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4장 창조에 관하여
2항 하나님께서는 다른 모든 피조물을 만드신 후에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되 이성이 있는 죽지 않을(불멸) 영혼을 가지도록 창조하셨고 그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참된 거룩하심을 주셨고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셨으며 또 그것을 수행할 능력도 주셨다. 그러나 변할 수 있는 의지의 자유가 있도록 하셨기에 그들은 범죄 할 가능성 아래 있었다. 그들의 마음에 기록된 이 율법 외에도 그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계명을 받았다. 그들이 이것을 지키는 동안에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행복을 누렸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가졌었다.
1. 인간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몸은 흙으로 지으시고 그 안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몸과 영혼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람은 피조물 중에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존재입니다. 다른 짐승과 같이 흙으로 육을 입고 있지만 동시에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때 영적인 존재라는 말은 인격적인 존재라는 말입니다. 짐승은 육이 있으나 인격적이지 않고 천사나 마귀는 육이 없으나 인격적 존재입니다. 짐승은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지만 천사나 마귀는 처음부터 그 수가 정해져 있습니다. 인격적 존재의 번성이란? 그 자체가 특별한 것입니다. 사람은 짐승도 아니요 그렇다고 천사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 존재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방식이 있어 왔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영혼을 인정했으나 영혼과 육을 대립적 관계로 이해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지주의입니다. 영지주의는 초대교회 이단인데 이들은 육은 죄를 짓고 영은 순결한 것으로 여겨 육에서 탈피해서 영의 사람이 되는 걸 구원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생각은 그 시대의 이해가 반영된 것입니다. 육을 포함한 물질세계를 영적 세계에서 흘러나온 오물로, 육을 영혼의 감옥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육신을 경시하고 영적인 경험을 가장 추구해야 할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이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구원이란 육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을 그렇게 규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사람, 곧 전인이 인격적 존재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고귀한 존재입니다. 육신의 삶을 경시하고 영적인 경험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형상의 전인으로 삶을 중히 여겨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영과 육을 날카롭게 나누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가르침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현대는 영혼을 부정하고 사람을 단지 물질적 존재로 규정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이것은 과학과 의학의 발달로 인해 인간 정신이 육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영혼을 부인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본래 사람의 영혼과 육을 유기적인 일체로 보지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부정하면 사람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 훨씬 심각한 문제가 초래됩니다. 이런 관점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인해 영혼과 육이 분리되는 것은, 성경의 관점으로 보자면 절대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죽은 자의 부활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육신과 영혼으로 지으셨지 한면 만으로 짓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은 짐승도 천사도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을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 그리고 그 형상이 몸과 영혼 전체에 해당하는 전인적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영혼과 육신이 서로 유기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육신의 그릇된 삶은 반드시 영적인 면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고 영혼이 잘못되면 육신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다만, 여기에는 그 중요성이나 순서상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육신이나 마음이 다 중요하나 마음이 더 깊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상태를 살피고 보살피는 것은 마치 우리 삶의 뿌리를 좋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 뿌리를 내리고 살 때 가장 온전하고 적합한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점은 소수이기는 하지만 영혼을 영과 혼으로 분리해서 이해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 자체는 크게 문제 될 수 없지만 영과 혼을 날카롭게 분리해서 영은 하나님과 관계하며 혼은 육을 다스린다는 식의 관점은 이단적이므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를 삼분설이라 하는데 누가복음 10장 27절의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 히브리서 4장 12절 혼과 영을 쪼갠다는 말씀을 근거로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전혀 삼분설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이 영과 혼 육에 각각 대응하는 게 아닙니다. 로버트 레이먼드 신학자는 이것을 하나의 요점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강조하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태와 마가가 이 말씀을 조금씩 다르게 네 가지 혹은 다섯 가지로 표현하는데 그러면 누가는 오분설, 마태는 사분설, 마가는 육분설 지지자냐고 누가 그렇게 생각하겠느냐? 라고 반문했습니다. 무엇보다 성경이 영과 혼을 교차적으로 사용한다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이 두 단어는 여기저기 구분 없이 사용됩니다. 성경이 영혼이라고 달리 부르기에 그 점에 있어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해석에 있어 무리가 있고 심지어 이단사상으로 번져갈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의 혼과 영을 쪼갠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혼과 영을 쪼개어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 쪼개는 것은 둘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관통하여 쪼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숨은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낱낱이 다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마음의 은밀한 구석까지 쪼갤 수 있다는 겁니다. 말씀 앞에 숨을 수 있는 존재는 없습니다.
2. 하나님의 형상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가리켜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걸까요? 사람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악을 저지르는 것도 하나님의 형상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하나님과 같다고 여기면 잘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은 유사점을 말하는 것이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을 얼마나 닮았을까? 이 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면은 아주 가깝게 닮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을 수 있지만 모든 게 다 같은 수준으로 닮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고 만물의 주인이시며 왕이듯이 사람도 유사한 면을 지닙니다. 사람은 피조물의 왕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세상을 다스릴 왕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에 문화명령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 권한을 행사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분봉 왕입니다. 타락이란? 이 왕의 지위를 이용해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진정한 왕으로 반역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세상에 오시는 것이 곧 심판이요 종말입니다. 따라서 왕의 지위는 하나님의 형상이고 지금은 그 형상이 깨어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의로 세상을 다스려야 하지만 불의하고 악합니다. 세상을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자기 의로 다스립니다. 이것은 가정에서 또 큰 범주인 사회와 국가에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듯이 사람도 거룩합니다. 거룩함의 본질은 구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존재와도 구별되십니다. 심지어 아무리 순수한 천사라 해도 하나님과의 간격은 심연의 깊이를 지닙니다. 그처럼 사람은 짐승이나 악한 그 어떤 존재와도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타락한 후에 이 거룩함을 상실했습니다. 사람은 이성 없는 짐승같이 되려 합니다. 설령 이성이 어느 정도 작동한다 해도 이성도 심각하게 손상을 입어서 바르게 기능하지 못합니다. 양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이 감각되지 않는다거나 감각되어도 무시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람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동물과 다를 바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당신은 짐승이나 다를 바 없다는 말을 받아들일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은 이성과 양심과 도덕적 관념과 같은 인격적인 것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게 거룩함을 향해야 하지만 타락한 이후에 아무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으로 율법을 세우셨습니다. 그 점에서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말씀에서 법으로 세워졌습니다. 그처럼 사람도 말하며 법을 세웁니다. 그러나 타락한 후에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거짓된 법을 자기 마음에 심었습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심었던 하나님의 법은 깨어지고 손상을 입어 아예 기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 가지를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이라 말하며 이 세 가지가 하나님 형상의 본질입니다. 이것은 또한 사람이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의 직분을 받았다는 것과 일치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왕으로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직분을 받았고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으로만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은 카톨릭이 형상과 모양을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형상이란? 사람의 이성적 능력이며 모양이란? 특별한 미덕 즉 거룩함과 같은 덧붙여진 은사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이성은 타락하지 않았고 건재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전인의 타락으로 봅니다. 그러면 형상과 모양이란 다른 의미를 지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두 가지 다른 개념의 형상이 아니라 단지 중복일 뿐입니다.
질문
1. 나는 누구입니까?
2. 육신의 삶과 영적인 삶은 어떻게 구분됩니까? 성경이 말하는 구분과 영지주의가 말하는 구분에 어떤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까? 영지주의와 유사한 신앙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습니까?
3. 구원과 하나님의 형상은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