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 敗者의 노래
소슬 바람이 스쳐 갈 적마다 잎새를 떨구던 버드나무는 이내 앙상한 가지를 바람 결에 흔들며 춤추고 있다.
바라보니
바람이 가녀린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는 것인지.....
버드나무 가지가 바람을 타고 춤을 추는 것인지.....
그것을 보니 떠오르는 선문답 하나!
스승이 지나가며 보니 제자 둘이 다투고 있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깃발이 바람에 흔들린다. 바람이 깃발을 흔든다는 제자들의 말 다툼이였다. 그것을 바라보던 스승은 " 둘 다 틀렸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살아 가면서 '바람이 깃발을 흔들고 깃발이 스스로 바람에 흔들린다는 이러한 논쟁을 많이 벌이곤 한다. 어리석은 줄 알면서도.....
1990년 김병희선수의 전국대회 우승에 이어 다음해 전국 태권왕 대회에서 원영철군이 초등부 헤비급 우승을 차지 하며 전성기를 이어가던 91년도에 후배 정용석군이 한 소녀를 도장으로 데리고 왔다.
'본인이 태권도 선수가 되기를 원하고 부모님도 원하여 형님께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되어 소녀를 데리고 왔노라고 했다.'
" 이름이 뭐지? "
" 네, 전성아입니다. "
" 이름이 예쁘구나, 열심히 해보거라. "
" 네! "하고 수줍어 하며 나와의 인연을 맺은 성아는 육상 단거리 충북 대표 선수였던 어머니의 소질을 물려 받았는지 오른발 왼발 가릴 것없이 사용을 잘했고 심폐력과 지구력이 뛰어난 소녀였다.
제천여중으로 진학한 후 성아는 의림여중의 순기와 같이 1992년 5월 25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된 한국 중,고등학교 태권도 연맹기 대회에 처음 출전한 전국대회에서 전성아와 김순기선수는 예상을 깨고 준결승에 진출하였다.
준결승에서 전성아 선수의 상대는 강남여중의 정재은 선수였다.
1회전을 끝내고 나니 성아가 1:0으로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적인 판정이 아니였다.
내가 판단하기에는 정재은 선수가 2점 이상을 득점 한 것 같은데 .....
2회전을 마치고 나서도 여전히 1:0으로 성아가 이기고 있었다.
2회에서도 상대는 분명 득점을 했다. 하지만 심판들은 계속 정재은 선수에게 득점을 주지 않았다.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휴식시간에 펄펄 뛰며 소리 소리 지르는 강남여중 코치를 보며 나는 갈등했다.
내가 강남여중 코치였다면....내가 상대 선수의 학부모였다면.....
불현듯 작년 문화관광부장관기 생각이 났다.
' 김병희는 2년 연속우승의 의지를 갖고 휴일도 반납하고 무더위와 싸우며 힘든 훈련을 마치고 출전하여 여유있게 예선을 통과하고 준준결승에서 만수여중의 선수와 경기를 치루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얼굴을 가격하여 상대 선수가 맞아 머리보호대가 벗겨지고 휘청거리는 일방적인 경기에도 불구하고 병희는 심판들의 불공정한 판정으로 만수여중의 선수에게 지고 말았다.
경기 내내 나는 항의를 하였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그래도 일말의 양심이 있었는지 그렇게 소란을 떠는 나에게 주심은 경고 한번 주지 않았다.
경기를 마치고 나오며 병희는 "사범님! 제가 이겼는데 왜 제가 졌지요? "하며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나는 " 병희야! 먼저 나가거라. "하며 감독관석으로 가서 따졌다.
" 이런 걸 판정이라고 합니까? " 하니 " 심판이 그러는 것을 어떻게 하나? "하고 평소 싸래기만 드셨는지 반말조로 말하며 " 억울하면 소청하라"고 한다.
몇몇의 심판 및 임원에게 어필해 보았지만 경기를 뒤집을 수는 없는 일이였다.
오후에 이재봉 코치와 같이 인천체고의 양기모 코치 승용차로 대전체고에 가서 코치 협의회 모임을 가지며 나는 만수여중 코치에게 병희 경기를 말하니 " 아! 따당차고 얼굴 잘 차던 아이 말이죠. 참 잘하던데 그 경기는 솔직히 우리 애가 졌어요." 하고 시인 한다. 그제서야 나는 마음이 조금 풀렸지만 병희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어찌 할 수 없었다. 이후 마음의 상처를 받은 병희는 많은 방황과 갈등을 하며 태권도를 하지 않겠다고 하여 나와 병희 부모님 속을 많이 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전성아와 정재은선수는 3회에서도 서로가 득점이 있었는데 전광판의 점수는 여전히 1:0으로 성아가 이기고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어린 선수가 상처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이것은 스포츠가 지니고 있는 이상인 '보다 노력하고 보다 성실한 사람이 성취할 수 있다'는 사회정의에도 어긋나는 일이며 또한 나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3회를 마치고 감독관석으로 가는 주심을 보며 성아를 기권시키기 위해 나는 흰 수건을 들었다.
주심이 성아의 팔을 들어 주기 전에 수건을 던지면 성아의 기권이 될 터이니....
감독관석에서 걸어 나오던 주심은 내가 수건을 던지려고 하자 손으로 나를 진정시키며 다시 감독관석으로 뛰어 간다.
한참을 상의 하던 감독관과 주심은 수건을 놓지 않고 들고 있는 나를 몇 번이나 보더니 이내 상대에게 1점을 주고 우세승으로 정재은 선수의 승리를 선언한다.
성아의 어깨를 감싸 안고 경기장을 나오며 나는 나에게 말하듯 성아에게 말했다.
" 성아야! "
" 네! "
" 시골에서 고생하며 올라왔지만 솔직히 오늘 경기는 성아가 졌단다. 그건 성아도 인정하지? "
" 네 ! "
" 하지만 우리는 오늘 진정한 태권도를 한 것이란다. 그것이 남들은 어리석은 패자의 노래라고 할지 모르지만....성아야! 동메달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 제천으로 돌아가서 더 노력하자구나. "
" 네! 사범님!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
밖으로 나오니 성아 어머니께서 다가와 " 사범님! 어떻게 된거예요?" 하고 묻는다.
상황을 설명하니 스포츠맨이셨던 성아 어머니께서는 " 네 사범님! 성아에게 바른 정신을 가르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시며 오히려 나의 마음에 상처를 걱정하며 차를 권하신다.
그렇게 나의 뜻을 받아들인 성아는 제천으로 돌아오자 다음날부터 학교 수업을 모두 마치고 하루에 한 시간씩만 수련하면서도 나가는 전국대회마다 입상 내지는 우승을 하여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성아는 대한태권도협회의 우수장학생에 선정되었다.
이 땅에 태권도가 탄생 된 이후 태권도장의 일반 무도적인 수련과 엘리트 스포츠의 경기화로 인하여 태권도는 무궁한 발전을 이루었지만 언제나 문제는 심판의 판정과 감독, 코치의 자질이었으며 그것은 경기 전에 짜놓은 협잡과 영향력 있는 인사의 압력, 향응제공 그리고 인간관계로 맺어진 인연 및 뇌물의 제공을 뿌리치지 못하는 가련한 인간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가련한 일이다. 그것은 ITF와 WTF로 양분된 이후 스포츠로서 세계적인 발전을 이룬 태권도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가장 큰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개선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그럼으로 인하여 우리는 태권도 정신과 명예를 스스로 잃어가고 있다.
전자호구도입과 차등득점제 같은 좋은 제도와 규칙도 그것을 판정하는 심판이나 항의하는 코치의 정당치 못한 마음가짐(폭력적인 대응만이 최선이라고 하는)일은 판정에 있어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이나 깃발을 흔드는 바람 같은 것일 뿐이다.
지금의 경기규칙하에서도 심판의 도리가 제대로 선다면 태권도의 명예를 실추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심판의 道理(도리)란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정정당당한 판정이다. '
패자의 노래!
그것은 나를 잊어야 하는 수련이다.
피땀을 흘리는 나를 잊고
뼈가 부딪치는 고통을 잊고
명예와 영광을 잊을 수 있고
좌절과 굴욕을 잊을 수 있는
최선을 다한 忍耐(인내)와 克己(극기)속에
비겁한 승리를 부끄러워 하는 廉恥(염치)를 알고
정정당당한 패배를 부끄러워 하지 않는
百折不屈(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는 것을 자랑스러워 하는
진정한 敗者(패자)가 되어야 하리라.
태권도 경기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기에
패배를 인정할 줄 아는 者만이
태권도 경기를 통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며
진정 아름다운 패자의 노래를 부를 수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