사업 기반 마련
1963년 12월 14일 안중근의사숭모회(이하 ‘숭모회’로 약칭)가 문화공보
부로부터 사단법인 설립을 승인받았다. 2009년 9월 30일 현재 국가보훈
처에 등록되어 있는 독립운동가 기념사업회는 48개이다. 이 가운데 가장
먼저 설립된 것이 “일성이준열사기념사업회(www.leejun.org)”로 설립일은
1955년 2월 25일이다. 그런데 이 사업회의 홈페이지에 의하면 동 사업회
가 애국선열 기념사업의 최초 활동이라고 한다. 신문 자료에 의하면 이
준열사추모준비회 발기인회가 결성된 것은 1946년 5월이었다.37) 숭모회
는 이준열사기념사업회에 이어 두 번째로 승인받은 독립운동가 기념사
업회이다. 숭모회가 이전의 안중근의사선양회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지
36) 김춘선, 「안중근의거에 대한 중국의 인식」, ꡔ안중근 연구의 기초ꡕ, 경인문화사, 2009,
401쪽.
37) ꡔ동아일보ꡕ 1946년 5월 7일 「만국회의에서 독립절규 해아밀사 이준열사 추념을 준비」.
13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2007년에 수정된 안중근의사기념관 홈페이지(http://www.patriot.or.kr)38)
에 의하면, 숭모회의 주요 사업은 ① 3대 기념식(3·26 순국, 9·2 탄신,
10·26 의거) 거행, ② 안의사 해외독립투쟁지 대학생 탐방, ③ 청소년·
학생 글짓기대회·웅변대회, ④ 음악회·창극, ⑤ 나라사랑 프로그램 안
중근, ⑥ 안중근 마라톤, ⑦ 국·내외 안의사 관련 자료의 발굴 수집, ⑧
안의사의 사상연구 및 학술 심포지엄 개최, ⑨ 안의사 관련 각종 서지 및
홍보 책자 발행, ⑩ 각종 숭모활동 및 선양사업 추진 등이다. 그런데 이
러한 사업들은 숭모회가 설립된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고, 시간이
흐르면서 추가·수정되었는데 무엇이 언제부터 추가·수정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사업들이 결국은 안중근을 기념하기 위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5·16군사쿠데타 주역들의 안중근에 대한 관심은 숭모회의 사단법인
설립에 이어 1967년 4월 26일 안중근 동상의 현충시설 지정,39) 1970년 10
월 26일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준공·개관으로 이어졌다. 서울시 중구 남
대문로 5가 471번지(남산공원 내)에 石造瓦葺 1동(594.28㎡, 180평)으로
마련된 안중근의사기념관은 국민들의 성금과 박정희 대통령의 지원에
의해서였다. 기념관이란 ‘어떤 뜻 깊은 사적이나 인물 그리고 사건 등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집’을 지칭한다. 기념관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혹은
역사관 등과 기능 및 역할이 중복되는 측면이 있으나, 특정한 역사적 인
물이나 사건 등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를 갖는다.40)
기념관 건립에 이어 1972년 8월 16일 안중근의사의 유묵 25점과 尹奉
吉義士遺品 68점이 보물로 지정된 것은41) 안중근과 윤봉길에 대한 국가
적인 관심의 표현이었다. 윤봉길의사유품 68점은 보물 제568-1호부터 제
38) 1997년 10월 26일 개설되었다(ꡔ국민일보ꡕ 1997년 11월 1일 「안중근의사 사이버기념
관 개설, 숭모회·웹스코리아 제작」).
39) 국가보훈처 홈페이지(http://narasarang.mpva.go.kr) “현충시설” 참조.
40) 정호기, ꡔ한국의 역사기념시설ꡕ, 서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205~206쪽.
41) ꡔ경향신문ꡕ 1972년 8월 10일 「안중근, 윤봉길 의사 유물 보물로 지정」.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33
568-2호, 안중근유묵 20점은 보물 제569-1호부터 제569-20호로 지정되었
다.42) 그런데 당시까지 지정된 보물 중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제작
된, 그리고 독립운동과 관련된 유물의 보물 지정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보물은 유형문화재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국보 다음으로 높은 문화재
를 가리킨다. 보물 지정은 일제강점기에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
념물 보존령’(1933년 8월 9일)43)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며 해방 후 제헌헌
법 제100조에서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 보존령의 효력을 계
속 유지시켰다. 1955년 일제강점기에 보물로 지정된 419건(남한 367, 북
한 52)이 일괄 국보로 승격·지정되었다. 그 후 1962년 1월 10일 문화재보
호법이 제정·공포되고 이 법에 따라 국보와 보물로 분류·지정되어
1963년에 386건이 보물로 다시 지정되었다. 윤봉길의사유품과 안중근유
묵이 보물로 지정된 이후 독립운동 관련 유물의 보물 지정은 1997년에야
이어졌다. 1997년 6월 12일 ꡔ백범일지ꡕ가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되었고,
2006년 12월 29일 황현초상 및 사진이 보물 제1494호, 2007년 2월 27일 최
익현초상이 보물 제1510호, 2009년 9월 2일 대한제국 고종 ‘皇帝御璽’가
보물 제1618호로 지정되었다. 황제어새를 제외하면 모두가 독립운동과
관련된 것들이다. 여전히 전근대 생산 유물들이 주로 보물 지정의 대상
이 되는 경향이었지만, 근대 특히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보물이 지정된
것은 유물 자체의 가시적인 가치보다는 그 유물과 관련된 정신적인 측면
에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42) 보물 제569-1호(百忍堂中有泰和) ; 제569-2호(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 제569-3호(年年
歲歲花相似 歲歲年年人不同) ; 제569-4호(恥惡衣惡食者不足與議) ; 제569-5호(東洋大
勢思沓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 제569-6호(見利思義見
危授命) ; 제569-7호(庸工難用連抱奇材) ; 제569-8호(人無遠慮難成大業) ; 제569-9호
(五老峯爲筆 三湘作硯池 靑天一丈紙 寫我腹中詩) ; 제569-10호(歲寒然後知松栢之不
彫) ; 제569-11호(思君千里 望眼欲穿 以表寸誠 幸勿負情) ; 제569-12호(丈夫雖死心如
鐵 義士臨危氣似雲) ; 제569-13호(博學於文約之以禮) ; 제569-14호(第一江山) ; 제
569-15호(靑草塘) ; 제569-16호(孤莫孤於自恃) ; 제569-17호(仁智堂) ; 제569-18호(忍耐)
; 제569-19호(極樂) ; 제569-20호(雲齋). 이상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 참조.
43) ꡔ조선총독부관보ꡕ 1933년 8월 9일.
13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1973년 3월 5일 전남 장성군 삼서면 학성리 육군보병학교 내에 안중근
의사 동상이 건립되었다. 군에 안중근의사 동상이 건립되었다는 것은 안
중근이 한국군의 표상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라는 평가였다. 한편 안중근
의사기념관에는 1973년 9월 2일 최성모(숭모회 전 부이사장)가 건립·헌
납한 안중근의사 어록비를 시작으로, 1975년 10월 26일 김용원(경제인연
합회 전 회장), 1982년 9월 2일 정주영(현대그룹 전 회장)이 어록비를 건
립 기증하였다. 이어 안중근 순국 77주년이었던 1987년 3월 26일 “국가안
위 노심초사”, “지사인인 살신성인”, “동양대세 사묘현……”, “이토히로부
미 15개 죄상”, “최후의 유언” 비 등이 헌납되었다. 비는 한국사회에서 가
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기념물의 양식이다. 어떤 인물이나 사건의 의미를
기록된 문자로 돌에 기록해 두는 것은 영구히 그 의미를 보존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비는 그 규모가 작고 기념물로서
의 가시성이 현저하지 못해서 상징화의 기능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44)
국가적인 관심과 후원은 안중근 관련 자료들의 발굴로 이어졌다. 안중
근 관계 자료의 발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그의 자서전인 ꡔ安應
七歷史ꡕ와 그의 저서인 ꡔ동양평화론ꡕ의 존재가 확인된 사실이었다. 즉,
1969년 4월 일본 東京 神田 고서점에서 ꡔ安重根自敍傳ꡕ이란 표제로 된
일본어 번역본이 최서면에 의해 발견되었다.45) 그리고 1978년에는 나가
사키(長埼)의 渡邊庄四郞이 ꡔ안응칠역사ꡕ 한문 원본을 한국대사관에 기
증함으로써 그 자료가 본격적으로 발굴될 수 있었다.46) 한편, 1979년 9월
市川正明(한국명: 김정명)이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연구실 ‘七條淸美 文書’
중에서 ꡔ안응칠역사ꡕ와 ꡔ동양평화론ꡕ의 등사본 합책을 발굴하였다.47)
44) 박명규, 「역사적 사건의 상징화와 집합적 정체성: 기념비, 조형물의 문화적 기능을
중심으로」, 5쪽.
45) 崔書勉, 「安應七自傳」, ꡔ外交時報ꡕ 1970년 5월호, 東京: 外交時報社, 777쪽 ; 윤병석, 「해제 안중근전기전집」, ꡔ안중근전기전집ꡕ, 국가보훈처, 1999, 37쪽.
46) 최서면, 「안중근 자전고(自傳考)」, ꡔ나라사랑ꡕ 34, 외솔회, 1979.12, 56~57쪽.
47) ꡔ동아일보ꡕ 1979년 9월 1일 ; 윤병석, 「해제 안중근전기전집」, ꡔ안중근전기전집ꡕ, 국
가보훈처, 1999, 37쪽.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35
이러한 노력들을 통하여 안중근의 친필 고본은 아니었지만 그의 유고가
원문대로 빛을 보게 되었다. “안중근 공판 관련 기록”은 중 관동도독부 지
방법원 본 등사본은 1976년 ꡔ한국독립운동사자료 6: 안중근 편1ꡕ(국사편찬
위원회), 주한일본공사관기록+일본외교문서+대한매일신보는 1978년 ꡔ
한국독립운동사자료 7: 안중근 편2ꡕ(국사편찬위원회)로 공개되었다.48)
이와 같은 안중근 자신이 남긴 자전적 기록이나 당시의 재판 기록들은
안중근을 연구하는 데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일차사료들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안중근에 대한 많은 단행본들이 국내와 일본에서 간행
되었다.49)
이외에도 안중근의거에 대한 ꡔ경성일보ꡕ 호외,50) 안중근의 미공개 사
진,51) 안중근의 절필,52) 안중근의 편지,53) 안중근의 사진,54) 안중근의 이
토 저격 현장 필름,55) 안중근의 여순옥중 마지막 자작 시 11편56) 등이 국
내와 일본 등지에서 발견·소개되었다. 또한 1974년 10월 26일 서울 중구
을지로 국도극장에서는 안중근의거 64주년을 기념, 연방영화사에서 제작
한 70㎜컬러영화 ‘의사 안중근’의 시사회가 열렸다.57) 이 영화는 “안중근
48) 한상권, 김현영, 「안중근 공판 기록 관련 자료에 대하여」, ꡔ안중근 연구의 기초ꡕ, 경
인문화사, 2009.
49) 안학식, ꡔ의사안중근 전기ꡕ, 해동문화사, 1963 ; 유경환 저, ꡔ안중근ꡕ, 태극출판사,
1972 ; 이선근 등, ꡔ한말격동기의 주역 8인: 김옥균, 안중근, 이완용 외ꡕ, 신구문화사,
1975 ; 최홍규, ꡔ안중근사건공판기ꡕ, 정음사, 1975 ; 이은상 역, ꡔ안중근의사 자서전ꡕ,
안중근의사숭모회, 1979 ; 市川正明, ꡔ安重根と日韓關係史ꡕ, 東京: 原書房, 1979 ; 경
인문화사, 1986 ; 유희용 편, ꡔ(의사)안중근ꡕ, 서남출판사, 1979 ; 유경환, ꡔ안중근ꡕ, 중
앙서관, 1983 ; 中野泰雄, ꡔ安重根: 日韓関係の原像ꡕ, 東京: 亜紀書房, 1984 ; 中野泰
雄, ꡔ일본의 지성이 본 안중근ꡕ, 경운출판사, 1984 ; 안중근의사숭모회 편, ꡔ민족의
얼: 안중근의사 사진첩ꡕ, 안중근의사숭모회, 1987 ; 최이권 편역, ꡔ(애국충정)안중근의
사ꡕ, 법경출판사, 1990.
50) ꡔ경향신문ꡕ 1973년 5월 17일 「안중근의사 의거 속보 경성일보 호외 발견」.
51) ꡔ경향신문ꡕ 1975년 10월 30일 「안중근의사 등 애국지사 15명 미공개사진 첫 공개」.
52) ꡔ경향신문ꡕ 1978년 2월 6일 「안중근의사 절필 일서 발견」.
53) ꡔ경향신문ꡕ 1978년 2월 18일 「안중근의사 사진 10장, 편지 1통 또 발견」.
54) ꡔ경향신문ꡕ 1978년 4월 8일 「안중근의사 사진 9점 경주서 발견」.
55) ꡔ경향신문ꡕ 1979년 1월 10일 「안중근의사 이토오 저격 극적현장필름 동경서 발견」.
56) ꡔ경향신문ꡕ 1985년 12월 10일 「안중근의사의 여순 옥중기 마지막 자작 한시 11편 발견」.
13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사기”(1946), “고종 황제와 의사 안중근”(1959)에 이어 안중근에 관한 세
번째 영화였다.
안중근의거에 대한 국가적인 평가와 국민들의 관심은 천주교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1979년 9월 2일 명동대성당에서 노기남 대주교 주례로 안
중근 탄생 100주년 기념미사가 거행되었다.58) 기념미사 후 안중근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죄했던 평가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는 의견과 연구가 제시
되었다. 불과 몇 십 명만이 참석하였고, 현직 교구장이 아닌 전임59) 서울
교구장에 의해 거행되었다는 한계는 있었지만, 안중근의거를 살인행의로
단죄하였던 한국천주교회가 그 의거의 가치를 수용하여 행동으로 옮긴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이후 1980년 3월 26일 안중근의사 서거 70주기 추
모미사, 1986년 9월 26일 안중근의사 서거 76주기 추도미사, 1987년 9월
26일 순국 추도미사, 1990년 3월 26일 서거 80주년 추모미사, 1990년 9월
26일 순국 추도미사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거행되었다. 그
런데 당시 일부에서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공인 여부를 거론할 정도로
주최 측을 폄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한국천주교회의 공식 행사로 간주
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안중근을 천주교 신앙인의 측면에서 추적한 논문들도 발표되었다.
1984년 발간된 ꡔ황해도천주교회사ꡕ에 안중근의거가 군인으로서 전쟁 중
전개한 정당방위라고 언급되었다. 1986년에는 안중근의거가 신앙심과 애
국심이 조화를 이루어 발현한 정당한 행위였다는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자료적인 측면에서도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아쉬움이 많았다.60)
1990년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ꡔ안중근(도마)의사 추모자료집-서거 80주
년을 맞이하여ꡕ를 발간하였다. 이후 이 자료집은 천주교회 측에서 안중
근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기초 자료로 활용되었다.
57) ꡔ세계일보ꡕ 1993년 1월 15일 「‘안중근의사’ 시나리오 3편 집필」.
58) ꡔ경향잡지ꡕ 1979년 10월 「교회의 이모저모」, 86쪽.
59) 1967년 서울교구장직을 사임하였다.
60) 윤선자, 「안중근의거에 대한 천주교회의 인식」, 61~62쪽.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37
한국천주교회의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었지만 안중근의 순국과 의거를
기념하는 천주교회 측의 행사들과 연구업적들은 ꡔ가톨릭신문ꡕ에 신앙인
안중근으로 언급되었다.61) 또한 가톨릭 연극의 주제가 되었다. 1991년 4
월 가톨릭문화운동연합연극분과 극단 산맥은 ‘안중근 그리고 도마’를 제3
회 정기공연 작품으로 올렸다.
1966~1976년의 문화대혁명이 종료되고 한·중간의 민간 문화교류가 이
루어지면서 중국에서 안중근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고조되었다. 그 결과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안중근 관련 신문기사를 비롯하여 각종 회억록·
저서·논문들이 연이어 발표되었다. 1980년 11월 13일 안중근의 의거지
인 하얼빈에서 발간되는 ꡔ흑룡강일보ꡕ는 홍룡의 ‘하얼빈에서의 안중근’
이란 글을 실었다. 이를 시작으로 ꡔ길림신문ꡕ·ꡔ연변일보ꡕ·ꡔ요녕일보ꡕ
등 중국 동북지역의 신문들에서 안중근 관련 기사를 수록하였다.62) 안중
근의 생애와 항일활동을 소개하면서 안중근은 항일투쟁의 선구자라고
평가하였다. 중국 내 한글 잡지들도 안중근의거, 안중근 동료들에 대한
글들을 실었다.63) 1986년에는 동북삼성 조선족학교에서 사용하는 ꡔ조선
어문ꡕ 교과서 제9책(5학년용)에 “열혈투사 안중근”이라는 내용이 수록되
61) ꡔ가톨릭신문ꡕ 1968년 10월 6일 「안중근의사의 순교설」 ; 1980년 3월 16일 「민족의 횃
불 안중근의사」 ; 1982년 8월 29일 「‘암살자 安重根’ 妄言 신앙인에 대한 모독」 ; 1986
년 3월 23일 「참 신앙인으로 다시 부각되는 안중근의사」 ; 1986년 4월 13일 「안중근
의사 재평가돼야 한다」 ; 1986년 7월 27일 「독립기념관 ‘안중근 전시실’에 가톨릭관
계 자료 전무」.
62) ꡔ흑룡강일보ꡕ 1980년 11월 3일 「하얼빈에서의 안중근/홍룡」 ; 서명훈, 「80년 전 하얼
빈의 조선사람들」, ꡔ흑룡강일보ꡕ 1989년 4월 10일 ; 김우종·원인산, 「청사에 길이
빛날 그 이름 안중근」, ꡔ흑룡강일보ꡕ 1990년 5월 14일 ; 류동선 구술, 김파 정리, 「후
손만대에 잊지 못할 민족의 얼-애국지사 안중근과 오빠 류동하를 회억하며」, ꡔ길
림신문ꡕ 1985년 6월 18일, 6월 13일, 6월 15일 ; 최홍빈, 「항일독립투쟁 의사-안중근
-」, ꡔ연변일보ꡕ 1989년 12월 15일 ; 김춘선, 「안중근의거에 대한 중국의 인식」, ꡔ안
중근 연구의 기초ꡕ, 경인문화사, 2009, 402쪽의 각주 70에서 재인용.
63) 송정환, 「하얼빈역두의 총소리」, ꡔ장백산ꡕ, 1983 ; 고송무, 「안중근의 의거 도운 유동
하의사, 그 가족의 일대기」, ꡔ장백산ꡕ, 1988 ; 김운룡, 「안중근의 옥중실기」, ꡔ장백산ꡕ,
1988 ; 김충실, 「개를 쏴죽인 안중근」, ꡔ소년아동ꡕ, 1989.3 ; 류동선 구술, 김파 정리, 「안중근과 그의 동료들」, ꡔ송화강ꡕ, 1985.3 ; 송정환·황현걸, 「안중근전」, ꡔ장춘문예ꡕ,
1991 ; 김춘선, 「안중근의거에 대한 중국의 인식」, 402쪽의 각주 71에서 재인용.
13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었다. 또한 중국의 흑룡강성당사연구실, 길림성사회과학원, 연변대학, 북
경대학 등의 연구기관과 학교들에서 안중근의 항일운동과 동양평화사상
에 대한 학술연구가 이루어지면서 많은 연구성과가 발표되었다.64) 1989
년 10월에는 길림성사회과학원 주최로 장춘에서 안중근의사 의거 80주년
기념 국제학술토론회가 열렸다. 이는 개혁개방 후 중국에서 안중근을 주
제로 개최된 첫 학술회의였다.
안중근의거지인 하얼빈과 대련을 중심으로 안중근 기념행사가 전개되
었다. 1983년 하얼빈 거주 4만여 명 교포들이 안중근의사의 흉상을 하얼
빈역에 세우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중국정부가 일본을 의식, “역
구내에 안중근의사의 흉상을 세우는 것은 국제적인 외교문제를 야기할
우려가 있다”며 난색을 표명하였다. 교포들은 하얼빈 시내중심부의 민족
문화궁 뒤편 5층 부속건물을 제2의 흉상 건립장소로 선정하였는데 이 역
시 중국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해 흉상 건립은 중단되었다. 그리하여 ‘국
가안위노심초사’의 조국애를 새긴 안중근의사의 흉상은 하얼빈의 한 허
름한 다락방에서 먼지에 덮인 채 방치되었다.65) 1987년부터 하얼빈시의
조선족 이퇴직간부문화활동중심과 조선족부녀연의회가 매년 3월 26일과
10월 26일을 안중근기념활동일로 규정하고 다양한 기념활동을 진행하였
다. 1990년에는 흑룡강혁명박물관에 안중근사적전시관을 설치하였다. 하
얼빈시인민정부는 안중근을 ‘하얼빈의 역사인물’로 그리고 ‘하얼빈시에서
선정한 세계 40대 위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하였다.66) 그러나 일본과
의 외교관계를 인식한 중국은 공개된 장소에 안중근 동상을 건립하는 것
은 허용하지 않았다.
64) 저서로 대표적인 것은 양소전·안청전의 ꡔ조선애국지사안중근ꡕ(상무인서관, 1983),
송정환의 ꡔ안중근ꡕ(요녕민족출판사, 1985), 김우종·최서면의 ꡔ안중근ꡕ(요녕민족출
판사, 1994), 김우종·리동원의 ꡔ안중근의사ꡕ(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8), 아 성의 ꡔ안중근격창이등박문ꡕ(신세계출판사, 2002) 등이다(김춘선, 「안중근의거에 대한 중
국의 인식」, 402쪽의 각주 72).
65) ꡔ경향신문ꡕ 1990년 10월 20일 「안중근의사 흉상, 하얼빈 다락방서 7년째 ‘낮잠’」.
66) 김춘선, 「안중근의거에 대한 중국의 인식」, 401쪽.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39
일본에서도 매우 특수한 경우이지만 안중근을 기념하는 일이 진행되
었다. 1981년 미야기현 구리하라군의 대림사에 안중근의사를 현창하는
2.5m 높이의 비가 세워졌다.67) 여순감옥에서 안중근을 감시했던 구일본
군 헌병 지바 도시치는 안중근이 처형되기 직전에 써준 글을 보관하였고,
그의 유족이 1979년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하였다. 이에 한·일 유지
들의 성금으로 지바가 묻힌 대림사 경내에 비를 설립하였다.68) 1990년 6
월에는 안중근의사를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소개한 글이 처음으로 일본
정부관계 출판물에 실렸다. 일본외무성이 편집에 협력하는 ꡔ외교포럼ꡕ
(재단법인 세계의 움직임사 발행·일본외무성 편집협력) 6월호에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을 계기로 한 한국특집 가운데 재일한국계 학자 市川正明
청삼대교수가 쓴 안중근의사의 행적과 사상을 소개하는 「독립과 동양평
화를 찾아」라는 글을 게재한 것이다. 일본어 6천자 분량인 이 글은 ꡔ동양
평화론ꡕ 서설과 공판정에서의 진술 등을 소개하고 안중근의사가 이토를
사살한 것은 “남의 나라를 빼앗고 사람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인물이 존
재하고 있을 때 이를 방관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안
중근의사의 말을 인용, 설명했다.69) 당시까지 일본은 안중근을 테러리스
트로 규정하고 있었다.
숭모회가 사단법인으로 설립된 196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안
중근 기념사업은 국가적인 후원과 국민들의 관심 속에서 추진되었다. 안
중근의사기념관 설립과 안중근 유묵의 보물 지정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의 관심과 후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과 후원은 안중근 관련 자료
들의 발굴로 이어졌고, 안중근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천주교회 측에서도
안중근을 천주교 신앙인으로, 단죄하였던 안중근의거를 애국적인 행동으
로 인식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추모식과 논문들로 표명하였다. 중
67) ꡔ동아일보ꡕ 1992년 9월 7일 「안중근의사 독립혼 일본서 추모, 여순 수감 당시 일군
감시헌병과 합동법사」.
68) ꡔ국민일보ꡕ 1992년 2월 17일 「일본의 ‘반역’」.
69) ꡔ경향신문ꡕ 1990년 5월 23일 「안중근의사 한국독립운동가」. 일정부 관계 출판물서 첫
소개.
14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국에서는 안중근의거지인 하얼빈을 중심으로 동북삼성에서 안중근을 기
념하는 사업들이 추진되었다. 안중근 동상 건립과 같은, 안중근을 표면에
내세우는 사업은 할 수 없었지만 신문기사·학술회의·단행본 등을 통하
여 안중근을 기념하였다. 일본에서도 안중근 기념비가 설립되었다. 이처
럼 이 기간 안중근 기념사업은 국·내외적으로 토대를 다져나갔다.
4. 기념사업 확대와 활성화
1993년 문화부에서 안중근을 ‘이달의 문화인물’(8월)로 선정하였다. 문
화인물은 ‘한국인 재발견운동’의 일환으로 문화부가 문예진흥원과 함께
1990년 7월부터 추진하였는데 안중근은 “국가보훈”의 측면에서 선정된 첫
인물이었다.70) 기념관 건립, 안중근유묵의 보물 지정에 이어 국가적인
차원에서 안중근에 대한 관심이 다시 제기된 것이다. 문화인물 선정은
안중근 기념사업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세계일보사는 1992년 11월부터
게재한 안중근의사 기획시리즈를 1993년 7월 ꡔ대한국인 안중근ꡕ으로 간
행, 독립기념관은 ‘안중근의사의 독립운동사에서의 위치’를 주제로 안중
근의 달 기념특별강연회와 안중근의사의 의열활동 관련 사진 기획전을
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은 8월 한 달 동안 안중근의사 사진첩 외 11종 12
책 전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은 8월 20~29일 중국의 안중근의사 항일독
립유적지순례, 한국영상자료원은 8월 14·15일 고려영화사 제작 ‘자유만
세’(1946)와 연방영화사 제작 ‘의사 안중근’(1972) 영화 상영, 숭모회는 11
월 ‘안중근의 생애와 사상’을 주제의 국제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1995년 4월 14일 안중근 동상이 광주시 북구 운암동 중외공원에 건립,
70) 2005년까지 456명이 선정되었는데 그중 국가보훈의 측면에서는 1994년 박은식, 1995년
김병로·김구, 1996년 서재필, 1997년 송진우, 1999년 김창숙, 2000년 김좌진 등 8명
이다[문화체육관광부 홈페이지 중 하단 메뉴인 ‘한국의 문화인물 홈페이지
(http://person.mcstgo.kr 참조).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41
준공되었다.71) 또한 그해 광복절에는 광복절기념주화로 안중근의사의
초상을 새긴 1만 원짜리 주화가 만들어졌다.72) 그리고 1996년 10월 26일
에는 숭모회가 안중근 흉상을 건립 제막하였다.73) 1997년에는 전쟁기념
사업회 전쟁기념관이 선정하는 ‘호국인물’로 안중근이 선정되었다. 그리
하여 3월 14일 전쟁기념관에서 ‘3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안중근에 대한
추모식이 거행되었다.74) 국방부 유관 기관인 전쟁기념관에서 ‘호국인물’
로 안중근을 선정한 것은 안중근에 대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계속적인
관심의 표현이었다. 국가 차원의 관심은 안중근 유묵이 계속하여 보물로
지정될 수 있게 하였다. 1999년 12월 15일 안중근의 유묵 1점,75) 2000년
2월 15일 유묵 3점,76) 2003년 4월 14일 유묵 1점,77) 2007년 10월 24일 유묵
1점이78) 보물로 각각 추가 지정되었다.
2005년 8월 17일 통일부는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2009) 기념행사’를
비롯 ‘광복 60주년 기념 남북공동사업’으로 추진 중인 안중근의사 유해
발굴 등과 관련, 북한에 ‘동참 제안서’를 발송하였다. 통일부와 국가보훈
처 관계자, 민간전문가 등으로 실무단을 구성하고, 실무자회의에서 ‘고증
을 위한 남북학술세미나·전기자료집 발간·북한 해주에 기념관 건립·
여순에 추모비와 추모관 설립·중국 하얼빈역에 추모비 건립·현장검증
을 위한 조사단 구성·유해발굴시 봉안장소·생가복원·추모문화행사’
등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제의는 6월 21~24일 제15차 남북장관급
회담 결과에 따른 후속 조치로, 통일부장관과 북한내각책임참사는 공동
71) ꡔ세계일보ꡕ 1995년 4월 14일 「안중근의사 동상 건립, 광주 중외공원서 준공」.
72) ꡔ국민일보ꡕ 1995년 3월 3일 「광복·유엔 50돌 기념주화 8월 발행」.
73) ꡔ세계일보ꡕ 1996년 10월 27일 「안중근의사 의거 87주 기념식」.
74) ꡔ세계일보ꡕ 1997년 3월 15일 「안중근의사 어제 추모식」.
75) 보물 제569-24호: 天與不受反受其殃耳 / 김화자.
76) 보물 제569-21호: 欲保東洋先改政略 時過失機追悔何及 / 단국대학교 ; 보물 제569-22
호: 國家安危勞心焦思 / 안중근의사기념관 ; 보물 제569-23호: 爲國獻身軍人本分 /
안중근의사기념관.
77) 言忠信行篤敬蠻邦可行 / 안중근의사기념관.
78) 보물 제569-26호: 臨敵先進 爲將義務 / 해군사관학교박물관.
14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보도문을 통해 “안중근의사의 유해발굴사업 등을 공동 추진, 일제시기 항
일정신을 함께 살려나갈 것”이라고 발표하였다.79) 2005년 9월 15일 남과
북은 ‘안중근의사 유해 공동발굴단’을 만들어 안중근의 유해 수습과 봉환
사업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80) 이어 2006년 3월 20일 남북한은 안중
근의사의 유해가 묻힌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중국 현지에서 공동조사를
벌이는 데 합의하였다.81)
그러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2008년 3월 25일 한국정부가 여순(旅
順) 안중근 유해 매장 추정지 일대에 대한 발굴작업을 2개월 예정으로 시
작하였다. 중국정부가 아파트 건설 공사로 훼손 논란이 일고 있는 유해
발굴 예정지에서의 공사를 중단시키고, 남북 공동조사나 한국측의 단독
조사 및 발굴도 무방하다고 알려온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조사지역
은 북한이 안중근의 고향이 황해도 해주라는 연고를 내세워 1970년대부
터 중국과 함께 여러 차례 발굴을 시도한 지역이었다.82) 정부 수립 이후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정부 주도로 벌인 안중근 유해발굴작업은83) 2008년
5월 28일 중단되었다. 여순감옥 뒤편에 자리 잡은 유해매장 추정지를 상
대로 광범위한 발굴조사를 벌였지만 유해를 찾지 못한 때문이었다.84)
국가적인 관심은 관련 자료 발굴·발간과 학술회의를 통해 안중근 연
구를 심화시켰다. 1995년 안중근의 사형집행 광경 기록 등이 포함된 자료
집이 ꡔ아주 제1의협 안중근ꡕ 일본편(1~3권)으로 국가보훈처에서 영인 발
간하였다.85) 또한 1999년 3월 26일에는 안중근에 대한 최초의 한글 위인
전과 재판의 전과정을 실은 공판기가 영인본으로 묶여져 나왔다. 독립기
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안중근의사 의거 90주기를 맞아 ‘한국독립
79) ꡔ가톨릭신문ꡕ 2005년 8월 21일 「안중근기념사업 남북 함께 한다」.
80) ꡔ한겨레신문ꡕ 2005년 9월 16일 「남북, 안중근의사 유해 공동발굴 합의」.
81) ꡔ서울신문ꡕ 2006년 3월 21일 「남북, 안중근의사 유해위치 공동조사 합의」.
82) ꡔ세계일보ꡕ 2008년 3월 26일 「사설: 安 의사 순국 98돌, 유해 발굴 작업에 부쳐」.
83) ꡔ가톨릭신문ꡕ 2008년 4월 6일자.
84) ꡔ세계일보ꡕ 2008년 5월 29일 「안중근 유해발굴 잠정 중단」.
85) ꡔ한겨례ꡕ 1995년 8월 3일 「안중근 사료집 발간」.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43
운동사 총서’의 하나로 ꡔ안중근의사 자료집ꡕ을 발간하였는데 미국 하와
이 교포사회에서 읽혔던 ꡔ대동위인 안중근전ꡕ과 일본인 기자가 공판을
방청하고 남긴 속기록을 묶은 것이었다.86)
안중근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도 속속 개최되었다. 2001년 ‘안중근의
거 92주년 한·러 국제학술회의’, 2004년 10월 8일에는 ‘안중근의사의 위
업과 사상 재조명’(숭모회 주최)을 주제로 의거 95주년 기념 국제학술회
의,87) 2008년 10월 17~18일에는 ‘동북아 평화와 안중근의거 재조명’(안중
근·하얼빈학회와 동북아역사재단 주최)을 주제로 국제학술회의88)가 개
최되었다. 국제학술회의는 연구주제와 범위는 물론 연구자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안중근의 사상과 의거를 한국사 내지 한반도에
가두지 않고 인류평화사상·동양평화를 위한 의거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와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안중근의거 100주년인 2009년에는 안중근 기념행사가 굉장히 많다. 학
술회의에서 특별기획전, 창작오페라, 뮤지컬 공연까지 다양하다. 8월 7일,
‘안중근의거의 국제적 영향’(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주최)을 주제로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국제학술심포지엄, 8월 27일 중국 하얼빈에서 ‘중국인 눈
에 비친 안중근의사 의거’(관훈클럽 주최)를 주제로 해외 세미나가89) 개
최되었다. 이외에도 학술회의들이 준비되고 있는데 의거 100주년 학술회
의들은 안중근의 사상과 의거를 주로 국제적인 관점에서 조명하는데 초
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그런데 많지 않은 연구 인력은 100주년 학술회의
들을 추진하는데 문제를 발생하게 할 수 있다. 소수의 연구자들이 한정
된 시간에 독창적인 논문들을 작성하고 활발한 토론을 진행하는 것이 쉽
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2007년에는 ‘안중근의 청년정신을 21세기 젊은이들에게’라는 모토
86) ꡔ경향신문ꡕ 1999년 3월 19일 「안중근의사 순국 89주년 최초 한글위인전 발굴. 공개」.
87) ꡔ국민일보ꡕ 2004년 10월 9일 「하얼빈의거 러 한인 의병과 연계” 안중근의사숭모회
국제학술회의 개최」.
88) ꡔ한국일보ꡕ 2008년 10월 21일 「하얼빈의거 99주년 국제학술대회서 재조명」.
89) ꡔ서울신문ꡕ 2009년 8월 26일 「중국인 눈에 비친 안중근의거」.
14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로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http://www.danji12.com)’가 설립되었다.
2006년 10월 25일 창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6개월간 준비과정을 거쳐
50여 인의 상임 이사들로 조직을 구성,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가 2007년 5월
16일 안중근기념관에서 발족하였다.
1993년 8월 21일 ‘제100회 교회사연구발표회 겸 안중근의사기념 학술심
포지움’이 개최되었다. 안중근의 신앙과 민족운동에 대하여 추적하였는
데 안중근의거에 대한 교회의 인식과 태도에 대하여 논의가 심도있게 진
행되었다.90) 심포지움 후 거행된 안중근의사 추도미사는 현직 서울교구
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강론에서 안중근의
거가 윤리적으로 타당하였다고 말하였다.91)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의 강
론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인식한 것처럼, 전 서울교구장 뮈텔(Mutel)
주교가 단죄한 안중근의사가 1993년 현 서울교구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
에 의해 ‘복권’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92) 왜냐하면 김수
환 추기경의 강론은 비공식적인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공식적인 것
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 번의 미사에서 행해진 강론으로 끝나는 아쉬
움을 남겼다.
2000년 11월 1일, 영성·윤리 신학의 측면에서 안중근을 추적한 심포지
엄이 ‘2000년 대희년과 안중근 토마스’라는 주제 아래 한국교회사연구소
주최로 열렸다. 신학적인 측면에서 안중근의거의 정당성을 보다 자세하
게 규명하고자 하였고, 아쉬움은 남았지만 발표자도 토론자도 안중근의
거가 전쟁 중에 전개한 정당한 행동이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안중근의거를 추적한 학문적인 연구성과들이 집적되고, 실천의 측면에
서 안중근의 신앙과 애국심을 이해하고 본받으려는 많은 노력들이 계속
되었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이토 처단은 살인행위가 아니라 애국심과 신
90) 이날 발표된 4편의 논문과 각 논문의 토론문, 종합토론문은 ‘안중근 연보’와 함께
1994년 ꡔ교회사연구ꡕ 9(안중근 토마스 의사 특집호)로 발간되었다.
91) ꡔ가톨릭신문ꡕ 1993년 8월 29일자.
92) 김춘호, 「안중근의 의거(義擧)는 정당한가?-사회윤리적 관점에서-」, ꡔ신학과 철학ꡕ
2권, 서강대학교 비교사상연구원, 2000, 100~101쪽.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45
앙심을 조화시킨 영웅적인 일이었고, 따라서 그를 성인의 반열에 올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93) 그러나 신학자들과 교회신학자들의 공통
된 의견은, 안중근이 가톨릭신앙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했고, 신앙의 신
념 아래 이토를 저격하고, 죽음을 받아들였다 할지라도 열심한 신앙인이
었지 순교자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교회법과 교리, 교회의 전
통에서 제시한 ‘순교의 3가지 필수조건’ 때문이다. 안중근의거는 궁극적
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며, 안중근의 사형 자체도 신
자로서 그가 마지막까지 신앙을 고백했지만 ‘신앙’ 때문에 죽은 것도 아
니며, 박해자 즉 일본정부도 ‘신앙’ 때문에 사형선고를 내린 것이 아니라
는 것이다.94)
안중근의거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인식변화는 성당 명칭에 ‘안중근
도마’가 사용되고, 교구 차원의 행사들이 행하여지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98년 4월 27일, 군종교구는 새 성당을 ‘안중근 도마 성당’이라 명
명하였고, 1999년 5월 대전교구 전민동본당은 ‘안중근 도마 추모성당’으
로 공포되었다. 1999년 3월 25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은 안중근의사
기념관 앞에서 ‘민족과 함께 한 참신앙인 안중근 도마’를 주제로 순국 89
주기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추모미사도 봉헌하였다. 같은 해 9월 군종교
구는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제31회 국제군인사도직(AMI) 총회에 참석,
2000년대 한국의 군인신자상으로 안중근을 제시하였다. 1999년 청주교구
는 충북 청원군 청소년수련관의 운영을 지자체로부터 넘겨받아 2000년 5
월 ‘안중근학교’를 개설, 안중근의 생애와 사상을 교육하였다.95).
안중근의거를 가장 적극적으로 현양한 단체는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
제단이었다. 매년 안중근 순국 추모미사를 거행하였던 사제단은 2000년
10월 25일 조선카톨릭교협회와 함께 ‘안중근의사와 민족통일’이라는 주제
로 심포지엄을 개최하였다. 이튿날 사제단과 조선카톨릭협회는 하얼빈역
93) ꡔ한국일보ꡕ 1997년 7월 31일 「천주교, 안중근의사 시성시복 추진」.
94) ꡔ가톨릭신문ꡕ 1997년 9월 7일자.
95) 윤선자, 「안중근의거에 대한 천주교회의 인식」, 74쪽.
14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구내에서 묵념 등 기념행사를 하고 안의사 유해 남북공동발굴을 결의하
였다. 안중근은 남북한 모두에서 항일투쟁가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2001년 4월 안중근학교·안중근연구선양회와 함께 ‘안중근
평화운동’을 시작하였으며, 5월 5일 제1회 ‘안중근통일문화제’를 안중근학
교와 함께 마련하였다. 12월에는 ‘통일염원 한겨레 성찬제와 안중근 도마
의사 하얼빈의거 92주년 남북 공동 학술세미나’를 평양에서 개최하였다.
2002년 3월 25일 제1회 안중근 평화상을 제정, ‘평화를 여는 가톨릭청년’
에 시상하였고, 4월 29일~5월 1일, 조선카톨릭교협회와 함께 중국 대련·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도마 의사 순국 92주기 남북공동기념행사”를 개최
하였다.96)
신자들의 인식과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0년 8월 제천 배론
성지에서 원주교구와 나고야교구의 한·일 화해와 일치 청소년 세미나가
개최되었는데, “안중근의사의 사상에서 본 한일간 화해와 평화” 등에 관
하여 토론하였다. 2002년 3월 한국가톨릭언론인협의회 전국대회는 ‘안중
근의사의 삶과 영성’ 특강을 마련하였고, 2003년 3월 평화방송TV는 특선
영화 ‘의사 안중근’과 ‘청소년특별기획-안중근의사의 발자취를 따라서’
등 안중근 관련 3·1절 특집방송을 하였다. 이상 살펴본 것처럼, 안중근
에 대한 한국천주교회의 관심은 교구·본당·신자 차원에서 다양한 형태
로 표출되었다. 그러나 일회성의 행사들이 많고, 안중근과 안중근의 의거
를 천주교신앙의 차원에서 밀도 있게 다루지는 못하였다.97)
한편 1999년 3월 1일 안충석 신부 등이 성역화사업을 대통령에게 건의
하였다. 1만평 규모의 ‘안의사 추모공원’을 신사참배지였던 서울 남산식
물원에 조성하고, 안중근의 고향이자 신앙생활의 모태역할을 하였던 황
해도 청계동성당을 복원하고,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비무장지대
(DMZ)에 안중근의 유해를 모시는 방안도 추진한다는 것이었다.98) 3월 26
96) 위의 논문, 74~75쪽.
97) 위의 논문, 75~75쪽.
98) ꡔ평화신문ꡕ 2000년 3월 26일자.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47
일 남산의 안중근의사 동상 앞에서 안충석·신성국 신부 집전으로 미사
를 올리고 성역화사업 추진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9월 5일 ‘안중근의사성
역사업추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9월 16일 동 위원회는 서울시장에게 성
역사업을 제안 설명하였는데, 서울시는 ‘남산제모습찾기일환’의 이유로
제안을 부결하였다. 이에 동 위원회는 12월 23일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안중근의사남산성역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였다.
2000년 1월 1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안중근의사 생가복원사업 추
진을 결의하였고, 3월 16일 안의사유해발굴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유해발
굴위원회는 “중국 旅順감옥에서 처형당한 뒤 감옥 내 수인묘지에 묻힌
안의사의 유해 매장장소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발견했다. 중국 및 북
한의 양해를 얻는 대로 유해를 발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유해발굴위
원회 도쿄사무국은 도쿄의 성이냐시오성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안의사
매장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일본에서 입수한 지도 및 서류와 방증
자료 등 여러 점”이라고 말했다. 안중근의사가 묻혀 있는 수인묘지는 1만
5천여 평 규모로 일제가 패망한 뒤 중국의 애국열사를 묻는 공동묘지로
바뀌었다.99)
현행법상 국가유공자 관련단체의 경우 ‘先 설립단체 유일주의’가 적용
되고 있어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국가로부터 독립운동가단체로 인정받
을 수 없다. 그럼에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가 설립된 것은 친일인사들
이 숭모회의 이사장 및 주요 간부를 역임한 때문이었다.100)
2005년 3월 25일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사)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과
함께 ‘안중근의거에 대한 인식’을 주제로 안중근의사 의거 100주년 기념
준비 및 제1회 국제학술회의를 서울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하였다.101) 이어
2005년 10월 26일 ‘안중근의 신앙과 사상’을 주제로 제2회 국제학술회
99) ꡔ동아일보ꡕ 2000년 3월 18일 「안중근의사 유해 中서 곧 발굴키로……매장장소 확
인」 ; ꡔ경향신문ꡕ 2000년 3월 21일 「개운찮은 ‘安의사 墓地’ 발표」.
100) 주진우, 「독립 열사 욕보이는 독립운동 기념사업회」, ꡔ시사인ꡕ 48, 2008.8.12.
101) ꡔ가톨릭신문ꡕ 2005년 4월 3일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의거 100주년 기념준비 국
제학술대회」.
14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의,102) 2006년 3월 24일 ‘안중근 부자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제3회 학술대
회,103) 2007년 10월 26일 ‘안중근과 그 가족의 독립운동’을 주제로 제6회
학술대회,104) 2008년 10월 24일 ‘동아시아공동체와 안중근’을 주제로 제8
회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의거 100주년 학술대회를 추진하였다.
한편 2006년 1월 11일 ‘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
원회’가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주도로 발족하고, 각계 인사 100명이 추진
위원으로 위촉되었다.105) 동 위원회는 2009년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민
족문제연구소 등 50여 독립운동단체·시민단체·학술단체로 ‘안중근의사
의거·순국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로 확대 개편하였다. 100주년 기
념사업은 순국 99주기인 2009년 3월 26일부터 100주기인 2010년 3월 26일
까지 1년간을 사업기간으로 기획하였다. 주요사업으로는 안중근의사의
생애와 사상을 재조명하는 국제학술대회와 자료집 발간 등 학술사업, 전
시회·시민강좌·유적지순례·청소년평화캠프 등 대중교양사업, 공연·
서예대전·UCC공모전 등 문화사업, 기념주화와 우표 발행 추진 등이었
다. 또한 그동안 내국인만을 수상자로 선정했던 ‘안중근 평화상’을 ‘안중
근 국제평화상’으로 확대하고, 아시아의 평화운동에 기여한 국내외 인물
을 선정 상금 1만 달러와 함께 시상하기로 하였다. 100주년 사업의 내용
을 보면 학술연구와 미래세대 교육에 중심을 두고 추진한다는 특징이 있
다. 그런데 100주년 기념사업은 연대 형식으로 만들어진 기념사업추진위
원회가 추진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많은 기념사업을 추진하
기 위해서는 인적 자원과 더불어 물적 자원이 요구되는데, 현실적으로
인적 자원이나 물적 자원을 조달할 수 있겠는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1992년 3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안중근 순국 82주년 기념오페라 ‘안
중근’이 공연되고 대련천주당에서 연미사가 올려졌다.106) 그리고 같은 달
102) ꡔ가톨릭신문ꡕ 2005년 11월 6일 「안중근의사 의거 96주년 학술대회」.
103) ꡔ가톨릭신문ꡕ 2006년 4월 2일 「안중근의사 순국96주기 추모식·학술대회」.
104) ꡔ가톨릭신문ꡕ 2007년 11월 4일 「안중근의사 하얼빈의거 98주년 기념식, 학술대회」.
105) ꡔ문화일보ꡕ 2006년 1월 11일 「안중근 기념사업회 발족」.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49
하얼빈시에 중국교포사회에서는 처음으로 안중근의사연구회가 설립되었
고,107) 서덕근의 주도로 하얼빈공업대학에 안중근장학금이 설립되었다.108)
2000년 3월 26일에는 여순감옥이 있는 大連에서 한국인회와 조선족노인
회의 공동주관으로 西崗구 조선족 소학교에서 안의사 순국 추모식이 거
행되었다. 대련의 한국인과 조선족이 함께 안의사 추모식을 개최한 것은
처음이었다.109) 그해 대련에 거주하는 조선족 동포 40여 명으로 구성된
‘안중근연구회’가 출범하였다.110)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의 수교가 이루어졌다. 한·중 수교는 중
국 소재 안중근 관련 자료 및 사적지 조사와 중국에서의 안중근 기념사
업에 활기가 되었다. 1992년 10월 29일부터 1993년 11월 19일까지 약 18억
원을 모금한 ꡔ세계일보ꡕ가 1993년 11월 10일 공보처의 승인으로 재단법
인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을 설립하였다. 1988년 ‘여순일아감옥구지’라는
현판 아래 중국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여순감옥에는 안중근의사 코너
가 마련되어 있었다. 안중근이 복역한 지하감방은 간수사무실부속창고로
이용되고 있었고, 수감동 복도벽에는 ‘조선애국지사 안중근’이라고 쓴 액
자 속에 수감 당시의 사진이 남아 있었다. 또한 옥중사진, 유화초상화, 이
토와 하얼빈 역사의 사진, 유시 ‘장부가’, 약력, ‘빈여천인지소악자’라고 쓰
인 유묵족자 등이 있었다.111)
1994년 4월 15일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은 여순감옥 내에 안중근 관련
안내 표지동판 3종(안중근 수감 감방 설명판, 안중근 교형장, 여순감옥
수감 기간 중 안중근의 사진 촬영 지점)을 부착하였다. 그리고 1998년 8
106) ꡔ서울신문ꡕ 1992년 4월 21일자.
107) ꡔ세계일보ꡕ 1992년 4월 2일자 ; ꡔ한겨례신문ꡕ 1992년 6월 5일자.
108) 2006년까지 15회에 걸쳐 약 400명 하얼빈공업대학생에게 안중근장학금이 전달되었
다(ꡔ흑룡강신문ꡕ 2006년 11월 1일 「2006년도 안중근 장학금 전달식 거행」).
109) ꡔ동아일보ꡕ 2000년 3월 27일 「안중근의사 추모물결……韓-中-日서 순국90주년
추념식」.
110) ꡔ중앙일보ꡕ 2009년 3월 26일 「박룡근- 대련 ‘안중근연구회’ 회장」.
111) ꡔ세계일보ꡕ 1992년 12월 4일 「여순감옥의 실상, 거사와 순국의 현장: 24」.
15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월 15일 전국재소자교화후원회장인 朴三中 스님과 조선족동포 및 재일교
포 등 20여 명이 뜻을 모아 마련한 안중근 추모비가 세워졌다.112) 2001년
4월 5일 기념재단은 여순감옥 내에 안중근의사 독립전시관을 개관하고,
10월 20일 안중근이 재판을 받았던 여순 일본군관동부 법원구지를 매입
하여, 2004년 6월 5일 여순일본관동법원구지 진열관 복원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한편 2001년 10월 19일 크라스키 류하노프카(煙秋 下里)에 단지동맹 기
념비가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 의해 세워졌다. 단지동맹을 했던
장소는 이웃마을인데 그곳은 황무지로 변해 인적이 끊겨서 대로변에 비
를 세웠다.113) 그런데 비석에는 1909년 2월 당시의 국호가 대한제국이었
음에도 대한민국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고,114) 2005년 8월 24일 비석의 뒷
면 러시아어 비문 중 ‘한국’이라고 표기된 부분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었다.115)
2006년 1월 16일에는 하얼빈의 중앙대로 금안 오로바광장 공원에 안중
근 동상이 세워졌다. 청동으로 만든 높이 4.5m, 기단 2m 크기의 동상으
로 숭모회에서 마련한 것이었다.116) 그러나 이 동상은 중국 중앙정부의
지시로 설치 10일만에 강제 철거되었다.117) 의사를 추념하는 방식에서
개인과 공공의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공장소에 동상을 세우
려면 공적 논의 절차가 필요하다.118) 2006년 3월 26일에는 하얼빈 고려회
관에 안중근 동상이 세워졌다. 서울 구로구에서 마련한 것이었는데 중국
당국의 공식 허가를 받은 것이 아니었다.119) 그해 7월 하얼빈시 철도국은
112) ꡔ동아일보ꡕ 1998년 8월 17일 「안중근의사 순국 中 여순감옥에 추모비」.
113) ꡔ서울신문ꡕ 2001년 10월 23일 「김삼웅 칼럼: 연해주의 안중근·이상설 유허비」.
114) ꡔ서울신문ꡕ 2009년 7월 22일 「안중근의거 100년」.
115) ꡔ국민일보ꡕ 2005년 8월 26일 「연해주 안중근의사 단지 기념비 훼손」.
116) ꡔ세계일보ꡕ 2006년 1월 18일 「중국 하얼빈서 안중근의사 동상 제막」.
117) ꡔ동아일보ꡕ 2006년 3월 23일 「中하얼빈 안중근 동상 사라졌다」.
118) ꡔ국민일보ꡕ 2009년 9월 4일 「사설: 씁쓸하게 유랑하는 안중근 동상」.
119) ꡔ문화일보ꡕ 2006년 3월 27일 「하얼빈 고려회관에 ‘안중근 동상’ 설치-양대웅 구로구
청장」.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51
역 플랫폼에서 안중근의사가 서서 총을 쏜 지점엔 총알이 날아간 방향으
로 삼각형 표시를, 이토가 총을 맞은 지점엔 네모 표시를 설명 없이 대리
석 보도블록 위에 새겼다.120) 또한 같은 달 하얼빈시는 자오린공원 내에
안중근의사비 건립을 허락하였다. 앞면에는 여순감옥 수감시 붓글씨로
남긴 ‘청초당’과 단지 손도장, 뒷면에는 ‘연지’라는 글자가 각각 새겨졌
다.121) 같은 해 경기 부천시가 하얼빈시와 꾸준한 협상을 벌여 하얼빈 역
사에 안중근의사 홍보관을 설치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 하얼빈역사
에 홍보관이 설치됨에 따라 안중근의사 기념물은 조선민족예술관 1층 기
념관과 자오린공원 안중근의사 기념비까지 하얼빈에만 3개로 증가하였
다.122)
한편 일본에서는 매년 대림사에서 안중근의사와 지바의 합동법사가
거행되었고, 1996년 3월 26일 일본의 학자 등 20여 명이 도쿄 국제문화회
관에서 “일본 안중근연구회”를 발족하였다.123) 1997년에는 일본의 대표적
극단이 안중근의사를 다룬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124) 매년 많은 일본인
들이 안중근의사기념관을 찾아와 참배하는데 안중근의사기념관 측에 따
르면 1996년 일본인 참배객들은 1만 4천여 명으로 전체 참배객의 10% 이
상이었다.125)
미주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는 의거현장인 중국 하얼빈역에 의거기념
비와 기념관을 세우기로 하고 1993년 1월 7일 발기인 모임을 갖고 구체적
인 사업추진방안을 협의하였다.126) 2008년 현재 미주 안중근 기념사업회
120) ꡔ한겨레신문ꡕ 2006년 7월 4일 「안중근의사 저격 장소 복원」.
121) ꡔ가톨릭신문ꡕ 2006년 7월 9일 「하얼빈시 안중근의사 추모행사」 ; ꡔ가톨릭신문ꡕ
2009년 3월 11일 「안중근 애국의 날-자오린공원의 안중근의사 기념비」.
122) ꡔ내일신문ꡕ 2006년 7월 12일 「부천 자매도시 하얼빈에 ‘안중근 홍보관’」.
123) ꡔ한국일보ꡕ 1996년 3월 27일 「‘일본 안중근연구회’ 발족」.
124) ꡔ한국일보ꡕ 1997년 7월 9일 「일 극단 안중근 연극 화제, 이토를 죽인 ‘국적’서 ‘영웅’으
로……」.
125) ꡔ문화일보ꡕ 1997년 8월 15일 「‘일 정부 사죄안받곤 눈 못감아’, ‘나눔의 집’ 정신대할머
니들」.
126) ꡔ동아일보ꡕ 1993년 1월 9일 「안중근의사 기념비 하얼빈에 건립 추진, 미주기념사업회」.
15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는 LA 한인타운에 건립 중인 ‘노인복지회관’ 내에 안중근의사 흉상을 세
우고, 시청각 자료실을 만드는 기념사업을 추진하였다. 안중근의사의 흉
상은 2000년 제작이 완료되었다.127)
1990년대 초부터 안중근 기념사업은 매우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문화
인물과 호국인물로 선정되었고, 유해발굴작업이 남북 공동으로 추진되었
다. 천주교회는 신앙인 안중근, 애국적인 안중근의거라는 측면에 초점을
모았다. 한중 수교로 중국에서의 안중근 관련 기념사업들이 활발하게 추
진되었으며, 미주와 일본에서도 안중근연구회가 조직되는 등 국외에서도
안중근 기념사업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5. 맺음말
해방 후 안중근 기념 첫 사업은 동상건립기성회 조직이었다. 해방된
한반도에서 안중근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다는 의미이다. 이
후 안중근 기념사업은 주로 순국일에 추모행사로 진행되었다. 해방 이후
1960년대 초까지 안중근 기념사업은 동상 건립과 순국일·의거일에 거행
된 추념식이었다. 추도란 “죽은 이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으로 ‘추념’도
비슷한 의미이다. 추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훈을 끌어내는 것이야
말로 추도의 진정한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추도란 정확한 사실
에 토대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중근에 대한 자료 발
굴과 그에 기초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 기간에는 몇 편의 희곡
과 단행본이 출간되었을 뿐이다. 천주교회 측에서도 소극적인 관심을 표
명하였을 뿐이었다.
숭모회가 사단법인으로 설립된 196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안
중근 기념사업은 국가적인 후원과 국민들의 관심 속에서 추진되었다. 안
127) ꡔ재외동포신문ꡕ 2008년 4월 18일자.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53
중근의사기념관 설립과 안중근 유묵의 보물 지정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의 관심과 후원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관심과 후원은 안중근 관련 자료
들의 발굴로 이어졌고, 안중근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 천주교회 측에서도
안중근을 천주교 신앙인으로, 단죄하였던 안중근의거를 애국적인 행동으
로 인식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추모식과 논문들로 표명하였다. 중
국에서는 안중근의거지인 하얼빈을 중심으로 동북삼성에서 안중근을 기
념사업들이 추진되었다. 안중근 동상 건립과 같은, 안중근을 표면에 내세
우는 사업은 할 수 없었지만 신문기사·학술회의·단행본 등을 통하여
안중근을 기념하였다. 일본에서도 안중근 기념비가 설립되었다. 이처럼
이 기간 안중근 기념사업은 국·내외적으로 토대를 다져나갔다.
1990년대 초부터 안중근 기념사업은 매우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문화
인물과 호국인물로 선정되었고, 유해발굴작업이 남북 공동으로 추진되었
다. 천주교회는 신앙인 안중근, 애국적인 안중근의거라는 측면에 초점을
모았다. 한중 수교로 중국에서의 안중근 관련 기념사업들이 활발하게 추
진되었으며, 미주와 일본에서도 안중근연구회가 조직되는 등 국외에서도
안중근 기념사업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즉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화하고 확산되었
는데, 그것은 안중근이 한국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가 그
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의 동양평화사상과 의거가 지닌 역
사적 의미가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만큼 그를 기념하는 각종 사업
들의 다양화와 확산은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안중근을 기념하는
기념사업 확대는 독립운동가와 독립운동사에 대한 관심의 증대이다. 안
중근 기념사업의 시작, 전개, 확대는 시간이 흐르면서 독립운동가와 독립
운동사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고 한국사는 물론 세계사적으로도 한국
의 독립운동이 자리매김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
를 찾을 수 있다.
2009년 현재 안중근을 기념하는 단체는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의사
기념사업회,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 등이
15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대표적이다. 독립운동가 중 기념하는 단체가 이렇게 많은 것은 안중근뿐
이다. 그만큼 안중근의 사상과 의거가 우리 역사와 세계사에 던지는 의
미가 크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각 단체가 설립 취지에 맞추어, 중복되어
낭비하는 일없이 기념사업을 추진한다면 안중근 기념사업은 다른 기념
사업의 모델이 될 수 있다.
그동안 안중근 기념사업은 일회적이고 중복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사후 관리가 미흡하였다. 향후 안중근 기념사업은 안중근의 정신을 미래
화하는, 안중근의거를 국제평화의 측면에서 자리매김하는 방향으로 나아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안중근의 사
상과 의거에 대한 철저한 사료 조사와 정리, 그에 토대한 연구와 평가가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안중근에 대한 사료정리와 연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기념관을 건설하는 것이다.
학술연구 외의 기념사업들은 학술연구 결과를 충분히 활용하여 장기
적인 안목에서 기획되고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안중근의 이름을 내건
많은 기념행사들이 있는데 대개는 왜 안중근 이름을 필요로 하였는지 의
문이 들게 한다. 순국일이나 의거일에 행해지는 기념식은 자칫 의례적인
행사로 전락할 수 있다. 따라서 장기 계획을 수립하여 기념식을 추진한
다면 일회성의 행사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동상이나 비와 같은 기념시
설도 왜, 어디에 건립하는지를 충분히 숙고·조사한 후 진행해야 할 것이
다. 또한 건립한 기념시설은 사후 관리와 활용이 중요하다. 건립에만 주
력하여 건립 이후에는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그리하여 훼손되기까지 하
는데 관리자(단체)를 분명히 한다면 이용과 관리에 효율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 접수일 : 2009.11.5 / 심사완료일 : 2009.12.1
▪ 주제어 : 기념사업, 순국일, 의거일,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의사기념사
업회,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안중근연구회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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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 국문요약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윤 선 자
해방 후 안중근 기념 첫 사업은 동상건립기성회 조직이었다. 해방된
한반도에서 안중근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은 인물이었다는 의미이다. 이
후 안중근 기념사업은 주로 순국일에 추모행사로 진행되었다. 해방 이후
1960년대 초까지 안중근 기념사업은 동상 건립과 순국일·의거일에 거행
된 추념식이었다. 추도란 “죽은 이를 생각하며 슬퍼하는 것”으로 ‘추념’도
비슷한 의미이다. 추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훈을 끌어내는 것이야
말로 추도의 진정한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최고의 추도란 정확한 사실
에 토대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중근에 대한 자료 발
굴과 그에 기초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데 이 기간에는 몇 편의 희곡
과 단행본이 출간되었을 뿐이다. 천주교회 측에서도 소극적인 관심을 표
명하였을 뿐이었다.
1960년대 초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안중근 기념사업은 국가적인 후원
과 국민들의 관심 속에서 추진되었다. 안중근의사기념관 설립과 안중근
유묵의 보물 지정은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관심과 후원이었다. 그리고 이
러한 관심과 후원은 안중근 관련 자료들의 발굴로 이어졌고, 안중근 연
구의 기초가 되었다. 천주교회 측에서도 안중근을 천주교 신앙인으로, 단
죄하였던 안중근의거를 애국적인 행동으로 인식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을 추모식과 논문들로 표명하였다. 중국에서는 안중근의거지인 하얼
빈을 중심으로 동북삼성에서 안중근을 기념사업들이 추진되었다. 이처럼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57
이 기간 안중근 기념사업은 국·내외적으로 토대를 다져나갔다.
1990년대 초부터 안중근 기념사업은 매우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문화
인물과 호국인물로 선정되었고, 유해발굴작업이 남북 공동으로 추진되었
다. 천주교회는 신앙인 안중근, 애국적인 안중근의거라는 측면에 초점을
모았다. 한중 수교로 중국에서의 안중근 관련 기념사업들이 활발하게 추
진되었으며, 미주와 일본에서도 안중근연구회가 조직되는 등 국외에서도
안중근 기념사업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즉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은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화하고 확산되었
는데, 그것은 안중근이 한국 민족운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가 그
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의 동양평화사상과 의거가 지닌 역
사적 의미가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 만큼 그를 기념하는 각종 사업
들의 다양화와 확산은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그동안 안중근 기념사업은 일회적이고 중복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
사후 관리가 미흡하였다. 향후 안중근 기념사업은 안중근의 정신을 미래
화하는, 안중근의거를 국제평화의 측면에서 자리매김하는 방향으로 나아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안중근의 사
상과 의거에 대한 철저한 사료 조사와 정리, 그에 토대한 연구와 평가가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안중근에 대한 사료정리와 연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기념관을 건설하는 것이다.
15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4집
❂ 영문요약
Historical Significance of An Jung-geun
Memorial Project after Korea’s Liberation
Yoon, Seon-Ja
The first An Jung-geun memorial project after Korea’s liberation was to
organize an association for the realization of erecting a bronze statue of An
Jung-geun. This means that An Jung-geun was positively judged by the
people in Korea after liberation. Since then An Jung-geun memorial project
was chiefly conducted by a memorial event on the day of his death for the
country. An Jung-geun memorial project was to erect his bronze statue and
hold a memorial service on the occasion of the day of his death for the
country and the day of his conducting patriotic deed till early 1960s since the
liberation from Japan’s colonial rule. The term of “memorial” is to pay a
tribute to the memory of somebody and further more, the real meaning of
“memorial” is to draw a lesson out of it. And the supreme meaning of
“memorial” should be based on a plain truth. For this, materials about An
Jung-geun should be collected and studies based on them should be made,
however, several plays and books were only published during the period
and the Catholic Church side expressed its passive stance about them, too.
From early 1960s to early 1990s An Jung-Ggun memorial project progressed
under national support and attention. The establishment of An Jung-geun
해방 후 안중근 기념사업의 역사적 의의 159
memorial hall and the designation of his autographs as a national treasure
were accomplished by support and attention on the level of the government.
Such attention and support led to a collection of materials about An
Jung-geun and formed the basis of a study of him. The Catholic Church side
which had convicted him of his patriotic deed also expressed its opinion in
a memorial service and papers that it should be recognized and understood
as a patriotic deed. An Jung-geun memorial project was progressed in
Northeast China with Harbin as a center, too. During the period the
foundation for his memorial project was laid at home and abroad.
From early 1990s His memorial project was progressed very actively. He
was selected as a cultural figure and patriot and the excavation project of his
remains was progressed in collaboration with North Korea. And the Catholic
Church focused on the side of a believer “An Jung-geun” and his patriotic
deed. As they pushed actively ahead with his memorial project in China with
the establishment of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Korea and China, and a
society of the research of An Jung-geun was organized in America and Japan,
it was actively progressed at home and abroad.
As time went by, his memorial project diversified and was promoted. This
means that he occupied an important position in the history of Korea’s racial
movement and his “The Orient Peace Thought” and patriotic deed assumed
great historical meaning. Therefore to diversify and spread various kinds of
projects to commemorate his patriotic deed assumes historical value and
meaning.
All the while, there were many cases of a single-shot or overlapped event
in his memorial project and follow-up service left something to be desired.
From now on his memorial project should be progressed in direction of
making his spirit go to the future and placing his patriotic deed in the side
of international peace. In order to do that, thorough arrangement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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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on historical materials about his spirit and patriotical deed should be
made, and then the study and evaluation of him should be made on this
basis. The arrangement and research on historical materials about him is to
establish an invisible An Jung-geun memorial hall.
Key words: Memorial project, Day of one’s death for the country, Day of
one’s conducting patriotic deed, Society of men respecting and
serving An Jung-geun, Promotion Committee of An Jung-geun
Memorial Project, Lu-shun Foundation for Patriotic Martyrs,
Society of the Research on An Jung-ge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