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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야 하는가
제3장 인간이 가야 할 길
1)인생길을 가는 우리
1 동기와 목적을 모르는 인생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인간은 왔다가 간다고 합니다. 자고이래로 아무리 훌륭한 성현군자도 왔다가 갔습니다. 이런 역사의 움직임. 이런 천륜의 움직임은 이 순간 나에게도 연속되고 있습니다. 왔다가 가야 할 우리 자신들입니다. 무슨 인연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인간은 이 땅에 와서 이 만상과 혹은 어떠한 이념적인 형태 속에서 뒤넘이치다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무엇을 위해 왔으며, 무슨 목적을 위하여 가는가? 이것을 수많은 철인(哲人)들, 혹은 수많은 종교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해결지으려 하였으나 해결짓지 못한 채, 인류역사는 그로 인한 서러움과 더불어 지금까지 움직여 나왔습니다. 또 지금도 계속 움직여 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긴장된 순간에 있는 우리입니다. 아니 가려야 아니 갈 수 없는 인생행로를 걷고 있는 우리임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부모의 혈통을 통하여 태어나고 보니 생각지도 않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또 살다가 보면 뇌쇠하여서 가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꽃다운 청춘시절이 지나가 버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고, 노쇠하는 것을 방비하고자 하지만 방비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면 안타깝고 생각하면 클클하고, 생각하면 무엇인지 모르게 사방을 휘저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어남을 여러분은 생애노정에서 몇 번이고 느꼈을 것입니다. 내가 왜 왔으며, 내가 왜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하느냐? 여러분 스스로 태어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태어나기는 했지만 무슨 동기로 태어났으며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지. 나를 낳게 한 동기와 목적을 알지 못하는 우리입니다. 나기는 났지만 내가 나고자 해서 난 것이 아니요. 살기는 살지만 내가 살고자 해서 사는 것이 아니요. 죽기는 죽지만 내가 죽고자 하여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들어 무엇을 자랑할 것이냐? 자기 자신이 나고 싶어 나지 못하고 자기 자신의 그 무엇을 갖고 살지도 못하고, 죽음길을 피할 수도 없는 자신을 갖고 무엇을 자랑해 보아야 처량할 뿐입니다. 났으니 살아야 할 운명이요. 또 그렇게 살다 가야할 운명입니다.
이렇게 살다 가는 목적은 무엇인가? 여러분은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동기가 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으니 목적도 나만의 것이 아님에 틀림없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는 자가 어디 있으며, 호화찬란한 자리에서 살고 싶지 않은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나입니다. 그렇지만 또 자신을 자랑하고 싶고, 마음대로 살고 싶은 나입니다. 이런 심정의 교차점을 지닌 나입니다.
나를 연유하여 나지 않은 내가 보다 큰 무엇을 요구하고, 보다 더 잘살기를 바라고, 더 큰 목적의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 나 때문이냐. 그렇지 않으면 어떤 상대적인 목적 때문이냐 하는 것을 여러분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손을 들어 나 때문이라고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의 혈육을 받고 태어날 때 스스로 나고 싶어서 났습니까? 부모가 나를 낳기는 했어도 나는 부모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생명체요. 마음대로 이끌 수 없는 생명체요. 마음대로 죽일 수도 없고 살릴 수도 없는 생명체입니다.
그러한 권한을 누가 갖고 있는가? 그 권한의 소유자를 해명하는 날, 자기를 중심삼고 즐거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들은 이 기준을 넘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더 큰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 일생을 통해 사망의 권한을 밀고 나가 실제로 더 크고 놀라운 생명의 세계와 인연을 맺고 싶어합니다.
더 나아가서는 어떠한 정적인 사랑의 심정이 있어 인간의 정적인 세계를 넘어 영원불변의 정적인 세계와 접하고자 합니다. 해명하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런 느낌에 내가 수시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그 무엇이 모순된 세상을 저버리도록 재촉하고 있다는 것을 양심이 맑으면 맑을수록 느낄 것입니다.
2 악을 피하고 선을 찾아가는 인생행로
땅 위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어느 누구도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고 보니 선한 종자가 아니라 악한 종자입니다. 나고 보니 창조의 이념 앞에 설 수 있는, 어떤 가치를 노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자기의 모습이 불초한 모습. 미비한 모습. 불완전한 모습. 부족한 모습임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인간을 기독교에서는 타락인간이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본심은 타락세계에서 즐기면서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6천년 동안 이 길을 피하고 피해 나왔으나 아직까지 완전히 피했다 하는 기준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지향하면서 그 무슨 목적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 왈 인생행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죽어서라도 악을 제거시키고 선을 붙들어야 할 목적 밑에서 악의 환경을 피해 나가는 노정이 인생행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의 마음은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마음이 본향을 향하여 움직일 때는 그렇지 않지만, 악에 치우치는 자리에 서게 될 때는 그 무엇이 나를 잡고 있는 듯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악사, 혹은 사망의 권한, 흑암권세를 향하면서 본심을 피해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도피노정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도피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악을 도피해 가야 할 세계 인류를 어떻게 지도할 것인가? 하늘이 계시다면 그 지도방법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 땅 위에는 참된 지도자가 없습니다. 누구의 사정을 봐주고 누구를 붙들고 내 사정을 말할 입장이 못 됩니다. 수많은 인류가 왔다 갔으나 인류는 지금까지 도피해야 할 운명에 걸려 있습니다. 자기의 갈 길을 가기에 바쁩니다. 도피자의 운명이 그런 것입니다.
철창에 갇혔다가 도피하는 범죄자가 있다면 그 앞에 보이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기가 살길. 자유의 세계, 자기가 그리는 어떠한 세계일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자유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강하면 강할수록 처한 환경에서 도피하여 달음질칠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는 도피자의 운명에 있으면서도 갈구하는 동산이 어디인지. 자기가 소망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역사는 돌고 돌고 또 돌고 있습니다. 목적도 방향도 처지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자위하면서 살아 온 인간입니다.
인간이 타락하여 범죄했으므로 공의의 신(神)과 불의의 신이 대치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나라는 존재는 불의한 사탄의 구속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으니, 이 세계의 도피자입니다. 이 세상은 도피해야 할 성입니다.
도피하는 데는 개인적으로 멋지게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자기 혼자서만 살아서는 안 되겠으니 가정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 민족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세계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 천주적으로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을 제시하여 가르쳐주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대해 사랑이니 창조주니 무슨 이념의 절대자니 하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여 도피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지시할 수 있는 표준은 어떠한 학설이 아닙니다. 천상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3 하나님이 도피의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터전
마음은 자연의 이치에 부합되는 것입니다. 선을 향해 무한히 움직이고자 합니다. 그것은 자석이 남과 북을 가리키는 것과 같습니다. 자연의 이치는 방향을 잃고 선을 피해 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현상이 없습니다. 인간의 마음도 역시 어떤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자 합니다. 생명을 향하여 움직이는 마음. 심정을 통하여 움직이는 마음. 진리를 분별하는 마음. 전체와 화합하고 싶은 마음. 전체의 어떤 이념에 화하여 살고 싶은 마음. 이 마음이 하나님이 도피하는 방향을 지시할 수 있는 터전이 됩니다.
이처럼 도피자의 입장에 있는 우리가 천성을 향하는 마음을 지켜 나가려면 싸워야 합니다. 싸움을 거쳐 도피의 목적을 달성하느냐 실패하느냐의 여하에 따라 구원을 얻느냐 못 얻느냐가 결정됩니다.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거쳐가고 있습니다. 이 싸움의 과정을 거쳐 나가는 데는 하나님이 바라는 모습으로, 하나님이 바라는 작전법으로, 하나님이 바라는 곳까지 가야 합니다. 주체자의 프로에 응하여 상대적인 가치를 세워 나가야 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입니다.
여러분. 지금 자신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도 어떠한 목적세계에서 움직이고 있고, 또 그 세계에 사로잡혀 살고 있는 자신임을 부정하지 못할진대. 자신의 모습이 인생 도피행로에서 어떤 처지에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원수들이 앞길을 첩첩이 가로막고 있는데도 눈도 뜰 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 있다는 것을 꿈도 꾸지 못하고 자기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혹은 달음질쳐야 할 행로에서 피로하여 쓰러진 자도 있습니다. 그 모양은 천태만상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되찾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처지에서 어떠한 모습을 갖고 있는지 마음의 기준을 잡아서 자신을 분석해야 합니다. 마음은 자꾸 재촉하는데 무엇인지 모르게 클클하고, 무엇인지 모르게 공포의 위압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런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느낌이 자연적으로 들뿐만 아니라, 보이는 모든 물상을 통해서도 작용되어 들어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런 것을 통해서라도 자신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만일 어쩌다가 여러분이 영(靈)의 눈이 열려서 보면, 수천년 전에 왔다 간 수많은 도인들이 만인 앞에 외치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옆에는 많은 영인들이 달음질쳐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야. 같이 가자. 원수가 온다' 고 하며 깨우쳐주려 하고 있으나. 여러분 귀는 그런 소리를 들을 줄 모르고, 눈은 볼 줄 모르며, 몸은 감각할 줄 모르는 처량한 모습입니다. 탄식하자면 이 이상 탄식할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기 일신만 탄식할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의 가치를 전체의 이념세계와 연결시키려는 천륜 앞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됩니다.
4 본향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할 운명
사람이 도의 길을 가는 데는 달음질만 쳐서 되지 않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구비조건과 목적을 성사할 수 있는 마음 바탕을 갖추어 그 목적을 향해 달음질쳐야 합니다. 인간은 타락으로 인해 진리를 잃어버렸고, 마음의 본향을 잃어버렸고, 생명의 본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이 네 가지를 잃어버렸습니다.
도피하는 자의 마음에 사무친 것은 본향에 가는 것입니다. 본향에 등록할 수 있는 국민이 되려면 진리를 터득해야 합니다. 사탄이 갖고 있는 악한 세계의 모든 비밀을 알아야 하고, 타락한 이 땅의 모든 문제를 해명할 수 있는 진리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 가지고 달음질쳐야 합니다. 오늘날의 사탄 주권을 하나님 주권으로 연결시키기 위한 목표 밑에서 인간은 진리의 본향, 양심의 본향, 생명의 본향. 사랑의 본향을 그리워하면서 그곳을 향하여 달려야 할 운명에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인류역사 6천년은 진리를 찾는 노정이었습니다. 본향을 향하여 달음질치는 데는 인간이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조건이 되는 진리를 찾고 해명하지 않으면 아무리 달음질쳐 봤댔자 소용없습니다. 내가 진리에 입각한 목적관을 가지고 나타나 모든 가치를 타진할 때, 진리가 해명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무가치합니다. 그러므로 인류는 지금 마음의 방향과 더불어 진리의 방향을 더듬는 단계에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노정에는 진리의 왕이요. 진리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그 무엇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 인류는 사조(思潮)나 주의에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진리는 둘이 있을 수 없습니다. 유일이요 영원이요 불변입니다. 그렇지만 이 진리와 만인류가 화할 수 있는 내용을 갖춘 진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인륜 도덕, 혹은 사회질서를 세워 나오면서 제시된 것은 양심기준에 응할 수 있는 진리의 표준입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을 해결지을 수 있으리라고 알고 있지만 아닙니다. 인간이 아무리 그것을 해결했다 할지라도 자기 앞에 다가오는 생사의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에 걸리게 됩니다. 이 생명문제를 어떻게 할 것이냐? 인간의 마음은 무한의 세계와 인연맺으려 하는데, 이 심적 작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목적관이 없이 움직이는 것은 우주만 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목적을 중심한 가치적 인연을 벗어나서 작용하는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어떤 기준에 대한 절대적인 신념을 갖고 내외적으로 침범해 오는 모든 악의 조건을 방비하라고 강력히 주장하는 마음의 작용에는 반드시 그 목적지가 있을 것이며, 그 목적지에서는 어떤 인연적인 가치를 천상 앞에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마음의 움직임에 의해, 마음이 지시하는 대로 살면 됩니다. 전체목적은 모를지라도 생활적인 가치의 인연을 세우기 위하여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역사는 발전해 나왔으며 문화도 발전해 나왔습니다. 문화에 따라 혹은 인지(人智)에 따라 모든 외적인 환경도 어느 정도까지 변화 발전해 나왔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세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 마음의 세계는 혁명도 없고 발전도 없고, 그냥 그대로 영원이요 불변입니다. 마음에 어떤 목적관이 있어 뚜렷한 목표를 설정하면 무한대로 달려 나갑니다.
남과 북을 향하는 지남철이 방향만 잡히면 그 이상의 당기는 힘이 없는 한 방향을 돌이킬 수 없듯이 양심세계는 어떠한 외래적인 힘으로 움직여내지 못합니다. 그 움직여낼 수 없는 마음의 작용은 절대적인 이념권내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뚜렷한 목적관이 해명되면 모든 세포나 감정까지도 휩쓸려 들어가는 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제아무리 훌륭한 양심작용이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갖춘 정도 이상의 작용은 못 합니다. 자기가 갖춘 정도 이상의 작용은 못 합니다. 물론 주체적인 입장에 있지만 몇천 만 배 이상은 못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육신을 수습해야 할 상대적인 입장에 있기 때문에 상대적인 관계를 벗어나서는 작용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에도 차이가 벌어집니다. 천태만상의 차이가 있지만 그 양심은 본질을 향한 방향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심의 방향을 확정짓기 위하여 관(觀)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인생관이니 우주관이니 하는 것. 또 무슨 주의 주장이나 진리의 표상이 나옵니다. 상대성을 지닌 완전체기 때문에 완전한 마이너스가 있으면 완전한 플러스를 대충 알 수 있습니다. 완전한 플러스가 있으면 완전한 마이너스는 성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연현상입니다. 따라서 천상에 영원 불변한 완전한 주체가 있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은 그 완전한 주체를 본받아 그 주체 앞에 상대기준을 조성하기 위하여 오늘도 내일도 노력해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턱대고 인간의 마음기준을 옮겨놓으려야 옮겨놓을 수 없습니다. 몸과 박자를 맞추어서 옮겨놓아야 하기 때문 입니다. 먼저 몸을 다스려서 그 몸을 어떤 환경에 몰아넣은 다음 그 심정의 방향을 자연적인 법도와 맞추어야 합니다. 이런 진리의 법도가 세워지길 하나님은 원합니다. 만약에 세계를 통할 수 있고 하늘의 원칙과 부합될 수 있는 진리가 나온다면, 이 양심은 무한대로 뻗어 활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진리를 찾아 나옵니다. 그러나 오늘날 20세기 문명을 자랑하는 문명세계에서 인간의 마음이 솟구쳐서 찾고자 하는 무한대의 절대자 앞에 자연적인 상대기준을 조성할 수 있도록 재촉하는 진리는 지상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타락의 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모양으로 가르쳐주고 저 모양으로 뒤넘이쳐 나오면서 하나의 목적에 연결시키기 위한 서글픈 역사를 하고 계십니다. 내가 인생행로를 걸고 진리의 방향을 찾아 나가는 도피 행로에서 하나님은 얼마나 수고하였겠습니까? 오늘날까지의 인간 역사를 놓고 여러분은 서글프고 비참한 역사였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역사를 진행시켜 나오는 주체자에게는 더 서글프고 비참한 투쟁이 지금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투쟁이 없다면 여러분이 편히 눈을 감고 자고 쉴 수 없는 비참사가 벌어질 것입니다.
마음은 시작과 끝이요 영혼과 실존적인 본체와 연할 수 있는 것이기에 그런 슬픔이 사라질 때까지. 그런 슬픔을 영원히 벗어나 해결 지을 때까지 그것과 똑같은 자극적인 슬픔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그런 슬픔을 재촉한 것이 인간이요 그런 슬픔을 연결시키고 연장시켜 나온 것이 인간이니. 이러한 인간을 대해 심판하는 것은 타당한 처사일 것입니다.
5 우리의 갈 길
이제 인간은 진리를 갖추고 본향을 향하여 달음질쳐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생명을 찾아야 합니다. '내 영원불변한 생명의 주체는 어디 있느냐?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은 사랑이라 하였고 예수님도 사랑이라 하였는데, 그 사랑의 주체는 어디 있느냐? 그와 상봉하여 내가 갖고 있는 진리의 가치는 이것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양심의 기준이 이것입니다. 내가 갖춘 사랑의 기준이 이것입니다.' 하면서 그 가치의 결정을 받고 가는 곳이 영계입니다. 영계는 지극히 선한 천상세계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되는 사탄세계. 악한 지옥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졌습니까? 이제 우리는 찾아야 합니다. 마음 외 현상을 보고 내 마음이 이런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내 마음을 무한히 솟구치게 하는 본체 앞에 자연적인 작용으로서 음적인 입장. 혹은 양적(陽的)인 주체 앞에 대상적인 입장에 설 수 있는 역사적이요 시대적이요 미래적인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의를 찾는 것입니다. 이제는 진리를 찾아 헤매던 선조들을 비웃을 수 있는 위대한 용자(勇者)가 나와야 합니다. 역대의 성현 현철들을 대하여 대관절 무엇을 했느냐고, 수많은 도를 세운 도주들을 대하여 무엇을 했느냐고 항의할 수 있는 용자가 땅 위에 나타나기를 나는 고대합니다.
그것이 도피하는 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필연적인 조건이요 구비해야 할 절대적인 조건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인간은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스스로 이런 환경에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인간이 아니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원인적인 내용을 갖고 있는 인간도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상대적인 입장에서 가치적인 관계는 갖고 싶지만 가치적인 인연을 맺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가치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꺾여 넘어가나 안 넘어가나 되지 않은 꼴을 해 가지고 으스대면 주위의 만물까지도 '이 녀석!' 합니다. 이것이 우리 양심을 가진 사람의 본연의 현상입니 다. 먹지도 않은 자가 꺼떡거리면 '이 녀석!' 하면서 한대 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나쁜 마음이 아닙니다. 본연의 현상입니다. 양심세계는 주의도 없고 관도 없습니다. 따로 떨어져나가 해명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6 인생이 바라는 최고의 목표
진리의 본향에서 더불어 즐길 수 있는 마음, 진리와 마음이 합하여서 움직일 수 있는 생명. 진리와 마음과 생명이 접하여 천정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랑. 이것이 인생이 바라는 최고의 목표입니다.
엄연히 사지백체를 갖고 있고 감정을 갖고 있다면, 여러분의 시선은 무엇을 바라보고, 머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여러분의 사지는 무엇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걸릴 것입니다.
'손아. 너는 진리를 그리워하고, 진리를 찾기에 얼마나 수고하였느냐? 몸아, 너는 진리를 향하여, 본체를 향하여 수시로 달리고 있는 마음에 얼마나 협조했느냐? 하고 반문해 봐야 됩니다. 오늘도 내일도 될대로 되라. 한술 먹었으니 그만, 한잠 잤으니 그만, 이렇게 그만 그만하다 보면, 인생은 다 지나가고 사망의 절벽에 코를 쥐어박고 가야 할 운명에 놓이게 됩니다.
인간은 그렇게 무가치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게 무질서하고 무목적적인 입장에서 살라고 대우주의 주인이 우리의 생명을 땅 위에 내놓지 않았습니다. 원인과 목적을 기반으로 한 관계의 현상세계를 통하여 변함없이 그 목적을 추진시키려는 어떠한 인연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한다면, 그 인연의 가치를 종합하여 논해야 할 인간이 그렇게 시시해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그런 인간이 아닙니다. 여기에 똑똑한 사람이 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뭐 인텔리인데' 하면서 어디 가도 도피하려고 하는 사람은 한번 이 방면을 노크해 보라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마음의 방향을 높이고 마음의 세계를 높여야 합니다. 땅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높은 곳을 바라봐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세계만이 아닙니다. 하늘을 봐야 되겠습니다. 하늘을 높이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세계는 땅의 생명으로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땅의 어떤 목적과 이 세계의 양심작용은 거기에서 머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일생동안 어떠한 만족에 취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거나 내 심정이 무한대로 뻗어갈 수 있는 영원한 관계를 맺고자 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부정하지 못할진대 역사의 종말을 비웃고 넘어설 수 있는 진리의 모습은 어디 있느냐. 마음의 모습은 어디 있느냐, 생명의 모습은 어디 있느냐. 사랑의 모습은 어디 있느냐? 그런 모습을 찾아봐야 합니다.
7 나의 인생행로는 어떤 모습인가
모든 피조물은 자가창조의 진리적인 면, 자가창조의 심정적인 감성, 자가창조의 생명적인 감성, 자가창조의 사랑적인 감성을 자기 분량만큼 느끼게끔 하나님이 창조하였습니다. 그래야 사랑받을 것이 아닙니까? 죽은 모습을 하고 있다면 누가 사랑하겠습니까?
진리적인 모양이든가. 심정적인 모양이든가, 마음의 모양이든가. 생명적인 모양이든가. 사랑의 모양이든가 자기의 본성을 근거로 한 자동적인 발동력을 일으킬 수 있는 자극을 느낀 자라야만 하나님이 '오냐! 내 아들이다'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사는 것입니다.
까딱 잘못하면 오해하기 쉽습니다. 본성적으로 부여된 기반 위에서 자기 자신의 생명. 자기 자신의 진리. 자기의 자신의 마음의 힘. 자기 자신의 생명의 충격 등 자가자칭할 수 있는 원천적인 내용, 동기적인 내용을 갖추어야 절대자 앞에 상대적인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면 그저 까먹고 세워주면 쓰러지고 하는 자들은 안 됩니다.
오늘날 도피성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가? 하나님은 무엇을 바라고 계신가? 우리 인간이 진리의 원동력을 지닌 실체가 되기를 고대하며 6천년 동안 하나님은 허덕였습니다. 그러한 경지에 들어가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처럼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도 내 안에 있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동기적인 느낌을 가지고 이 사망의 길을 멋지게 가려는 도피의 왕자는 붙들 자가 없습니다. 그는 진리와 더불어 움직이고, 우리의 마음세계와 화하고 생명원칙과 인연을 맺어 무한히 운동하고. 심정세계와 더불어 무한한 창조의 묘미를 나타내는 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절대 보호합니다.
그러한 경지에서 자기의 가치를 논하고 자기를 중심삼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논할 수 있게 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는 하나님은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내가 만일 어떤 책을 써서 '거기에 아무개 아무개는 이렇다'고 했을 때에 그 사람이 '야 이놈아! 너 기분 나쁘게 왜 그러느냐' 할 것 같습니까? '그대가 말하지 않아도 그대의 마음이 이렇지 않습니까? 하며 좋은 곡조로 노래를 불러주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이상은 당신의 심성에 내재해 있는 모든 자극적인 감성을 우리 인간에게 드러내어 그 모습을 보고 기뻐하려는 것입니다. 자기를 중심삼고 사는 사람은 결국 없어지고 망합니다. 자기의 가치를 백퍼센트 노래하는 자는 죽음과 더불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정의 효자. 열녀. 혹은 일개 종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충신들도 그 국가가 세계 사조에 휩쓸리고 융합되고 망하게 될 때에는 함께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도피성을 향해 달리는데는 어떠한 개인적인 것과 자기 중심적인 감정은 모두 끊어 버리고 가야 합니다.
6천년 역사 이래 그런 사람이 나왔다면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안 나와서 한탄하는 하나님입니다. 만일 한국에서 그러한 청년이 나온다면 하나님을 이 한국으로 모셔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망언이 아닙니다. 전파를 캐치하는 수신기가 강력히 끌어 들일 수 있는 내용을 갖출 때는, 모든 전파를 받아 다시 발송할 수 있습니다. 그런 원동력을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금까지 자신을 붙들고 자탄하였고, 나 하나에 국한된 가치를 논하며 슬퍼하였습니다. 처량합니다. 일개 가정. 일개 국가. 세계의 주의 사상에 자기의 목을 걸고 허덕이는 인간의 무가치한 모습을 바라보고, '야 이놈들아, 비켜!' 하고 소리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오시는 용자가 메시아입니다.
8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관계의 세계
관념적인 역사관은 쉽게 지나갑니다. 인식적으로 이 우주를 해명하지 못하면 역사는 이대로 계속될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모든 다 내정된 하나님의 뜻과 심정을 연결시킬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영생합니다. 역사와 더불어 심판받지 않습니다. 끝날과 더불어 망하지 않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문제는 자신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먹을 것을 먹지 못하고, 입을 것을 입지 못하고, 밤잠을 개의치 않고 기도한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인생길이 바빠서였습니다.
자신의 길도 해결해야 했고, 민족의 길도 해결해야 했고, 세계의 길도 해결해야 했기에 몇백 배의 노력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인생행로를 가는 데 있어서 얼마만큼 수고하고 노력하면서 이 길을 개척해야 할 것인가 각자가 생각해 보십시오. 인생행로의 낙오자가 되지 말고, 인생행로를 달리는 이 활주로에서 떨어지는 추락자가 되지 말고, 멋지게 대공을 날으는 제트기처럼 날아갈 수 있는 용자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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