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정복왕조 거란과 요(遼)
거란은 요하(遼河) 상류의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몽골족 계통의 한 부족으로서 역사 무대에는 4세기 중엽부터 등장한다. 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이곳을 관장하던 고구려의 압박을 피해 요서(遼西) 지방으로 남하한다. 5호 16국 시대에 북조 여러 나라들과 마찰이 일자 조공이나 바치면서 가까스로 선린관계를 유지한다. 당대에 이르러 이곳에 송막(松漠)도독부가 설치되면서부터는 당의 치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송막 도독에 임명된 이진충(李盡忠)이 스스로를 ‘무상가한(無上可汗), 즉 ’지고의 카간‘이라고 칭하면서 당에 반기를 들었지만(696) 곧 진압당하고 만다. 후환이 걱정된 거란인들은 타링하 양안의 비옥한 목지를 버리고 시라무렌강 방면으로 이천해 그곳에 정착한다.
거란에 관한 최초의 중국문헌은 『위서(魏書)』이지만, 이에 앞서 타링하 강가의 만불당(萬佛堂) 동쪽 동굴에서 502년에 씌어진 거란어 비문이 발견됨으로써 미지의 거란 역사에 등불이 켜진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백마를 탄 신인(神人)이 라오하무렌강(老哈木倫河)에 내려와 한 젊은이가 이끄는 수레를 타고 시라무렌강에 내려온 천녀(天女)와 두 강의 합류지점인 무예산(木葉山)에서 만나 부부가 된다.
부부는 사내애 여덟을 낳았는데, 그들이 거란 8대 부족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바가토르(몽골어로 ‘용감한 자’라는 뜻)라고 부르는 부족 추장들은 서로가 자웅을 겨루면서 심하게 다투기도 한다. 그러다가 7세기 초부터 부족들은 알력을 불식하고 합심해 8대 부족의 수장격인 카간을 3년에 한 번씩 교대로 선임함으로써 마침내 부족들간의 화합을 이루어낸다.
이로부터 200년이 지난 후 야율아보기라는 불세출의 거물이 나타나 중국에 대한 설욕을 씻기나 하듯 첫 정복왕조인 거란국을 세운다. 원래 거란족은 말과 소를 토템으로 하는 두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자는 야율씨로, 후자는 소(蕭)씨로 불렸다. 그래서 야율은 말씨족 출신의 성이고, 아보기는 이름이다. 일찍이 고려를 침입한 거란군 가운데에는 소씨 성을 가진 몇몇 장수들이 있었다.
아보기의 어머니는 태양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는데, 9척 장신에다 300근의 활을 거뜬히 당기는 괴력의 사나이로 자랐다. 29세(901)의 젊은 나이에 질자부(迭刺部)의 족장으로 추대되고, 907년에 카간으로 선출된 그는 9년 후인 916년에 세습제에 의한 거란국을 선포한다. 그는 ‘대거란’ 황제로 자칭하면서 신책(神冊)을 연호로 정하고, 도읍을 상경(上京) 임황부(臨潢府, 현 린퉁진)로 잡았다.
일찍부터 서구에서는 거란의 음사인 ‘키타이(Kitai)’로 중국을 지칭해 왔다. 8세기에 만들어진 오르혼 강가의 돌궐 비문에는 ‘키타니(Qitany)'로 쓰여 있고, 『원조비사(元朝秘史)』에는 ’키타이(Qitay)'로 나온다. 일부 학자들은 이것을 ‘자르다’라는 몽골어 ‘키트 쿠(Kit-khu)’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한때 거란이 중국을 대신할 만큼의 대국으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국호는 태조 야율아보기가 거란으로 시작했는데, 아들 태종 때에 요나라로 개명 되고, 전성기를 맞는 6대 성종 때는 ‘대거란’으로 바뀌나 8대 도종 때는 다시 요나라로 복원된다.
동북아시아에서 당⟶송으로 이어진 중국의 중화체제가 무너지고, 대신 여러 민족에 의한 다원체제가 출현한 10-12세기의 역사적 격동기에 요나라가 9대 209년간(916-1125)이나 존속하면서 황하 이북의 중국 땅은 물론, 계승국인 서요(西遼, 1132-1211)를 포함해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그 위세를 떨치고 귀중한 인류 공동의 유산을 남겨놓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의 독특한 제도와 정책,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요체는 이질적인 유목사회와 농경사회의 이중구조에 대한 효율적인 조화와 융합이다. 유목민이라서 당연히 유목경제에서 출발했지만, 농경과 수공업을 받아들여 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한인(漢人) 위주의 농경민과 수공업자들을 유치해 한성(漢城)이라는 성곽도시를 만들어 농업과 수공업을 동시에 발전시켜 생산된 소금과 철을 인근 나라들에게 수출했다.
통치구조에서도 “번(藩, 거란인)은 한(漢, 중국인)을 다스리지 않고, 한은 번을 다스리지 않으며, 번과 한은 통치를 달리한다.”는 통치이념에 기초해 최고행정기관으로 북, 남 추밀원(樞密院)을 설치했는데, 북 추밀원은 유목민들의 군사와 민정을 다스리고, 남 추밀원은 중국인과 발해인 등 농경민들의 민정을 관리한다.
단, 군사만은 북 추밀원이 관장하되 ‘15-50세 백성은 병적에 의해 관리’한다는 병민일치(兵民一致)의 군사제도를 시행해 전시에는 전민이 동원될 수 있는 일사불란한 체제를 갖추었다. 그래서 400만 인구에 160만 대군을 거느린 군사대국으로 위세를 떨칠 수 있었다. 중국식 관제를 도입해 전국을 5경(京)으로 나누었는데, 그중 2경은 유목지대, 1경은 유목과 농경 혼합지대, 나머지 2경은 농경지대 이다.
당의 기미정책(羈靡政策, 다른 민족에 대한 간접통치)아래에서 유교적 통치이념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은 요나라는 중국 문물제도를 수용해 나름대로 활용했다. 건국창업에 기여한 좌명공신(左名功臣) 21명 중에는 한인 지식층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과거제도도 받아들인다. 그리고 5대 시대 같은 난세에 ‘이한제한(以漢制漢)’, 즉 ‘중국인으로 중국을 제재한다.’는 기민한 전략으로 후당(後唐)을 멸하고 후진(後晋)과는 군사적 동맹 관계를 맺고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燕雲) 16주를 할양받는 성과도 올린다.
대외무역에서도 변방의 각장(榷場)교역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면서 송나라와의 해상무역도 예하의 동단국(東丹國) 내 발해인들을 통해 활발히 전개한다. 문화면에서 특기할 것은 전혀 문자 전통이 없는 유목민으로서 2종의 문자, 즉 한자의 자형과 자의를 참고해 만든 표의문자인 ‘대자(大字)’와 음절단위의 표음문자인 ‘소자(小字)’를 창제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특별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거란 소자가 조자법(造字法)에서 한글과 비슷한 점이 있어 한글 창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한 일본학자의 주장이다.
‘요하문명’이 추구하는 바탕은 유목사회이지만 농경과 수공업을 창의적으로 수용해 유례없는 유-농-공의 복합사회를 요하 강가에 일구어놓은 거란인들이 간직한 그 조화와 융합, 창의의 혼이 있었기에 여타 유목민들과는 달리 발흥한 그 고장을 시종 본거지(수도)로 삼고 광활한 중국 땅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요나라를 중국의 첫 번째 정복왕조라고 일컫는 것이다. 조화와 융합, 창의는 세상사와 인간사에서 힘과 지혜의 원천이고 만고불변의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