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봤어도 다 알 것 같았던 여승女僧
김 해 자
마지막 다니던 공장에서 나는 병을 얻었다. 식도역류증과 축농증.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겨울 패딩을 자르고 박고 실밥을 뜯느라 공장 안은 항상 솜과 먼지투성이었으니. 야간할 땐 아프다 못해 불난 것 같은 명치 위를 두드려댄 지 오래 되었으니. 흘러내리는 콧물 닦아낼 틈이 없어 코에 휴지를 대충 쑤셔 넣고 미싱을 밟아댔으니. 서울 가서 당장 수술해야 한다고 강권하던 의사는 여섯 살 먹은 딸아이도 축농증이란 진단을 내렸다. 하긴 그럴 법도 하지. 반지하 정도가 아니라 계단을 스무 개 가까이 내려가야 하는 진짜 지하에 살았으니까. 하수구가 역류해 시꺼먼 물이 다용도실에서 솟아나 코를 막고 오수를 퍼내던 때도 있었으니. 키 크고 마르고 착해 보이는 의사는 세 가지 ‘당장(當場)’을 요구했다. 당장 공장 그만둘 것. 당장 수술할 것. 당장 이사할 것. 서른 중반, 병은 내 직업과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호구지책으로 ‘윤선생 영어’라는 방문교사를 거쳐, 15년 가까이 들여다보지도 않던 책을 구해 펼치고 공부해서 나는 학원가에 입문했다. 가장 수요가 많았기에 1년 가까이는 영어 선생이었다. 날마다 미리 공부해서 공부한 만큼 가르치는 학생이자 선생. 하지만 동명사와 분사도 명확히 구분이 안 되는 수준으로 아이들에게 계속 성문종합영어를 가르칠 수는 없었다. 재미도 없고 양심도 오래 허락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서 학원을 옮겨 그나마 가장 잘할 수 있는 듯한 문학과 논술을 가르치는 선생이 된 것이다. 의외로 문학 교과서에 나오는 시와 소설들은 재밌었다. 재밌다고 시험을 잘 보게 할 수 있는 선생이 되주진 못하겠지만, 의외로 자가학습해가며 가르치는 문학 선생을 아이들이 좋아해주는 행운은 따랐다. 그러던 어느 밤 고2수업에서 백석이란 이름의 「여승女僧」 이란 시를 설명하다 아이들 앞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예기지 않은 사태가 발생했다. 아마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는 구절부터였겠다. 단 12행의 시로 사람을 울게 만든 경험은 지금도 시의 힘을 믿게 하는 사건이다. 현실의 막강한 힘에 휘둘려 시가 무력하게 느껴질 때나 시가 안 써져 막막할 때 말이다.
여승女僧
-백석-
여승(女僧)은 합장合掌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녯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설어워졌다
평안도平安道의 어늬 산山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女人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女人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十年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山꿩도 설게 울은 슳븐 날이 있었다
산山절의 마당귀에 여인女人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읽어봐도 이 시는 한 행마다 나를 멈칫거리게 한다. 땀과 때에 전 베옷 입고 옥수수를 팔며 파리떼 달라붙어 칭얼거리는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우는 가난한 식민지 여성의 모습이 떠오르고, 필경 길에서 병을 얻어 죽었을 아이를 관도 없이 묻었을 돌무덤에 핀 도라지꽃이 연상된다. 가지취와 옥수수와 도라지꽃이라는 식물적 존재가 자기만의 역할을 하고, 섶벌과 산꿩이라는 동물적 존재가 사람의 성정과 정서를 대변하고, 남편을 찾아 떠돌면서 행상을 하는 여인과 딸이 죽자 머리를 깎는 여인과, 시간이 흘러 산 속에 있는 가지취 내음이 나는 여승이 서럽게 흘러간다. 한 행마다 혀 안에서 구르는 유음이 설운 정조를 더해준다. 종결형 ‘-다’로 끝나는 문장이 무려 10개인데도 딱딱한 느낌을 주지 않으니 희한하다. 불필요한 언어를 찾을 수가 없다. 한 행 한 행 한 사람의 역사를 새기듯이 집중되어 있다. 이 시가 시간의 부침을 겪지 않은 채 읽을 때마다 감동을 주는 건, 어쩌면 시인의 기량이나 기술만이 아니라,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물과 사람, 뭍 존재에 아주 깊이 동조되어 하나가 된 경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결국 시란 존재에 대한 사랑이 아닐 것인가. 30년이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여승」 같은 시 한 편 못 썼으니 나도 희망이 있겠다. 존재 깊이 더 사랑해야만 하는 과제 또한 우리를 더 잘살게 하는 이유가 되겠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