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고립 (목회자에게도 친구가 필요합니다) 글쓴이: 박 종진 목사
예전에 전도사 시절에 교회에서 하루 바닷가로 야유회를 간적이 있었습니다.
야유회가 끝날무렵에 샤워를 하고 나오는데 부목사님이 저를 황급하게 막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마침 윗옷을 제대로 잘 입지 않고 막 나오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목사님은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성도들에게 사역하는 전도사가 윗옷도 제대로 안입고 메리야스를 입고 있고 있는 상태가 사역자의 영성에 큰 흠집이라고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목회자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혹시나 성도들이 목회자에 대한 존경이나 신비함이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보았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정반대의 목사님이 계십니다. 청년 목회로 유명하신 분인데
교회 홈피나 글에 자신의 근황이나 사진을 자세히 올려 놓습니다. 이유인즉 목회자의 생활이 투명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투명한것은 좋은데 가끔은 민망한 사진을 올려 놓는 예도 있는것 같습니다. 어떤 것이 정답이고 성경적이다 말하기는 곤란한 것 같습니다.
너무 자신을 감추는것, 너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러내려는 것, 나는 어느쪽에 가까울까요, 자신을 감추는 것도 비겁하고 외식적인 흐름에 빠질수 있고,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기에는 부정적이고 연약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까하는 두려움이 존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의 아들인 옥성호 형제가 목회자의 고립이라는 컬럼을 쓴적 있습니다.
언젠가 분당 우리교회의 이찬수 목사님이 설교에서 그러더군요.
“나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내 곁에 오지 마세요. 나를 자세히 알게 되면 다칩니다. 당신도 다치고 나도 다칩니다. 그러니 그냥 멀리서 보세요. 나랑 친해지려고 하지 마세요. 괜히 나랑 친해졌다가 내게 실망하고 몇 가정이 이미 교회를 떠나갔습니다.”
뭐, 물론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오죽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높은 기준 내지 나름의 선입관을 가지고 접근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면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하지만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닙니까? 목사를 대단히 신령한 사람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들이 부담스러운 목사나 둘 다 말입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착각에서 벗어나면 서로가 더 자유로울 수 있을 텐데요.
흔히들 목사를 외로운 직업이라고 하는데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스스로 자신을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친구 중에는 목사가 된 애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사가 된 친구들 중 한 명을 약 10년 만에 만났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보고 그러더군요.
“어, 성호 형제 잘 지내고 있어? 자네 요즘 여러 가지로 분주하다면서...”
친구 사이에, ‘형제’니 ‘자네’니...이게 어디 쓸 단어들입니까? 그나마 존대말을 안 써서 다행이지요. 더 웃기는 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 같이 목사가 된 경우 아예 서로를 부를 때 “무슨 무슨 목사님”이라고 부르면서 피차간 존댓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공석이라면 이해가 가지만 사석에서조차도 말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심지어는 부모님들까지도 아들을 “무슨 무슨 목사님”이라고 부르면 존댓말을 쓰기도 합니다. 심각한 상황이지요.....
엄마에게 아들은 ‘성호’일 뿐입니다. 옥성호가 교황이 되어도 엄마와 아빠에게 나는 ‘성호’일 뿐입니다.
(물론 모든 목회자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이 목사가 되었다고 스스로 관계에 있어서 장막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인간은 다 친구가 필요합니다. 친구는 우리로 하여금 사회가 만들어준 직책을 벗어 버리고 ‘나’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합니다.
*사모님들도 사적인 자리에서 목사님을 부를때에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 물론 공적인 자리에서는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겠지요. 그러나 개인적인 자리인 가정이나 부부관계 그리고 사적인 자리에서조차도 그런 공적인 호칭을 부르는 것은 친밀한 관계나 서로에게 진솔하게 다가갈수 있는 여지를 차단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서로의 고립이나 외식적인 모습을 가지고 서로를 대할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목사이기 전에 먼저 부부 라는 것을 아는 것이 더 필요할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로 만남을 허락하셨기에 여보라든지 당신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목회자는 참으로 고독하고 외로운 자리인데 스스로를 자꾸 그렇게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생각해 보아야 할것입니다."
목회자는 스스로의 경건성과 영성을 이렇게 포장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바울의 말처럼 모든 부분에서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조심해야 되고 오해를 살만한 행동은 자제를 해야할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 지나쳐서 자칫 외식주의나 율법주의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강대상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회자가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은 어쩌면 자신의 목회에 나쁜 영향력을 미치거나 아니면, 존중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 자신의 연약함이나 부족함을 같이 나눌수 있다는 것은 사역자에게는 행복한 일일것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용기와 관용과 이해를 넘어선 성도들의 신뢰가 동반되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인간은 어쩔수 없이 상한 갈대와 꺼져 가은 심지와 같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더 깊이 와닿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실성이나 순전함보다는 형식주의가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모습에 있는 외식주의, 새벽예배에 목회자는 무조건 성도들보다 늦게 까지 있어야 한다. 기도를 하지 않는데도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경우, 평신도가 목회자보다 기도를 많이 하면 목회자의 인격과 영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닌데 ,, 바리새인의 외식주의 영성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전의 신학생들은 모두다 양복을 입고 신학교를 다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히려 요즈음은 너무나 자유분방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이전의 목회자의 본이 되기 위한 노력은 도전이 되는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쳐서 사역자가 자신을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것도 부정할수는 없을 것입니다.
목회자의 경건성과 영성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내야 하는가?
일관된 삶을 통해서 나타나는 내면의 진솔하고 정직한 삶과 인격, 투명한 삶.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어느정도 신비감이 있는 존재일것입니다.. 목회자라는 직분은 모든 사람들에게, 불신자들도 궁금증을 갖고 있는 신비한 사역자들입니다..
목회자와 성도와의 어느정도 거리를 유지하는것,
목회자가 자신의 모든 것을 해체하듯이 보여줄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을 포장하거나 신비감을 더욱 조장해서 자신을 고립시키거나 소외시키는 일은 없어야 할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의 몫이기도 하지만 성도들도 몫이기도 합니다.
목회자를 이해하고, 목회자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해 줄수 있는 친구같은 동역자들이 필요한 것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