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영혼의 황폐 죽음이 다가왔을 때 우리의 뜻을 하느님의 뜻에 합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이 세상이란 늘 고통의 연속이 아닌가? 유혹이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고 항상 하느님과 멀어지는 위험을 안고 사는 세상이 아닌가? 다윗 임금도 하느님께 호소하였다. "저들이 쳐 놓은 덫에서, 나쁜 짓 하는 자들의 올가미에서 저를 지키소서."(시편 141, 9) 데레사 성녀도 하느님을 잃는 위험성에 대하여 늘 고민했는데 그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날때마다 기도했다. "아! 이제 하느님과 떨어지지 않고 한 시간이 지났구나. 이제 돌아오는 한 시간도 하느님과 떨어지는 일없이 지나게 해주소서." 같은 맥락에서 아빌라의 요한 성인도 말했다. "세상에는 하느님과 멀어지는 위험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많은 의인들은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보다 하느님의 은총이 떠나기 전에 죽음을 바랐다." 잘 생각해 보라. 참으로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으면서 훌륭한 죽음을 맞는 것보다 바람직하고 기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우리가 오래 살면 살수록 하느님의 은총을 잃어버릴 위험도 비례적으로 많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대가 만일 모든 죄를 고해하고 하느님의 은총 아래 있을 때 당장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을 떠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얼마나 순결한 상태로 맞는 죽음인가? 더 오래 삶으로써 혹 대죄에 빠지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비록 대죄에 빠지지는 않는다 해도 소죄를 전혀 안 짓고 살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왜 우리가 그다지도 목숨에 대한 애착을 가져야 하는가? 오래 살면 살수록 우리는 더 많은 죄를 짓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베르나르도 성인이 한 말이다. 아무리 훌륭한 일을 많이 해냈다 하더라도 한 가지의 작은 소죄가 하느님을 불쾌하게 한다. 하늘나라를 열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같이 있기를 열망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하느님을 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많은 성인들은 세상을 떠나기를 갈망했다. 그래야만 저 세상에 가서 사랑하는 하느님과 얼굴을 맞대면서 애인을 만나듯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한숨 지으며 말했다. "오, 하느님, 제가 죽어서 당신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었으면!" 또 바오로 사도도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필립 1, 23) 시편 저자도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1, 3)라고 읊지 않았던가? 어느 날 사냥꾼 한 사람이 숲 속에서 매우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남자의 노랫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 보니 그 노래의 주인공이 거기에 있는데, 자세히 보니 아주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손과 얼굴을 가진 나병환자였다. 사냥꾼이 말을 건넸다. "보아 하니 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 같은데, 어쩌면 그렇게도 행복하게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시오?" "아, 친애하는 친구여, 사실 당신 말대로 나는 나병 환자요. 그것도 말기가 다 되어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다오. 지금 내 몸은 무너지는 울타리에 지나지 않소. 그리고 이 울타리만이 나를 하느님과 떼어 놓는 유일한 장벽이오. 이 장벽이 무너지면 그때에는 내가 하느님께 가게 된다오.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된다는 것을 나는 아오. 그러기 때문에 이처럼 매일 목소리를 높여 가며 하느님께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를 노래로 아뢰고 있다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은총의 정도와 영광에 관하여 어떻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한마디 해야겠다.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다. 우리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각자에게 기대하는정도가 따로 있고 그 이상을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의 사랑이어야 되는 것이다. 이빌라의 요한 성인의 말을 빌려 보자. "모든 성인들은 더 많은 은총 속에 살기를 바라고 살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열망이 충족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코 실망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마음은 늘 고요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는 것보다 큰 은총은 자신의 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들은 자기가 받은 은총에 늘 만족하며 살았고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을 그분의 뜻으로 알고 살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