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5 마을숲 <이야기밥>
얀, 선민, 지안, 보리밥
장작나르기를 마친 이야기동무 얀, 웃음꽃자리로 옵니다.
얀의 손을 잡고 약속합니다.
책꽂이나 탁자위에 오르면 잔디밭에서 놀리기로 말이죠.
새끼손가락 걸고 엄지로 도장찍고 손바닥으로 복사하고 네 손바닥으로 코팅도 합니다.
이야기동무 선민과 지안이 와서 맛있는 차, 언연이 준 과자를 가지고 개구쟁이방에 앉습니다.
맹꽁,
맹꽁,
맹꽁
오늘은 저마다 가져온 이야기보따리를 들고, 이야기밥차를 타고 봄날드라이브 갑니다.
가는 동안, 차장너머로 보이는 자연과 사물들을 이야기밥차 안으로 모읍니다.
얀, 얀 다음으로 지안, 지안 다음은 보리밥, 보리밥 다음은 선민, 다시 얀, 이렇게 말밥이 옮겨갑니다.
바람, 선민이, 길, 햇볕, 구름, 트럭, 대나무, 바다, 윤슬, 갯벌, 논
어느새 이야기밥차는 용화사에 닿았네요.
얀이 바위틈 사이에 피어난 보랏빛 꽃, 이름이 뭐냐고 묻습니다.
이름이 알고 싶다는 얀한테 우리는 “아, 이름을 알 수 없네”
이름은 누군가 지어주면 되는데 말이죠. 세상이 약속하는 이름이 아니라 우리들이 불러주면 되는데...
소나무 가지 사이로 갯벌이 보이는 바위에 셋은 걸터 앉고 얀은 바위를 오르내립니다.
잠시 눈을 감고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로 합니다.
.
.
.
보리밥이 시를 읊어요.
이야기동무 선민이가 품에서 책한권을 꺼내요.
……앤은 무릎을 꿇고 6월의 아침을 내다보았다. 그 눈은 비할 길 없는 기쁨으로 빛났다. 아, 정말 아름답지 않아? 정말 사랑스럽지 않아? 정말이지, 여기서 살 수 없다니! 앤은 이곳에 살 거라는 상상을 해 보았다. 여기는 상상할 수 있는 여기가 있었다.
바깥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너무 가까이 서 있어서 나뭇가지가 집에까지 뻗쳤고 만발한 꽃들 때문에 잎사귀가 거의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집 양 옆으로는 사과나무와 벚나무가 꽃잎을 흩날리는 큰 과수원이 있었고, 나무 밑 풀밭에는 민들레를 뿌려 놓은 것 같았다. 아래쪽 정원에 흐드러지게 필어 있는 엷은 자줏빛 라일락의 짜릿한 꽃향기가 아침 바람을 타고 창가에까지 밀려왔다.
정원 아래로 시냇물이 흐르고, 하얀 자작나무들이 가득한 골짜기까지 클로버로 뒤덮인 비스듬한 초록 풀밭이 있었다. 덤불 속에는 고사리와 이끼와 온갖 숲 속 식물들이 자라고 있을 것 같은 즐거운 생각이 들었다. 그 너머에는 가문비나무와 전나무들이 초록빛 깃털처럼 뒤덮인 언덕이 있고, 반짝이는 호수 맞은편에서 본 적이 있는 작은 회색 집 지붕 끝이 보이는 곳에 골짜기가 있었다.
왼쪽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커다란 헛간들이 있고, 그 아래 쭉 펼쳐져 있는 푸른 들판 너모로 반짝이는 푸른 바다가 얼핏 보였다.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앤의 눈은 거기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그 모든 것을 탐스럽게 받아들였다. 가엾게도 앤은 지금까지 아름답지 않을 곳들을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이곳은 앤이 꿈꾸던 어떤 곳보다도 아름다웠다.……
선민이는 지금 어떤 빛깔로 앤은 물들이고 있을까요?
빨간 머리 앤은 온몸 가득히 사랑을 담고 있지요. 어떤 어려움도 앤 앞에서는 힘을 얻지 못하지요. 앤은 세상을 빛나게 하는 동무죠. 제게는 그랬어요.
캔디, 앤, 톰소여와 허클베리 핀, 커다리아저씨와 어린 왕자, 철이(은하철도 999), 마루치와 아라치 그리고 ……. 단발머리 찰랑거리던 시절, 늘 든든한 동무였던 이름들이 떠오릅니다.
지안 이야기동무는 <욕심쟁이 거인>을 들고 왔네요.
“선민이가 <빨간머리 앤>을 들고 온 걸 보고 나도 <키다리아저씨>를 가지고 올 걸 생각했어. <욕심쟁이 거인>은 우리집에도 있어. 내가 어렸을 때도 읽었는데 좋아.”
그리고 우리는 그림을 찬찬히 읽습니다.
아이들은 날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거인의 정원에 들러 놀았어요.
부드러운 푸른 풀밭 위로 별처럼 아름다운 꽃들이 군데군데 피어 있는 넓고 멋진 정원이었지요. 봄이면 연분홍빛과 진주빛 고운 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는 복숭아나무도 열두 그루나 있었어요. 나무 위에는 새들이 날아와 지저귀고, 아이들은 새들의 달콤한 노랫소리를 듣느라 노는 것을 멈추곤 했지요.
“여기 있으면 정말 좋아!”
아이들은 와글와글 떠들어대며 즐거워했어요.
그리고 보리밥은 <살아있어>.
선민은 눈 감고 듣겠다하고 얀과 지안은 그림으로 읽습니다.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살아있다는 건 어떤 거지?
살아있다는 건 숨 쉬는 것
살아 있다는 건 소리 내는 것
살아 있다는 건 헤엄치는 것
살아 있다는 것은 먹고 달리고 가만히 있고 꽃피고 열매맺고 시들고 아프고 눈물나고 웃는 거네.
얀이
“살아 있는 건 있는 거고, 살아 있는 건 죽는 거야”
우리 모두
“와, 얀은 철학자네!”
이제 똥밥은 눕니다.
우리앞에 보이는 소나무와 바람과 바다가 우리를 살리지요.
“우리는 모두 이야기빚이 있는데 사는 동안 그 이야기빚을 갚으면서 산대요.”
선민이가 사는 동안 풀어낼 이야기보따리가 이미 아름답고 고마워서 보리밥은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얀이 이끄는 대로 가서 새 한 마리. 살아 있던 새, 이제는 움직이지 않는 새, 그래서 살아 있는 새 한 마리를 솔가지로 덮어줍니다.
마을배움터로 돌아오는 이야기밥차에서 우리 앞에 펼쳐진 ‘살아 있는 것’ 찾습니다.
눈길 닿는 것, 모든 것들이 살아 있습니다.
흙, 바람, 표지판들이 그대로 우리 속으로 들어와 살아납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