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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기 ]
오늘이 있음에 늘 감사한다.
오래전 나도 모르게 발간된 내 미션 중의 하나로 인해
마치 선 보듯이 나서서 지난 시간을 살릴 계제가 되었다.
동창이란 제일 생기발랄. 왕성할 때 만나 오늘까지 서로 통화하고 온갖 이유 대면서
만남을 즐길 수 있으니 그 또한 큰 복이다.
밖이던, 안이던 언제 들어도 부드럽고 사랑스런 소리가 “보성”이란 단어다.
내 집안 보성은 올해 작고하신 55회 선배가 내 매제이고 둘째 사위가 보성 85회이다.
김 종욱 총무가 후기 겸 지난 세월 중 몇 사례를 끄집어 올리라 내라하여 해 본다.
내가 해온 일은 쉽게 말해서 등반으로 치자면 루트 개척과 가이드다.
길 찾으면 관련 기업. 부처. 기관이 실제 행 할 수 있게 가이드 하는거다.
심부름 꾼이다.
30여 년간 3개국 정부 기구에 연속으로 소비 물자로 수용되어 써비스 하다보니
우물 안 개구리를 가까스로 벗어났던 거 같다.
처음부터 원고 제출까지 작성한 것 중 민감한 사건은 수차에 걸쳐 전부 삭제했다
보성 동문 관련 일들과 민감하지 않으면서 언론이나 이미 알려진 사건들에 한해서 들쳐 본다.
0. 동문 관련
해외에 한국인이 그렇게 많지 않았던 시절에 어딜 가나 현지에서 보성 동문회를 만들거나 확대에 힘썼다.
북경에서 국내 그룹사 사장 자격으로 근무할 때 총 12명의 보성 동문이 매달 모였었다.
그중 동문회 62회 김용성은 대우가 지분 투자한 켐핀스키 특급 호텔 매니저였다.
김은 북경 근무 마치고 귀국 시에 내게 "고백할 게 있는데 먼저 용서를 빕니다"
하여 " 괜찮으니 얘기해봐라" 했다.
ㅡ 중국 공안 외사처장이 호텔로 와서 김을 델구 공안국으로 갔다.
처장은 * 000 이가 중국 책임자로 와서 사업을 하는데 당신과 가깝고 자주 만나는걸 안다.
매일 000의 동향. 사업관계와 북한. 중국 고위층 접촉을 자세히 보고해라*하여
* 000 이 누구냐*고 질문했다가 혼나고, 00 사장인데 잡아떼냐 하여 알겠다고 매일 보고 하겠다고 서약서 집행.
이후 내 동향 파악하는데 무척 고민스러웠고 죄진 기분이었다 함.
어째 자주 보자 하더라.
공안국은 나에 대해 다 알면서 내게 여러 명을 감시원으로 부쳐 놓았었다.
후배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 안타까운 심정이었다.
그래서. * 야. 미리 얘기했으면 내가 내일 일정까지 다 알려 줬을 텐데.. 미안하다*. 했다.
후배는 보성 나온 게 후회스러웠을까?
지금도 중국. 홍콩 근무한 동문들 모임인 보중회가 모인다.
최 승한이도 멤버이다.
0. 한국 위성 발사
잘은 모르지만, 인공위성 띄우는거나 핵폭탄 날리는거나 원리는 같다고 한다.
내가 한국도 위성 소유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미 의회 핵‧위성 관련 문헌을 뒤지면서 구 러시아 혼란기에
러시아 엔진이 필요하다는 계획을 올렸는데, 곤란하다 한다.
그 다음 날 계획 추진키 위해, 당시 청와대 과학비서관인 윤 창현을 찾아갔다.
자초지종 설명하고, ... 윗분 승인받아 달라고 했더니 20분쯤 후에 와서
*ㅇㅋ. 추진 승인 났다* 한다. .
창현이가 고3 때 삼양동 집에서 뭔 심지에 불붙여 로켙 날리는 나름대로 시험하는 걸 본 기억이 있었다.
이후 윤 비서관이 소개해준 관계 전문가분들과 많은 회합을 했다 .
8년 후 첫 한국 인공위성이 하늘을 갈랐다.
그리고 또 4년 후 한국 과학자들 4명이 모스크바에 회의차 도착 후 잡혀가
* 000을 누가 갖고갔나?* 는 조사를 받았다고 국내 신문. 방송 기사가 났다.
창현이는 송도 Techno Park 초대 및 4대 사장으로. KIMS. KIST. 충북Techno Park 개척 등으로 공헌이 많다.
0. 보성 - 군(軍) 선배.
YS 가 취임후 우선 한 일이 쿠데타 날까 봐 군 하나회 조직을 없애는 거였다.
50회 최 승우 장군이 선후배 군인들의 귀감이 되어 참모총장감이라 했었다.
당시 육본 작전 본부장이었는데 하나회 선두주자라고 갑자기 강제 전역 되었다.
이후 최 장군은 중국을 오가며 조선족들에게 좋은 일을 하고 싶다 하시어 동북 삼성 길림성
이동호 매탄 (석탄) 국장을 소개시켜 드렸다.
*이 국장은 필요시 북한 관계자들을 오라고 하여 (국경이라 오가는데 용이) 훈춘에서 현대 중국사장과 북 무역부 협의도 성사.
0. 블라디 콩 농장
정부의 해외 식량 확보 시험의 일환으로 이지역 미개발된 농토 2천만 평(여의도 20배)을 거의 공짜로 임대하여
북에서 외화벌이 나와 있던 일꾼들을 고용하여 콩 농장을 했다.
남북 경협은 이것뿐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소리 없이 여러 곳에서 임가공. 수산물. 호텔 등을 해 왔었다.
요란하기만 하고 퍼다 주는 경협은 하지 말아야 하는거다.
투자는 우리가 하지만, 이익은 블라디. 북. 우리가 1/3씩 분배다.
대체로 수확물은 기차로 지역별 운송 가는데 가시는 도중 대량이 길가에 포대로 날라 간다.
대강 자리가 잡혀서 민간 기업에 넘길 때가 되었다.
이때 보성중 동기 유 회종 (현재 미국 산 호세 거주)이 " 동기 김부길 두류공사 사장이 콩 유통 한다 " 하여
거의 1/10 가격에 넘겼다. 나중 소식에 의하면 성공은 못했다고 한다.
0. 김 동식 목사 피납.
북경에서 탈북 청소년( 꽃 제비)들을 돌보시던 김 동식 목사님을 오랜 기간 작으나마 집 보수. 확장. 물자 지원해 드렸는데
* 이 분은 소아마비로 거동이 불편.
북한에서 탈북 부부로 위장한 납치조에 의해 연변 동행한 후 납부되어 처형 되었고, 나와 한국인 몇은 중국 공안에 불려가서
그간의 관계 진술을 당했다...
0. 보성 입학
대구 구석 동네의 대명국교 3년 때 서울로 왔는데 혜화, 돈암에서 시골 학생이라고 한 학년 아래로 가라고 하여 안가고,
정릉 넘어가는 아리랑 고개 옆 한 학년이 2~3학급이던 작은 정덕 국교를 가게 되었다.
대구에서 학교 다닌 건 부친의 직업 때문이었다.
일제때 유학 가셔서 당시 항공기 보유 세계2 위이던 일본 항공 정비사를 하셨는데 해방되자 귀국하셨다.
고생의 시작이었다.
중고 비행기 한 대도 없던 시절에 덜컥 조국에 와서 담날부터 실업자 되었다가 유학 시절 알던 친구 주선으로 군대 트럭 기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육군 항공정비대가 창설되어 기술고문관으로 차출되어 L19 정찰기 부대가 창설되는 곳마다 항공기 고문관을 하셨다.
봉급은 일체 없고 쌀과 보리 섞은 자루가 다였다.
고문(顧問)관이 괜히 고문(顧問)관이 아니었다.
무지 정신적 고문(拷問)을 당하는 거였다
어머님은 매일 군인 옷 빨래 거리를 가져와 밤새 일 하셨다.
사천 비행장. 대구 앞산 비행장을 쫓아다니다가 여의도 비행장 생기면서 드디어 한양 입성을 했다.
도착 후 성북구 산동네를 시작으로. 해마다 이사가 시작되었다.
이때 아버님이 주신 훈시가 평생을 좌우했다.
*먼 하늘보다 땅을 봐라.
음악과 불은 멀리서 보고 들어라. *
한이 맺힌 말씀이었음을 커서 알게 되었다.
중학 입시 때 6학년 담임이 " 보성이 유일하게 단독 출제하니까 넌 보성중 원서를 사 와라 "했는데
난 태어나서 첨 듣는 학교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했다.
난 동네에서 젤 가까운 경동 중학밖에 몰랐었다.
입학 후, 할 수 있는 게 공부밖에 없어서 열심히 했더니 1학년 1반에서 1등을 했다.
이후 2학년 전체 1등을 향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2학년 2학기 시험 때 기계체조 전공 선생이라 뜀틀, 물구나무서기 등으로 시험 봤다.
난 물구나무서다가 자빠져서 60점 받았다. 그래서 2등.
전 세계에서 물구나무서기로 체육 시험 보는 데가 있을까?
이 일로 인해~
1등이 대한 강박관념이 사라지고 대충 공부했다.
놀러만 다니고 중3 때 정학도 맞고..
그 일이 없었다면 괜찮은 공부 벌레가 되었겠지만, 그 덕에 넉넉한 맘으로 세상 보게 되었다.
3학년 여름 방학에 문득 돈이 없으니, 전국 일주 무전여행 해 볼까 하는 생각에 무작정 같은 동네 사는 같은 반 황 돈현을
살살 꼬드겨서 사흘 뒤 무작정 무전여행을 갔다.
보름 동안 기차는 몰래 타고 버스는 여 차장에게 불쌍하게 보여 공짜로 타고 밥은 식당에서 얼쩡대다 치우는 일 도와주고
얻어먹었다.
그러다가 경주 밑 물금역에서 기차에서 미리 내려 도망가다 잡혀서 오전 내내 물금역 역사 청소도 했다.
0. 고1 때 성 백인 선생님이 나에게 도움 주실라고 모두가 무서워했든 태 호남 체육선생
아들 국교 5학년생 공부 알바로 추천하여 6개월간 미아리 삼거리 시장 소재 선생님 댁을 드나들었다.
태 선생님이 댁에서는 엄청 자상하셨다.
성 선생님은 서울대 교수로 가셨는데 고교 때 편지 보내면 인생 가르침을 주시곤
0. 국내외 오 가며 한 직장에서 여러가지의 복잡한 대외 활동을 해서, 간혹 나 자신의 정체성이 헷갈리는 때도 있었다.
도둑놈이 오랜 버릇 못 버린다고.
걷다가 내 본명을
부르면 서너 발자국 더 가서 돌아봤다.
커피 샾에서 만나자면, 미리 맨 구석 자리에 앉아서 입구를 보고. 여차하면 튀어야 하니까
전화 올 때 내가 쓰던 가명을 부르며 안부 전하면 일단 끊고 어디서 써먹던 성함인가 기억해 낸 후
대화를 하는 세월이 오래 지속되었었다.
국내 업무는 근처도 안 가 봐서. 정치, 경제, 사회에 밝다든지 하는 것과는 한참 먼
밖의 하는 일이 말 하기 힘든 일이다 보니 가급적 일반 모임을 피하게 되었다.
어떻게 살아왔던 누구에게나 잊고 싶은 일. 진실로 후회하는 사건. 자랑스러웠던 일. 부끄럽고 추했던 비밀 이런 게 다 있다.
*4시 10분* 속의 박00은 한국 도착 후 20여 년간 정부 기구에서 근무하고 은퇴해서 잘 지내고 있다.
쏘냐는 한국 딱 한번 왔다 갔다.
또 나도 모르게 출판된 다른 하나는 주석궁 의사를 국내 데려온 사건이다.
그는 한 시간의 오차나 간단한 말도 정확히 기록으로 남기어 대단한 기억력의 소유자이구나 하며 놀랬다.
이 과정에서 중국 공안에 구속되었지만 한 달 걸려 다시 델고 왔다.
이 책은 내가 해외에 근무 시 본인이 저술 출간되었고 본사에 얘기하여 내 신분 보호 상 재출판 금지 요청했었다
그는 유명 인사가 되었으나 한 번도 연락 안 했다.
그리고 해외 출장 지역은 한국과 통신이 안되는
지역이라 한국 공항서 생명 보험 크게 들고 출국했다.
못 돌아오면 기록상 내 이름으로 나간 적도 없기에 공식적으로 내 가족 보상과 보호가 불가능했고 사건 터지면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상식이다.
아직도 나는 아내에게 그 생명 보험 통보받고 심정이 어떠했냐고 물어보질 못했다..
⁂ 아내에게 ..
남들 같은 일상생활 기대하지 말라 했고 소식 끊어지면 본부에서 연락 올 거다. 같은 황당한 소리를 새댁한테 했으니 ..
아내는 * 별 미친놈한테 잘 못 걸렸구나* 했을거다.
그리고 실제로 모든 경제생활. 자녀 교육은 아내가 등짐 지듯 도맡아서 고생바가지로 시켰다.
4년 전 돌아가신 어머님은 첫 직장은 아셨지만
수시로 바뀌는 직업 땜에 진짜인 줄 알고 걱정도 많이 하시고.
실업자 되나 하고, 점도 치러 다니시고 그랬다.
그래서 왜 좋은 직장을 자꾸 사표 내냐는 소릴 들었다.
나 훈아가 아.. 세상은 왜 그래? 했는데
실상 신문. 잡지. 영화에서 봐 온 몰상식. 이해하기 힘든 그런 사실들이 꽤 많았다.
나는 자진 사표 낸지 ... 2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도
그곳에서의 과업 수행을 자랑스럽다고 여기며 조직이 건강하게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맘이다.
느낀것은 한국 공무원과 국가 기구는 대폭 축소되어야 국민 생활과 기업이 잘 돌아가겠구나. 하는
성찰(省察)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공적 숫자가 불었다.
그냥 놀고먹는 애들만 늘어난다.
0. 이산가족 관계
전 국민의 20% 이상이 아직도 이산가족이다.
그런데 남북 상봉 쑈를 통해 만나는 순간부터
남녁 집안. 기업들의 정신적 갈등. 대북 송금으로 남쪽 분들은
심신이 피폐해진다.
헤어져 생사도 모른 체, 지나는 가족 간의 아픔과 갈망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인고(忍苦)와 죄책감의 시간이다.
세계는 힘의 강약 구조와 힘의 무자비함에 대해 선 모르는 학자.
정치인들이 다듬은 헌법상의 남북 국민은 남북 모두가 동일한 권리를 갖게 했다.
그래서 북의 자녀들이 남쪽 재산 소송한다면 불리할 수 밖에.
북한 출신은 물론 자동이고 조선족 들도 호적상 할아버지가 증명되면 주민증 금새 나온다.
전 세계 이런 인도주의 국가가 없을 거다.
북에서는 남녁 가족 중, 잘 살고 힘깨나 있는 가족을 골라서 상봉시켜야 이득이 된다.
재벌. 유명 인사. 정치인. 언론인. 종교인이 대상이다.
00 과학 기술대학은 주로 대형 교회 이산가족 목사. 신부들이 엄청, 갖다 바쳤고. 북한 내 초대소. 별장. 관광지 가구. 등
모든 게 한국의 이산가족 기업들의 제품이다.
0. 유명 레저그룹 회장은 북에 9살 때 두고 온 장남이 살아 있다고 하면서 중간 브로커와 북에 자금 뜯길 태세라
여러 곳에 부탁했는데 답이 없었다 한다.
당연히 그랬겠지.. 개인 사로 치부하고 신경 돌리기 힘드니까..
부탁받고 6개월 정도 진행후,
북한 측에게 그 장남 델구 나오라 하고 회장 모시고 갔다
그리고 미리 북경서 북 관계자들 만나 ~ “할머니 아들 몸 등에 화상이 있다더라고, 확인해보자 한다” ~ 하여
북 관계자들이 질겁했다.
내가 꾸민 거짓이었거든.
점검 실사 결과...
이미 오래전에 하늘로 간 아들을 시체 팔이 작전에 써먹은 거다.
그 회장은 * 죽은 거 확인했으니까 그간 날라간건 괜찮다. 한이 풀려 너무 고맙다*고
날 껴안고 우는데, 나도 눈물이 났다.
중간 과정은 복잡해서 생략.
0. 한국 유수의 제약회사들이 대부분 월남 기업이다.
이 중에 한 기업의 재북 가족 상봉은 대통령 재가받아 북경서 최초로 비공식 남북 가족 상봉시킨 적도 있다.
그런데 북의 장남과 남의 차남 간 배다른 형제이어서 아버님 돌아가시니 형제고 뭐고 빗장 걸어 잠그고는 끝이다.
그리고 아직도 제 3국 통해 가는 북의 이산가족 행 달러가 만만치 않을 거다.
0. 46회 선배 이산가족
보성이 낳은 걸출한 언론인으로 조선일보 유00 주필이 계셨다.
지금은 고문이시고.
하루는 부르셔서 " 부친 생사를 알아야 제사. 추모를 할 텐데 알아봐 달라" 하여
마침 김 00대에서 교수하다 이리로 오신 분이 계셔서 유 선배님 사항 문의했더니 부친을 잘 아는 분이라한다.
약속 잡고 두 분끼리만 만나게 해 드렸다.
:부친은 혜화동에서 후퇴하는 인민군에게 납북되시고 김00 대에서 재직하시다가 작고하셨다 한다.
이후 선배 모친 모시고 맘 편히 기일을 추모하셨다고 한다.
유00 선배와 같이 1번지 ( 혜화동 1번지가 보성) 클럽을 만들어 광화문 일대 공무원. 언론. 기업인 보성 모임 총무를 오래 했다.
0. 대북 쌀 및 카페트 지원
북한에 대홍수와 기근이 나서 쌀과 모포가 대량 필요하였다.
북과 작업을 하여 쌀과 모피를 수송키로 합의했다.
그 얼마 전 남쪽 홍수 시에는 북의 쌀을 받았다.
그즈음 상호 유화 정책으로 왕래가 잦았고 모든 건 언론에 난 그대로다
목포에 내려가서 당시 00통운을 독려하며 쌀을 실었다.
실제 정부 비축미가 넘쳐나서 창고 보관료가 많이 나갔다.
쌀을 좍 트럭에 싣고 배로 운반했다.
운반선이 삼선 해운인데 50회 선배가 회장이셨다.
그리고 모포는 한일합섬의 모포를 실어 보냈는데 이 북쪽 애들이 남조선 로고가 있다고 다 불태웠다 한다.
얘들이 빼돌려 중국에 팔아먹었나 하고 태운 증거를 대 봐라 했더니, 남포항에서 불태우는 사진을 보여준다.
쌀도 북경 China world 호텔에서 북측 만나서 잘 접수했냐고 문의하니까 왜 반쪽 쌀 톨을 보냈냐 한다.
그래서 그거 우리가 ‘모자라는 쌀을 비싼 돈 주고 사온 것.’ 이다 하고 그러면 앞으로 안 보낸다고 했더니 괜찮다 한다.
정상 과정은 담당 실무 부처가 하고 난 반응만 확인한 거다.
북측은 삼선 해운 배를 타고 북에 가서 전달한 선원을 간첩으로 몰아서 감금했다.
일주일 후 풀려나긴 했다
0. 탈북자
북에 30년 이상 살다 온 분들은 여기하곤 뇌 구조가 상당히 다르다.
언급한 김00 씨를 북중 국경서 오랜 기간 고생 끝에 데려와서 한국일보 기자 출신 아버지랑 살게 했는데
한 달도 안되 서로 웬수가 되더라..
북에서 우리 가족 개념은 사라진지가 오래다..
배급과 지정 직업으로 살아오고 당이 우선인 김씨 부족국가에서 지내 온 사람들과
능력껏 각기 자유롭게 살아온 우리의 가족 개념과는 합치되기 힘들다.
0. 김정일 인척 술자리.
북 대사관은 북측 인사가 출장오면 나에게 연락하여 술자리를 마련했다.
한번은 서열 10위 내의 김정일 인척이 와서 내 아내와 같이 자리를 했는데 4명이 위스키 두 병을 마셨다.
도중에 내가 장난삼아" 당신 신분이 정확히 뭐냐? 명함도 안주고.." 했더니 안색이 변하고 보위부 대표가 "
거, 형님 무슨 개소릴 하시요?" 한다.
그래서" 한국에선 명함 없으면 실업자로 본다" 했더니
인척이 크게 웃으면서 " 알갔소.. 거 골( 머리)이 쎄구만, 낼 다시 봅세" 한다.
담날 다시 만나고 여러 대화를 했다..
북 고위층들은 노는 물이 다르다.
항가리 부대사는 북경에 부인과 아들하고 같이 왔고 매일 저녁 클럽 같은데 가서 놀다 나오곤했다.
강남 야타족 같이 생겼고 노는게 그랬다
하루는 조양공원이라는 제일 큰 공원을 지나가는데 아들이 "여기는 외할아버지 집 비슷하다" 하니까
부인이 급히 " 그런말 하면 안돼" 해서 .
아 ..김씨 집안이구나 했다.
*한국 역사상 6.25이후 북측과 오랜 기간 상호 흉금 없이 서로의 집과 사무실 방문하고
회식. 상호 긴밀한 내용 회담을 한 이런건 남북 간에 없던 일이었다.
당시 서로가 무척 유연했다.
기업들의 대북 경협이 큰 역활을 했다.
그런 모양새가 되어야 어려운 일들도 줄줄이 풀리는데, 어쩌다 일방적 관계가 되었나.
결과가 너무 안타깝다.
그때는 북한이 큰소리쳐도 내심 한국에 한참 꿀리고 있을 때다.
서로 묵계하에 트고 지내고 상호 대표성 인정하고 북경에서 만큼은 폭력적인 짓은 않기로 했었다.
0. EXPO에 북한 유치 활동
내가 EXPO 위원으로 파견 되었다.
나는 북한도 EXPO에 데려오면 좋겠다 싶어서 본부 건의하여 승인되었고 ..
이때 한‧러 간 북방 외교가 시작되어 분위기도 괜찮았다.
오명 EXPO 위원장과 상의하여 중국에서 북한 부총리급과의 회담을 추진했다.
주중 북한 대사관에 연락했고 1주후 북경서 회담하자는 답이 왔다.
오 위원장. 구00비서 (나중에 차관승진), 나 셋이 천진 경유 북경 China World 호텔로 갔다.
북한은 최00 (부총리급) 대사관 보위부가 참석.
오 위원장은 해박한 정보 통신지식과 EXPO 참가시 유익한 점을 명쾌히 설명 했다.
그때 북한 대표단이 한국인 설명을 받아 적는 걸 처음 보았다.
그만큼 오 위원장은 유연하고 그림을 크게 보는 분이셨다.
그리고 북 참가단이 오가는 비용. 항공기 (아시아나) 제공 등 다 합의했고
백두산 천지 물과 한라산 백록담 물을 합쳐 합수제를 하기로 했다.
준비 다 마치고 개막 일주 전쯤 이순실 간첩 사건이 터졌다.
북한의 EXPO 참가는 날라갔다.
한달 뒤 신문에 EXPO 위원 5명이 수뢰죄로 모두 구속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나 포함 위원이 6명이었는데
세상은 요지경이다.
0. 북한 산악연맹
김상현 국회 부의장이 저녁 하자 해서 만났다.
" 내가 아시아 산악연맹 회장인데.. 중국. 북한도 연맹에 가입토록 해봐라" 였다.
" 중국은 제가 장백발 IOC 위원( 북경 부시장)을 잘 아니까 거길 통해서 해보겠음. 북한은
주중 대표부 통해 알아보겠음" 했다.
*장 위원은 진로가 투자한 북경 회진루의 명의상
공동 주주였다.
* 북경시+ 진로 인터내셔날 50% 씩 투자.
* 이후 연맹 의도 대로 잘 진행되었다.
김 부의장님이 개인적으로 양복 티켙 1매 주시어 좋은 걸로 해 입었다.
0. 북의 고위층들은 유아 때 부터 평생 교육을 받아와서 주체사상. 맑스‧레닌. 변증법. 사회주의. 자본, 식민주의. 등
이런데 정말 말이 안 되는 게 많지만, 어쨌든 무지 엄청난 틀에 박힌 지식을 갖고 대화를 하면 엔 폭포수 를 쏟아낸다.
북의 상대들은 나와 만나면 상호 정치 대화는 아예 피하고 국제정세. 문학. 예술. 상호협력 이런걸 주고 받았다.
한국에서는 북한에 대해 깊게 배우게 해주는 곳이나 자료는 특정 부서, 극동대 북한학과 정도 등으로 미약했다.
이 상황에서 북의 논리를 깨는 건 아주 간단하다.
애 크면 해외 유학 보낼 수 있냐?
집은 더 큰 데로 가야지?
가족여행 어디로 가냐?
답이 없다.
수많은 태영호 같은 엘리트가 있는 북한이지만 결국은 자녀들 장래 때문에 한국에 온 거다.
0.
북을 잘 알고 직접 상대해보면 별거 아니다.
지레 겁먹거나 약점 잡히면 늘 상 무언가 제공하면서 평화 구걸하게 된다.
동네 양아치들은 아는 친구 잡아서 시계. 돈을 뺏아 간다.
쎄게 붙거나 대들면 담엔 절대 못 그런다.
언제 부터인가 북녁한테 잽혔다.
남.북 간에는 미국이 동맹인 이상 절대 전쟁이 날 수 없다.
붙으면 남북 양측이 거의 전멸 된다는 걸 안다.
근데 미군 철수 외친다..
미국 철수는 한 달 내에 한국을 제3의 벹남. 아프간으로 만들 수 있다.
군사. 정치가 아닌 핀셑 금융 정책으로.
.
우리가 급속 발전한 것은, 전후 미국이 키운 일본으로부터의 기술 습득과 미국이 동북아 균형과 안보를 위해 한국을 지원하고
특출난 지도자의 리더슆과 잘 살아보자는 국민 정신과 노력의 결과다 .
0. 불가리아 입국
1990년대 전후 한국에서 대 공산권 외교 작전할 때 관건(關鍵)은 접근 방법이다.
참고로 러시아와 수교는 1990.7월이다.
마침 한국 최초로 세계민속 음악제를 추진 중이었는데.
세계 축제라는 말이 될라면..
공산권 예술가가 필요하다. 근데 방법이 없다.
하여 내가 불가리아에 갈 일이 있어서 가는 김에 동구권 연주가 등을 델구 오겠다하고 신분을 한의사로 하여
유명 한의사 한 분을 대동하여 출발.
파리 도착하여 불가리아 영사관에 비자 신청하면서 us$100을 넣었더니 다음 날 허가났다.
이틀 후 소피아 공항 도착하고 입국 심사하는데. 경찰이 오더니 두 사람 따라오라 손짓을 한다.
* 한국인이 어케 입국했냐?*
* 정식 비자 수속해서 왔다.
*왜 왔냐*
* 관광 왔다*
몇 마디 하고선 기다리라 한다.
두 시간 정도 흘렀나.
차에 태우더니 쏘피아 <Novotel> 에 내려주고 *여기서 묵고 허가 하에 외출하라*
체류 기간인 1주가 낼 모레인데, 로비에는 북한 애들이 매일 와서 진 치고
호텔에서는 내가 부탁한 파리행 항공권이 없다 하고.
그래서 노보텔 지배인(프랑스인)에게 찾아갔다.
* 북한 애들이 날 잡아가려는 것 같다. 항공권 구할 수 있냐* 하니 그건 이미 불가하다 한다.
몇 가지 방안 문의 중에 그리스행 오리엔탈 기차는 어떨까 했더니. ..*
표는 사줄 수 있다. 단 무사 한거는 책임 못 진다* 한다.
방으로 와서 한의 박사에게 자초지종 설명 후 * 만일
잘 못 되어도 당신은 풀려날 수 있으니 한국 가서 두루 상황 설명해 주시요* 했더니
*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이 왔으면 같이 가든지 말든지 해야지* 하여 정말 감격 했다..
러시아. 동구권들은 당시 탑승 시에 검사를 안 하고, 국경서 양국 공동 검사를 한다.
둘이 기차에 오르고 국경선 공동 검사가 다가와서 다시 마법의 $100 을 두 장 준비하여 여권을 각기 내면서
둘에게 $100을 주었다.
실제로 동구권에서 $100은 구경도 못해 본 애들이 99%였다.
*이 한의 박사님은 노량진 수동 한의원장이셨던 <선우 기> 선생님.
이분을 도와서 5개국이 최초 회원으로 세계 동양 의학회를 경주에서 창립하고 정부 지원받아
미국 서부에 미 최초의 한의대를 설립 했다
..
0. 쿠엔‧카오 키 수상 관련 일화.
홍콩 근무 시 좀 알고 지낸 전 월남 수상 <쿠엔 카오 키>가 은밀한 부탁이 있다고 하여 저녁 식사를 했다.
키는 월남에선 최대 반역자이며 실거주지인 미국에선 베트남 깽단 실제 오야였다.
그는 공군 사령관 출신으로 월남 폭망 시에 항공기에 달러. 보석들을 싣고 직접 조종 탈출하였다.
4번째 부인과 함께.
사연은
* Mr. Song이 벹남 정보기관장과 친하니까 만나서 내가 베트남에 정착 가능한 방안이 있는지 타진해 달라* 였다.
그러면서 $5억을 헌납 하겠다 한다.
* 그럼 네가 네 연줄로 얘기해라 * 했더니. 말할 놈이 없단다. 뭐 해줄 놈 없다더니 할 놈도 없네.
1주 후 키 부인. 비서와 함께, 같이 하노이로 갔다.
당시 정보 책임자는 월남 패망 당시 한국 대사관의 이 00 공사를 심문한 사람으로 김일성 대학을 나와 한국말 잘하고
주한 월남 공사를 했다. 아들은 서울대 나와서 현재 벹남 외교부 고위직이다.
정보기관장 만나 얘기했더니 보안사령관하고 의논 후 알려주겠다 한다.
우리 일행은 헤어져 별도로 저녁 먹고 호텔로 갔고..
담날 오후 보안 사령관. 정보기관장이 호텔로 왔다.
긴 말 않고 * 대통령이 ..역적은 밖에서 죽어야 한다* 라는 통보였다.
그런 조치가 당연한건데도. 벹남이 대단하게 생각되었다.
0. 용정 도로 및 일송정 정비
한중간 수교 후 엄청난 한국 관광객들이 중국 여행을 했다.
특히 초기엔 조 중 국경의 연변 용정, 백두산 등을 선호했다.
당시 용정의 일송정 정자는 조선족 자치주 주장이 김일성대를 나온 놈인데 웬일인지 용정 우물을 잠그고 정자를 폭파했었다.
그래서 용정 시장과 정자 복원 도로포장 방안을 강구하여 용정 ~ 거제의 자매결연을 실현키로 했다.
왜냐면 당시 대통령 고향이 거제라 성사되면 복원 자금이 용이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거제 시장 조00에게 대통령 직접 만나 보고하라 했더니 정말 그렇게 하였다.
결국 자금은 거제 소재 대우 조선에서 당시 10억 원이 출자되어 우물 정비. 용정 ~ 일송정간 도로 확대, 정자 복원이 되었다.
용정시는 답례로 나에게 용정시 경제 고문증 수여
* 사진.
0. 한중 최초 합작회사.
1980년 중반 한중 수교 전에 마카오 총독( 폴튜갈인. 나중 폴튜갈 대통령됨)과 친분있는 재미교포를 통해
한중 무역 가능성 타진하고
총독은 마카오 재벌이면서 중.북에 영향력있는 마 만기를 소개.
당시 삼미회장 김현철에게 중국산 철광석. 석탄 수입할 수 있냐고 타진한 바 가능하다 하여.
마카오 총독을 국내 초대하였다.
당시 중국 석탄. 철광석 등이 우회 수입 중이었고 정부도 직교역을 찾고 있을 때였다.
총독이 통보 없이 입국하니 청와대와 외무부가 난리법석 이다.
마카오 통치자인데 당연히 외교적 절차가 있었어야 한다면서 김 회장을 소환했다.
김 회장은 자초지종 설명하고 비공식 방문임을 강조.
나도 나서서 잘 해결 후 총독은 총리와 외무 장관을 만나고 출국.
6개월 후 최초의 한.중 합작 회사인 삼화 (삼미+ 중화) 가 탄생했다.
삼미 김현철 회장은 그룹 회장 노릇하는 과정에 너무 시달림이 많아 정말 하기 싫다 하면서 식당이나 하겠다고 했는데
정말로 동생에게 회사 넘기고 미국 가서 식당을 했고 이후 선교사로 활동했다.
0. 삼강평원 사업.
한국이 낳은 천재란 칭송 받던 모 인사가 장관도 지낸 후 만주 삼강평원을 개발하고 있다는 기사가 자주 났었다.
내 상식으로는 10억 평이나 되는 땅이 세 곳의 강에 둘러 있는데 개발이 아직 안 된 거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다. 하고 나름 조사를 했다.
많은 기업들이 투자하고 정부도 나서서 지원을 했다.
미래 먹거리를 생산할 기지라 해서 현지 답사하여 확실히 검토 해 보겠다고 하여 승인이 났다.
그때는 홍콩 →북경 →할빈 → 야부르(자동차) →현장인 후진까지 가는데 5일 걸렸다.
이곳은 일제 만주 731부대가 생체 실험을 한 곳이다.
미리 후진 시장에게 연락하여 도착 당일 시 관계자들과 만찬하는 가운데 조선족 노인 한 분이 내게 눈신호를 주어서
화장실에 간다하고 나와서 만났다.
노인이 자기 소개를 하는데 만주 시절부터 농지 개발 해온 기술자라 한다.
그래서 문의했다.
* 삼강 평원 개발이 가능하냐?" 했더니
" 불가능하다. 사방 200km 내에 산이 없어서 수로에 쓸 돌이 없고 기차나 트럭이 들어올 운수 도로도 없다.
여름엔 늪지대가 되고 나무가 자랄 수 없어 방풍림도 불가하다. 겨울엔 도끼도 땅을 못 찍는다"
결론이 쉽게 났다.
만찬 후 시장에겐 한국에 가서 잘 설명드리고 담에 다시 온다고 둘러댔다.
노인에게는 가져간 외화 바꿈 돈을 드렸더니 " 이거 돈이냐?" 한다.
할빈에 가면, 사용이 가능하다 했더니 고맙다 한다.
3일 후 북경에서 삼강평원 개발 당사자인 000 회장을 만나 회식하며 물었다
" 10억 평 악토에 방풍림은 어떻게 만들고 관개 수로는 어찌하며 트랙터가 늪을 다닐 수 있게 할 방안을 말씀해 주시오." 했는데,
답은 못 하고 한민족의 고토 회복을 위해서 등등 연설을 한다.
옆엔 건국대 농대 학장도 계셨다.
이분은 " 장관. 00 부장도 승인한 사업이다 " 하여.
나중 "대통령 되면 하시고 제가 모시겠습니다." 했다.
그 후 여러 가지 지원도 미약해졌지만 어쨌든 삼강평원은 사라졌다.
0. 요플레의 한국 생산
80년대 중반.
러시아를 자주 가면서 파리와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했었다.
프랑스 여의사가 점심 후 요플레를 사주면서 먹어보란다.
아주 맛이 좋았다.
그래서 당장 이 공장엘 가자 했더니 공장은 지방에 있다 해서 사무실로 갔다.
국제 이사가 맞이해 주었다.
나에게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 " 한국에 우유가 나냐? 과일은 뭐가 나냐?"
우유도 나고 과일은 여러 가지 나온다 했다.
그러면서 요플레 신 개척개발 국가에는 시설을 공짜로 해준다고 한다.
우유 생산회사 이름이 뭐냐? 해서 ㅇㅇㅇ를 대 주었다.
귀국 시 000 기획실에 근무하는 전직 내 상관이 있어서 Broucher를 3부를 가져다주었다.
4년 후 자카르타 근무 마치고 북한산 등산 후 하산길에 공짜로 시식해보라면서 주는데..
아..요쁠레였다.
이게 뭔 일인가 해서 그 선배한테 연락했더니 롯데로 옮겼다.
자기도 그게 생산된지 몰랐다 한다.
나중 00 그룹 사장과 업무상 점심시간에 요쁠레 생산 전 과정을 얘기했더니 놀란다.
자기들도 이게 어디서 시작 된지, 모르고 프랑스 요플레 본사 이사가 직접 왔더란다.
나나 선배는 요쁠레 한 상자도 받아보지 못했다.
0. 카자크 고려 무용학교.
80년대 말기 구 러시아 시절 카자크를 갔다.
가기는 잘 갔는데 호텔서 경찰한테 불려가 소위 초대소에 갇혔다.
"여기 고려인들이 많아서 사업하러 왔다"
" 누굴 만날거냐?"
" 찾아봐야 하니 당신이 안내해주면 100불 주겠다."
OK.
카자크인들은 사실 구 러시아에 반감이 강했다.
80년대 독립운동 때 무자비한 탄압을 받았고.
러시아의 핵 실험이 카자크 평원에서 실시되었기에 백혈병. 암 등 환자가 속출.
군은 대령 이상은 진급 안되고 별부터는 러시아 인이다.
100$ 받으니 나를 환대 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자기들에게 나란 존재가 해가 될 게 없기 때문이다.
그의 소개로 북의 망명한 장군. 성공한 고려인인 카자크 국회의원. 조선 무용 학교장을 만났다.
나 혼자 만나면 나와 만난 사람들은 처벌받는다.
외국인 접촉 금지이거든.
이때 감탄한 것은 롯데가 미리 들어 왔다는 거다.
일본 롯데였지만.
귀국 후 이대 한국무용 교수 김매자 교수를 만나 카자크 고려 무용학교 선생을 초청해 달라 했고.
김 교수가 흔쾌히 수락하여 실행에 옮겼다.
김 교수는 술도 잘 마시고 보신탕을 즐겼다.
운동량이 많이 요구되는 무용이니까.
김 교수 지원으로 카자크 조선 무용학교가 커지고 유학생들도 왔다.
김 교수는 이후 중국 조선 무용학교도 지원하여 교류가 활발했다.
북경 근무 시 김 교수와 함께 이대 무용과 30명이 단체로 왔는데 몽땅 진로 식당에 초대하고 문 닫아걸고,
밤새 놀이판 만들어 주었다.
김 교수는 공산권 교류에 큰 역할을 했다.
통이 매우 큰 여자였는데 입학 문제 등의 웃기는 죄목으로 구속되어 인덕원 구치소에 면회 갔었다.
인덕원 구치소 면회는 3번 갔는데, 이인제. 유승윤 건대 이사장. 김 교수 구속되었을 때다.
0 중국 전력 사장과의 우정
.
중국 동북전력은 길림. 흑룡강. 요녕. 내몽고. 북한 북쪽 발전을 총괄하는 거대 조직이다.
동북전력 동사장[董事长:회장]이 몽고 출신의 *판 사장인데 지금은 중국 신에너지 총회장이다.
북의 전력 수급 파악과 한국산 전선 수출차 판 사장과 대련에서 만남을 약속했다.
그 시점에 중북 국경 단동 시에서 잠시 일을 볼 때였다.
약속한 날 엄청난 비가 내려 철로가 끊기어 대련을 갈 수가 없었다.
첫 만남이라 만난을 무릅쓰고 가야만 했다.
새벽에 현지 지인이 수소문하여 택시 하나 불러왔다.
기사는 대련 가자 하니 텍도 없는 소리라고 거절한다.
사정 설명하고 월급의 3배를 주겠다 제안했다.
그러니까 타라 하면서 도중에 못 가도 할 수 없다는 다짐을 몇 번 한다.
그리고 자기 집에 들러 마누라에게 설명하면서 미리 준 선금을 건넨다.
중국 남자들은 마누라한테 잘 못 보이면 먹고 잘 데가 없다.
아래위 세탁은 물론이고.
이 기사는 장거리를 많이 했다면서 이럴 때는 고지대 도로로 가야 한다면서, 비가 잦아들면 해안 도로로 간다는 설명을 했다.
난 좌우지간 가기만 하면 된다고 하고 도중 잠이 들었고 5시간 달려, 점심 먹고 다시 연료 넣고 출발.
가는 도중 비는 그치고 있었다.
약속은 저녁 6시.
아무리 빨리 가도 그 시간까지 가는 건 무리였다.
도착하니 저녁 8시를 넘었다.
기사가 먼저 들어가서 판* 사장이 왔다 갔는지 식당( 엄청나게 큰 중식당) 주임에게 물으니, 친구들과 있다고 한다.
기사가 ‘판’에게" 이런저런 스토리"를 설명하니 3명이 뛰어나왔다.
자기들은 기후상 내가 오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들끼리 식사 중이었다 한다.
판 은
"이 상황에 약속 지키려 목숨 걸고 왔냐?" 며 부등켜 안았다.
목숨 건 건 아닌데 만남은 소중했다.
그리고 나를 나이트클럽에 데려가 무대에 세워놓고 무슨 설명을 하여 기립 박수를 받았다.
이후 중국에서 나의 어려운 일을 많이 도와 주었다 .
중국에서 국가 에너지 기관의 위세는 검‧경을 뛰어넘는다.
" 네 힘이 어디까지 미치냐?" 하니, 전선이 가는 데까지 라고 한다.
판 덕에 당시 아주 잘생긴 대련 시장 ‘푸시라이‘도 가끔 만나고, 대련 TV에 한중경제 관련으로 같이 나왔었다.
시진핑과 겨루다가 가족 전체가 폭망은 했지만 사내로서 엄청난 매력이 있었다.
그가 지금 총서기라면 중국은 어떨까 가끔 떠올린다.
0. 미국으로 이동
오래 해온 일들이 한국서는 정치 역학상 할 수 없는 환경이 되어서 미국으로 갔고 이때 다시는 안 온다하고
일시불(一時拂) 퇴직금을 타서 연금이 없다.
절이 싫으면 머리 길러야지.
후배들이 직급별로 저녁 자리를 마련하고 왜 그만두는지, 이유를 대라며 인민재판 비슷한 형상이 되었지만
각기 자리 마감 때는 큰 행운의 열쇠를 배웅 선물로 주어 안 팔아먹고 아직 잘 보관한다.
미국서 가칭 (동북아 농업개발회사)에서 사업하다 고어가 대선에서 플로리다 부정선거 승복 선언 후
동북아 개발회사는 24시간 만에 해체되고 나는 동 티무르에 잠시 오가다가 2015년부터
인도네시아 정부 감리인증 기구의 한국 대표로 일을 해오고 있다.
내가 미국에 체류 시 서부 거주 57회들과 정말 즐겁게 지냈다.
종우. 털보. 용우 등과 온천지역 부부 동반 캠핑도 가고, 샌디아고에서 정용우 요트도 타보고.
한번은 LA에서 뉴욕 경유 이집트. 터키. 요르단을 가는 길인데 폭우로 LA 비행기가 3시간 출발 지연되고 뉴욕 도착했더니
연결 항공기가 출발해 버려서 밤 12시에 뉴욕 공항에서 오갈 데가 없었다.
LA 털보한테 임 익재 전번 알아서 전화했더니 새벽 1시에 득달같이 왔고, 나와 아내를 태우고 자기 집에 가서 재워 주고
다음 날 뉴욕 구경도 시켜 주었다.
졸업 후 35년 만의 전화 한 통에.....
만사 제 끼고 도와준 익재에게 늘 감사한다.
털보는 나와 아내 데리고, 겨울에 엄청 위험한 절벽인 Heaven's Island 와 Archers 등을 구경시켜 주었다.
수년 전 뉴욕 들렀을 때 뉴욕 동문들과 즐거운 저녁을 같이 했고...
뉴욕 곳곳을 휩쓰시고 다닌 종구 덕에 아내와 내가 선상 Lobster. 오래된 고성의 박물관,
이태리 마피아가 키운 듯한 째즈‧바도 갔었다.
옆으로 새는 얘기지만 내가 몸 담고 신세를 졌든 진로의 장진호 회장은 운영을 잘못한 것도 있지만, 유‧무형의 압력 속에서
결국 회사를 다 날리고 감옥 가시기 전에, 명의를 제3자 앞으로 이전 마쳔한 진로 부지. 기타 건물, 외국 자산을
사장과 친지들에게 명의신탁했다가 다 날렸다.
노태우 대통령이 동생에게 차명 위임했다가 거금 날렸듯이.
장 회장은 출옥 후 국내 생활. 벌금 등 감당을 못하고 나와 함께 태국. 벹남. 캄보디아. 중국으로 오랜 기간 도피 아닌
현실 도피 생활했고 때론 숙박비도 없었다.
결국 5년 전 북경에서 수면 중 심장마비로 객사하셨다.
나는 진로의 해외 사업으로 인해 검찰 법원에 3년간 불려 다니고 재판도 받고..
내 집에는 영문도 모르게 전임자( 해외 도피)의 일로, 5억, 6억 해서 두 차례 가압류 들어오고 아내는 기절 직전까지 갔었다.
난 국내 진로 본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체 본사 지시로 서류에 서명만 했던 해외 사업 투자들이었는데.
투자 자금들이 내가 대표를 하던 홍콩을 경유해서 갔기 때문에 엄청 곤욕을 치루었다.
오랜 기간 시달리다 무혐의로 나왔지만, 그룹사 사장들 세월이 쉬운 게 아니더라.
ㅡㅡㅡ
한국과는 규모나 활동 범위가 다른 중국. 러시아. 북한 등의 소위 잘나가는 분. 어둠의 분들과 지내기도 했지만
이들 목숨도 자기 것이 아니었다.
평 시민으로 행복한 가정 꾸리기도 힘든데, 소위 붕 뜬 맘으로 ’국가다 조직이다‘ 하고 다녀봐야 가족들 피곤하고
대부분 말로가 일반인 평균 수명에 못 미친다.
난 007 영화를 무지 혐오한다.
말짱 만화 같아서가 아니고 주인공 도와주던 여자는 꼭 죽는다.
탈레반이 만든 영화도 아닌데.
또 TV에 국내외 스파이 영화 속의 적이던, 아군이던 스파이가 잡힐 거 같으면 채널 돌린다.
수교전 겨울에 러시아를 동에서 서로 한 달간 횡단하면서 몇 번이고
심문도 받았던 기억. 중국 공안. 불가리아. 동반 탈주 등 그런 것들이 떠올라서이다.
빈곤과 자유 없는 불안한 눈동자만 마주하다가 파리에 도착하니 천국에 온 거 같았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디쯤 와있을까 생각해보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벹남 전 당시 최전선 퀴논 어촌과 농가. 캄보디아 학살 전시 현장. 아우슈비츠 수용소. 러시아 초대소...왜 이런 장면이 올라올까?
그리고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내가 카메라를 들이대니까 지나던 신부‧수녀님들이 얼굴을 가렸다.
이럴수가.. 하느님의 병사들이.
다른 나라 쳐들어가거나 정복 해 본 적 없는 나라는 양, 토끼처럼 국민들이 순하도록 길들여져있다
그러나 우린 4.19. 6.29 도 있었다.
슈퍼파워들은 자신들 이익이라면 작은 나라의 인권. 정의. 평화는 임시 사탕발림의 단어에 지나지 않는다.
판을 다시 짜면 되니까.
중. 러. 미가 그렇지 않나?
조폐공사. 은행에 맞서는 기업은 일주일 못 버틴다.
한국이 미국에 맞서면 오래 못 간다.
그리되면 우리가 가지 말라 해도 미국이 떠난다.
패싸움에는 쎈놈한테 잘 끼어 들어가야 살아남는다.
전 국민 지원금은 무기력
Indian Reservation이나 호주 원주민 마을로 만들게 된다 .
카불 탈출하려 항공기 바퀴에 매달렸다가 고공낙하로 돌아가신 분도 있던데..
매달릴 힘 있었으면 싸웠어야지..
0. 콤뮤니즘 봉 등반 허가
정 우섭이가 날 보자고 하여 만났다.
" 동국대(?) 산악반이 러시아 콤뮤니즘 봉 등반하려는데 우리나라에서 허가가 안 난다.
이걸 해결해주라" 하고 우섭이가 부탁 아닌 지시를 하여, 당시 문공부 담당 국장 만나서" 미동구권 접촉과 외교 지원 일환으로
체육 교류하려는데 러시아로의 출국 및 등반 허가가 필요하다." 고 하여 승인을 받았다.
사실 미수교국 교류. 외교관계 수립이 내 목록에도 들어가는 것이어서 이런 요청은 환영했었다. 이후 우섭이가 술을 자주 샀었다.
0. 현재 생활
인도네시아 를 한달에 한번 꼴로 다니다가 꽉 묶려있다.
인니 국영 감리/ 검사시험/ 인증발급/ 하는 정부기구 SUCOFINDO 의 한국 대표로 일한다.
어려워지는 조건으로부터 탈출 기업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중에
작년에 인니 기업과 K-POP INDONESIA 설립도 하여 현재는
코로나로 ON LINE만 교육 한다.
숨 돌리기 힘들 정도의 긴장된 생활은 이미 오래고, 평온 속에 섞이어 살아온 생활도 만만치 않았다.
위의 기술 내용들은 내 판단으로 공익(?)에 저촉 안 되는 것만 끄적되어 미안한 맘이다.
속초 승화 집에서 어떤 스토리를 얘기한 것처럼 탁 까 놓고는 안되니까 .
기업들의 요청에 따른 진행 과정도 피를 말리는 또 다른 싸움터였다.
특히 시베리아 제2 유전 인도네시아 동부 칼리만탄 유전 지분 매입. 매각 시에는 평균 2년이상
현장 답사와 몇 날 며칠 협의를 하는 등
눈에서조차 피가 터졌던 울트라 마라톤이었다.
세계 메이저들과 사생결단의 경쟁이 살벌했다.
이들과 돈이 개입되면 정의도 의리도 없고 등에 찍히는 칼보다 무서운 일들이 벌어진다.
와중에 수뢰 등에 얽혀 감옥을 가신 현지 지자체장. 정치인. 경영인들도 계시고.
아직 매일 새벽 두 시간 운동은 수십 년간 해오고, 교회 색소폰 합주반에 충실키 위해 하루 1시간 이상의 악기 연습도 한다.
이 지면을 빌어 동기들의 평온한 삶과 가족에 축복이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토막토막 스토리라 뭔 소린지 모를 수도 있는걸,
이리저리 돌려서 그나마 몇 개 이런 세계도 있다 하고 내놓은 걸 이해 바라며.
중간중간 내 의견이 꼭 옳지는 않겠지만 나라가 어려울수록 힘 합치자고 하는 거니까
봐 주시길.
아 참. 내가 군에서 잠시 좋게 말해 미허가 외출, 병영 불법 탈출로 서울에 이틀간 몰래 왔다가
청량리역 헌병대에 잡혔는데 * 어 너 시한이구나* 하는 헌병 상병 덕에 감방 안 가고 무사히 귀대. 진정 고맙다.
57회 최 상병.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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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반갑네. 57 ★★★ 칼럼을 읽으면서...
일흔 줄을 넘긴 우리 57회 친구들의 인생 여정을 읽으면서 지나온 과거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펼쳐 놓았을 뿐인데 하나같이 감동적인 내용의 전달이다.
누구 하나 장편으로 성공담을 자랑하지 않고도, 그저 토막토막 추억을 끄집어내어 엮어냈지만
국내외 지구촌 곳곳에서 각기 열정을 다하여, 때로는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심지어는
목숨을 무릅쓰고 극한 상황에 내몰리면서까지의 분투는 이미 흥미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심을 만들어낸다.
현재까지 네 명의 친구가 옛이야기와 현재 또 앞으로 꿈을 솔직하게 밝혀 주고 서로가
톱니바퀴가 되어 15회차를 굴려준 것에 대하여 고마울 따름이다.
나는 이제까지 소주잔이나 건네면서 정(情)을 주고받으며 잘 안다고 했던 친구들의 眞面目을 보면서
이들, 자랑스러운 學兄들 덕택에 내가 있음을 느끼면서 고마움에 고개가 수그러진다.
나의 버킷 리스트는 친구들의 행동에서 새롭게 차곡차곡 작성되며,
미미할지라도 약간 위선적일지는 몰라도, 어설픈 변신과 함께 지금 당장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